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역사

오스트리아의 역사
Die Geschichte Österreichs
고대중세 ~ 근세근대현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













2




















바벤베르크
가문
프르셰미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역사를 다루는 문서.

1 오스트리아의 등장

현재 오스트리아는 게르만 민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르만계 국가지만 본래부터 게르만의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종족적으로도 게르만족 혈통 외에 본래 이곳에 거주하던 켈트족과 이후 유입된 슬라브족의 피가 섞여들어갔다. 현대의 게르만적 정체성은 멀리는 로마시대에 유입된 바바리족에서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에 의해 점령, 관리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오스트리아 지역은 본래 켈트족이 살던 땅으로 켈트족이 세운 노리쿰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자리에 노리쿰 속주가 세워졌다. 로마 지배 아래 게르만계 바바리족(Bavarii)이 이 지역에 정착했으며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그러나 훈족의 등장과 이로 인해 촉발된 게르만족의 대 이동 시기에 로마는 이 지역에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동고트족롬바르드족이 연이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혼란은 그치지 않았고 곧이어 아바르가 이 지역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전후로 슬라브족이 유입되었다. 슬라브족은 아바르에 저항하여 사모 제국을 세우는 등 독립 왕국을 만들기도 했으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이 지역을 동방 유목민들과의 완충지대로 삼아 변경주를 설치하고 바바리아 공국 아래 둠으로써 관리를 받기 시작한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의 영향력 아래서도 이 지역은 아바르에 이어 등장한 헝가리를 상대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다. 이후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변모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가 바바리아 공국을 축소시키고 현재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설치하면서 현 오스트리아 정체의 기원이 시작된다.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은 이 변경백국을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 지역은 고 고지대 독일어로 Ostarrîchi라고 불렸으며 여기서 현대 독일어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칭하는 Österreich가 유래했다. 영어 이름인 Austria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당시 라틴어로 Marchia Orientalis (동부 변경주)라고 불렸으며 Marchia Austriaca로도 불렀는데 여기서 Austriaca는 고 고지대 독일어의 ostar를 라틴어식으로 활용한 것으로 의미는 Orientalis와 같다. 이 (Marchia) Austriaca가 변형되면서 현대의 Austria가 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 오스트리아를 부르던 Ostmark라는 표현은 Marchia Orientalis라는 라틴어식 표현의 표준 고지 독일어 번역이다.

이후, 이 지역을 통치하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몰락하고 보헤미아 왕국(프르셰미슬 왕조)이 오스트리아 변경백을 상속받고 공국으로 승격되었으며, 1273년 황제위에 오른 스위스 기반의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다뉴브 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1278년 보헤미아군을 오스트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낸 뒤 공령을 가문의 영지로 삼았다. 후에 스위스에서의 반란으로 합스부르크 본령을 뺏기자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가에게 제2의 고향으로 여겨져 중요 지역으로 부상한다.

2 유럽의 변경에서 유럽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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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강역.

1477년 부르고뉴 공 샤를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유일한 후손이었던 딸 마리는 프랑스의 압박으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아들 필리프를 남기고 5년 후 승마 사고로 사망하여 부르고뉴 공국이 통치하고 있던 전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옴으로서 유럽 정세에 몰아칠 격동을 예고했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아들 필리프는 스페인 왕국의 가톨릭 공동왕(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국왕)의 유일한 왕위계승자 후아나 왕녀와 결혼하였다. 이로서 그는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조가 되어 펠리페 1세로서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합치는 광대한 왕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고 필리프의 아들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帝冠)과 전 합스부르크 영지를 손에 넣으면서 카를 5세(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로서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의 수장으로 등극하였다.

혼인 정책으로 땅을 마구마구 얻었기 때문에 이 결혼정책은 "다른 가문은 전쟁으로 영토를 얻지만, 너 합스부르크여! 결혼하라!"라는 격언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합스부르크 제국은 중세봉건제도의 바탕 위에 결혼정책과 상속을 통해 이어받은 영토로 성립된 제국이었기 때문에, 많은 지역이 한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일 뿐, 내부는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아서 광활한 영토로 유럽 내 최강국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었음에도 그 크기에 비해 국력은 약했다. 지금의 미국이나 19세기의 대영제국 같은 독보적인 초강대국이라기보단 여러 강국들 중 상대적으로 강한 유럽 국가라고 하는 편이 이해를 돕기 쉬울 것이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까지의 역사는 합스부르크 항목을 참조.

17세기의 부침을 거쳐 중흥에 접어든 오스트리아는 4국동맹 전쟁(1718), 폴란드 계승전쟁(1735),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 수행으로 전비를 소모한다.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그 때까지 영토 확장에 도움이 되었던 혈연 관계가 오히려 역풍이 되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슐레지엔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2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슐레지엔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다.

쓴맛을 본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해 준비에 들어가자 이를 눈치 챈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가 오히려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 소위 7년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 때 힘이 부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 간의 라이벌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 치하의 프랑스를 끌어들이고, 러시아와도 동맹을 결성하고, 스웨덴이 가담함으로서 완벽한 포위 전선을 구축했는데 이것을 '외교 혁명', 동맹의 역전이라고 부른다.

이 때 이 동맹국들의 지도자들이 여성들이라,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세 자매의 패티코트 동맹"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 누가 봐도 완벽한 프로이센의 완패로 끝날 만한 전쟁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천재적인(그리고 필사적이었던) 기동 덕분에 시간을 6년이나 질질 끄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베를린을 포위당하여 프리드리히 2세는 함락될 때를 대비하여 독배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멸망을 눈앞에 둔 그 때, 러시아에서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덜떨어진 독일계 황제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여 전쟁을 중단해버렸다. 때문에 전쟁에 지쳐 있던 다른 동맹국들도 철수해버렸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어쩔 수 없이 슐레지엔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30여년에 걸쳐 프로이센을 본딴 전제-계몽주의적 개혁을 시작하며 내정에 힘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상실하기는 하였으나 멸망 직전의 오스트리아를 구해내고 중흥시킨 구국의 군주로 당대와 현대 모두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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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강역.

이후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무색해지자 황제인 프란츠 2세는 스스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칭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인 1806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대패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프랑스와 동맹국들에게 영토를 할양했으며 1809년에 복수를 위해 다시 참전했다가 또 털리고 다시 영토를 할양해 주는 등 오스트리아는 대단히 안습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2]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빈 회의에서 전쟁 중 잃었던 영토에 대한 대가로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달마티아 해안 등을 차지하였지만 독일 남부에 갖고 있던 영토들은 영영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독일 연방(1815~1866)의 주도권을 쥐고 당시 전 독일인들의 주요 화두였던 통일 독일의 구축과 자국 내의 오스트로슬라브주의, 헝가리 독립운동, 이탈리아에서의 카보나리당과 같은 사상들을 모두 억누르며 1848년 혁명을 방어, 제국 유지에 가까스로 성공하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소(小)독일주의를 외치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게 처참하게 박살나면서 독일에서 밀려나 독일어권에서는 남독일권으로 세력이 축소되었다.[3] 전통적 우방이던 가톨릭 국가 바이에른 왕국 또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독일로의 팽창은 저지되었다.

3 이중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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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이중제국의 강역.

오스트리아-헝가리 참조.

4 제국의 붕괴 이후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은 민족적으로 독일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대대로 계승해오던 오스트리아인들은 "이쪽이야말로 진짜 독일인, 북쪽 놈들은 프로이센 촌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도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4] 다만 오스트리아가 독일로 통합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은 다민족 제국과 그 광활한 영토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합스부르크가의 부담과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던 프로이센 왕국의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과 다민족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고, 독일오스트리아가 모두 독일 민족(독일어권)의 공화국이 되어 버린 전간기 시대에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한 독일/오스트리아 통일론이 강하게 부상,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의결되었지만 독일이 강대해지는 것을 우려한 연합국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따라서 나치 독일이 민족 통합의 기치를 내세우며 오스트리아 내에 나치당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안에서 이미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구축한 파시즘 정당 기독사회당 정권(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탄압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4년 돌푸스를 암살하였고, 뒤이어 집권한 쿠르트 슈슈니크는 나치당에 대한 제한을 풀었다. 이 기회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더욱 세력을 확장하엿고, 공공연히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하게 된다. 1938년 3월 결국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왔고,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끼 독일-오스트리아의 합병(안슐루스)를 선언한다. 이런 행각은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관계를 냉각시켰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국경에 집결했으나, 결국 외교적 협상끝에 이탈리아의 '양해'를 얻고 무마된다. 이때도 오스트리아 독립주의자가 있었다. 즉 귀족주의적인 견해에 따라 "진퉁 귀족 럭셔리 독일민족인 오스트리아인이 왜 쌍놈의 히틀러가 이끄는 무식한 프로이센인들의 나치당에 머리 숙여야 함?"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나치당에 의해 철저히 탄압되었고, 결국 독일과 같이 싸운 전쟁(2차대전)에서 또 패배했다(…).

…독일인과 연합했다가 두번이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그 뒤로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인을 굉장히 미묘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5 현대

2차 대전 후에는 독일과 같이 미국/소련/영국/프랑스 4개국이 분할점령해서 신탁통치를 했다.[5] 다시는 독일과 통일하지 않고, 영구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신탁통치 10년만인 1955년 독립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독일 민족국가'는 공산권의 동독, 자유세계의 서독, 중립국 오스트리아라는 삼국으로 분리된 것이다.[6]

냉전시대 자본주의 서유럽과 공산권 동유럽을 잇는 지리적 위치와 중립국이란 점 때문에 미소 정상회담도 여려차례 열리는 등 양진영간의 외교와 경제교류가 빈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프랑스의 마담 드 퐁파두르,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각각 동맹을 주도했다.
  2.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오스트리아는 현대의 독일 남부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와 바이에른주에도 영토를 보유하고 있던(그러나 이 영토들이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비연속국 참조) 나라였고, 그 영토 중에는 프라이부르크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곳에 보유하고 있던 영토들을 이 때 다 잃어버렸고 두 번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3. 사실 비스마르크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고 하는 데, 오스트리아가 받아들이지 않아 단념했다고 한다.
  4. 다만 히틀러 본인은 봉건적 냄새가 짙게 나던 오스트리아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병역의무까지 기피해 도망쳤음에도 독일군에 입대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히틀러가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싫어했던 이유에는, 유대인을 포함해 온갖 인종이 섞여 살던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현실도 작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간 독일도 폴란드인과 덴마크인, 프랑스인이 소수민족으로 있었으니까 '인종적으로 순수'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북쪽의 독일 제국 또한 여러 왕국과 제후국들로 구성된 느슨한 연방제로, 각 연방국의 통치는 오히려 오스트리아보다도 봉건적이었다. 그야말로 모순.
  5. 밴드 오브 브라더스 10부의 배경이 오스트리아다.
  6. 엄밀히 따지자면 두개더 있긴 하다. 룩셈부르크의 경우 20세기엔 대공위를 부르봉 왕조가 상속하고, 오랜기간을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를 오갔으며, 두번의 세계대전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치기전에 관광 코스로 항상 들를정도로 갈린 턱에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 보단 룩셈부르크인으로 분리되었으며,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라 불리는 리히텐슈타인이 남아있긴 하나, 2차세계대전 이후 국방/주변국을 제외한 국제외교 부문을 스위스에 맡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