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동광(金東光) |
생년월일 | 1953년 1월 5일[1]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부산광역시 |
출신학교 | 송도고등학교 - 고려대학교 |
포지션 | 가드 |
신체 사이즈 | 184Cm, 90Kg |
실업입단 | 1975년 기업은행 농구단 입단 |
소속팀 | 기업은행 (1975~1983) |
지도자 | 바레인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3~1985) 기업은행 감독 (1987~1992) 서울방송/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 감독 (1994~1997, 2004~2006)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1998~2004, 2012~2014)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5~2016) |
2000~2001 한국프로농구 감독상 | |||||
최종규(원주 삼보 엑서스) | → | 김동광(수원 삼성 썬더스) | → | 김 진(대구 동양 오리온스) |
목차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농구선수이자 농구 감독. 1970년대를 대표했던 전설의 포인트가드로 한 시대를 풍미한 명 선수이기도 하며, 동시에 여러 팀을 두루 거친 감독이기도 하다. 직설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을 정도로 화끈한 성격과 카리스마가 부각되면서 팬들 사이에서 광간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 선수 시절
이 분의 학창 시절을 직접 보게 되면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안습인데, 사실 이분 백인 아버지를 둔 혼혈이다.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후 당시 미 공군 기지에서 복무했던 아버지 조지 E.프레츠 씨가 전쟁 중 미국 전출 지시를 받는 바람에 어릴 적에 아버지를 거의 못 보았다. 이후 그가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 미국에서 전지훈련했을 때, 2001년 챔피언결정전을 마친 후에 보았을 정도. 감독 & 해설자로서의 모습만 본 젊은 농구팬들은 조금 튀게 생긴 사람 정도로 여기기 쉬우나, 선수 시절에만 해도 장발이 되면 머리가 아프로 스타일이 되고 누가 봐도 혼혈 티가 확 나는 외모였다. 출생 신고도 2년이나 늦게 했는데, 1950년대 혼혈에 대해 그토록 좋지 않았던 정서 때문에 그랬다는 아픈 사연도 있다. 그나마 인권의식이 개선되었다는 21세기 지금도 심심할 때마다 인종차별 논란이 나오고 있는데 당시엔 오죽했으랴... 김동광의 학창 시절은 말 그대로 헬게이트였다. 심한 따돌림은 기본이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집단따돌림을 근절해야 합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전학을 가서 중학교 생활을 하던 중, 같은 혼혈인 문영환을 만나게 되고 이 둘은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송도중학교 농구부의 故 전규삼 감독이 둘 다 서양 혼혈이니 나중에 신체조건이 크게 좋아질 거라는 기대로 둘을 스카웃한다 이후 수십년간 대한민국 농구를 떠받치는 전규삼표 가드의 첫 시작이었다.[2][3]
그러나 더 커질 것으로 생각했던 키는 좀처럼 자리질 못해 고등학교 졸업 시점까지도 178cm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입학 후 멈췄던 키가 갑자기 커져서 184cm까지 컸으니 당시를 생각하면 좋은 체격이었다. 더군다나 포인트가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2010년대 시점에서도 KBL 프로농구에서 180cm를 넘는 포가는 생각 외로 드물다.
이후 순탄할 것 같은 대학 생활은 지병인 빈혈이 찾아오면서 위기를 맞았는데, 그토록 훈련이 세기로 유명한 고려대 농구부에서 당시 코치가 김동광의 훈련을 막아가면서 몸 관리를 하게 했고 치료를 하면서 몸을 추스른 김동광은 2학년 때부터 레귤러가 된다. 그 후 대학무대를 정복하게 된다. 이때 동시대에 활동한 라이벌로는 박수교가 있다. 김동광과 박수교는 이후 1970년대 명 포인트가드로서 라이벌이 되었다. 훗날 프로농구 감독으로서 대차게 까이는 것도 비슷하다.
혼혈로서의 장점을 이어받아서 운동능력이 뛰어났고 포인트가드이면서도 몸싸움에도 강했으며 천부적인 농구센스와 포인트가드로서의 리딩은 당시 최고로 평가받았다. 국가대표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중국과의 경기중 240cm짜리 목철주한테 파울했다가 맞을뻔한 건 안자랑 현역 시절 그의 별명은 불멸의 가드, 코트의 마술사, 탱크가드, 코트의 야생마 등등. 별명만 봐도 최고로 평가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기업은행의 간판선수로 맹활약했다. 당시 기업은행 농구 팀에서 김동광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이름이었고 그 시절 잘 생긴 얼굴까지 더해 인기도 대단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삼성 & 현대 등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농구 팀을 창단하면서 기업은행은 선수 스카웃에서 돈빨이 받쳐주지 못해 밀리기 시작했고, 기업은행의 행보 또한 김동광을 실망시키면서 그는 1983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파격적인 조건으로 2년 9개월 동안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정인 기업은행 코치로 복귀하였다. 강호석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승격하면서 대기업팀들과의 힘든 스카웃 경쟁에서 나름대로 알짜배기들을 챙기면서 1992년 실업연맹전 우승도 일궈내는 등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3년 SBS 농구단이 창단되고 선배인 신동파 당시 SBS 감독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이때 기업은행에서 강력하게 이적을 만류했지만 결국 김동광의 SBS행을 막지 못했다. 1년 뒤 신동파 감독이 물러나자 SBS 감독을 이어서 하게 되었고, 특유의 드센 품성 탓에 총감독으로 물러나는 부침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농구 출범 이후 김현준 감독 대행의 뒤를 이어서 1998 ~ 2004년까지 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삼성 감독 시절 팬들에게 여러가지로 까이기도 했는데, 프랜차이즈 스타와의 관계 조율에 실패하고 내친 일 때문에 김동광 감독의 인격을 비난하는 팬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문경은을 팽하고 우지원을 데려왔던 일. 우지원이 먹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못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문경은만한 활약은 하지 못해 득점력 저하를 불러왔고, 우지원을 데려온 이유를 수비강화라고 언플했지만 정작 우지원 역시 수비가 헬이라 별 차이는 없었다.
더군다나 수비를 중요시하고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외국인 선수를 늘 단신조합으로 뽑아서 돌동광이라고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항상 191cm-199cm 조합의 용병을 선호해서, 2m를 넘는 상대 장신 용병들에게 속절없이 털렸다. 이 때문에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안목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단신덕후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성적 자체는 좋았지만 이런 점들이 늘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았다.
결국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곧바로 2004년 SBS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초반에는 괜찮았다. 6강 언저리에 있다가 교체한 외국인 선수 단테 존스의 신들린 활약을 앞세워 15연승을 달리면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5연승 당시 대구 오리온스에 크게 이기고 있던 도중 여유있게 벤치에 앉아 코치들과 웃으며 노가리(...)를 까던 캡처 사진[4] 덕에 광간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비록 4강 PO에서는 전주 KCC 이지스에게 1승 3패로 졌지만, 성공적인 복귀. 이듬해인 2005-06 시즌에는 5할 승률인 27승 27패를 기록하면서 선전했지만, 이 해 치열한 6강 PO 경쟁 때문에 7위로 밀리면서 PO 탈락했다.
문제는 이 2차 SBS-KT&G 시절은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너무 컸다는 점이었다. 물론 김성철-양희승이라는 쌍포도 있었지만, 팀의 핵심은 단테 존스였고, 존스에 대한 파해법이 나오면서 성적이 하락하더니, 결국 2006-07 시즌 초반 6승 10패에 그치자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그리고 2012년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복귀할 때까지 야인으로 지내게 된다. 백수로 논 것은 아니고, KBL에서 행정 일을 보았다.
3.1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복귀
3.1.1 2012 ~ 2013 시즌
2012년 돌상준이 작살낸 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으로 전격부임하면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김동광의 측근인 김상식이 코치로 같이 부임했고, 삼성에서 은퇴했던 이상민(농구선수)도 코치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민이 경험을 쌓아서 감독으로 갈때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몸빵용 감독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딱히 인연이 없는 이상민을[5] 김동광 감독 본인이 선임했을 리는 없고, 프런트가 꼽아놓은거 같은 구도라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기대 반 우려 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논란에 관계없이 전력보강 구상을 확실히 밝히는 등 의욕적으로 임하던 모습은 팬들에게 잘 어필이 되었다.
그리고 원주 동부 프로미와 부산 KT 소닉붐에서 팀과 잘 섞이지 못해서 계륵 취급을 받던 브랜든 보우먼과 대리언 타운스를 각각 트레이드로 데려와서 팀에 완벽히 적응시키면서 재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초에 용병을 갈구던 모습과는 달리 그 둘의 기를 잘 살려주는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높이가 필요할 땐 205cm, 125kg의 거구 타운스로 대처하고 속도와 득점이 필요할 땐 빠른 보우먼을 기용해서 재미를 봤다. 더군다나 보우먼의 경우 원주 동부에서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고 강동희 감독에게 이리저리 까이는 등 고생하다가 삼성 이적후 활기있는 모습을 보여서 죽은 용병도 살린다는 드립이 나왔다.
또한 브랜든 보우먼이 이적 후 원 소속팀 동부와의 경기에서 복수심에 불타올라 노마크 상태에서 필살 5점짜리 360도 계란후라이 덩크!를 구사하다 실패한 뒤 이승준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로 역관광당했음에도 오히려 보우먼을 격려해주는 모습에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보우먼을 자주 갈비집에 데려갔었다는...
3월 15일에 KCC를 꺾고 2년만에 6강 플레이오프에 팀을 진출시키자 농구팬들은 지난 시즌 꼴찌팀을 6강으로 이끈 김동광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돌상준은 역시나 까였다.
3.1.2 2013 ~ 2014 시즌
2013년 9월 30일 신인드래프트에서 1.5%의 확률을 뚫고 4순위 지명권을 따내 고려대 가드 박재현을 지명했다.#1 이후 원주 동부 프로미와 박병우 - 김명훈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서 빅맨 보강을 하였다. 사실은 2년간 임대형식으로 트레이드로, 2년이 지나면 소속팀으로 복귀할 수도 아니면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2
시즌 초반에는 마이클 더니건이 2경기만에 부상으로 빠지며 8연패를 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더니건이 돌아오면서 골밑과 수비가 보강되면서 중위권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후 팀이 연패에 빠지면서 슬슬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트레이드 부분에서 굳이 마이클 더니건을 내주고 허버트 힐을 데려온 것 이나, 박재현지명으로 인해 빅맨 보강을 위해 박병우를 내주고 김명훈을 영입한 부분, 김동우 영입등으로 선수 보강을 했지만,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한 부분을 비판받았다.
그런데 2014년 1월 27일, 팀의 성적부진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감독직 자진 사퇴를 선언했다.#3 잔여시즌은 김상식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이상민코치와 함께 치른다고 한다. 팬들은 마저 시즌 치르고 떠나시지 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드래프트때 좋은 선수 잡겠답시고 경기를 개판으로 치른 몇몇 팀들과 달리 끝까지 열심히 했던지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가도 있다. 더불어 최하위를 헤메는 어떤 팀의 수장은 왜 가만 있냐고 까이고 있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이충희의 동부 종신감독을 원하는 팬이 있을수도 결국 이충희도 사퇴(...)
현재까지 흑역사기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은 해놔서 비밀번호가 될뻔할걸 도중에 끊어놨기 때문에 그리고 돌상준 똥 치우느라 고생한것도 있고 서울 삼성팬들의 평가는 좋은편이다.
4 해설위원직
이게 웬일입니까??[6]
2011년에는 [[MBC SPORTS+|]]에서 해설을 하였는데, 해설로서 상당히 직설적인 스타일을 드러냈다. 가끔 무개념 판정을 하는 심판을 디스하기도 하는 등 프로농구판 모두까기인형의 위엄을 보이고 있어 해설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일부 팬들은 자기팀 선수를 디스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을 때도 있다. 농구팬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 감독 시절에도 외국인 선수가 전술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자 카메라 앞에서 아 진짜! 하면서 위엄을 보였던 전력이 있었는데 해설에서도 그 성향이 확실히 나타난 듯. 삼성의 감독을 자진 사퇴한 후 2014-2015시즌부터 [[MBC SPORTS+|]] 해설자로 다시 돌아왔다.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왕왕"이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아니라 익숙치 않지만 "시간 간격을 두고 이따금씩"이라는 뜻의 표준어다. 자신이 까드가드 출신이라 그런지 리딩가드의 중요성도 심심치 않게 강조한다. 또 백보드를 이용한 뱅크샷 자유투는 성공률이 높지 않다고 좋지 않게 보는 편이다.[7] 박찬희는 그래서 자유투 실패 때마다 항상 쓴소리를 듣는다.
5 국가대표팀 감독(2015 ~ 2016)
해설자 활동을 계속하던 중 2015년 6월 29일,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막장 농구협회가 명색이 국가대표팀인데 통역도 매니저도 전력분석관도 없이 감독 한명만 덜렁 선임해놓고, 지원은 나몰라라 하고 있어서 농구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매니저도 전력분석관도 없는 김동광호, 불안하다 관련 썰
이렇듯 제대로된 지원도 없이 선수들이 유니폼을 빨고 제대로 식사도 지원 못해주는 상황에서도 괜찮은 경기력을 보이며 고군분투 했으나, 중국에게 역전패 당하고 8강에서 이란을 만나 패하며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국가대표의 중심으로 떠오른 이승현과 가드로의 가능성을 보여준 최준용이 그나마 수확.
6 스타일
한마디로 신사다. 그리고 코트에서 직접 뛰는 선수마냥 땀도 많이 흘리는 열혈 감독이다. 작전타임때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며 답답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어투로 선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독려한다.
아버지가 미국인이라 그런지 외국인 선수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외국인 선수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 왜 광간지인지 실감이 난다.
아래는 어록.김동광 플레이어
- 수비는 열정이야. 수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거야.
- 넌 인삼공사 팀이냐? 아 이런 참...[8]
- 우리 수비가 뭐야? 난 셋하라고 한적이 없어. 아 돌겠네.
- (차재영의 플레이를 질책하며) 주고 다시 받아야지 얼루 들어가~! 언제 어려운거 가르쳤냐? ... 아이 참 답답한 놈이네.
- (타운스를 혼내며) Come on man!
- 이관희! 볼이 뜨겁냐? 잡은 볼을 왜 놓쳐 이 사람아!
- 게임 하다 침도 뱉을 수 있고 욕도 할수 있어. 너도 똑같이 해야지~! ...(중략)...너도 똑같이 욕해! 농구장에서 발길질 해야 돼? 정신이 없어.[9]
- (몸싸움에서 밀리는 유성호에게) 웨이트는 뭐하러 해?
- (선수들 플레이가 맘에 안드는지) 서 있을려면 여기(벤치)서 서있어.
- (심판에게 항의하며) 야 니들 눈엔 맨날 안보이냐? 왜 우리편만 안보여 쟤네 건 다 보이고?
- (4쿼터 종료 직전 남은 시간 문제를 두고)
- 김동광: 비디오 판독 해봐!
- 최한철 심판: 맞으면요?
- 김동광: 아 얘기해! 내가 감독 관둘게!
- 최한철: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볼게요(...).
- (자꾸 석연찮은 판정이 내려지자) 여기 전주 아니야 이 사람아! 여기 우리 홈이야! 죄송하긴 뭘 죄송해!
7 기타
아들인 김지훈도 고려대를 졸업하고 프로농구선수로 잠시 뛰었으나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3번이나 하면서 큰 활약은 하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2010년부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매니저로 활동 중이다. 프로 지명을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KT&G로 받아 낙하산 소리를 듣기도(...). 이 사실은 허재의 아들 허웅이 아버지에게 지명을 받지 않고 원주 동부 프로미에 입단하자 경기 해설 도중에 몇번 언급한 적 있다.
김동광 감독은 2012년 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김동광 감독 배수진 "농구명가 재건위해 아들도 잘랐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본인이 고대출신이다보니 수위급 물망에 오른 고대 후배들이 드래프트에 뛰어들때마다 고대 가드들을 지명했으나, 그 후배들은 믿거고 정신들을 증명하듯 감독 커리어 말년을 망치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박재현.
- ↑ 이 공식 생일엔 아픈 사연이 있다.
- ↑ 그 이후 전규삼의 손에서 강동희, 신기성, 김승현, 김현중같은 명품 가드들이 숱하게 나왔다.
- ↑ 강압적인 지옥 훈련부터 욕설, 구타, 똥군기로 얼룩진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에서 전규삼 감독은 대단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1996년에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36년 동안 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하면서 단 한차례도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부터, NBA 고급플레이들을 연구해서 직접 선수 개개인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을 짜줬다는 후문까지.
- ↑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김진 감독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 ↑ 김동광과 이상민은 초중고대 그리고 프로팀까지 전혀 접점이 없다. 학연도 아니고 지도자와 선수로 같은 팀에서 활약한 적도 없다. 반대로 김상식의 경우 기업은행, SBS에서 감독과 선수로 함께 했고, 김상식이 은퇴하자 김동광이 직접 팀에 건의해서 해외연수까지 보내준 사이다.
- ↑ 선수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오기 힘든 플레이를 많이 했을 때 이 대사가 항상 나온다. 선수가 이지샷 특히 노마크 상황의 골밑슛을 넣지 못했을때의 반응이 가장 많다. 물론 접전상황에 선수가 외곽에서 말도 안되는 터프샷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이 대사가 나온다.
- ↑ 실제로 농구 교본같은 것을 보면 뱅크샷은 정면이 아닌 대각선 위치에서 쏘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정면에서 쏠 경우 방향이 조금만 빗나가도 슛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 ↑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이동준이 마크가 숭숭 뚫리고 파틸로가 드라이브인을 해오자 비켜주는 올스타전스러운 플레이를 보여주자
- ↑ 12/13 시즌 이동준이 전주 KCC 이지스의 정희재의 트래쉬 토크(이동준의 입모양을 봐 짐작컨대 "뭐라고? 개새끼라고(혹은 양키새끼)?"로 추정)에 흥분해 그를 가격하고 테크니컬 파울을 얻자 작전타임의 상당부분을 이동준을 추스르는데 썼다. 이동준은 이 경기 후 자신이 혼혈이라 게임중 여러 불이익을 받는다면서 격한 감정을 토로했는데, 김동광 본인도 혼혈인지라 이동준이 겪은 일이 남일같지 않았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