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FC/역사

리버풀 구단의 95년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1987, BBC 제작)[1]

1 창단과 전성기

안필드의 임대인이었던 존 하울딩(John Houlding)에 의해 창설되었다. 하울딩은 1878년에 에버튼 FC을 공동으로 창단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울딩과 에버튼은 금전적인 이유로 큰 갈등을 겪었고 당시 에버튼 창단주 가운데 보수적인 성공회 목사도 있어서 맥주제조업으로 돈을 번 하울딩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갈등 요인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1891년 하울딩은 구장의 임대료를 100파운드에서 250파운드로 올리려고 했다. 에버튼은 이에 불만을 품고 냅다 구디슨 파크로 자리를 옮겼는데 졸지에 구장이 비어버린 바람에 난감해진 하울딩은 결국 새로 구단을 창단해버렸다. 그 구단이 바로 지금의 리버풀 FC다. 같은 지역에 있는데다 이런 이유로 에버튼과는 머지사이드 더비를 이루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는 노스 웨스트 더비를 이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장미 더비가 노스 웨스트 더비인줄 알지만 장미 더비는 맨유 vs 리즈와의 것이다)

원래는 '에버튼 FC & 애슬레틱 그라운즈'라는 이름으로 협회에 창단 신청을 했으나 협회는 에버튼과 이름이 겹친다 하여 불허했고 결국 리버풀 FC로 이름을 바꾸었다. 에버튼이 떠나는 바람에 달랑 3명만 남았던 선수진은 하울딩이 스코틀랜드에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와 구색을 갖추었고 당시 지역 리그였던 랭커셔 리그에 참가한다. 창단하자마자 랭커셔 리그에서 우승해 2부 리그로 승격했고, 2부 리그에서도 승격한 해에 우승을 달성하면서 1부 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1970~80년대 리버풀의 유럽대회 무쌍을 보여주었던 BBC 다큐멘터리 (2001년 방영.)

이후 몇 차례의 2부 리그 시절을 제외하고 굉장히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며 기록을 보다시피 주로 7~80년대에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특히 빌 샹클리 감독과 밥 페이즐리 감독이 큰 역할을 했다. 샹클리 감독은 2부 리그에서 빌빌대던 팀의 구조를 혁신해 강팀으로 만들었고, 1973/74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여 리버풀의 전설이 된다.

샹클리 감독이 은퇴하고 수석코치였던 밥 페이즐리가 감독이 되면서 리버풀의 최고 전성기가 시작된다. 페이즐리 감독이 지도한 9시즌 동안 리버풀은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UEFA컵 우승 1회, 리그 컵 우승 3회, 채러티 실드 우승 6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라는 기록을 세운다.

2 몰락, 반짝, 그리고 다시 부침의 길로

1982/83 시즌 이후 페이즐리 감독이 떠나고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 페이건이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1983/84 시즌에 리그 - 리그컵 - 유러피안컵 우승으로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 달성을 이루어냈으나, 중원의 장군 그레이엄 수네스가 이탈리아의 삼프도리아로 이적하는 바람에 전력에 구멍이 생겨 1984/85 시즌에 라이벌인 에버튼에게 밀려 1위 우승컵을 내주어야 했으나, 새로 영입된 덴마크인 선수 얀 묄비와 존 워크의 활약으로 그 해 유러피안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유벤투스와의 경기를 했지만, 경기 와중에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자 그 책임을 물어 7년간 유럽대항전에 출전이 금지되어서 리버풀에게 대한 비난의 화살이 커졌으나[2], 케니 달글리시가 플레잉감독으로 활동하던 시절인 1989년에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참사가 벌어지면서 96명의 콥이 죽었는데, 더 선에서는 콥들이 심지어 노상방뇨, 갈취, 폭행을 했다는 수 많은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을 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힐스버러 참사 참고.

헤이젤 참사로 UEFA 대회 출전권을 일시 박탈 당한 리버풀은 리그에선 1,2위만을 다투는 등 강팀의 면모를 보였지만,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지휘하던 1991~1994년까진 꽤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심지어 1993/94 시즌에는 8위(...)를 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후임인 로이 에반스 감독 시절에는 존 반스, 이안 러쉬, 롭 존스,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등을 앞세워 1994/95 시즌에는 맨유가 약한 틈을 타서 풋볼 리그 컵(당시 코카콜라 컵)에서 우승했으나, 1995/96 시즌 FA컵 결승에서는 맨유에게 패배했다.

1996년에는 마이클 오언이 들어왔고, 1998년에는 공동 감독[3]으로 제라르 울리에가 취임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팀을 만들고자 시도하기 시작했다.

3 2000년대

3.1 제라르 울리에 감독 시절

1998년에 울리에가 취임한 이후 중상위권을 마크하다가 2000/01 시즌에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미니 트레블을 기록했다. 하지만 저 미니 트레블은 FA컵을 빼면 유에파컵이나 캐피탈 원 컵(당시엔 워싱턴컵) 같이 빅클럽들이 노리기엔 다소 부족한 컵이었고 중요한 리그나 챔스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그다지 대단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울리에 시절에는 울리에 3종 셋트(엘 하지 디우프, 브루노 셰루, 살사프 디아포.) 등 수많은 먹튀가 나왔기에 02/03, 03/04 시즌은 콥들에겐 악몽의 시절로 기억된다. 울리에 시절은 01/02 시즌 리그 준우승, 02/03 시즌 초중반 리그 1위를 일시적으로 차지, 그리고 그 시즌 워싱턴컵에서 우승했었을 때까지가 전성기였다. 사실 이 시절의 리버풀은 울리에 감독의 심장 수술 이전까지는 잘나갔다. 수술받은 그 후가 문제였다.(...) 03/04 시즌에는 4위로 챔스 진출권을 얻었으나 무관으로 시즌을 마친 탓인지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경질되었다.

3.2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 시절

이후 감독이 라파엘 베니테스로 바뀌었는데 부임 직후 첫 해인 04-05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이후로도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때 04-05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밀란을 상대로 전반에만 3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전에 주장 스티븐 제라드의 활약에 힘입어 3골을 따라잡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승리하였다. 당시 결승전 장소가 이스탄불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를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부르며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는다. 리버풀 팬들에게는 바이블 격인 경기.

05-06 시즌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를 역시 승부차기로 꺾고 FA컵 우승을 차지했다.하이라이트

06-07시즌 AC 밀란과 다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필리포 인자기의 두 골에 무너져 준우승에 그쳐야했다.

08-09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0으로 대파한후 8강에서 첼시를 만나게된다. 하지만 첼시를 상대로 1차전에서 '원정팀의 무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3:1로 패배, 2차전 첼시의 구장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전반 2:0의 점수를 냄으로써 '이스탄불의 기적'을 재현할 뻔 했으나 후반에 4점을 내주고 2골을 추가함으로써 4:4이 되었다. 1, 2차전 합계 7:5로 첼시에게 4강행 티켓을 내놓고 만다. 경기 자체는 엄청 재밌었다. 4월 22일 프리미어 리그 아스날 FC와 경기를 치뤘다. 아스날의 아르샤빈이 4골 폭풍을 몰고와 4:4무승부. 참고로 이 날 아스날의 유효슈팅은 4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리버풀 빠로, 그들의 Meddle앨범의 Fearless라는 곡의 부제는 리버풀의 엠블럼 문구인 "You'll never walk alone"이다. 곡의 후반부에 리버풀 응원가가 흘러나온다. 헬로윈은 안티인가?[4]

그 외 한국에선 프라모델 매니아로 유명해진 이시영이 팬 카페에 리버풀을 좋아한다며 강아지 라라와 함께 보고싶다는 글을 올렸다. 이젠 축구 팬 캐릭터도 확립인가(...) 그러나 얼마전 맨유vsFC서울 전에서 맨유 유니폼을 입고 축구를 관전한 것이 알려지면서 일부 팬들한테서 배신자로 불려지게되었다.

08/09 시즌은 아쉽게도 결국 2위로 끝을 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팀워크와 실력이 차차 나아지고 있어서 다음 시즌에도 훌륭한 순위로 끝낼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열심히 영입하려고 했던 가레스 배리가 결국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을 해버리면서 베니테스 감독만 바보가 돼버렸다. 거기다가 팀의 플레이메이커 라고 할 수 있는 사비 알론소레알 마드리드 C.F.의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배리가 왔다면 알론소가 떠나도 상관없겠지만 배리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알론소의 이적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되는 입장. 하지만 09/10시즌부터 레알이 갈락티코 정책이 부활했다며 쇼미더머니(...)를 쳐대는 바람에 결국 알론소가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였다.(3000만 파운드) 대신 AS 로마에서 알베르토 아퀼라니를 영입했지만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퀼라니의 부상이 많다는 이유로 모두 의구심을 품었다. 리버풀 팬들은 아퀼라니의 포텐이 터지길 바랄 뿐이다. 문제는 2009년이 다 되어가도록 10분 이상 출전한 정규 경기가 한 번도 없다는 것. 이제 좀 뛰나 했더니 또 부상.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지만 부상 고치러 베오그라드까지 날아갔다면... 에라이 주급도둑아!

맨체스터 시티아스톤 빌라, 토트넘 핫스퍼 등의 팀의 약진과 사비 알론소의 부재로 힘든 시즌을 보내며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예선에서 광탈,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7위에 그쳤다. "You will never walk alone"이라는 전통의 문구는 "You will walk alone", "You'll never walk again" "You will never win again" 등으로 패러디되고 있는 상황이다. 안습. 그리고 이 와중에도 베니테스 감독은 여전히 "토레스만 있었으면..." 하고 있으니... 하지만 토레스/제라드 모두 복귀하고도 포츠머스에게 0:2로 패배하면서 계속 나락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패배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기 때문에 로또풀이라는 별명을 대신하여 예능풀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떠오르고 있다. 가령 골대 근처에서 팬이던진 풍선에 공이 맞고 골이 들어간다던지(...)

09-10시즌 리버풀의 진짜 문제는 수비라인이다. 시즌 첫 경기 토트넘전에서 선발로 나왔던 스크르텔과 캐러거 두 센터백이 서로 팀킬...을 해버리는 사고가 있었고, 이후 15경기가 넘도록 부상과 출장정지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폼을 갖춘 수비라인이 선발 라인업에 뜬 일이 없었다. 잊지말자. 언제나 리그든 토너먼트든 우승하는 팀은 수비가 탄탄하다.히피아도 없고 리세도 없고
그래도 토트넘, 에버튼 등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지긋지긋한 아퀼라니의 포텐이 드디어 터져서 각 경기당 한 도움을 꾸준히 주면서 이김으로서 토레스가 부상으로 빠지는 중이었음에도 다시 재기를 하나 싶었지만...아스날을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토레스가 복귀하고도 결국 강등권을 기어다니는 위건을 상대로 졌다. 게다가 그나마 될것같은 유로파마저 릴에게 얻어터지면서 슬슬 베니테스 감독 경질설이 부각되고있다.

그래도 아직은 토레스가 있어서인지 릴을 이기면서 유로파 통과는 해냈다. 하지만 맨유에게1-2 역전패하며 6위로 내려앉았다. 5위 맨시티와 7위 아스톤 빌라 보다 2경기, 4위 토트넘보다 1경기를 더 치룬 상태로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감독부터 4위권이 힘들어졌음을 인정했을 정도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는 중.
게다가 유로파리그 8강 1차전 벤피카 원정에서는 1:2로 역전패. 그래도 홈에서는 관광보내고 4강에 진출했다.

베니테스 감독은 내년의 팀의 리빌딩이 필요하다면서 많은 이적예산을 바라는데... 일단은 저 미국인 2명이 이적 자금을 그 정도로 많이 내줄 것같지는 않지만 회장도 당장 바뀌는데다가 구단이 인수되어가는 와중이라 모르는 일이다. 일단 베니테스 감독은 돈만 주어진다면 리버풀에 남겠다고 선언.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유벤투스가 베니테스 감독을 거액의 이적료가 있다면서 꼬드기고 있었다. 베니테스 감독은 물론 토레스나 마스체라노같은 주전 선수들도 노린다던데...

토레스가 시즌 아웃 선고를 받은 가운데, 월드컵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지자 리버풀 때문에 페르난도 토레스를 월드컵에서 볼 수 없다!라는 이유로 세계 축구팬들에게 까였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친 09/10 시즌이다(...) [5]

결국 첼시에게 홈에서 0-2로 완패하면서 4위진입은 실패했다.

09/10 시즌 마지막 경기. 모든 시선이 첼시 FC와 맨유로 쏠렸을때, 헐시티랑 비겼다. 결국 7위로 시즌 마무리. 풀럼이 UEFA컵 우승이라도 하면 우승자 진출권으로 인해 까딱하면 UEFA컵도 못나가게 생겼지만, 아틀레티코가 UEFA 우승을 하여서 못나가진 않게 되었다.

결국 이적예산이 영 시원찮았는지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과의 계약이 해지되었다. 이대로 중위권 팀이 될지 아니면 다시 뛰어난 감독이 와서 지난 시즌의 부진을 극복할지 주목받는 부분.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진을 보유하고 있다던 응원가는 허언만은 아니었다. 제라드야 제라드라지만, 알론소는 레알로 마스체라노는 바르샤로... 하지만 그 모든 스쿼드가 단 1시즌 만에 와르르 중원이 무너지고 팀이 무너지고

그리고 이후의 로이 호지슨-케니 달글리시-브렌던 로저스로 이어지는 콤보를 겪으면서 그나마 라파 법사라는 리버풀 팬덤의 반응이 강해졌다. 애초에 영국 내에서는 오래전부터 베니테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고.

3.3 로이 호지슨 시절

리버풀 FC/10-11시즌 참조.

3.4 케니 달글리시 감독 시절

리버풀 FC/10-11시즌
리버풀 FC/11-12시즌 참조.

3.5 브렌던 로저스 감독 시절

3.5.1 리버풀 FC/12-13시즌

팀 리빌딩은 미완, 팀컬러 변경은 어느 정도의 성공,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라는 다소 미적지근한 시즌 결과였다. 자세한 내용은 상단의 항목 참고.

3.5.2 리버풀 FC/13-14시즌

  • 13-14 최종 리그 기록 : 38경기 26승 6무 6패 (승점 84점, 준우승)

무려 4년만의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하면서 리버풀의 암흑기드디어 끝났다. 그러나 후반기까지 거의 닿아갈 듯 하던 리그 우승컵이 막판 허무하게 사라졌기에 아쉬움도 큰 시즌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3.5.3 리버풀 FC/14-15시즌

  • 14-15 최종 리그 기록 : 36경기 18승 8무 12패 (승점 62점, 6위)

암흑기를 마침과 동시에 암흑기 영웅이 떠나고(...)

챔스일정이 추가되었으므로, 새로운 수준사실상 B급 선수들의 영입으로 스쿼드의 두께를 두텁게 하였으나 멘탈갑이 떠나니 또 멘탈갑이 왔다! 113m의 영입으로 수비 문제, 수지의 공백을 만회하는가 했더니 대차게 말아먹고 챔스 진출권도 따지 못했다...안습

우승 가능성이 어느정도는 있었던 리그컵과 FA컵을 잇달아 말아먹고 챔스는 말할 것도 없으며 유로파에서마저 광탈했다. 로브렌 캐리 리그 또한 6위로 마치면서 챔스 재진출에 실패, 암흑기가 한 시즌만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게다가 리버풀의 살아있는 레전드 제라드의 고별전에서 6대1로 지는 것이 압권.

3.5.4 리버풀 FC/15-16시즌

8R 머지사이드 더비가 무승부로 끝나면서 로저스 감독은 경질.

3.6 위르겐 클롭 감독 시절

3.6.1 리버풀 FC/15-16시즌

로저스 감독이 경질 된 후 부임했기 때문에 선수단에 아무런 개편없이 시즌을 이어나갔다. 클롭은 그의 특유의 전술 게겐 프레싱을 구사하기 때문에 선수단 모두가 그에게 적응해야만 했다. 부임 초기에는 모양새가 갖춰지지 않고 어지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갈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EPL 순위 8위, 유로파리그 준우승, 리그 컵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얻게됐다. 시즌 중에 부임해서 이 정도 성적을 얻은 것은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팬들에게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3.6.2 리버풀 FC/16-17시즌

시즌 종료 후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브랜던 로저스 감독의 선수단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분데스에서 통했던 클롭의 알짜배기 영입이 EPL에서도 먹힐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나름 호평받고 있고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들이 많이 영입됐다.

4 역대 주장 목록

국적이름기간비고
30px앤드류 한나1892년-1895년최초의 주장
최초의 스코틀랜드 출신 주장
30px지미 로스1895년-1897년
30px존 매카트니1897년-1898년
30px해리 스토러1898년-1899년최초의 잉글랜드 출신 주장
30px알렉스 레이즈벡1899년-1909년
30px아서 고다드1909년-1912년
30px에브라임 롱워스1912년-1913년
30px해리 로우1913년-1915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리그 중지
30px도널드 맥킨리1919년-1920년
30px에브라임 롱워스1920년-1921년
30px도널드 맥킨리1921년-1928년
30px톰 브로밀로우1928년-1929년
30px제임스 잭슨 주니어1929년-1930년
30px톰 모리슨1930년-1931년
30px톰 브래드쇼1931년-1934년
30px톰 쿠퍼1934년-1939년
30px맷 버스비1939년-1940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리그 중지
30px윌리 페이건1945년-1947년
30px잭 발머1947년-1950년
30px필 테일러1950년-1953년
30px빌 존스1953년-1954년
30px로리 휴즈1954년-1955년
30px빌리 리델1955년-1958년
30px조니 휠러1958년-1959년
30px로니 모란1959년-1960년
30px딕 화이트1960년-1961년
30px론 예이츠1961년-1970년
30px토미 스미스1970년-1973년
30px엠린 휴즈1973년-1979년
30px필 톰슨1979년-1981년
30px그레이엄 수네스1982년-1984년
30px필 닐1984년-1985년
30px앨런 한센1985년-1988년
30px로니 웰란1988년-1989년최초의 아일랜드 출신 주장
최초의 영연방이 아닌 국가 출신 주장
30px앨런 한센1989년-1990년
30px로니 웰란1990년-1991년
30px스티브 니콜1990년-1991년
30px마크 라이트1991년-1993년
30px이안 러쉬1993년-1996년최초의 웨일스 출신 주장
30px존 반스1996년-1997년최초의 흑인계 주장
30px폴 인스1997년-1999년
30px제이미 레드냅1999년-2002년
30px사미 히피아2001년-2003년최초의 북유럽 출신 주장
최초의 비(非)브리튼 섬 - 아일랜드 섬 출신 주장
30px스티븐 제라드2003년-2015년가장 오랜기간 역임한 주장
30px조던 헨더슨2015년-현재

국적으로 따지자면 잉글랜드가 23명으로 가장 많고, 스코틀랜드가 15명, 나머지 아일랜드와 웨일스, 핀란드 1명씩이다.

5 역대 올해의 선수 목록

시즌이름국적포지션경기비고
01-02사미 히피아30px 핀란드수비수57경기5골
02-03대니 머피30px 잉글랜드미드필더55경기12골
03-04스티븐 제라드30px 잉글랜드미드필더47경기6골
04-05제이미 캐러거30px 잉글랜드수비수56경기0골
05-06스티븐 제라드30px 잉글랜드미드필더53경기23골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06-07스티븐 제라드30px 잉글랜드미드필더51경기11골
07-08페르난도 토레스30px 스페인공격수46경기33골
08-09스티븐 제라드30px 잉글랜드미드필더44경기24골FWA 올해의 축구선수상 수상
09-10페페 레이나30px 스페인골키퍼52경기17개 [6]
10-11루카스 레이바30px 브라질미드필더47경기1골
11-12마르틴 스크르텔30px 슬로바키아수비수45경기4골
12-13루이스 수아레즈30px 우루과이공격수44경기30골
13-14루이스 수아레즈30px 우루과이공격수37경기31골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상 수상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 수상
14-15필리페 쿠티뉴30px 브라질미드필더52경기8골
15-16필리페 쿠티뉴30px 브라질미드필더43경기12골
최다 수상자는 4회 수상한 스티븐 제라드이며, 그 뒤로 2회 수상한 루이스 수아레스, 필리페 쿠티뉴가 있다.
  1. 단, 1977년 유러피언컵 우승 장면 등 일부 장면은 저작권 문제로 업로더에 의해 편집되어 있으니 양해 바람.
  2. 헤이젤 참사로 인해 리버풀 외 영국 리그의 모든 팀이 5년간 출전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징계 후 리그 우승은 다름이 아니라 라이벌인 에버튼 FC(...) 이 출전 금지 때문에 유러피언컵 출전이 무산되면서 두 팀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3. 그 해 11월부터 울리에 단독 지휘
  4. 헬로윈의 키퍼 오브 더 세븐 키즈 파트 2 앨범에 You always walk alone이란 노래가 있다.
  5. 다행히도 토레스는 월드컵 전에 회복하여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결과는...
  6. 골키퍼라는 포지션 때문에 클린시트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