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선수 경력

1 개관

이승엽의 커리어는 크게 대한민국 시절과 일본야구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에서는 레전드급, 일본에서는 두 해[1]를 제외하고 고난의 연속이라고 표현 가능.

2 각 시기별

2.1 고교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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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이승엽은 1993년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12년만의 청룡기를 모교에 바치는데 일조했다.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활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다만 고3때는 팔꿈치 부상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2 한국프로야구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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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신인 시절, 삼성 입단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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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전에서 데뷔 첫 홈런을 치는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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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타이론 우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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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27일 대구 LG전에서 홈런을 치며 당시 월간 최다홈런 신기록(13개)을 기록한 이승엽.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앳된 얼굴이다.

처음에는 한양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가계약되어 있었으나, 수능에서 총점 40점 이하를 기록[2]하며 대학 진학 자격을 상실하여 자연스럽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된다. 이 당시 교육부의 규정에 따르면 체육특기자라 하더라도 수능시험 총점이 40점을 넘지 못하면 대학 입학이 불가능했다. 프로 입단을 위해 고의로 시험을 망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저 멀리에...그러나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본인 입으로 사실임을 밝혔다. 정확히는 37.5점을 맞았다고.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는데 선배들이 술을 엄청나게 권하는 바람에 본인이 생각한 대학생활은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의로 시험을 망친 거라고...

경상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청룡기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한 투수여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때에도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 좋은 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팀의 빈틈을 메꿔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의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군 면제를 받았던 상태였지만...하지만 우용득[3]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는 이승엽에게 배팅 재능이 있음을 확인해[4] 스프링캠프에서 돌연 타자로 전향시켜, 1년간 타자로 기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여기에 우용득 감독은 한 수 더 떠 기존에 1루수였던 양준혁을 외야로 이동시키고 검증도 안 된 고졸 신인을 1루수[5]로 박았다. 1995년 데뷔 첫 시즌 타율 .285에 홈런 13개로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지만,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듬해인 1996년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는데, 백인천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해 주었고[6], 1년만 타자로 활약한다는 조건도 까먹고 1996년에 조정기를 보낸[7] 이승엽은 1997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장타에 눈을 떠 홈런 제조기로 명성을 높였으며, 이 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화려한 타선의 중심축에 서게 되었다. 참고로 이때까지 이승엽의 별명은 신해철이 이끈 밴드 N.EX.T의 노래인 '날아라 병아리'에서 나온 얄리 혹은 스나이퍼였다. 3할을 쳐내는 정교함과 필요할때 마다 나오는 클러치 능력등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 하지만 후술할 활약으로 라이온킹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이 별명은 사실상 묻히게 되었고 이후 스나이퍼의 칭호는 이 분이 가져가게 된다. 하지만 최훈은 스나이퍼의 기본은 목표를 보는거라면서 보는것 밖에 못하는 스나이퍼라고 카툰으로 디스했었다[8]

연도홈런
199732[9]
199838[10]
199954[11]
200036[12]
200139
200247
200356[13]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의 홈런왕 신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1997년부터 일본 이적 직전인 2003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홈런 30개 이상을 쳐냈다. 1998년, 2000년을 제외하고 다섯 번의 홈런왕을 차지했다. 특히 1997년에는 앞선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삼성을 일약 포스트시즌에 복귀시킨 주역이 되었고,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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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리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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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30일 광주 해태전에서 54호 홈런을 친 이승엽.

특히 1999년 54홈런으로 1998년 당시 두산 용병이었던 타이론 우즈의 42개, 토종타자로서 장종훈이 세웠던 41개보다 무려 열 개 이상 많은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면서 그의 주가는 폭등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홈런왕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 1999년 5월이 특히 뜨거웠는데, 한 경기 홈런 3개를 밥먹듯 쳐내면서 순식간에 5월 말 합계 20개 중반대 홈런숫자를 기록했고, 8월 초에 장종훈과 우즈의 기록을 깨 버렸다. 그 해 왕정치의 기록을 깨뜨리고 60개 이상 칠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나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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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홈런 라이벌 심정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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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22일 대구 SK전에서 김원형을 상대로 세계 최연소 300홈런[14] 을 기록하고 들어오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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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한국프로야구 홈런 신기록 (56호) 달성. 2014년 현재까지도 한국프로야구동양인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며,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야구에서도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깨뜨리기 이전까지 최다였다.3루베이스를 돌고있는 이승엽을 축하해주는 코치는 류중일이다.전광판에 깨알 김풍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면 기분 탓이다.

그리고 홈런 기록을 새로 써나가던 시절인 1999 시즌과 2003 시즌 때 대구구장은 외야가 먼저 매진이 되고 사람이 더 많이 들어갔으며 잠자리채가 쫘악 깔려있었다. 특히 1999년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 홈 마지막 경기에서는 홈런성 타구가 한화의 용병 제이 데이비스에 의해 잡히자 팬들이 항의 차원에서 물병 등의 쓰레기를 투척하는 스킬을 시전했고 데이비스는 우산을 쓰고 외야에 서 있기도 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이미 홈런 54개를 친 상태여서 더했다.

그러나 외다리 타법의 약점이 드러나자 2000~01시즌에는 36개와 39개의 홈런을 기록했음에도 타율이 0.293, 0.279로 떨어지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에 이승엽 인기는 매우 높았기때문에 신윤호를 상대로 1차투표에서 지고도 2차투표로 MVP를 수상한다.[15]이에 이승엽은 타격폼 수정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고, 그 결과는 2002~03년에 보여준 엄청난 퍼포먼스였다. 2002년 0.323의 타율로 정확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홈런갯수도 47개로 늘리며 홈런왕 2연패에 성공했으며 2003년에는 0.301의 타율에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자 현재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인 56홈런, 한 시즌 최다타점인 144타점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심정수와 펼쳐진 불타는 홈런왕 라이벌리는 2002년의 월드컵 열풍과 맞물려 침체되었던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요소였으며, 이 둘은 2년 연속으로 3할-40홈런-100타점을 찍었다. 그러나 심정수는 세부 스탯에서 앞섬에도 홈런왕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콩라인이 되었고 이승엽은 홈런왕 2연패에 성공함으로서 승자로 기록될 수 있었다.

이승엽이 있던 시절 삼성은 굉장히 타고투저의 경향[16]이 강하여, 1997년 5월에는 대구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5:27이라는 역사적인 스코어를 포함하여 무려 3연전에서 49점을 내 LG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여기서 나온 논란이 부정배트 논란. 하지만 2001년 전까지는 혼자서 홈런을 치던 타자의 이미지가 강했다.[17] 그러다 2001년 마해영이 들어오고 2002년 양준혁이 돌아오면서 공포의 이마양 트리오 타선이 구축되었다. 이 3명은 2003년 합계 127홈런 356타점을 쳐내기도 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는 이승엽을 큰 무대에 강한 사나이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차전까지 20타수 2안타라는 극악의 타격 부진에 시달리던 이승엽이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그를 믿고 계속 출전시키는 그답지 않은뚝심을 보였고, 결국 KS 6차전에서 이승엽은 LG의 마무리 투수 이상훈을 무너뜨리는 동점 3점 홈런을 작렬시켜 우승으로 가는 발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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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점 쓰리런 홈런 치고 홈에 들어온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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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나온 마해영이 백투백 홈런으로 경기를 끝내 버린 후, 그는 눈물을 보였다...

마해영의 회고에 따르면 동점 쓰리런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와서 "형 제발 끝내줘"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마해영은 곧바로 한국시리즈 역사상 길이 남을 백투백 홈런으로 정말로 시리즈를 끝내버렸다!!!

여담으로 한창 홈런왕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도 '투수를 했으면 어떘을까'하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너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고 치켜세워주며 마음을 다잡아 준 사람은 현 KIA 타이거즈 감독 김기태.[18]

이승엽의 한국프로야구 1기 성적은 그야말로 어마무시 한데.. 1기 통산 OPS가 1.0이 넘는다. 그것도 서비스 타임인 95, 96년 성적을 합쳐서다. 남들이 1시즌에 OPS 1.0찍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승엽은 평균 성적이 OPS 10할 이상. 참고로 7년 연속 30홈런에 1기 9년 동안의 평균 홈런은 36개.

2.3 일본프로야구 시절

한국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커리어 하이나 평타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있지만 그게 오래가지 못했고, 기복과 부침이 심한 시련의 시기. 그래도 일본시리즈 우승반지를 껴보는 기쁨을 누렸다. 절반의 성공이라며 위로하는 말들도 있지만 연봉 값에는 미치치 못한 활약인 것은 분명하다.

2.3.1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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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은 2003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의 거취에 많은 야구 팬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이미 이승엽은 오래 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고 있었고, 팬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인 그가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애틀 매리너스 등 다양한 구단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며 이승엽의 미국 진출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19]

그리고 2003년 12월 11일, 이승엽은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입단을 발표한다. 미국 출신인 바비 발렌타인 감독 밑에서 뛰면서 2년 후 다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겠다는 것.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승엽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9년 후, 2012년 힐링캠프에 출연해 이날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밝혔다.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 것이 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든 대구와 삼성 구단을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고. 이승엽 자신으로서는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한국 최고 타자의 미국행을 기대하던 많은 팬들은 이승엽의 일본 진출 소식을 듣자 큰 실망감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시즌 초반 4월에는 폭풍과 같은 활약을 보였고 시즌 1호 홈런은 역풍이 분다는 마린즈 스타디움 장외 구멍 사이로 뚫고 들어가 건너편 주차장 차 유리를 뚫고 들어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임팩트 있는 시작을 장식했다. 그러나 5월부터 이승엽의 약점을 간파한 일본 투수들의 집요한 공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 2군으로 떨어진다. 그와중에 기존 주전 1루수였던 후쿠우라와의 포지션 경쟁은 완패를 당하고, 좌익수로 완전히 전향하다시피했다. 시즌 후반 다시 올라왔지만 용병타자 치고는 평범한, 이승엽 스스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우여곡절 많은 이적 첫 해를 보낸다.

2004년 성적은 14홈런 50타점 타/출/장 .240/.328/.450 OPS.779

2005년은 마침 그 때 롯데 코치로 부임해 일본으로 건너온 김성근과 함께 어마어마한 훈련량으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범경기에서 20타수 1안타의 극도의 부진을 겪으며 개막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승엽이 이 때 얼마나 동계훈련을 많이 소화했던지 당시 팀의 주전 유격수였던 니시오카가 그동안 이승엽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시범경기에서 좀 못쳤다고 기회를 안 주는건 말이 안된다는 식으로까지 얘기나 나올 정도였다. 역시 김성근

개막 후 열흘도 되지 않아 1군에 콜업되었으며 첫 경기에서 결승 3루타를 치고 시즌 첫 홈런을 세이부의 에이스 와쿠이에게 뽑아낸 것을 시작으로 잇달아 홈런과 안타를 터뜨리며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결국 홈런타자의 바로미터인 30홈런을 이 시즌에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2016년 시즌 시작 시점까지 이후 10년간 지바 롯데에서 30홈런 타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유달리 데이터 야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좌투수에 약하다는 인식이 박혔던지 이승엽을 플래툰으로 돌려 버린다. 그럼에도 홈런 30개를 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 그러나 출루율이 .315로 그치는 등 생산성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승엽 골수팬들에게 이는 발렌타인과 롯데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롯데는 굉장히 변칙적인 라인업을 사용하던 팀이었고, 1루수 후쿠우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플래툰으로 돌려졌다. 플래툰은 기본에 타순도 엄청나게 변칙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당시 팀내 최고 타율이었던 이마에 토시아키가 8번타자로 기용되었다거나, 3-4-5 클린업트리오를 후쿠우라-사부로-사토자키를 넣고, 7-8-9번 타순을 셋 다 20홈런 이상의 장타자인 프랑코-이승엽-베니 용병 3인방으로 채워 클린업트리오를 두 개 운영하는 식이었다. 어쨌든 이 당시 롯데는 이런 변칙적인 라인업이 엄청나게 재미를 봐서 승패마진 +35의 84승 49패 3무의 엄청난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다. 자국선수들도 뻔질나게 플래툰으로 돌려지는데 이승엽만 특별 대우를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뿐더러, 심지어 당시 김성근은 아직 스윙이 베스트로 올라온 상황이 아니므로 현재의 이승엽에게는 플래툰이 더 좋을수도 있다는 말을 했던 적도 있다.[20] 실제로 이 시즌까지 이승엽의 대좌투수 타율은 2할 1푼대로 매우 좋지 않았으며, 발렌타인이 이승엽에게 아예 기회를 안줬다는 편견과는 달리 좌투수를 적지않게 상대한 편이었다. 좌완투수 상대시 주로 투스트라이크에서 바깥쪽으로 뚝 떨어지는 변화구에 헛스윙 심진을 당하기 일쑤였다.

여하튼 그 해 롯데는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 상대는 한신 타이거스였는데, 이승엽은 시리즈 전체 홈런 3개를 치면서 한신을 떡실신시키며[21] 이마에의 미칠 듯한 안타에 좀 가려졌어도 지금까지도 한신의 악몽으로 기억되는 '33-4', 하얀 안개 사건의 대미를 홈런으로 장식하며 롯데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 중 하나가 된다. 뭐시여! 한신은 관계 없잖여!

2005년 성적은 30홈런 82타점 타/출/장 .260/.315/.551 OPS .866

2.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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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팀의 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듯, 시즌 종료 후 이승엽은 롯데와 재계약 협상을 하면서 계약서상에 수비보장을 명시해달라는 초유의 요구를 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시즌 이승엽은 지명타로 뛰는 것을 무척 싫어했으며, 좌익수라도 계속해서 고정적으로 맡기를 원했으나 팀내 용병타자 셋이 모두 외야수였던 관계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돌아가면서 지명타자를 맡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롯데의 세토야마 대표는 금액은 이승엽이 원하는대로 맞춰줄 수 있지만 수비보장은 선수기용의 문제이고 감독의 권한이기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굉장한 난색을 표했고, 결국 롯데와의 협상은 결렬된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다시 한 번 꾀할 것 같았지만 정말 의외로 정작 선택한 곳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걱정과 우려를 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어쨌든 이승엽은 배수의 진을 치고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된다. 다음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계약기간은 1년으로 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반면 춘계 훈련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은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개막전에서 6타석 3타수 3안타 1홈런 3볼넷의 화끈한 성적을 보이면서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후 6월 초 무라타 슈이치를 제치고 홈런 1위로 올라서며, 9월 초까지 계속하여 리그 홈런 1위를 달린다. 그러나 8월 말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결국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 자리를 내주게 된다. 우즈가 미친듯이 후반기 몰아쳤기 때문에 이승엽의 몸이 정상이었더라도 홈런왕을 따낼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이 해 우즈와의 홈런왕 신경전은 또 다른 볼거리였고, 우즈도 이승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한 언동을 자주 보여 그런 논란을 더욱 불거지게 했다. 이후 2007년 말까지 우즈가 낫다 이승엽이 낫다 논쟁은 국내 일본야구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터지는 주제였다.

이 해, 정작 요미우리의 전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승엽 혼자서 열심히 홈런을 치면 뭘 하나...투수들은 죄다 흔들렸고 야수진에서도 이승엽 외에 니오카 토모히로, 아베 신노스케 정도를 빼고 나면 그렇게 인상적인 선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승엽과 함께 중심타선을 구축해줘야 할 타카하시 요시노부고쿠보 히로키[22]가 부상으로 골골거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2005년까지 감독하던 호리우치 츠네오가 팀을 대차게 말아먹고 다시 2006년에 하라 감독이 돌아와서 복구하던 과정이었다. 그 해 이승엽은 커리어 최고 성적을 찍었지만 반대로 팀은 사상 최초 2년연속 B클래스[23]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사실 그나마도 이승엽과 하라 다쓰노리 감독, 우쓰미 테츠야 등의 활약이 좋아 이 정도로 선방한 것이었다.

2006년 성적은 41홈런 108타점 타/출/장 .323/.389/.615 OPS 1.003.[24][25] 이런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만큼 2006년 국내에서 이승엽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물론 성적 자체가 좋았던 이유도 있지만, '일본 무대, 그것도 일본 최고의 명문팀에서 4번타자로 맹활약을 펼치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는 점이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극일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이승엽과 요미우리는 4년 30억엔의 초대형 재계약을 맺는다. 당시 이승엽의 연봉은 약 6억 5천만엔으로 당시 리그 전체 1위였으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2위의 메가톤급 계약이었다.여러분 최고의 4번타자를 영입했습니다 이승엽 본인은 자신을 믿고 붙박이 4번타자로 지지해줬던 하라 감독에게 우승을 안겨주고 메이저리그로 가고 싶었다고 했지만 '일본 리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위해 거쳐가는 단계'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던 한국 팬들은 다소 허탈해했다. 2ch를 포함한 안티들은 메이저리그에 간다는 말은 순전히 자신의 몸값 높이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고 비난을 가하게 되었고, 일부 팬들도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 의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26]

2007시즌에는 전년도 활약을 뛰어넘는 괴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들에 차 있었고, 개막전부터 가볍게 홈런을 때려내면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듯 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 중간 2군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전년도에 비해 다운그레이드된 모습으로 결국 2할 7푼에 30홈런의 강타자 커트라인 수준의 활약을 보여준다. 시즌 최종 성적은 30홈런 74타점에 타/출/장 .274/.322/.501 OPS .823. 이 시즌에는 볼넷 38개를 골라내는 동안 119개나 되는 삼진을 당하면서 커리어 후반기의 고질적인 선구안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해 3월에 당한 왼손 엄지손가락 부상도 이승엽의 하락세에 크게 일조했다. 손가락의 통증 때문에 몸쪽 공 타격시 임팩트를 제대로 싣지 못했을뿐더러 통증이 점점 심해져 시간이 갈수록 타석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웠다고 할 정도. 투수들이 이를 간파한 후론 집요하게 몸쪽 공 승부를 시작했고, 급기야 통증이 악화된 시즌 후반기엔 몸쪽 공은 버리고 바깥쪽 공 위주로 타격을 하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타격의 밸런스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막판 몰아치기로 기어이 30홈런을 채우는데 성공.

결국 시즌 종료 후 엄지손가락 수술을 받게 된다. 다만 이 수술에 대해서 장훈을 비롯한 다수의 원로들이 수술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조언했다. 수술을 하게 되면 신경세포가 같이 죽게 되므로 타격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유였다. 다시 말해서 통증은 없어질 지 몰라도 이전과 같은 느낌으로 타격을 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잘 치는 타자일수록 이 리스크가 크기 때문. 하지만 결국 이승엽은 수술을 택했고, 우려대로 이 결정은 일본에서의 남은 커리어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음 시즌인 2008년은 4월 한달간 1할 2푼 5리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신속하게 2군으로 내려갔으며 이후 전반기를 쉬다시피 한다. 슬슬 먹튀소리도 나오고 혐한들의 조롱은 극에 달했다. 일본의 안티 요미우리 진영에게도 이승엽의 부진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원로 노무라 카츠야는 "이승엽은 장식용 4번타자"라고 깠다.

7월 말 다시 복귀했으나 장타력이 되살아나지 않고 대타나 중간 교체가 많았으며 드문드문 나오는 등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장면이 많았다. 워낙 부진의 늪이 오래되자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차라리 다른 강타자를 넣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는 의견[27]들도 많았다. 하지만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만일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 낼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모두가 다 아는대로 그 예언은 적중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준결승 전까지 중국전 끝내기 안타를 빼고는 지독한 부진에 시달렸으나, 준결승 8회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려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고, 결승전에서 1회 쿠바 투수에게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을 쏘아 올려 대한민국 금메달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 때의 임팩트가 매우 컸기에 비교적 약효가 오래 간 까임방지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이승엽은 요미우리 복귀 직전 일본전 홈런에 대해서 '홈런을 쳐서 일본한테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다'라는 인터뷰를 공개적으로 했는데, 한국 내에서는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 '(일본 리그)팀 복귀를 의식하는 거냐', '이미 패배한 팀을 두 번 죽이는 말' 등의 부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 기사를 접한 2ch 등 일본 커뮤니티에서 '맞아,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었어'(...)라며 결승전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2ch는 강민호의 퇴장 빌미를 제공한 문제의 볼 판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연히 쿠바를 응원했다.

그러나 정작 리그로 복귀한 뒤의 현실은 시궁창. 일본시리즈에서 18타수 12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찍으면서(이것은 일본시리즈 최다삼진 기록 역대 2위였다.) 전혀 힘을 쓰지 못했고, 요미우리는 결국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라 감독은 이승엽이 끝내 한 건 해 줄 것이라면서 팬들은 물론 심지어 요미우리 출신 원로들까지 반대하는데도 최종 7차전까지 이승엽을 변함없이 주전으로 기용하는 의미를 보여줬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 구단주는 시리즈 종료 후 하라 감독에게 "이승엽을 왜 썼느냐"고 분노를 쏟아냈으며, 이승엽 본인도 귀국 후 “일본시리즈 패배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준비가 부족했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최악의 1년이었다. 응원해 주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밝혔다.
2008년 성적은 8홈런 27타점 타/출/장 .248/.324/.431 OPS .755. 시즌 전체적으로는 45경기 출장에 그쳤다.

2009년 제2회 WBC 불참을 선언하면서 시즌 성적에 집중하겠다고 공언한 뒤, 3월 시범경기에서 홈런 8개를 치면서 팬들의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하라 감독은 3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4번 알렉스 라미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을 무한경쟁 체제로 운용하겠다고 발표했다.

2009시즌이 시작되면서 4월 초 부진에 빠졌고 하라 감독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이승엽을 붙박이 주전 자리에서 신속하게 제외시키며 플래툰 체제에 편입시킨다. 그간 이승엽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여왔던 하라 감독의 선택이었기에 이 선택은 국내 이승엽 팬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는데, 이승엽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하라 감독의 변심(?)에 서운함을 표시했으나, 하라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간 기다려 준것만으로도 보살이라며 충분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5월 초 다시 대폭발하여 1할 대 타율을 잠시나마 3할 이상으로 높여 놓는 등 맹활약하면서 다시 주전으로 꾸준히 나오려는 찰나, 이승엽 데이를 기점으로 31타수 무안타의 부진에 빠지고, 감독은 그를 다시 플래툰으로 돌린다. 이후 잠시 살아나는가 했더니 다시 36타수 무안타의 극악의 부진에 빠져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7월 초 하라 감독은 '무기한 2군 강등'을 선언하고 이승엽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 이후 다시 못 올라오고 77경기 출장에 머무르며 16홈런 36타점 타/출/장 .229/.327/.484 OPS .811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커리어 최초로 2년 연속 규정타석 달성에 실패했다.

이후 포스트 시즌에는 1군등록에 성공하고 플래툰 방식으로 선발과 대타를 오가며 뛰었으나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는 여전히 부진했고 일본시리즈에서는 초반에 홈런도 치는 등 조금 나아졌으나 막판가서는 또 그냥 그랬다. 일본시리즈 성적은 12타수 3안타, 그리고 6경기중 고작 2경기 선발출장에 그치는 등 팀의 주요전력에서는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래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커리어 두 번째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획득.

2010시즌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1루수 이동으로 인해 사실상 주전자리에서 밀리고, 대수비나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기복있는 플레이로 인해 가끔씩 주전으로 나오기도 한다. 2010년 5월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에서 "6억엔짜리 번트"라고 까였다(...).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벤치의 지시였는지는 모르겠지만.[28]

결국 계속된 타격부진으로 2010년 6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돌았다. 장훈의 말에 따르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할 수도 있다고 했고 한쪽에서는 한국에서 이승엽을 받아주지 않는 분위기라서 은퇴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후 9월초에 잠시 1군에 올라왔다가 3경기에서 5타석 서고 포풍 강등. 9월 말에 다시 1군 등록으로 대타 및 대수비 요원으로 나왔으나, 홈런은 커녕 안타 한 개도 추가 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10년 시즌 성적은 커리어 사상 최악인 5홈런 13타점 타/출/장 .163/.280/.337 OPS.617.(56경기 출장.) 그리고 BB/K 수치가 0.5에도 못미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결국 요미우리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은 요미우리 시절의 이승엽에 대해 분노에 찬 한줄평을 남겼다.

"4년 계약에 거액까지 지불했는데 X같은 활약밖에 못했다.(4年契約で大金払って、クソの役にも立たなかったってのもいる)"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입장에서는 이승엽은 희대의 먹튀로 기록되었다.

2.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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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식에서 박찬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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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했다. 본인은 일본프로야구에서 계속 플레이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29] 요미우리 시절에 비하면 많이 삭감된 연봉으로 뛰게 되었다. 영입에 흥미를 보인 구단은 대규모 보강으로 현질을 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알렉스 카브레라와의 재계약이 불투명해서 대체로 싼 1루수 자원을 찾고있는 오릭스 버팔로즈가 꼽혔으며,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뛰게 되었다. 1억 엔도 못넘는 싼값에 계약할 것으로 점쳐졌었으나 의외로 1억 5천만 엔에 인센티브 포함이라는 준대박 계약. 물론 요미우리 시절 받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3년간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대박이라는 평. 등번호는 3번으로 확정되며 선수 생활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 자릿수 등번호를 달게 되었다.[30]

2011년 4월 13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8회말에 쐐기를 박는 큼지막한 쓰리런을 날렸다. 승짱 쓰리런 해설이 백인천이었어야 하는데#

그와중에 대선배이자 자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장훈 선생을 디스하는 발언을 했다. 장훈 선생이 자신을 5천만엔짜리 선수라고 평한것이 너무나 기분 나빴다고 대놓고 디스했는데 정작 장훈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연봉이 5천만엔 정도라면 이승엽을 원하는 팀이 2팀 정도 있다며 한국 복귀도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승엽의 짬밥을 보나 2011 시즌 오릭스와의 계약 내용으로 보나 별로 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5월 7일,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2군에 내려갔다가 보름만에 올라왔다. 여러모로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5월 22일 1군에 복귀한 이후부턴 맹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해줄 몫은 해줬다.

2군 가기 전 0.145 1HR 5RBI 2루타 3개 장타율 0.241 출루율 0.214 OPS 0.455
1군 복귀 후 0.232 6HR 15RBI 2루타 10개 장타율 0.451 출루율 0.305 OPS 0.689
(7월 26일 기준)
에서 보다시피 비율 스탯이 크게 향상됨을 알 수 있다. 1군 복귀 후의 비율 스탯은 요코하마의 4번 타자 무라타 슈이치나 현재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때 40홈런을 치기도 한 소프트뱅크의 베테랑 내야수 고쿠보 히로키와 비슷한 정도. 슈이치에 비해 홈런과 타점이 절반인 건 넘어가자

홈런수로만 치면 2011년 퍼시픽리그 외국인 타자중 3위일 정도다. 1위는 같은팀의 아롬 발디리스(2011년 10월 15일 기준으로 아롬 발디리스 14개 & 이승엽 11개) 2011년 WBC에 적응하게 한답시고 거지같은 반발력을 가진 데드볼을 공인구로 쓰는탓에 전체적으로 타자들의 성적이 대폭 다운된 점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파워쪽에서는 확실하게 살아났다고 해도 될듯.

2011년 9월 20일, 13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부터 이 기세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승엽의 기량이 죽지 않았다는 반증.

그리고 10월 4일, CS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세이부와의 원정 경기에서 세이부의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를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뽑아냈다!! 승짱 쓰리런
그리고 이 홈런이 결승점이 되며 CS 진출에 한 발 앞서게 되었다.마지막에 삼진 2개 먹은 건 빼자

그러나 그 다음 날인 10월 5일. 세이부 선발 투수 호아시 가즈유키에게 전날 3번째,마지막 타선 포함, 5연타석 삼진이라는 굴욕과 동시에 4타수 무안타로 그치고 말았다.

10월의 부진으로 한동안 선발라인업에서 빠져있던 10월 14일, 니혼햄과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15호 홈런을 때려냈다. 10월 18일에는 CS 진출권이 달린 시즌 최종전에서 4타수 무안타 3삼진 무안타로 삽질을 해버렸다. 결국 팀도 패배하고 CS 진출 실패, 본인은 타율 딱 2할을 마크했다.

2011년 최종성적은 15홈런 51타점 타/출/장 .205/.267/.385 OPS .652. 덤으로 32볼넷을 얻는 동안 자그마치 121삼진을 당하는 (안 좋은 의미로) 엄청난 BB/K를 기록하고 말았다. 2011년 이승엽의 성적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규정타석도 못 채웠는데 삼진은 리그 5위.

2011년 10월 19일, 이승엽이 국내 복귀를 결정했다는 기사가 떴다. 2012년 시즌부터는 다시 국내에서 이승엽을 볼 수 있을 듯.그런데 친정 팀으로 복귀하면 응원가가 문제잖아 다 필요없어 전용구호 하나면 되는데

10월 21일, 자신의 일본 무대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자신이 가진 실력과 노력을 전부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다고...
후에 일본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멘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래에 서술한 스타일에 나와있듯, 이승엽의 경기 내적인 멘탈은 약한 편이다.

여담으로, 일본 생활을 하며 후쿠오카 돔에서는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고, 만루홈런은 삼성 복귀 이듬해 기록하였다.

2.4 한국프로야구 2기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옵션 3억을 포함한 총액 11억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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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초부터 팬들에게 빅재미를 선사해주었다.이승엽이 이 링크를 좋아합니다![31]

2012년 복귀 첫 해 시범경기 성적이 타율 0.429 2홈런 7타점으로 거포에서 이똑딱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아주 긍정적인 성적이라 수많은 영양사들과 삼성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는 중.

2.4.1 2012 시즌

전성기 시절의 무시무시했던 폭발적인 홈런, 타점 생산과 엄청난 포스는 많이 사라졌으나, 전체적으로 팀 타선의 중심과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는데, 홈런왕, 정규시즌 MVP, 한국시리즈 MVP, 골든글러브를 받으신 한국인 선수 중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흠좀무.[32]

그리고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하면서 양준혁, 한대화와 함께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8회) 타이의 영예를 안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4.2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타이중 참사를 일으킨 대표팀에서 그나마 몇 없는 자기 역할을 한 야수였다. 홈런은 없었어도 2루타 세 번은 모두 필요한 타이밍에 터져서 왜 자신이 국민타자인지를 증명했다. 1루수 3명 중 제일 나았다는 평. 아직도 어르신이 먼저 나서야겠냐 이대호는 수비 불안을 좀 보여서 까이기는 했지만 이대호도 자기 역할을 충분히 했다. 문제는 이승엽의 새까만 후배였던 김상수...

2.4.3 2013 시즌

해당 문서 참조.

파일:Attachment/이승엽/352grando.jpg
2013년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352호) 달성. 참고로 이 분2002년 한국시리즈 물론 2012년 한국시리즈 이어 이번에도 당했다.

일본시절 부진한모습이 돌아오는건가?
10년 연속 100안타, 9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고,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때린 선수가 되었지만[33]...

냉정히 말하자면 신인 시절을 제외하고 국내 무대에서 쓴 이승엽의 커리어 로우 시즌. 두 번째 소포모어 징크스

2.4.4 2014 시즌

국민타자의 완벽한 부활, 이승엽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40-40클럽[34]

복귀 첫 시즌에 비해 클래식 스텟은 향상됐지만, 리그의 타고투저 광풍에 견줘보면 실제 생산성은 2012시즌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나이 39세에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파일:Attachment/이승엽/나이.jpg
파일:Attachment/이승엽/나이2.jpg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 형님도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이가 들어(...) 샴페인을 못 따 무차별 세례를 받고 있는 이승엽.

시즌 종료 후, 9번째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KBO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2.4.5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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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3일 KBO 리그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의 순간.
바로 지금. 이 위대한 순간의 증인이 될 수 있어 행복합니다! - 2015년 6월 3일 포항 롯데전에서 KBO리그 최초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 후 캐스터의 멘트

개인통산 400홈런,[35] 개인통산 3600루타[36], 한일통산 600홈런 올해 이분 나이가 40이시다 40-400클럽(...)
또 하나의 전설을 써내려갈 것인가?이미 전설이잖아 근데

포항의 사나이[37]

2015년 9월 1일 양준혁의 최다 장타 기록을 넘어섰다.

KBO 최초의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지만, 수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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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2016 시즌

2016년 8월 24일, KBO 통산 최다타점 기록 경신
2016년 9월 14일, 드디어 한일통산 600홈런
역대 2번째 1,200득점
역대 2번째 3,800루타
역대 4번째 12년 연속 두자릿 수 홈런
노인 학대 당하는 국민타자

해당 문서로.

2.4.7 2017 시즌

국민타자와의 이별. 현역 마지막 시즌
KBO 최다 타이틀 홀더를 향해[38]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을 삼성으로 불러 준 류중일이 계약 만료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팬들도 최소한 이승엽 은퇴식까지는 류중일이 감독을 맡아 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다음 시즌의 목표는 무려 주 포지션인 1루에서 10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구자욱은 1루 수비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만큼 외야로 가게 될 것이라고.
  1. 한 해는 당연히 2006년이고, 나머지 하나는 커리어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2005년. 2007년에도 30홈런을 기록하며 중심타선에서 활약했지만, 제한적인 출장 속에 마린스 홈구장에서 30홈런을 기록하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대활약한 2005년에 비하면 부족하다. 무엇보다 2007년은 커리어 하락의 시발점이 되는 해다.
  2. 이 당시 수능 총점은 200점.
  3. 이승엽뿐만 아니라 투수 유망주였던 이대호를 타자로 전향시킨 것도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의 작품이다. 이대호도 어깨 부상이 있었다.
  4. 사실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던 청룡기 결승전에서는 결승홈런도 쳤었고, 1994년 세계청소년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로만 활약해 홈런상과 득점상을 수상한 바 있다.
  5.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했던 이동수가 1루수로 나올 때는 좌익수를 보기도 했다. 또는 양준혁이 좌익수를 서기도 했다.
  6. 이것 하나만으로도 백인천 감독은 삼성에서 아주 큰 일을 해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백인천이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야구로 먹고 사는 것의 팔할은 이승엽 덕분이다. 백인천이 이승엽이 홈런칠 때 괜히 요시 그란도시즌이라 외치는 게 아니다
  7. 홈런은 9개였지만, 대신 커리어 처음으로 3할을 쳤다.
  8. 2012 스카우팅 리포트에 수록된 카툰으로 물론 2011년 모습 한정. 오히려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장성호가 엘지를 저격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었다. 이 와중에 쥐훈인증
  9. 이 해 홈런왕을 처음으로 차지했다. 2위는 30개를 기록한 이종범.
  10. 이 해 타이론 우즈가 기존 장종훈의 시즌 41홈런을 경신하여 42개를 쳤다.
  11. 타이론 우즈의 KBO 홈런 신기록을 바로 이듬해에 경신.
  12. 홈련왕은 40개를 날린 박경완.
  13. 이른바 "아시아 홈런 신기록". 자신의 KBO 신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움. 이미 전반기 끝나갈 시점에 홈런 40개를 돌파했었다. 다만 2013년에 NPB블라디미르 발렌틴이 57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 타이틀은 발렌틴에게로 넘어갔고 아시아 최초로 60홈런을 돌파하면서 시즌을 마감하였다.
  14. 종전의 기록은 약쟁이알렉스 로드리게스가 가지고 있다.
  15. 당시 1차투표에는 신윤호가 우위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가반수가 투표를안하면 1,2위를 두고 재투표가 되는 규칙이 있어서 재투표했고 신윤호,이승엽을 뽑지않은 기자들이 전부 이승엽을 투표해서 이승엽이 MVP를 수상하게됫다.
  16. 대신 마운드가 약해서, 2001년까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없었을 정도. 특히 1999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때 자기도 홈런을 치며 활약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동갑내기 임창용이 정규시즌 내내 너무 무리하게 등판한 결과 불을 지르면서...
  17. 그렇다고 타자가 없던 것도 아닌게 1997년엔 양준혁(30홈런), 신동주(21홈런)가 버티고있었고, 1998년에도 여전히 양준혁이 27홈런을 치면서 뒤를 받쳤다. 1999년, 2000년엔 찰스 스미스(40홈런), 김기태 등이 중심에서 버텼고.
  18. 삼성에서 뛰었을때 주장을 역임했으며, 이승엽이 그를 보스처럼 따랐다고 한다.
  19. 2002년에는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로 7경기 11타수 3안타 2홈런 5타점을 기록했고, 2003년 시즌 전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초청을 심정수와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현재의 마이애미 말린스) 받아 주로 후반이닝 대수비로 투입되어 10경기 10타수 2안타 2홈런 3타점을 기록했었다. 그리고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이승엽에 대한 관심은 끊어졌다.
  20. 하지만 김성근의 이 발언을 이승엽 본인은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21. 이후 요미우리로 이적한 후에도 유난히 한신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6년 커리어 하이때는 물론이거니와 2008년 요미우리가 한신과의 13게임 승차를 뒤집고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 중간에 만난 한신전에서 결승타를 치는 등.
  22. 2015 프리미어 12 때 그 일본 감독 맞다.
  23. 2005년에 5위로 B클래스 찍고 가을야구 실패. 2006년에는 4위를 찍었다.
  24. 그런데 2006년의 세부스탯을 보면 BABIP가 무려 .351이나 된다.(일본 통산 BABIP .288) 즉, 운이 기형적으로 따라준 전형적인 플루크 시즌이라는 것.
  25. 한국은 세이버메트릭을 위주로 성적을 보지만, 정작 세이버메트릭스 스탯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심하다. 쉽게말해 좆문가가 넘쳐난다 특히 나무위키에 좆문가가 넘쳐난다 이치로의 항목을 보면 수비주루로 WAR을 40을 벌고 15년 통산 빠따질로 WAR 10도 못벌었다는 개소리도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 2015년 시즌 BABIP은 .300 이고, 30팀중 BABIP 이 타율보다 4푼이상 높지 않은 팀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엔젤스 오브 에너하임 밖에 없다. 이승엽의 BABIP이 타율에 비해 .028 높은건데, 이건 오히려 NPB 리그 평균 편차보다도 훨씬 낮다. 타자의 성적이 좋고 타율이 높을수록 BABIP 이 높은건 당연한 일이다. 만약 타율이 .280 정도고 BABIP 이 .350 이면 플루크 시즌이라고 볼수 있으나, 위에 서술했듯이 타율과 .028 밖에 차이 안나는데 플루크라고 하는건 거의 망언에 가까운 수준이다. 타자의 성적과 타율이 높으면 BABIP이 당연히 높을수 밖에 없는것을 잘못 해석하는것. KBO, NPB, MLB 할것 없이 톱 타자들은 대부분 .350 BABIP 대에서 논다. 위에 주장대로라면 마이크 트라웃 같은 경우는 통산 BABIP 이 타율보다 .050 이나 높은데, 그러면 마이크 트라웃은 커리어 전체가 플루크 커리어란 뜻이된다. 매니 마차도 같은 경우에는 2016시즌 타율과 BABIP이 비슷한데, 마차도는 인필드 수비가 모든 팀이 리그 탑 수준인 아메리칸 동부에서 뛰어서 손해를 본것. 이번시즌 토론토의 툴로위츠키와 좌시 도날드슨, 보스턴의 잰더 보가츠와 더스틴 페드로이아, 양키스의 디디 그레고리우스와 숙청맨 스탈린 카스트로, 탐파 베이의 에반 롱고리아 등등 동부지역의 수비력은 상대하는 팀 입장에서는 재앙수준이다. 그 증거로 골드글러브도 동부팀이 거의 다 싹쓸이한다. 물론 그 전 시즌들의 BABIP은 대부분 타율보다 3 4 푼 높다. 그리고 애초에 한가지 스탯으로 선수가 플루크시즌을 보냈는지 아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정말 타구가 강해서 그런건지, 수비가 좋았는지 안좋았는지, 운이 따라줬는지 아닌지도 다 감안해서 Batted Ball Avg. Velocity, wOBA, Total Extra Base Hits 같은 스탯을 수십가지와 함께 고려해야하기 때문. 그럴 필요가 없다면 연봉협상은 무지하게 쉬울것이다. WAR 이 나온대로 돈달라고 하면 반박을 못할테니.
  26. 4년 계약이 끝나면 이승엽은 30대 중반에 접어들게 된다. 나이도 나이지만 기복과 멘탈 약점이 뚜렷한 30대 중반의 선수를 메이저리그에서 영입할 이유가 현실적으로 없기도 하다.
  27. 특히 이 때 김별명이 최종 후보인선에서 탈락을 해 버렸다. 성적이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특히 김태균 넣으라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래도 김태균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으로 이미 군 면제를 받아서 망정이지...
  28. 여담이지만 잘 나가던 2006시즌에 뜬금없이 기습번트 안타를 성공시킨 적이 있었는데, 이 때는 '승짱은 번트도 잘 댄다'며 찬양받았다(...).
  29. 사실 삼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요미우리에서의 활약(...) 때문에 와도 자리없다라고 한 당시 삼성 감독 때문에 갈 엄두가 안났다고 한다. 와도 자리가 없다고 하신 분이 만에 하나라도 한 시즌이라도 일찍 물러났거나, 양준혁이 2010년에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2011년에 이승엽 - 양준혁 체제를 삼성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선동열의 이 발언도 순화된 버전이라는 점. 당시 선 감독의 반응은 왜 온대요? 걔 여기 와도 자리가 없어요. 식이었다고.
  30. 삼성과 지바롯데 시절 36번, 요미우리 시절 33번과 25번을 달았고 삼성 복귀 후 다시 36번을 달았다.
  31. 사실 저건 일종의 낚시이다. 저 글에 있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바로 자기 담벼락에 링크되는 종류인데 그 말인즉슨 일단 저건 눌러봤단 소리.송정아 이거봐
  32. 외국인 선수까지 포함하면 타이론 우즈도 있다.
  33. 그동안 친 352개의 홈런 비거리는 무려 41.225km라고 한다. 이승엽 마라톤은 어디까지?
  34. 8월 21일 "7~8년만 젊었어도 병호와 해볼만 했을텐데..."라는 기사에 "아이고 성님 욕심도 많으요 ㅠㅠ 이러다 나이 40에 40홈런 날리시는거 아니우?"라는 덧글이 올라오자 달린 반응 중 하나(...).
  35. 2015년 6월 3일 롯데전에서 달성했다.
  36. 3300루타로 되어 있었으나 이미 2015년 4월에 달성했고, 2015년 6월에 3400루타를 달성했다. 2015년 8월에 포항에서 3500루타를 달성했다. 그냥 양준혁의 최다루타 기록인 3879루타를 넘는 걸로 목표설정 하는게
  37. 8월 8일 기준으로 포항야구장 개장 이후 포항에서만 홈런 12개째다!
  38. 2016시즌 마감 시점에서 홈런, 타점, 순수장타, 장타율, OPS의 5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 최다 타이틀 홀더인 양준혁은 경기, 타석, 타수, 안타, 2루타, 득점, 총루타, 볼넷, 사사구의 9개 부문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이 중 2루타(24개), 득점(9점), 총루타(46루타) 3개 부문이 가시권에 들어있다. 게다가 양준혁이 가진 나머지 타이틀 분야에서 정성훈, 박용택, 박한이, 김태균 등이 경신을 1시즌~3시즌 사이 정도 가시권으로 앞두고 있어 결국 이승엽이 압도적 최다 타이틀 홀더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이는 KBO기록만 놓고 봤을때고 해외기록을 합치면 이미 이승엽이 모든 타이틀 분야를 가지고 있다.사사구만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