重工業
heavy industry
1 개요
중공업이란 기계를 통해 둔중한 물체를 제조하는 산업을 일컫는다.[1] 경공업에 비해, 생산계수가 높기 때문에, 더 자본집약적이고 경기에 민감하다. 전통적으로 금속공업(제강, 제련, 금속제품제조)과 기계공업(화기 제조, 기관 제조 등)이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중엽에 걸쳐 출현한 화학공업, 전기공업(전력공업)도 이에 속한다. 기술의 발전에따라 합성 고무, 비료, 시멘트부터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가리키는 공업이 상당히 광범해졌다. 이러면서 화학공업까지 합쳐서 중화학공업이란 표현이 일반화되었다.
2 주요산업
금속공업은 금속소재(반제품이나 원자재)를 만드는 1차금속제조업과 이를 완제품으로 가공하는 금속제품제조업이 있다. 1차금속제조업은 제선, 제강, 압연의 공정을 갖는 철강공업과 광석(ore), 고철(scrap)에서 필요한 금속을 회수하는 비철금속공업으로 구분하고 있다.[2] 현대에는 채산성을 위해 한곳에 모여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기계공업에는 금속공업의 연장선상에서 기계공업의 기초를 담당하고있는 산업기계공업과 이를 가지고 소비재 등을 설계, 조립하는 전자기계공업(전자제품,전자산업), 건설기계공업(중장비), 기관차, 자동차, 전차, 선박(조선업), 항공기, 철도차량 등을 만드는 수송기계공업, 미사일, 로켓 등을 만드는 방산(방위산업체) 등이 있다.
화학공업에는 유기화학공업과 무기화학공업이 있다. 여타 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설비를 요한다. 오늘날에는 원유가 유기화학공업 종래의 것들을 상당수 대체하고 있다.
위와 같은 것을 총동원하여 대형공장, 댐, 초고층빌딩 등 초대형 건축물을 시공하는 것과 강도높은 광업 또한 중공업에 포함된다고 한다.
3 역사
3.1 영국
산업혁명 참고
3.2 프랑스
3.3 독일
3.4 미국
3.5 일본
1955년을 전후하여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는 미국의 역할이 상당하였다.
3.6 한국 중공업의 역사
3.6.1 근대(~1945)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 조선은 근대식 공장 건설을 꾀했다. 그러나 경험, 자본, 기술 등의 부재로 인하여 중공업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대한민국에 중공업이 들어 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며, 1918년 미쓰비시가 겸이포 제철소[3]를 건설하고, 1930년대 일본질소비료(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을 세우는 등 주로 민간자본의 진출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만, 1930년대까지도 철도국 부속공장, 용산공작회사, 경성전기[4]회사공장 등 여러 공장 중에 조선인 경영자는 없었다.
조선총독부 내에서 중공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을 전후해서 부터이다. 1936년 10월, 조선산업 경제조사회에 따라 한국의 중공업이 일본 제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 총독부의 시국대책 조사회의회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1940년에 이르면 화학, 기계, 금속 공업 따위의 중공업 규모가 경공업의 그것과 동등해지며 우세를 띠게 되었으며 1944년 한국의 자급률은 50%에 육박하게 된다.[5]
3.6.2 해방에서 전쟁까지(45~53)
한반도의 지하자원은 북부에 편중되어있다. 1942년을 기준으로, 산업의 쌀인 철광석과 주 동력원인 유연탄은 98%이상이 북한에 존재하였고, 이외에 한반도 주요 광물인 구리(89.3%), 아연(78.4%), 텅스텐(72.7%), 무연탄(71.6%), 금(69.6%), 동(66.2%)이 모두 북에 쏠려있었다.[6] 따라서 이와 밀접한 중공업 역시 일제강점기 북부를 위주로 발달하였고, 전력 역시 그러하였다. 그결과,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중공업 공장과 이를 지탱하는 지하자원, 발전소[7]를 소군정과 북한에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8] 이러한 상황속에서 제1공화국은 중공업이 완전경제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산업부흥5개년계획(1949)을 통해 금속공업, 기계공업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3.6.3 전후복구기(53~63)
자유당정권은 중공업을 기간산업으로 보고 미국의 원조와 국채를 집중시켜 육성을 하려 하였다. 한국의 자동차공업은 1955년,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신진공업사[9]가 세워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25인승 H-SJ 차량 2천대를 생산하고도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자 1960년에는 부산진 공장이 준공되어 8월부터 자동차 생산에 들어갔다. 이에, 1962년, 경성정공이 3륜자동차, K-360, T-600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해 10월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5.16으로 집권한 군부 세력도 자립경제를 위한 핵심으로 중공업을 강조하였다. 정부는 1962년 4월 자동차공업 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국산자동차 공업 보호육성법을 입안하며 그해 8월 새나라자동차[10] 공장을 준공하였다. 또한 그해 초 울산공업지구를 설정하여 수입대체산업화를 위시한 중공업화를 계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석유화학 공장과 함께 연간 30만톤 이상의 종합제철소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종합제철소는 삼화제철을 비롯한 실업계의 외면, 생산성과 추진력 부족 등의 이유로 추진에 난항을 겪었고, 공화당의 양순직의원, 민주당의 김대중의원 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제철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소견을 내밀었으나 결국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하면서 무산된다.
3.6.4 개발독재기(64~87)
대한민국 정부가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진흥정책을 구상한 것은 1971년 말부터였다. 정부는 1972년 공업화가 아닌 중공업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11], 1980년 100억불 수출 돌파, 1981년 국민소득 천불 달성이라는 과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중공업화로써 산업을 고도화시켜야 한다고 천명하였다[12]. 이러한 구상은 기계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69), 자동차공업육성계획(1969), 철강공업육성법(1970), 조선공업진흥기본계획(1970) 등을 통해 이미 준비해오던 것이었고, 이에 힘입어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 정책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부실한 기반위에서 외채와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하면서 시작한 중화학공업은 때마침 닥친 오일쇼크와 맞물리면서 곧바로 부실화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이에 유신정권은 8·3긴급경제조치[13][14]와 정책금융 등 각종 특혜를 대기업에 부여하면서 중화학공업을 계속 유지하였다. 이런 흐름은 새로이 집권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에도 이어져서, 산업합리화조치[15]가 단행되었고, 정책금융 지원이 계속되었다.
3.6.5 민주화시대(88~)
고도성장을 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던 군사독재가 막을 내린후에 민주화 시기에도 중공업은 꾸준히 발전하였다.[16] 90년대말에 이르면 한국은 조선업, 철강,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적인 생산 규모를 달성하게 되었다.
4 관련 기업
4.1 대한민국
- 현대중공업
- 현대삼호중공업
- 현대로템
- 현대위아
- 두산중공업
- 두산인프라코어
- 한진중공업
- 삼성중공업
- 대우조선해양
- SLS 중공업
- SK이노베이션
- LG화학
- 롯데케미칼
- 로윈
- 우진산전
- 한국항공우주산업
4.2 일본
4.3 중국
4.4 러시아
4.5 미국
4.6 독일
4.7 영국
4.8 프랑스
4.9 캐나다
4.10 이탈리아
4.11 스웨덴
4.12 벨기에
4.13 자동차/제조사
자동차/제조사 참고
4.14 오토바이/제조사
오토바이/제조사 참고.
5 가상의 기업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시노하라 중공업
- 덴마 - 스텐 중공업, 팍스 중공업
- 레드 아이즈 - 야가미 중공업
- 벡실 2077 일본쇄국 - 다이와 중공업
- 슈퍼로봇대전 시리즈 - 웡 중공업
- ↑ The manufacture of large, heavy articles and materials in bulk, 옥스퍼드사전.
- ↑ 비철금속공업은 제련업이라고도 한다. 철이 하도 중요하다보니 철 이외의 금속을 뭉뚱그리게 되었으며 비금속(卑金屬)이 이에 속한다. 4대 메이저 비금속(卑金屬)으로는 알루미늄, 납, 구리, 아연이 있다. 비금속(非金屬)과는 다르다 비금속(卑金屬)은!
- ↑ 이후 일본제철.
- ↑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이다.
- ↑ 카터 J. 에커트의 글 참고.
- ↑ 조선경제연감(1949)에 따른 1942년 매장량 기준
- ↑ 발전소의 80% 빼앗긴 탓에 그나마 대한민국에 편중되어있던 다른 공장들의 가동도 어려워졌다. 수력에 한정해서는 96%이상, 전체 발전 평균 실적으로 보았을 때는 92%를 빼앗겼다. 다만, 정부수립이 확실시 되는 1948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상당한 양의 전력을 공급해주었고, 공장 운영이 차질을 가장 큰 요인은 대일무역구조 붕괴와 공산화에 따른 물자 부족이었다. 이후로는 미군정의 관리부실 또한 크다
- ↑ 해방당시 제조업의 규모가 약 15억원이었고 이중 중공업(금속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이 7억원을 차지하였는데, 미군정에 넘어온 중공업 공장의 규모는 고작 1.4억원이었다. 그나마 기계공업의 경우는 대한민국 72%, 북한 28%으로 나뉘어졌는데 전체 규모가 530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 ↑ 대우자동차의 전신. 자세한 내용은 신진자동차 문서 참조.
- ↑ 이 회사가 훗날 신진자동차와 통합해서 대우그룹에 넘어가서 대우자동차가 되었다.
- ↑ 1973년도 예산안 시정 연설에서
- ↑ 1972년 11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 ↑ 1972년 대통령의 비상조치로 모든 대기업의 사채를 동결하고, 강제로 금리를 대폭 인하하여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하거나, 출자전환하도록 하였다. 이외에 은행과 금융기관의 모든 예금을 동결하고, 강제로 금리를 내리도록 하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사적소유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반시장적인 조치이나, 이 조치를 통해서 당시 부실화된 수많은 중화학공업 대기업들이 살아남고 급성장하면서 지금의 재벌 중심 경제 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 ↑ 또한 8.3조치 직후 단기금융업법을 제정해서 그동안 음성적으로 활동하던 명동사채업자들을 양성화하였다. 이들은 **투자금융, ##종합금융 등의 명칭을 내건 단기금융회사(소위 단자사)를 설립해서 제도권금융에 편입되었다. 제2금융권으로 구분된 이들 회사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까지 활동하다가, 연이은 인수합병으로 모두 사라졌다.
- ↑ 여러 산업 분야에 단행되었으나, 대표적인건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이다.
- ↑ 그래서 김영삼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칭찬을 꽤나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