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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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8대 진덕여왕 김승만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30대 문무왕 김법민

[1]
묘호태종(太宗)[2][3]
시호무열왕(武烈王)
김(金)
춘추(春秋)
생몰년도음력603년[4] ~ 661년 6월 (59세)
재위기간음력654년 ~ 661년 6월 (8년)
종교불교

1 개요

통일신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군주.
무려 700년 동안 지속된 삼국시대를 종결시킨 인물.[5]

신라의 제 29대 .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며,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도 많이 알려져 있어서 본명인 ‘김춘추’로도 유명하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왕들 중에서 건국 군주들을 제외하고 본명이 가장 많이 알려진 왕 중 한 명. 신라의 정치사로 보면 혜공왕 대까지 이어지는 신라 역사 상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시기인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그의 집권을 기점으로 신라의 정치체제가 이전과는 다른 많은 변화를 이루었고, 그의 주요 업적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것이라는 면에서는 사실상 '창업군주'의 일면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임금이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 편이다. 무열왕은 어디까지나 즉위 전에 일본과 중국과 고구려를 넘나든 외교 활동이나 즉위 후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고, 백제 세력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군대를 격파해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수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이다. 물론 ‘삼한 통일의 주역’이라고 하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2 출생과 성장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湌龍春【一云龍樹】之子也 【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天明夫人 眞平王女 妃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간(角湌) 서현의 딸이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지왕아들 이찬 용춘(龍春:김용춘)의 아들로, 선덕여왕의 조카이다.[6] 풍채가 매우 특이했는지, 당태종이 그를 보고 매우 기이하다고 평했다. 《일본서기》에서도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다(春秋美姿顔善談笑)고 기록되어 있으니 뭔가 사람을 끄는 외모와 언변의 소유자였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오오 마성의 남자 김춘추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춘추는 한끼에 쌀 세말과 장끼 아홉 마리를 먹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다만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식으로 해석 가능하다.[7]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왕을 위해 차린 음식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왕이 혼자서 다 먹진 않는다. 일부만 먹고 남은 반찬은 밥만 바꾸어서 왕 밑의 대신들이, 그리고 그 밑의 신하들이 먹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먹을 땐 아랫사람을 생각해서 최대한 깨끗하게 반찬을 먹었다. 이렇게 보면 김춘추 혼자서 다 먹었다기보다는 왕을 포함한 궁중의 신료들이 먹은 음식 전체가 한끼에 쌀 세말이란 소리다. 즉 무열왕 본인이 대식가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무열왕 치세의 신라의 풍요로움(그만큼 밥이 많았기 때문에)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바로 아래로 이루어지는 구절과 연계해서 해석해 보면 더욱 그렇다.

3 외교 활동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그의 외교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그의 외교 활동이 결과적으로 신라의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고 그것이 신라의 삼한일통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 활동을 전개했기에 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꽤 국제적인 정치가였다.

3.1 외교 활동의 배경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인 대야성 도독 김품석선덕여왕 11년 (642)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합천) 공략 당시 사망했었는데, 김춘추는 이를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8] 그리고는 백제 멸망을 맹세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로 갔던 것이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인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642년)

김춘추의 고구려행을 복수심으로만 보는 해석도 많은데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타격도 김춘추 고구려행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텐데, 품석은 대야성 상실의 1등공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과 끝까지 항전하지 않았던 것은 김춘추에게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김춘추로서도 백제 공세로 초래된 자신의 정치적 위기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만한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고구려로 가기 전에 김유신과 맹세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떠나는 김춘추를 향해 김유신은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왕궁의 뜰을 짓밟게 될 것이오"라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말을 했고 김유신에게 "60일 이내면 돌아올 것인데 이 때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김유신과 피를 나눈 맹세를 다졌다.[9]

3.2 대 고구려 외교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직접 김춘추를 대접해 주었다. 김춘추는 고구려 조정에서 양국이 그간의 상쟁을 중지하고 화해하며,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도와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게 고구려의 보장왕은 "죽령 이북 땅이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줄 수 있다"고 답했다. 김춘추는 "이웃의 위기를 기회로 어찌 영토를 내놓으라 할 수 있습니까? 전 신하로서 어쩔 수 없으니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라며 이를 거부하였고 보장왕은 결국 김춘추를 붙잡고 구금시켜 버린다.

감옥에서 김춘추는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고구려 신하 선도해에게 청포 3백 보의 뇌물을 보내자 선도해는 김춘추를 찾아와 토끼전 이야기를 하였고, 거짓말로 자라를 속이고 위험에서 벗어난 토끼의 꾀를 상기시키며 융통성 있는 대답을 할 것을 당부해 줬다. 이에 대해 연개소문이 그냥 겁만 줄려고 안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대접한 일 밖에 없다. 실권자인만큼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조종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증거는 없다.

한편 김유신은 김춘추를 구할 결사대[10]를 꾸려 한강을 넘어 북상해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춘추 역시 토끼전 이야기대로 보장왕을 다시 만나 신라에 돌아가면 왕을 설득해 고구려 옛 땅을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설득하고 목숨을 구해 돌아왔다.

3.3 대 왜국 외교

647년 비담의 난이 평정되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김춘추는 신라 최대의 권력자가 되었다. 국내 문제가 일단락되자 김춘추는 왜국을 방문하여 양국 현안 절충을 모색하였다.

김춘추가 왜국에 다녀온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646년 9월 기사를 보면 왜 조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 관료인 다카무쿠노겐리(高向玄理)를 신라에 보내 '질(質)'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응해 이듬해 비담의 난이 평정된 후 김춘추는 겐리와 함께 왜국으로 건너간다. '질'은 '인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보통 상대국에 대한 굴종의 의미로 보내져 장기간 그 나라에 체류하는 사람이지만 김춘추는 곧 돌아와 648년 당으로 건너간다. 사실 김춘추를 '인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부합하는 건데 신라 중대왕실의 시조인 김춘추를 인질로 규정하여 '신라는 왜의 번국'임을 내세우려는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김춘추가 전통적으로 신라의 적대국이자 오히려 백제와 친밀했던 왜에 건너간 이유와 김춘추가 왜국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지만 나름대로 왜와의 외교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탐색했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태돈 교수는 저서 삼국통일전쟁사에서 백제에 대한 왜국의 군사 지원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했으며 신라와 왜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위에 기록된 것처럼 훌륭한 풍채와 세련된 화술로 여러 왜의 신하들과도 교류하며 신라와 왜의 관계에 대해 협의를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왜는 여전히 친백제 외교노선을 유지했고 특별한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김춘추의 대 왜국 외교는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4 대당 외교와 나당동맹

648년 3월, 당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 당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았고 이 문제로 김춘추는 당으로 파견되었다. 태종은 김춘추를 극진히 우대했고 김춘추도 장안에 머물면서 태종과 담소를 나누었으며 당 조정 중신들과 교류하면서 나당 양국의 이해관계를 확인하였다. 신라는 당에 의존해 고구려,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했고 당은 고구려 공격에 있어 배후의 신라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이해관계의 일치를 바탕으로 김춘추는 당 방문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는데 3남 김문왕을 장안에 머물러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로 남게 하여 나당 외교의 거점을 확보했으며 김춘추 입장에서도 아들을 통해 최강대국 당의 유력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으므로 신라 정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과 만나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것을 흔히 나당동맹의 결성 시점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나당 양국의 합의점을 찾아냈지 구체적인 시기나 계획 등은 나오지 않은 시점이었다.

또한 김춘추는 귀국해서 신라 관복의 양식을 당의 복식과 같게 하였으며 신라 고유의 연호를 없애고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신라의 대외관계 방향성을 표방한 것으로 신라는 당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은 649년 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 나갔고 거란과 요서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당에 온 백제 사신을 통해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아간 성을 돌려주고 신라 공격을 계속하면 당이 개입할 것을 천명했으며, 왜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지원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로써 나당동맹은 명백히 표명된 셈이다.

4 내정의 정비

비담의 난 진압 후 신라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떠오른 김춘추는 진덕여왕 치세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의 정비도 단행하였다. 이때 신라의 중앙관서 조직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와 입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좌리방부를 창설하였다. 또한 국가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당의 복식 도입을 주도한 사람도 김춘추였다.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인 654년에는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히 살펴 이방부의 법제 60여조를 정비했다. 김춘추의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도움이 되었으며 신라에서 가장 왕권이 강대했던 시기라 평가되는 중대왕권의 기본적 골격과 체제가 김춘추에 의해 다져지게 되었다.

5 즉위와 백제의 멸망

진덕여왕의 죽음에 따라 진골 최초의 왕이 되었다. 그의 능력이나 세력도 세력이지만 혈통을 따져 봤을 때 진골 중에서 성골에 가깝기 때문에[11] 별 문제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중대의 시작이며, 일연 스님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하고(下古)의 시작. 어느 쪽에 있어서도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

흔히 진평왕 때부터 열세였던 신라가 무열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승세를 타고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무열왕의 치세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계속 파상공세를 퍼부어 여전히 엄청난 위기였다. 당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냐면 백제, 고구려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신라는 곧 망할 나라"라는 인식이 돌 정도.

무열왕 재위 2년(655년)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에 연합공격을 가해 33개 성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고, 재위 5년째인 659년에도 하슬라(강릉) 방어선이 말갈과 고구려의 위협을 받아서 실직(삼척)을 2선 방어기지로 삼아야 했다. 무열왕도 이를 타개해 보기 위해 655년부터 당에 계속 헬프를 쳤으나 사신을 보냈으나 660년 7월 소정방을 파견하기까지 당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무열왕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태종무열왕 6년 기사

그러나 659년 10월, 꿈에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에서 내년에 백제를 친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하고 사라졌다. 무열왕은 두 사람을 추모하는 불제를 열었고 그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라는 절을 세워 이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결국 당의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로 왔고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잔을 받고, 대야성 함락때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준 배신자 검일을 친히 목베어 대야성에서 있었던 딸과 사위의 복수를 했다. 그리고 삼국 통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딸의 복수를 마치고 바로 죽었으니 일종의 복수귀 같은 인생인 셈. 《삼국사기》와 유사에는 당태종과 묘호가 같아서 신문왕때 당나라에서 이것을 문제삼아 묘호를 고치라고 압력을 넣었고 신라측에서는 이를 완곡한 어조로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6 죽음에 대해

흔히 병사했다고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드라마 삼국기에는 백제의 패장 윤충,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는 백제의 왕족 부여궁, 이문영의 소설 취리산에는 백제의 유민 사충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근거로 상상을 더한 것이다. 특히 삼국기의 경우 이남교의 <고백신조(高百新鳥>[12]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여기서도 무열왕이 윤충의 손에 죽는다.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13]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14]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익산 지방은 미륵사왕궁리 유적 등이 있던 백제의 주요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정복된지 1년도 안된 661년에 신라의 왕이 그 곳에 갔다가 피살되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 아무래도 글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사서의 묘사와 때맞춘 왕의 사망 기사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듯한데, 무열왕의 죽음이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은 그저 근거가 희박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 저 기록의 앞은 백제 잔당과의 전투고 뒤는 왕의 죽음이기 때문에 대관사와 금마군의 기록은 전투가 잔혹했음을 알려주는 비유이고 왕은 그저 시기를 맞춰서 우연하게 죽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해석이다.[15]

파일:Muyeorwangneung.jpg

태종무열왕릉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하고 있다. 무열왕릉 항목 참조. 사적 제 20호.

7 평가

뛰어난 외교실력으로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여 도 많지만 같은 민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배신하고 이민족인 당과 동맹을 맺으면서 떼어주는 고구려땅을 대동강 이북으로 정해서 만주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민족의 배신자, 심지어 매국노 취급까지 받는 등 가 더 많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무지에 의한 오류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구상은 백제가 앞서 하였으며, 위덕왕, 성왕 등 백제왕들은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적극적으로 부채질했다. 백제 위덕왕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수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백제도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역시 백제의 성왕은 수차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다. 645년 당태종은 실제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했고, 외교관계에 있던 백제,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에 응해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했으나, 백제는 당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고구려로 출정 중인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이에 분노한 당태종은 백제와 외교관계를 단절시켰고, 신라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던 것이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삼국 사이에 민족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이다. 아직 논란이 있지만, 당시에 삼국 간에 민족의식이 희박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다. 이보다는 당시 삼국 사이에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느냐, 아니면 조금은 있었느냐 하는 것이 더 학계의 관심사라 보는 것이 옳다. 여러 사극을 보면 남녀평민들의 옷차림은 삼국 모두 똑같긴 한데...당시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지금의 삼한이라 불리던 현재 남한 지역에는 어느 정도 민족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도 삼한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었고,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 전쟁을 펼칠 때, 일통삼한의 기치를 내세우며 백제,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려 하였다. 이 용어는 특히 백제 유민들에게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신라가 포섭한 고구려 유민들은 당시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떠나 신라로 귀순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 부르며 이민족 취급한 것을 볼때, 고구려와 신라 간에는 동족 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보여진다. 다만 백제는 지배계층이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 출신이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보다는 연계의식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또한 중앙귀족들에게 한정된 의식일 뿐, 계속 백제에 반란을 일으켰던 마한 지역의 의식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여진다.[16], 당시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도 그렇지만 특히 백제는 틈만 나면 신라를 침공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민족과 영토를 팔아먹었다는 것을 정당화 하긴 쉽지 않다.

당시 신라가 위기 의식을 느낄 정도로 고구려와 백제가 맹공을 가해온 것은 사실로 특히 의자왕 즉위후 신라공세에 광적으로 열을 올렸다. 백제는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 이래 신라를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가면서 침공해 오는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끼고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백제와의 전투에 올인하려 했으나 고구려에 자청해서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오히려 투옥 당했던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눈치챘다. 이후 김춘추는 일본에도 건너가 보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당과의 동맹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당이 저런 태도로 나올 것을 예측했으면서도 당과 동맹을 맺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좋았지만 그의 외교활동이 부른 결과가 '당'이라는 또다른 거대한 적과 싸우게 되었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신라마저도 당에게 편입될 뻔한 여지를 제공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다행히 잘 막아냈기에 망정이지. 그의 외교 활동은 결과로 봤을 때는 목적대로 되었으므로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큰 모험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판단하기엔 과정에서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래저래 백제에게 망하거나 당나라에게 빼앗기거나 마찬가지라는 도박성 외교였다고 할 수 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의 침공으로 죽은 개인적인 원한을 부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한 요인이었을 수는 있으나 결정적인 요인이라 보기는 어렵다. 사서에 드러난 기록들로 볼 때 당시 신라를 이끌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가를 위한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희생도 감내하였던 인물들이었다.

후대 사람은 그에 대해 평하는 것은 자유지만, 국가를 책임지는 사람이 개인적인 감정 혹은 이념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대입하기 어렵지만, 이완용 같은 매국노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가를 배신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반면 독립운동가는 대의명분의 따라 살았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독립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는 김춘추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 알아주는 왕족이자 관리인 그가 당나라에서 굴복적인 일을 당했음에도 이를 견디고, 결국 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개인적인 복수심이 작용했다고 해도 성급하게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침공하지도 않았다. 그는 당대 조국을 지키는 방법을 택했고, 이로 인해 신라를 살렸다는 점에서 훌륭한 정치가이다.

대다수 이야기에서 백제의 멸망 보다는 고구려의 멸망에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넓은 영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광대한 나라라는 초점이 고구려의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춘추가 제일 먼저 찾아가 동맹을 제의했던 것은 고구려였다. 그런데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신라의 요청을 묵살했고, 이후 김춘추는 일본에 갔지만, 이마저도 실패한다.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간 나라가 당나라이다. 그렇지만 묵살할법도 한게 진흥왕의 거한 통수 전적을 보고서도 신라의 지원요청에 쉬이 응하기란 쉽지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양원왕 때 평양이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나라가 다름 아닌 신라였다.[17] 비록 밀약이 있었다고 추측되기는 하지만 한 때 고구려와 신라는 한번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오히려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을 도와 백제를 무력화 시키거나 혹은 멸망시킨다면 영토문제가 골치 아팠을 것 이다. 백제는 신라의 감싸져 있는 형태였기에 설사 백제를 무력화 시켰다고 해도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신라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로서는 얻을 수 있는 영토가 없을 것이고 단순히 후방안정이 고작이었기에 오히려 신라를 침공하는 것이 이득이었을 것 이다.[18]

8 인척 관계

김유신과 정치적으로 동맹이었으며, 나중엔 그의 여동생 문희혼인하기도 했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고타소는 《삼국사기》에선 문희의 소생으로, 《화랑세기》에선 전 부인이자 보종의 딸인 보라의 소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김춘추 딸 중 하나는 김유신에게 시집간다.[19][20]. 또한 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김법민은 문무왕이 된다. 때문인지 나중에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증받는다.

또한 원효대사의 장인이기도 하다. 원효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자 무열왕이 이를 듣고 일찍 과부가 된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를 원효와 맺어주기 위해 원효를 데려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원효가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원효를 인솔하던 관리가 요석궁으로 원효를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는데, 여기서 요석공주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이가 바로 신라의 대학자로 유명한 설총. 즉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주가 되는 셈이다. 따지고 보면 김유신도 무열왕의 사위이니 하나같이 비범한 인물들을 사위로 두었다.

9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三月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다
一年夏四月 왕의 죽은 아버지를 추봉하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夏五月 율령을 가다듬어 정하게 하다
一年 당에서 사신을 보내다
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 고구려가 북쪽의 변경을 침략하다
二年春三月 당이 고구려를 치다
二年 법민을 태자로 삼다
二年冬十月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치다
二年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바치다
二年 왕의 딸인 지조를 김유신에게 시집을 보내다
二年 월성 안에 고루를 세우다
三年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오다
三年秋七月 문왕을 당에 보내다
四年秋七月 일선군에 홍수가 일어나다
四年 토함산의 땅이 불타다
四年 흥륜사의 문이 무너지다
四年 바위가 부서져서 쌀이 되다
五年春一月 중시인 문충을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하슬라(지금의 강릉)를 주로 삼다
六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秋八月 아찬 진주를 병부령으로 삼다
六年秋九月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치다
六年 공주 기군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죽다
六年冬十月 장춘과 파랑이 당의 소식을 전하다
七年春一月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당 고종이 백제를 치게 하다
七年夏五月二十六日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다
七年夏六月十八日 남천정에 다다르다
七年夏六月二十一日 태자 법민이 소정방을 맞았다
七年秋七月九日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七年秋七月九日 소정방기벌포에 도착하다
七年 백제의 왕자가 당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다
七年秋七月十二日 당과 신라의 군사들이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가다
七年秋七月十二日 백제의 왕자가 가축과 음식을 보내다
七年秋七月十三日 의자왕이 밤에 도망하다
七年秋七月十八日 의자왕이 항복하다
七年秋七月二十九日 왕이 소부리성에 이르다
七年秋八月二日 주연을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다
七年秋八月二日 모척의 목을 베다
七年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七年秋八月二十六日 임존의 목책을 공격하다
七年秋九月三日 낭장 유인원이 사비성을 지키다
七年秋九月二十三日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 등을 차지하다
七年 당 황제가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다
七年秋九月二十八日 왕문도가 조서를 전달하고 갑자기 죽다
七年冬十月九日 왕이 이례성을 치다
七年冬十月十八日 이례성을 빼앗아 지키게 하다
七年冬十月三十日 사비의 남쪽에 있던 군대를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一日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五日 왕이 왕흥사잠성을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二十二日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八年春二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말을 바치다
八年春三月五日 품일이 군영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다
八年春三月十二日 대군이 두량윤성을 공격하다
八年夏四月十九日 군사를 돌이키다
八年夏五月九日 고구려가 술천성을 공격하다
八年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다
八年夏六月 대관사 우물물이 피가 되다
一年夏六月 왕이 죽다

재위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 재위기간에 삼국통일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역대 신라 왕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기록이 많은 왕이며, 특히 왕이 되기 전의 활동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신라 임금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삼국시대의 왕들 중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진 왕 중 하나로 봐도 될 것이다. 그만큼 태종 무열왕이 가진 역사적 입지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삼국사기 5권은 선덕여왕부터 시작하여 태종 무열왕에서 끝난다.

10 현대 매체에서의 태종 무열왕

삼국기, 연개소문, 선덕여왕(드라마)계백(드라마)에도 나온다.

재미있게도, 자세히 보면 같은 방송사라 그런지 선덕여왕과 계백 두 드라마에선 김춘추가 입는 의상이 서로 같다[21].나의 춘추는 그렇지 않아?!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신라의 영웅으로 나온다. 다른 국왕인 광개토대왕이나 근초고왕과 비슷한데 현혹으로 적의 캐릭터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으며, 확장 현혹술을 연구하면 건물도 현혹할 수 있다. 격려를 사용하면 주변 아군 병사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올려준다. 실제 무열왕은 외교형 군주였는데 여기서는 말 탄 검 영웅이라서인지 무장형 군주로 보인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비교적 희화화되어서 등장한다. 김유신도 무열왕을 막 대하는데, 이에 무열왕이 "우리 신라는 다 좋은데 이 위아래위아래 없는 말투는 싹 고쳐야 한다"고 하지만 김유신은 "이게 우리 전통 아이가? 얼마나 살갑고 좋노!"라며 일축. 그리고 김유신을 겉으로는 반기면서도 견제하고 있다. 김유신이 나가자마자 협상단을 불러서 김유신같은 꼰대는 못 믿는다면서 협상단이 신라의 미래를 짊어진다며 격려한다. 그리고 의자왕에게는 개인적인 원한이 더 큰 모습을 보인다. 영화 초반 4자대면에서도 의자왕에게 딸의 원수라고 단단히 복수에 목 마른 모습을 보이며 마지막에 기껏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백제 영토는 물론이고 의자왕의 신원마저 당나라에게 귀속되자 크게 상심한 모습을 보이며 둘째 아들이자 당의 관료 김인문을 원망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도 당고종에게 빌붙는 인물로 묘사되며 마지막에는 아들 법민에게도 '고구려는 대장군하고 내가 맡을 테니 아버지는 빠지라'는 말을 듣는다. 무열왕에 대한 현대인들의 부정적 평가가 많이 반영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후속작 평양성에서 아들인 문무왕이 당에 굽신대면서도 챙길 것은 챙기고 당에 할 말도 하는 왕으로 등장하는 것과 많이 비교되는 묘사. 후속작인 평양성에서는 이미 고인이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양성 전투 시점에서는 고구려의 연개소문도 고인이어야 하는데[22]

10.1 드라마 선덕여왕

김춘추(선덕여왕) 참조.

10.2 드라마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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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근초고왕(드라마)광개토태왕(드라마)에 이은 KBS 대하드라마 영웅군주 3부작의 마지막 시리즈 대왕의 꿈의 주인공으로 2012년에 또 등장하게 된다. 게다가 주인공은 또 최수종이 캐스팅되었다.[23] 아역 배우는 뿌리깊은 나무(드라마)강채윤 아역과 인수대비(드라마)단종을 맡았던 채상우.

이 드라마에서 김유신과 함께 양대 주인공이며 어린 시절 만난 김유신을 형처럼 따른다. 극중에서 총명한 것으로 묘사하며 알천 등 개혁파 신료들에게, 왕자가 없는 진평왕의 후계자로 지지받는다. 그러나 폐왕(진지왕)의 손자로서 진골 신분이라는 약점이 있다. 또한 총명한 것을 넘어 이상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사도태후 앞에서 진지왕의 폐위는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등 목숨이 위태로운 발언을 서슴치 않아 후덜덜하다.

덕만과 국반 갈문왕의 국혼 문제를 두고 반발했다가, 갈문왕과 사도태후의 눈밖에 나서 서라벌을 떠나 10년을 서라벌 밖에서 지내고 다시 돌아와 진평왕이 사정부의 관리로 임명했다. 소금 밀매로 이익을 챙기는 집단을 적발해 내고 위기를 맞지만 김유신과 귀문의 도움으로 무사히 구출.

보라궁주라는 부인(추소영 분)이 있는데, 대야성에서 죽는 딸 고타소가 이 부인의 소생으로 설정한 듯하다. 그러나 이는 《화랑세기》의 기록이고, 《삼국사기》에서 고타소는 분명히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의 소생이다.

국왕 즉위 이후로는 거의 악역이 따로 없다. 실제로 김유신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에게 까인다.(…) 대의를 외치며 사사건건 당나라를 옹호하고, 다른사람들이 뭐라 하던 눈만 굴릴 뿐 전혀 굽힐 줄 모르며, 기어이 당군을 지키러 자기 백성들의 떼죽음까지 외면하는 등 완전히 타락한 독재자다. 선덕여왕은 약과일 만큼.

마지막엔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데, 여기서도 "당신은 옛날의 대의를 잊고 삼한 땅을 당나라에게 팔아넘기고 있다"라 극딜을 겪는다. 그래도 굽히지 않자 태종 무열왕을 눈물 서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대왕의 높은 대의가 백성들을 구제할 것입니다"라 하고 사라지는데, 끝내 한반도 위가 당나라의 영토로 바뀜을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비꼬기다.(…) 제작진이 무열왕을 어지간히 싫어했던 듯.
  1. 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태종 무열왕 표준영정. 통일전에는 삼국통일의 주역들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의외로 이 표준영정과 문무왕 표준영정을 혼동하는 사람도 많다. 이 표준영정을 그린 사람은 세종대왕의 표준영정도 그린 운보 김기창.
  2. 기록상 남아있는 삼국시대 묘호중 주인이 확인된 유일한 묘호다. 수로왕태조(太祖)라는 묘호가 있다고 하지만 그건 《김해김씨 족보》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신뢰하기가 힘들다. 족보는 후대에 가문의 위상을 위해 조작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일본측 기록에 백제에서 도모왕(동명성왕 추정)을 태조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긴 한데 참고 수준이다. 다른 사서(史書)에는 등장하지도 않고...고구려의 경우에는 태조대왕 역시 있다만 이 경우 역시 좀 애매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과 태조 문서 참조.
  3. 다만 진흥왕 순수비에는 태조가 등장하며 문무대왕비와 흥덕대왕비에는 태조 성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태종이 있는데 태조가 없을 리가 없는 데다가, 당대 기록인 금석문에까지 태조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미루어 신라에 태조라고 불리는 왕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다만 누가 태조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해석이 분분하다. 이 역시 태조 항목을 볼 것. 참고로 모든 군주에게 묘호를 올리는 관행은 당나라 때에야 도입되었고 한반도에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물론 원나라 간섭을 거치면서 폐지됐다가 조선 때 부활). 따라서 신라의 일부 군주에만 묘호를 붙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의 생년이나 연령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생년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나라를 다스린지 8년째인 용삭(龍朔: 당고종의 연호) 원년(661년) 신유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는 기록에서 역산한 생년이다.
  5. 문자 그대로 삼국시대최종보스. 고구려-백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사악한 마귀와 같은 존재였겠지만 김춘추의 조국인 신라의 입장에서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 나라를 구할 신라에 깃든 거대한 행운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6. 학계에서 위서로 취급받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용춘의 형인 용수(《삼국사기》 등에는 용춘과 용수가 동일 인물이다!)와 진평왕의 장녀인 천명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18세 춘추공 부분에는 용춘으로 되어 있다. 용춘이 딸 밖에 없어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7. 참고로 진짜로 쌀 세말(오늘날 도량형으로는 약 50리터지만 옛날의 도량형은 오늘날의 도량형보다 작다)과 장끼 아홉마리는 뱃속에 절대로 다 못 들어간다. 그러니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
  8. 역시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지만, 《화랑세기》에서는 김유신풍월주였던 때, 풍월주 부제가 되었으며 나중엔 풍월주까지 되었다고 한다.
  9. 이 때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임명된다.
  10. 결사대 숫자는 신라본기에는 1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김유신 열전에는 3천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1. 사실 김춘추는 진골로 태어난 게 아니라 성골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진지왕의 폐위로 인해 진골로 강등당한 것이다.
  12. 고구려, 백제, 신라의 머릿자와 야마토 정권 아스카(飛鳥)시대의 鳥를 따 지은 제목이다.
  13. 지금의 익산 지방의 사찰터에서 '대관'이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가 출토되었다.
  14. 지금의 익산 지방.
  15. 뒷날 고려고종이 죽기 한달 전에 자운사 연못 물이 피로 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본 보문각교감 강교가 "옛적 신라의 무열왕이 죽을 때도 대관사 물이 피로 변했다고 하는데 불길한 징조다"라고 해석하는 기록이 존재한다.(고려사절요, 고종 46년)
  16.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에도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선전되었으나 실질적인 동족의식은 크지 않았고 이후 잘 알다시피 후삼국시대가 열린다. 한민족의 민족개념은 고려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대몽항쟁시기 때 급격히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 '민족적 위기'라는 몽골 침략기간에조차도 백제 부흥을 기치로 반란을 일으킨 이연년의 난 같은 사례가 있을 정도. 따라서 이것은 현대인의 과잉민족주의를 무리하게 고대에 투사한 오류라고 볼 소지가 있다.
  17. 정확하게는 당시 백제 주도의 연합군의 중심 축이던 신라가 돌연히 고구려 정벌의 반대한다. 이러자 성왕은 할 수 없이 고구려 정벌을 그만두게 된다.
  18. 연계소문이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요구한 것도 이런 배경 이었을지 모른다.
  19. 이 딸이 문희 소생인지 전처 소생인지는 불분명하다.
  20. 고대사회에서는 혈통의 고귀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왕족이나 상류층에서 근친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에서도 특히 중기 전후로 성골 등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들에서는 근친혼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라는 부모 중에서 낮은 신분을 자식이 물려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골끼리 혼인하려다 보니 근친혼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고 신라 중기에 성골이 감소하자 이런 현상은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골은 씨가 말라버리고 말았다.
  21. 사실 이게 당연한거다. 우리나라의 경우 워낙에 드라마 별 개성적인 발고증 덕분에 같은 시대를 다른 드라마라도 방송사별로 복장이나 갑옷이 다 다르며 심한 경우엔 아예 외주제작사별로, 혹은 같은 방송사나 외주제작사 내에서도 PD 등 제작진에 따라 그런 차이가 생겨나기도 한다.
  22. 연개소문은 665년에 사망했고 평양성 전투는 668년이다.
  23. 삼국 각각의 전성기를 다룰 거라면 질리게 극화된 삼국말기나 까도 많고 여러번 드라마에 나왔던 이 양반보다는 선덕여왕에 카메오 출연 외에는 한번도 드라마 출연이 없었던 진흥왕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사극팬들 사이에 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