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敎仁. 한국어로 읽으면 '송교인'.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가,혁명가.
2 상세
쑨원과 함께 중국동맹회를 세워 혁명운동을 이끌었으며 신해혁명의 주역. 중화민국 수립이후 국민당[1]을 창설했다.
후난 성 출신으로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반청(反淸)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곧 중퇴한다. 1904년 귀국해 창사에서 황싱(黃興) 등과 화흥회를 조직해 청나라 타도를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1905년, 쑨원의 흥중회와 결합해 중국동맹회를 세우고 기관지 <민보> 편집을 맡았으며 1910년 상하이에서 일간지 <민립보>를 발행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난징 임시정부에서 법제국 국장을 맡았다.
임시정부 초대 대총통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겨주었을 때 새 내각에서 농림총장을 맡았지만, 위안스카이의 반동적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곧 사임하고 국민당을 창설해 1913년 2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차기 총리가 될 것이 유력시 되는 상황에서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르자, 위안스카이는 암살을 사주해 1913년 3월 20일, 상하이에서 쑹자오런을 저격, 이틀 후 3월 22일 쑹자오런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향년 31세.
(1913년 3월 22일, 그의 장례식 사진. 관에 넣기 직전에 예복을 입히고 사진찍었다.)
그의 죽음은 중화민국史에 있어서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죽음으로 위안스카이는 매국적,독재정치를 펼치며 독주를 달리게 되었고, 중국은 더욱 혼란스럽게 돌아가버렸다.[2]
쑹자오런은 너무 시대를 앞서 가다 '실패한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의 정치노선은 쑨원과 많이 대비되는면이 많은데, 쑨원은 강력한 대통령제, 중앙정부제를 주장해왔으나 쑹자오런은 의원내각제, 즉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해왔었다. 사실, 민국 초기 쑨원의 입지는 커다란 영향을 얻지 못했다. 쑨원이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건 1917년~1922년 사이 전개한 호법운동 활동이었다. 따라서 민국 초기(1912년~1916년) 때는 쑨원보다는 쑹자오런의 정치적 영향이 상당히 컸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그를 '애국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3 여담
여담으로 중국에서 쑹자오런의 암살배후가 누구인지를 두고 논란도 상당히 뜨겁다.##
주로 위안스카이냐? 쑨원이냐? 놓고 논쟁인데, 당시 여러 정황을 봤을때, 위안스카이에 의한 암살설이 상당히 유력하다.
- ↑ 오늘날 국민당과는 관련없음.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기원은 쑨원이 일본에 망명했던 시기인 1914년 '중화혁명당'이 시초다. 쑹자오런 때의 국민당은 1912년~1913년 존속했는데, 이 정당은 위안스카이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당했다.
- ↑ 쑹자오런 암살 3개월 후,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세력들이 '타도 위안스카이'운동을 벌여 제2차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봉기는 전국적으로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고 위안스카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리고 쑨원은 7월에 일본으로 망명...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정적으로 급부상한 쑹자오런이 사망한 이후, 위안스카이는 가혹한 독재체제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