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품관인법

(구품중정제에서 넘어옴)

九品官人法

옛날의 입학사정관제 (학생부 종합)

1 개요

중국의 관리 등용 제도의 하나. 구품중정제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의 위나라 문제 조비가 처음 시행한 이후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과거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당나라 때까지 오랜 기간 존속했던 제도로, 중국의 문벌귀족 계층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한 제도였다.

2 시초

춘추전국시대에는 대개 부모의 관직과 작위를 자식이 세습하거나, 군주와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특별히 등용되는 형식으로 관리를 채용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인재들의 전기를 보면 연줄을 타고 군주와 대화(=면접)를 나누고 이빨을 털어 언변을 드러내 임용되는 일화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인재 충원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해 정말 실력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은 소수의 인재들에 한정된 예외적인 사례였다. 대부분의 관직과 작위가 세습되었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귀족적이었다.

한나라 시절에는 초창기에는 위와 같은 방법을 따라 관리의 채용 방법은 세습 임용이나 특별 등용 정도였다. 그러다 한문제 시기부터 각 지방에 인재를 '추천'해서 올리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비상설적인 '천거'가 시작된다. 천거령은 여러 차례 반복되다 아예 상설화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거리선제다.

유교 사상에 따라 지방관과 지역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는 기본적으로 군국제로 시작했기에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한나라가 종법적 가족질서와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지방세력을 중앙정부로 끌어들이는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지방 호족의 자제가 천거되어 중앙관료가 되면서 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떨어져나갈 동인을 상실하고, 이것을 유교적 시스템으로 포장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한나라 시대에 일반적인 관리 임용 방법이 되었다.

특히 애초에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시작해서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무제가 건국한 후한 시기는 향거리선제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향론은 후한의 발달한 경제와 태학으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을 통한 민간 인재 육성 때문에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유력자들의 여론을 고려해 천거한다는 구조였으니 지방 유력자들의 자제들만이 천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선발 기준이라는 것이 유교적 도덕률이 기반이라 검증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후대로 가면 무능하고 딱히 도덕적이도 못 한 인물들이 천거된 반면, 유능한 인물이라 해도 악평이 돌면 천거되지 못 했다.[1]

그리고 기본적으로 호족들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시스템인 향거리선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후한의 시스템은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주었는데, 그 이유는 지방과는 상관 없이 존재했던 중앙권력의 존재, 환관과 외척 때문이었다. 중앙의 황제는 지방에서 올라온 관료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지방에 권력의 근거를 두지 않는 환관을 중용하고 일부 세력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환관과 외척을 측근세력으로 둔 황제권과 지방 호족들이 기반이 된 중앙관료들이 세력 균형을 이룬 것이 후한 초중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자 중앙관료들은 지방 호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관료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어 중앙귀족의 모습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런 대립구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이행되어가던 찰나에 하필이면 황제들이 잇달아 요절하면서 중앙권력을 둔 대립이 벌어졌다. 중앙귀족의 수장의 위치가 된 외척과 환관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강해지던 황권은 역으로 추락했고,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에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이 엮이면서 향거리선제도 무너졌다. 특히 영제 시기,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매관매직마저 성행하니 사실상 향거리선제는 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수재로 천거된 이가 글을 모르고, 효렴으로 천거된 이가 부모와 별거하고 욕심이 많으며, 용감한 장수라고 천거된 사람은 닭처럼 겁이 많다"는 포박자의 글은 천거제를 기반으로 한 향거리선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걷잡을 수 없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미 멈춰버린 향거리선제가 재기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파탄을 맞은 것은 한말의 대전란이었다. 향거리선제는 향론(鄕論)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제도인데, 엄청난 수의 민간인서주대학살 등의 살육을 당하고, 전란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집단으로 이주하거나, 권력자의 정책에 따라서 '강제 이주'를 여러 차례 당하면서 기존의 향촌 사회는 아예 붕괴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원상을 따라 오환 땅으로 이주했다는 인구가 약 10여만 호 이상, 조조와 손권이 유수구에서 전투 벌일 무렵에는 조조가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리자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백성 10만 호가 강동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구가 우르르 이동하니 향촌사회가 기존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러니 향거리선제를 부활시켜 인물을 천거하는 기존 방법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명사들의 인물평이다. 당고의 금 이후에 청담에 포함된 인물들이 자신들의 인맥이나 경험을 통해 지역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향거리선이라는 공식적인 루트를 대체한 것이다. 이때의 인물평으로 유명한 것이 '월단평'으로 유명한 허정허소이고, 형주의 수경선생 사마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렇게 인물평을 들어 유명해진 인물들이 명사이고, 이런 명사들이 다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삼국지의 초기 인물 형성 구조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조조다. 조조는 인물평을 받기 위해 허소를 찾아갔고 갖은 노력 끝에 '치세능신 난세호웅'(〈삼국지 위지 무제기〉 기준), 혹은 '청평간적 난세영웅'(《후한서》 기준)이라는 평을 듣고 기뻐한 것도 이를 통해 탁류에 속해 있던 자신이 청류의 세계에서 명사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태위를 지낸 명사인 교현이 조조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조가 명성을 얻는 데 아주 크게 작용했다.[2] 그리고 자신이 세력을 세운 뒤로는 일단 여론보다 다소 낮은 관품을 내린 뒤 실력을 보고 나서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방식을 사용해 인재를 즉시 채용하는 정책을 쓰게 된다. 예를 들어 순욱순유의 추천으로 정욱을 등용하고, 정욱의 추천으로 곽가를 등용하고, 곽가의 추천으로 유엽을 등용하고, 유엽의 추천으로 만총여건을 등용하고, 만총과 여건의 추천으로 모개를 등용하는 피라미드 상법 같은 인재 등용이다.[3] 그리고 순욱은 일품관이 되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방법은 긴박한 상황에서 인재를 모집할 때는 도움이 되었으나 안정된 사회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모을 때는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군주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단 한 사람이 전체 영토의 인재를 찾아내고 등용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등용한 신하의 추천으로 또다른 신하를 등용하는 꼴이 되므로 중앙정부와 연줄이 없는 사람은 등용되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조조는 반복적으로 구현령을 내렸고, 이 구현령에서 내건 것이 '불인불효 유재시거'이다. 한 마디로 요약해 만일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를 추천해온다면 그 사람에 대한 향론이나 인간적 평판은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을 바탕으로 평가해 발탁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교적 틀을 벗어났다는 것만 강조하지만, 간단히 말해 춘추전국시대로의 회귀다. 모수자천을 통해 오기와 같이 인격적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나 전한 초기의 명신 진평 같이 인물에 대한 악평이 존재하는 인물도 뽑아 쓰겠다는 것은 국가적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인 자신이 스스로의 역량과 인물 판단을 바탕으로 직접 관료를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한참 이후에 황제에게서 직접 시험을 보는 전시에 아주 살짝 영향을 주게 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군주의 역량에 지나치게 좌우되며, 극도로 많은 자천자가 등장할 때에 군주가 이를 다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근본적 문제가 존재하게 된다. 결국 조조의 구현령은 인물을 추천함에 있어 유교적 도덕률이라는 방패로 마음대로 배제하지 말라는 인물 추천 가이드라인의 제공이라는 의미와 능력 있는 사람은 나서라는 공식 선언 정도로 끝나게 된다. 무엇보다 이는 조조 당대에 한정되었으며, 조비만 해도 의외로 유교적 정서가 강했기에 공식적 제도로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

3 발안

이런 문제점을 감안하고 유교 사상에 따라 각 지역의 존경받는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해 진군(陳群)이라는 대신이 조비에게 구품관인법을 제안하여 실시하게 된다.

구품관인법은 명목상 한나라의 향거리선제와 조조의 유재시거를 혼합, 장점만을 추려 만들었다고 하며, 지역 여론인 향론에 따라 현명함과 덕이 있음을 기준으로 개개 인물의 서열을 매겨 현자와 유덕자의 계층조직을 형성하도록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양질의 인재를 중앙정부에 등용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한계가 드러나버렸다.

4 특징

  • 벼슬의 단계를 1품에서 9품까지 9단계로 나눈다. 따라서 한나라 시절에 녹봉의 차이 정도로 구분이 불명확하던 관직을 위계와 품등으로 명백히 구분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관직에 따른 권한 및 위계질서가 성립하게 된다.
중국내에서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18반으로 세분화하거나 정과 종을 도입해서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원래 제도의 뜻대로 사용되었다.
  • 기존에 벼슬하던 사람들 중 명망이 높은 사람을 선정해서 각자의 출신지인 군국에 따라 각각 군국의 중정(中正)이게 아니다이라는 관직에 임명, 해당 지역에서 인재를 찾아 추천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각 중정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의 향론을 듣고, 타지역까지 흘러간 사람들까지 명단을 작성해서 향품(鄕品)이라는 품등을 매기고, 장(狀)이라는 상신서를 붙여서 중앙정부에 보낸다.
이렇게 한 이유는 전란에 많은 인재들이 고향을 벗어나 타향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고향 사람을 시켜 찾아내게 한 것이다.
  • 중앙정부는 중정의 상신서를 받아 해당 인재를 등용할지 여부를 결정한 후, 등용한다면 향품보다 4단계 낮은 품계를 준다. 그리고 해당 인재가 벼슬살이를 지속한다면 중정이 준 향품까지 승진이 가능하다.
일단 추천이 들어와도 한 번 시험적으로 낮은 관직을 주어 성실하게 근무해서 실적을 쌓으면 승진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향론도 무시하지 않아서 너무 낮은 향품을 받은 사람이 중앙정부에 들어와 안면을 바꾸고 높은 직위로 올라가지 못 하도록 하는 장치도 만들었다. 즉, 실력만 있고 인품이 비천한 사람은 고위급 관료가 못 된다는 이야기.

일단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 이론상으로는 중앙정부의 생각과 각 지역의 여론을 종합해서 융화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도 어느 정도 위나라의 조정내의 관료기구와 각 지방 사족이나, 호족들의 여론을 안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면서 초기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5 변질

하지만 이 제도가 생각한 것처럼 잘 돌아갔다면 혹평을 받을 이유도, 과거 제도가 도입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 중정이 너무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
아무리 현지에서 인품이 좋고 여론도 좋은 인물이라 해도 중정에게 잘못 보이면 아예 기록이 안 되거나 하품의 상신서가 올라가게 되는데, 그러면 중앙정부에 아예 채용이 안 되거나 되더라도 평생 하급 직책만 전전하다 퇴임하게 된다. 한 번 중정에게 찍히면 나중에 출세해서 편파적인 중정을 갈아버린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출신 가문이 매우 대단한 경우를 제외하면 개인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원래 정해진 향품을 수정할 수 없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든 중정에게 잘 보여야 한다. 이에 따라 각종 뇌물과 향응이 오가는 등 온갖 로비가 벌어지면서 현지의 민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 나눠먹기식 인사가 가능하다.
중정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진짜로 중립을 지키는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고, 중정을 견제할 수단도 없다. 따라서 각 중정들끼리 담합해서 자신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품의 상신서를 올리거나 서로를 중정으로 추천함으로써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 수 있다. 반대로 나눠먹기에 끼어들지 않거나 끼어들 수조차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해봐야 평생 하급 관직에만 머물게 된다.
  • 평가 기준이 분명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평가 기준에서 효, 덕, 인품 같은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데, 이런 요소들을 공정하게 측정할 기준 자체가 없다. 게다가 능력도 실제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해당인에 대해 주변인들과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으로 판정하므로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한다 해도 명성만 높고 실력이 바닥인 허풍선이들이 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 문제는 향거리선제 시기부터 존재했던 고질적인 문제인데, 향거리선제의 천거 시스템을 이어받은 구품관인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 공정하고 정확하게 시행하려 노력할수록 품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것에 비해 반발만 많아진다.
대상자를 분류하는 과정부터 불효나 부덕, 불충 등의 사유를 파악하게 되는데, 대부분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사소한 위반사항이 엄청난 문제가 되는 꼬투리 잡기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능하고 명성 높은 인재가 어쩌다 3년상 치르던 중 병이 나서 여종에게 간호받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불효 항목에 걸려 하품을 받는 어이 없는 사태가 일어나고, 문벌귀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하품의 판정이라도 받았다간 가문의 힘으로 중정에게 항의를 하거나 중정을 실각시키려 할 테니 자연스럽게 높은 가문의 자제들은 엄청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상품을 주게 된다. 사실상 출신가문이 어디냐에 따라 판정이 결정나는 것이다.
  • 각 지역의 여론인 향론이 강력하면 그나마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대혼란 속에서 향론은 각 지역이 황폐화되고 지역민들이 유랑하면서 붕괴된 지 오래였다.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향론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구품관인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향론이라 해도 사실상 중앙정부의 중정이 생각한 향론이 되어버리므로 중앙정부에서 생각한 인물이 추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형식적으로만 지역민심을 감안하는 제도가 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구품관인법의 또다른 이름이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가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파악한 사마씨들이 기존의 군중정 위에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설치함으로써 완전히 높으신 분들끼리 관직을 나눠먹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주대중정은 기존의 군중정보다 더 큰 주라는 광역에서 인재를 추천할 수 있으며, 고위관료가 주대중정을 겸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서진 시대에 이미 상품(上品)에 한미한 가문 출신이 없고 하품(下品)에 세도가 집안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문가 출신인지 아닌지만 따져서 관직을 주는 제도로 완전히 변질되고 만다. 명문가에 태어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위 관료가 될 수 없으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대대손손 계속 해먹는 사태가 일어났다. 가문을 잘 만나야 높은 벼슬하는 이 더러운 세상 한 마디로 말해 음서 따위는 비교도 안 될 개막장 제도가 되었다. 그러라고 도입한 제도가 아닐 텐데

6 결과

구품관인법의 도입은 호족이나 명문가가 독점적으로 고위 관직에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해당 호족과 명문가들이 대대손손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생겨난 문벌귀족이라는 귀족 계층을 계속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남북조시대쯤 가면 쿠데타로 인해 국가가 교체되고 황제 가문이 바뀌더라도 귀족 계층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귀족이 되고 안 되고는 귀족들만 결정이 가능한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가가 망했는데 기득권층은 그대로라는 소리다.[4]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 아래에서는 황제라도 귀족들에게 우리보다 한미한 가문 운운하는 뒷담화를 들을 수 있었고, 황제가 추천한 인물이라도 귀족들 마음에 안 들면 귀족이 못 되며 고위 관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 이는 결국 남조의 국가들이 개막장이 되는 데 큰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에 당시 유행하던 청담사상까지 결합하니 양(육조) 말기쯤 가면 고급 귀족들이 마치 신선처럼 보이게 치장하고 살면서 실무가 뭔지도 모르는 생활을 영위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구품관인법은 겉으로만 보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참 이상적인 제도이자 유토피아적 법칙으로 보였기에 북조에도 이런 제도가 적극적으로 수입되었다. 결론은 북조도 남조를 따라 중앙정부에 있는 사람들만 혜택을 받는 꼴이 발생, 이에 따라 푸대접을 받던 국경수비대나 부족의 원천지에 남은 원래 부족민들이 반발하는 통에 육진의 난이 일어나 국가가 무너지고 장기간 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 벌인 내전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구품중정제의 문제점은 이미 조위 시대 말에 하후현이나 두예가 폐지를 건의할 정도로 익히 잘 알려진 상태였으나 이 제도의 좋은 점을 알아차린 귀족 계층들이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절대적으로 이 제도를 사수하려 했다. 덕분에 수나라 시절에 확실한 대체재인 과거 제도가 도입되었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 했다. 과거 제도는 자신이 장원급제를 해도 자손이 과거에서 떨어지면 가문은 엿을 먹는 격이 되므로 대대손손 해먹기가 힘들어, 실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중요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처 하급 관료만 선발하는 제도로만 운영되다가 당나라 후기 안사의 난부터 시작해 황소의 난까지의 전란으로 문벌귀족들의 지역기반이 초토화되고 과거 급제자에 대한 인식이 상향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래 취지대로 실시된다.

이 제도를 폐지할 수 없던 황제들이 궁여지책으로 상급 직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하급 직책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만든다든지, 측근들끼리만 정책을 결정한다든지 하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관료체제에 혼란이 발생하고 부패가 가중되는,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만 나타나고 안 그래도 혼란한 정국이 더 혼란해졌다.

구품중정제는 하급 직책에도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었다. 상기했듯 처음에는 낮은 품계를 주기 때문에 명문가에 태어나 고위 품계로 올라가는 하급 직책은 청요직이라고 해서 대접받고 나머지는 멸시받는 사태가 일어났다. 황당하게도 상설업무가 적고 숙직을 하면서 천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벼운 업무인 낭관(郞官) 같은 것이 주로 청요직으로 대접받았고, 그 밖에 상설업무로 일이 바쁜 벼슬은 탁직으로 여겨져 꺼려졌다. 이렇게 된 이유도 가관인데 높으신 분들이 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 하는 실무를 담당하다 실수나 사고라도 치면 경력에 금이 갈 테니 나중을 위해 좋은 대우와 평판을 받으면서도 위험성이 적고 한가한 업무에 종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무 능력이 낮은 인물들이 고위직으로 올라가면서 관료들의 업무 능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 놀고 먹는 놈이 더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이러면 청요직에 있는 사람은 그냥 대기순번 탄 셈이니 다른 사람들을 깔보면서 업무를 등한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런 더러운 꼴을 보면서도 승급의 희망도 없으니 부패의 길로 나서게 된다.

7 평가

결국 구품관인법은 시작부터 말아먹으려고 만들 리는 없으니 의도는 좋았으나 현실은 시궁창인 사례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껍데기만 보면 여러 가지 좋은 제도를 섞어 잘 칵테일해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제도를 운영할 사람들을 모두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중립을 지키는 훌륭하신 분으로 보았다는 허점을 드러내면서 해먹는 놈들이 계속 대대손손 해먹는 제도로 빠르게 변질된다.

조위 초기에 잘 돌아갈 때는 본래 목동 출신으로 하급 관리였던 등애 같은 인재가 추천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같은 시기에 이미 종회가 등애의 출신이 낮다고 무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귀족화 경향이 매우 빠르게 나타났다. 제대로 돌아간 기간이 극히 적고 변질된 형태로 돌아간 기간이 압도적이라는 문제 외에도, 속을 보면 썩을 대로 썩어있는 레몬과도 같은 제도였음에도 겉으로는 이상적인 제도로만 보여서 해당 제도의 개선이나 폐지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문제점도 만들어냈다.

이 제도에서 유일하게 장점을 찾을 수 있다면 관직을 9단계로 세세하게 구분함으로써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촉한정통론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촉은 제갈량의 영향으로 인해 철저한 실력제일주의가 자리잡았고, 멸망 직전에도 제도적으로 기득권의 이익을 보장하여 개천용이 못 나오게 막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5]
  1. 이런 점 때문에 조조는 유재시거를 선포하며 '불인불효'도 상관 없다 해서 당대에 충격을 주었다.
  2. 이처럼 명사의 평가를 얻어내지 못 하면 몸으로 때워야 했다. 손견은 명사인 원술의 밑에서 일했고, 유비공융을 도우러 가면서 자기 이름 한 마디 언급해준다고 감격한다. 심지어 유요허소태사자에게 좋은 평을 내리지 않았다 하여 그를 중용하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3. 이것은 연의에서만의 내용으로, 실제로 이들이 등용된 경위나 시점은 제각기 다르다.
  4. 유송 이래 남조의 창업군주들은 하나같이 한미한 무장 출신이라 권위를 인정받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귀족 세력을 포용해야 했다. 귀족들과 별개로 한미한 인사들을 임용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관료제가 아니라 측근정치 형태가 되다 보니 이들은 이들대로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양상을 제대로 된 관료제로 개편하려 시도한 인물이 양무제 소연인데, 말년에 지치고 후경의 난까지 겹치면서…
  5. 참고로 는 단순히 천거에만 의존해서 차라리 구품관인법이 더 낫다 싶을 정도로 시스템이 원시적이었다. 당장 국왕과 측근세력과 지방 토호들이 서로간의 이해관계로 묶인 사이나 다름 없어서 중앙집권도 약하고 내전도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