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문화대혁명
1 개관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발생한 폭력은 단순히 사람에게만 가해진 게 아니라,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존의 문화 전체에 악영향을 끼쳐서 수많은 문화유산과 서적 등이 파괴당하고 소멸 당했다. 마찬가지로 음악, 미술, 영화, 체육,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이없는 정책과 숙청이 난무했고, 중국 문화계도 당연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 상세
2.1 문화유산 파괴
중국사 좋아하는 역덕후라면[1] 다음 목록을 읽으면서 온몸에 전율이 흐를 것이요, 전문가/학자라면 기껏 답사한 유적지의 허전함에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며, 도굴꾼은 삽질 좀 해볼 건덕지도 다 때려 부순 홍위병을 저주할 것이다. 이게 어느 정도의 충격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조선왕릉, 종묘, 백제금동대향로, 현충사,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 해인사, 팔만대장경, 석굴암, 불국사같은 문화재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소멸됐다고 해보면 짐작이 될 것이다.
1.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2.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3. 산서성의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4.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가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림. 5. 세계불교의 최고보물이라고 불리는,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친히 개광(開光)한 삼성상(三聖像) 중의 하나일 팔세등신상의 얼굴이 훼손됨. 6.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편평(扁平)하게 됨.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孔廟)[2]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공령이(孔令貽)의 분묘도 파헤쳐짐. 7.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희묘(虞姬廟: 사당)와 우희묘(虞姬墓: 무덤)도 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문혁(文革)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뿐임. 8. 곽거병의 곽릉(霍陵)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함.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9. 이화원(頤和園)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됨. 10.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두 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11.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 사당)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곳의 묘우 고적(古蹟)을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부수고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를 한 무더기 구해냄. 12.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醫聖祠: 의성을 모신 사당)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13. 하남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세 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 등의 목각본도 불에 탐. 14.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것 때문에 훼손됨. 15. 서성(書聖) 왕희지의 능묘와 20무(畝)[3]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거의 평지화됨. 남은 건 서성(書聖)의 망혼(亡魂)이 떠난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뿐. 16. 문성공주(文成公主, 당대의 공주)가 친히 주재한 송찬건포(松贊乾布)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塑像)이 각랍사(覺拉寺)에 있었는데, 훼손됨. 17.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18. 하남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跪像), 19. 항주혁명청년이 악묘(岳廟,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악비의 묘도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듦. 20. 21.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짐.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됨. 22. 해남도의 천애해각(天涯海角)에 명나라 때 23. 호북강릉(湖北江陵)의 명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24. 북경성 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 또한 베어버림. 25.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26.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이 집은 세 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27. 홍위병이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한 권뿐이었는데 네 구절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시체는 불태움. 28.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기념관이 문혁 때 부서짐. 29. 산동 관현중학 홍위병들이 교사의 선동 하에, 천고의개(千古義丐) 무훈(武訓)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친 후, 모여서 비판하고 태워 재로 만듦. 30. 북경 교외의 은제장(恩濟庄)에 묻힌 동치, 광서 양황제의 궁정대총관(宮廷大總管) 이연영의 묘를 파헤침. 31. 장지동(張之洞,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수장(首長)인 장 씨 부부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뜯어먹기도 함. 32. 하남 안양현의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묘가 파헤쳐짐. 33. 흑룡강 흑하현에 있던 장군분(將軍墳)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34. 송나라 때 시인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35. 청나라 말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함. 36. 강유위(康有爲, 변법자강운동을 양계초와 함께 주도함)의 묘도 파헤쳐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靑島)시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함. 37.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개석의 옛집, 장개석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38.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됨. 39. 양호성[5]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40.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千佛洞)의 벽화도 파괴됨. 41. 산서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제묘였으므로 부수어버림. 42. 안휘 곽저현 문묘(文廟),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43. 당대(唐代)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문 곳이 현화산(縣花山)으로, 그의 사후(死後), 제자가 개명하여 포선산이 되었는데, 송왕(宋王) 안석(安石)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지은 후, 포선산은 유명해졌는데, 문혁 때 이를 사구(四舊)라 하여,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두 개의 탑이 모두 훼손됨. 44.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백 여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됨. 45. 송대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썼고, 비석에 새겨져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근 일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 |
그리고 이것들은 홍위병에게 쓸려나간 문화유산들 중 극히 일부다.(…) 홍위병 놈들은 저런 문화유산 위치는 어떻게 알았대? 보기에 거슬리는 건 다 때려 부순 거지, 뭐
위의 것들만 보전시켰어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세계유산 보유국이 되었을 것이다. 당장 문혁으로 싹쓸이된 마당에도 중국의 세계유산 등록 건수는 무려 50건으로, 51건이 등재된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만약 이 어마어마한 유적들이 파괴되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숫자의 유물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아무튼 지금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각종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는 문화대혁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문화재이거나, 문화대혁명 이후에 발견된 문화재들이다.
이 시기에는 "종교는 착취계급이 이용하는 도구로 반드시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문제를 처리한다"는 종교말살정책으로 당의 모든 종교사무부분을 완전히 폐쇄시켜, 각 지방 종교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천주교의 경우, 각 지역의 홍위병들은 각 성당에 들어가, 건물과 성상을 부수고 성경을 태우는 등 기도와 전례, 성경 읽기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또한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다른 종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았으며, 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종교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항저우의 유명한 사찰 영은사(靈隱寺)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파괴당할 뻔했다. 하지만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절 입구와 대웅전 앞에 마오쩌둥 사진을 붙여놓으라'고 지시해서, 사진을 본 홍위병들이 절을 부수는 걸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문화유산마다 다 마오 사진 붙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마오는 반동분자로 몰리는데… 심지어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경비병이 아니었다면 자금성조차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참고로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막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은밀한 활약을 펼쳤다.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절, 과학자들에게 경호병력을 붙여 보호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저우언라이 항목 참조. 막고굴 역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명나라 황릉도 피해를 당해 만력제와 황후, 후비들의 유골과 부장품 일부가 파괴되어, 결국 만력제의 더 자세한 행적과 건강상의 특징 등은 영원히 묻히고 말았다.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과 관련된 유적들도 이 당시에 파괴될 뻔했다. 한번은 쑨원이 광둥 정부 시절 머물렀던 광저우 사저를 박살내러 홍위병들이 몰려오자, 관리인이 기지를 발휘해, 마오쩌둥이 쓴, 쑨원을 찬양하는 글을 들고 나와 홍위병들에게 읽어 준 다음, "자, 이래도 여길 부술 테냐!"고 소리치자 홍위병들은 그냥 물러가버렸다고 한다. 물론 저장성에 있던 장제스 생가는 그런 거 없이 홍위병들에게 박살났다.
유교와 공자 역시 봉건적인 사상으로 취급당해 취푸(곡부曲阜, 공자의 고향)의 대성전에 모셔져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났고, 거의 분서갱유에 가까운 유교 경전 소멸이 일어났다. 또한 무형문화재도 상당수 실전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 즉 제향(祭享)하는 법이기도 한 《제공대전(祭孔大典)》도 실전(失傳)되어, 한중수교 이후 한국의 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1990년 석전대제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행사로 초빙 및 2004년 취푸 공묘 석전대제 재현 기사. 현재도 우리나라 쪽에 오히려 명ㆍ청대의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로써 한국이 오히려 중화 문명을 중국보다 잘 보전한 국가가 되었을 지경. 리얼 소중화 돋네
공자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는 중국의 시도가 평가절하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하드파워는 강하지만, 소프트파워가 취약해 미국을 넘어서기 힘들 거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래서 중국은 공자학원 등을 통해 소프트파워를 증진시키려 하나, 위에 열거된 장렬한 병크 덕분에 그 노력이 가까운 미래에 보상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위의 제공대전도 어디까지나 후대에 형식만 임시로 부활한 것이지, 실제 제사와 그 제사를 수행하는 직책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6]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선 다시 부활하지 못해서, 타이완에 거주하는 공자의 종손인 공수장(孔垂長)이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공수장의 할아버지이자 선대 봉사관인 공덕성(孔德成)은 이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참사에 경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큰 반감을 가져서, 국부천대 이후 생전에 한 번도 곡부의 공묘(孔墓)를 찾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자신의 묘지를 곡부에 두지 말도록 했다.
공자 외에 위에 나온 예시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곽거병, 제갈량, 악비, 해서, 왕희지 등 중국사에 길이 남을 명사들의 무덤과 기념물이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인쇄 및 무수한 기록과 자료가 박살나 버렸다.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제인증을 받은 직지심경을 만든 한국보다 자기들 인쇄술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해도 그 증거가 없다(…).
더불어 중국 옛날 동전도 무수히 녹여서 재활용한 탓에, 1976년, 신안 보물선 1척에서 발견된 송나라 시대 동전 800만여 개를 소장중인 한국이 졸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국 옛 동전을 보유한 나라(!)가 되어버렸고(...), 중국 옛 주화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연구해야할 지경이다(...).
그 와중에 자금성 내 소장 중이던 청나라 황실이 수집한 최고급 문화재 중 69만여 점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튀면서 가지고 가버렸기에, 운 좋게도 홍위병의 광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화재를 심히 아끼던 장제스가 중국의 문화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먹튀한 게, 오히려 고향을 떠나 온 실향민 신세인 문화재들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 된 셈. 예상은 못했겠지만, 선견지명이라 해야 할까… 국립고궁박물원 항목 참조.
문화대혁명 이후 발견되어 살아남은 문화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릉. 1974년에 발견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여서[7] 그 압도적인 크기와 수량의 병마용(兵馬俑)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2.2 종교 박해
문화대혁명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중국 전역의 종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위병들 입장에서는 문화재와 함께 모조리 박해하고 때려 부수고 타도해야 할 1순위가 종교였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의 종교가 공격 목표였다.
티베트에서는 무려 '6,000개'의 티베트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다. 승려들은 쫓겨났고, 홍위병들은 사찰이란 사찰은 모조리 불태우기에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승려들이 고문을 당하다 학살당했다. 홍위병들은 비참한 모습의 시체들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대로변에 전시했다고 한다.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시 몇 개만 들자면, 가장 큰 사원이었던 간덴 사원은 다이너마이트로 날아갔으며, 수많은 경전 및 관련 문서들은 화장실 휴지로 사용되었다. 정말이다. 참고로 이 경전들 중에는 8세기경에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사본들도 있었다. 만약 사본들이 그대로 살아 남았다면 세계 불교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간덴사원에서 가장 신성하게 모셔지던 쫑카빠(tsongkhapa 1357–1419)의 등신불을 모시고 있던 탑은 구습과 결별했음을 보이라며 스님들로 하여금 스스로 탑을 부수고 등신불을 꺼내어 불에 소각하게 하였는데 홍위병들이 물러나자 불을 놓은 스님이 직접 불 속에 뛰어들어 타다 남은 유골들을 구출했다. 후에 유골들은 인도의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지고 유품과 사리를 수습하여 다시 탑을 새웠다.
포탈라궁도 박살날 뻔 했으나 역시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저우언라이가 편지를 보내 "이런 건물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후에 봉건계급이 어떻게 농노들을 착취 했는지 교육할 수 있다!" 라고 회유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포탈라궁 언저리에 있던 달라이 라마의 직속사원인 남걜사원과 옛 티베트 의회 건물은 박살 난 후였다.
- 사실 티베트 억압은 점령 직후인 1951년부터 행해졌는데, 당시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에게서 명망이 높던 티베트 승려들을 강제로 데리고 나와 채소밭에서 거름을 주는 천한 일을 공개적으로 시키거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양이나 개를 죽이게 하는 등 , 티베트 시민들은 그걸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또 무슬림들이 많은 위구르 자치주 지역에서는 홍위병들에 의해 쿠란이 불살라지고, 무슬림 이맘들이 끌려나와 물감을 뒤집어쓰고 조리돌림 당하는 등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에는 인민해방군이 회족 무슬림 1,600명을 학살하는 샤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의 기독교 신자들도 배교(背敎)를 강요당했고, 거절하면 당국에 끌려가 구타와 가혹행위 및 고문을 당하며 처참히 유린당했다. 개요의 소개영상에서도 나오듯이, 성당들도 정신 나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성모상 등 각종 성상들은 그 자리에서 꺼내져 처참히 부서지고, 그 자리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몇 남지 않은 수도원들도 파괴되었으며, 가정 예배나 기도도 금지되고, 홍위병들은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의 집에도 우르르 쳐들어가, 성경과 찬송가 서적 등을 빼앗아 불태우고 다녔다. 종교인들은 끌려나와 공개적으로 갖은 모욕, 조롱 속에 치욕과 수모를 당해야 했다. 모든 교회들은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 교회로 강제 통폐합되었으며, 이에 따르지 않는 교회는 교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파괴되고 폐쇄 당했고, 중국 정부를 거부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신자들은 강제수용소에 처넣어졌다.
2.3 무술
더불어 사제관계가 봉건적이라고 중국 무술도 개발살났다. 그니까 제 아무리 무술을 평생 익혀도 결국 다구리가 최강이다. 이는 유명한 소림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승(武僧)의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8] 우리나라의 서당 훈장처럼,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중국에서 무술가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노쇠해서 은퇴한 후에는 제자들의 봉양을 받기도 했다. 이런 모습과, 유파, 문파를 세워 제자를 받아 돈을 벌었다 하여, 공산주의 정권에서 좋지 않게 봤던 터라, 문화혁명 이후로 무술가들은 물론, 무술서적들도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현재는 중국무술이라는 이름 아래 장사꾼들밖에 남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무술이나 격투기를 배워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이랑 전수받은 걸 바탕으로 이것저것 피드백을 해줘야 배우는 사람이 제대로 배울 수 있는데, 그 맥이 끊겨버리니 완전히 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홍콩, 마카오, 대만, 화교 거주지 등지에서 보급된 것들로 인해 무술의 명맥이나마 겨우겨우 유지되는 상황. 게다가 중국정부 주도 하에, 우슈라는 이름으로, 수십, 과장해서 수백에 가까운 중국무술들을 한 덩어리로 강제로 묶어버리는 만행이 저질러졌다.[9] 이래서는 본래의 진면목과 각 문파나 고명한 무술가들 고유의 기술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기초수련법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2.4 스포츠
스포츠도 예외는 아닌지라, 중국 축구나 농구 분야에서 많은 인재와 옛 기록, 흔적 등이 말살되었다. 이 당시 중국은 선수들이 외국 풍에 물든답시고 올림픽은 물론 모든 체육종목의 해외대회에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국 축구인으로서 한국과 전 세계 축구 역사, 용품 등을 수집하는 이태형이 1950년대 중국 연변팀 축구 유니폼을 겨우 구했는데, 조선족인 정지승이 어렵게 보관하여 겨우 남은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국가 유니폼에서 클럽 유니폼까지 불태워져서, 지금 중국에선 이 시절 축구 유니폼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정지승도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축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후반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 축구계에서 일했으나, 심부전증으로 66살로 급사하고 만다. 그리고 중국에서 국기(國技)라 일컫는 바둑도 4구악[10]이라 하여 금지되었다. 이래놓고 마작은 어찌하지 못했다는 게 함정(...). 괜히 장제스가 중국인한테 모든걸 다 금지시킬순 있어도 마작은 금지 못시키겠다고 한게 아니다. 당시 손꼽히던 청년 기재로 이름을 떨치던 녜웨이핑은 흑룡강성의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바둑에 대한 중국정부의 인식전환으로 인해 다시 바둑을 두게 되었다. 훗날 녜웨이핑은 중국의 1인자가 된 뒤, "흑룡강성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녜웨이핑의 제자 마샤오춘이 10년 더 일찍 태어나서 이런 걸 겪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2.5 식문화
이 운동은 중국 요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궁중 예식을 기록한 문헌 다수가 문화 대혁명 때 소실[11][12] 된 것과 함께, 중국 요리의 전통이 문혁으로 인해 거의 끊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베이징에는 명청(明清)시대부터 이어진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음식점들이 많았으며, 황실요리에 버금가는 고급음식을 취급하는 고급음식점이 많았다. 당시 이런 류의 음식점들은 홍위병의 공격을 받고 가게 명을 죄다 향양(向陽), 동풍(東風) 따위의 근본 없는 이름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고기 샤브샤브를 팔던 '동래순(東來順)'에는 원래 유명 소설가 라오서의 휘호 '노점신풍(老店新風)'이란 간판이 걸려있었으나, 이 또한 홍위병에게 찢겨나갔다. 그리고 가게는 '민족찬청(民族餐廳)'으로 개명 당했다. 건륭제가 혼자 몰래 와서 먹고 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오는 사오마이(烧卖) 가게, '도일처(都一處)'는 '북경소매관(燕京烧賣館)'으로 개명 당했다.
홍위병들은 음식점을 멋대로 점령하고, 요리사들에게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요리를 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황실 요리를 팔던 고급음식점들은 삽시간에 만두나 빵, 죽 따위를 파는 급식소로 전락해버렸다. 역시 홍위병은 중국의 급식충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중국 요리의 심각한 단절을 가져왔다.[13]
2.6 미술
21세기가 되면서 중국 출신 현대미술가들이 뜨고 있는데[14], 이들 상당수가 문화대혁명 당시의 트라우마를 작업 주제로 삼고 있다. 중국출신 현대미술가들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이웨이웨이[15] 같은 경우, 시인인 아버지[16] 때문에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장샤오강 같은 작가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들을 주제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다만 문화대혁명의 포스터들은 그 촌스러운 원색미 때문에 프로파간다적으로는 높이 평가된다. 서구에서는 이 문혁 포스터만 모아서 전시회를 할 때도 있다.
2.7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도 예외는 아닌지라, 그 이전에 상당히 다양한 소재의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이 나올 정도였으나, 문혁 시기 들어 그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과 그 작품을 제작한 감독들은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고, 작품 소재와 촬영기법도 제한을 받게 되어 내용도 단순화 되었다. 거기에다가 강력한 심의의 영향으로 애니메이션 제작도 급감하여, 문혁 기간 동안, 중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제작된 작품수는 단 17편(참고로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제작된 편수다!)에 그치는 암흑기를 겪게 된다.
중국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산업에서 창의력 부족과 모방이 심하게 나타나는데, 당시 홍위병이었던 중국의 꼰대들은 이 분야에 대해 왜 니들은 일본이나 한국처럼 좋은 작품을 못 만드냐고 중국 젊은 세대를 많이 디스한다. 하지만 중국식 만화인 연환화나 수묵화 애니메이션 등이 가장 타격을 입게 만든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오히려 중국이 일찍부터 애니메이션 사업이 있었고 일본보다 훨씬 먼저[17] 장편 셀 애니 극장판을 아시아에서 처음인 1941년에 서유기를 만들었던 게 중국이다.(다만 스톱모션 장편 애니는 인도가 더 빨랐다.)
연환화 역시 굉장히 발달해서 중국 특유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자리잡아 가며 50년대에만 해도 부흥기를 맞고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도 완전히 개발살났다. 한 마디로 바로 그 홍위병들이 중국 애니메이션을 다 작살냈다. 그래놓고서 그 행위는 반성하지 않고 현대의 중국 청년들만 탓하니 정말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
2.8 연극
문화대혁명으로 가장 피를 많이 본 영역
4인방의 수장이자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특히 앞장서서 조진 분야이다. 이미 그 전에 장칭은 1964년에 경극 공연대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기존 경극이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내용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건전한 사회주의 노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디스했고, 모든 경극은 인민들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경극 전반에 대한 개작을 지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장칭의 방침에 반발하거나 미온적이었던 경극 배우들은 모두 숙청되었는데, 당시 경극 배우들에 대한 처우는 문혁 시절 홍위병이었던 첸카이거가 감독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1967년에 우선 기존 경극을 왜곡 개작하거나 아예 새로 만든 소위 혁명경극 5편, 혁명무용극 2편, 혁명교향곡 1편까지 8편의 공연물이 '문화대혁명의 이상적 음악 작품'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은 곧 양판소 양판희(樣板戱)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엄청나게 자주 상연되고 방송되었다.
- 제1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홍등기(紅燈記, The Red Lantern)》
- 《사가빈(沙家浜, Shajiabang)》
-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Taking Tiger Mountain by Strategy)》
-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 Raid on the White Tiger Regiment)》
- 《해항(海港, On the docks)》[18]
- 혁명무용극
- 《백모녀(白毛女, The White-haired Girl)》
-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The Red Detachment of Women)》
- 혁명교향곡
- 《사가빈》(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 혁명경극
혁명경극 중에 장칭이 특별히 좋아했던 작품이 《기습백호단》과 《홍등기》였다. 《기습백호단》은 한국전쟁 당시 금성 전투를 다룬 작품으로, 중국인민지원군 명의로 참전한 중국군이 한국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백호연대를 섬멸하고 그 군기를 노획한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이 군기는 아직까지도 단둥의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19]에서 전시되고 있다.
《홍등기》는 중일전쟁 당시 만주국 점령 하의 후린 철도역 탈환을 위해 잠입한 중국 공산당의 공작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원작으로, 신해혁명 이후 대를 이어 중국 공산당의 혁명에 동참한 리씨 집안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적에 대한 섬멸 의지와 순국하면서도 대를 잇는 혁명의 기상을 선전하는 작품이다.
《백모녀》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인 여주인공이 악덕 지주의 첩으로 팔려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뒤, 팔로군 병사로 지원해 싸우던 남주인공과 만나 공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내용이고, 《홍색낭자군》은 빈농 출신인 여주인공이 공산당 여군 부대에 입대해, 혁명 전투에서 맹활약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경극과 가무극 모두 기존의 화려한 의상과 무대 미술을 지양하고, 가수와 배우, 무용수들이 평범한 인민복이나 군복, 기타 수수한 평복을 입고 연기하도록 했고, 주인공은 무조건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한 영웅상으로 설정되어, 그에 반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철저히 타도한다는 내용이 골자가 되도록 했다. 극의 음악 반주는 기존의 소규모 기악 합주단이 아닌,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동원되어 맡도록 했고, 각본과 작곡, 안무를 개인 창작가가 아닌 여러 창작가들의 공동 창작 형태로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 양판희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고 판단한 장칭은, 2번째 양판희 창작을 지시했고, 여기서 뽑힌 9편의 작품이 제2차 양판희로 이름 붙어 보급되었다.
- 제2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용강송(龍江頌, In Praise of the Longjiang)》
- 《홍색낭자군》 (같은 이름의 혁명무용극을 경극으로 개작한 것)
- 《평원작전(平原作戰, The Warfare on the Plain)》
- 《두견산(杜鵑山, Cuckoo Mountains)》
- 혁명무용극
- 《기몽송(沂夢頌, In Praise of the Yimeng)》
- 《초원아녀(草原兒女, Little Sisters of the Grassland)》
- 혁명교향곡
- 《지취위호산》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 피아노 반주곡
- 《홍등기》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관현악 반주 대신 피아노 반주로 공연이 가능하도록 발췌 편곡한 것)
- 피아노 협주곡
- 《황하 협주곡(黃河協奏曲, Piano Concerto 'The Yellow River')》 (시안 싱하이의 칸타타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
- 혁명경극
2.9 음악
그나마 경극이나 무용극은 상대적으로 공연할 레퍼토리가 많은 편이었지만, 피아니스트나 관현악단의 경우, 이 1~2차 양판희나 대중 집회 때의 혁명가요 반주를 빼면 연주할 곡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인터내셔널가를 제외한 모든 국외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홍등기》 피아노 반주곡판과 《황하 협주곡》만을 연주해야 했다. 관현악단도 《사가빈》과 《지취위호산》의 교향곡판과 《황하 협주곡》, 그리고 혁명 경극과 무용극 반주만 하면서 이 시기를 버텨내야 했다.
당연히 이 시기에 활동했던 지휘자와 관현악단 단원들, 피아니스트들은 문혁 후, 전부 당시 상황에 학을 떼며 부정적인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중앙교향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였던 리더룬은, "하도 같은 곡을 수백 번 반복해 공연하다보니,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악단원들이 악보 없이, 심지어 눈 감고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가무단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천시양도, "우리는 문혁 시기 《백모녀》만, 그것도 수백 번을 공연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이 일을 지겨워했지만 그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물론 시기와 장소에 따라 이 양판희 외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것도 양판희 작품을 편곡해 정부의 검열을 거쳐 허가받은 것만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중국의 양악 분야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1977년에 가서야 수많은 금지곡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연주자 뿐 아니라 작곡가, 대본 작가, 연출가, 안무가들도 심한 탄압을 받았고, 양판희의 공동 창작 때를 빼면 개인 이름을 붙여 작품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예 거기서 배제된 인물들은 홍위병들에 의해 반혁명적이라며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투옥 혹은 하방(下放)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숙청을 당하거나 실종되어버리기도 했다.
몇 가지 예로 조선 출신 작곡가 정률성도 이 시기에 마찬가지로 고문과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문혁 말기에 세상을 떠났고, 비슷하게 고문과 하방(下放) 노동을 당해야 했던 작곡가 왕시린(王西麟)도, 홍위병들로부터 치아를 몇 개 잃고 얼굴 모양이 변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살아남았다.
중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사람이자 촉망받는 작곡가로, 베이징 중앙음악원장과 중국 정치국원이라는 요직까지 올라갔던 마시총(馬思聰)은, 문혁이 일어나자 졸지에 서방 추종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결국 1967년에 가족들과 홍콩으로 밀항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콥스키 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2위를 차지했던 피아니스트 류시쿤(劉詩昆)도, 문혁 시기 고문과 투옥 생활을 겪었고, 6년 동안의 징역을 살면서, 감방 벽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로 연습을 대신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문혁 이후의 연주가나 작곡가들은 그 당시의 음악이나 어법을 일부러 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중국이 사상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들어, 양판희의 연주가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 정부도 문혁 시기처럼 이들 양판희의 공연과 관람을 강제하지는 못하고 있고, 공연 횟수도 그 당시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져서, 일종의 추억팔이 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 중국 공산당에서는 문혁 시기 성경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오쩌둥 어록을 인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어록 구절에 가락을 붙인 어록가라는 혁명가요풍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고, 그 외 정부나 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혁명가요의 아이디어를 빌려 노래로 만들었다. 물론 이 운동 자체가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마오 찬양가도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 노래들도 문혁이 끝난 뒤에는 평가절하되어,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현재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 진행곡》도 이 당시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곡의 작사자인 톈한(田漢, 1898~1968)이 문혁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노래는 한동안 가사 없이 연주만 되는 곡으로 전락했다. 1978년에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찬양하는 가사가 나오긴 했는데, 이때 중국인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20] 이후 1982년 톈한이 복권되자, 원래의 가사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중국의 음악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후유증은, 오늘날 중국의 대중음악계에도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2012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과거 문화대혁명 시절 대중음악계를 미친듯이 검열하는 바람에, 실력 있는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이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싸그리 사라져버리는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 실력이 있는 대만의 가수들에게 높은 순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중국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는,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 중에 실력자들이 더 많고 인기도 더 많다. 결국 중국 대륙 출신 가수들은 상대적으로 비주류가 되어버렸다.
사실, 1950년대 이전까지의 중국은 일반적인 대중음악이라고 부를 것이 없었다. 애초부터,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표현의 자유 제한과 검열이 극도로 심한 공산주의 국가의 환경에서, 대중음악이 제대로 발전을 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그 악명 높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중국의 대중음악계가 완전히 전멸해 버렸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마오쩌둥 찬양가 같은, 공산혁명가, 공산당 찬양가, 인민해방군가 같은 것들 뿐이다. 결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검열로 인해 중국의 대중가요계가 위축되고 완전히 퇴보하면서, 날이 갈수록 대만의 대중가요계보다 인재풀이 크게 좁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0~1980년대에는 개혁개방으로, 광동어 노래와 대만 가수들, 등려군이 음악계를 평정했는데, 문제는 이들은 중국 대륙 출신이 아니라 대만 출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1990년대에는 배우로 더 유명한 장국영 등이 가수 활동을 하면서 중화권의 가요계를 빛낸 적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대부분 홍콩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지금까지도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을 불러오지 않으면 사실상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2000~2010년에 중국 경제가 크게 발전함과 동시에 시민들의 문화 수준도 향상되면서, 중국의 대중가요가 질적으로 제대로 된 발전을 할 기미가 보이나 싶었으나, 동시기에 가요계가 유튜브 등을 통해 세계화가 되고, 이 가요계를 미국과 유럽의 서방권 가수들과 한류폭풍의 영향력까지 겹쳐서 중국의 대중음악계를 완전히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가뜩이나 좁아터진 상황에서 중국을 대표할 만한 유명 가수가 나올 인재풀이 더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과장된 인식도 없진 않은데 "중국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는 정권 찬양이나 군가 뿐이다.", "하다 못해 북한이라도 약간의 예외는 있는데 중국은 그런 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단적인 예로 중국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매년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데 근현대사를 다루는 드라마들을 제외하면 이런 드라마들의 오프닝/엔딩 곡이 전부 정권 찬양이나 군가일 수는 없지 않은가?
2.10 영화
영화도 다를 게 없다. 중국의 연극계와 영화계는 경극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문화대혁명 이후부터는 발전이 아예 정지되어버렸다. 물론 중화권 영화가 성룡, 주윤발, 장국영 등을 중심으로 70년대부터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절정을 이루며 중화권 문화를 빛내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저런 영화계 인재들은 전부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 출신이라는 것이다. 중화권 음악계를 빛냈던 등려군이 대만출신이었다는 점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홍콩 영화는 1997년에 사실상 중국 영토가 되고나서는 과거의 명성을 전부 잃어버리고 몰락했으며, 이전의 전성기 시절에 남긴 수많은 영화들은 전부 홍콩의 영화로 취급하지, 중국 영화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중국 영화계가 쑥대밭이 되었던 1970년대 당시, 중국인들은 북한 영화를 많이 봤다. 북한의 만수대예술단과 예술단체들이 간혹 중국에서 공연하면 입장권 쟁탈이 너무 심하여 행정급별 혹은 중공당원 위주에 따라 입장권을 배분할 정도였다. 중국 장년층은 그 당시 유행하던 북한 영화들을 '추억의 영화'로 떠올린다.
물론, 홍콩 영화가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던 시절에도, 중국 본토에서 장예모, 첸 카이커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들은 계속 나오고, 공리 같은 재능 있는 배우들도 꽤 나와서 중국 영화의 명맥을 가까스로 이어가긴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지아장커같은 중국 감독이 칸, 베니스 영화제 등 세계무대에서 상을 받으며 끊겼던 중국 영화 맥이 살아나고는 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갈려 나갔을 영화 인재들을 생각하면 그 손실이 엄청나다.
결국 막장스러운 국가의 정책이 자국의 대중가요계와 영화계를 짓밟음에 따라, 대중문화계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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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역사를 좋아하거나 관심있는 위키러들도 밑에 항목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질것이다.
- ↑ 공묘(孔墓)와 공묘(孔廟)는 별개임에 주의하자.
- ↑ 전답의 단위, 6척 사방을 보(步), 100보(步)를 무(畝).
- ↑ 취소선이 쳐진 이유는 칭기즈 칸이 실제로 묻혀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불칸 산은 몽골에 있기 때문에 해당 유적의 진위여부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 ↑ 장쉐량이 일으킨 서안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다.
- ↑ 본래는 공자의 뒤를 잇는 제후란 뜻의 연성공(衍聖公)으로 불렸으나, 신해혁명으로 공화제가 되자 더 이상 귀족 작위란 형태를 가지기 곤란해졌다. 결국 1935년에 민국 정부에서 명칭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바꾸었다.
- ↑ 문혁 초기에 있었던 반달리즘만 사그라져서 그렇지, 정확하게 얘기하면 끝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 끝난 연도는 1976년으로 친다.
- ↑ 오해가 없도록 첨언한다면, 무승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전하고 익히는 전통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민간으로 퍼진 소림 무술은 살아남았다. 다만 실전(失傳)된 무술도 상당수이고, 억지로 현대에 소림사를 복원했지만, 과연 제대로 복원된 것이 있기나 할까, 하는 문제가 있다.
- ↑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우슈는 시작부터가 태권도와 같이 스포츠화 된 현대 무술을 지향하는 만큼 만행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우슈에 대한 평가를 이런 식으로 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는 의미.
- ↑ 낡은 문화, 사상, 풍속, 습관을 가리키는 말.
- ↑ 대표적인 사례가 만한전석으로 요리들의 순서, 즉 조합법을 알 수 없다.
- ↑ 프랑스 코스요리처럼 순번을 지키는지, 그냥 무작정 전부 늘어놓는지 등 예식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수가 없게 된데다가 문헌을 찾을수가 없으니 청나라 시절 만한전석에 대해 알고있던 환관(나이 문제로 기억이 엉망인) 을 찾아내어 최면요법으로 기억을 불러내려는 방법까지 두었다고도 한다.
- ↑ 가쓰미 요이치, 《중국 혁명의 맛》, 2015, 교양인
- ↑ 물론 중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투기자본이 미술품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긴 하다.
- ↑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베이징 주경기장의 설계 과정에 미술 컨설턴트(Artistic Consultant)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부 성향이 강해서 정작 올림픽이 끝난 후 가택 연금을 당했다.
- ↑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까 봐 시골로 하방당했다.
- ↑ 일본같은 경우 1958년에 만들어진 백사전이 첫 장편 애니이다. 물론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1943)이 있으나 이건 2차대전 홍보물 애니라서 장편 애니에서 제외된다.
- ↑ 원제 그대로 영역하자면 The Harbour가 맞겠지만, 중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저렇게 되어 있다.
- ↑ 미국에 저항하고 (북)조선을 원조한 것을 기념하는 곳.
- ↑ 이 노래가 쓰일 당시 중국은 일제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의용군 진행곡》은 항일투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사가 바뀔 당시 '일제가 침략한 때를 벌써 잊은 것이냐'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