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물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 대해서는 스티브 잡스(영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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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티븐 폴 잡스 (Steven Paul Jobs) |
국적 | 미국 |
출생 | 1955년 5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
사망 | 2011년 10월 5일 |
신체 | 188cm, O형(Rh-)[1] |
학력 | 리드대학교 철학과 중퇴 |
직업 | 기업인 |
배우자 | 로렌 파월 잡스 |
자녀 | 4명 |
종교 | 불교 |
서명 |
목차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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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애플의 기기로 표현한 잡스 |
21세기 혁신의 대명사이자 아이콘격인 인물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자 글로벌 IT기업 애플의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공동 창업주이자 전 CEO. 프로그래머.
세계 최고의 전자기기, 소프트웨어 회사 애플의 창립자이지만 그가 디지털 시대의 아이콘으로 평가 받는 것은 단순히 단순 성능을 끌어올린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로 인류의 삶을 진일보시킨 창의적인 제품을 만든 것에 있다. 맥킨토시를 통해 PC 열풍을 불러와 대부분의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되도록 개인PC 시대를 연 인물이면서 또한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이 보급되도록 하여 오늘 날 모바일 시대를 만든 인물이다. 일개 기업인이 창의적인 제품으로 인류의 삶을 두 번이나 바꾸며 21세기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러한 창의적인 제품 개발 뿐만 아니라 애플의 광고전략, 프레젠테이션까지 직접 진두진휘하면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마케팅 전략과 PT기술로 신제품 발표회를 대성공시키며 마케팅업계에선 신화적인 프레젠터이자 광고인으로도 유명하다. 마케터, 광고인이라면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연구하고, 공부안한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단순 기업인을 넘어 비범한 생각과 행보로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 정치학부 이민자로 후에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는 네바다 주에서 카지노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다 당시 잡스의 생모인 조앤 시블은 아버지의 반대로 잔달리와 헤어진 상태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입양보내려 했다. 이에 잡스는 친부모와 헤어져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된 불우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사나이.[2] 처음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빌 게이츠와는 좀 다르다. 이름도 양부모가 지어준 것.[3]
폴 잡스 부부는 양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키웠으나, [4] 어렸을 때 잡스는 부모 속을 많이 태우는 아이였다고 한다. 아버지 폴의 말에 따르면 스티브는 그렇게까지 천재성을 안보였다고 한다.
고아라고 아이들이 놀리는 바람에 아이들과 노는 대신 차고에서 안쓰는 부품을 모아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생부모는 정식으로 결혼, 소설가이기도 한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을 낳았는데,[5] 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으나, 만난 후에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친부모라는 작자들은 결혼한 후 몇 년 만에 또 이혼했다.(...)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증오하는데, 친모와는 만난적이 있지만 친부와는 끝내 만나지 않았고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만을 진짜 부모로 여기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친부모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외에도 패트리샤 잡스라는 여동생도 있다. 패트리샤 잡스는 폴 잡스 부부의 입양된 딸이지만, 모나 심슨을 만나게 되면서 패티와 관계는 멀어져버렸다고 스티브 잡스 전기에서 말한 바 있다.
잡스의 사업가 인생은 고등학교 때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별볼일 없고 꿈없이 살던 잡스는 갑자기 전자공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HP 社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다.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공부해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6] HP(휴렛 패커드)에 여름 인턴으로 채용된다. 그곳에서 애플을 같이 세운 동업자인 워즈니악을 만난다. 인턴이 끝나고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칼리지에 입학해 한 학기만에 전공이 맘에 들지 않고 대학생활에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중퇴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연설에 의하면 부모님의 저축을 몽땅 투자할만큼 자신의 대학 생활이 가치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였다. 잡스의 전공은 철학이었는데, 대학을 중퇴 후 많은 교양 수업을 청강한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나중에 UI용 글씨체를 디자인할 때 서예 강의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7] [8] 동양철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그 영향으로 종교는 불교. 1970년대에 불교의 선(禪)사상에 심취하여 '오토가와 고분(乙川弘文)'이라는 일본인 승려 밑에서 수행을 한 적도 있다.[9] [10] 한때는 자신도 스님이 될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심취했었으나 스승의 만류로 다행히(?)도 IT쪽의 길을 관철했다는 일화도 있다.
2.2 애플의 시작
젊었을 적 |
그 뒤 1년 정도 문학과 철학에 심취해 있다가, 우연한 기회로 아타리(게임회사)에 게임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퐁(Pong)과 같은 초기 비디오 게임에 빠져버린 잡스는 컴퓨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타리에서 또 1년도 못채우고(...) 사표를 낸다. 그 때 워즈니악은 아직 HP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운영하고 있던 '손수 컴퓨터 만들기 클럽'에 가입한 잡스(20세, 남, 무직)는 컴퓨터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 후 워즈니악과 잡스는 의기투합하여 직접 컴퓨터 제작에 착수, 1976년 애플 I이라는 PC역사상에 길이 남을 기종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롤아웃한다.[11] 비록 나무 케이스에 모니터조차 없는 투박한 플라스틱 기판과 실리콘칩 덩어리였지만, 꽤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꽤 많은 돈을 안겨주었다. 워즈니악의 아버지는 "왜 그 놀고먹는 백수(잡스)와 45:45로 나누느냐?!"라고 했다고 한다.[12]
처음 애플I을 개발했을 때 당연히 이것을 받아주려는 가게는 없었는데 이때 컴퓨터라는 것은 큰 회사나 대학, 정부기관에서만 쓰는게 일반 적이었고 PC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의도 돼있지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 잡스가 이것을 한 가게에 자신의 유창한 말빨(...)로 팔기로 구두계약을 하고 생산을 했는데... 애플 I의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모니터고 뭐도 없이 요즘으로 치면 컴퓨터 본체만있는 기기다. 당연히 모니터와 기타 입력장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주인은 당황하지만 대인배 적인 마인드로 그걸 그대로 판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다들 아는 바와 같이...뭐야 뭔데 말빨 영업의 전설 고 잡스옹
애플 I의 가격은 666.66달러였다(...). 혹자는 잡스와 워즈니악이 악마의 숫자 666을 좋아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숫자가 반복되는 게 멋져서 그랬다고(...). 혹시...이거?
사실 애플 I은 거의 '기판만 있는' 수준의 물건이라 케이스 등은 자작 해야 하므로 거의 요즘으로 보면 '기판 키트' 수준의 물건이었다. 대량 생산되지도 않았고 동네 상점에다가 영업망을 뚫어서 판매했다. 구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워즈니악만이 A/S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제대로 상업적으로 출시된 제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플 II, II+ 등 후속 모델들이 차례로 성공하면서 명성과 부를 얻게 되었다.
2.3 애플에서 쫓겨나다
하지만 애플 II, II+ 이후로 애플은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한다. 일단 애플 II는 코모도어 등의 경쟁을 받기 시작하며,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들지 않고 스티브 잡스의 개입이 심했던 애플 III는 망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애플 III가 망하자 잡스는 GU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리사 프로젝트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동시에 시작한다. 원래 잡스는 자기 딸의 이름까지 붙인 리사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가 리사팀에서 쫓겨나서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다.
이후 잡스는 자신을 쫓아낸 리사 프로젝트에 대한 경쟁심이 불타오른 나머지 매킨토시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하며 주 90시간 근무를 시키는 등 공돌이를 갈아넣기 시작하고 애플 II 팀, 리사 팀, 매킨토시 팀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매킨토시 팀이 애플 본사에 걸어놓은 해적기를 리사 팀이 뺏어가기도 하고, 매킨토시 팀이 "주 90시간 근무 야 신난다!" 라고 하자 리사 팀은 "주 70시간 근무했는데 매킨토시 보다 빨리 출시할 예정이다!" 라고 하고, 애플 II 팀은 "주 50시간 근무로 회사를 먹여살린다!"라며 서로를 디스하기도 했다(...).
또한 잡스가 회사에 "리사 팀은 정말 형편없는 팀이다. 그들은 회사에 도움이 안되는 팀이니 리사 팀을 해체시키고 매킨토시에 올인하자." 라고 주장한 사실이 리사 팀에게 전해지자 리사 완성에 오기가 생긴 리사 팀의 개발자들은 "리사가 출시되지 못하면 집단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가겠다." 고 선포하였다. 당시 막 들어온 존 스컬리는 애플 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잡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서 리사 팀을 매킨토시 팀에 병합시키려고 하였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리사 팀과 매킨토시 팀의 병합이 거론되자 연봉 문제가 터지는데, 당시 잡스의 의해 반강제로 1 ~ 2만 달러를 받으면서 주 90시간 노동을 하던 매킨토시 팀은 자신들보다 일도 덜하는 리사팀이 연봉은 5만달러나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잡스는 매킨토시 팀에게 보너스 제공을 약속하면서 잠재우는데 성공...했더니 이번에는 그들보다 적은 연봉으로 일하고 있었던 애플 II 팀이 들고 일어났다.
이 잡스가 몰고온 대형 폭풍은 잡스의 애플 내에서의 위치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이사진은 물론 갓 들어온 존 스컬리와 계속해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이에 스컬리를 쫓아내기로 결심한 잡스는 과감하게 이사회에서 투표를 걸었는데, 이미 위의 사건사고들로 인망도 잃을 대로 잃었고 실적도 부진했고 그러면서 친목질도 심각했기 때문에 그냥 졌다(...). 이리하여 1985년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중에 이 조치를 회사가 악의적으로 선량한 잡스를 내쫓은 것처럼 설명하는 곳이 많은데, 잡스 자신이 자초한 거다.[13] 당시의 잡스는 정말... 심했다.
이때에 투자처를 찾던 그는 그의 모교인 Homestead High School의 선생을 찾아 투자해주지 않겠냐는 질문을 했고, 당시 그의 성공 가능성을 그리 좋게 보지 않은 선생은 그러겠노라고 해놓고 정작 입금은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생은 후에 잡스가 성공한 사실에 땅을 치며 후회하며 아직도 선생노릇을 하고있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도 애정이 남아있는지 애플 사의 컴퓨터를 종종 보냈다고 카더라.
2.4 NeXTStep
쫓겨날 때 엔지니어 몇 명을 같이 데리고 나와 NeXT라는 회사를 차리고 NeXTStep이라는 이름의 차세대(그때 당시) 컴퓨터 개발에 매진했다. 이 때도 여러가지 기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완전 자동화 된 공장, 화장실이 하나만 있는 회사 빌딩 같은 것들.
그것의 일환으로 1986년에는 루카스필름에서 CG를 담당하고 있던 픽사를 인수했는데, 이때는 NeXT프로젝트의 일환으로써 인수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잡스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아버렸다.
잡스가 온갖 열정을 쏟았던 NeXT는 기술적으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장에서 참패한 반면, [14]픽사는 틴 토이라는 토이스토리의 원조격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어떻게 보면 안습.
결국 잡스는 결단을 내려 NeXT의 생산을 1993년 완전 중단했다. 하지만 NeXT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NeXT의 OS인 NeXTStep은 뒷날 애플에서 OS X과 결국 iOS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상 지금의 맥은 매킨토시 클래식보다는 NeXT의 후계에 더 가깝다.
2.5 픽사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픽사는 최초에 잡스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구입한 회사였다. 픽사는 당시 소프트웨어 개발팀과 그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기술데모 및 3D 애니메이션 외주를 맡던 창작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애초 잡스가 픽사를 인수한 이유는 오로지 자사 컴퓨터에 킬러 소프트로 탑재할 소프트웨어가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존 라세터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 스티브 잡스는 회사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창작팀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을 본 뒤, "누구 작품이냐?"고 묻고 대답을 듣자, 그 이후로 창작팀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픽사는 5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는데 당시 잡스의 다른 회사도 적자행진 중이었고 애플은 넥스트에 특허소송을 걸고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간섭하지 않아서 당시의 잡스를 "보기 드물게 관대한 투자자"로 묘사한다. 창작팀은 잡스가 전혀 간섭하지 않아서 아직도 이때 근무했던 픽사 창작팀 직원들은 스티브 잡스를 사장이라기 보다는 투자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회상한다.
이후 픽사가 3D 애니메이션 틴 토이를 발표하면서 영화제에서 시상을 하고 호평을 받게되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 자기 욕심을 버리고 3D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해주게 되었다. 잡스는 디즈니의 주식을 다량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디즈니에서 픽사 애니메이션을 스폰서하고 마케팅을 담당하도록 로비를 했고, 덕분에 1995년 개봉한 토이스토리는 대 히트를 기록한다. 그리고 토이스토리의 성공과 픽사 덕분에 잡스는 실패한 CEO의 대명사에서 차세대 전자산업의 리더로 다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잡스가 픽사의 상업적인 성공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기가 직접 경영방향을 정하고 컨트롤하려 한때는 픽사의 흑역사에 가까웠고 잡스에게도 큰 이익이 없었다. 도리어 프로젝트에서 한 발 빼고 자금과 스폰서줄을 잡아준 뒤 알아서 일하게 시켜놓자 대박을 거둔것. 이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겠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서 잡스가 꽤 많이 바뀐 것도 사실이다.
2012년 픽사는 헤드쿼터 빌딩을 새로 단장하면서 건물 이름을 "스티브 잡스 빌딩"으로 명명했다.
2.6 애플로 복귀
한편, 잡스도 없고 워즈니악도 없던 애플 사는 잡스 시절부터 계속되던 부진으로 인해 겨우겨우 연명만 하는 썩은 사과가 된 수준이었다가, 결국 1996년 NeXT사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경영컨설턴트로 불러들이는 길 아멜리오로서는 쪽팔린짓을 하고만다.(...)
잡스가 애플사에 돌아왔을 당시(1997) 애플은 무려 1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있었고, CEO인 길 아멜리오는 온갖 삽질을 반복하며 직원들과 이사회의 신뢰마저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아멜리오가 잡스를 복귀시키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빌 게이츠는 당장 애플로 달려가 아멜리오에게 잡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실수며 결국 당신은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이츠가 질투에 눈이 어두워 그랬다기 보단, 이미 잡스 본인 또한 경영악화로 애플에서 쫒겨난 위인인지라 실패한 전 경영자를 다시 불러 들이는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잡스는 어렵지 않게 경영권을 장악하고 아멜리오를 쫒아낼 수 있었다.
잡스는 복귀하고 게이츠와 쌍방간의 소송 취하 합의를 이끌어 내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소송을 합의로 마무리시킨다. 또, 애플은 잡스가 경영권을 잡은지 1년만에 4억 달러 흑자로 돌아서는 기적을 연출해낸다. 사실 기적이라고 하기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한데 아멜리오는 최대한 많은 제품을 개발하고 많은 사업에 손을 대는 방식의 경영을 하고 있었고, 이와 반대로 경영권을 잡은 잡스는 제품의 종류를 줄이고 꼭 필요한 사업을 제외한 기타 사업에서 손을 때며 동시에 직원 3000명을 해고했다. 물론 아멜리오가 바보도 아니고 말이야 쉽지 간단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이러한 구조조정은 애플의 수익성을 회복시키며 파산 직전에 몰려있던 애플을 간신히 살려놓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의 애플의 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제품은 1998년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반투명케이스의 일체형 컴퓨터인 iMac G3이었고, 그 디자인을 책임졌던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는 이후 애플의 디자인 부문을 이끌면서 뒤에 부사장의 지위까지 승진한다.
이후 애플의 호전된 경영 성과에 더해 픽사의 두번째 작품 벅스 라이프까지 대박을 터트리면서 잡스는 완전히 정상에 올라선다.
2.7 아이팟
아이팟 나노 1세대를 소개하는 잡스 |
그렇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01년 그는 아이팟을 세계시장에 선보였는데, 이 MP3플레이어는 아이튠즈와의 연동작전이 크게 성공하면서 아이리버 등의 제품들을 제치고 그야말로 대히트를 치게 된다. 노하우와 함께 경험도 경험이니만큼 전반적인 기술력 자체는 아이리버가 뛰어났으나, 터치 기술과 함께 디자인 등의 새로움으로 승리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인터넷 복돌문제로 신음하던 음악계에서 아이튠즈는 음악계와 일반인들 모두에게 큰 호응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서비스되었던 것이 크다. 당시 미국의 복돌이들은 돈을 안내는 것보다는 그저 편한 공유방식으로 인해 복돌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꿰뚫었다는 듯.
그리고 아이팟은 무려 1억대나 넘는 물량을 팔아치웠다. 아이튠즈는 아이팟에 넣을 수 있는 MP3음원을 판매하고 있으며, 1억 5000만 곡 이상의 노래를 매년 팔아치우고 있다.
그리고 2004년 애플의 CEO로 완전히 복귀했다. 2004년 제품 설명회에서의 CEO 취임 선언은 가히 충공깽#. 사실 잡스는 설립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애플의 CEO 직함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젊은 잡스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사회에서 그에게 CEO 자리를 맡기지 않았고, 자신도 CEO를 맡는 것을 원치 않아 했다고 한다. 이때서야 처음으로 애플의 CEO가 된 것이다.
이런 전성가도를 달리던 도중 잡스는 2004년 8월에 췌장암 시한부 선고라는 청천벽력을 맞게된다. 온갖 역경을 넘어 다시 우뚝 섰다 싶었던 잡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특히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암으로 애초부터 발생 자체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발견시기도 보통 늦기 마련이어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잡스의 췌장암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췌장암 중에서도 희귀한(약 1%) 섬세포암이었다. 잡스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동안 잘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되도않는 자연요법에 의지하다가 괜히 병을 키워서 결국 사망에 이른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암투병 문단 참조.
스탠퍼드 대학 졸업축사 중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진단을 받은 바로 그 날) "나는 목으로 내시경을 넣어 위와 창자를 거쳐 췌장의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약으로 잠든 상태였는데, 같이 있던 아내가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암은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췌장암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iMac 등의 출시로 데스크탑 시장에서도 착실하게 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OS X도 이번에 엘 캐피탄이 새로 출시되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매킨토시에 인텔의 CPU를 쓰고, 부트캠프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윈도우와의 호환성을 확보하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2.8 아이폰 출시와 스마트폰 혁명
2007년 6월 29일,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한다.스티브 잡스 아이폰 키노트 영상
Today, today, Apple reinvents the phone.(오늘, 바로 오늘, 애플은 휴대폰을 재발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아이폰의 소개를 시작한다. 이때 쓰인 프리젠테이션 기법이 유명한데, 스티브는 아이폰의 세 가지 핵심 컨셉(Revolutionary mobile phone, iPod with touch control, Breakthrough internet communicator)을 애플 특유의 어플 모양의 아이콘들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These are not three seperate devices. These are one device!(이것들은 분리된 세 가지 기기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기기에요!)"이었다. 아이폰이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휴대폰, mp3플레이어, 인터넷을 하나로 합친 편리하고 혁신적인 제품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테크닉이었다.
스티브가 프리젠테이션을 이어가면서 비난한 것은 기존의 "스마트폰"들의 세가지 점이었다. 첫번째는 플라스틱 버튼을 탑재해 가지고는 한계(어플마다 조금씩 다른 UI가 필요한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점, 출시이후 개선할 점이 생겨도 소비자를 일일이 찾아가 개선하지 못하는 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쓰는 방법을 익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고, 세번째는 그것들이 그닥 "스마트"하지 않다, 즉 기능이 미약하다는 점이었다. 각각에 대해 스티브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고 이는 결국 아이폰을 혁신적인 스마트폰으로 만들어버렸다.
첫번째는 멀티터치UI였다. 플라스틱 버튼이라고는 전면에 홈버튼 하나만 두고 모두 없앤 뒤 커다란 3.5인치짜리 디스플레이를 배치한다. 디스플레이에 터치패널을 장착해, 사용자가 디스플레이를 누름으로써 기기를 작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키보드를 디스플레이에 띄움으로써 플라스틱 쿼티 키보드를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하지만 실제로 스티브도 밝혔듯이 컴퓨터의 GUI를 휴대폰으로 가져오되 입력 장치를 마우스 대신 터치패널과 손가락으로 바꾼 것이다.
두번째는 어플 중심의 직관적인 UI이다. "메뉴->목록->항목" 방식에 익숙했던 기존의 휴대폰 UI와는 다르게 애플은 아이폰에 계산기면 계산기 어플을, 시계면 시계 어플을 하나 하나 만들어서 매우매우매우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구축했다.(사실 이것도 애플 입장에서는 83년도 부터 맥에서 쓰던 방식이다.)
세번째는 OS X을 아이폰에 도입한 것이다. 물론 모든 기능과 성능을 가져온 것은 아니고 휴대폰이라는 보다 제한된 사양에서 충분히 돌릴 수 있을 정도로 개량한 OS였다(스티브는 데스크톱 클래스라고 강조했지만...역시 위대한 상인). 그래도 그 정도만 해도 아이폰을 기존의 스마트폰들과 크게 차별화될 수 있게 하였다.
애플에서 아이폰을 발표하자 스티브의 PPT에서 신나게 까인 경쟁회사들은 한결같이 아이폰을 무시한다. 가장 빈번한 공격 포인트는 역시나 가격.
출시 이후 언제나 그렇듯이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격에 조금 불편해 했지만 그래도 전문가들이나 언론들의 예상보다 아이폰은 잘 팔렸다(구체적인 통계자료 추가바람.). 혹자에 의해서는 "스타트랙에서 뛰쳐나온 듯한 기기"라고 찬평을 받았다. 실제로 그 당시 다른 스마트폰들과 나란히 놓으면 상당히 외계인스러운 모습이다
아이폰은 이후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꾸었고 아이폰의 방식을 표방한 오픈소스 안드로이드의 등장으로 그 개념은 더욱 확산되었다. 지금 스마트폰이라고 나오는 대부분의 기기의 전반적인 컨셉은 아이폰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 거의 없다.
2.9 아이패드 출시
2.10 암투병과 사망
매일 매일이 마치 당신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십시오. 언젠가는 틀림없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 스티브 잡스, 2005년 6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2011년 1월 17일에 잡스가 스위스로 병가를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다시 그의 건강을 우려하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 또 병가, 이번에도…
췌장암 혹은 이의 후유증으로 추정되었으며, 그의 병가가 알려지자마자 애플 주가가 6.6% 급락, 시가총액 220억달러가 증발하는 현상이 일어나, 애플이 얼마나 잡스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 당시 인콰이어러지에서는 6주 시한부를 판정받게 되었다는 보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실리콘밸리 오찬에 참석하기로 하여 루머를 불식시켰다. 오바마 대통령과 미팅 예정 - ABC발 뉴스 [15]
그러던 중 2011년 3월 3일 아이패드2 발표회장에 강림, 루머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고, 잡스 시한부설로 위태위태하던 애플의 주가는 폭등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iOS 발표때 다시 등장했을 땐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왔으며, WWDC 2011 첫날, 오전 10시의 발표회에도 재등장하였는데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점점 시한부설이 루머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였다.
2011년 8월 25일, 결국 CEO직에서 사임한다고 밝히고, 대신 애플 이사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CEO 사임사 전문 그리고 불과 사임 두 달 뒤인 2011년 10월 5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 와우, 오 와우, 오 와우." #
이날 사람들은 한시대를 풍미했던 기업인이 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사후에 그가 대체의학에 의존하다가 치료시기를 놓쳐서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잡스는 2003년 10월 이미 췌장암 판정을 받았으나, 이듬해 3월까지 수술을 거부하고 정신수행, 식이요법과 침술 등으로 암을 고치려고 했다. 잡스는 몸에 칼을 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부인이 설득하고 난 뒤에야 겨우 수술을 받아들였다. 수술을 받아들은 뒤에도 자신의 병에 대해 치밀하게 공부한 뒤 치료법까지 지시하는 등 전문가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발견 당시에 췌장의 5%만 퍼져 있었던 암은 9개월 뒤에는 췌장 전체로 퍼졌고 수술을 한 뒤에도 전이가 계속되어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여담으로 맥의 시작음을 800% 느리게 한 영상에 "잡스가 승천할 때 들은 소리"라는 댓글이 많이 달려있다.(...)
3 경영 철학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로 유명하다.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 아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발표방식을 쓰면서 많은 발표자들의 귀감이 되고있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스티브 잡스는 철저한 제품 위주의 경영을 하였다. 제품이 중심이며,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게 애플의 신념인 것이다.
4 인간성 문제
잡스가 따분한 IT계의 인물인데다가 일반인들이 그다지 존경하기 쉽지 않은 기업가라는 측면에서 잡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독특한 일이다. 이것은 "서민 가정에 입양 - 특유의 기질로 성공 - 성격과 개인의 결함으로 나락으로 추락 - 전과 다른 면모로 화려하게 부활"이라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삶을 실제로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잡스는 인간성 안 좋기로 악명이 높았고,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서적을 보면 거의 반드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는 걸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잡스는 누구의 눈에나 띄일 정도로 대단한 아이는 아니었고, 어느정도 성장한 후에도 성격도 어른이 안 된 사춘기 소년 같았다. 그는 풍족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내심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려고, 서부에서 등록금이 비싸기로는 탑을 다투는 리드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경제적 부담을 이용해서 부모를 포기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도 부모가 희생해서 학비를 마련해 준다고 하자, 실용성하고는 담을 쌓은 철학과를 선택한다. 그래도 부모는 그를 대학에 보냈다. 자신의 의도가 좌절된 것이 너무 화가 나서 잡스는 대학으로 떠나올 때 인사는커녕 부모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16] 잡스 전기에 따르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한다. 또, 리드 대학 중퇴의 주 이유는 부모에게 가해질 경제적 압박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취직 이후엔 막장스런 행동을 제법 했는데 이후로도 오래도록 같이하게 되는 워즈니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아타리에서 일할적에 같이 게임용 기판을 개발했는데, 5천달러를 보너스로 받고서도 700달러밖에 못 벌었다고 속여서 그 절반인 350달러만 워즈니악에게 건네주었던 사례가 유명하다. 그나마도 잡스는 기판 제작을 잘 몰랐기 때문에 워즈니악이 일을 다했고, 4일뒤에 개인적으로 할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타리에서 빨리 끝내라고 했다며 워즈니악에게 거짓말한 뒤의 일이다. 워즈니악은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아타리 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실망했다고 한다. 절친한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이 정도였다...
애플로 인해 갑부가 된 이후 잡스는 이 경항이 더욱 심해져 돈많은 자아도취형 돌아이의 행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애플에서 나올당시, 옛 동거녀였던 크리스 앤이 딸 리사를 데려오자 잡스는 그 딸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월 500달러씩 주는데 그쳤다. 이때 "나는 무정자증이다."라면서 변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 일은 까들에게 두고두고 까인다. 그리고 이일에 대해서는 자기도 무지 쪽팔려하는 것 같다. 딸을 버려놓고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더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데 정작 당시 개발하고 있던 PC는 '리사'로 지었다. [17] '리사' 컴퓨터는 말아먹었지만(...).
(잡스의 딸 리사 브레넌. 1978년생이며, 하버드대 재학 시절 교내 신문에 투고한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신문, 잡지에 글을 쓰는 문필가로 활동중이다.)
잡스는 실패를 경험하고 많은 세상의 이치를 알게되면서, 안드로메다에 보냈던 개념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딸에게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잡스가 리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1991년에 로런과 결혼한 이후(리사 10대 이후)였고, 리사를 받게된 것도 리사의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키울 처지가 안되자 딸(리사)만 잡스의 회사에 남기고 떠나서 그런것이다. 비록 나중엔 딸을 키웠다고 할지라도 이런 잡스를 나쁘다면 나쁘지 좋은 아버지라고는 할 수 없다.
'또라이 제로 조직'이라는 책에 따르면 잡스는 같이 일하기에는 괴로운 상사였다고 이야기된다.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확실히 일은 굉장하게 해내지만 부하직원들한테 자신의 뜻이 잘 전달이 안되거나 자신의 뜻대로 일처리를 못했을 때 심하게 화를 내는 부류의 상사라고 한다. 일례로 애플 사에서 배달 운반용 차를 대량 구입했는데 이 차의 색깔이 애플사 건물의 색깔과 잘 매치되는 흰색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가 떼를 쓰는 바람에 회사가 상당한 금액을 다시 들여 차의 색깔을 모조리 그가 원하는 대로 바꿔 주었다고 한다. 픽사 인수 직후의 사례도 유명한데 직원들을 통보도 퇴직금도 없이 대량 해고시켰고, 갑작스런 해고는 곤란하니 2주의 유예기간을 주는게 어떻냐고 픽사측에서 애원하자 그럼 2주전에 통보했다고 생각하라며 무시했다.
이런 잡스의 막장행보에 관해서는 윌리엄 사이먼 저 'iCon' 아이콘?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워낙 신랄하게 비판한 터라, 기껏 MS와 대립각을 세워 정의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잡스로서는 대단히 화나는 일이었는지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잡지를 맥스토어에서 다 치워버렸다고.
앞서 좀 이용해먹은 것도 있고 해서 스티브 워즈니악과도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아직 잡스가 애플로 돌아오기 전 워즈니악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잡스에 대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잡스는 워즈니악이 애플의 주식을 부인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줄 때 극구 말렸다고 한다. 애플은 창업자의 것이 아니고 주주의 것이고, 주식이 없으면 애플에게 워즈니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연히 물욕이 별로 없고[18] 베풀어주기 좋아하는 워즈니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주식 대부분을 나눠주었고, 애플의 주식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팔아 써버렸다. 워즈니악과 잡스의 관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 폰의 성장세가 두드러지자 그 선봉에 서있는 HTC에게 멀티터치 지적재산권 분쟁도 걸었다. HTC의 뒤에 있는 구글과 한판 크게 붙을 기세.[19]
예전에는 유닉스의 그래픽 UI 등에도 지적재산권으로 분쟁을 걸려 했지만 썬 측에서 '님들 MAC OS 기본은 우리 유닉스에서 따왔심 ㅋㅋ'이라는 한 마디에 버로우를 탄 적도 있다.(여담으로 빌 게이츠도 오픈 오피스에 대해 재산권 분쟁을 걸려다가 윈도우 Java의 관련 기술에 대해 언급하자 버로우 탔다고 한다.)
외국 사이트 등을 둘러보면 소시오패스가 성공한 훌륭한 예라고 써있기도 한데 이 사람은 행동양식이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긴 했지만 정확한 진단은 받지 않아서 함부로 취급하긴 그렇다. 아직 소시오패스라는 병명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잡스의 뒤통수 치기 행각에 대해서 정리한 글이 있다. 극단적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만 담아놓은 이야기로, 잡스의 행각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가지게한다.#
1991년 잡스는 조지 부시 행정부에 의해 대통령 수출 위원회에 영입이 거론되고 있었다. 때문에 인사 검증 목적으로 FBI가 잡스의 뒷조사를 한적이 있다. 대부분의 지인들은 FBI와의 인터뷰에서 잡스를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이웃은 잡스에 대해 조용하고 잘난 척하지 않는 인물로 칭한 뒤 자신의 집 조경공사 때는 우리집에 찾아와 공사 때문에 문제가 없는지 물어볼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지인들은 애플의 성공 이후 그는 때때로 정직성과 통합적 사고능력을 잃거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기도 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참고로 애플의 성공이란 복귀 후를 말하는것이 아니고 젊을때의 첫번째 성공을 말한다. 이 당시는 NeXT 사장 시절. 결국 스티브 잡스는 결격 사유 없음으로 결론이 나서 대통령 수출위원회의 위원으로 공직에 봉사했다.
이 시기에 황야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성이 변화하였는데, 그 과도기적 사건이 바로 광포해서 픽사의 창립멤버 중 하나이자 부사장이었던 앨비 스미스의 이름을 아예 픽사의 기록에서 말살한 사건이다. 애초부터 그는 그냥 잡스와 안맞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잡스와 열렬한 회의나 논의를 하다보면 항상 둘 사이에는 고성이 오가고 서로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할정도로 맹렬히 싸웠다. 그래도 앨비는 하고싶은 소리를 다했고, 잡스도 앨비와 싸우면서도 앨비를 인정하고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러다 마지막 싸움에서 잡스는 앨비 흉내를 내며 조롱했고, 앨비는 절대로 타인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룰이 있었던 잡스 사무실의 화이트 보드에 마구 글을 썼다. 이 싸움 이후 앨비는 사표를 냈고, 잡스는 사과하면서 회사에 남아달라고 설득했지만 거절당했다. 앨비가 퇴사한 이후 앨비의 이름은 픽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이성적인 일에 이성을 잃고 광포한 것은 예전 잡스의 모습이지만 애초에 자신에게 대놓고 대드는 인물을 중요한 자리에 두고 그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싸움 후에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일은 이전의 잡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잡스는 본래 능력있는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탁월했지만 그 뭣같은 성격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못버티고 떠났다. 넥스트의 1992년에서 93년간의 1년동안 부사장급 9명 중 7명이 떠났을 정도. 하지만 이 시기에 인생의 암흑기를 겪으면서 잡스의 성격은 변화를 겪는다. 이때의 변화에 대해서는 뉴욕 타임스의 "스티브 잡스가 황야에서 배운것" #이라는 기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전 잡스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자신이 지시하고 부하가 뭐라든 듣지 않았다. 그러나 잡스는 드디어 부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이전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오로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잡스를 띄우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고 오로지 잡스를 위한 쇼였다. 하지만 복귀 이후 이런 모습은 없어지고 각 부분의 담당자들이 자기 파트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애플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디자인의 조너선 아이브, 관리의 팀 쿡, 소프트웨어의 크레이그 페더리기 정도는 알고있을 것이고,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협상의 에디 큐, 마케팅의 필 실러, 하드웨어의 밥 맨스필드라는 애플의 분야별 전문가들을 알고있을 것이다. 이전의 잡스라면 이런 인물들의 건의는 다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아주 사소한 것까지 간섭하고, 잘된 모든공은 자기가 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잡스의 독차지 때문에 사람들은 실무진들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 인간성의 결함이 다듬어진 잡스에게 드디어 능력있는 인물들을 붙잡아 두고 조화시키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잡스가 죽자 포스톨은 제어가 안되기 시작해 축출되었고 맨스필드는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변한점은 이전의 잡스는 뛰어난 인재를 집어내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기는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동안 사사건건 간섭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고집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는데, 고난을 겪고 복귀한 이후에는 "믿지 못하겠으면 일을 맡기지 말고, 일을 맡겼으면 믿으라."는 경구에 충실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복귀한 이후 나중에 iMac이 되는 애플의 컴퓨터 라인업인 프로젝트 C1의 마케팅을 잡스가 마케팅 전문회사에 일을 맡겼는데, 이들이 iMac이라는 이름을 뽑아낸 뒤에 잡스를 만나러 갔다. 거기서 잡스는 애플에서 C1에 멋진 제품명을 지었는데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한다. 잡스가 보여준 이름은 필 쉴러가 지은 MacMan...만약 이랬다면 아이북은 북맨, 아이팟은 팟맨, 아이튠즈는 튠즈맨, 아이폰은 폰맨(...), 아이패드는 패드맨...[20]
잡스는 이들에게 맥맨이 애플의 마케팅 부사장 필 실러의 아이디어라고 밝혀주었다. C1 마케팅을 맡은 마케팅 전문회사의 켄 시걸은 맥맨은 부적합하다 아이맥이 낫다고 말했지만 잡스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면서 다음 미팅까지 맥맨을 능가하는 다른 이름을 지어오지 않으면 맥맨으로 하겠다고 한다. 두번째 미팅에서 잡스는 새로 마케팅 회사가 뽑아온 이름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여전히 맥맨이 좋다고 하자 켄 시걸은 다시 아이맥을 제안했다. 잡스는 아이맥이란 이름이 싫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며 맥맨이 낫다고 말한다. 두번째 미팅 다음 날 잡스는 아이맥으로 결정 하자고 한다. 나중에 애플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잡스는 아이맥이라는 이름이 어떤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고, 실제로 실크스크린으로 iMac을 C1에 프린트한 뒤 한동안 들여다 보기도 한 뒤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로서 iDevice가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고집불통 잡스였다면 스스로 뽑은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맥맨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고, 아이팟은 팟맨, 아이폰은 폰맨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황야에서 고행을 마치고 돌아온 잡스는 그 못된 버릇을 고친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인격적인 면에서의 문제를 많이 고친 건 아니어서 이후로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죽기 직전까지 항상 장애인 주차구역에 차를 대곤 했으며 딱지를 떼기 싫다며 차에는 번호판도 안달고 다녔다. 법적으로 차 구입 후 6개월 안에 번호판을 달아야하는데 그걸 싫어해서 6개월마다 차를 새로 샀던 것. 고집을 좀 꺾었다고는 해도 결국 그는 암을 치료하자는 의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대체의학을 고집하다 사망에 이르게 된다.
5 여담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업가'지 절대 '개발자'가 아니다.
근데 엑스박스를 구원한 거대 프랜차이즈를 바라보는 안목이 없었던걸 보면 게임업계와는 그닥 인연이 없었던걸지도 모른다.물론 IT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는 (뛰어난)경영자임은 사실인데 위의 FBI 보고서에는 '그런데 기술 부분에서는 좀 거시기...'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가 이룬 업적은 결코 무시할수 없다. 입양아, 문제아, 명문대학도 아니고 그저 대학중퇴자인 그가 21세기 IT시장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그의 삶 자체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희망을 준다.
- 위에도 언급한 저 네 조합의 패션. 그는 언제나 검은 쭉티에 리바이스 501,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그의 옷장에도 잠옷과 이 옷만 있었다고.
속옷은?잡스의 공식전기에 언급된바에 따르면 검은 쭉티는 잡스가 협력관계에 있는 일본 소니공장을 방문했다가 직원들이 전용 유니폼을 차려 입은게 멋있게 보여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소니쪽 관계자에게 물어서 일본의 디자이너 미야케 잇세이에게 의뢰하여 유니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은 잡스는 즉시 그에게 전화를 넣어 애플 직원용 유니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나중에 미야케가 보내준 견본중 잡스가 선택한게 검은 쭉티였다고.[23] 재미있는건 이 쭉티를 애플직원들에게 소개했더니 야유만 엄청 먹어서 직원용 유니폼으로 쓰려는 생각은 접었고, 자신의 전용 유니폼으로 쓰면 되겠지하고 몇벌만 주문했는데, 미야케가 100벌 넘게 보내줘서(....) 반품하거나 버릴 수 없어 그냥 집 옷장에 쌓아뒀다가 맨날 입게 되었다고 한다.
-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연설 중 일부.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통념, 즉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잡스의 이 스탠퍼드 대학 연설은 아직까지도 명연설로 꼽히며 유튜브 조회수 2천만건을 돌파했다.#
- 연봉 1달러 CEO로 유명하다.[24] 대신 주식(애플, 그리고 디즈니)이 있으니까. 애플, 디즈니 주식을 반 정도 매각해 약 5억달러의 이익을 얻었다. 게다가 추가적인 옵션까지...
- 아이폰 4의 수신률 불량 문제(왼쪽 하단을 잡으면 수신율이 현저히 떨어짐)에 대해, 개인 이메일로 "그렇게 안잡으면 될 거 아니냐." 라고 대답한게 밝혀졌다. 링크 개인 이메일이라면 시니컬한 성격의 잡스니 봐줄 만하겠지만, 문제는 저게 아이폰 문제에 대한 애플의 공식 입장임이 드러났다. 제안한 해결책이 그렇게 잡지 말든가, 범퍼 악세서리 사세요. 덕분에 여러 군데에서 신나게 까이고 있다. 그리고 모두의 우려대로 범퍼 무료제공으로 대충 때웠다.[25]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나오는 내용으로는 이런 성의없는 대응이 아이폰 4의 결함이 언론에서 과장된 바와 다르게 큰 문제가 아닌듯 보이기 위한 '계획된 대응'이었고, 결과적으로 아이폰 4는 전작의 절반에 불과한 환불률을 보였다.
- 젊었을 때는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가서는 은행장의 넥타이가 촌스럽다고 솔직히(...) 말한다든가, 프랑스 대통령 주최의 오찬에 참석해서는 느끼한 프랑스 요리 말고 이탈리아 요리는 없습니까? 지난 주에 이탈리아에 가서 먹었더니 참 맛있던데. 하고 미테랑 대통령께 직접 요청하거나 하는 용자의 기질도 가지고있었다고 한다.[26]
- 사실 대학시절부터 이미 공짜로 장거리 전화를 거는 기계장치[27]인 블루박스를 제조해서 팔아먹었고,[28] 심지어는 그걸 가지고 로마 교황한테 공짜 장난전화를 거는 용자짓도 한 바 있다.
국내 단위로 해도 코렁탕 먹을짓을 국제 레벨로 벌이다니하지만 정확히는 스티브 워즈니악의 작품이다. 심지어 교황한테 장난 전화 에피소드도 스티브 워즈니악의 유쾌한 장난 가운데 하나였다. 교황한테 전화는 걸었으나 시차로 인해 새벽 5시이기 때문에 교황이 잠자고 있다고 대답이 왔다고. 모스크바 국제회담을 들먹거리며 목소리를 흉내내 가면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둘은 그때까진 절친이었고 파트너였다.
- 자가용으로 애용한 벤츠에 번호판이 없는채로 다닌것도 유명한 일화다. 국내에서는 이 이야기에 불법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지만 사실은 캘리포니아 교통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것이라는 워즈니악의 증언이 있다.# 이에 캘리포니아 교통당국은 따로 특혜를 주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방법은 전기에서 밝혀졌는데, 새 차를 인도받고 6개월이 지나기전에만 번호판을 달면 되는 캘리포니아법에 따라 6개월마다 새 차를 리스했다고 한다. 벤츠 SL55 AMG 차종을, 그것도 늘 똑같은 은색 차종을 6개월마다 새로 리스했기에, 합법적으로 번호판을 달지 않은 벤츠를 몰 수 있었다!
Think Different
- 또 애플의 주차장 중에서 장애인 구역에 차를 대곤 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워즈니악에 의하면 애플 주차장에 세워둔 잡스의 벤츠가 털린적이 있어서(…) 사무실 창문에서 잘 보이는 곳에 차를 대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애플 직원들은 차에 Park Different라 써진 쪽지를 붙여놓는것으로 대응(...). [29]
- 애플의 성공신화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는 사장님들이 잡스를 성공지표로 삼고 "자네 잡스라고 아나? 스티브 잡스. 걔가 어떻게 성공했냐 하면 말야." 라고 운을 떼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붐이 일기도 했다. PC잡지 마이컴이나 컴퓨터 학습을 통해서 탈모 이전의 잡스부터 리얼타임으로 지켜봐온 한국 컴덕후들 입장에서는 무척 짜증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정직하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때부터 분위기 싸늘해지니 어른의 사정으로 그냥 적당히 때우고 자리를 피하는것이 상책이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한국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1983년 11월 당시 삼성 이병철 전 회장과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회동을 가진적이 있었다고. 이 당시 이병철 회장은 잡스를 만난후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승친구
- 또 잡스는 삼성전자의 매장에 매킨토시를 전시할 것을 제안했지만 당시 삼성은 PC보다는 반도체에 더 관심이 있던 상황이라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이때 삼성이 이 제안을 승낙했으면 지금 대한민국의 IT시장이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잡스 복귀 후 애플이 아이팟을 출시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애플은 삼성과 좋은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30]
6 스티브 잡스 전기
사망 직후 전세계에서 목빠지게 기다리던 스티브 잡스의 공식[31] 전기가 출간되었다. 책 자체는 2011년 11월 21일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잡스 본인의 사망으로 인하여 집필 속도에 불이 붙음에 따라 한달이나 이른 2011년 10월 25일 전세계에 동시에 출간됐다. [32] 제목은 Steve Jobs. 월터 아이작슨이 집필했으며, 이 작업을 위해 잡스 자신과 가족,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모든 접근 권한을 얻었다고. 출판도 안 된 상황에서 국내외 베스트 셀러에 올랐었다. 결국 출간 하루만에 가뿐히 1만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윌터 아이작슨이 집필한 자신의 전기에 대해 "내가 맘에 안 들 법한 얘기도 있겠지요?" 라는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에, 아이작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스는 알았다고 한 뒤 "열받고 싶지 않으니 지금은 읽지 않겠습니다. 한 1년 뒤에 읽어보지요.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다면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두 달 좀 안되어 잡스가 사망했기에 이 말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아이작슨에 의하면, 아직 미공개 신제품에 대한 이야기 등 애플의 전략 사정으로 올리지 못한 내용이 많으며, 이는 나중에 재발간으로 보태겠다고 밝혔다.[33] 이 내용중에 계속 떡밥이 나오는 새로운 TV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은근 많다.
2015년 아이패드 프로의 발매로 스티브 잡스의 스타일러스 혐오가 주목받자 일부 극성 애플 팬들이 "스티브 잡스의 스타일러스 발언은 아이패드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공식 전기에는 스티브 잡스가 태블릿에 스타일러스를 넣는 것을 혐오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다. 그토록 숭배한다는 잡스의 전기도 안 읽어본 애플빠들
그리고 현 CEO는 애플 펜슬이 스타일러스가 아니라 펜슬, 즉 연필이라고 반박했다.#종이에 안써지는데? 분명 아이패드 프로에 펜슬을 쓰는 모습을 보면 잡스도 기뻐할 거라고.
잡스는 다음과같이 회상한다. 그사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태블릿 PC소프트웨어로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라고, 그래서 노트북 컴퓨터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니 애플은 자신이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에 대해 라이선스를 얻어야 한다고 계속 나를 괴롭혔지요. 하지만 그의 기기는 완전히 잘못된 방식을 쓰고 있었어요. 스타일러스가 딸려 있었거든요. 스타일러스가 있으면 끝이에요. 그날 저녁 그 사람은 나한테 그얘기를 열 번쯤 했을 겁니다. 나는 지긋지긋해져서 집에 돌아와 이렇게 말했지요. "웃기고 있네. 진짜 태블릿이 어떤 건지 보여주지." 다음날 잡스는 회사에 출근해 자신의 팀을 모아 놓고 말했다. "태블릿 컴퓨터를 만듭시다. 단, 키보드나 스타일러스가 딸려 있어선 안됩니다."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터치해 입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민음사, 2011. 738p 인용
2002년 잡스는 자신이 개발한 태블릿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것은 스타일러스나 펜을 써서 스크린에 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그 해에 몇몇 제조업자들이 그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태블릿 PC를 출시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우주에 흔적을 남기진 못했다. 잡스는 PC의 올바른 표본을(스타일러스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출처 :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민음사, 2011. 773p 인용
7 그가 남긴 것
Stay hungry, Stay foolish.
- 2005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맨 마지막에 사용한 인용구. 이는 잡스가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Whole Earth Catalog의 1974년 판에 씌여있던 말이다. 잡스가 생전에 인용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34]
스티브 잡스는 단순히 능력있는 CEO를 넘어 IT계를 주도한 인물이었고 또한 실적이 부진하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회사들을 뛰어난 창의력과 적극성으로 기업가치를 크게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곤경과 실패, 그리고 몰락 역시 경험했으나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정도로 화려하게 재기했다는 점에 있어서 본보기가 될만한 케이스. 암이 아니었다면 그의 열정과 성취욕으로 볼 때 노년까지 일선에서 왕성히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렌드를 창조하고 자사 제품을 새로운 메인스트림의 정점에 올려 놓는 데에 성공함으로서 그의 탁월한 안목을 여러번 증명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마우스, GUI, 컴퓨터 그래픽스, MP3 플레이어와 앱스토어, 터치 스크린 핸드폰, 태블릿 PC 등은 물론 그만의 발명품이나 유물은 아니지만, 이들의 상용화와 보편화를 가속화시키고 인지도를 대폭 높이는 데에 잡스가 크고 작은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2007년 등장한 아이폰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쉬운 인터페이스와 파격적인 디자인은 전세계 휴대폰 사용자들을 매료시켰고, 이후 출시된 대부분의 스마트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연 아이폰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삼성이 갤럭시 시리즈를 만들었을까? 핵폐기물은 나왔을 듯.
한편 그는 새로운 기기들의 단순함과 조작의 편리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적이고 참신한 디자인을 선보여, 출시된 제품들을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하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또한 이미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 후발 주자로 뛰어들어서 단시간 내에 강한 입지를 구축하고 선구적인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던 것을 보면 그의 사업 능력이 상당히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애플이나 자기 자신의 이미지 관리와 활용에도 능숙했으며, 20세기와 21세기의 IT시장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선 많은 아쉬움과 실망감이 있으나 그의 존재감과 안목, 기획력과 실행력은 독보적이었던 만큼 잡스를 역사의 저 너머로 보낸 애플이 어떤 행보를 보일 지가 주목된다.
애플 측 공식 반응.
애플은 한명의 비전과 창의성을 함께 지녔던 천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정말 놀라웠던 한사람을 잃었습니다. 스티브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던 저희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늘 영감을 주는 멘토였던 그를 잃었습니다. 이제 스티브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회사를 남기고 떠났으며, 그의 정신은 애플의 근간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
애플 이사회 공식 반응.
스티브의 명석함과 열정, 에너지는 우리 세계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끝없는 혁신의 근원이었다. 세계는 스티브 덕분에 진보했다.
7.1 찬사
빌 게이츠와 함께 디지털 문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세상을 바꾸고 간 남자인류의 삶을 진일보 시킨 위대한 크리에이터이자 혁신의 아이콘.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창업주이자 경영자
마케팅계의 전설적인 프리젠터이자 마케터
[1] 유명 코미디언 빌 버가 스티븐 잡스 사후 몇 주 후에 했던 코미디
8 매체
현재 스티브 잡스를 다룬 영화는 두편이 존재한다. 애쉬튼 커쳐가 주연한 《잡스》(Jobs)는 조슈아 마이클 슈턴이라는 주로 인디영화를 찍었던 경력의 감독이 찍는 영화며 전기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2002년까지의 이야기만 다룬다. 처음에는 독립영화였으나 커처의 미칠듯한 싱크로율 덕분인지 애플사에서도 간간히 도움을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 공개되는것이 확정되었다.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Cj2T&imgurl=http://cfile212.uf.daum.net/original/03606B4F50BED7E02710D9
《잡스》의 한국개봉은 8월 29일로 확정되었다.
팀 쿡의 잡스 코스프레
이와는 별개로 할리우드의 명망있는 각본가인 에런 소킨이 각본을 쓰고, 대니 보일이 감독을 맡게 된 마이클 패스밴더의 주연영화 소니 픽처스의 《스티브 잡스》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야말로 스티브 잡스 전기에 기반한 영화며 스티브 워즈니악이 자문을 맡고 있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잡스의 전기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잡스 역에 확정된 배우는 크리스천 베일이었는데, 얼마 안 돼 베일이 하차하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잡스 역을 맡아 2015년 초에 촬영에 들어갔다. 역시 캐스팅 문제와 이로인한 제작 지연에 계속 시달린 소니도 프로젝트를 포기했고, 이어 유니버설 픽처스가 배급을 맡기로 결정했다. 북미에서 2015년 10월 9일에 개봉했다. 북미에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 있는 단 4개의 극장에서만 개봉했는데 한 개관당 평균 13만 381달러를 벌어들이며 주말 3일 동안 52만 1522달러를 벌었는데 박스오피스 16위로 데뷔하며 심상치 않은 대박의 기운을 풍겼다. 한국에서는 2016년 1월에 개봉. 이야기는 1998년 첫 아이맥까지의 세가지 제품 발표를 중심으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티브 잡스(영화) 문서 참고.
위에 논의된 영화들은 둘다 잡스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후 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1999년작 《실리콘밸리의 해적들》(Pirates of Silicon Valley)은 잡스가 아직 자체 후광을 두르고 과거 세탁을 거친 후 IT계통의 성인으로 올라서기 전이어서 그런지 제법 정직하게 만들어져 있다. 실제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잡스와 게이츠가 서로 나쁜놈이라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 가끔 대한민국 케이블 TV에서 해준다.
문명 5 확장팩 신과 왕에서는 위인 계열 유닛으로 나오는데, 위대한 상인이다. 절대 위대한 기술자나 과학자가 아니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는 항상 강매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호머 심슨은 물론이고, 리사 심슨과 신도 절절맨다(...)
드라마 《닥터후》에서는 사후세계 네더스피어에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저승인데 아이패드가 있냐고 묻자 스티브 잡스도 여기 있는데 뭐 이상할 게 있냐는 식으로 말한 것. 근데 이 네더스피어는 사실… [35]
만화 《세인트 영멘》에서는 천국에 온 후로 영혼 입국 시스템을 파격적으로 뜯어고쳐놔서 접수담당인 12제자들이 여러가지로 한가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잡스는 불교신자다
- ↑ 유튜브 "더보기" 14번째 줄 Steve jobs was blood type "O"
- ↑ 대학원생이었던 잡스의 친모는 잡스 부부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 입양을 거부하려 했으나 잡스 부부가 무슨일이 있어도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양에 동의했다.
- ↑ 우연인지는 몰라도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동갑이다. 하지만 2월생인 스티브 잡스가 10월생인 빌 게이츠보다 한학년 위였다.우연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와 빌게이츠가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IT 시대의 새로운 변화를 20대에 맞이 할수 있는 그런 황금같은 몇 안되는 시기였다.
- ↑ 스티브가 어렸을 때 양어머니는 잡스를 수영교실에 보내기 위해 가정부 일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열심히 키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잡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는 식으로 지극정성으로 키운 나머지 조금 버릇이 엉망이 되어버린 듯...인데 이처럼 대성한 것을 보면 아예 '버릇을 들일 것'이 아니라 그냥 원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듯 하기도 하고...
- ↑ 참고로 모나 심슨의 전 남편이 심슨 가족의 작가중 한명인 리처드 어펠인데, 호머 심슨의 어머니 이름을 아내 이름에서 가져다가 쓴것으로 유명하다.
- ↑ FBI의 보고서에 따르면 잡스의 고등학교 시절 최종 GPA학점은 4점 만점에 2.65 로 그닥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GPA 학점이 역량으로 직결되는건 아니라는 가장 유명한 사례.
- ↑ 하지만 현대 타이포그래피는 독자적으로 과학적인 이론을 거쳐 발전했으로 동양의 서예 기술과는 거의 무관계하다. 허풍일 가능성이 높다.
- ↑ 만약 기술이나 이론과는 관계없이 보기 좋게 쓰여진 글자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거라면 무관계하다고만 볼 수 없다.
- ↑ 아이폰이 원버튼 & 손가락터치의 직관적인 조작성을 고집한 이유도 잡스가 수행했던 선사상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 ↑ 오토가와 고분은 스티브 잡스에게 있어서 인생의 스승중 한명이라 할만한 인물로 스티브 잡스의 NEXT 社에 종교지도자로 영입되어 일하기도했고 잡스의 결혼식의 축사도 맡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여담으로 오토가와 고분은 2002년에 스위스에서 여행도중 연못에 빠진 여자아이를 구출하려다가 익사했는데 향년 64세였다.
- ↑ 근데 워즈니악은 자서전에 Apple I, Apple II 할 것 없이 스티브(잡스)가 한 건 아무것도 없고 내가 혼자 만들었다라고 적어뒀다. (그리고 사실이다.)
- ↑ 그런데 이것은 잡스가 영업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업직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쪽 일이 원래 사람 만나서 밥먹고 커피먹고 하는 것이 일이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그만큼 인간관계가 영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 ↑ 잡스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해고하기 위해선 이사회의 결정이 필요한데,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이사회가 왜 잡스를 잘랐겠는가? 이익은 커녕 손해만 내는 짓을 하고 있어서다. 물론 잡스의 독선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성격도 한몫했지만.
- ↑ NeXT는 애플과의 계약으로 대중적인 PC(개인용 컴퓨터)를 판매하지 못했고 잡스 개인의 목표로 비교적 비싼 개인용 워크스테이션을 판매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개인에게 그런 기기는 별로 필요없었고 실패했다. 애플의 정통 데스크탑 라인인 파워 맥과 인텔로 넘어와서의 맥 프로가 이 개인용 워크스테이션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 ↑ 사망후 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인콰이어러의 6주 시한부는 루머였지만, 실제로 2월에 자신이 오래 살 수 없음을 알게되었고 그때부터 지인들을 만나며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 미국에서는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동등한 관계에서도 모욕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어른이랑 대화할때 눈마주치는 습관이 없는 동양계 유학생들은 죽어나간다. - ↑ 리사는 1978년생. 그리고 리사 컴퓨터는 1978년에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추가적으로 나온 거에 따르면 "Local Integrated Software Architecture"의 약자는 Lisa에 끼워맞췄다고 한다. 물론 이름 자체는 딸인 리사가 맞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 ↑ 어느 정도냐 하면 워즈니악은 초반에 잡스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잡스가 그걸 개인적으로 써버리지 않고 다시 회사에 썼기 때문에 그냥 넘겼다고 한다.
- ↑ 2011년 7월 판결에서는 HTC의 손을 들어주어 역관광#(알겠지만, S3은 HTC계열사)이 되나 싶었으나 동년 11월 22일 판결에서는 다시 뒤집혀서 애플의 완승.
- ↑ 잡스는 골수 소니빠였기 때문에 이 명칭이 소니의 히트작 워크맨에서 따왔다고 오해하기 쉽상이나 맥맨이라는 이름을 지은것은 다시 말하지만 필 쉴러였다. 물론 시걸이 잡스에게 맥맨은 소니 제품의 뉘앙스와 여러가지 이유로 좋지 않다고 말하자 잡스 자신은 맥맨이 맘에 든다며 고집을 부렸다. 최종적으로 아이맥으로 결정하기 전까진 고집을 꺾지 않았으나 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꺾은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일화. #
- ↑ 잡스가 프레젠테이션 때 자주 사용한 문구다.
- ↑ 참고로 잡스가 착용한 안경은 Lunor의 classic rund로 한국에선 60만원대(!)에 팔리고 있다.
다른 나라에선 그보다 저렴한 30만원대 가격으로 구할 수 있다 - ↑ 여담이지만 미국의 세인트 크로의 제품이라는 것은 그 회사의 언플로 밝혀졌다.
- ↑ 구글 CEO 래리 페이지, 페이스북 CEO 저커버그도 1달러 연봉 CEO다.
- ↑ 범퍼 무료제공으로 덮은 후에 2013년에 안테나게이트 소송전이 끝났다. 모든 구매자들이 15달러 환불 받는걸로.
- ↑ 이러한 점 때문에 애플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를 위험요소로 여기고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잡스가 스스로 존 스컬리를 데려와주시는 바람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미국은 시내 전화는 기본료에 포함으로 공짜다.
- ↑ 정확히 애플 1과 마찬가지로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들었고 잡스는 팔아먹기만 하였다.
- ↑ 애플의 광고 슬로건인 Think Different의 패러디.
- ↑ 삼성, 애플에 적개심을 불태우는 몰지각한 삼엽충, 앱등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애플과 삼성전자는 좋은 파트너다.
모바일은 아니다.아이팟을 굉장히 낮은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던 것도 삼성이 부품가격을 몹시 싸게 공급했던 것이 한몫했다.원래 끼리끼리 닮는 법이다. 애플 빠에게는 성인이겠지만 잡스의 행실은 글쎄...삼성이 반도체를 애플에 헐값에 공급하고 미국 시장에서 아이리버를 때려잡고 한국에서도 MP3 새 라인을 내놨다.빌런끼리는 죽이 맞는법?이 때문에 소송전 등으로 잡스가 삼성에게핵전쟁을 선포했을 때, 부품 공급을 담당하던 팀 쿡이 '더 이상 삼성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말라.' 라고 충고를 한적도 있을 정도. 그리고 이 팀 쿡은 현 애플의 CEO다. 게다가 이번에지구최강 저수율TSMC의 수율에 엿먹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이미 잡스에 대한 전기는 꽤 있었으나, 그동안은 잡스가 공인을 하지 않은 것들.
- ↑ 처음에는 자서전이라고 써있었지만 전기가 맞다. 번역본 광고도 '전기 출간'이고.
- ↑ 실제로 전기에는 출간 당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아이패드 교과서에 관한 언급이 한 문단 정도 넌지시 있었다.
- ↑
김정일의 말마따나직역하면어리석은 그대로, 배고픈 그대로"계속 굶주리고, 계속 미련해져라."가 되겠지만,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굶주린 것처럼) 계속 추구하고, (미련한 것처럼) 계속 시도하라."라는 표현이 알맞다. 즉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계속 시도해서 얻으라는 말이다.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이 다르면 느낌도 다르다.월터 아이작슨의 저작 "스티브 잡스"의 108p에는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 ↑ 미시가 만든 가짜 사후세계에, 원래 용도는…. 고인드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