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

分斷國家

J’aime tellement l’Allemagne que je suis heureux qu’il y en ait deux.

나는 독일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여럿이었으면 좋겠다


— 프랑수아 모리아크

1 개요

원래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었던 나라였지만 전쟁과 외세의 압력 등으로 2개 이상의 국가와 민족으로 나뉘게되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다시 통일된 단일국가를 지향하는 국가(들). '분열국가(分裂國家)', 또는 '분국(分國)' 이라고도 부른다. 분리주의와는 다르다[1]. 자세한 건 후술.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나게 된 미국 및 서방권의 자유진영과 옛 소련 및 동구권의 공산진영이 냉전을 형성하게 되고 자신들의 영역이나 주변국 등에 근접해 있는 국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권 내의 위성국가화 하기 위해 하나의 국가이자 민족이었던 나라를 2개 이상으로 분할하게 되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분단국가란 이런 뜻으로 쓰이며, 한국이 현재 세계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라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위의 보다 넓은 정의를 적용하여 세계적 사례를 보면 이러한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언어, 민족, 종교 등의 차이로 분단된다. 아프리카 수단이나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같이 국민투표를 통해서 그 민족끼리 스스로 분할을 하였던 경우도 있고, 통일을 지향하나 외세에 의해 분단된 루마니아몰도바도 있으나 이념 대립 때문에 분단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언론에서는 흔히 한국을 현재 세계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말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는 냉전의 영향으로 이념대립에 의해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분단된 현실을 강하게 어필하여 민족적인 의식을 고양하려는 것이다. 냉전 시절 분단국이라 불리던 독일, 베트남, 예멘은 모두 통일이 된 상태라는 점 때문에 통일의 시급성을 강조하는 목적으로 흔히 쓰이는 표현법이다. 한국과 가까운 이웃나라인 중국 역시 냉전시대때 국공내전으로 국민정부와 공산당이 피터지게 싸운 후 대만으로 후퇴한 중화민국과 대륙을 점거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분단되었기는 하나, 남한과 북한처럼 '선분단후전쟁'이 아니라 '선전쟁후분단'된 점이 다르고, 후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 등 단일 민족 국가를 수백년간 유지해온 한반도와 달리 중국과 대만은 청나라 이전까지는 아예 다른 지역, 다른 민족으로 단절되어 지낸 시기가 비교적 긴데다 민족적, 언어적으로 중국과 비슷하게 대만 원주민들이 밀려나고 중국 한족들이 숫적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에 흡수, 동화 된 시기도 근세기에 그쳐 역사적인 배경이나 맥락이 남북한과는 다를뿐더러,[2] 양측의 규모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그로 인해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도 애매하여, 양쪽 다 국제[3]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갖는 남북한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4] 그러므로 한국은 유일한 분단국가라기보다는 냉전체제에 의해 잔존하는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분단상태에 있는 국가 중 현재 세계에서 유일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을 현재 세계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하는 것은 공적인 단체에서 언플을 통해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2 사례

다음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분단된 국가 사례이다.

2.1 현재의 분단국가

2.1.1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미국과 옛 소련이 주둔하면서 분단의 씨앗이 싹트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받다가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되어있었으나, 이념대립을 해결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별개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단되었고, 심지어 1950년에는 6.25 전쟁이 발발하여 동족상잔의 비극과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겪기까지 했다. 휴전 60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과 대립은 계속되고 있으며, 서로간의 왕래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지역에 고향이나 혈육을 둔 이산가족 및 실향민, 탈북자들이 이북의 고향 또는 친지들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남북한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1.2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장제스가 이끌었던 중국 국민당마오쩌둥이 이끌었던 중국 공산당의 대립과 갈등이 빚어낸 국공내전으로 결국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지금의 타이완 섬으로 몰려나게 되면서 지금까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분단된 채 함께 존속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며, 양안통일의 필요성에는 큰 틀에서 공감한다.

한국 전쟁 이후 본격적인 냉전 시대엔 공산국가이자 한국전쟁의 침략자로 낙인찍힌 중화인민공화국은 '죽의 장막'에 갇혀 있었다. 반면 중화민국은 비록 내전에서는 밀려 영토가 대폭 축소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UN에서의 지위는 여전히 상임이사국 China로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UN에서 심상치 않은 전개가 펼쳐졌는데,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새로운 중국 대표로 인정받으며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빼앗은 상황이 벌어졌고, 이에 반발해 UN에서 탈퇴한 중화민국은 졸지에 초특급 약소국 처지가 되어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기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이후 UN 가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강력한 저지 시도와 회원국 대다수의 외면으로 무산되었고, 국제기구에는 가명을 써서라도 제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세계무역기구에서 이 나라가 쓰는 이름은 대만팽호금문마조 개별관세구역이니 말 다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덩샤오핑 집권 이래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고 미국과도 수교를 하기에 이르러 중화민국에 대한 노골적인 강경 조치는 줄었고, 중화민국은 오랜 계엄을 종식하고 완전한 민주화가 실현된데다 국력의 한계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함부로 도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해협이라는 자연적 장벽까지 있어서 전쟁 위험은 오히려 남북한이 직접 맞닿은 한반도보다 훨씬 낮다.

지금은 중화민국의 기업들이 대륙으로도 많이 진출했으며 대륙 관광객들도 대만이나 진먼 섬을 관광차 방문하기도 하는 애매한 현상유지 상태이다. 이를 상징하듯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미 징병제를 폐지했으며[5] 중화민국도 징병제를 폐지하는 수순. 이런 면에서 보면 국제 사회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지만 양측의 경계는 느슨해져서 사정은 한반도보다 나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는 남북한과 달리 양안통일의 찬반에 대한 이견이 심하게 엇갈리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고 국내에서 이에 반하는 관점을 용납하지 않지만, 민주국가인 중화민국에서는 중화민국 중심의 통일이나 대등한 통일, 민주적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하는 자들중화인민공화국과의 통일을 반대하고 타이완만을 위한 국가로 재편할 것을 지향하는 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양안통일을 반대하는 후자는 단순히 통일 거부를 넘어 명분상으로라도 중화의 정체성을 가진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까지 내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만 문제에는 항상 '독립'이라는 키워드가 쓰이게 되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을 자기땅으로 여기기 때문에 반대론자의 행보는 '독립' 시도가 되는 것이다.

대만 독립파 중에는 대만이 아예 중국이었던 적이 없다(!!!)거나 그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현재의 대만에 있는 정부는 대륙에서 축출된 중국 국민당 떨거지들이 대만을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사적으로 대만은 청나라에 복속됐었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점령했다가, 태평양 전쟁 후 1945년에 중화민국으로 편입된 것이지만, 아무래도 타이완 토박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지배자만 바뀌었지 중화의 정체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일본이 지배할 때는 일본인으로, 중화민국이 지배할 때는 중국인으로 둔갑해야만 하는 것에 강한 반발을 느끼고 대만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확실히 대만은 오랫동안 역사, 민족 동질성, 언어 동질성을 공유해왔던 한반도의 남한-북한과 달리 근현대를 제외하면 역사적인 연관성이 적은 편이다. 이전까지는 한족과는 다른 대만 원주민들이 거주했고 민족적, 언어적으로 한족의 피가 가장 많이 섞여들어간 시기는 명나라 말기 때부터이다.

자세한 사항은 양안관계 참조.

2.1.3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 - 키프로스 공화국

키프로스에 언어, 민족, 종교가 완전히 다른 터키계와 그리스계가 거주하고 있고, 여기에 오랜 앙숙으로 있는 터키그리스의 정치적 갈등과 국제적 대립이 얽혀 사실상 분단 상태의 국가가 되었다. 현재 북키프로스는 터키만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하였을 뿐 국제사회에서는 독립 및 분단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미승인국이다. 때문에 UN이나 올림픽 등에서는 키프로스 공화국만이 키프로스라는 이름을 달고 참여한다. 분단 전 키프로스 국기는 현재 남키프로스 국기로 쓰이고 있고, 북키프로스에서는 북키프로스공화국 국기와 함께 터키의 국기가 게양되고 키프로스에서는 그리스의 국기가 게양되면서 각각 터키그리스를 등에 업고 강한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북키프로스는 어디까지나 터키가 키프로스 북부지방을 불법 점령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만 북키프로스에 남키프로스 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면 사실상 분단국이다. 물론 북키프로스나 터키 입장에서 남키프로스는 그리스의 괴뢰정권일 뿐이고 남부 지역에 대한 행정력이 못미치는건 마찬가지다.

이쪽도 한반도의 휴전선과 같은 철책이 존재하고 UN이 감시하는 Buffer Zone이 설정돼 있는데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와 유사하다.

2.2 예전의 분단국가

2.2.1 동독 - 서독

1945년 나치 정권이 패망하게 되면서 독일은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고, 알자스, 칼리닌그라드, 동프로이센등 많은 본국 영토를 주변국에 반환,할양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분할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분할 점령하에서 자유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소련의 이념이 대립하여, 결국 통일된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1949년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역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소련 점령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정권이 따로 들어서 동서냉전의 희생양이 되어서 동서로 분단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심지어 수도 베를린도 옛 점령군의 점령 지역에 따라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할되었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었다. 동구권의 개혁, 개방 열풍속에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서, 동독 정부는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10월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면서 분단국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담으로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정권 시대에는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 민족 국가의 일부로 여겨져서 강제로 통일이 되고, 이후 독일의 한 지역으로 여겨졌지만 전후에는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완전히 다른 국가로 분리되었으므로 '분단국가'로 보지 않는다.

2.2.2 북베트남 - 남베트남

프랑스인도차이나였던 베트남제2차 세계대전일제의 침략을 받다가, 일제의 패망으로 호찌민을 중심으로 공산성향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북반부에 수립되고, 남반부에는 옛 왕조를 모시는 베트남국이 성립되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통일된 정권을 수립하지 못하고 1954년 북위 17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55년 남반부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되어 남북베트남 간의 이념대립이 계속되었고, 결국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미국과 대한민국 등까지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나, 최후에는 북베트남이 승리하게 되면서 남베트남은 망하고 사회주의 통일로 분단에 종지부를 찍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사실상 북쪽의 흡수통일이고 통일 베트남 정권도 구 북베트남과의 연속성을 두고 있지만, '명칭'이나 '형식'만 놓고 보면 흡수통일은 아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남베트남 공화국'이 합쳐지면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으므로. 게다가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지자 바로 통일이 된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에 새 정권이 생기고 이 새 정권이 북베트남과 통일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진 후 통일이 될 때까지는 1년 2개월이 걸렸다.

2.2.3 북예멘 - 남예멘

예멘은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 남부지방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왕국으로 먼저 독립했으며, 1962년 쿠데타로 왕당파와 공화파 간의 8년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공화파가 승리하여 1970년 왕정이 완전히 폐지되고 예멘 아랍 공화국(북예멘)이 성립되었다. 남부지방은 1967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남예멘)이 성립되었다. 남예멘과 북예멘은 성향은 달랐지만,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며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공산권의 쇠퇴로 북예멘 쪽이 협상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1990년 통일하여 예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통일 후 구 북예멘 출신과 구 남예멘 출신들의 갈등으로 구 남예멘이 재분리를 선언하자 다시 내전이 터져서 북예멘의 승리로 끝났다.

2016년 현재 예멘은 내전 상태로 시아파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비롯한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예멘 정부는 남쪽으로 후퇴, 아덴을 임시 수도로 삼으면서 사실상 북예멘과 남예멘으로 다시 분단된 상태이다. 다만 후티 반군이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아서 분단 국가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아랍연합군이 결성되어 후티 반군과 전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후티 반군의 저항이 워낙 거세 사우디아라비아는 굴욕만 맛보고 있다. 상황이 고착화될 경우 재분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2.3 분단국가의 국세(國勢)비교

지역기준년도면적
(백분위)
인구
(백분위)
명목GDP
(백분위)
남한 vs 북한2014년100,210㎢ vs 120,540㎢
(45.39 : 54.61)
5128만 vs 2485만
(67.36 : 32.64)
1조 1,296억$ vs 144억$
(98.74 : 1.26)[6]
중화인민공화국 vs 중화민국2010년9,640,821㎢ vs 35,980㎢
(99.63 : 0.37)
13억 7,053만 vs 2315만
(98.34 : 1.66)
9조 4,691억$ vs 4,891억$
(95.09 : 4.91)[7]
키프로스 vs 북키프로스2012년9,251㎢ vs 3,355㎢
(73.39 : 26.61)
83만 vs 30만
(73.45 : 26.55)
219억1,000만 달러 vs 17억6,600만 달러
(88 : 12)
서독 vs 동독1990년248,577㎢ vs 108,333㎢
(69.65 : 30.35)
6217만 vs 1630만
(79.23 : 20.77)
9,457억$ vs 1,595억$
(85.57 : 14.43)[8]
남베트남 vs 북베트남1973년173,809㎢ vs 157,880㎢
(52.40 : 47.60)
1937만 vs 2393만
(44.73 : 55.27)
추가바람
북예멘 vs 남예멘1990년195,000㎢ vs 360,133㎢
(35.13 : 64.87)
716만 vs 259만
(73.44 : 26.56)
550억$ vs 120억$
(82.09 : 17.91)
독일, 베트남, 예멘 모두 인구가 많은 쪽이 체제경쟁에서 이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화민국 지못미
  1. 분단과 분리주의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논리면 식민제국기를 거쳤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피식민지국과 제국주의 열강들도 분단국가다(...)네오 나치들과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2. 물론 현재는 대만에서 중국 한족들이 대다수이고 원주민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 자체도 정체성은 중국인 이라는 정체성과 대만인이란 생각이 엇갈리고 있다.
  3. 남한과 북한의 수교국을 확인해보면 남한이 북한보다 수교국은 훨씬 더 많지만 전 세계적으로 남북한 동시 수교국도 꽤 많이 존재한다. 특히 과거 공산국가였던 베트남, 중국, 몽골, 독립국가연합, 동유럽국가들이나 6.25 참전 16개국 일부 국가들 중에도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있다.
  4. 90년대 들어 UN에 남북한 모두 가입하게 되었다. 한국의 UN 가입은 소련중공, 동독, 베트남, 폴란드, 쿠바 등의 공산권에서 계속 방해를 놓고 반대를 했기에, 냉전이 끝날 90년대 무렵이 되서야 UN에 가입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UN 가입은 미국, 중화민국, 영국, 서독,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국가가 계속 반대했다. 자기들이 가르기로 합의해 놓고서... 소련이 없었다면 남한도 없었고, 미국이 없었다면 북한도 없었다.
  5. 명목상으로는 한동안 유지하였다. 하지만 여기는 어차피 필요한 군인보다 징병 대상자가 더 많고 군대 갔다 오면 출세하는 분위기라 군대 서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가기 싫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명목상 징병제이고 사실상 모병제였으나 이제는 명목상으로도 징병제가 폐지되어 완전히 모병제가 되었다.
  6. UNSD 2012년 자료 기준
  7. IMF 2013년 자료 기준
  8. CIA World Factbook 1990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