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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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선주전(先主傳)」 | ||||
유비 |
묘호 | 열조(烈祖)[1] |
시호 | 소열황제(昭烈皇帝) |
연호 | 장무(章武) |
성 | 유(劉) |
휘 | 비(備) |
자 | 현덕(玄德) |
생몰기간 | 161년 6월 7일 ~ 223년 4월 23일 |
재위기간 | 221년 4월 6일 ~ 223년 6월 10일 |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촉한(혹은 촉)의 초대 황제. 그리고 소설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주인공이다.[2]
그가 세운 촉한은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 때문에 한이라고 국가명칭을 공표하였지만, 삼국시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오늘날까지 전한과 후한 을 따로 구분 짓듯이, 촉 지방에 할거한 한나라라는 뜻에서 촉한이라고 불린다. 일부 역사가들은 계한이라는 이름으로 칭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한과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끝 계(季))이란 뜻으로 촉나라에 정통성을 주는 명명법이다.[3]
잘 알려진 유비의 생김새는 기이하다. 그는 귀가 어깨에 닿고 손목이 무릎에 닿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실 큰 귀나 긴 팔 등등의 설정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외모라고 한다. 유비가 귀가 크다는 건 정사에서도 나오는 사실이다.[4] 정사에 따르면 그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수염이 없었다고 한다.[5] 유비는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며, 당시로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전장터를 떠돌면서도, 황제가 되기까지 명분을 더럽힌 적이 없는 처세술의 롤모델로서 평가받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소설 초반에 나오는 황건적에게 대항하는 의병을 조직한 뒤, 대장간에서 만든 쌍검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후에는 군주가 된 유비가 직접 전쟁터에 나설 일이 없으니 초반에만 잠깐 나오고 말지만.
그는 한나라 황실의 명분적인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 그가 반동탁 연합군에 가입한 일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웅기》에는 영제(靈帝, 재위 168~189) 말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에서 무리를 모았다가 영제가 죽자, 유비 또한 군을 모아 동탁(董卓) 토벌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조조와 약간의 친분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연의 또는 연의 이후에 만들어진 창작물에서는 보통 이때부터 조조와 유비가 서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다만 연의에서 유비는 공손찬과의 친분을 살려 공손찬의 부장으로서 동탁대항전에 참전했다고 묘사되지만, 공손찬은 동탁 토벌에 참여한 적이 없다.
또한 유비는 밑바닥부터 역경을 딛고 올라서, 난세의 흐름 자체를 바꿔버린 인물이다. 더불어 삼국정립 그 자체를 이끌어낸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보통 다른 시대라면 조조 같은 강력한 군벌이 가뿐하게 다 쓸어버리고 새 왕조를 여는 혼란기 정도뿐이었을 후한 말기를 수많은 창작과 민담의 무대로 만든 사람은 조조의 천하통일을 막아낸 유비였다. 삼국지 이야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황건적의 난 때 나타난 수많은 군웅 중에서 가장 미약한 기반으로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유비 뿐이다.[6][7] 또한, 유비가 조조를 박살냈을지언정 이릉대전에서 모든 성과를 잃은 패배자가 되었다는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8]
이런 설정은 한고조 유방과 유비를 최대한 비슷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유방은 실제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의 악과 깡, 패기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마인드를 가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개인적 능력도 나름 있었다는 점에서 유비와 비슷하기도 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부려 천하를 차지하였다는 점도 있었고. 연의에서는 유비를 유방과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그의 한중왕 선언이나 참칭에 큰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의 포지션은 몰락한 황족의 귀공자다. 그러나 그가 지녔던 황족이란 타이틀로 인하여 그가 얻은 실익은 없었고, 또한 삼국시대때는 그보다 더 유력한 황족도 많았다. 연의에서 유비의 최고의 무기는 눈물로써, 오죽하면 유비냐 울기도 잘한다라거나 유비는 눈물로 천하를 차지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의의 이러한 설정 때문에 유비는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인물로 해석되기도 한다.[9]
2 이름과 칭호
널리 알려진 표기인 '유비 현덕'이라는 그의 전체 이름은 본래 일본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한국에서 쓰는 건 일본의 영향이다. 연의 본문에서는 유비, 유현덕, 현덕, 유황숙, 한중왕, 소열제 등의 호칭으로 그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자와 이름을 다같이 소개할 때는 성은 유,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고 길게 늘여 쓰거나, 줄여서 부를 때는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지 <유비 현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나 부모, 조상, 군주 등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음을 예로 여겼고 발음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휘(避諱)라고 부른다. 피휘할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대놓고 면전에다 이름을 부르면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고 하였다. 자(字)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야말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였다. 요컨대, 이름이야말로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친한 사람이라고 함은 친구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 등 그야말로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다. 또한 공식적인 문서에는 인물의 이름을 쓴다. 다시 말하자면, 벼슬과 자는 같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성+자를 하면 존중의 의미이고 벼슬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성+벼슬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꽤 존중해주는 것이라고 한다.[10]
유비의 다양한 호칭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유비(劉備) : 본명.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는 부모같은 사람이 아닌이상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였으며, 평대가 되기에 아군이라면 당연히 쓸 사람이 없고, 오히려 적이 많이 쓴다. 유비놈이라던지. 그래도 낮춰 불러 귀 큰 놈이라든가 돗자리 짜던 촌놈 하는 식의 욕설로 호칭하는 경우와 비등한다.
- 현덕(玄德) : 자. 현덕이라는 그의 자는 도덕경 10장에서 따온 어휘로 여겨지며, 이를 풀이하자면 묘한 덕 또는 매우 깊은 덕이라는 뜻이다.
- 유현덕(劉玄德) : 성+자. 딱히 벼슬이 없을 때는 이 호칭이 자주 쓰였다.
- 귀 큰 아이 : 적대 군주가 유비를 욕할때 부르는 이름. + 여포가 죽기 직전 부른 이름. 예를 들어 여포의 유언이 있다.
- 유예주(劉豫州) : 도겸, 조조가 상표하여 예주목을 벼슬로 받았을 때의 호칭. 사실 유비가 자주 있던 소패는 예주 패국 패현으로 추정된다.
- 유황숙(劉皇叔) : 연의에서 헌제와 만난 다음 족보를 뒤져보고 황제의 숙부뻘이라 하여 붙은 호칭. 주로 아군들이 유비의 혈통을 높이려는 뜻에서 자주 쓴다.
- 유좌장군(劉左將軍) : 헌제를 만나고 좌장군 벼슬을 얻었을 때 불렸을 듯하다. 실제로 '유좌장군'이라기보단 유예주라고 더 불렸을 듯하다(제갈량이라든가).
- 한중왕(漢中王) : 한중왕에 오른 뒤에 쓰인 이름.
- 선주(先主) : 촉한의 앞선 군주라는 뜻. 정사 삼국지에서 쓰인 호칭이다. 성+선주라고 해서 불린 적이 있는 듯. 송나라 시대의 기록 가운데 삼국지를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한 농부가 의자를 머리에 쓴 다음 "유선주 같지 않나?"면서 장난을 쳤다는 것이 있다.[12] 위의 정통성을 이은 진의 사가인 진수가 촉한을 꽤나 존중했음을 나타내는 칭호다.
- 소열제(昭烈帝) : 시호+제(帝)를 붙여서 황제로 취급한 것. 정통성을 인정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는 호칭이다.[13] 물론 시호이므로 생전에 저렇게 불린 적은 없다.
- 소열, 한소열 : 帝는 떼고 시호만 부르는 명칭. 한국에서 조선시대 왕들을 부를때 보통 시호를 부르듯, 조선시대에 유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소열로 부르는 기록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 음흉한 놈, 사기꾼, 배신의 달인 : 촉까들이 종종 쓰는 호칭. 물론 촉까가 아니어도 유비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중 음흉한 놈이란 호칭은 그 유서가 깊다.
-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 : 유비군이 기본적으로는 임협의 성격이 강했기에 나오는 말. 은근히 한국 인터넷 상에선 많이 쓰인다.
3 생애
유비(삼국지)/생애 참조.
4 평가
조조가 유명한 학자인 배잠에게 형주에서 유비와 함께 지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평가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배잠이 말했다.
그가 만약 중원에 있다면 민심이 흔들리고 백성들이 핍박에 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변방을 차지한다면 변방 최고의 군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 세설신어 <식감中>
이 말이 "유비 그 인간 능력 겨우 지방군주감 정도밖에 안돼요.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유비가 이미 중원을 차지한 조조와 함께 있으면 조조의 기반이 흔들리고 중원이 피튀는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뜻. 게다가 조조 앞인데 "유비님 능력은 너님보다 더 대단함."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설사 지방을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그냥도 아니고 최고의 군주라고 평가하였다.[14] 적어도 유비가 마냥 폄하될 정도로 무능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은 건 확실하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 진수
물론 진수가 "임기응변과 재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하였다." 라고 평한걸 보면 전략적 측면에서는 조조보단 아래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유비는 진수에게 있어서는 적국의 군주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나라(위나라 또는 진나라)에서 건국자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는 조조와 유일하게 진수가 비교하는 인물이다.
한고조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지 고려했을 때 (한나라의 건국자인 한고조는 당시 중국인에게는 영웅 중 으뜸.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 이순신과 같이 존경받는 인물), 진수는 적국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유비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군주의 그릇과 풍도를 평할때 유비를 가장 전설적이었던 군주인 한고조와 역량을 견줄 정도로 유비의 역량을 동시대 인물 중에서 최고로 친 것이다.
4.1 군사적 능력
연의의 유비는 그 조상인 유방에게 비롯된 전형적인 중국식 영웅[15]이다.
반면에, 정사(正史)의 유비는 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여러번 굵직한 전적을 올렸다. 공손찬 밑에서 원소를 막는 역할을 하여 공을 세워 승진을 한 사실이나, 도겸이 유비를 소패에 주둔시켰던 것, 여포가 그를 소패에 주둔시켰던 이유, 조조가 유비를 여포쪽에 붙여두었던 이유, 원소가 조조의 후방을 교란시키도록 유비를 파견했던 것, 유표가 신야를 그에게 맡긴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더불어 박망에서 하후돈을 격파한 것도 조운,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의 용병술이였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장(劉璋)이 보낸 유괴(劉璝), 장임(張任) 그리고 등현(鄧賢) 등을 모조리 격파했다. 후에 유장은 이엄(李嚴)을 보냈지만 이엄마저 유비에게 항복했다.[16]
그리고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지키는 낙성을 공격하는데 1년여 간을 보냈다. 이 당시 유비는 능구렁이 같은 행동으로 촉에서 세력을 키웠는데 당시 유장의 군사적 성과와 유비의 공격 이후 대처 방식은 대체로 무능하거나 적절치 않았으며, 유비가 처음 입촉할 당시부터 유장 세력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유비에게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고, 유장 세력을 바깥에서부터 군사적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촉의 내부에서 유장의 지원금을 미끼삼아 적극적으로 유장 휘하 세력을 포섭하여 세력을 키운 것으로 볼 때, 이는 적진 한복판에 고립된 상황에서 유비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것 이전에 자신이 쌓아 놓은 명분과 신의를 외지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이용했던 유비의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군사행동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본격적으로 유장을 공격하기 시작한 유비는 성도로 쾌진격하기보단 군현 등을 장악하며 호족들을 포섭했으며 이는 조운, 장비, 제갈량등이 지원을 오는 것이 쉬워지는 잇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벽 이후 손가와 유비 세력은 대놓고 촉을 '언제나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또 취해야 하는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유장 세력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평가가 이러했던 것이다. 그래도 익주평정 당시 큰 소요 없이 비교적 안정된 형태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높게 평가하는 팬들도 있다. 이 부분도 사실은 유비의 정치력과 연계되는 부분인데 확실히 형주남부를 얻고 바로 익주로 진격, 거기서 1년 이상 유장과 싸워 익주를 얻고 바로 형주에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오와 대치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한중으로 조조를 상대로 대군을 투사할 정도이니 유비가 한번 세력을 얻기 시작했을때의 정치와 연계된 군사적 행보는 예사로운 부분은 아니다.
이릉대전에서는 오나라보다 정황상 열세의 상태에서 오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이민족들을 포섭하였고 이이, 유아, 손환를 격파했으나 주연과 송겸의 방어선을 뚫지못했다. 이후 육손은 유비를 도발했다. 육손에게 패한 방릉 땅의 호족 문포와 등개를 유비는 아끼면서 장군으로 임명하였는데, 육손의 투항 권유에 넘어간 문포가 재차 오나라로 도주함에 따라 유비의 꼴만 우습게 되어 버렸다. 또한 유비는 황권의 조언을 듣지않은 채 강공으로만 일관하다가 황권을 포로로 잡히게 만들었다.
유비는 조조나 원소 등과 달리 체계화된 전술을 심도있게 배울 기회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17] 원술과 대치할 때도 유비는 한 달 넘게 원술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여포|]](呂布)의 뒷치기 때문에 본거지를 잃게 되어 달아나야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싸우기 힘들다. 조조가 서주 공략 중 황급히 연주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단순히 예상하지 못한 뒷치기인 것도 있지만 상대가 여포라는 점도 한몫했다.
한중 공방전에서는 하후연이 죽은 뒤, 조조가 직접 나섰으나 이미 요충지를 다 차지한 상태였던 유비는 험한 땅에서 지키며 교전에 응하지않는 식으로 서서히 조조에게 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도록 했으며 조조는 결국 한중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유비의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라 법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 책략들 중 적합한 것을 선별하여 채택하는 것도 총사령관의 능력이다. 이건 조조 역시 마찬가지.
반면, 법정(法正)전에서는 세(勢)가 불리하여 오히려 유비가 있는 곳까지 화살이 날아올 정도였음을 볼 때 대군을 이끌고 온 조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 같다. 이러한 점은 교전에 응하지 않으며 수비로 일관했다는 무제기의 기록과는 충돌한다. 정사 삼국지 조상(曹爽)전은, "과거에 조조가 두 번 한중에 들어갈때 대패할 뻔 했었다"라며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부자에서 조전은 유비의 용병술이 서툴다고 평가했고[18], 다른 선비인 부간은 유비의 용병술에 대한 조전의 평가는 부정하지 않되, 유비가 너그럽고 법도가 있어 능히 사람을 죽도록 싸우게 할 수 있다고 평했으며, 휘하의 뛰어난 인물로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을 들어 유비의 뛰어난 인용술을 강조했다.
위략(魏略)에서는 유비가 유대(劉垈)와 왕충(王忠)에게 "조조가 직접 오면 모를까, 니들 같은 잡것들은 내 상대가 안 돼."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근데 그 이후 정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와버렸다. 그리고 유비는 얼마나 황망했던지 먼발치서 조조의 깃발만 보고도 혼자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유비가 격파한 장군들은 유대, 왕충, 채양, 하후돈 등인데 이들은 군재(軍材)가 있었다는 기록[19]이 특별히 없었으니 양민학살이었다거나 작은 전투에 강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유비 생전에 있었던 모든 크고 작은 전역들은 모두 유비 주도로 그의 지휘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20]
조조에게 약했다곤 하지만 조조는 물량에서 언제나 유비보다 앞서 있었고 그도 자기보다 세가 강한 원소 등을 깨부순 먼치킨임을 고려해야 한다. 따지고보면 조조도 도겸을 이기지 못해(조조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조조가 서주로 쳐들어간 적이 있다.) 홧김에 백성을 학살한 적이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산양공제기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의 군선을 불태운것을 유비라고 기록하고 있고 화용도에서 조조가 달아나며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21]라고 말했다고 적혀있다. 그 유비한테 패해서 도망가는 마당에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고 조조가 자신의 라이벌로써 유비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오주전에서는 유비가 먼저 공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뒤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둘다 조조를 격파한 걸 유비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유비가 조조에 맞서 대등하게 싸운 건 적벽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이 적벽의 싸움이 삼국지연의에선 유비가 한 거라곤 조조를 추격한 것 뿐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
다른 건 몰라도 유비가 패배를 수습하는 능력 하나는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흩어졌던 사병들이 다시 모였다는 기록이 여러번 보이며, 패배해도 손놔야 할 정도까지 간 적은 거의 없다. 이릉에서의 대패 이후에도 군사를 두 번이나 수습했다.[22] 그러니까 전법을 힐링으로 붙인게 신의 한수. 조조가 자주 친정(親征)을 나가고 그의 부하들도 대부분 조조의 지휘 아래가 아니라면 수비 위주로 나가는 등 위나라의 전략의 기본은 조조를 중심으로 돌아간 데 비해, 유비군의 경우는 유비가 총지휘를 맡으나 어느 정도 장수들의 재량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조조군의 장수들이 조조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말이라면, 유비군의 장수들은 급할때는 스스로 반응하기도 하는 유비의 손과 발이랄까.
천하삼분책으로 유명한 융중대의 북벌 계획은 유비와 서북지역을 공략하고 관우가 형주에서 북상해 양쪽에서 협공해 들어가는 것을 골자로 하며 이때 관우에게 형주의 군권을 따로 내줬다. 위나 오에서 이런 경우는 사마씨 일족, 주유, 육손 등등 드문 사례다. 그리고 위나 오는 창업자가 알아서 군권을 갖다줬다기보다 이들이 군권을 쟁취한 것에 가까웠다.
유비가 왜 이렇게 초반에 많이 패배를 했는가는 그의 초반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손견처럼 제대로 된 군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고.[23] 이후에도 볼수 있듯이 유비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패배 수습은 뛰어나고 웬만한 상대에겐 크게 당하지 않는 정도지만 상대가 강하면 와장창(...) 패배하는 정도의 역량이었기에 교육과 경험의 부족은 더더욱 쓰라렸을 것이다.
거기다가 기껏 처음 얻은 영지인 서주도 진군의 말에 따르면 빼앗기기 쉬운 땅이었던데다가[24](이는 훗날 여몽도 같은 말을 한다.) 여포와 원술과의 싸움에 자기 기반을 다 잃었고, 겨우 다시 자기 기반을 찾으려하니 조조에게 쫓기고, 기껏 의탁한 원소는 조조에게 개발살나고… 거기에 군력이 너무 모자라 유표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았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초반 자원도 안 좋은데 다른 세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적벽대전 이후에야 겨우 숨쉴 틈이 생겨 확장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기적인 것이 유비의 삶 초반이었다.
종합하자면, 조조나 주유 등 당대 본좌들에 비할만한 특출한 사령관은 못 되지만 연의의 묘사만큼 무능하진 않고, 세력의 격차가 크거나 대단한 강적을 만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승률을 보장할 수 있는 상당한 능력의 지휘관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느정도 세력을 갖춘 후로는 이릉전투 전까지 이렇다 할 패배를 한 적이 없고 적벽대전, 한중공방전에서 조조를 상대로도 상당한 승전을 따내었다. 하지만 유비의 진정한 능력은 전투력이 아니다.
4.2 인재를 보는 통찰력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터득한 인재의 장단점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은 또한 유비의 장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재를 아끼는 것과는 다르다. 인재를 아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알아보고 쓰는 건 아무나 못한다. 군위지인위명(君以知人爲明), 즉 '임금은 인재 알아보는 것으로써 밝아진다.'만은 확실했던 군주.
이게 유비, 조조 두 굇수와 손권의 가장 큰 차이점.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손권은 인재를 아끼긴 했지만 인재를 쓰는 방식에선 아쉬운 점이 많았다.
자신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유파를 어떻게든 정중히 모셔와서 자신과 일을 함께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판단 같아 보였다. 그렇게나 무시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모셔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유파를 영입하는 데에 성공하자 유파는 촉한의 내정을 확실하게 책임졌으며 유비의 재정상태를 크게 개선시켰다.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에 비해 짬밥에서 밀리는 장수인 위연의 재능을 파악하고 과감하게 한중태수로 임명하는 결단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촉한의 문무백관들이 한중태수의 자리에 장비가 임명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비는 위연을 한중태수로 임명하며 어떻게 일 처리를 할지를 위연에게 물었고 이에 위연은 매우 유창하게 답변하여 좌중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약간 다른 경우긴 한데, 아우 장비의 경우에도 그에게 사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우려하여 충고하기도 했다. 허나 결국 장비는 그 때문에[25] 죽었다. 즉 다른 이의 장단점을 잘 파악했다는 것.
마속에 대한 평은 예언에 가까울 정도다. 제갈량은 마속을 천하의 기재라 보았지만 유비는 마속의 한계를 꿰뚫어보았고 결국 제갈량은 울며 마속의 목을 베게 된다.(읍참마속) 다만 제갈량이 유비의 유언을 무시하고 마속을 기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제갈량은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내리고 왕평을 부장으로 딸려보낼 정도였으니 제갈량 역시 마속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임하지는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즉 따지고 보면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하긴 했지만 유비의 유언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으며 이걸 단순히 '이게 다 유비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로 치부하긴 어렵다.
게다가 아군뿐 아니라 적군에도 그 통찰력은 그대로여서 한중전에서 유비가 두려워한 장수 장합은 훗날 제갈량의 북벌 때 위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진군이나 전예처럼 유비 밑에 있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후 대박난 케이스도 있다.[26]
조조에게 쫒겨 서주에서 달아나며 헤어진 진등은 서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망이 드높았고[27] 손책의 대군을 적은 병력으로 막아내기도 하여 조조 또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할 정도였다. 그리고 유비는 그가 조조밑에 있던 시절에도 담력과 포부를 갖춘 천하의 영웅이라고 높이 평가했었다.
방통의 사례가 반론으로 재기될때가 있는데 사서에선 유비가 방통을 직접 만난 기록은 없고, 작은 현의 현령을 맡겼으나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관되고, 이후 노숙과 제갈량의 천거를 받고 실제 면담을 해본 후에 제갈량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었다. 익주 종군 중 그가 전사하자 슬퍼했을 정도면 방통의 능력을 낮게 본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역시 유비도 사람인지라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완이라는 인재는 연의에서의 방통처럼 유비가 고작 현장을 시키다가 제갈량의 진언으로 발굴해낸 케이스다. 서주에서 여포에게 뒷치기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여포의 위험성을 간과한 셈이다. 배송지 본인이 신빙성이 없다며 부정하긴 했지만 곽충 5사에서 인용한 주석에서는 유비가 조조가 보낸 자객을 인재로 생각하고 기용하려 했다가 제갈량이 간파해서 무마되었다는 일화도 있다.[28]
4.3 아랫사람들을 아끼는 모습
유비의 진정한 능력이라면 역시 아랫사람들을 아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유비를 삼국시대의 주연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지지와 합쳐져 그를 영원한 민중의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비집단은 최강자인 조조에게 자주 패배해 도망가는 와해당하기 딱 좋은 위치의 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을 잘 구슬려서 데리고 다닌 걸 보면 유비가 아랫사람들을 관리하는 능력은 훌륭했던 모양이다.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제갈량이 반역자의 상(相)이라며 위연을 죽이려 했는데 유비가 "그러면 다른 항복한 장수들이 불안해한다"며 반대했다고 서술하여 그의 인망을 더욱 높였다.
양의가 머리가 좋길래 중용해봤더니 시종일관 유파와 화합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이를 지켜본 유비는 분란을 심하게 조장할 것을 우려하여 양의를 홍농태수라는 껍데기뿐인 직책으로 좌천시켰다. 이는 어떻게든 그를 품으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천하의 개쌍놈이라 해도 일단 자기 백성으로 들어오면 진심으로 자신의 혈육으로 생각한 군웅이 유비였다. 조조 같았으면 목이 달아났어도 여러번 달아났을 그 양의조차 품으려고 노력한 게 유비다.
황권은 원래 유장의 참모로서 유비가 익주로 들어오는 목적을 파악하고 반대한데다, 유장이 항복하기 전까지 계속 항전을 하였다. 유비 입장에서는 얄미운 인물이었겠지만 유비는 그를 중용하여 한중 공방전에서 법정과 함께 종군 참모로 기용했다. 황권은 유비의 승리에 공헌했고, 이릉 대전 패배 후 위에 투항했을 때에도 유비는 그의 투항을 끝까지 감싸주었다. 사실 유비가 황권의 건의를 듣지 않아서 이릉대전 때 피해가 더 커진면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 시대에는 충분히 투항한 신하의 가족을 처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비가 전부 자기 잘못이라며 황권을 감싸주고, 덕분에 황권은 유비에 대한 의를 잃지 않았으며, 황권의 아들 황숭은 촉한 마지막 저항 일원 중 한 명이 됐다.
미방이 오나라에 항복하자 그의 형인 미축이 스스로를 포박하고 유비에게 나타나서 죄를 청했다. 그러나 유비는 미방의 죄는 미축과 전혀 관련이 없다며 미축을 존중하며 대하기를 처음처럼 했다. 비록 미축은 부끄러움으로 병이 나 분사했지만. 미축의 아들인 미위나 손자 미조는 촉한에서 그럭저럭 지위를 유지한 것을 보면 연좌하지는 않은것 같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제갈량에게 황제가 되어달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함으로써 죽어서도 제갈량을 의리와 인정으로 묶어내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단한 인물. 이는 연의나 이문열 삼국지에서 유비에게 애매하게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다고만 쓰고 어떻게 사람을 이끄는 지에 대한 묘사가 안 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 듯하다.
삼국지에 등장한 모든 군웅들 중 이렇게까지 자신의 아랫사람들을 아낀 건 유주자사 유우를 제외하면 유비가 유일했다. 조조는 순욱을 버렸고 손견은 조무를 버렸으며 손권은 육손을 버렸다. 또한 원소는 전풍을 버렸고 동탁 역시 여포를 업신여기다가 역관광당했으며 도겸은 자기 백성이 마구잡이로 고초를 당하는데 그냥 수수방관했다. 하지만 유비는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수하로 들어오길 죽음으로 거절한 장임을 너무나 아까워하며 대성통곡했고, 유독 자기를 매우 싫어했고, 죽을 때까지 전혀 충성하지 않던 안티 유비의 대명사 중 한사람 유파마저도 관직까지 줬다.
말엽에 관우에 이어 장비까지 줄줄이 죽자 이 즈음의 유비는 위에 서술한 유비와는 살짝 달라져서 황제로 오를때 이에 반대한 이들이나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가끔 숙청하기도 했고 조운과 제갈량의 만류에도 이릉대전을 일으키기도 했다.[29]
유비가 아직 조그만 지역의 현령이었을때 독우를 매질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유비는 기본적으로 거친 유협의 성격이 강했고 말년에 나라의 기틀이 잡혀서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아도 될 때는 냉혹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힘이 없을때 인내하며 덕을 내세우던 유비와 그렇지 않은 진정한 효웅으로서의 유비가 갈린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유비는 그 시대에 유달리 인덕을 내세우는 흔치 않은 군웅이긴 했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효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애시당초 인덕과 의리만 내세우면서 선인으로만 남을 것이었으면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고[30] 유장의 뒷통수를 쳐 서촉을 손에 넣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비가 음흉한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아래의 항목을 참조.
4.4 음흉한 인물이라는 의혹
연의에서는 인의를 강조하면서도 여포와의 일화라거나 오나라와의 관계 등에서 현대 시각으로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어 능구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특히 유비의 이러한 연의상 단점을 좀 더 부각시킨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널리 퍼지면서 유비의 인물상에 대한 평가로 지나치게 기울었다. 사실 정사의 유비도 덕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효웅의 모습을 보인, 양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기에 평가가 갈릴수 밖에 없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여포의 경우, 여포가 사로잡힌 뒤 조조와 유비 앞에서 나를 기용하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조조를 꼬드겼을 때, 이를 고민하는 조조에게 유비가 "(여포의 양아버지인) 정원과 동탁의 일을 잊었으냐."고 진언하는 일이 있는데, 이때 여포가 원문사극의 일화를 언급하며 '천하의 간사한 인물이야말로 바로 너다.'라고 유비를 욕한다.
조조의 경우, 여포에게 공격당한 유비군을 조조가 받아줬지만 유비는 몸소 농사를 짓기도 하며 조조를 방심시키고는 원술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받자마자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빼앗았다. 원소의 경우, 조조에게 서주를 다시 빼앗기고 떠돌이가 된 유비는 원담(연의에서는 정현)덕분에 원소군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원소에게서 유표에게로 도망간다.
연의에서 손건이 사자로 유표에게 갔을 때 채모가 "유비는 여포를 따르다 조조를 따르다 원소와 따르다가 갈라선 인물이라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사자로 온 손건을 목베어 조조에게 보내면 조조의 환심도 사고 조조가 형주도 공격하지 않을겁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연의에서도 배신 장면이 많이 나왔다는 뜻이다.
오나라의 경우, 주유와 노숙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지만 서촉을 정벌하면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형주를 돌려주지 않았고 이 부분에 대해선 서로 통수치고 통수치다가(...) 이릉대전 이후에야 그나마 진짜 동맹다운 동맹이 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것이다. 하여간 촉한과 손오와의 관계에서 유비와 손권 둘 다 마냥 피해자는 아니라는건 분명한 사실. 결정적으로 유장을 치게 된 사건은 이미 익주로 들어올때부터 촉을 먹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배신이다.
정사의 유비는 연의에서 묘사되는 마냥 군자가 아닌 당대의 효웅인만큼 그 역시 남을 배신하고 우롱한 행태가 없지 않다. 유장을 치게 된 것은 정사의 유비가 왜 '인의의 탈을 쓴 효웅'으로 불리는지 보여주는 일화로 고우영 선생은 유비의 이런 면을 조그마한 이득은 희생하고 더 큰 이득을 한번에 먹으려는 꿍꿍이를 가졌다고 표현했다.
유비가 장로와 대치하던 중 조조가 손권을 치게 되자 손권이 유비에게 구원요청을 보냈고, 조조가 보낸 악진의 대군을 얼마 안 되는 병력을 거느린 관우 혼자 이겨내기 힘들다 생각한 유비가 유장에게 지원군을 줄 것을 청했지만 유장이 지원군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유장을 향해 군을 일으킨다. 그 전까지는 동족이라면서 친하게 굴더니 막상 자신이 힘을 얻으니 태도가 바뀐 셈이다. 이전부터 유비는 장로 세력을 공격해주길 청한 유장의 요청을 무시하며 유장이 보낸 군비를 자신에게 민심을 돌리는 수단으로 멋대로 사용했고, 배신하기 불과 6개월 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장에게 자신의 군을 증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유비 스스로가 이 일이 명백하고 극명한 배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急)하면 나는 관(寬-너그러움)하고 조조가 포(暴-사나움)하면 나는 인(仁)하고 조조가 휼(譎-속임)하면 나는 충(忠)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小故)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구주춘추)
즉, 유비는 이 배신이 (조조와도 같은) '너그럽지 않고 인하지 않은', '천하에 신의를 잃을' 배신행위라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유비가 숨기고 있었던 야심은 방통과의 대화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연회에서의 기습을 논하는 방통에게 유비는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 즉, 유비는 자신의 은혜와 신의를 촉을 먹어치울 수단으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웅에게 아주 당연스러운 일이고 은혜와 신의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주요 홍보수단으로 삼아온 유비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유비가 "배신을 꺼리는 도덕적인 군웅"이었다는 연의의 이미지는 대단히 편중되어 있으며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유장이 상당부분 익주의 혼란을 초래한 면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배신은 배신이다. 주석을 단 습착지와 배송지는 유비가 유장을 치고 양심의 가책 없이 기뻐하며 연회를 베푼 일에 대해 가열차게 비판했다.
무릇 패왕(霸王)은 필히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고 신순(信順)에 기대어 이를 근원으로 삼으니,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그 도가 어그러지는 법이다. 이제 유비가 유장의 땅을 습격하여 빼앗고 권(權-권도, 권의)으로 일을 이루니, 신(信)을 저버리고 정(情)에 어긋나 덕의(德義)가 함께 잘못되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공(功)이 융성하다 하나 의당 크게 상하고 패한 것으로, 비유컨대 손을 끊어 몸을 보전한 격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
습착지의 주 |
유장을 습격하도록 꾀한 것은 그 계책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왔으나, 의로움을 거슬러 공을 이루고 본래 궤도(詭道-부정한 방법, 속임수)에 말미암은 것이라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은 절로 그치게 마련이니, 이 때문에 유비가 즐거워하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경솔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한창 즐긴 것은 시의에 맞지 않아 그 일은 화를 즐기는 것(樂禍)과 같은데, 자신을 무왕에 비교하며 더더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고 방통에게는 잘못이 없다. |
배송지가 덧붙인 주 |
4.5 음흉한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반론
유비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것은 지나친 평가라고 보기도 한다. 배신과 배신이 연이어 벌어지던 난세에 그 당시 군웅들에 비해 유비가 딱히 도덕적으로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31]
우선 여포의 경우, 유비는 갈 곳 없던 여포를 받아주었고, 여포는 유비를 배신한다. 그러므로 여포를 사형시키자고 한 유비의 처분은 정당한 것이다. 여포가 방천화극의 가지 끝을 화살로 맞춰서 유비를 구해준 일을 들어 그래도 유비가 배신한 게 맞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여포가 뒷치기 안 쳤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여포가 유비를 쫓아낸 건 두 번이다.[32]
조조의 경우 실제로 그가 어떤 생각이었든 군사까지 주며 유비를 신뢰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유비는 시원하게 뒤통수를 쳐버렸다. 다만 유장의 경우와는 달리 유비에게도 명분은 있었는데 헌제의 밀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속마음은 어쨌든 한실중시라는 스탠드를 취하던 유비에겐 절호의 기회면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내린 밀명을 씹으면 그건 말 그대로 반역이다.[33][34]
원소를 배신하고 유표에게로 붙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당시 유비와 원소의 관계는 원소 휘하의 객장이지 정식 부하도 아니었고, 유비가 활동한 지역부터가 유표의 영지에 가깝고 유표와 원소는 외형적으로는 동맹 비스무리한 상황이었다.[35] 유비의 역할 역시 이런 원소와 유표의 동맹을 확고하게 하고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였다. 그러다가 조조의 부하인 조인에게 패배한 뒤에 동맹이었던 유표에게로 귀순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원소에게로 돌아가려면 조조의 영역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긴 한 것일까?[36]
오나라의 건은 누가 뒷통수를 쳤는지에 관해 자세한 내역은 복잡한데 형주를 누가 점령했는가 그리고 어느 때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가가 모두 복잡하게 엉켜있고 역사학자들도 비판하는 세력이 다르므로 형주 공방전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유장을 친 것에 대해서는, 배송지는 유장을 친 유비를 비판했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이를 유장은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없어 땅이나, 관직을 빼앗긴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 불행이라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물론 배신은 배신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도덕적으로 옹호의 여지는 없긴 하지만 유비도 아예 할 말이 없는건 아니라는 것. 게다가 형식상으로는 유장은 유비를 장로세력을 막아주기 위한 용병으로 불러 놓고 유비가 촉지역에서 명성이 높아지자 보급을 끊고 공격을 했으니 유장의 배신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결국 유비도 촉을 집어 삼킬 계획으로 유장의 요청에 응했고, 유장의 신하들이나 촉의 호족들과 연계하여 내부에서 세력을 키웠으니, 유비를 옹호해주는 쪽에서도 대부분 유비가 결국 유장을 배신한 건 맞다고 인정하고 있다.
유비는 한때 흔히 굽힘이 없는 강직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인물인 만큼 논란이 거세다. 다만, 비굴한 인물로 묘사가 되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난세였고, 숱한 비굴함을 통해서 살아남아야 승자가 된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백성들과 같이 피난을 갈때에는 자신의 가족들을 백성들 곁에 가게 했고, 백성들과 함께 갔다. 이걸 보면, 유비가 단순히 비굴하다고 하기 힘들다. 정말 비굴한 인물이라면 재빠르게 자신의 식솔들 부터 챙기고 짐이나 다를거 없던 백성들도 포기하고, 먼저 자신과 수하들과 같이 먼저 탈출할지 모른다.
정사에서도 실제 행보를 보면 명성, 신뢰 등으로 나중에 돌아온 것들도 있기는 했지만 사람이 미래예지가 불가능한만큼 전혀 이익이 없는 선행들도 많이 하였으며 그럴 이유가 없는데 고작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기도 했다. 유비를 무능하고 음흉하게 보이게 하는 일들도 여기의 서술들을 읽고 자세히 알아보면 유비의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가진 이상이 괴리가 심해 벌어진 경우가 많다. 현실적으로 행동한 일들이 그를 음흉하게 보이게 하고,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한 행동들이 유비를 무능하게 보이게 한 셈. 본인도 자신을 음흉하게 보는 사람들에 대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하기도 했고 더구나 당시는 난세였었고, 아무리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사람도,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쉽지가 않다. 어쨌거나 그는 효웅임에도 최대한 인덕을 내세웠고 이러한 점이 그를 조조의 최후의 숙적으로 부각되게 만든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최강의 무기였던것만은 분명하다.
총평하자면 현실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상을 추구한 군웅.
4.6 성깔
위에서 말했듯이 유비가 기본적으로 인덕을 내세우긴 했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이라는 별명처럼 정사의 유비는 태생부터 임협세력으로서 활동한 가락이 어디 안 간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몰락한 귀공자풍인 연의의 유비와는 또 다른 모습. 독우를 패거나 익주에서는 심지어 다른 장군들의 가솔을 인질로 잡는 등 거친 모습도 보이고 수염 콤플렉스를 건드린 장유를 죽인 적도 있다.[37] 또한 황제 즉위를 반대한 비시를 좌천시키기도 했다.
정치적으론 유비가 큰 집단을 다스린게 익주 입성 후라서 자료가 적지만 익주에 입성하자마자 충분히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는 모습도 보이지만 토목 공사나 금주령등 빡빡한 모습도 보인다.[38] 그렇다고 무조건 빡빡한 것은 아니고 신하들의 말을 잘 듣고 그에 따르는 유연한 면도 있었다. 이 부분은 간옹 항목을 참조하면 좋다.
의외로 깐깐한 면이 있었는지 은근히 부하들을 자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완의 경우 직무태만으로 처형당할 뻔했으며 방통의 경우 역시 직무태만으로 높게 보지 않았다. 장완의 경우 오에 항복한 반준의 인척이라서 불이익을 당했을수도 있으며 방통 역시 주유 밑에서 일했기에 유비가 신중했을 경우도 있다. 익주 입성 후 유비의 이런 빡빡한 정치에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이것은 엄격한 법치를 주장한 제갈량의 영향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조조가 촉을 치자고 하자 오히려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유엽이 얘기한다. 이를 볼때 깐깐하게 사람을 가려서 자신을 확실히 따를 사람을 남겨놓는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4.7 조조의 라이벌
유비에 대하여 진수는 "유비는 항상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였다. 조조와 하는 행동의 반대의 행동을 하여 세력을 구축하여 대항하였다" 라고 하였다. 덧붙여 그는 "이러한 유비의 행동은 그가 조조에게 대항하여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보다는 조조가 자신을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실질적으로도 조조가 통일군주가 못된 연유는 유비 때문이었다. 유비가 조조와의 승부에서 항상 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조조의 계산에서 어긋난 행동을 하였다. 유비가 원술토벌을 명분으로 조조의 세력을 벗어난 것과 천하삼분지계와 적벽대전이 좋은 예가 된다. 때문에 유비는 촉을 까는 위나라팬들에 의하여 대역죄인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조위의 형법은 무거웠고 세금이 과했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대응한 적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 "그나마 유비와 제갈량 덕분에 당시 중국 대륙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중 일부는 조위 아래에서 연명하던 궁핍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다는 반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구주 춘추』의 주석 「방통전」에 '나(유비)와 조조는 물과 불의 관계다. 조조가 엄격하면 나는 관대하게 대한다.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인덕에 의지한다. 조조가 책략으로 행동하면 나는 성실하게 행동한다. 언제나 조조와 반대 행동을 취해야만 비로소 일이 성취된다'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그는 항상 조조와 상반된 모습으로 정치적 행보를 보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지 연의에서도 유장을 배신할 당시에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조조와는 원수 사이였지만, 당시 문화가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서로 간간이 서신을 교환했던 모양이다. 순욱(荀彧)이 죽었을 때 유비는 서신을 보내어 간신이 나라를 망친다며 은근히 조조를 비판하기도 했고, 또한 조조가 죽었을 때 조비(曹丕)에게 조문을 위해 조의금 조로 예물과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가장 호적수다운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비는 예물은 받고 이 사신을 죽였다(...).
조조가 유비를 가리켜 자신과 더불어 천하의 단 둘뿐인 영웅이라고 평가한 점과 함께 적벽에서 패한 후 유비는 나의 영원한 맞수라고 평가했고, 조조가 한중에서 패하고 유비가 승리한 이유에 대해, 법정이 유비를 도와줘서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으며, 유비도 언제나 조조와 반대되게 행동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열거한 뒤 생각해보면 그들은 서로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렇다보니 실제로는 어떠했는가를 떠나 일단 대중적인 이미지로는 조조가 실력주의에 냉철하고 실리 위주, 대를 위해서 소는 비정하게 희생할 수도 있는 효율 정치의 대명사라면 유비는 인정와 인덕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조가 유비의 존재에 불안감을 내비친 적이 여러 번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주인공이 된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대 최강의 군주였던 조조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서 결국 황제가 된 인물이었고, 당시의 군주들에 비하면 온화한 유비였으니 역사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더하여 유비는 늘상 조조의 제1종 경계 대상이었으니, 악역 조조에게 맞서기에는 유비보다 더 좋은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유비를 향한 대중들의 인기도 높았던 터라 서주 대학살, 회남 사천 한중 지방에서의 대규모 백성 강제이주를 통한 유랑민들의 대량 발생, 원소 투항병 7~8만 생매장 사건, 황제인 헌제를 허창으로 강제로 모셔온 후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등 강압적인 행위를 하고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주군인 헌제의 아이를 밴 동귀비와 동승, 이후 황후였던 복황후마저 둘다 매질로 참혹하게 죽여버리고 자신의 딸을 그 자리에 들어앉힌데다.[39][40] 결국 아들대에 왕조를 무너뜨린 일, 양수 최염, 여백사, 순욱, 공융과 같이 토사구팽당한 자들의 처참한 죽음과 같은 이름 높은 악행들로 인해 당대에 이미 넌 그냥 나쁜놈으로 여겨지던 조조에 맞선 상대이니 소설 속에 유비가 선한 설정을 맡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4.8 인덕과 매력
유엽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는 마치 부자지간과도 같다고 하는 등 인덕을 갖추고 연의보다도 훨씬 실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소위 말하는 인덕의 군주로 잘 나타나 있다.
연의에서 유비의 가장 큰 강점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을 부각시켰는데 실제 정사에서도 유비와 가까이 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인간성에 매료되었고 그가 통치한 곳의 백성들 역시 유비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다. 예외라면 유파뿐이다. 유파는 사람들이 보면 왜 그런지 정말 궁금할 정도로 유비를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익주평정 후 할 수 없이 부하가 되었다.[41]
유비는 어려서 노식의 밑에서 공부를 했을 때 자신의 종친인 유원기는 유비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평하며 그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대주었다. 정사에서 같이 공부한 동종 유덕연의 아버지 유원기라고 언급하며 딱히 칭호를 붙이지 않는 점을 미뤄 유원기는 유비와 가까운 친척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유비의 인간성 하나만 보고 그런 지원을 해준 것을 미뤄볼 때 유비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어릴 때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유비는 인망이 대단했다. 비록 방랑군주로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공손찬, 조조, 원소 등의 객장으로 밥을 구걸해 먹는 위치에 있었다 해도 그 인망을 잃지 않아 관우나 장비, 옛 도겸의 부하 중 미축, 미방, 손건은 유비가 이렇게 한량 신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섬겨 나중에 촉한을 건국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 진등 같은 이는 여러 명사에 대해 칭찬하면서 유비는 왕패의 재력이 있다고 평가하며 공경한다고 얘기했다.
병사들이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는 것만 봐도 유비의 매력을 알만하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었다지만 싸워서 진 대장이 어디 있다는 걸 알자마자 그를 찾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이 유비에 대한 신뢰와 충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한 말 많은 군주들이 몰락하고 군세를 잃었지만 유비의 경우처럼 패배 후에 알아서 주군을 찾아간 사병 조직은 많지 않다. 거기다가 한 번은 유비가 조조의 대장기를 보고 놀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간 뒤에도 그를 찾아 돌아온 사병들이 있었다.
이러한 '인덕이 넘치는 유비'의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신야 탈출로써, 유표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잇게 된 유종이 아버지가 다스렸던 형주를 조조에게 갖다바쳤고, 이에 유표에게 의탁해 그를 도와 신야에서 조조를 견제하고 있던 유비는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야를 버린채 유표의 장가 유기와 연합하기 위해서 강하로 이동하게 됐는데, 이때 신야성 주민 10만명이 유비에게 애걸복걸하며 자신들도 데려가달라고 부탁하였다. 제갈량을 포함한 모든 신하들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유비는 백성들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며 무리를 무릅쓰고 모든 신야성 주민들을 받아주어 함께 길을 나선다.[42]
정사 선주전에 따르면 이 일은 제갈량이 반대한 것은 아니고 조조에 쫒기는 유비의 무리가 십여만에 이르러[43] 하루에 행군이 10리를 가지 못할 정도로 지체되자 어떤 사람이 '지금 무리 가운데 갑옷을 입은자는 적으니(군사는 부족하고 피난민은 많은 상태)'이걸 어찌 하겠습니까?'고 이르니 유비가 "무릇 큰일을 이룰때는 필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법이니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어찌 내가 이들을 버리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진의 학자 습착치는 이 말을 두고 "형세가 위급한데도 도를 잃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애초에 연의에서 제갈량, 정사에서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군량도 군사도 부족한 상태로 적에게 쫒기는 파멸적인 상황에서 백성들까지 데리고 가봐야 도망치는 속도만 느려지고 짐밖에 안된다. 이는 순전히 유비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전까지의 유비의 정치적 생활을 생각해보았을때 그는 항상 백성에게 인심을 얻는것을 그의 정치적 생명과 목표를 두었었고, 이제 곧 국가를 건설하려는 마당에 백성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세세한 면을 보면 당시 유비의 인기는 천하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서도 유종이 항복한 것을 따지러 형주에 갔다가 세가 불리하여 유비가 형주를 떠나자 유종의 측근과 형주의 민간인 다수가 또 유비를 따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단순 백성뿐 아니라 유종의 측근마저(!) 유비를 따르려 했을 정도였다면 당시 그의 인망이나 정치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정사에서 언급된 유비의 매력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 유비가 원소 밑에 있을 적에 조운 밑에 유비를 따르는 일단의 군사들이 있었는데, 원소 밑에서도 대놓고 스스로를 "유좌장군의 군사"라 칭하면서 유비를 끝까지 따랐다.
-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유비가 구원하러 왔었는데 유비에게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이 따라다녔다.
- 도겸이 죽게되자 도겸은 두 아들이 있었으나 스스로 유언하길 유비가 아니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업을 생면부지의 유비에게 맡긴다.
-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조조에게 달아나자 조조는 유비에게 자신과 같은 수레에 타게 하고 같은 자리에 앉게 하였다.
-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원소에게 달아나자 원소는 자신의 성에서 200리 밖까지 마중나왔다.
- 유표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형주를, 식객에 불과한 유비에게 넘기려 했다.[44]
- 형주가 조조에게 항복하자 유비는 신야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이때 10만 명의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 내려갔다.
- 장송, 법정은 유비를 만나보곤 유비에게 익주를 넘겨줄 것을 결심하고 자청해서 유비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
상대인 조조가 일찌감치 항복하면 받아주는 편이기에 유비의 매력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항복하면 쫓기지도 않고 편히 살 수 있는데,[45] 유비의 부하들은 처자를 버리면 버렸지 유비와 함께 쫓기는 길을 선택했다. 당장 개국공신인 미축의 경우는 재산과 동생들과 자기 인생을 당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유비에게 올인했다.[46]
전해를 따라 서주 구원병으로 파병됐을 때에는 굶주린 백성들 수천을 거두기도 했다. 정황상 이들은 조조의 1차 서주 침공 탓에 발생한 전쟁 난민으로 보이는데, 유비가 끌고 온 병력이 천명 남짓한 숫자였다는 것과 이러한 난민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하등 도움될 것 없다는 점을 볼 때 이후의 당양 전투때의 피난민 행렬과 비슷하게 볼 수 있을듯. 도대체 피난민 행렬이냐 군대냐?
하여간 정사고 연의고 간에 유비는 주변 인물들이 보기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 캐릭터로 그려진다. 워낙 확고하게 강조된 부분이라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유비의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그려내는데, 예를 들어 조조빠 성향의 창천항로든 유비에게 우호적인 화봉요원이든 이 부분을 잘 묘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유비의 이런 면이 반영되어 매력을 100 아니면 99를 찍고 있다.[47][48]
다만 제갈량을 얻기 전까지는 유학자들하곤 영 인연이 없었는데 문제는 당시 유능한 문사나 지략가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했다는 것(...). 이런 점에서 유비의 인망은 피지배층에만 인기있는 반쪽짜리 인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은 유비가 배경에 아무것도 없어서 그렇다는 추측도 있다. 뒷배경이 빵빵한 조조, 원소는 일찍부터 많은 인재들을 모았지만,[49] 사실상 인생의 절반 이상이 방랑이었던 유비는 그런 배경이 없었기에 인재를 모으기가 힘들었다는 것. 그렇기에 관우가 조조를 버리고 유비에게 돌아간 것과 제갈량이 아무것도 없는 유비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 당시에도, 현재에도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확실히 유비는 평원령 시절 다른 부자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지배계층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5 황족 논란
"유비가 정말로 황족인가?"는 사실 예전부터 자주 논의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이 평역 삼국지에서 제시한 견해가 있는데, "중산정왕은 100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 많은 자손들 중에 족보를 사칭해서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겠는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일 뿐이고, 당대의 시대상과도 전혀 맞지 않다.
5.1 우선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들 수 있을까?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 일은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가짜 족보가 나돌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인쇄술의 발달로 집집마다 제각기 족보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짜라도 일단 족보를 만들어두면 그 문헌에 근거해서 같은 조상이라고 우겨서 끼어드는 시도를 할 수 있고, 끼어들기를 당하는 쪽도 '문서화'된 족보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영부영 일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원칙적으로는 씨족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죄로 보기 때문에 명백한 범죄 행위였다.
그리고 조선시대도 사실은 좀 애매한 게 초중기까지는 "에이, 내가 원래 안동 김씨지만 우리 집이 어디에서 오래 살았네 그냥 어디 김씨 하겠소"하면 그냥 어디 김씨가 된다. 또한 본격적인 족보 위조의 초창기에는 족보 위조한답시고 끼어든 작자들이 완전히 날조라기보단 어느 정도 몰락한 잔반과 금전적 거래로 말을 맞췄으며 돈으로 문중에 이런 저런 일들을 해줬기 때문에 깊게 파고들어서... profit!이 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이상이 조선시대 후기의 사정이다. 후한의 상황은 달랐다. 우선에 족보가 집집마다 있는게 아니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인쇄술이 없었고, 종이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집집마다 족보를 한 부씩 갖춰둘 수가 없었다. 즉, 족보는 일족의 유력자나 관청에서 보관되거나, 친족들의 기억에 의지해서 서로의 관계를 식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친족을 인증하는 것은 일단 친족 서로 간의 기억과 유력자만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헌 정보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원시적인 수단을 쓰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일족임을 사칭하여 끼어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친족을 강압하거나 일시에 속여서 많은 사람의 기억을 일시에 변조해야 한다는 건데, 원리적으로는 거의 비트코인을 위조하겠다는 발상이나 다름없다(…) 또한 당시는 농경사회다보니 요즘처럼 친척이 잘 모이지 못하던 시절도 아니고, 딱히 따로 할 일도 없고 가까운 거리에 모여서 사니까 뻔질나게 친척집 들락거리는게 바로 취미생활 취급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친족 사회는 조선시대 말기나 대한민국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폐쇄적이고 견고했다고 봐야 한다.
5.2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후예는 촌수로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한참 떨어진 방계다. 실제로 중산정왕의 자손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았고[50], 사실 유비 정도의 방계 황족은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게다가 유비의 조상은 한무제 대에 한 사건에 휘말려서 이미 작위를 박탈당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유비 이외에 그 시대에 군웅으로 이름을 날린 황족[51]들은 유비보다 훨씬 격이 높아 공(公)의 작위를 받은 황족이었으며, 진왕 유총처럼 왕(王)의 작위를 가진 황족도 있었다. 하지만 유우는 공손찬에게, 유총은 원술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유요는 손책에게 축출당하였다.
황족도 힘이 없으면 얼마든지 비참한 수모를 당할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아니, 막말로 후한은 황제부터가 꼭두각시 놀음이었고, 유비가 군웅의 말석에서 왔다갔다할 무렵에는 이미 바지사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황통과 한참 떨어진 방계 황족이 과연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52] 기껏해야 한의 정통성을 어어간다는 명목이 전부다. 그 덕분에 황숙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것도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한 이후, 그러니까 힘을 갖춘 뒤에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5.3 정사에 일족과의 교류와 가계에 대한 상세 기록이 있다.
당시의 중국 사회는 일가 친척간의 배타적인 상호 부조 구조가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사에는 유비가 유씨 일족과 가진 관계들이 묘사되어 있고, 특별히 신뢰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적이 없다.
- 유비는 아버지 유홍이 요절한 탓에 가난해져서 노식 밑에서 배우게 될 때 친척 삼촌뻘인 유원기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았다.
- 어릴 적에는 친척인 유씨 가문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다.
- 어릴 적에 불경한 말을 했다가 지나가던 유씨 가문의 한 어른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 유비의 가계나 집안 형편이 기운 사유 등은 정사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유비가 유씨 집안의 후예들과 씨족 공동체 안에서 긴밀하게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들은 모두 위-진을 정통 왕조로 보고 있는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고[53], 배송지를 비롯한 후세의 역사가들도 이 점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자치통감에서 기록의 부재를 들어 의문을 제시하긴 했다.[54] 그러나 '중산정왕의 후손이 지나치게 많아서 구체적인 가계도가 없다'라는 수준인데다가 향촌사회가 붕괴된 위진남북조 시대나 족보 날조가 성행하던 당 시대의 사례를 기계적으로 유비와 비교한 것이라, 후한 말기 당시에 황족과 주변인들이 유비의 혈연관계에 대해서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반론하지는 못한다. 향촌사회가 붕괴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사람들이 워낙 이리저리 유랑하다 보니 배타적인 친족 집단이 명확하게 유지되기 어려웠고 엉뚱한 집안 사람이 끼어드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다.
5.4 유표, 유장 등 당대의 유씨 군웅이 유비를 친족으로 보았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소개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유비가 유장의 친척이라는 이유였다. 유장이 유능한 인물은 아니였지만 친척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유표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관념에서 성씨 사칭은 중대한 범죄 행위이고,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다. 거기다 황족 사칭? 그리고 후한 조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사족으로 유비는 한경제의 차남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유표와 유장은 한경제의 사남 노공왕 유여의 후손이다.
5.5 적대 인물들도 혈통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악명 높은 조조와 조비마저도 유비의 혈통에 대해서 전혀 왈가왈부하지 않았다.[55] 유비가 칭제를 하면서 멸망한 한(후한)을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漢)이라 했다. 따라서 유비의 혈통을 부정할 수 있었다면 후한을 멸한 조비 측에서는 정당성을 위해 당연히 유비의 혈통을 부정했을 것이다. 실제로 후한 말에 상대방의 혈통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그 점을 트집잡아 공격하는 프로파간다는 매우 매우 흔했다. 예를 들어, 원술이나 공손찬은 원소가 얼자라고 '종놈'이라고 헐뜯었으며, 원소는 조조의 혈통이 '환관' 집안이라고 헐뜯었다.
유비에게 조금이라도 의혹의 여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적대 진영에서는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혈통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당대의 거의 모든 기록과 당시 사람들이 당사자인 유씨 일족에서 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유비가 유씨 황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후대사람들이 유비의 황족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다. 당대 사서를 보면 혈통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뭔가 기록에 남기거나 확실하지 않다고 서술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56]
5.6 결론
유비는 유방의 후손이며, 따라서 유비는 한나라 황실의 후예가 확실하다. 다만 한참 떨어진 방계일 뿐이다.
헌제 유협이 황숙으로 부른 것에서 유비의 황족인 이유중 하나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실제로는 유비가 헌제와 만나서 헌제가 황숙으로 부르게 되는 기록은 없다. 애초에 그것 없이도 유비가 황족임을 증명하는 기록은 위에 등재한 것처럼 흘러 넘쳐난다(...)
친족들이 인정한 만큼, 어차피 직계가 아니니 얻을 수 있는 것은 명분 뿐인데 자칭 황제가 아니라 후대에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조상인 유승보다 더 크게 성공하였기에 유비의 혈통은 논할 필요도 없다. 아니 논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6 가족 관계
유비의 아내로는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등이 있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 차남 유영, 삼남 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해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다만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전의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이 없고 저 기록이 전부다.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중이던 상용은 원래 위나라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7 미디어 믹스
- 유비/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 ↑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한 묘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있다. 조선 인조의 묘호도 원래는 열조 였는데, 신하들이 '남당 열조 서지고는 인물이 별로인데 쓰지 말죠?' 라고 해서(열조 묘호 사용 반대는 효종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묘호를 사용하는데 최종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군주이기에.) 변경하려고 하니 이후 '아니 열조는 한 소열제도 쓴 묘호인데 뭐가 문제임?' 이라는 반론이 나왔고 인조의 아들 효종의 경우도 '전에 쓰던걸로 해도 무방할거 같은데? 재논의 해봐'라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결론이 '한 소열의 예로도 좋지만 역시 남당 열조랑 겹치는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해서 인조로 결정.
- ↑ 초반부 주인공은 유비, 유비 사후에는 제갈량, 제갈량 사후에는 강유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 ↑ 물론 촉한 뒤에도 한나라를 계승했다며 나타나는 나라가 있지만 어디서 굴러온 듣보잡이 한나라 왕족 후손임을 참칭해 세운 것이므로 정통성은 없다. 그러므로 한나라 왕족 출신인 유비가 세운 촉한을 마지막으로 정통성있는 한나라라고 여기는 것이다.
- ↑ 후한서 여포열전에서 여포가 유비에게 "대이아(大耳兒,귀 큰놈)가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라고 말한다. 또한 선주전에서 유비는 돌아보면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 부실하게 나는 수염이 유비 나름대로는 스트레스였던 듯 하다. 관련 에피소드도 있는데 후술한다.
- ↑ 조조도 타 군웅과 비교하면 시작 세력은 미약(?)한 편이긴 해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있지만, 유비는 문자 그대로 맨주먹으로 시작한 수준이며. 조조의 경우 무슨이유에선지 황제자리에 오르지 않았고, 손권은 3대째로 초창기 군웅이 아니다. 그 외에 원술이 '초창기 군웅이면서 황제가 된' 케이스이긴 한데, 그 원술의 시작 기반과 결말이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비교 할 수가...
- ↑ 이것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 창천항로 한중공방전에서 조조가 말한 "미증유의 군웅할거... 그로부터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가. 유비. 유현덕이여, 살아남은건 무명에서부터 올라온 너 혼자뿐이구나, 유비!! 만 여의 밤을 지나 남은것은 너와 나 단 둘 뿐"이라는 대사다.
- ↑ 유비는 형주의 잔존세력들을 모아서 오와의 동맹으로 적벽대전을 설계하여 조조의 천하통일을 박살냈다. 또, 한중에서 승리하여 촉한을 굳건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동시에 자신과 한고조 유방을 동일시하여 황제로서 즉위하는데 성공했다. 죽는 시점에서는 이미 조조가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이루고 죽은 셈이다.
- ↑ 사실 이러한 해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마오쩌둥의 삼국지연의 인물 재해석으로 인해 늘어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유비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해석한 것과는 별개로 조조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 ↑ 이는 한국에서는 좀 다른 부분이다. 김사장, 김교수, 하고 부르는 것은 그 호칭을 받는 대상자의 명백한 윗사람이거나 최소한 같은 나이대, 같은 지위에서나 존중하는 표현이지 아랫사람이 이렇게 부를 경우 굉장한 실례가 된다.
- ↑ 연의에서는 툭하면 적들에게 "돗자리나 짜던 천한 놈이"라면서 출신 문제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족인 동시에 하류층인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 ↑ 면류관을 의자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 농부는 관청에 잡혀갔지만, 황제가 무지렁이 시골 농민이 장난친 걸 가지고 진지 빤다며 풀어주게 했다.
- ↑ 소열은 시호이고, 연호는 장무다.
- ↑ 굳이 변방 최고의 군주라고 한 것은 유비 생전에 보여준 이민족 친화 능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 ↑ 무능한듯 보이지만 덕이 많고 주변에 뛰어난 인물이 많은 인물. 대표적으로 유비의 조상인 한고조.
- ↑ 연의에서는 황충과 위연이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엄은 방통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포위했다가 생포 및 항복시켰다.
- ↑ 유원기 덕분에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긴 했지만 전술이나 전략 관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 ↑ "싸우기만 하면 지는 양반이 익주같은 험지를 어떻게 도모하겠냐" 라는 발언인데, 결국 익주를 먹어버렸으니 별 의미는 없다(...).
- ↑ 사실 하후돈과 함께 출격했던 명장 우금도 격파한 바가 있다.
- ↑ 그렇기 때문에 관우, 장비 등 초창기부터 유비를 따랐던 신하들의 전공과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선 유비의 전적을 살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총사령관은 유비지만 직접 일선에서 싸우는 건 휘하 야전사령관과 참모들이니까.
- ↑ 劉備,吾儔也。但得計少晩. 少가 '부족하다' 라고 해석되어있으나 '조금'으로 해석된다 해서 이상할 것도 아니니,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조금 늦구나"라고 해석될 수도 있겠다.
- ↑ 조비의 오 공격 때문에 어부지리로 가능했다는 폄하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이릉에서의 대패는 그런 걸로 치부가 가능할 정도의 참패가 아니었다. 야전군 전체를 말아먹은 참패이고 살아돌아간 것도 촉에 남은 잔존병력이 도우러 왔기 때문일 정도로 피해가 절망적으로 컸다.
- ↑ 손견에게는 원술이라는 훌륭한 뒷배경이 있었다. 후한 말기에 명망과 명분 양쪽에서 원술을 뛰어넘을만한 군웅은 유표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원술은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기 못했기에 자기가 직접나가 싸우기 보단 손견을 시키는게 낫고, 손견 또한 싸우면서 누적되는 손해는 원술이 커버해주니 좋고...이 둘간의 관계는 양자가 서로 이득을 보는 공생관계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유비에게도 공손찬이라는 뒷배경이 있었지만, 유비의 거듭된 패배는 공손찬의 밑을 떠난 뒤다.
- ↑ 교통의 요지이며 사방이 평탄하다. 이 말인 즉슨 지리적 여건상 방어에 도움이 되는 요소가 거의 없다는 말이니...
- ↑ 사실 장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진실은 불명확하지만, 정황상으로는 부하를 가혹하게 다루다가 상관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 진군은 등용 직후 유비가 여포에게 밀려나면서 제대로 중용할 새가 없었고, 전예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야하는 집안 사정 탓에 떠났다.
- ↑ 진등이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돌자 서주 지역 노인들이 진등을 따라가겠다고 일제히 소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 ↑ 유비가 평원상으로 있을 때 인망을 얻자 누군가가 그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이 죄책감을 느끼고 유비한테 실토한 다음 암살을 그만 두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는 만큼 해당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 ↑ 이 부분은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꼬라박고패배해서 그렇지 은근히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복수의 명분도 있었고 형주를 다시 되찾아 천하삼분지계를 다시 유비쪽으로 유리하게 끌어오기 위한 시도였다는 평가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결국 조운 말대로 주적은 위인데 오를 친 것은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있다. - ↑ 인덕의 대명사였던 유우가 공손찬에게 끔살당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 ↑ 손책은 원술을 여포는 정원과 동탁을 배신하는등 배신은 밥먹듯 일어났다.
- ↑ 드라마 신삼국에서도 자신을 욕하는 여포에게 "저는 장군을 받아주었고 서주목의 인수까지 양보하고 소패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장군께서는 주위의 참언만 믿고 저를 두번이나 죽이려 하셨는데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따지자 여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 ↑ 그리고 정욱을 비롯해서 유비는 위험인물이니 얼른 제거하자는 조조 세력 내의 목소리도 있었다. 설령 유비가 황제의 밀명을 따르지 않았더라도 조조가 유비를 제거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 ↑ 또한 먼저 유비의 뒤통수를 친 건 따지고보면 조조다. 흔히 관우만 조조가 열성적으로 포섭을 시도한 일만 부각되서 그렇지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했을 때 조조는 장비에게 중랑장 벼슬을 내렸고, 장비가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를 납치했다고 위략에 적혀있는데 이는 장비에게 벼슬만 아니라 하후씨 집안의 사위로서 인척으로 삼으려다가 실패하자 납치라고 언플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조는 이후 손책이 강동에서 위세를 떨치자 조인의 딸을 손씨 가문에 시집보내 인척 관계를 맺는 정략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간옹과, 손건, 미축 등 유비의 다른 부하들도 관직을 조조에게 받았다.
- ↑ 왜냐면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까
- ↑ 그리고 조조가 유비를 직접 서주에서 두들길 때 원소는 어차피 유비가 전사하면 순교자로 포장해서 써먹을 수 있으니 더 좋다는 생각으로 도와주지도 않았으니 배신이라면 원소가 했다고도 볼 수 있다.
- ↑ 다만 죽일때는 조씨가 천하를 얻고 유비가 223년에 익주를 잃을것이라는 참언을 했다는 이유로 죽였다.
- ↑ 금주령은 간옹의 성드립에 거두지만
- ↑ 딸을 황후나 왕비로 만드는 예는 많이 찾아볼 수있으니 딱히 깔건 아닌데 임산부 그것도 황제의 아기를 밴 동귀비나 황후인 복황후를 죽여버린건 평상시라면 반역죄로 다스려 질 수 있는 일이다.
- ↑ 아이러니하게도 조조가 황후 자리에 앉힌 조조의 딸은 진심으로 헌제를 섬겼다. 헌제가 쫓겨나자 자신도 따라갈정도
- ↑ 그러고도 황위 등극 반대등 태클에 태클을 일삼았다. 물론 유비는 계속 중용했지만
- ↑ 물론 유비의 인덕뿐 아니라 서주대학살의 악몽도 한 몫 할것이다.
- ↑ 이것은 병사들과 피난민을 합친 수치였을테니 연의 묘사대로 10만명 모두가 민간인은 아니었을것이나 갑옷입은 자가 적었다고 언급되었으니 민간인의 수가 적어도 수만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 ↑ 이 내용은 배송지가 각주로 단 위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엄밀히 말해 정사는 아니고, 배송지는 스스로 각주를 덧붙이면서도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기록의 신뢰성을 비판했다. 당시 유표의 정황을 보았을 때 유일하게 형주의 호족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던 유비에게 무게를 실어줌으로서 기반이 없는 자신의 후계를 보호하려는 시도가 아니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
- ↑ 특히 장비, 미방 등은 조조 밑에서 중랑장같은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벼슬을 버리고 유비와 함께 쫓기는 길을 선택했다. 관우는 두 말 안 해도 두터운 대우를 직접 약속 받았음에도 유비의 소식을 알자 바로 미련없이 유비를 찾아 떠났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
- ↑ 심지어 그 동생 이 오나라에 항복하자 수치심을 느끼다가 죽을 정도
- ↑ 삼국지 시리즈의 매력 100 캐릭터는 3의 초선(특정 이벤트로 출현)과 후기 시리즈의 고대무장인 조상님 정도다. 그 외의 라이벌은 옥새(...)
- ↑ 반대로 유비 인생의 최대 숙적인 조조는 무력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에서 90 이상으로 출현하고 있다.
- ↑ 조조는 후한 말 실질적인 지배계층인 환관 집안의 배경(할아비 조등은 십상시를 쥐락펴락하는 진짜 실세였고, 문자의 옥 때는 청류파의 존경까지 얻었다)이 있고, 원소는 명문가(사세오공 : 요즘으로 치면, 4대 동안 이런저런 장관을 맡고, 한 세대에 장관 두 명을 배출한 집안)의 자식이다. 원소는 어떻게 보면 유비에 비슷하게 자수성가한 유형에 가깝지만.
- ↑ 아들이 100명을 넘었다. 황족 인플레이션이 벌어진 원인 중 하나.
- ↑ 유표, 유언, 유우.
- ↑ 막말로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전주 이씨가 황실 복원을 주장하며 황실 놀이를 하고 있지만, 과연 무슨 대접을 받고 있는가?
- ↑ 진수는 조조는 재상 조참의 후손,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어놨다. 오히려 손견의 경우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 애매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역사가였던 진수도 유비의 혈통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 ↑ "소열제의 한이 비록 중산정왕(한경제의 아들)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친족관계가 멀어서 그 세대의 수와 이름, 관직 등을 기록할 수 없으며, 유송의 고조가 초원왕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 남당 열조가 오왕 각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광무제(전한 멸망 후 흥한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천하를 회복한 후한의 창업자)나 진의 원제(서진 멸망 후 동진을 강남에 세워 진왕조의 명맥을 이은 동진의 창업자)와 비교하여서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수 없다." - 《자치통감》권69 위기일 황초 2년
- ↑ 게다가 조조는 생전에 협천자를 통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유비의 혈통에 대해 조조가 전혀 조사를 안 했을까?
- ↑ 당장 진수에 경우 손견이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자손이라는 떡밥에 대해서는 "아마 손무의 자손일 걸로 추측된다."라는 불확실한 추정만 했지만 유비와 조조는 명백하게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거론했다. 그런데 손견은 현대에서 이미 손무의 자손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굳어졌고, 정작 유비는 혈통을 사칭한 걸로 의심을 받으니 모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