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통제

(부의에서 넘어옴)
청의 역대 황제
11대 덕종 광서제 자이티얀12대 공종 선통제 푸이황조 멸망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50대 바다라울트 투르 칸51대 휴브트 요스 칸52대 복드 칸
만주국의 역대 황제
황제 책봉초대 강덕제 아이신기오로 푸이황조 멸망
파일:Attachment/Xuantong.jpg
묘호헌종(憲宗)[1]
공종(恭宗)[2]
시호만주식추가바람
중국식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예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3]
한호[4]거훙거 요소 한
(: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ᠾᠠᠨ, Gehungge yoso Han)
칸호[5]휴브트 요스 칸
(: ᠧᠨᠺᠬ ᠠᠮᠭᠠᠯᠠᠨ ᠻᠠᠭᠠᠨ, Хэвт Ёс Khaan)
만주어아이신기오로 푸이
(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연호
(청)
만주어거훙거 요소
중국어선통(宣統)
몽골어-
연호
(만주국)
만주국 집정대동(大同)
만주국 황제강덕(康德)
생몰기간양력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6](62세)
재위기간
(청나라 황제)
양력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11일)[7]
재위기간
(만주국의 집정)
양력1932년 3월 9일 ~ 1934년 2월 28일 (1년 357일)
재위기간
(만주국 황제)
양력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5일 (11년 170일)

위의 사진은 1917년 장쉰의 복벽 사건 때 찍은 사진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통하여 그 드라마틱한 삶이 알려지며 유명해진 인물.

1 개요

신해혁명으로 축출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만주족의 마지막 황제[8]. 불과 우리나라 나이 3살에 즉위했다가 단 3년만에 퇴위했다. 즉, 그가 뭘 해볼 도리는 하나도 없었다. 성인이 되면서는 괴뢰국의 군주로 옹립되어 있다가 종전 후 전범으로 몰려 옥살이도 했다.
정복 왕조의 황제이지만 그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어서'라는 의미의 '일리'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청나라 황족이나 귀족 계급인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묘호2004년에 공종(恭宗)으로 결정되면서 비공식적으로 복위되었다. 중국에서는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왕조가 묘호 등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폐제로 인정되어 공식적으로는 황제 취급을 하지 않는다. 청나라 다음의 중국은 다들 아시다시피 공화국을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이었고, 당시 상황이 상황이였던 만큼 선통제의 묘호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자금성에 선통제를 살려두는 이유 자체가 청나라의 황제를 외국 황제로 둔다라는 명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시호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겸손할 혹은 사양할 손.(…)

한호(만주식 군주 칭호)는 거훙거 요소 한.

휘는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만주어 발음으로도 푸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도 푸이이다.[9][10]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푸이의 이복동생 푸런(溥任, 1918.8.17~2015.4.10)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 씨로 함께 바꾼 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연호는 만주식으로 거훙거 요소, 중국식으로 선통(宣統). 만주국 시대의 연호는 강덕(康德)

한때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경우도 있었지만 한 개인으로 보자면 거대한 제국의 황제에서 일개 정원사가 되어 자신이 살았던 자금성에서 근무하는 등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일생동안 신해혁명, 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2 생애

2.1 3살배기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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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순친왕과 선통제(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어린이)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1883년~1951년) 아이신기오로 짜이펑(愛新覺羅 載豊)의 아들로 태어났다. 흥미로운건 순친왕의 생몰년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도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 중화민국에 선양한 사실상의 주체였고, 만주국을 반대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도 협조했기에 대접받은 편이었다. 1924년까지는 사실상 자금성의 가장 웃어른으로 예식을 처리했고, 톈진으로 잠깐 옮겼다가 이후 쭉 베이징에 살았다. 이 때문에 일제에게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태후에 의해 3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서태후는 광서제 죽은 다음 날 급사했기 때문에 섭정은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효정경황후 예허나라씨(孝定景皇后 葉赫那拉氏)가 선통제가 집권하면서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되어 공동으로 맡았다. 여담으로 어린 나이인 그가 긴 즉위식을 지루해하며 칭얼거리자 그를 품에 안고 있던 순친왕이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청나라가 곧 망한다"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는데 그 말대로 그의 제위는 오래가지 못하고, 1911년신해혁명으로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푸이의 퇴위를 재촉하며 제시한 조건에 태후인 융유황후가 서명을 하는 것으로 폐위된다. 민심의 혼란을 우려한 것인지 한동안은 협약내용에 있던 대로 황제의 예우는 그대로 유지되었기에, 푸이는 궁전인 자금성 안에서만 청나라의 황제로써 지내게 된다.

2.2 복벽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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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시절의 푸이

1916년 2대 총통이자 사실상의 첫 권력자인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벌어진 베이양군벌(北洋軍閥, 북양군벌)들의 갈등으로 푸이의 운명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3대 총통인 리위안훙(黎元洪, 여원홍, 1864~1928년)에 반대한 장쉰복벽운동으로 1917년 7월 임시로 복위되었으나, 돤치루이(段棋瑞, 단기서, 1865~1936년)의 반격으로 얼마되지 않아 11일만에 물러났다. 1924년 베이양 군벌 간의 내전인 제2차 펑톈즈리전쟁(奉天直隷戰爭, 봉천직예전쟁)이 일어나자 공화주의자인 펑위샹(馮玉祥, 풍옥상, 1882~1948년)의 군대에 의해 그 때까지 살고 있던 자금성에서 쫓겨나고, 결국 푸이는 일본 공사관으로 대피하였다. 이를 핍궁사건이라 한다. 청나라 판 아관파천 이 인연(?)이 훗날 그의 만주국 황제 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결정으로 중국은 돤치루이, 장쭤린 류의 푸이 복위파와 폐위찬성파가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베이징 시민들은 폭죽을 쏘며 푸이의 추방을 기뻐했다고 하...는데 청실 복고론자였던 레지날드 존스턴은 중국 내부에서 군주정의 인기가 드높았다면서 이와 상충되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11] 이후 청 황릉이 장제스의 부하인 쑨뎬잉(손전영)에 의해 도굴당한 일과 협약이 지켜지지 않은 등의 중화민국 정부와의 마찰도 푸이가 일본의 손을 잡는 계기가 된 듯. 이 건에 대해 자세한 것은 # 이후 푸이는 장제스가 과거 북양정부와 청나라 황실이 맺었던 협약을 다시 이행하겠다고 그에게 제안했다. 다시 자금성에 살게 해주고 품위 유지비용을 대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푸이는 일본에 손을 내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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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망명시절의 푸이와 완룽 부처

2.3 괴뢰 황제에서 평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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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3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푸이

이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집정(執政, 최고 통치자)이 되었다가 1934년부터 황제가 되었다. 물론 철저한 일본의 꼭두각시였다. 한 예로 푸이 개인은 전통적인 청 황실 출신답게 불교를 숭상했음에도 일본의 강압으로 신토가 만주국의 공식 국교가 되었다. 다른 예로 도쿄에 가서 히로히토 덴노를 만났을 때는 날씨가 맑은 것도 덴노 덕분이라는 식의 찬양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의전상으로는 여하간 만주국은 일본의 가장 친한 우방으로서 의전 역시 일본 덴노 다음이었다. 일부의 묘사처럼 일제에게 아주 핍박을 당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하간 푸이는 꼭두각시였고, 그 역시 그런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실제로 푸이는 전범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사실을 그대로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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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황제(강덕제) 시절의 푸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에 따라 만주국도 사실상 붕괴하게 되자, 푸이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통화시 부근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을 해산했다. 흔히 이곳이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곳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와는 다른 곳이다. 후금이 세워질 때 수도인 허투알라는 랴오닝 성이고 통화시는 지린 성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가 누르하치의 조상인 건주위 여진족의 땅에 속할 뿐. 만주국을 억지로라도 청의 후신이라고 볼 경우 국조가 창건한 나라를 후손이 공식적으로 해산한 몇 안되는 경우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일본인도 만주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피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45년 8월 17일에는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전범 대우를 받았으며, 이후 1946년 도쿄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만주국 황제 때의 일을 증언한 뒤 1950년 중국으로 넘겨져 푸순 전범교도소에서 10년 동안 지내게 된다.

마오쩌둥의 특별 사면령으로 출소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시민이 되어 자금성의 정원사로 일했다. 이후엔 1964년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연구위원회'로 전출되어 자료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한 것. 물론 이는 청 황실의 새로운 계승자가 된 중국 공산당이 이전 황실을 우대함으로써 구 기득권층을 달래는 한편,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측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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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황조의 황제 마오쩌둥과 찍은 사진.

마지막 황제치고는 후한헌제오대십국시대 후주의 공제(북송태조 조광윤에게 양위)에 버금가는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신 정권들이 대체로 전시대의 지배층에게 매우 가혹했던 것을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다. 애초에 신 정권은 기존 정권의 독재정치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혁명에서 출범하였으니 당연히 주적으로 삼았던 기존 정권의 인사들에게 가혹할 수 밖에 없다. 러시아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혁명 이후 각각 차르 왕조 일가와 부르봉 왕조 일가가 숙청당했다.

사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은 청 황조가 망하고 바로 공산정권이 들어선게 아니고 청 황조 사후 이러저러한 혼란기를 거친 후에야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청 황조에 대한 민중의 원한이 다 씻길대로 씻겨나갔기 때문(더 정확히는 그간 청 황조보다 훨씬 더 나쁜 놈들 - 중국 공산정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이나 장제스 등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묻힌 것). 이를 대한민국과 비교하자면, 한국은 마찬가지로 일본이라는 훨씬 더 나쁜 적이 있기 때문에 해방 후 일제 관련인사들은 철퇴를 맞았지만 조선 왕조 가문은 숙청당하지 않고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선 왕실이 대한민국 건국 후 일제시대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은 잠시 잊도록 하자

심지어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덩샤오핑 등 공산당 출신 개국공신들이 모조리 토사구팽되던 것을 간주해 보면(영화 "마지막 황제"의 끝에서도 이것이 묘사되고 있다) 공산정권에 도움은커녕 존재 그 자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던 존재였음에도 그는 정말로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4 사망

하지만 그가 병으로 죽어갈 무렵은 문화대혁명 때라서 어수선했는데, 그가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 그를 반동이라고 하면서 계속 핍박하던 교도소 소장이 나중에 풀려난 푸이 앞에서 홍위병한테 끌려가서 반동분자, 수정주의자라고 쳐맞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교도소 소장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살았음에도 비참한 꼴이 된 소장을 동정한 푸이가 홍위병들에게 착한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말하지만 홍위병들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교도소장은 푸이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새 삶을 찾기를 바라며, 푸이를 무조건적으로 몰아붙이는 다른 정치국원들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영화상에서 좋은 인물이며, 홍위병으로부터 그를 변호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보인다. 또한 홍위병들이 교도소장을 고발하는 죄목은 제국주의자, 반동분자, 배신자인데 이는 바로 푸이가 과거 고발당한 죄목이다. 영화속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해당 죄목은 교도소장의 이러한 성향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병(신장암)으로 죽어갈 때 제대로 치료도 못받을 뻔 하다가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그의 집에 웬 여성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는 네놈이 만주국 허수아비 황제 시절에 궁녀였는데, 그때 너에게 강간당했다!!"면서 보상하라고 날뛰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홍위병 표식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그걸 본 진짜 홍위병이 오더니만 욕을 퍼부으면서 끌고가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패 죽였다고 한다. 당시 가짜 홍위병도 판쳤기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대놓고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진짜 홍위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나중에 다른 여성들이 찾아와 궁녀였다고 발악하며 돈을 요구해 돈을 받아가기도 했는데 다른 여자들이 몰려와서 우리도 돈을 내놓으라느니 난리를 부렸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름시름 앓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제대로 유언도 못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저우언라이의 배려 덕분인지 병상 위에선 나름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베이징의 인민납골당,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등을 전전하다가 1996년에야 사후 28년 만에 청 왕조의 두 능구 중 하나인 허베이성 이셴(易縣)의 청서릉(清西陵)[12]으로 이장하였다.

3 개인사

궁정시절에는 자금성의 부패한 내무부에 대해서 개혁을 시도했을 정도로 궁정 내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애쓰려고 했고 톈진 시절에는 씀씀이가 매우 헤프고 사치스러운 한량이었다고 한다. 하긴 청나라 황제에 올랐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고, 만주국에선 일본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사치 외에는 따로 할 것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을지도. 베트남 제국 마지막 황제이던 바오다이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평생을 5번 결혼하고 까지 포함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후손은 없었다. 특히 황후인 효각민황후 고불로씨(孝恪愍皇后 郭布羅氏)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효각민황후 고불로씨는 푸이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이름인 '완룽'으로 부른다. 풀네임은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 영어 이름은 엘리자베스(Elizabeth).

1935년 완룽이 완룽의 오빠의 음모로 일본 군관과의 사이에서 사생아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완룽이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 황후는 그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그와 다르게 아이는 완룽이 푸이의 운전사와 사통해 아이가 생긴 것이고, 그 사실을 일본군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선 완룽이 "당신을 위해서 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만주족이에요!"라고 하자 푸이는 일을 덮기 위해 "황후가 수태를 했소. 만주국의 후사가 생겼소."라고 둘러댔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1891~1945. 일본이 2차대전에서 참패하자 권총으로 머리를 날려 스스로 끝냈다.)는 "네. 여기에 아이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운전사의 이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푸이는 하얗게 질려서 완룽의 손을 뿌리치고 식당을 나가버리고 아마카스는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온 아시아는 일본의 영토다!라고 의기양양해한다. 그 결과로 황실의 명예를 위해 운전사는 총으로 슥삭.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의사가 주사로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 실제로 푸이가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인 사실은, 초판 자서전에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다.

완룽은 1946년 아편에 빠져 병사할 때까지도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완룽의 아이가 죽은 이유는 푸이의 질투뿐 아니라, 아이가 일본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까봐 죽여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황후와의 부부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는데, 황후의 정신병 등이 원인이었다. 아이를 두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제수가 되는 사가 히로는 푸이가 게이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했는데, 1962년 재혼한 부인 리수셴(李淑賢)은 게이설을 부정하고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푸이는 (현대)중국 최초의 공식 이혼남이다.

완룽은 거란족의 후예라는 설도 있는 몽골계의 소수민족인 다우르(達斡爾, Daur)족 출신이다.

또, 2번째 부인 숙비 어르더트씨(淑妃 額爾德特氏)가 유명하다. 숙비 어르더트씨는 몽골족 출신으로 풀네임은 어르더트 원슈(額爾德特 文繡). 완룽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원슈라고 부른다. 원슈는 중간에 푸이와 이혼하고 떠났다.

1살 터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제(愛新覺羅 溥傑; 우리식 발음으로는 부걸)는 일본 귀족인 사가 히로와 결혼하여 2녀를 두었다. <유전의 왕비, 최후의 황제>에서는 사가 히로와의 결혼으로 인해 푸이와 푸제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화해하고 사가 히로 또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푸이는 일본 여자와 결혼한 동생을 평생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이복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런(愛新覺羅 溥任)은 성을 진(金)씨로 바꾸었고, 현재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푸런의 아들 진위장(金毓嶂)은 자신의 다음대부터는 성을 다시 아이신기오로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푸런은 청나라 황실의 가장 마지막 생존자로 2015.4.10일 사망하였다.

한국의 박정희와 인연이 있다. 박정희가 1942년 3월 23일 만주국 소재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할 때, 만주국 황제 푸이가 우등상을 받은 박정희에게 금으로 된 시계를 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푸이는 졸업식에 참석하진 않아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다. 푸이와 박정희가 만났다는 소문이 있지만 푸이는 1기 졸업식만 참석했고 박정희가 졸업한 2기 졸업식은 참여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 치킨라멘이 먹고 싶었다고 사가 히로가 회고전에서 말하였다. 트리비아의 샘에서는 이걸 다루고, 제작진이 직접 선통제 무덤에 가서 치킨라멘을 조리해서 바쳤다.

4 대중매체에서의 선통제

영화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 1987)>는 그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 저술된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문판 제목은 <황제에서 시민으로(From Emperor to Citizen)>. 이 자서전은 중국 공산당 밑에서 교화 생활을 하던 중에 썼던 <나의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후덜덜한 제목의 자아비판서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영화는 배경이 중국이고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기하는(…)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카데미 작품상 상을 비롯한 9개상을 석권했고 세계적으로 흥행도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서 푸이 역을 열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존 론은 나중에 괴작 영화들에만 주연(...)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다크히어로 영화인 "셰도우"에서 칭기즈 칸의 마지막 후예인 쉬안 칸 역을, 러시아워2에서 최종보스로 나온다. 사실 이건 아시안 배우에게 악역, 조연만 시키는 헐리우드의 차별과 한계 탓이 컸다. [13] 꼭 인종문제, 정치문제 때문만이 아니어도 헐리우드는 애초에 막장 집단이다. 버터플라이 M 에선 여장남자로 나와 제레미 아이언스와 연기하는등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했지만 별 빛을 보지 못하고 이후로는 중국 쪽으로 아예 노선을 돌려 중국 사극 드라마에 주로 출연했다. 중국에서도 '마지막 황제' 이미지가 강한 탓에 주로 왕으로 나온다.

<마지막 황제>가 유행할때 KBS를 통해서 수입 방영한 <말대 황제>라는 중국 드라마는 전반적으로 선통제를 찌질한 양반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고 이 드라마를 본 분들은 꽤 충격을 받았는데, 어른이 된 푸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강희제국>에서 열연한 진도명이다. 이 드라마 후반부에 영국인으로 분장해서 한국전쟁을 참회하는 연극장면이 거의 그대로 나왔다. 진도명은 강희제, 장제스(!?), 진시황[14], 월왕 구천, 한고제 등의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성군 연기를 주로 하는데 이 작품에서 <강산풍우정>의 천계제와 함께 찌질한 암군역으로 활약한 작품이고 둘 다 잘 어울린다. 성군과 암군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

일본의 동인음악가인 BITPLANE(예전에 주로 process 2.3.1이라는 명의로 활동.)의 다른 뮤지션 명의중 하나가 선통제의 만주어 이름 한자가차를 딴 愛新覚羅溥儀였다. 딱히 연관성은 없어보인다.

  1. 1967년 대만에 있는 종친들이 올린 묘호.
  2. 2004년
  3. 1967년에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양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였던 것을 2004년에 고쳤다. 즉, 딱 한 글자(도울 양襄->근심할 민愍)가 바뀌었는데, 시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4. 만주식 군주 칭호
  5. 몽골식 군주 칭호
  6. 혹은 16일에 사망했다고도 한다.
  7. 정사복벽
  8. 엄밀히 말하자면 아니다. 위안스카이중화제국 참고(...) 근데 위안스카이는 마지막 한족 황제는 맞다
  9. 애초에 흔히 중국어로 알려진 베이징어가 만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0. 봉투에 쓰는 '부의'의 한자는 '賻儀'이다. 부수 하나 차이이다.
  11. 당시 남방과 북방의 분위기 자체도 다르고 시각도 워낙 치열하게 대립해서 상충되는 기록이 남아도 딱히 이상할 건 없을 듯... 사족으로 남방의 공화주의자들도 푸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둥 과격한 주장을 일삼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레지널드 존스턴은 만주국 건설조차 동방의 여명 운운하며 찬양할 정도로 좀 과도하게 군주정을 지지하는 감이 있다.
  12. 화룽황가묘역(華龍皇家陵園)의 부이묘. 별칭은 獻陵.
  13. 2016년인 지금도 아시안 배우들이 이 벽을 넘기는 힘들다. 오죽하면 스티븐 연목욕탕 친구코난 오브라이언에게 '아시아인이 잘한다'라는 인식이 여전하다고 말했을까.
  14.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과 중국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를 모두 맡아봤으니 중국에서 약 2000년 동안 이어진 황제 중심 중앙집권체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담당한 셈이다. 중국의 황제 중심 중앙집권체제는 진도명으로 시작해서 진도명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