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전쟁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넘어옴)

영어 : Sino-Vietnamese War
한자 : 中越戰争(중월전쟁)
중국어 : 對越自衛反擊()/对越自卫反击() - 대월자위반격[1]
베트남어 :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Trung(월중 국경전쟁)

중국-베트남 전쟁
400px
▲ 중국의 선전용 사진[2]
냉전의 일부
날짜
1979년 2월 17일 - 1979년 3월 17일
장소
중국-베트남 국경 일대
교전국23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중국22px-Flag_of_Vietnam.svg.png 베트남
22px-Flag_of_the_Soviet_Union.svg.png 소비에트 연방(지원국)
22px-Flag_of_Laos.svg.png 라오스(지원국)
지휘관23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덩샤오핑
23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예젠잉
23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쉬샹첸
23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양더지
23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쉬시요우
22px-Flag_of_Vietnam.svg.png 레주언
22px-Flag_of_Vietnam.svg.png 똔득탕
22px-Flag_of_Vietnam.svg.png 반 티엔둥
결과
상호 간 승리 주장,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승리
영향
베트남에서 중국군 철수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수
병력총 병력 20만 명
전차 550여 대
정규군 10만 명
기타 병력 15만 명
피해규모● 중국의 주장
- 전사 8,531명
- 부상 2만 1천 명

● 베트남의 주장
- 전사 2만 6천 명
- 포로 238명
- 전차/장갑차 420대 파손
- 박격포 66문 파손
● 중국의 주장
- 정규군 5만 7천 명 전사
- 민병대 7만 명 전사
- 포로 1,636명
- 전차/장갑차 185대 파손
- 박격포 200문 파손
- 미사일 기지 6개 파괴

1 개요

베트남 전쟁에서 우방 관계이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신생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3] 전후 처리 문제를 놓고 대립한 끝에 벌인 전쟁.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벌어진 국지전이었으나 국지전 치고는 스케일이 상당히 컸고, 그 후유증은 베트남군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89년까지 계속되었다. 중국-소련 국경분쟁과 함께 공산권 내 노선 대립과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미국과 수교하고 소련중화민국과 비공식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게 그때 상황이다. 베트남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하고자 중화민국과 비공식 관계를 갖는다.[4]

2 배경

역사상 오랫동안 중국은 베트남을 조공국으로 삼고 있었으며, 무력에 의한 병합도 여러차례 시도했다. 실제로도 여러 차례 점령하여서 중국은 베트남을 '남월'이라고 부르며 오랫동안 상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맹획의 종족 연합을 베트남이나 버마로 생각하는 떡밥이 오랫동안 돌았지만 사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손권의 영향 아래 있었다.[5] 애초 베트남의 시작인 남월이 진나라 멸망 후 이 곳에 내려간 장수 임효와 그의 부관 조타[6]가 세웠고, 이 둘은 한나라에 강력 저항했으므로 당연한 거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그런 이유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와 비슷하여 베트남 전쟁 때 대만이 중국의 개입에 대항해서 남베트남에 대해 병력 및 군수지원을 천명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에서 강력히 막았다. 물론 대만의 참전이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도 있었지만,[7] 물론 나중에는 받아들여서 육해군 소수 병력이 군수지원대로 참전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화교들의 경제권 장악이 겹쳐서 통일된 베트남과 중국 관계는 같은 공산국가라고는 해도 영 좋지 않았다.[8]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부도 중국이 자기네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개입할까봐 노심초사했으며, 중국이 공식적인 파병을 해서 지원해주겠다고 애걸했는데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이것은 남베트남도 별 다를 바가 없을정도로 남북베트남인들은 중국인에 대한 태도에서만큼은 일치했다. 마치 옛 식민제국을 보는 한국인의 시선이랑 비슷했다.

그래서 베트남은 남베트남 점령 후 잔류하던 화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으며,[9] 국경 문제에 있어서도 소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캄란에 있는 해군 기지를 소련 극동 해군에게 임대해주는 등 반중친소 노선으로 급격하게 돌아섰다.[10] 그리고 베트남과 중국 간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중국은 기껏 지원해줬더니[11] 통일 후에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베트남을 배은망덕하게 여겼고, 자신의 앞마당으로 여기고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반중세력이 갑툭튀한데다가 소련까지 끌어들이려고 하자 격노했다. 1978년 1월에는 이전부터 빈발하던 중국-베트남 국경분쟁을 이유로 들어 양국 간 외교관계까지 단절되었다.

한편으로 파리 평화회담 조인(1973년) 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미국의 관심이 급격하게 식으며 사이공 함락 2주 전, 론 놀이 이끄는 캄보디아의 친미 정권도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에 의해 무너졌다. 폴 포트는 당시 극단적인 마오이즘에 경도되어 역사상 유례없는 폭력적 공산화 정책에 따른 대학살을 마구잡이로 추진, 캄보디아 전역을 말 그대로 사지(死地), 즉 킬링필드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크메르 정권은 극렬 자민족중심주의를 내세워서 베트남계 주민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는데 이건 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고, 이미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패자이자 강호로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쳐서 자신감도 높아지고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 등으로 무장까지 엄청나게 강화된 베트남은 머뭇거림 없이 1979년 1월에 캄보디아 공격을 단행해서 크메르 루주를 정글로 몰아내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한다. 그런데 분명 침략이긴 침략인데 캄보디아 내부에선 오히려 잘 됐다고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12] 그러니 이걸 침략이라고 까야 하는지 해방이라고 칭찬해야 하는지 참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는 "자국민에 대한 학살극을 벌이는 크메르 루주를 응징하고 그들의 압제에 시달리는 캄보디아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도차이나방위대 베트남군이 출병한다."고 주장했다. 틀린 말 같지 않다.

3 전쟁의 발발

파일:Attachment/jido.jpg
중국군의 공세. 국경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침공했으나 주공은 라오카이와 란손 방면이었다.

파일:Attachment/doha.jpg
중월 국경을 넘어 도하하는 중국군 59식 전차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덩샤오핑화궈펑버르장머리 없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서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삼아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오며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베트남의 국방장관이자 미국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보응우옌잡 대장은 친중파여서 주화론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휘에서 물러났고, 총참모장인 반띠엔중 대장이 총지휘를 했다.[13]

300px300px
PPSh-41를 든 베트남군 여자 민병대.중국군 의무병의 치료를 받는 베트남 여군 포로.

베트남군 주력이 모두 캄보디아 방면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중월전쟁의 사진에는 베트남군 여자 민병이 자주 등장한다. 베트남군의 주력은 당시 1000km가 떨어진 캄보디아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북부는 거의 공백상태였다. 중국에서는 당장에 하노이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문제는 당시 베트남이 중국이 쉽게 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초강대국 미국도 비록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놓은 제한 및 남베트남의 황당할(...) 정도의 자멸 탓이라고는 해도 8년 만에 GG쳤는데, 당시 미군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중국군이 쉽게 상대할만한 적은 아니었다. 중월 전쟁 당시 베트남군의 총병력은 현역만 세계 3위권이었고, 1975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 총병력은 100여만 명이 넘었다. 이후 감축해서 최근에는 현역 45만, 예비군 500만으로서 현재도 대병력이다. 게다가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도 상당했고, 이래서 무기의 양은 적어도 질은 1970년대 말 전쟁 시점에는 중국보다 나았다.[14] 예를 들어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은 미제 전투기 F-5A-37와 미제 헬리콥터 다수를 사용했을 지경이었다.

3.1 양측의 전력

베트남은 대부분의 정규군이 캄보디아와의 전쟁에 동원됐었고, 북부에 주둔한 병력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동안 후방지역에 머물렀던 만큼 대부분의 병력이 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K-47 같은 총기는 정규군이 사용하는 무기였고, 민병대는 SKS같은 2선급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대부분의 병력이 중국판 SKS인 56식 소총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고, 분대마다 1~2명씩 AK-47이나 RPD지원화기로 사용하고 있었다.이것은 곧 전력차이로 직결되어 중국군은 기습하여 있는대로 자동소총을 쏘고 도주하는 배트남 정규군의 게릴라식 전법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해진다.

중국군은 초기에 6만여 명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 최종적으로는 약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100여 기의 항공기, 63식 경전차(PT-76)를 주력으로 한 400여 대의 전차를 투입하였다. 베트남군은 예비로 남겨졌던 소수의 국경수비대와 대부분의 민병을 규합, 최종적으로 18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40여 대 미만의 항공기와 소수의 기갑차량이 동원되었다.

3.2 과정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친중 노선을 걷던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철군시키기 위해 1979년 2월 17일에 침공을 시작했다. 중국군은 윈난성과 광시성에서 출발하였으며 베트남 산악지대와 정글을 재빠르게 돌파, 국경 너머 약 30km 정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번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경고 성격이 짙은 만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바로 철군할 생각이었으므로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지형은 산악지대 너머로 넓은 평야가 펼쳐저 있었고, 만약 산악지대가 뚫린다면 수도 하노이까지는 일사천리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적의 의도를 알 수 없고, 알더라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결사항전의 태세로 싸우는 베트남군의 전투의지는 중국군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정글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군은 인해전술에 가까운 돌파식 밀어붙이기 전략을 구사하였으나, 베트남군은 이를 간파하고 산 능선을 따라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중국군은 1950년대의 혼란과 빈곤 및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으로 한국전쟁 이래 통신 장비나 전술이 지난 25년간 크게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베트남의 지형에 맞추어 교리를 발전시킨 상태였으며,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당시의 전술을 익혔기 때문에 중국군의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15] 베트남군은 미군에게서 노획한 M113 같은 장갑차를 이용해서 보병을 빠르게 수송, 재배치하였으며 거점을 뺏기기 전에 중국군의 위협으로부터 재빠르게 빠져나가 새로운 방어선에 투입하는 기동 전술을 사용했다. 전투 병력을 최대한 보전한 것이다.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을 활용하여 개전초 24시간 동안에 중국의 63식 경전차를 13대나 격파했다. 또한 미 항공력을 받아내본 베트남에게 중국의 항공 전력은 감수할 수 있는 상대였다. 오히려 초기에 15대나 되는 중국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중국군은 진격이 지체되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예비부대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총 20만의 병력을 규합해 대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트남군의 방어선은 뚫리기 시작하였고 돈단과 몽카이가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돌파작전으로 중국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40여 대의 기갑장비가 파괴되었다. 그에 비해 베트남군은 840여 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16]

베트남군은 역공을 시작하여 2월 28일에는 돈단을 다시 탈환하였다. 중국 수뇌부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던 정예사단인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을 공략한다. 인해전술에 가까운 공격으로 많은 베트남군의 방어진지가 전멸당했고 베트남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전략적인 철수로 중국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입혔다. 결국 중국군 6만명의 집중공격으로 란손은 함락당했고, 중국군은 란손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뒤 바로 철수했다. 3월 2일에는 국경 인근의 라오카이도 파괴하였다. 중국은 전략적 목표는 달성하였지만 예상보다 병력 손실이 많아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이 무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어차피 완벽하게 승리하여 베트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인 중국이 전쟁을 벌인 이유는 캄보디아를 무단점거한 베트남군의 철군이었다. 중국은 앞서 언급된 지역에 대한 순간적인 점거는 가능했지만, 베트남의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인민해방군의 상대였던 베트남군은 대다수가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되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의 철수는 중월전쟁 떄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실패와 별 다를바없다.

width=50%
승리를 외치는 중국군의 선전 사진.(...)
현실은 시궁창 중국군의 대부분 선전 사진에는 AK47이 보이는데 이것은 중국군 선진화 홍보의 일환 이었고 주력소총은 SKS였다

3.3 소련의 개입

거기다 당시 베트남은 친소 노선을 걸었기에, 소련은 중국에게 전쟁이 확대될 경우 소련군은 유격대를 투입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중국은 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소련이 제대로 개입할 경우 벌어질 사태를 잘 알고 있었던데다 군사력도 겨우 재건이 시작되었을 만큼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끌기 힘들었다. 병력을 좀 더 투입하고 기존에 벌어진 전투의 교훈으로 이거 저거 개선해서 다시 공격을 재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고 해도 이후 군대 및 사회가 만신창이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4 종결

중국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철수한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고는 일방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결국 베트남 땅에서 큰 피해를 입은 중국군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을 중단시키기는 고사하고 국경도시를 파괴하고 베트남에 지속 팽창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만 보낸 뒤 물러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원래부터 중국군의 목표는 베트남의 점령이 아니라 국경에서 다발적 분쟁을 이끌어 베트남 주력을 북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직후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간 전쟁을 할만한 역량도 없었다.

양측 공식발표는 서로 만 단위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나, 중국군 5,000여명이 사망하고 베트남군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집계된다. 다만 공산국가의 특성상 중국측과 베트남측 모두 서로의 피해를 축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국군 사망자는 많게는 2만 6천명까지 추산, 베트남군은 민간인까지 합해서 3만명으로 추정치가 올라간다. 대체로 베트남군의 패하가 중국군보다 약간 많거나 거의 비슷한걸로 집계되는데,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민병대를 상대로 이 정도 전과밖에 올리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군이 현대화를 결심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17]

양측은 당시 모두 승리를 주장했으나, 현재로 봐서는 전쟁 목표를 달성시킨 베트남군의 판정승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 봐서는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뚫고 어느 정도 내륙까지 진입한 중국군의 승리지만, 전략적 즉 전쟁목표의 달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퇴시키지 않고 중국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베트남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초창기에 단숨에 서울까지 점령당했던 조선이 끝내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국토를 방위한다는 목표를 달성시켰기 때문에 전쟁의 승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베트남의 경우 주력이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돼 있었고 주력군은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중국군은 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는 낮아지게 되었다. 당시의 중국군이 비교적 졸전을 펼친 이유는 1960년대 이래로 정치 문제 때문에 전력 증강이 거의 멈추었고 문화대혁명 때문에 고급 지휘관 상당수가 숙청[18] 군 훈련도 전투보다는 정치 교육에 더 매진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나 중인분쟁에서 경이롭기까지 했던 인상적인 작전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 중국을 몰아낸 국가로서 동남아시아의 패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베트남은 이 전쟁으로 한동안 동남아 지역의 패자로 군림한다.[19] 민족주의적인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빵셔틀 캄보디아, 라오스 뿐만 아니라 태국, 버마까지 아우르는 동남아 공산국의 맹주를 꿈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당하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베트남 자체도 엄청난 소중화 노릇을 하며 주위의 소수민족을 동화시키려고 한 건 사실상 마찬가지다. 당장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일대는 19세기 프랑스 식민화 직전까지만 해도 역사적으로 참파나 캄보디아 땅이었던 걸 베트남이 수세기에 걸친 남진 정책으로 뺏어먹고 식민화한 땅이다.

전쟁 이후에도 1980년대 내내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에서는 고지를 중심으로 중국과 베트남 양국의 일진일퇴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한국전쟁의 고지전을 연상케 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사상자도 꽤 많았지만, 서방에는 이 전투들의 치열함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양국은 냉전 말기인 1988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1989년에는 캄보디아에 있던 베트남군이 철수하였다. 캄보디아는 다시 왕정으로 복귀했고[20], 친베트남+왕정세력의 연립정부가 출범하면서 크메르 루주는 배제되었다.

5 이야깃거리

당시의 중국군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 크리로 싸움 좀 하는 장군들이 갈렸다(...) 원래 홍군 시절부터 중국군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전에도 계급이 없이 참전했지만 상대가 다들 하나같이 답이 없다거나 뭔가 나사가 하나 둘 씩 빠진 상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답이 없다의 대표적인 예시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 중화민국군이니 국부군이니 하는 명칭이 부끄러울 정도로 군이 총체적 막장이었다.

그다음에 나사가 하나 둘 씩 빠진 상대는 한국군과 미군이다. 한국군의 경우에는 아직 초창기라 혼란과 카오스가 넘치는 막장상황이었고 개전직전에 가장 정예병력이 대대급 훈련을 받은 수준이라 막장이었다. 그나마 남베트남같이 답이 없다 수준은 아닌것이 김홍일, 김석원, 김종오, 이종찬, 손원일, 김신 같은 개념있는 장교들이 주요 보직에 있어서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까지 땜빵이 가능했으며 기본적으로 미군도 칭찬할 만큼 병들의 자질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경우 왜 나사가 빠졌냐 하면 군축과 제독의 반란같은 내부문제 때문에 총체적 난국이었으며 특히 육군의 경우 유럽 쪽에 남아있었던 병력을 제외하면 인적자원과 장비가 2차대전 말기보다 못한 상태였고 2차대전때 활약했던 야전 소부대지휘관이 6.25에 참전한 경우가 매우 적었었다. 반면 실전경험 있는 장군들은 차고 넘치고 중간급 대대장급은 2차대전때 후방에서 근무하거나 책상물림하던 장교들이 계급정년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진급을 위해 참전한 경우가 많아 서로 손발이 안맞아 그대로 좆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갑갑했으면 시실리에서 전투부대 지휘관 경험이 있는 김영옥대령이 회고록에서 6.25당시 중소대장들의 실전경험부족을 질타였을 정도였을까.[21]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 사활을 걸고 있었지 아시아는 구 열강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노하우를 보존해 자위대를 미군의 보조전력으로 쓰면서 버티다가 정 뭐하면 전선을 물려 알래스카-필리핀-괌-파퓨아뉴기니-ANZAC-하와이 라인을 지키면 그만이라는 소극적 방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중국군은 다른 건 못해도 최소한 인적자원들, 특히 지휘관들의 재능이 차고 넘쳤었고 완충지대 북한을 보위하겠다는 대전략 목표가 뚜렸했으며 비록 한국이라는 외국이지만 미군이나 연합군에 비해서는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명장인 맥아더가 노망이 들었는지 자뻑이 max를 초과했는지 뻔히 보고되었던 재앙을 무시해주시는 바람에 교착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절대 무계급 체제의 군대가 효율성이 있어서 잘 싸운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당시 총사령이었던 펑더화이가 국방부장을 맡으면서 1956년 계급이 도입되었고, 1956년에 원수 10명, 대장[22] 등의 계급이 존재했다. 그러나 펑더화이가 실각한 이후인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4년 계급은 다시 폐지되었다. 원래 소련군도 계급 폐지를 했다가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계급체계를 부활시켰는데[23]중국군에서는 다시 도입되는 1987년까지 계급이 없었고 정치장교의 힘이 여전히 막강한 것을 보면 중국군이 이 기간 동안 얼마나 군개혁을 하지 않고 지내왔는지 알 수 있을 지경이다.

또한 이 전쟁은 중국군에게는 군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경각심을 주었다. 물론 중국이 군 현대화를 진짜 심각한 당면 과제로 받아들인 것은 1차 걸프 전쟁이 계기다. 당시 수십만명의 대 병력을 지닌 이라크군이 미군과의 기술력 격차로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초토화가 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경악한 중국군 수뇌부는 걸프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당장 변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베트남군의 선전으로 1990년대까지 전쟁에서 중국군 60만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공개된 자료를 보면 실제로 투입된 병력은 40만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한 베트남군은 거의 대부분이 빈약한 민병대 수준이었으니 확실하게 중국의 굴욕이 맞다. 또한 미국 등 서방세계는 이러한 공산권의 분열양상을 보고 기존의 공산권 국가 전부를 묶어서 상대하는 정책에서 한쪽과 친해져 다른 쪽을 견제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또한, 중월전쟁 이후 베트남에 거주하던 약 30만명의 중국계 화교들은 베트남 정부에 의해 강제로 중국 남부로 추방당하거나 홍콩이나 마카오 등지로 떠나든지 해야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근해에도 자주 나타났던 보트피플은 사실 대부분 이런 중국계 베트남인들이다. 그들은 모국인 중국이 자신들을 따뜻하게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중국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그대로 길거리에서 가난하게 떠돌도록 방치했고 중월 국경지대에 베트남인 자치구역을 마련해줄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당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인구만 많지 경제적으로 위낙에 가난했던 국가였던지라 도와줄 여유가 없었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하튼 이들 추방 화교들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면서 귀국하였고 베트남 경제계에서 상당한 손으로 부상했다라는 후일담격인 얘기가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베트남북한과의 사이도 덩달아 나빠졌는데, 북한이 이 전쟁에서 중국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사이가 나빠진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전쟁 종전 때 억류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 이대용 공사 외 2인을 석방,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원래 이들은 북한이 북송을 목적으로 베트남에 요청해서 억류한 것이었는데, 이들이 전향을 거부하는 와중에 이 전쟁이 터지고 북한이 중국쪽으로 돌아서자 더 이상 북한 말을 들어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때마침 경제 사정이 월등히 나아진 한국 측에서도 약간의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내걸자 거기에 동의하고 이들을 석방한 것이다.

6 대중문화

80년대 대륙에서 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많이 만들어졌다. 하나같이 배달의 기수 수준의 작품이 많은데 당시 중국군의 장비나 배달의 기수식의 클리셰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마음을 비우고 보면 의외로 재밌다.(...) 친절하게도 대부분 인민해방군 영화제작소가 만들었기 때문에 저작권에서 자유로워서[24] 유쿠나 투더우같은 중국 웹뿐만 아니라 유튜브에 올라온 것도 그대로 볼 수 있다. 1979년전쟁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여러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전투를 다루기도 한다.

6.1 전쟁자체를 다룬 작품

등등 10여편이 있다.

6.2 등장 인물들의 경력으로만 언급되는 작품

서금강, 임국빈, 원일초 주연의 홍콩 영화 성항기병속집(省港旗兵續集, 1986)에서, 홍콩 경찰의 제안으로 범죄 조직의 스파이로 잠입하게 된 3인방[25] 중 한 명인 위경생(임국빈 분)이 중월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전쟁 당시 중상을 입었고 3등공을 수립했으며, 통신병으로 있었다고 짧게 언급된다.
이연걸과 종려시가 나온 보디가드(中南海保鑣, 1994)에 나오는 악당[26] 바로 중월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특수부대출신으로 나온다.

그리고 2003년에 중국에서 제작된 사라진 총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과 마을주민들은 중월전쟁에서 참전 경력자로 나온다.
  1. 베트남군이 먼저 기습해서 중국군이 자위그 자위가 아니다를 위해 반격했다는 주장.
  2. 사진을 보면 AK-47 소총이 많아 보이지만 저 당시 중국군에는 AK-47 소총은 거의 보급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3.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북베트남 정권은 남베트남을 1년간 구 베트콩 중심의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 혁명 정부라는 꼭두각시 정부로 다스리다 1976년 정식으로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고치며 통일 정권을 선포했다
  4. 물론 중화민국은 미승인했다. 말 그대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비공식 관계.
  5. 정확하게는 교주의 사씨의 자치령이었는데….참고로 제갈량이 맹획을 공격하러 갔던 남만은 지금의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이다. 베트남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베트남인들의 조상들은 베트남 북부에서부터 창강 이남 중국 남부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 한족이 창강 이남을 개척하면서 베트남인들은 현재의 위치로 계속 밀린 것이므로 맹획은 베트남인의 근친일 수도 있다. 또는 타이계 민족일 수도 있다.
  6. 베트남어로는 찌에우 다. 현재 베트남인홍콩인 중 독립 성향 홍콩사람들은 둘 다 조타를 시조로 받든다. 일단 일부 극우 베트남인들은 광동인의 경우 나중에 내려온 화교가 아닌 중국본토의 광둥 성 내의 광동인 및 남방 월족계 중국인들까지 원래 동포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7. 비슷한 예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전쟁에 UN의 이름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아주 싫어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무장하고 한국에 들어올 경우 군대를 이쪽으로 돌려 막겠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8. 대한민국이 일본과 같은 자유 진영이었어도 일본에 대해 시선이 좋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9. 유명한 보트피플의 상당수는 화교계 베트남인들이다.
  10.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지는 미국이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든 해군기지였는데, 미국이 떠난 후에 비어있다가 소련군이 들어와서 썼다. 당시 소련 해군의 해외기지는 거의 없었는데 그걸 미국이 공짜로 지어줬으니, 소련으로서는 정말 고마울 지경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죽쒀서 개준 셈이 되었다. 여기에 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철수했기 때문에 비어있었는데,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중국의 압력이 다시 가중되자, 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러시아에 각각 해군기지 임대제안을 했다. 기사 기사하지만 결국 베트남 정부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제안을 취소하고 캄란만 기지를 비군사시설로만 운용하기로 했다.
  11. 베트남군의 게릴라전 교리는 중국군에게 배운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북베트남군 주요 지휘관들은 대부분 접경인 중국 윈난의 보병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12. 크메르 루주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느냐하면, 1980년대 영화를 찍으러 크메르 루주 병사로 분장한 배우들이 진짜로 오인되어 캄보디아 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13. 전쟁 끝난후 지압 장군은 실각하고 반티엔둥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
  14. 삽질로 자멸하던 남베트남이 미군 철수당시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군사력 전세계 5위권 안에 들었다는걸 기억하자. 그게 고스란히 베트남군손에 들어갔으니
  15. 애초에 응우엔지압도 그렇고 이 양반들도 사실 교육과 혁명가 커리어 초반은 대부분 운남육군강무당이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 받으며 쌓았는지라...민족보단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보면 초창기에는 동고동락에 같이 혁명하며 성장했던 동아시아 사회주의권이 이제 커서 각 나라의 집권 세력으로 갈라서자 벌인 동족전쟁스러운 성격도 있다
  16. 물론 중국군이 질적인 수준에서 베트남군과 비슷했으며 또한 베트남군의 화력에 노출되는 공격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17. 하지만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거는 없다. 앞선 대미항전 때도 그렇고, 굳이 침략군이 나치스나 북한처럼 학살에 눈이 먼 종자들이 아니라 해도 당시 사회 경제적 기반이 여전히 소규모 농촌 중심이었던 베트남에서는 정글에서 벌어지는 포격전 사이에 외딴 농가가 휘말리는 식으로 의도치 않은 민간인 피해가 나기 쉬웠다.
  18. 단 여기서 오해가 있다면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의 숙청은 처형이 아니라 노동교화소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혹은 홍위병에게 학대를 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때까지 자살하거나 맞아 죽지 않았다면, 대부분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었다.
  19. 베트남이 막거나 이겨낸 국가들은 프랑스, 미국, 중국.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국가 다섯 중 3개 국가다.
  20. 시아누크 왕이 이전 왕정 시절 저지른 전횡으로 나라가 막장이 되었던 현실을 고려, 실권은 주지 않고 지위만 갖는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다.
  21. 결과적으로 1945-1950년 5년간의 초고속 군축으로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51년 상반기를 지나서야 2차대전때의 위용을 다시뽐냈다고 할수있다.
  22. 다른 나라의 상급대장에 해당.
  23. 이 시기가 스탈린의 대숙청이 작용되기 직전인 1935년이었는데 이 땐 2차대전이 벌어지기 한참 직전의 시점이었다. 또한 소련이 건국된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24. 저작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홍보 영화의 특성상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도 자유로이 올라와도 아무도 지워달라는 요청을 안한다.
  25. 셋 모두 고급 간부의 자제들이며 공안으로서 재직하고 있었고, 자유를 찾아 대륙에서 홍콩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 붙잡혀 대륙으로 압송을 대기중이었다.
  26. 매트릭스2와 견자단이 출연한 도화선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예성이라는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