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대한제국)

(융희제에서 넘어옴)

조선의 역대 국왕
26대 고종 이희27대 순종 이척대한제국 멸망
(조선총독부)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
초대 고종 이희2대 순종 이척황조 멸망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일본 제국 창덕궁 이왕
경술국치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초대 이왕 이척2대 이왕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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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어진 복원모사도, 2014년
묘호순종(純宗)
시호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연호융희(隆熙)
본관전주(全州)
능묘유릉(裕陵)
이척(李坧)[1]
군방(君邦)
정헌(正軒)
출생지조선 한성 창덕궁 관물헌
사망지일본 제국 식민지 조선 경성 창덕궁 대조전
즉위식1907년 8월 27일
장례식1926년 6월 10일
배우자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아버지고종태황제
어머니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민씨
생몰기간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6일 (52년 1개월,1만 9024일.)
재위
기간
대한제국 황제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3년 1개월,1136일.)
식민지 조선 이왕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6일 (15년 7개월,5719일.)
조선의 역대 왕세자
헌종 이환순종 이척칭제건원
대한제국의 역대 황태자
칭제건원순종 이척의민태자 이은

1 소개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또한 순종을 마지막으로 한반도에는 정식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 역사상 최후의 군주가 되기도 한다.[2]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약칭 순종효황제. 융희황제, 융희제라는 호칭도 사용하지만 대한제국 공식 의전 호칭이 아니다. 생일인 3월 25일은 대한제국 때 건원절(乾元節)이라는 이름의 국가경축일이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 7일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황제탄신경절을 건원절(乾元節)로 개칭하자고 상소해 이를 윤허하였으며, 다음해인 1908년(융희 2) 음력 2월 8일양력으로 환산해 3월 25일로 정했다.

참고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보다 1살 많다.

2 병약한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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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낳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성년이 넘어서도 생존한 이로, 귀한 아들이지만 대신 건강은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성황후가 무속에 기대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러시아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커피에 아편을 넣어 올렸는데 맛이 이상함을 느낀 고종은 바로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여 순종의 이가 모두 상하였다. 그 탓에 이가 빠져 틀니를 끼고 살았으며 커피를 마신 며칠동안은 혈변을 누는등 몸살을 크게 앓았다고 한다.

이 이후 약간 어벙해 보이는 외모까지 겹쳐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순종의 입지는 그야말로 공기가 되었지만 당시 후계자로 삼을 만큼 나이가 차고 능력있는 자손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버지 고종은 후계자를 교체하지는 않았다. 단적으로 대부분 독립운동 단체나 계몽단체의 초기 정부형태는 입헌군주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고종 사망 이후에는 일제히 공화정으로 돌변한다. 순종을 내세워서는 구심점 역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애초에 고종이 자신의 퇴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또 그 부작용 때문인지 순종에겐 직계 자손이 없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성불구였다는 기록도 있다. # 하지만 그의 성기능이 정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어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한 심인성 발기부전을 의심하기도 한다.

3 재위기간

3.1 반강제 즉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보낸 것이 일본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결국 고종이 황태자에게 국정의 섭정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는데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순종의 즉위식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말이 황제였을 뿐 실권은 일본을 등에 업은 이완용송병준에게 있었고, 이완용과 송병준 이두사람의 주도하에 일본에 국권을 넘겨주는 일이 착착 진행되어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고종이 퇴위하면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장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내관 두 사람이 이들의 대역을 맡는 촌극이 벌어졌다.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입법권, 관리임명권, 경찰권 등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해 서울에서 대거 해산군인들과 일본군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3.2 명목상의 대한제국 황제

그 해 순종은 즉위하면서 바로 아랫 동생인 의친왕을 놔두고 그보다 20살이나 차이나는 둘째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영친왕은 순종의 이복동생이지 아들뻘이 아니므로,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로 책봉해야 한다. 실제로 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이 황태제로 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하지만 순종은 정종이 태종을 세자로 삼은 일을 전례로 들면서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 호칭 문제는 고종의 의중이 개입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엄귀비의 견제설, 일본의 견제설 등이 있다. 의친왕의 어머니 장 씨는 종1품 '귀인'으로 사후 봉해졌지만, 영친왕의 어머니 엄 씨는 아예 품계를 넘어선 '황귀비'였는데다[3] 살아 있으므로, 서열 문제가 끼어있기도 했다. 곧바로 일본은 유학 명목으로 영친왕을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혼인시켰다. 순종황제의 즉위 이듬해인 1908년에는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어 일본의 경제권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은 순종군복을 입은 순종

실로 나라가 멸망 직전으로 가고 있는 가운데 각처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나고 실력양성운동도 일어났지만,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지는 못했다. 순종은 이완용송병준, 일본의 압력으로 무력하게 국권을 하나둘씩 일본에게 넘겨주다가 결국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덴노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방식으로 조선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순종이 이 일을 나름대로 막으려고 했던 순정효황후 윤씨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원래 한일합방조약 각서에는 일본 덴노와 순종이 서명과 어새의 날인이 필요한 '조칙'을 내리기로 했는데 정작 어새만 찍힌 '칙유'가 내려졌다는 점을 들어 순종이 서명을 거부해 어쩔 수 없이 도장만 찍은 칙유를 내리게 한 것이 아니냐는 연구가 있기는 하다. 정확하게는 조약서에 국새를 찍었는데 조서에는 찍지 않았으므로 효력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와서 효력이 없었다고 하는건 의미가 없지만 일제가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합병했는지 알 수는 있다.

3.3 식민지 조선의 창덕궁 이왕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뒤 왕공족으로서 이왕(李王) 직위를 받게 된다. 미야케는 쇼토쿠노미야(昌德宮). 우리가 아는 그 창덕궁을 가리키는 거 맞다. 그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며 당구를 즐겨 쳤다고 한다.

고종의 장례식 때는 양복을 입은 문상객이 오면 아예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아 좌중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인 고관들까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을 왔다는 증언이 있다. 결국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사망했는데 순종의 국장을 기회로 제2의 3.1 운동을 시도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왕직은 영친왕에게로 이어졌다.

사망 전에 남긴 유조(유언)가 있는데, 궁내부 관리인 조정구에게 구술하도록 하여 이후 미국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게재되었다. 주 내용은 한일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 및 친일 관료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순종 본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를 한글로 번역, 일반인에 공개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신한민보의 기사와는 달리 궁내부의 조정구는 순종이 죽기 1달 전인 1926년 6월말에 죽었다는 것. 유언을 꼭 죽기 직전에 남기지는 않으므로 조정구가 죽기 전 순종이 미리 유조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를 증명할 증거는 없다. 어쨌건 사실 순종은 말 그대로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뭘 하고 자시고 할게 없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유릉(裕陵). 고종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몄다. 이 능에는 순종, 순종의 첫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모두 합장되어 있다. 조선 왕조의 능제 중 유일한 3인 합장릉 형식이다.

4 평가

최후의 임금으로써 뭔가를 하려했던 흔적도 없었고 친일파와 일본 세력에 휘말렸으며, 망국 후에도 일제가 보장해 준 이왕직에 만족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 그 이상의 특별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단, 순종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저항은 고종이 다 해보기는 했다. 외교적 청원이라거나 해외 단체와의 연결이라거나, 국내 반외세 세력과의 연결이라거나 국외로의 탈출시도라거나, 심지어 결과적이지만 죽음을 통한 저항까지. 순종은 옆에서 그게 실패하는 것을 보고 성장한 것이다. 더구나 모친은 일본에 저항하다가 대놓고 암살당했다. 애초에 즉위 당시 이미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몸이 저렇게 병약해서야 뭔들 할 수 있었겠냐만은......

궁중 의사 알렌이 싫어했는데, 알렌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둥, 부정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전반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명석하다는 평도 내렸지만, 대외적인 이미지가 바보로 굳어진 것이 문제다. 여러모로 삼국지 유선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도가 없었다. 그나마 국왕의 이미지 정도? 어쩌면 정말 유선처럼 기막힌 처세술이었을지도.

5 독서광

상당한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덕에 보학에 밝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사람의 본관과 이름만 듣고도 상대의 항렬을 알아내 몇 대손인지 맞히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직계 조상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한다.[4]

6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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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그린 황룡포본1936년 추가 이모한 어진의 사진2014년 복원한 복원모사도

순종의 어진은 1935년 신 선원전에 봉안된 현황을 기준으로 황룡포본 1축, 홍룡포본 1축, 군복본 1축, 면복본 1축, 군복본 1축, 복건본 1축 등 총 7축이 제작되었다. 그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진은 순종 사후 1928년 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이다. 황룡포본은 완성 후 창덕궁 신 선원전에 봉안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어진 및 왕실 유물과 함께 부산으로 옮겨져 관재청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러던 중 1954년 12월 10일 발생한 용두동 대화재로 인해 어진의 오른쪽이 훼손되었다. 당초에는 7본 모두 불타버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황룡포본은 1936년에 이모한 후 촬영한 흑백 사진, 이당이 그렸던 순종의 다른 어진의 얼굴,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황룡포 등의 자료를 토대로 2014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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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초상 사진, 1909년순종 어진 유지 초본, 김은호순종 어진, 김유진, 164 × 104㎝

군복본 1축은 1909년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김은호가 그린 어진 유지 초본이 남아 있으며, 김유진 화백이 이를 토대로 그린 어진도 있다.

7 기타

  • 야사에 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주다 망국의 이야기가 실린 대목을 읽자 그 궁녀의 뺨을 치며 자신을 능멸하지 말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순종 행장에도 표현을 약간 순화하여 기록하고 있다.[5] 그 야사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의 순종이 망국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며, 암군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고종과 달리 등극 때부터 아무런 실권도 없이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최초로 개방한 황제이다. 물론 일본의 강요가 크긴 했지만, 순종 본인의 의지도 없지는 않았던 듯 하다. 창경궁과 창경궁에서 보관하고 있던 황실유물들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경복궁 내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문제는 이게 국권이 피탈된 이후에는 완전 놀이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창경궁이 1909년 창경원이 된 이후에도 죽 그 곳에서 거처했다. 순종 생전에는 매주 목요일에 창경원이 폐쇄되었는데, 순종이 직접 창경원에서 산책하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서울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 있는 고종 어극(즉위) 40주년 칭경기념비(속칭 비각)의 현판 글씨는 그가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다. 현판을 잘 보면 끝에 예필(睿筆)이라고 쓰여 있는데, 예필이란 황태자가 쓴 글씨를 말한다.
  •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다. 대한제국 황실 복원 문서를 참조.
  • 메이저리그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소속팀 시카고 컵스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1908년대한제국 순종이 제위에 있을 때였다. 이것을 떡밥 삼아서 얘기할 때 알기 쉽게 "순종 2년"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순종은 군주의 묘호이고 연호가 아니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융희 2년', 또는 "순종 1년"이 맞다.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대체역사물/작품에서는 아버지 고종처럼 30% 정도의 작품에서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 1992년에 방영되었던 MBC 월화 드라마 '분노의 왕국'은 순종이 '이호'라는 아들을 비밀리에 남겼다는 가상역사적 설정을 주제로 하고 있다.
  • 역시 MBC 드라마인 마이 프린세스에서도 순종이 '이영'이라는 아들을 낳아 신분을 숨기고 민간에서 자라게 했다는 설정을 갖고 있으며, 궁(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대한제국 황제 성조 또한 황실의 적장자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순종의 아들이라고 추정된다. 원작 코믹스의 경우 원작자의 설명에 따르면 의친왕쪽 가계에서 이어지는 거라고 되어 있다.
  1. 고종의 아들들 중 이름을 하사받은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는 모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대개 같은 왕의 아들들은 이름자에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고종의 사가(私家) 일원인 흥선대원군과 그 형제들의 손자 이름도 항렬자를 제외한 이름 글자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과 이문용(李𪣢鎔).
  2. 그러나 한반도 북부에 '실질적인' 군주가 나타나긴 했다. 김씨조선 항목 참조.
  3. 황후 다음 지위로, 당시엔 내명부에서 가장 높았다.
  4. 조선의 예법에서는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게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일례로 19세기 풍양 조씨 세도가의 일원이었던 조병구는 고도 근시자여서 평소 안경을 끼고 생활했는데, 당시 임금 헌종의 면전에서도 안경을 쓰고 나타나자 헌종은 평소답지 않게 진노하며 그를 크게 나무랐던 적이 있다. 결국 두려움에 휩싸인 조병구는 그날 자신의 집에서 음독자살한다.
  5. "나이든 궁인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가 어떻다고 말하니, 즉시 엄하게 꾸짖어 물러가라 명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선황제(先皇帝)의 일을 논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녀배(宮女輩)들이 감히 선조(先朝)에 대해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