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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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50대 정강왕 김황51대 진성여왕 김만52대 효공왕 김요
시호진성왕(眞聖王)
김(金)
만(曼) / 원(垣)
생몰년도음력(865년~ 869년) ~ 897년 12월 4일(29세 ~ 33세)
재위기간음력887년 7월 6일 ~ 897년 6월 (9년 9개월)

1 개요

신라의 마지막 여왕.

신라의 제51대 . 신라 3번째이자, 한국 역사상 마지막 여왕이다. 재위기간이 뚜렷한 몇 안되는 신라 왕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정강왕의 여동생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보아 865년~869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니 즉위 때는 19~23세였을 것이다. 현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환상이 있는지 선덕여왕(드라마) 등 일반적으로 창작물에서 신라의 여왕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선덕여왕진덕여왕은 여러 정황상 즉위 시점에서는 이미 최소한 중년, 혹은 할머니였고 한국사에서 '젊은 여왕'은 진성여왕뿐이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과 함께 신라의 세 여왕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각각 '선덕왕', '진덕왕'이라고 적혀 있듯이 진성여왕 역시 기록에는 '진성왕'이라고 적혀 있다.

정강왕은 죽기 전에 "여동생이 총명하니 선덕여왕진덕여왕의 전례도 있고, 잘 할 것이다."라며 후계로 지명했으나 '총명하다=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오빠 정강왕이 남긴 유조에 따르면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고 적혀 있다. 어지간한 남성들 못지않게 체격이 큰 여성이었던 듯 하다. 왕족이라 잘 먹어서 어지간한 남성보다 컸을지도..

2 정말 암군인가?

현대 관점으로 보면 지극히 개막장사생활로 유명한데, 이는 역사에도 공식적으로 기록된 근친상간(…) 및 역하렘(…)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魏洪)과 간통하였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위홍이란 사람의 성은 김씨이며 경문왕의 동생이니, 즉 삼촌(!)이다. 그리고 위홍이 죽은 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 두세 명을 궁에 끌어들이니 음탕 문란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大角干)으로,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쪽이 맞는 기록으로 보인다. 간통한 상대를 왕으로 추봉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로, 진성여왕의 남편이었기에 사후에 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정리하자면, 근친혼은 신라 왕실에서 계속 행해온 풍습이라는 점과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사실만을 미루어보아 암군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성여왕대에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 의하면 "'"(왕의) 은혜가 바다 같이 넘쳤다"'"라며 성군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이 비문은 "진성여왕은 과연 암군인가?"라는 의견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당대 왕을 암군으로 묘사할 순 없었을 것이므로 저 기록만으로 성군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온라인에서 욕을 그리 얻어먹은 선조도 당장 기록 보면 정철같이 저런 식의 찬양을 쓴 게 눈에 보인다. [1]

진성여왕의 정치에 대해선 재평가 된 다른 폭군들이나 암군들이 다 그렇듯이 후대의 폄하가 들어갔을 수 있다는 시각이 있다. 따지고 보면 진성여왕 당시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견훤후백제를 세우고, 도적이 들끓는 등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조리 진성여왕의 탓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계속 쌓여온 신라 자체의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러나 당시 혼란스러웠던 신라의 상황을 수습·재정비하지 못하였던 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신라의 멸망이 가속화되었던 점으로 보면 역시 유능한 정치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3 기울어진 나라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는 이미 신라는 망해가고 있어,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부를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어차피 들어오지 않을 돈 선심 쓴다는 것인가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2]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효녀 지은 이야기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에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배 100여척, 병력 2,500여명을 이끌고 규슈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이 궁예(弓裔)에게 1백여 명의 기병으로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6년(서기 892년) 완산(完山)견훤(甄萱)이 주를 점령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자칭하니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이후 8년(서기 894년)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아슬라(지금의 강릉시)로 침범해오니, 그 무리가 600여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는 기록과 9년(서기 895년) 8월 궁예(弓裔)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의 업적으로는 2년(서기 888년) 왕이 각간 위홍(魏洪)에게 명하여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남아있었으면 수능에 헬게이트가...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그 외에 894년 2월에 최치원(崔致遠)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여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이 골자라서 신라의 정치체제로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지만, 이미 양길견훤이 독립한 상황이니 개혁을 제대로 시도했더라도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가 망해가니 반란도 잦았으며 대표적으로는 원종·애노의 난, 적고적, 양길, 궁예, 견훤 등등이 있다. 자연의 이상현상도 잦았다는 듯하다. 제법 똑똑했다고도 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은 안습할 따름이다.

재위 9년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嶢)(뒷날의 효공왕)를 태자로 봉했고, 11년(서기 897년) 6월에 왕위를 이양한 후 12월에 사망했다. 이것이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란 설도 있기는 하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한국의 고전 영화인 1969년작 천년호에서는 배우 김혜정이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주인공인 장군 원랑을 흠모하여 그의 부인인 여화를 죽이려 하나, 여화가 천년 묵은 여우에 씌이게 되어 되려 목숨이 위험해진다.(...)

상당히 음란하고 방탕한 모습으로 묘사되나, 상대등을 위시한 귀족들에게 위협당하고 신분 때문에 혼인하지 못해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원랑을 유혹하는데 실패하여 슬피 흐느끼는 장면은 모태솔로의 비애를 제대로 보여준다. 정준호, 김효진 주연의 2003년작 리메이크판 <천년호>에서는 김혜리가 연기했는데, 여기서는 요녀의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나왔으며 노현희씨가 연기했다. 여기선 완전히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서, 정치에는 관심없고 최치원의 충언에도 심드렁하기까지 했으며 오직 향략에만 치중한다. 각지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두고 "모-두 저절로 사라질 거에요"라며 말하는 장면이 가관이다. 백성들은 공공연이 "대왕은 무슨, 암탉이지!!"읍읍라며 까고, 도선은 제자인 경보에게 "백고좌를 해도 왕 마음이 콩밭인데 해서 뭐하냐!!"라고 하고, 그 백고좌 자리에선 대놓고 진성여왕과 위홍을 비판한다.

한편 숙부 위홍과 불 같은 로맨스(한편으론 오글거리는)를 연출한다. "위홍이 가는 길에 비가 와서 땅이 질어져 마차가 더디게 가니, 궁궐에서 위홍이 사는 소량리까지 모두 돌을 깔라"는 지시를 내리질 않나, 아무 자리에서나 자신의 아래 반열인 신하에 속하는 위홍을 왕보다도 더 윗사람인 것처럼 대놓고 띄워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진성여왕과 위홍의 불륜에 심기가 불편한 위홍의 처의 눈치를 보긴 한다.

극중에선 그저 평범하게 살길 원하던 여인이 원치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한다. 위홍에 대한 사랑은 거의 순애보 급이다. 위홍의 마지막 출연이 된 제7화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꽁냥꽁냥한 대사는 특히 압권. 물론 이미 처도 있는 숙부와 어린 조카 간의 로맨스는 비밀이었으나 나이 든 숙부 위홍이[3] 무리를 하는 바람에 복상사(...)를 당한 뒤 여왕 측에서 숙부가 자신의 지아비였다는 사실을 제8화에서 커밍아웃해 버린다.

그러면서 "난 분명 상대등 위홍을 사모했다"느니, "신라 왕가에서 따지고 보면 혈연관계 아닌 사람이 어딨느냐"는 정신승리가 묘하게 당당하다.(...) 이후 견훤이 무진주를 장악하자 그제서야 좀 정신을 차린 건지는 몰라도 대책을 강구하라 하는데, 신료들도 답이 없다 하니 "아니 힘없는 나보고 뭐 어쩌라고" 라며 답답해 하는 장면으로 나오는게 마지막.

여담으로 본 드라마에서는 궁예경문왕의 버려진 서자란 설을 따랐기에, 둘은 이복남매가 된다. 다만 둘이 대면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현세의 작품에도 나오는데 말 그대로 변태 색마로 나온다.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주인공을 살려주는 나름 개념이 잡힌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5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진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
一年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듣다
一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年春二月 소량리의 돌이 저절로 움직이다
二年 삼대목을 편찬하다
二年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존하다
二年 왕이 미소년과 음란한 행위를 하다
二年 거인이 정치를 비방하는 글로 곤욕을 치르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年 죄수에 대한 사면과 승려에 대한 도첩을 수여하다
二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三年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
四年春一月 햇무리가 5겹 생기다
四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서 연등행차를 보다
五年冬十月 궁예가 북원과 명주관내를 습격하다
六年 견훤후백제를 세우다
七年 병부시랑 김처회가 당나라에 가던 도중 익사하다
八年春二月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다
八年冬十月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10여 군현을 깨뜨리다
九年冬十月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
十年 서남쪽에 도적이 일어나다
十一年夏六月 진성왕이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十一年冬十二月四日 진성왕이 죽다

삼국사기 11권은 문성왕부터 시작되어 진성여왕에서 끝난다.
  1. 물론 선조는 성군까지는 아니어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괜찮은 왕이었다.
  2. 인왕백고좌회, 약칭 백고좌회를 의미한다.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행사다. 주로 신라시대에 행해졌으며, 마지막 기록은 고려 원종강화도에서 행한 것이다.
  3. 실제 위홍의 나이는 죽을 당시 40대 초반 정도였다. 그 정도 나이는 신라시대라도 노인으로 취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략 오늘날 50대 중반~60대 초반 정도 포지션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