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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학계의 시대 구분
한국사학계의 주류인 서울대학교에서는 전기-관학파 집권기, 중기-사림파 집권기, 후기-세도정치기의 3시기로 구분해서 보고 있다. 시대 구분으로는 전기와 중기가 근세, 후기는 근대 태동기. 개항 이후는 근대로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항하는 쪽인 고려대학교에서는 근세 및 근대 태동기가 서양사의 고대-중세-근대의 3분법을 억지로 꿰어맞추기 위한 궤변이라고 서울대의 설을 열심히 까는 경향. 이쪽에서는 닥치고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조선 전/후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개항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는 개항기라고 하여 근대로 편입한다.
주류적 관점은 아무래도 서울대를 따라 3분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강하다. 그러나 과연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교체 외에 시대를 구분할만한 근원적인 변화가 있냐는 변화가 있냐는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과연 훈구와 사림이 다른 세력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도전이 만만치 않다.
현행 검정 교과서(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조선의 시대 구분에 3시기 구분법을 쓰고 있는데, 양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를, 흥선 대원군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와 말기(개화기)를 구분 짓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회, 문화 부분에서 관학파 및 훈구파와 사림파 집권기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병자호란을 대개 조선 후기로 넣는 등 두 사관을 절충한(혹은 어중간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나무위키의 이 항목에서는 각 시대를 세기를 기점으로 대략 100년 단위로 분리하도록 하되[1], 19세기의 경우 고종의 즉위 전후의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그의 즉위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약사인만큼 주석은 최대한 생략해주시고 핵심 명사 위주로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2 건국과 발전: 15세기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홍건적 등 외적의 침입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원명교체기의 혼란기에, 황산 대첩등의 무훈을 바탕으로 신흥무인으로 크게 성장한 이성계는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성장한 정도전 등의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신진사대부와 힘을 합쳐 위화도 회군을 거쳐 고려를 무너뜨리고 유교(성리학)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왕족과 그 계파인 왕씨들을 탄압하는 왕씨 몰살이 자행되었다.
개국세력 내부 갈등으로 인해 두번의 왕자의 난이 있었으나, 난을 통해 즉위한 태종(3대) 이방원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숭유억불을 진행하며 새로운 국가로써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대왕(4대)은 국가의 기틀이 되는 주요 제도들을 정립했으며, 한편으론 고유의 민족 문화를 최고조로 발달시켰다. 그 중 백미는 훈민정음의 탄생. 또한, 영토 확장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지금의 압록강 및 두만강 아래 있던 여진인들을 강 너머로 쫓아 보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호랑이 모양 한반도' 영토를 완성한다.
세종 이후에도 세조(7대), 성종(9대)을 거치면서 문물 정비와 제도 확립에 박차가 가해졌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완성된 유교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고려보다 한층 강화되고 세련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의 모습을 갖춰 갔다.[2]
3 훈구/사림의 갈등과 사림의 집권: 16세기
이런 과정에서 기득세력인 훈구가 형성된다. 훈구란 정변과 반란 진압 등에서 공을 세워 공신전을 소유하게 된 대지주 공신들과 그 자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계유정난이란 비정상적 집권 과정을 거친 세조의 치세부터 형성되었다. 이들의 세력화는 토지겸병 문제와 함께 국가 체제에 상당한 문제들을 초래하게 되었고, 지방농토와 중앙관직 진출을 놓고 지방에서 중소 지주로 실력을 행사하던 사림들과 대립각을 형성하게 된다. 훈구(관학파)가 중앙조정의 기득세력으로서 보수적이면서 현실 추구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사림은 훈구와 대립하며 유교 정치의 이상적 구현을 추구했고, 조선 건국에 불참한 세력과 지방에 뿌리를 두었기에 중앙 조정의 지배력과 왕권의 제약을 주장했다. 이들은 사림이 어느 정도 세를 갖추게 된 성종 시기부터 대신-대간의 구도로 대립하기 시작한다.[3]
연산군(10대) 시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강력한 왕권 강화를 꿈꾸는 연산군의 의중이 서로 꼬이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라는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림이 화를 입었다 하여 '사화'라 일컬어지만, 사화와 관련해 피해가 컸던 것은 사림보다는 훈구 쪽이었다.[4]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이에 대한 역풍으로 신하들이 일으킨 중종반정을 맞이하여 폐위되고 만다.
이후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중종(11대)의 등극과 함께, 왕을 몰아낸 공신세력들은 추가적으로 훈구세력이 되어 더욱 강력한 권력과 특권을 차지하게 된다. 한편 연산군 시기 크게 배척을 받은 사림도 반정공신들의 협조를 받아 영향력을 어느정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신하에 의해 왕이 쫓겨난 사태와 더불어 왕권은 건국 초에 비해 많이 약화됐으며, 본래는 관료를 지칭하던 양반이 지배계층으로 계급화, 고착화 되면서 조선은 초기 중앙집권화 법치국가의 모습이 약해지고 사족이라는 집단이 양반으로써 양인 위에 군림하는 반상제 체제의 형태를 띄게된다.
사림 가운데 개혁파였던 조광조는 한때 국왕인 중종의 신임을 받아 개혁정치를 추진했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말미암아 실각, 숙청당한다(기묘사화). 조광조 실각 이후 중종은 훈구 중 특정 권신, 척신에게 힘을 몰아주는 정치를 취한다. 이로 인해 중종 후반기와 이후 인종, 명종 시기는, 윤원형 등의 외척과 그 일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또한 각기 다른 척신 세력들끼리 서로 대립(을사사화)하던 시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림의 중앙 조정에서의 입지는 약화되어만 간다.
그러나 훈구 척신 세력들은 그들끼리의 싸움을 통해 차츰 소수화되는 데 반해, 사림은 거듭되는 사화에도 불구, 훈구의 자손들도 흡수해가며 그 세를 꾸준히 늘려간다. 중종 때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서원과 향교는 이후 사림과 사족이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데 큰 지지 기반이 된다. 이 후 이이를 위시로 한 사림의 서인 계열이 훈구척신파를 계승하면서 정치 주도권 싸움은 사림들 간의 붕당정치로 옮아가게 된다.
4 기존의 훈구/사림 이분법 통설에 대한 반박
식민사학이 판치던 1960년대가 저물고, 이에 대항하는 학계에 새 바람이 불어오니, 그 일환이 조선 역사를 새로이 연구한 것이다. 1970년대 사학자들은 조선 지도층을 사림 훈구로 나눴는데, 이는 정설로 받아들여져왔다. 허나 1970년대 후반 하버드대학 한국사학 연구소 초대소장인 에드워드 와그너를 시초로 조선 정치사의 대표적 연구가인 정두희, 김범 등이 사림/훈구의 이분법을 부정하였고, 이는 현재 학계에서 수용 과정에 놓여있다.
허나 이분법 통설을 부정하는 것이 사림 훈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훈구'는 사실 원훈구 대신을 축약한 것으로, 원로 공신세력을 지칭한다. 대표적으로 한명회나 중종반정 삼대장 등이 들어간다. 헌데 사림과 훈구가 대립하여 사화가 일어나고 결국 훈구세력이 축출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공신세력' 만이 훈구의 정의에 맞는데, 이들은 이미 성종조에 축출되거나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렇다면 현재 정의하는 훈구파는 누구인가. 이때 적용되는 파벌의 잣대는 바로 씨족과 이해관계다. 공신세력과 그 가족들,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이들이 훈구파로 규정된다. 허나 이 정의도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엔 모순이 생긴다. 대표적으로 허종 형제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형제가 하나는 삼사의 대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삼공(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이었다. 헌데 그 대간이 삼공을 탄핵했으니, 이는 혈연관계로 규정되는 훈구파의 정의와 부합되지 못한다. 이들이 서로 대립하고 정치적 대결이 심화된 것은, 이들이 서로 사림과 훈구여서가 아니라, 성종조의 정치가 대간과 대신의 대립구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엔 사림의 세력은 미약했으며, 김종직을 필두로 사림이 유입되었다고는 하나, 실절적으로 사림으로 규정된 이들이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기묘사림의 이야기다.
따라서 와그너와 정두희를 비롯한 학자들은 사화를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 아닌, 삼사의 대간과 대신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화의 피화인에 사림뿐만 아니라 훈구파로 분류되는 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있는 것을 설명해준다.
한편 본래 조상은 훈구파로서 성종~중종조 때 대신이었던 가문이 후손은 정작 사림파로서 선조때 임용된 대신인경우도 허다하다. 일부는 이들을 전향사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기존의 통설에 대한 무수한 반례들은 기존의 사림과 훈구 대립구도를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하는게 바람직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사화는 삼사와 대신의 대립이며, 훈구파와 사림파의 교체는 왕도정치, 성리학 근본주의를 주창한 신유학의 폭넓은 수용(물론 훈구파도 수용한 측에 포함된다. 이로서 전향사림이 이해된다.)으로 이해된다.[5]
5 양란과 붕당: 17세기
사림의 집권 자연스레 각자 학파와 친소관계에 따라 당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게 되는 붕당 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림은 크게 이황, 조식 등의 동인과 이이, 성혼의 서인으로 나뉘어져 대립하였으며[6], 두 당 간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정여립의 난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조선은 개국 200년만에 이웃 일본의 대규모 침략(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100여 년의 센고쿠 시대 동안 분열되어 있던 일본의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쌓인 여러 내부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고,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대륙 침략 즉 한반도 침략을 감행한다. 히데요시는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동원해 전격적인 침략을 단행하고,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과 달리 200여 년간 평화 시대를 맞이하며 군제 운용이 헤이해져 있던 조선은 전쟁 초기 일본군의 침략에 파죽지세로 밀리고 만다.
일본군은 초기의 승기를 바탕으로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 까지 떨어뜨렸으며, 선조는 압록강 앞인 평안도 의주까지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 각지에서 재정비된 의병과 육군의 반격으로 전세는 고착세에 들어갔고, 조정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가 지원군을 파병하면서 전세는 오히려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일본군은 전선을 남해안으로 물릴 수 밖에 없었으며, 정유재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은 패퇴(철수)하고 조선은 마침내 전쟁에 승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농토 황폐화 등 전쟁 피해도 막심했다.
당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말, 광해군(15대) 시기에 더욱 극심해진다. 임진왜란 직후 동인은 서인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으며, 북인은 이후 남인마저 실각시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북인은 크게 초강경파와 상대적 온건파인 대북과 소북으로 다시 갈라졌다. 대북은 여러 옥사와 폐모론을 주도하며 소북을 밀어내어 권력 독점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으나, 이는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을 초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반정 이후, 대북은 숙청되었고, 소북은 당파로써의 힘을 잃고 여타 당파에 흡수되었으며[7] '서인 여당, 남인 야당'의 공존 형태의 붕당정치가 구현된다.
한편, 중원의 지배자인 명나라가 농민 반란 등으로 내리막을 걸으면서, 만주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고 명을 위협했다.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16대) 정권은 광해군의 양면 외교를 비판하며 대명의리론에 기울어져 있던 사대부들의 여론을 따라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는 후금을 자극하여 정묘호란을 터뜨렸으며, 국호를 청나라로 바꾼 뒤에는 다시 사대(신종)을 강요하게 된다.[8] 조선에선 척화론이 크게 대두했으나 청은 13만 대군을 일거에 투입하여 조선을 굴복, 군신관계를 맺게 한다(병자호란). 국왕인 인조는 삼전도에서 당시 청 황제 태종 홍타이치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다수의 백성들이 노예로 붙잡혀갔고, 내정간섭과 막대한 공물을 지불하게 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아야 했다. 이는 사족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이 때의 충격은 이후 소중화주의와 예학의 강화, 그리고 북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자리 잡기 시작한 효종(17대) 대에 이르러서는 내부 간섭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왕조와 지배층인 사족들이 내세운 이념은 오랑캐에게 당한 굴욕과 원망을 언젠간 갚아주겠다는 북벌론. 그러나 이건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구호였고, 실상 북벌론이 지배적이던 효종 및 현종대의 군사력 증강을 보면 각종 성읍 수축 등 방어력 증대가 중점적이었다.[9] 시간이 지나면서 북벌론은 흐지부지되었으며, 오히려 후기에 들어선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운동이 전개되기도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다시 평화기에 접어들었으나, 소빙기로 인한 현종 대의 경신대기근과 숙종 중반기의 대규모 가뭄과 전염병 창궐로 인해 양란의 후유증 극복은 숙종 후반기에 접어들어서야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방납에 대한 폐단을 억제하기 위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 효종 대에 걸쳐 유지되던 서인, 남인 공존 체제는 현종(18대)대 예송논쟁을 통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 끝에 숙종 집권 초 남인은 서인을 몰아내고, 만년 야당에서 여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남인의 조정 장악은 일시적일 뿐이었으며, 숙종의 개입에 따라 환국정치로 심화된다. 세 차례의 환국정치로 인해 끝내 남인은 중앙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집권 서인은 남인을 배척하는 강경파 노론과 남인에게 우호적인 온건파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6 왕권 강화와 경제적 안정: 18세기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시기로 대변되는 18세기에는 붕당 간의 갈등을 각 당의 인재를 동등하게 고루 등용한다는 탕평책 등으로 조절하는 전제에서 제법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탕평책은 숙종 시기 환국정치를 거치며 처음 등장한 단어로 경종 시대(20대)를 전후로 한 극한의 붕당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영종, 정조 시기 인사정책으로 활용됐다.
이 18세기 조선은 왕권의 강화 등과 함께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기를 구가한다. 화폐 경제가 마침내 상용화되고 이로 인해 상업이 발달했으며, 또한 청나라의 고증학이 전파되어 중앙조정에선 배척했지만 일각에서는 북학과 실학이 발달해갔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이 시기가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였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주장이 있다.
반면 중기의 반상제 체제는 점차 양인들이 국가에서 발행한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양반 족보를 사들이는 편법으로 양반층으로의 상승을 꾀하게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18세기 부농의 증가와 더불어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급증했으며, 부분적으로 면세 혜택이 있는 양반 수의 급증은 재정 감소와 조세 불균형을 초래해 당시의 조세 시스템을 더욱 악화시켰다.[10] 한편, 사림으로 대변되던 사족들이 중앙사족과 지방사족으로 이분화되어 조정의 관직이 한양과 그 주변에만 집중되어 가는 관직의 수도권 집중현상 또한 심화되어 간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붕당정치도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간다. 영조 집권 후반기에는 소론이 사실상 실각하면서 노론 일당만이 실권을 갖게 된다.[11] 탕평이 실질적으로 발휘된 건 영조 전반기(완론탕평)일 뿐, 영조 후반기와 정조 시기의 탕평은 집권 일당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왕의 견제책에 가까웠던 것. 영조는 후반기에 탕평이라는 미명하에 노론 내 척신들(풍산 홍씨, 경주 김씨)을 통해 노론 사림을 견제했고, 정조는 이미 실권을 상실한 남인과 소론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노론 일당 이전의 붕당 정치로의 복원을 꾀하였다(준론탕평).[12]
정조 시기 노론은 강경파인 벽파를 중심으로 당의 의리를 앞세우며 남인, 소론의 등용을 계속 반대하였고, 벽파와 달리 왕(정조)의 뜻을 쫓은 노론 온건파와 남인, 소론을 시파라 일컬었다. 이러한 반대에 부딪친 정조는 결국 말년에 붕당의 복구를 포기하고 노론 시파이자 명문 가문인 안동 김씨의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척신)으로 지목하여 세자의 근위세력으로 삼는, 척신 정치로 다시 돌아서는 모습을 보였다.
7 세도정치와 왕조의 황혼: 19세기 전반
정조가 숨을 거두고 당시 세자인 순조가 어렸기에 왕실의 큰어르신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할머니)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고, 노론 벽파는 정순왕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시파에게 숙청을 가한다(신유박해).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친정과 함께 시파(노론 시파)가 벽파에 반격을 가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붕당마저도 사실상 소멸한다.
19세기 전반에는 김조순의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중앙의 권세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것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도정치가 펼쳐진다. 붕당 정치 때보다 국가가 더 막장로드를 달리게 된 셈. 사실 조선 후기부터 심화된 권력의 수도(한양) 집중 현상은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이때 벌어진 상황은 현재 필리핀이나 라틴아메리카가 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형태인 족벌정치였고, 안동 김씨 족벌집단은 국가의 장래나 유지 능력 및 시스템에는 관심이 전혀 없이 오직 가렴주구에만 몰두하면서 조선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이는 국가 체제의 말기 증상으로 외세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이런 왕조는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생산성이 하락하면서 더 이상의 인구부양이 힘들어졌고 농민층의 소득저하로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었다. 특히 국가재정이 악화 되면서 사회보호망이였던 환곡이 부족한 재정을 채우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로 인해 농민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조선은 국가 막장 테크로 돌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식이 성장한 징후가 괄목하리만큼 곳곳에서 나타난다. 민중들은 착취체계로 변질되어 버린 조세 부역 체계와 탐욕스러운 수령들 그리고 이와 결탁한 아전, 토호들에게 시달렸으며,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나 1862년의 임술봉기, 진주민란 등이 대표적. 한편으로는, 서양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출몰하는 등 서구 열강이 조선에 점차 접근하기 시작한다.
8 개화와 망국: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1863년 고종(26대)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당시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세도정치 타파, 서원 철폐, 호포법 실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개혁은 어디까지나 구식 질서를 지키기 위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며, 당시 서세동점으로 대변되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하지만 흥선대원군도 섣불리 개혁을 하였다가는 멸망을 피치 못할 것을 생각하고 한 일이었다. 흥선군의 논지도 개화를 하되 준비가 된 상태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강화도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두 차례의 양요를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막아낸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친정으로 실각하였고, 왕후 민씨의 가문인 여흥 민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부활했으며, 명성황후 주도 하의 세도 세력은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는 차라리 양심적이다 싶을 정도로 나라를 철저하게 망쳐놓았다.
1876년 조선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개항을 했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조선이 가지고 있던 외교관을 뒤엎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조선의 종주국인 청과 이웃나라인 일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조선은 이 과정에서 뒤늦게 근대화를 추구했으나, 구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의 점진적 개화(동도서기)를 시도하였기에 부국강병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청으로부터 완전히 가져옴으로써 조선에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종은 이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꿨으며, 근대화와 중립화에 관한 여러 조치들을 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을 막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처사였고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후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화, 1910년의 경술국치로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 조선 건국은 1392년이므로 실질적 개국 초기는 1400년이며,100여년 뒤 사림이 성장하여 훈구와 충돌한 무오사화도 1498년 발생했다. 조선시대사의 기점이 되는 임진왜란 역시 정확히 개국 200년만인 1592년에 발생했다. 이후 숙종 최후의 환국인 갑술환국은 1694년 발생했으며, 또한 세도정치의 기점이 되는 정조의 죽음은 정확히 떨어지는 1800년이다. 그리고 19세기말인 1897년에 중화질서를 거부하고 칭제건원을 실시한 대한제국이 출범했다. 실제로 민음 한국사의 시대구분이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 ↑ 15세기 당시 전세계에서 조선보다 발전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는 명나라밖에 없었다. 같은 동아시아의 일본은 전국시대(일본)이었고 유럽은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였다. 같은 시대에 조선은 전국의 거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 ↑ 다만 이때의 사림 세력은 훈구파와 비하면 중앙 조정에서 그 기반이 약했기에, 훈구의 자손들을 사림으로 끌어들이거나 사림에 호의적인 훈구의 지원을 받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 무오사화에서 처벌받은 사림은 적었으며, 훈구도 함께 타격을 입었다. 갑자사화의 경우, 사림 이전에 훈구가 대놓고 집중 타겟이 됐다. 당시 사림의 세력이 훈구에 비해 작았던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 ↑ 구체적인 반박은 해당 학자들의 저서에 실려있다.
- ↑ 당시 동서분당의 원인으로는 구 훈구파에 대한 처우의 문제가 컸다. (이에 따르면 동인은 강경파에 서인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참고로 초기의 동인과 서인은 결코 대등한 세력은 아니었다. 동인이 다수 소장파에 해당했으며, 서인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인의 외연이 더 넓어져 그나마 동인에 대항할 만큼의 세를 갖추게 되었던 것.
- ↑ 대개 남인 혹은 서인으로 전향했다.
- ↑ 정묘호란 당시 침략한 후금의 군세는 3만여 정도였고 개전 초반부터 협상을 요구했기에 형제관계를 맺고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정도로 끝났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조선의 완전한 신종을 추구했으며, 이는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을 상당부분 포기했더라도 반드시 불거져야했던 충돌이었다.
- ↑ 강화도 포대가 완비된 것도 이때.
- ↑ 이는 19세기 삼정의 문란이 야기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 ↑ 이후에도 소론, 남인 인사들이 탕평의 이름으로 기용되긴 했으나 노론에 맞설 만큼의 실권이 없었다.
- ↑ 당시 정조가 적극 기용한 남인들 중에 정약용으로 대변되는 실학자들이 몇몇 포진해 있었기에, 이것이 정조가 실학자들을 후원해 국가 개혁을 꿈꾸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정조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