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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은 대한민국 최대 항공사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한때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항공이 지금 한진그룹의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플래그 캐리어이자 스카이팀 창립멤버가 되고, 전 대륙 취항 항공사가 될때까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1 대한국민항공사(Korea National Air ; KNA)
한반도 최초의 상업 항공사는 1924년 신용욱의 조선비행학교를 모태로 하는 조선항공사업사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대한국민항공이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수요 급감과 더불어 창랑호 납북 사건 까지 터지면서 경영에 위기가 닥치게 된다. 결국 신용욱은 1961년 7월 16일 자살했고, 1962년 11월 23일 파산(폐업 처리) 대한국민항공을 대신하여 설립된 것이 대한항공공사이다. (이 때문인지 대한항공은 KNA의 역사로 소급하지 않는다.)
2 국영기업 ~ 민영화 초기 시절
대한국민항공사가 파산한 직후 대한민국 정부의 출자로 국영 대한항공공사가 설립되었으나, 대한항공공사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면서 [1]누적 적자가 무려 27억 원에 이르자 정부는 경영을 포기하고 매각을 추진한다.[2]
매각 대상으로 인천을 거점으로 영업하던 물류 회사인 한진상사가 떠올랐다. 한진상사 내부에선 부채투성이의 공기업 인수에 반대 의견이 많았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조중훈 사장에게 인수를 제안하면서 일사천리로 매각이 확정되었다. 한진상사가 대금 14억 5,300만원에 대한항공공사의 부채를 모두 떠안는다는 조건이었다. [3] 1969년 3월 1일 대한항공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기체는 맥도넬 더글라스의 DC-9 1대, DC-3 2대, DC-4 1대, F-27 2대, FC-27 2대로 단 8기만 소유하고 있었던 참으로 초라한 항공사였다. 그러나 중동 붐으로 차차 해외로 나가는 노동자들이 많아지고 비즈니스 수요도 꾸준히 늘어나면서 이때를 기점으로 재정이 안정화 되었다.
이후 한진은 대한항공을 기반으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운송 기업집단, 거대 재벌 한진그룹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이바지하였다. 조중훈은 한진그룹 회장으로 경영을 이끌었고, 세계 최초로 에어버스 A300를 도입하면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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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320 대한항공 구 도장. 도장과 꼬리날개에 새가 그려져 있어 일본항공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인다.
사진 속 비행기는 1987년 11월 29일에 추락한 KE858편이다. HL7406이면 HL 국가코드, 7 민간용 제트기, 4 엔진 4개, 06 6번째 항공기다. 현재는 항공기 숫자가 많아져서 이러한 구분을 하기 어렵다. 윗동네 고려항공 도색과 유사한 감이 있다. 시대를 뛰어넘은 한민족
1969년에 보잉 707의 동체 단축형인 보잉 720을 도입하고 1972년까지 저 1대의 보잉 720과 몇 대의 보잉 727로 모든 노선을 커버했다. 이랬던 항공사가 이후엔 150대를 보유하고 있는 거대 항공사로 발전했다.
3 1970 ~ 1980년대, 보잉 747 도입 및 노선 확장
1972년 10월 18일, 보잉 747 도입을 확정하고 1973년 5월 2일 747-2B5, 등록번호 HL7410을 차관 도입하여 김포 - 하네다 - 호놀룰루 - LA 루트의 첫 미주 여객 노선을 뚫었다. 이 노선의 편명은 KE001/002편으로서 1979년 12월에 김포 - LA 직항 노선 취항 후에 폐지되었다가, 1989년에 창사 20주년 기념으로 김포 - 나리타 - LA 루트로 재취항했으며, 대한항공 미주 노선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해 오던 노선이었다. 오늘날 장거리 국제노선의 경우 항공기 성능의 발달로 인해 국적 항공사 노선이면 대부분 직항편으로 변경되었지만, 이 노선 만큼은 굳이 제 3국의 도시인 도쿄를 경유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일단 이 노선을 부활시킨 1989년 당시 20주년 기념 차원에서 대한항공의 첫 미주 노선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한 것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대한항공이 일본에서 항공자유화 5단계 운수권을 유지함으로서 항공수요가 상당한 도쿄 - LA 노선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영업함으로서 수익이 쏠쏠하다는 이윤의 측면이 훨씬 컸었다.[5]
하지만 2013년 4월 1일부터 최종 도착지를 LA 대신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변경하여 운항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도쿄 - LA 구간이 자체적인 수요가 갈수록 줄어드는데 경쟁해야 하는 항공사들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나리타 국제공항은 미주 노선이 엄청나게 깔린 아시아 최대의 허브 공항이기에 그만큼 LA 등의 주요 미국행 노선에서는 엄청난 경쟁이 당연하다. 어찌보면 초창기 미주 노선 루트인 김포 - 도쿄 - 호놀룰루 - LA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의 구간을 일부 단축한 형태로 바뀐 셈이다.
1980년대에는 미주 노선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자, 취항지가 파리와 취리히뿐이었던 유럽 노선의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1984년에 서울 - 프랑크푸르트, 1988년에 서울 - 런던, 1989년에는 서울 - 암스테르담 노선을 취항시켰으며, 이 당시에는 대한민국 건설 회사들의 중동 진출 붐 덕분에 바그다드, 쿠웨이트, 다란, 바레인, 제다, 리야드, 아부다비, 트리폴리 등의 중동 및 북부 아프리카 지역 취항지도 무척 많았다. [6]
1984년에 지금도 쓰이고 있는 하늘색으로 항공기 도색을 변경하였다.[7]
특히, 20년 넘게 오랫동안 대한항공의 얼굴마담으로 활약한 기종이라고 할 수 있는 보잉 747-400을 1988년에 10대 주문하여 출시된 해인 1989년부터 차례로 도입하였는데, 대한항공이 아시아 최초로 보잉 747-400 기종을 도입한 항공사로 기록된다. 대한항공의 롤모델이였고, 한때 보잉 747 최다 보유 항공사였던 일본항공보다 더 빨리 도입했다는 이야기.
1979년, 석유 파동 때 연비 절감을 위해 대한항공 카고의 도색을 무도색으로 바꾼 적이 있다. 하지만 1984년 신도색으로 갈아타면서 이 도색은 대한항공 카고 구도색의 상징이 되었다.
1978년, 도색 변경 전의 HL7441
1981년, HL7452.
4 1990년대, 탈냉전 이후의 노선 확장
1990년 즈음부터 대한민국의 소련, 중국 등의 공산권 국가와의 공식 수교 및 냉전 종식으로 인해 러시아 영공 통과가 가능하게 되어 유럽 특급 항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시베리아 항로가 개척됐다. 소련과 수교하게 될 무렵인 1990년 3월 31일 모스크바에 취항했고, 소련이 해체된 후 199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200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취항한다.
냉전 시대에 앵커리지 국제공항 중간 기착의 북극 항로 루트가 불가피했던 유럽 노선이 드디어 미주 노선과 같은 장거리 직항노선의 형태로 전환되면서 1970~198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던 등 유럽 3대 관문의 기반을 닦아놓은 유럽 노선이 대한항공 내에서 미주 노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거리 황금노선 수준으로 본격적으로 집중 투자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때의 시베리아 항로는 중국과 몽골 영공을 통과하는 현재의 항로와 비교할 때 비행 시간이 1~2시간 더 걸리는 항로였다. 경제성 확보를 위해 중국, 몽골 상공을 관통하는 항로의 개설이 시급했으나 중국과 몽골 항공당국의 관제 능력 미비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항공이 중국 관제사들을 대한민국으로 불러들여 교육시키는 등 많은 지원을 한 덕분에 1996년에 비로소 북극 항로보다 5시간 이상, 시베리아 항로보다 1시간 이상 단축되고 중간 기착 없이 거의 최단 거리로 비행할 수 있는 서해-중국-몽골-시베리아 루트를 가진 오늘날의 유럽 특급 항로가 탄생한다
대한항공의 유럽 지역 취항지 수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항공편 투입 횟수 및 용량 또한 미주노선 다음으로 규모가 큰 수준으로 대폭 증대되었다. 그 밖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괌 등의 대양주 노선도 신규 취항하였고, 일본 노선의 확충도 이어졌다.
1996~97년 즈음부터 중국 및 동남아 노선이 확충되기 시작했고, 현재 대한항공의 국제선 여객수송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777과 A330 등의 중장거리용 기재가 처음으로 도입되기 시작하고 중단거리용 737NG 시리즈를 대량 구매함으로서 747 클래식, MD-11, MD-82/83, 포커 100 등의 기존의 낡거나 문제가 많은 기재들을 모두 처분하거나 화물기로 전환하는 등 항공기재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덧붙여서 포커 100을 마지막으로 롤스로이스제 엔진의 도입이 전면 중단됐다. 그래도 전용기 몇기는 엔진이 RR이다.
5 2000년대 이후
2000년부터는 인천국제공항의 개항과 함께 항공동맹인 스카이팀 창립을 계기로 1980~1990년대처럼 무리한 노선 확장 등의 외적인 성장에 치중하지 않고 1990년대 후반에 진행한 항공기재 구조조정을 계기로 꾸준한 신 기재 구입 및 투자,항공기 안전 및 서비스 확충 등 항공사 운영의 내실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2010년대 현재는 외적인 성장에 치중하여 부실한 운영으로 사고다발 항공사라는 악명을 거의 떨쳐내었다.
2008년에는 우즈베키스탄항공과 협약하여 타슈켄트 남서쪽의 나보이에 있는 나보이 국제공항의 화물 시설을 투자하기로 했고, 나보이 국제공항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현재 나보이는 중앙아시아 화물 허브로 이용하고 있으며, 유럽으로 가는 화물기가 나보이에서 중간 기착 중이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여러가지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2014년 말에 터진 전직 부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좋은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고, 충격의 여파인지 그 후 여러가지 작은 사건들을 터뜨리고 있다.
한편 2010년도 들어와 A330과 보잉 777을 열성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며, A300-600을 2012년 완전히 대체하였다. 또한 2011년부터는 A380을, 2015년부터는 747-8i을 도입하면서 기존에 들여왔던 보잉 747-400을 퇴역시키는 등, 노후 기재 처분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787-9도 도입 예정이라고.
보잉 777 및 A380 등 최신예 기재를 운용하는 외국 항공사의 경우 3-4-3에다가 30인치 좌석간격이라는 닭장배열을 자랑하는데[8] 대한항공은 3-3-3 배열이고 앞뒤 간격도 33인치대로 이코노미석치고는 매우 넓다. 이것도 대한항공만의 고급 서비스라 할 수 있다. 대한항공에서도 광고 등 에서 매우 크게 홍보하는 부분이다. 아랍계 항공사처럼 일등석이 으리으리한 회사도 이코노미는 3-4-3 닭장 배열임을 감안하면 대한항공은 확실히 대인배다. 괜히 프리미엄 이코노미 같은 걸로 20% 정도 요금인상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6 기타 여러가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루프트한자를 제치고 항공사 항공화물운송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9] 최근에는 전세계적인 항공화물시장의 위축(대한항공의 최근 수입 대부분은 여객운송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및 양보다는 질을 우선한다는 방침 하에 화물운송 규모 자체는 예전보다는 줄었다.
비빔밥을 기내식으로 만든 회사이기도 하다. 이 기내식 비빔밥은 밀폐된 항공기 내에서 냄새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 엄청난 연구를 거쳐서 만든 것으로 국제 기내식 컨테스트 1위를 차지한 적까지 있다.
2009년을 맞아서는 40주년 기념으로 '하늘을 보자' 캠페인을 벌였다.
2011년 기존 보잉 747이 가지고 있던 '최대 여객기' 기록을 경신한 에어버스 A380-800을 도입했다. 덧붙여 첫 취항편인 인천 - 나리타편은 원래의 KE701 대신 당일에 한해 KE380편으로 운항하였다.
항공 운송업 외에도 칼 리무진, 칼 호텔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스카이팀 동맹 항공사인 체코항공의 지분 44%를 인수하였다.(관련기사)
1990년대 후반까지 동아제약과 더불어 광고에 한자를 많이 삽입하기로 유명했다. 예로 歐洲(구주)라는 말은 유럽의 음차어인 歐羅巴洲(구라파주)를 축약한 말로 대한항공에서 유난히 많이 사용하였다.(서구화된다는 말이 구라파에서 따 온 거다.) 그 외에도 본문의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한자를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
2014년 9월부터 아마데우스로 백오피스 예약 시스템이 변경되었다. 아마데우스는 대한항공의 전면 도입시기가 늦어져 아시아나항공이 먼저 도입한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도입계약은 대한항공이 5개월 더 빨리 체결했다. 덕분에 대한항공의 예약시스템 토파스, 아시아나항공의 예약시스템 애바카스에서도 양사 예약과 발권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바뀐 예약시스템이 엄청난 에러 와 함께 항의전화가 많다고 한다.
2015년 6월 16일 자로 파리 에어쇼에서 보잉 737 MAX-8 50대와 에어버스 A321 NEO 50대를 주문했다. 이는 대한항공의 첫 A320 주문건이며, 예산 약 13조원을 투입한 이번 주문은 국내 업계 사상 최고라고 한다. 보잉 737 맥스는 보잉 737 NG 시리즈를 대체한다. 협동체기를 대량으로 구매한 것은 저가 항공사의 성장세를 더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추정된다. 그 외에 파리 에어쇼에서 보잉 777-300ER도 2대 더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관련기사
P&W의 빠돌이상당한 고객이다. 대한항공의 거의 모든 여객기는 P&W제 엔진이 달려 있다.[10] 예외는 보잉 737과 보잉 777-300ER, 보잉 747-8, A300B4와 A380 등인데, 전부 다 P&W제 엔진 옵션이 없는 항공기들이다.[11] 다만, 최근에는 하락세를 겪고 있는 P&W 대신 GE로 활발히 갈아타고 있는 중이다.주문 내역을 보면 GE 아니면 선택권이 없는 기체들인데 GE 아니면 어떤 엔진을 넣어야하지 보잉 787-9도 GE제 엔진으로 주문했다. 어쨌든 롤스로이스제 엔진은 단 하나도 없다.[12]
- ↑ 이 시절에는 비행기를 탈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고 비행기 탈만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재벌회장이나 고위급 공무원, 외국인, 독일로 가던 광부와 간호사들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경영이 잘되기가 힘들었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막 항공대중화가 시작되던 시점이었지만 해외여행을 가기에는 비용이 아직은 턱없이 비쌌었던고로 국제선 이용자수는 그리 많지는 않았고, 중국의 경제력은 말도 할것도 없었던 처참했던 시절이라 비행기를 탈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건 마찬가지였고 한중수교가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셔틀장사할 거리조차 없었다.
- ↑ 1960년대 기준으로 27억 원이니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최소 100은 곱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LH보단 낫구만 - ↑ 적자가 워낙 컸던 기업이라 매각 제안을 받았을 때 조중훈 회장의 동생인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이 형을 뜯어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중훈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제안에 그대로 수긍했고 조중건 고문이 "형 미쳤어?"라고 말했다. 이후 조중훈 회장의 답이 걸작. "거기서 대통령이랑 싸움을 하냐? 답답하면 니가 가서 대통령한테 싫다고 해보던가" 이 말에 조중건 고문은 반격을 포기했다.
- ↑ 당시 에어버스는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있는 영국, 독일, 그리고 프랑스에서 자체적으로 뽑아서 운영하는 이른바 '지역구'급 업체였다. 게다가 민간 여객기 시장은 모두 미국이 휘어잡고 있었으므로 수출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었다. 그랬던것이 대한민국에서 A300을 발주해{자세한 것은 한국군 낚시전설 참조} 세계최초의 비유럽권 에어버스 도입운영국가로서 성능을 인정받아 현재의 위치에 이른 것.
- ↑ 게다가 운수권은 정말정말 따기가 어렵다.
- ↑ 단, 현재는 리야드, 제다, 두바이 노선을 운항중이다.
- ↑ 보잉과 공동 협의 하에 도색을 만들었다.
- ↑ A380에 850명을 넣는다는 것도 올 이코노미+3-4-3 닭장+시트피치 30인치대라는 극악의 배열을 가정한 경우다. 대한항공 A380은 3클래스 합쳐서 불과 410명대 정원이다.
- ↑ 운송 전문 기업을 포함한다면 대한항공은 3위에 속한다
- ↑ 공군의 엔진이 P&W라 정비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는 카더라가 있다
- ↑ 보잉 737과 보잉 777, 보잉 747-8은 단독 옵션이라 CFM 인터네셔널/GE 엔진을 쓰고 있으며, A380-800의 경우 P&W가 출자한 엔진 얼라이언스의 것을 쓰고 있다.
- ↑ 왜냐햐면 엔진 계약을 할 때 롤스로이스에서 엔진 수리는 무조건 자기네에서 하라는 방침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원동기 정비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항공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이다. 엔진 중정비가 불가능한 아시아나항공은 롤스로이스의 엔진을 채택한 항공기들이 있다. 그래서 일찌감치 A350을 주문한 아시아나항공과 달리 대한항공이 A350에 대해 아직 아무런 답이 없는 것도, 현재 A350에 트렌트 엔진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