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마 섬

(하시마에서 넘어옴)

端島

CNN선정 7대 괴기 장소
체르노빌 놀이공원세들렉 납골당아오키가하라토고 동물부적시장
인형의 섬군함섬곤지암 정신병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한글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
영어[1]
프랑스어[2]
국가·위치일본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2015년
등재기준(ii)[3], (iv)[4]
지정번호1484

홈페이지(한글)
현재와 1958년경의 모습 비교

1 소개

섬의 전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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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내부 모습

행정구역상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구 다카시마 정)에 소속되어 있는 섬이다. 나가사키 반도 옆에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高島) 섬 밑에 조그마한 섬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나카노시마(中ノ島) 섬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하시마(端島) 섬이다. 생긴 것 때문에 군함도(軍艦島, 군함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며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전부 떠나면서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1965년 7월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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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400m×140m에 면적은 6헥타르가 채 안되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섬이지만 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전성기에는 헥타르당 무려 835명이라는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를 기록하기도 했고 주택은 물론 학교, 점포, 병원, 영화관까지 갖춘 명실 공히 완전한 도시였다. 그러나 석유 때문에 석탄이 도태되면서 1970년대 이후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에 폐광되었다. 폐광 당시 2,000명으로 줄어있던 주민은 3개월 뒤인 4월 20일 모두 섬을 떠났다.

하지만 지금도 당시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있어 찾아가보면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수많은 건물들은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폐허가 되어 마치 폐건물처럼 변해 버렸다. 아니 이젠 섬 자체가 통째로 무한섬이 되었다. 게다가 인구밀도가 워낙 높았던지라 오밀조밀 뭉친 건축물들은 구룡성채를 방불케 한다. 폐허 덕후들에겐 그야말로 성지.

조그마한 섬 위에 고층건물, 그것도 폐허가 된 고층건물이 떠 있는 광경은 매우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폐광되고 난 뒤에도 섬의 소유권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1년에 지자체인 다카시마 정에 무상 양도되었으며, 지금은 나가사키 현의 편입되어 나가사키 시의 시유지가 되었다. 건물이 노후화되어 폐허가 된 곳이 많아 섬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2005년 8월 23일 기자들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 완전히 폐허가 된 섬 곳곳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8년에는 나가사키 시에서 조례가 제정되어 섬 남부에 정비된 견학통로에 한해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ㆍ견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견학시설 이외의 섬 전체는 아직까지 출입금지구역이다. 출금 해제 한 달만에 4천5백명이 넘는 인원이 섬을 방문했으며, 1년만에 약 59,000명이 섬을 방문했다. 또한 상륙하는 데 있어서 바람이나 파도 등 기상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나가사키 시에서는 상륙 가능한 일수를 연간10일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참고로 이 섬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역사스페셜에서 제대로 다룬 적이 있는데 군함도를 알고 싶다면 참고할 만한 가장 적절한 자료이다. 조금 부담이 적은 자료를 원한다면 같은 KBS의 역사저널 그날 80화에서 다룬 내용을 보는 것도 좋다.

책으로는 안재성의 <신불산:빨치산 구연산의 생애사>가 있다. 경상남도 지역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대원인 구연산이 어린 시절 모습으로, 군함도에 살았던 경험담이 잠시 언급된다. 구연산 자신은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군함도에 와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광산 한번 안가봤지만, 강제징용이 시작되기 전의 군함도 모습부터 나오는 진귀한 자료. 책은 빨치산을 찬양하는 종북주의 도서이니 읽고 주화입마에 빠지지 말자

2016년 5월에는 작가 한수산의 2권짜리 소설 <군함도>가 나왔다. 같은 작가의 2003년에 나온 소설 <까마귀>[5]에서 군함도 관련 부분만 발췌해서 내용 보강한 소설이다. 15세에 군함도에 징용된 서정우나 조총련계 박민규 등에게 취재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잠수함이 이 섬을 진짜 군함인줄 알고 어뢰를 발사하기도 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실은 1945년 6월 11일 잠수함 티란테(USS Tirante, SS-420)가 군함섬 앞바다에서 석탄운반선 한 척을 격침한게 "군함섬을 진짜 군함으로 오인공격"했다는 얘기로 와전된 것이다. 하긴 섬 자체가 작고 섬 위의 건물이 군함 상부구조물을 연상케 하는데다 연기를 내뿜는 굴뚝까지 솟아 있으니 얼핏 실루엣만 보자면 군함이라 착각할 만하다. #참고1 일본어 위키 하시마 항목 #참고2 잠수함 티란테 항목

메이지 유신 시대의 근대화의 산물로서 유네스코에 등록되었지만 정작 현재 하시마 섬 내의 메이지 시대 건축물은 다 무너져가는 3m 남짓의 제방 하나 뿐이다. (...) 나머지는 전부 메이지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현재 기준으로 60년 정도 된 건물 뿐이다. 100년 전에 만들어진 집을 리모델링 해두고 근대화의 유산이랍시고 등재한 셈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규연의 스포트라이드 15년 10월 30일 방영분에서 알 수 있다.

2 한국과 하시마 섬

일본 근대화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조선인 강제 징용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곳들 중 나.

"자원해서 갔다고...? 하시마를...?"

- 김형석 씨, 하시마 강제 징용 피해자[6]

죽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신기한 곳일수 있으나, 적어도 한국인들로선 신기하게만 여길수는 없는 장소다.[7] 군함섬에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많았기 때문. [8]

섬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이라고 불렸으며, 섬 자체도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게다가 이들이 받은 대우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가 집에 강제로 살게 했는가 하면 햇빛도 안들어오는 아파트 지하층에서 살게 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군함섬을 탈출하려고 시도한 조선인들이 여럿 있었으나 험한 파도에 쓸려가거나 발각되어 총살되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였다고. 기껏 파도를 해치고 탈출에 성공해도 도착한 곳은 전시 상태의 일본 본토. 즉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

한때 이 섬에 한글로 된 낙서가 있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 낙서는 1965년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 제작진이 연출한 것이라고 한다.[9]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처참한 학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징용이 본격화된 그 시기에는 한글, 한국어를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난 처벌과 학대를 받던 시절임을 생각해보면 글로 남기지도 못할 학대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임은 확실하다.

미쓰비시는 여전히 군함섬에 징용된 한국인 생존자들에게 그 어떤 보상도 하고 있지 않고[10] 나가사키 시는 군함섬의 가혹한 대접을 받은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내 진보성향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고 있지만 소수의 목소리라서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없는 듯.

2015년 5월 초,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산하의 민간 자문기구인 국제 기념물 유적 협의회가 하시마 섬을 비롯, 일본 정부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건설한 건축물 7곳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를 내리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물론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의 상징인 만큼 문화,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자면 분명 유산으로 오를만하지만 일본이 전쟁 범죄 사실은 쏙 빼고 유리한 설명만 남겨놓으려 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또한 군함도의 경우 메이지 시대의 것은 메이지 40년에 지어진 제방과 바다 속에 잠긴, 보이지 않는 해저 탄광 그리고 아마 섬 밑에 묻혀 있을 무언가들 뿐 이다. 군함도의 가이드가 소개하는, 정작 중요한 건물 들의 경우 쇼와 시대에 지어졌다던지 하는 식으로 사실상 메이지 시대의 것이 아니다.[11]

우리나라 당국은 이에 대해 일본 정부에 양자 협의를 요청하였으나, 일본에서는 현재 응답이 없는 상태이다 관련기사. 여러 한국 시민단체들과 일본 내 진보성향 단체들 역시 인권 탄압의 상징인 해당 시설물을 유산으로 등록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지 않나 우려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마리아 뵈머 독일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과 그 외의 유네스코 회원국들에 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독일의 언론에서도 '공포의 섬'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에 담긴 역사적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다. 관련기사

특히 유네스코 측이 하시마 섬의 역사적과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한일관계일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기에 유네스코를 너무 압박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 측의 주장을 어떻게 어필할지가 이번 논란 해결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시마 섬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일본이 하시마 섬에 대하여 소개할 때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건설한 섬이라는 걸 인정 및 명시하게 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일본은 현재 하시마 섬의 건설 시기를 1850년~1910년, 즉 일제 시대 이전으로 기재하여 조선인 징용 논란을 피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하시마 섬이 폴란드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처럼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 세계문화유산 (Negative World Heritage)로 등재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은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긴 했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우기며 산업발달이라는 긍정적인 상징으로 내세우려 하기 때문에 사실상 각국간의 의견 충돌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에 유네스코에서 협의를 할 시간을 주겠다며 시간을 미뤘다. 이전까지는 만장일치를 통해 문화유산을 등재했는데 한국 등의 일부 국가가 거세게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라 의견 조율을 위한 시간을 준 것이다. 아무래도 유네스코는 국가간의 충돌을 감안해서까지 등재를 하는 이례적인 행동은 피하고 싶은 듯 하다. 관련기사

한국인들이 본인의사에 반하여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노역을 당해왔던 사실을 문화유산에 기재하도록 합의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아우슈비츠처럼 부정적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차선책을 선택하게 된 셈.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대놓고 감금시설이기 때문에 네거티브로밖에 홍보 할 수 없지만, 하시마섬같은 경우는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긍정적인 상징조차 정확하지 않은 애매한 서술로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하고 있는 상황이라... 설령 합의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더라도 일본자국에서는 그 항목을 축소, 은폐하여 홍보수단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기에 일본이 한두번 그런것도 아니고 앞으로 상황을 우려하며 지켜봐야 할 듯하다.

결국 2015년 7월 5일,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등을 인정하면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측과 일본측의 타결협상안을 보면 강제노동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강제노역이 포함된 사실을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수용한것을 알 수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시킨 주체를 누구인지는 표기하진 않았으며. 그 주체가 당시 일본 정부에 있다고는 볼 수있다고는 하나 확정적으로 표기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협상안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은 하되, 법적인 책임을 물을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여 피해자의 배상은 관련없이 타결 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여러모로 강제성이 거의 없다싶이한 타결이라 후에 일본이 태도변화가 있더라도 유네스코의 이행권고만 있을뿐 강제성이 없기때문에 지속적으로 감시와 관심이 필요할듯했는데.... 관련 뉴스

...결국 등재결정이 내려지자 마자, 일 외무상의 강제노동을 인정한것은 아니라는 식의 발언을우디르도 이렇게 빨리 태세전환은 무리일 것이다[12] 시작으로 해서 일본번역문에서는 표현수준을 완화하는등, 여러가지로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관련기사

이에 대해 일본에 오랫동안 거주한 외국인들(교수 포함)도 forced to work는 강제 노동이 맞으며, forced to labor와 거의 의미 차이가 없다며 반박했다.참고 솔직히 고교생 수준 영어만 되어도 일본측의 주장이 심하게 무리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일본식 영어 사실 영문 표현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강제노동 여부를 못 박고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행동은 국내 여론몰이용 헛소리라고 볼 수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다르게 해석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기 때문에 당장 일본 우익들 사이에서 강력한 반발이 터져나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기사[13] 또한 일본 정부는 ‘인포메이션센터, 정보센터 등 피해자를 기리는 시설을 설치하겠다’ 고 약속하였으며, 이를 점검할 몇 가지 국제기구의 체계가 있다고 한다. 아마 강제성은 없는 듯하지만, 약속을 한 뒤에 대놓고 쌩까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일본 정부의 국제적 망신이다.참고

그러나 유네스코가 군함섬의 건축 기술성을 높이 사서 세계유산 등재 기준 2번과 4번을 적용시키는 등[14]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잔혹하게 죽어간 비극의 장소보다는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의 놀라운 결과물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더 강하기에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씁쓸하고 찝찝할 수 밖에 없는 결과이다. 결국 국제 사회에서 힘 없는 건 죄라는 사실만 또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이유가 더군다나 문화유산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 징용 사실을 얼마나 적극적이고 협조적으로 알릴지도 의문. 물론 위에 서술하였듯이 피해자를 기리고 알리는 시설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런 시설들을 얼마나 많이 설치할지, 또한 방문객들에게 얼마나 자세하게 설명할지는 불확실하다.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당시 하하가 하시마 섬을 방문하였으나 가이드는 강제 징용에 관한 언급을 아예 하지도 않고 자랑거리만 잔뜩 늘어놓는데다가 심지어 관광코스도 근대화가 이루어진 코스로만 이루어져 있고, 강제징용 장소는 제외한 정 반대이다...[15]

2014년 7월, 세종대학교박유하 교수가 하시마 섬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데다가 당시 노동자 착취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닌데 한국이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해야 하나,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신중하게 생각해보자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아래 일본의 입장에 서술된어 있는 진술을 보면 대충 어떤 근거에 기반한 주장인지 이해가 갈 것 이다.

무한도전 하하가 하시마 섬을 방문하며 촬영을 하였다. 배달의 무도 참조. 당연하게도 공양탑은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설마 일본한테 기대한건가? 심지어 지금은 폐쇄되었다

2016년 7월, 군함도 관광에 의한 르포가 연합뉴스에 게재되었다.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조선/중국인 징용노동자에 대한 명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등재 1년전인 2015년 7월 당시 외교부는 외교부 “日 조선인 강제노역 인정, 우리 외교의 중요한 성과” 자축 까지 했었던 상황이었다. 르포 내용은 군함도에 대한 일본 산업혁명에 대한 소개와 당시 최신식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부분이었고 징용에 대한 사실은 알기 힘들다고 게재하였다.

2.1 일본의 주장

일본이 against their will, forced to work와 같은 표현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펼치는데는, 당시 조선인들의 노역이 강제노역이 아니라 전시에 있는 징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식민화를 시키는데 성공한 일본 제국 입장에서 전시에 식민지를 포함한 자국민을 동원한 것뿐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후에 한국과 일본간에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것을 어떻게 바라보냐는 문제에 따라 한국과 일본간에 해석이 바뀌는데, 한국은 경술국치 및 그 이전에 한일간의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입장이고 일본은 2차 대전 종식까지는 식민지가 합법이지만 그 이후에 무효라는 입장이다. 한일기본조약에는 한일 병탄과 관련해 'already null and void' 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합법이었다 라는 소린가?' 라는 뉘앙스로 해석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해석으로라면 군함도의 강제노역은 2차대전 종식 이전에 발생한 일이고, 법적으로 조선인은 일본 제국의 황국신민으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에 의지에 반했지만 전시 징용을 했다는 것이다. 인권적인 문제는 있지만, 전쟁을 치르는 나라 입장에서 불법적인 행위는 아니었다는 것. 한국인 입장에서 이런 해석은 그냥 눈이 돌아갈 말이다. 징용을 강제노역과 분리하고, 일본과 전쟁을 치른 연합국의 여성에 대한 성범죄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본의 태도는 이같은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한일 병합 조약 자체가 억지로 빼앗아서 옥새를 찍어 조인시킨 조약이므로 원천무효였다. 그러므로 그 이후의 일은 객관적으로 봐도 불법이라고 봐야 한다!' 라고 하자니 식민지배에 대한 문제는 비단 일본 뿐만이 아니라 제국시대에 끗발날리던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러시아 등의 식민지를 거느렸었던 모든 구미 열강들의 입장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실로 난감한 문제다. 실제로 일본을 제외한 구미열강들 중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거나 배상을 실시한 국가는 거의 없다. 과거사 청산을 순탄하게 이행한 것으로 평가받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2001년, 하버드대 아시아센터가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들은 한일합방이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였다고 일축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들에게 식민지배를 당했던 아시아,아프리카,태평양 섬나라들 등 제3세계 신흥 국가들 역시 한국의 주장에 동조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지지 여론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설령 국제 표결을 한다고 하더라도 UN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라도 거부권을 던져버리면 아무것도 안된다. 무엇보다도 그들로부터 쏟아질 유무형의 보복은 주동자인 한국이 감수해야 한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은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 문제는 일본만 걸고 넘어지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 모두가 연루되는 문제이고 일본도 서구국가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때문에 유네스코 유산 등재에 대해서 일본 넷티즌들은 'forced to work' 라는 객체에 왜 자국민이라는 언급이 빠져있냐 라는 외무성에 대한 비난이 나왔다. 한국도 주체과 객체에 대한 표현이 빠졌다고 욕을 먹지만 일본도 객체에 대한 표현이 없다고 자국 외교관들을 까는 중. 하지만 일본은 '인권에 반하는 징용'이라는 자기들 입장에서 완화된 표현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지원해서 갔다라는 표현도 나온다. 더 열받는 사실은, 위의 하시마 섬 소개 홈페이지에는 강제노역은 고사하고 강제징용에 관한 내용조차 없다는 것이다

미와 모토히로 큐슈대 교수가 일본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을 확인해보자.

조선인은 탄광 노동자로 강제 연행된 것이 아니고 일본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애초에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강제연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근대 역사가인 박경식 씨가 1965년에 출판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라는 저서에서 조선인 전시 동원과 관련하여 강제연행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박경식 씨는 저서에서 '길을 가던 사람,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 등 닥치는 대로 그대로 트럭에 태우고 일본에 데리고 왔다'고 말한 노동자의 증언을 게재해 '강제 연행'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한국이 강제연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1939년에 시작된 '조선인 국내 이송 계획'을 뜻한다. 당시 조선인들 중에서는 식비가 없어 일본에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송 계획 시작 당시에는 모집 인원의 2배에 달하는 희망자가 있었던 때도 있었다. 한국 측은 강제로 끌려갔다고 주장하지만 스스로 일본에 온 사람이 많았다. 후쿠오카(福岡)현에 위치한 메이지 광업 히라야마 광업소가 1941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조선인 근로자의 모집 요강'에서는 고용기간을 2년으로 규정했으며, 이바라키(茨城)의 조반 탄전의 자료에서는 2번 계약을 갱신하면 임금을 2배로 올려 계약했다. 기간을 정하고 있는 것부터 노예같은 강제 노역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전세가 악화되자 조선반도에서 희망자가 줄어들었으며, 일본 본토의 젊은이들이 징병돼 탄광은 노동력이 부족하게 됐다. 거기서 '징용'이 시작된 것이다. 1939년 국가총동원법은 우선 일본인에 적용됐으며, 거부하면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 1,000엔 이하가 부과됐다. 그 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에게도 징용령의 적용이 확대됐다. 1944년 9월의 일이다. 그런데 연합국이 일본 주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1945년 3월 말에는 부산과 야마구치(山口)·시모노세키(下関)를 연결하는 부관 연락선의 항로가 끊겨 조선반도에서의 동원은 실질적으로 7개월 만에 끝났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1941년도 근로 동원 시행계획에 따른 조선인 노무자의 국내이입 요령’을 보면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에 대해서는 가급적 내지인(일본인)과 차별이 없도록 하라’고 써있고, 1943년 6월의 규슈(九州) 광산 학회지를 보면 후쿠오카현 아카이케(赤池) 탄광의 광산 근로자 1명의 평균 일당은 일본인이 4.65엔, 조선인이 4.64엔으로 차이가 거의 없다. 일본인보다 더 많이 받는 조선인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아니라 숙련 수준 차였다. 또 노동과학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면 1944년경의 규슈에서의 탄광 임금은 하루 4~8엔, 각종 수당이 붙으면 월 수입은 150엔 정도로, 많이 벌면 300엔도 벌었다. 조선인들은 급료에서 18.6%를 저축했고 34.5%를 조선으로 송금해서 가족들을 부양했다. 당시 대졸 사무직 초임이 75엔 정도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위험한 석탄 채굴은 그만큼 대우를 받았다. 다만 전황이 악화된 탓에 패전 3개월 전부터 노무자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체불된 급료에 대한 청구권은 1965년의 일한청구권협정을 통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일한 양국이 합의했다. 일본 남성이 부족한 가운데 조선인의 힘이 석탄 증산에 기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본도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제국시대의 조선인들이 노예처럼 노동력을 착취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선동으로는 미래 지향적인 일한 관계를 구축할 수 없다.

문제는 이같은 주장들을 단순하게 역사왜곡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한일 양국에서 엄연한 학자나 평론가들이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더러,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법리(法理)나 기록, 증거, 연구 면에서 함부로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학술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2.2 생활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광부의 강제 모집은 없었고 작업환경도 그렇게 심한 막장까지는 아니였다. 사전적 의미의 막장에서 일할 뿐

조선인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가족단위로 이주하여, 사택을 배정 받고 아이들은 일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16] 이때의 광부들은 주로 일본인들이였고, 그 다음이 오키나와인(류큐인)들이였다.

갱도에서는 끊임없이 붕괴며 가스누출과 출수사고가 터져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위험한 환경이였다. 시신은 나카시마 섬으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그러나 이에대한 반대급부로 광부들은 다른 업종 종사자에 비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숙련 광부는 최고 180원까지 받았는데, 이는 교사나 면서기 보다 높은 수준이였다. 결정적으로 군함도에서는 돈을 쓸 곳이 없어 돈이 모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경기가 더욱 좋아졌다. 배급제로 바뀌었지만 일본군이 남태평양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매일 보급선을 통해 파인애플이나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이 쏟아져 나왔고 각종 물자가 풍부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 전선이 넓어짐에 따라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어, 1943년에는 열대과일은 커녕 일본에서 생산되는 귤도 보기 힘들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안좋아졌다. 쌀대신 콩깻묵을 먹어야 했는데, 이건 식민지인 만주에서 생산한 콩을 군수용 기름으로 짜고 남은 찌꺼기였다. 그나마 썩고 곰팡이가 펴 있었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열악해 졌다.

또한 젊은 일본인이 군인으로 징집되자 광부가 될사람이 부족해져 식민지인들을 강제로 뽑아 오게 되었다. 물론 그 식민지인이란 조선인들이였다. 이때부터 끌려온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사는 사택과 학교 사이에 위치한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다. 허름한 방에 40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었다. 일본인 감독은 조선인들을 짐승처럼 취급하였는데 몸이 아파 일을 못나가는 조선인들을 무릎꿇려 앉혀 놓고 가죽혁대로 후려치는등 처참한 대우였다. 조선인들은 피흘리며 울부짖기만 할 뿐 평생 업악된 체제속에 살아 반항할 생각 조차 못하였다.

이들은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되었다. 끊임없이 파고 내려간 갱도는 지하 1,000m에 달했으며, 그 마저도 좁은 터라 기어들어가야할 정도였다. 이곳 지하에 매장된 석탄은 품질이 꽤 좋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지하로 파고 들어 경사가 60도 쯤으로 상당히 가팔렀다. 보통 하루 12시간 노역했으며, 심할 때는 16시간 이상씩 투입되기도 했다. 안전 대책을 강구할 리 없으므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자기수였다. 무너지는 것 외에도 가스가 차고, 해저 탄광이르 습도도 엄청 높았으며 해수로 인한 염분이 있는 지하수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헬멧과 고무줄, 속옷, 주먹밥 뿐이었다. 고무줄은 가파른 경사에 떨어지지 않게 서로를 묶는 용도로 쓰였다. 주먹밥은 콩깻묵을 섞었는데, 이는 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로 보통 비료로 사용할 만큼 저급한 음식이었다. 위험한 갱내 작업은 수용자들을 우선 투입하여 막바지에는 90%에 이르렀으며. 그 수는 800여명에 달했다.

전쟁 말기가 되자 조선인들마져 징병으로 끌고 가게 되자, 이번에는 만주의 중국인들을 노예로 끌고 왔다. 효과적으로 분할통치하기 위해 조선인을 2등국민, 중국인을 3등국민으로 대우하였다.(1.5등 국민인 오키나와 인들도 있다. 당시는 오키나와를 준식민지 취급)

군함도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따위는 없었다. 못쓰는 가마니짝 따위로 대충 덮어 거룻배에 싣고 가 나카시마 섬에서 기름을 부어 대충 태웠다. 사람 태우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전쟁 전만 해도 나카시마 화장장에서 연기가 안나는 날이 있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온종일 검은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일부 식민지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에 탈출을 시도하였다. 10km정도 헤엄치면 구마모토 현이 있어서 이쪽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중노동으로 몸이 워낙 쇠약해져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해쳐나갈 재간이 없었다. 대부분이 도중에 건너가 익사하였고, 간신히 육지로 도착하면.... 거긴 자유의 땅이 아닌 일본의 본토였다. 즉시 잡혀서 돌아오게 되었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그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러던 와중 45년 8월 9일 오전 11시경. 채광이 안되어 항상 컴컴했던 사택 집안이 갑자기 훤해졌다. 폭음도 없고 미군기가 날아가는 소리나 사이렌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일이냐고 어리둥절 하였다.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진 것이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일본인 감독과 관리직들이 모조리 사라졌다.(8월 18일)

사무실은 서류를 태우거나 가져가 텅텅 비었고, 탄광 입구는 폐쇄되었다. 심지어 일본인 광부들까지 없어졌다. 그제야 조선사람들은 깨닫게 되었다. "전쟁이 끝났다. 이제 집에 가도 된다"

이들은 곧바로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고, 일부는 나가사키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원자 폭탄으로 인해 방사능이 넘쳐나는 곳에서 잔해와 시체를 치우는 일을 반복하였다. 강제 노역의 대가는 여러 명목으로 보수를 제하여 그들에게 쥐어진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사라져버린 이섬에서 너도나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선착장 동굴 입구에 붙어 있던 영광의 문이라는 현판은 사라지고 대신 지옥의 문이라고 힘차게 휘갈겨 쓴 현판이 붙어 있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일본인이 없어진 그 다음날 천여명의 중국인 노동자들도 사라졌다. 중국에서 배를 갖고 와서 태워갔을 리도 없고, 일본인이 갑자기 친절해져서 중국사람들만 태워갔을리는 더더욱 없다. 그냥 조선인들이 모두 자는 밤사이에 천명이 몽땅 없어진 것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중국인만 골라 일하라고 갱속으로 보내놓고 입구를 폭파 한게 아닌가 의심할 뿐이다. 앞서 언급한것 처럼 탄광 입구는 접근 못하도록 폐쇄되었다.[17]

일본인은 모두 도망가고, 중국인들은 갱도속에서 몰살 된 것으로 의심되는 이때, 군함도에 남은 것은 조선인과 오키나와인(류큐인)들 뿐이였다. 원폭 맞은 나가사키 일대에는 이삼십명을 태울만한 배 한척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큰배가 없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였다. 일제는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들의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곤 했는데 군함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동할 대형배가 없는 덕분인지, 조선인들은 덕분에 몇명씩 작은 배로 육지로 이동 할 수 있었다.[18] 이에 조선인들은 개별적으로 섬에서 나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 갈수 있었다.

여담으로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는 일본인들을 위해, 일본 전역에서 일하고 있는 식민지 탄광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하고 계속 탄을 캐내라는 지시를 점령군 최고사령관령으로 내렸다. 그나마 군함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죄다 도망가는 바람에 이러한 명령이 수행되지 않았다. 해방되었는데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해말까지 계속 막장에서 죽어나던 우리 조상님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

3 그 외

  • 1981년 공공광고기구에서 이 섬을 소재로 공익광고를 만들었다. 석탄이 고갈되어 사람들이 떠나고 황폐해진 군함섬을 보여주면서 자원을 아끼자고 하는 내용. 참고로 이 당시는 완전히 무인도화된 지 6~7년 가량밖에 안 지난 시점이라 요즘에 보는 것과는 미묘하게 다를 수 있다.

<자막>나가사키 현 하시마 섬
<내레이션> 섬은 보물섬이었다. 석탄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이 일했다. 둘레 1.2km의 섬이 마을이 되었다. 4,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났다. 크게 자랐다. 1년, 10년, 30년, 석탄을 다 파자 사람들이 없어졌다. 집도 없어졌다. 자원과 함께 섬도 죽었다. 84년만의 일이었다. 우리들도 지금 자원이 없는 섬, 일본에 살고 있다.
<자막> 언제나 생각하고 싶은 우리들의 자원 - 공공광고기구

  • 게임 사이렌 2의 무대 야미섬의 모델이 되었다. 단, 당시에는 하시마 섬의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시기인지라 실제 로케이션은 오쿠노시마와 마나베시마에서 실시되었다.
  • 에로게 백귀의 무대 오우카도(응화도)의 모델이 되었다.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가 없는 이름만 바뀐 군함섬이라고 해도 과언이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 불쏘시개 영화인 배틀로얄 2편의 촬영지인데 주인공의 테러집단이 거주하는 곳이 이곳이다.
  • 강철의 라인배럴 에서 카토 기관의 비밀 기지가 이곳에 있다.
  • 이 섬에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BMS의 곡인 End Time이란 곡도 있다(곡의 장르명도 레퀴엠 트랜스이고 BGA는 하시마 섬의 폐허의 사진이다).7년 뒤에 나올 핵쓰레기 BGA는 부끄러운줄 알아야 된다.
  • 또한, 팝픈뮤직의 수록곡인 폐허 컨셉의 곡인 Remain 역시 작곡가 중 한명인 kors k가 군함섬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언급했다.
  • 이 섬 출신의 유명인 중에는 성우 이시모리 탓코우, 음악가 오카자키 리츠코(1959-2004)가 있다.
  • 일본의 프라모델 메이커 아오시마는 이 섬의 1/1400 스케일 프라모델을 발매했다. #
  • 2008년코미디TV채널에서 방영하던 공포 체험 탐방 예능 프로그램 고스트 스팟 프로그램에서는 무속인을 섭외하고 섬에 진입하여 내부를 촬영하였는데, 그 당시 참혹했던 현장들이 남아있어, 큰 화제가 되었다. 이때 당시 방영했던 하시마 섬 방영편은 일본의 못된 행실을 대중들에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어, 시청자들이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4 관련 문서

  1.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2. Sites de la révolution industrielle Meiji au Japon : sidérurgie, construction navale et extraction houillère
  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까마귀에게 하듯 돌팔매질을 했다고 해서 징용공을 까마귀로 치환해 붙인 제목. 이런 육시할 놈들
  6. 이 분께선 2015년 기준으로 95세시며 강제 징용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탄가루가 눈에 들어가 시력을 잃으셨고, 몸을 혹사시켜 불구가 되셨다. 참고로, JTBC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 군함도 세계유산등재 시민모임의 관계자에게 이분의 증언을 들려주자 낄낄 웃으며 거짓말 하면 그만이다"라고 개소리를 지껄이고, 증언이 아닌 증거를 가져오라며 비꼬았지만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일본 정부의 공식 강제징용 인증서를 보여주자 데꿀멍하고 이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앵커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일침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7. 사실 일본뿐 아니라 제국주의로 갑질을 했던 대다수 나라들의 몇몇 근대유산들이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 대부분의 전쟁관련 세계유산들이 그렇듯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입장이 갈리는 것. 가장 극단적인 예시가 바로 레오폴드 2세시절에 지어진 벨기에의 여러 근대 유산들.
  8. 징용과 요시다합숙소에서 노동한 사람을 합쳐서 500~600명 정도, 자기의지로 온 조선인 노동자는 80명 정도가 있었다.
  9. 북한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
  10. 사실,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일본이 배상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이 조약 자체에 대한 논란이 있다.
  11. 출처 :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1회
  12. 결정이 난 직후에 바로 기자들에게 발언한 내용이다. 기다릴 필요있음?
  13. 링크가 죽었으므로 wayback에 백업된 페이지로 대체
  14. 아우슈비츠처럼 부정적 유산으로 지정되었다면 6번 또한 적용시켰어야 한다.
  15. 다만 관광 코스가 근대화된 장소로 짜여진 근본적인 이유는 안전문제 때문이다. 섬 자체가 버려진지 오래되고 시설이 낙후된데다가 현재도 붕괴가 진행중인 시설이 많아서 붕괴위험이 전혀 없는 안전한 장소로 코스를 짜는 것 자체는 사실 당연한 일.물론 안전 문제가 아니라도 강제 징용에 대한 언급조차 삼가고 있는 하시마 섬측이 강제 징용 시설 쪽으로 코스를 짤지는 미지수이긴 하지만.
  16. 사택이란 일본에서 자랑하는 최초의 근대식 아파트이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과 하하가 이 섬에 상륙할 때 안내원이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급격한 비탈에 집을 연이어 붙인것과 같은 매우 조악한 구조라고 한다. 특히 채광이 안되어 문을 닫으면 빛이 전혀 안들어 왔다고. 학교의 경우 <신불산>의 주인공 구연철은 40명 학급에 조선인 학생은 3명 있었다고 한다.
  17. 이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밤사이에 천명여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사라진 것 까지는 사실이고, 살아남은 조선인들이 중국인이 갱속에서 몰살된게 아닐까 의심할 뿐이다. 일본의 전쟁 범죄에 목소리를 높이는 중국이,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때 아무말 없는 것을 보면 살아서 돌아가서 이러한 사실을 알린 중국인이 없는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18. 이상의 내용은 안재성의 <신불산:빨치산 구연산의 생애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구연산은 전쟁전에 군함도로 간 광부의 아들이였습니다.
  19. 유아용 비스킷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