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공화국

이탈리아의 역사
Storia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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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It.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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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노바, 교황령, 토스카나(피렌체), 밀라노, 만토바,
페라라(모데나), 파르마, 몬페라토, 루카, 등등




로마
왕국
사보이 공국사르데냐왕국
베네벤토 공국




나폴리
왕국





































그리스


비잔티움 제국














시칠리아
왕국
비잔
티움
갈루라 왕국, 로구도로 왕국,
아르보레아 왕국, 칼리아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1]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국기국장

[2]
697년 ~ 1797년
표어Viva San Marco!(성 마르코 만세!)
위치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일부
국가Inno Nasionale Veneto
수도베네치아
정치체제과두 공화제
국가원수도제
언어이탈리아어,라틴어
종교가톨릭
주요사건697년 건국
추가바람
1797년 멸망
통화두카트
성립 이전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치살피나 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3]

1 역사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경 고대 로마가 쇠락하고 있을 당시 이민족들[4]에게 도망치려 했던 사람들이 이탈리아 동북부 아퀼레이아의 석호에서 모이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고 7세기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로마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도제[5]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810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샤를마뉴의 아들인 피핀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중세를 기점으로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국가로 등극하면서 엄청난 부를 과시했다. 특히 십자군 전쟁 중 처음에는 제노바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였으나, 엔리코 단돌로가 도제였던 1202~04년의 4차 십자군 전쟁 때 원래 이슬람을 치기 위해 모여든 프랑스 기사단을 빚[6]을 이용해서 헝가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을 공격[7],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중요 상업루트를 독점해 단번에 제노바를 따돌리고 동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했다. 헝가리를 공격한 것 때문에 교황청에게 파문을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8]. 이후에는 심지어 프랑스인을 동로마의 옥좌에 앉히고, 교황청의 승인까지 받아서 '라틴 제국'을 창설해 1261년까지 60년이나 그리스를 간접 통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리스 정교도와 가톨릭 교도, 그리스인과 프랑스인의 관계는 험악해지다 못해 최악으로 변했다.[9]

13~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수행했다. 라틴 제국이 멸망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에는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제노바가 차지하여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였기에 때로는 결정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어 멸망의 위기에 처했지만 반격을 가해 실지회복에 성공한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통해 베네치아가 얻은 교훈은 섬을 둘러싼 육상 영토의 중요성이었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에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4차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중상모략을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된다.[10]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교황청이 발목을 잡은데다[11]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를 모두 모아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했다. 다만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면 아직까지는 취약한 상태였던 오스만 함대의 포위는 풀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12].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분명한 것은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이 허약한 베네치아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 없이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끼어들었다고 해서 로마의 멸망을 막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끼어들었다면 훨씬 빠르게 동지중해의 세력권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저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그나마도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만으로 오스만 제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시한부 신세였다. 서유럽 전체가 연합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면 모를까, 베네치아 공화국 혼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제4차 십자군 이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까지의 13~15세기에는 지중해 곳곳과 발칸반도에 무역거점을 잔뜩 건설해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으며 당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르네상스의 발전에도 큰 공로가 있는데, 원래부터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로마의 선진 문화를 일선에서 받아들이는 지역이 되었다. 포크냅킨, 손가락 씻는 접시를 서유럽에 소개한 것도 베네치아인들로, 11세기 후반 베네치아 도제와 결혼한 비잔티움 제국의 공주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한다. 15세기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했다. 여기서 대단한 것은, 쥐꼬리만한 본토를 가진 베네치아가 발칸 반도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는 것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약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13].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1512~1520)에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고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만 베네치아는 말이 도시 국가지 당시 기준으로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었다. 영토도 도시 국가 기준으로 보면 매우 컸고, 도시화율이 높아 200만명, 영국의 절반 정도로 인구 역시 무척이나 많았다.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1499년부터 1503년까지 전쟁을 하였으나 패한 후,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 지배권을 상실한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 유지된다. 식민지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이탈리아 북부로 진출했으나 체자레 보르지아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저지당했다. 특히 율리오 2세가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영토를 다 토해내게 된다. 그후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동맹. 1515년에 이르러 야나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씻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북이탈리아에서 더이상 영토를 확장하지는 못했다.

1520년대에는 스페인포르투갈 등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루트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1521년에는 포르투갈을 통해 베네치아가 독점하던 향료가 더 싼 가격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거부당하기도 하였다[14]. 그러나 여전히 바다에서는 매우 강했고, 사실상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러나 키프로스를 상실하여 팔 한 쪽이 뽑혀나가는 동시[15]에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 가량인 5만 명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16]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당연히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의 반발은 엄청났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영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어야 하는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점점 고립주의적으로 변하게 된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 당하고 말았다. 망했어요. 이후 베네치아가 예전의 부와 힘을 되찾는 일은 없었다.

베네치아는 한동안 경제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 제일의 부국답게 쇼미더머니 급의 재력을 자랑하며 무한대에 가까운 보급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이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된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17]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을 이용해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이후에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다.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797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 이 나라가 멸망할 때 원정을 왔던 나폴레옹은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폐지하여 멸망시켰다.

베네치아 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였다고 한다.[18] 그런 이유로 달마티아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했는데, 어느 정도 였나면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공화국의 혹독한 지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터키인들을 환영할 정도 였다 한다.[19] 이 차별은 식민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섬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였고, 때문에 후기에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경우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 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한 것도 이 순혈주의가 주 원인이었다.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20]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요' 하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는 해당 도시 항목 참조.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현실성 없는 조작된 결과인 것 같지만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

2 정치 체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유력 인사들 간의 집단지도체제인 과두 공화정이었으며 그리스의 아테네 못지 않은 폐쇄적인 체제였다.[21] 사실상 야당이 없는 일당 독재[22]였지만, 중세인들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발상으로 경제발전을 구가할 수 있었다.

투표를 통해 지도자인 도제를 선출했으며, 일단 선출된 도제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가 최고 권력은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10인 위원회에 있었으며 도제도 10인 위원회 내에서는 다른 위원들과 동등하게 단 1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10인 위원회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한 도제도 있었다.

베네치아 도제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8~9세기까지 베네치아는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위성국가였으나, 9세기 이후 아랍과 노르만의 침입으로 남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들이 무너지자 베네치아는 명목상의 봉신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위는 베네치아가 서유럽 세력(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 등.)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지키는 적당한 명분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상업을 통해 이룬 재력 및 군사력과 서유럽 최고의 외교력으로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3 트리비아

로마인 이야기이자 로마 제국 빠순이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 다음으로 빠심을 드러내는(즉, 편애하는) 국가다. 그러면서 동로마 제국은... 그녀의 저작으로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가 있으며, 다른 중세 지중해 관련 책에서도 베네치아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비중은 상당히 높다. 그러니까 적당히 필터링해서 읽자.

제대로 된 베네치아사를 읽고 싶다면 존스홉킨스 대학의 F. C. Lane 교수가 쓴 Venice: A Maritime Republic을 읽어보자. 시오노 나나미도 자신이 이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내용도 한 권에 베네치아사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흠이라면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되어 있다는 것과 페이퍼백판은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

문명 5의 확장판 멋진 신세계에서 최초의 플레이어블 도시국가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 관련 문서

  1. '가장 고귀한' 이란 명칭은 국가의 주권을 의미하며 유럽 여러 국가의 호칭이었다. 대표적으로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가장 고귀한 공화국이었으며 현재는 산마리노가 유일하게 가장 고귀한 공화국을 쓴다. 해당 공화국의 군주는 가장 고귀한자(Most Serene Highness)라고 호칭한다. Serene의 뜻이 고귀와 함께 고요가 있다보니 이를 가장 고요한 공화국으로 오역하기도 한다.
  2. 본국과 식민지가 표시된 지도. 전성기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말 그대로 동지중해의 여왕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드리아 해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3. [1],[2]
  4. 일설에는 아틸라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5. shibe doge, 지도자의 명칭으로 한국어로는 '통령', '원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최근엔 그냥 도제 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수공업자 길드의 도제(徒弟, apprentice)가 아니다.
  6. 4차 십자군의 군후들은 당시 서유럽 제일의 항해조직력을 가지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함대의 수송을 의뢰했는데, 문제는 지나치게 규모를 부풀려 잡았던 것이다. 실제 출항 직전 베네치아에 모인 십자군은 처음 십자군 군후들이 베네치아에 제시했던 병력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고, 자원한 병력의 상당수도 최소한의 지참금을 가져오지 않아 다른 군후들이 대신 지참금을 내주는 형편이었다. 전대미문의 대규모 병력 수송을 위탁받아 상선까지 총동원(상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1년동안 상업을 일체 중단했다)하고 대규모 함대를 건조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써는 요금을 전부 내기 전 까지는 함대를 출항시킬 수 없다고 버텼다.
  7. 처음부터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목적은 아니었고,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 베네치아의 항구도시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헝가리에 넘어간 자라를 공격하는 조건으로 빚의 상환을 유예받았었다. 도시 함락에 성공한 뒤 동로마 제국의 황자인 알렉시우스 4세가 도움을 청하자, 여전히 자금난에 시달리던 십자군이 이를 수용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것이다.
  8. 프랑스 기사들은 파문 선고에 당황하여 로마에 사절까지 보냈고, 사정을 전해들은 교황은 베네치아만 파문한다고 말을 바꿨다가 얼마 뒤 베네치아에 대한 파문도 해제했다.
  9. 이전부터 두 종파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적어도 서유럽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이 동쪽에서 오는 이슬람의 방파제라는 점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이런 배신 행위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의 방파제 역할에 문제가 생겼다.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베네치아가 이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신항로 개척과 함께 번성하던 베네치아에게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뭣보다, 단순히 사이가 나쁜 것과 험악하다 못해 거의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을 같은 선상으로 볼 수는 없다.
  10. 베네치아가 제노바와의 전쟁을 치루고, 전후 롬바르디아로 속령들을 넓히던 중에 동로마 제국 변경에서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베네치아를 포함한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11. 당시 교황은 자기네들도 구원 함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국가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여 끝내 함대를 결성하지 못했다.
  12. 이전 버전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다는 것을 근거로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세 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한 척 등 네 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사실도 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다.
  13.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를 예로 들면, 30척의 함선으로 제노바와 비잔티움 함선 네 척을 상대로 쩔쩔맨 끝에 패한 일도 있다.
  14. 사실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절박했겠지만, 후세인의 기준으로 보면 좀 뻔뻔한 시도였다.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저의가 너무 뻔했던 지라...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도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도 없었던 터라.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해대기 시작한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 제국을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은 네덜란드라는 잔혹하리만치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15.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에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한 말에서 인용.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다.
  16. 당시 나폴리는 스페인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게 당연지사.
  17.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는 어디까지나 이었다.
  18. 이 때문에 라이벌이였던 제노바 공화국밀라노 공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부침을 겪으며 지배권을 빼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
  19. 사실상 노예제도에 가까왔다. 베네치아 정부는 그렇게 뜯어먹고도 좀 더 벌어보려고 1516년 키프로스 주민들에게 일정액수의 돈만 내면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공고해는데, 이 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26000명 중 단 한명이었다고 한다.
  20.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혈육이라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부리는 해적들이 납치한 것이라, 누르바누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세바스티아노가 관여한 바는 없다.
  21. 공화정이란 단순히 군주가 존재치 않는 정치체제일 뿐이다. 공화정은 다시 과두 정치의 공화정과 민주 정치의 공화정으로 나뉜다. 베네치아의 공화정은 전자에 해당. 위키백과사전 참조.
  22. 물론 베네치아 역시 정치적 파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