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오장원

秋風五丈原(오장원의 가을 바람)
제갈량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

1 배경

손권군과 연합해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대파한 유비주유강릉이릉을 지키고 있는 조인을 포위하는 동안, 영릉·계양·무릉·장사의 형남사군(形南四郡)[1]을 정복한다. 얼마 후 주유가 급사하고, 유비는 익주유장을 쳐 [2]을 얻는다. 한편 그 때 조조는 한중장로서량마초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3년(216~219)의 치열한 전투(한중 공방전 항목 참조) 끝에 조조는 지키기도 힘들고, 버리자니 아까운 한중을 버리고 퇴각한다. 이에 유비는 219년 제갈량 등에 의해 한중왕에 추대된다. 그러나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맥성에서 여몽의 뒷치기로 전사하자 유비와 손권의 관계는 극도로 험악해지게 된다. 220년에 사망한 조조의 뒤를 이어 세자 조비위왕의 작위를 물려받는다. 곧이어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하고 산양공이 된다. 나라를 세운 위문제 조비가 헌제를 시해했다는 소문이 돌자, 유비는 나라의 회복을 선언하며 촉한의 황제가 된다(소열제).[3] 그러나 제갈량과 조운의 만류와 황충, 법정의 병사 그리고 장비의 암살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손권을 친다. 그러나 육손의 화공에 유비는 이릉에서 대패하고, 곧이어 223년 병사한다.

유비의 유언에 따라 승상 겸 익주목이 된 제갈량은 맹획의 반란군을 복종시킨다(연의의 칠종칠금). 마침 조비가 사망하고 위명제 조예가 뒤를 잇자 제갈량은 북벌에 착수한다.

2 북벌의 진행

2.1 1차 북벌

제갈량은 상용맹달을 회유하려 하나 맹달은 사마의에게 24일[4]만에 박살난다. 그러자 제갈량은 조운을 야곡도로 보내 위의 대장군 조진을 상대하게 한 뒤 기산로로 지나가 서량을 잠식해나가려 하고, 서량도 이에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마속이 가정에서 패해 전략이 완전히 무너지자, 제갈량은 한중으로 돌아오고, 1차 북벌은 실패한다. 제갈량은 마속을 벤다.

2.2 2차 북벌

조예는 대사마 조휴를 시켜 오를 공격하게 하려 하나, 조휴가 육손에게 대패하고 화병으로 죽음으로서[5] 제갈량은 한 번 더 기회를 잡게 된다.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해 진창성을 공격했으나, 학소의 굳건한 수비로 인해 군량이 떨어져 한중으로 돌아가게 된다.

2.3 3차 북벌

229년 봄, 제갈량은 진식을 보내어 음평, 무도 2군을 공격하게 한다. 곽회가 진식을 공격하자 제갈량이 직접 본대를 이끌고 건위에 이르렀고 이를 본 곽회가 물러나면서 제갈량은 음평과 무도를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음평, 무도가 계속 위의 수중에 있었다면 위군은 이를 통해 한중을 거치지 않고 검각을 노려 촉을 칠 수 있었다. 제갈량은 두 지역을 성공적으로 확보하면서 배후에 안정을 기했고, 여기에 저족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다만 접촉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3차 북벌의 공으로 제갈량은 다시 승상의 지위에 복직했다.

그러나 이 해, 촉나라는 군웅할거 때부터 활약했던 촉나라 최고의 명장 조운이 사망하는 손실을 입는다. 조운의 나이가 있으니만큼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은 아니었겠지만, 유비 때부터 함께 해온 군부의 정신적인 대들보 같던 조운의 죽음은 제갈량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게 애통했을 것이다.

2.4 위나라의 반격

제갈량의 공격이 계속되자 조진은 촉을 먼저 공격하여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작전을 입안했고,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조진 자신은 자오곡(...)을 통해 한중으로 진출하고 사마의가 상용에서 한수를 거슬러 올라와 남정에서 조진과 합류하며, 다른 군세는 야곡, 무도에서 진군하여 세 방향에서 촉을 공격하려 했다.

제갈량은 성고, 적판에 진을 치고 대비하였으나 여름에 장마가 쏟아져 잔도가 끊기고 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조진의 군대는 별 소득 없이 철수한다. 이 해에 제갈량은 위연을 강중으로 진출시켜 양계에서 곽회를 대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다.

2.5 4차 북벌

231년 2월, 제갈량은 목우를 사용해 병량을 보급하며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진출하여 농서를 노렸다. 이에 위는 드디어 사마의를 파견하여 제갈량을 맞서게 했고 장합, 비요, 대릉, 곽회가 이를 따랐다. 제갈량은 곽회, 비요를 요격하여 격파하고 상규의 보리를 쓸어갔고, 사마의는 요충지를 점하고 교전하지 않다 그냥 돌아갔다가, 노성에서 간만에 정면대결을 하게 되었는데 위연, 고상, 오반을 보내어 사마의의 본대를 격파하고 왕평이 후방을 기습한 장합의 별동대마저 대파했다.[6]

그러나 제갈량은 이엄의 태업으로 병량이 부족하여 철수한다. 이에 사마의는 장합을 보내어 제갈량을 추격하게 했는데, 장합은 반대하였으나 사마의가 억지로 밀어붙이자 울며 겨자먹기로 추격하였고 목문 전투에서 촉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당시 위나라 최고의 명장 장합을 죽이는데 성공한다.

제갈량이 군량 부족으로 귀환하자, 징계가 두려웠던 이엄은 제갈량을 모함하지만 제갈량은 이엄과의 서신을 증거로 제출하고 대부분의 신료들과 연대하여 이엄을 탄핵한다. 결국 이엄은 파직당하게 된다.

3 북벌의 종료

234년, 제갈량은 4차 북벌 이후 국력을 기울여 마지막 북벌을 준비한다. 이 때 제갈량의 북벌군의 규모는 약 10만으로 이릉대전 이후 촉이 투사했던 전력 가운데 가장 규모가 거대한 군세였다.

최초 제갈량의 목표는 미현(眉縣)의 위수(渭水) 남쪽까지 진군하고 주둔하며 무공(武功)이란 곳에서 동진하는 것이었다. 무공은 산악지대로 지형이 험준한 편이라 산을 끼고 싸우면 촉군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위나라 입장에서는 촉군의 무공산 행에 대하여 좋든 싫든 장안을 방어하기 위해 요격을 나가 공세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으니 제갈량이 무공으로 올 경우 당시 수비로만 일관하려던 위나라의 대전략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거꾸로 제갈량이 오장원으로 간다면 위의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된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이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갈량이 오장원 근처에 오도록 무공을 막았다. 그러자 제갈량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오장원에서 병사들로 하여금 둔전을 실행하고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민심을 획득하는 등 아예 오장원에 눌러앉아 버린다.

[1]
[2]

위치상으로 보면 촉이 오장원을 점유함으로써 위수 이남이 촉의 세력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장원이 공격하기 쉬운 지형이냐고 할 수도 없었으니, 오장원에 주둔한 촉군은 위수와 무공수를 통해 도강 중인 적을 요격할 수 있고 도강이 성공해도 오장원은 평지에 불쑥 솟은 150m 지점이라 적을 감제하기도 편하고, 구릉 위의 적을 공격하기도 힘들다. 만약 촉군을 공격하다 패배라도 해서 후퇴해야 한다면? 강이 등뒤에 있으니 배수진이 되니 후퇴한다 해도 괴멸적인 타격을 면할 수 없다. 다시말해 사마의가 오장원의 촉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수비만 할 뿐 나가 싸우지 않았다. 이에 백여 일 동안 대치가 계속되었고, 촉에게 조금 유리한 듯 했는데...

제갈량이 과로와 병으로 쓰러졌다.

제갈량은 양의강유에게 퇴각을 맏긴 후, 장완이 자신의 자리를 계승하게 하고 사망한다.

연의에서는 이 때 사마의가 추격해오자, 강유가 제갈량의 목상을 앞세워 다시 진군해 사마의를 따돌린다.(사공명주생중달)

4 추풍오장원의 의미

삼고초려 끝에 유비에게 출사해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유비의 뜻을 따랐던 제갈량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대목이라 독자들의 눈물을 빼낸다. 괜히 "삼국지 읽다 책 세 번 집어던질 때" 중 하나를 이 추풍오장원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7]

이 때 이후로 촉은 약해지게 되고, 압도적인 수세로 이긴 왕평낙곡대전강유가 몇 번 출전한 것(구벌중원 九伐中園)[8]을 제외하면 더 이상 공세를 펴지 못한다.

장완동윤, 비의가 연달아 죽고, 황호 때문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며, 아들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이 다시 그의 목상을 내보내자 위군이 "아직도 공명이 살아 있었구나!" 하며 도망치는 모습은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준다.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膵 死而後已)"라는 말로 상징되는 제갈량의 노력이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成事在天)"라는 명대사로 표현되듯이 하늘 앞에 무너지고 그 자신도 죽음을 맞는다.

이후 전투는 극히 줄어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삼국지에서는 추풍오장원 후 "장완과 비의가 죽자 유선황호에게 꾀여 뻘짓하고, 손권의 후계자들도 뻘짓하다가 결국 차례대로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의 진나라에게 망했어요"로 끝낸다. 그리고 위오촉을 멸하고 삼국 통일한 사마염의 서진도 똑같이 막장테크를 타다 흉노족 유씨의 전조에게 망하고 전조의 유총도 서진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중국은 삼국지와 오호십육국을 거쳐 수당에 이르기까지 혼란의 연속만 이어진다.


두보의 촉상(蜀相)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1. 여기서 유비는 황충, 위연, 진식 등을 얻는다
  2. 여기서 유비는 이엄, 마초, 마대, 오의, 황권, 법정 등을 얻는다
  3. 물론 당시에는 그냥 한이라고 불렀고, 촉한이라고 부른 것은 후대헤 전한, 후한 등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로 계한(季漢)이라고도 부른다.
  4. 상용에 도착하는 데 8일, 공성하는 데 16일
  5. 이후 대장군 조진은 대사마로, 표기장군 사마의는 대장군으로 승진
  6. 진서와 한진춘추의 기록이 다른데, 이에 대한 논란은 제갈량의 북벌 항목 참조
  7. 나머지 둘은 각각 관우와 유비가 죽는 장면(도원종언). 장비가 죽는 장면은 너무 어이없어서인지 잘 꼽히지 않는다.
  8. 더구나 이 때는 대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제갈량의 북벌과는 달리 등애에게 대패도 당했다... 이 사실이 추풍오장원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