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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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
मौर्यसाम्राज्यम्
존속기간기원전 322년 ~ 기원전 185년
위치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수도파탈리푸트라
정치체제전제군주제
언어고대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아르다마가디어, 프라크리트어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성립 이전난다 제국, 십육대국
멸망 이후사타바하나 왕조, 숭가 제국, 인도-스키타이






언어별 명칭
산스크리트어मौर्यसाम्राज्यम्
힌디어मौर्य राजवंश
구자라트어મૌર્ય_વંશ
벵골어মৌর্য্য সাম্রাজ্য
타밀어மௌரியப் பேரரசு
펀자브어ਮੌਰੀਆ_ਰਾਜਪਾਟ
그리스어Αυτοκρατορία των Μαουρύα
영어Maurya Empire
중국어孔雀王朝[1]
러시아어Империя Маурьев

1 개요

기원전 322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창시된 인도전제군주제 국가이다.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대제국으로, 인도 역사에서 인도 제국, 무굴 제국에 이어 손꼽힐 만큼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인도 제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인도와 북인도를 통솔했던 나라이다.[2][3]

2 역사

마우리아는 자이나교, 불교가 만들어지고 후에 굽타 왕조의 태생이 될 갠지스 강 하류의 마가다에서 시작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야(चन्द्रगुप्त मौर्य)는 원래 난다 제국의 마우리아라는 이름의 크샤트리야 계급 사람이다.[4] 하지만 어머니가 수드라였기에 서자와 비슷하게 기세를 온전히 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인도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맹공으로 홍역을 앓고 있었고 엔간한 나라들은 추풍낙엽같이 쓸려갔다. 가장 강했던 펀자브 왕국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루스[5]포루 포로로 잡히는 등의 난리가 났다. 탁샤실라[6] 왕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그 일대의 교수였던 차나키야[7]는 당시 인도의 패권국가였던 난다 제국의 왕 다나 난다에게 가 우리 나라를 도와 마케도니아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지만 거절당하고 모욕받는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라고 여기서 희망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한 차나키야는 제자 찬드라굽타에게 인도를 이 위기로부터 구할 왕국을 세우자고 이야기하며, 일단 난다 제국부터 멸망시키기로 한다(...).

기막힌 타이밍에 마케도니아의 병사들이 베아스 강은 더 이상 못 건넌다며 파업을 하게 되고,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부대, 6천 마리의 코끼리 부대의 무지무지한 물량을 상대할 자신도 없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철군하게 된다.[8] 찬드라굽타는 그리스의 펀자브 점령지에 쳐들어가 펀자브를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고, 이제 재상이 될 차나키야는 난다 제국이 약해질 틈을 기다리며 탁샤실라의 장교, 그가 키운 제자들, 다나 난다의 폭정에 지친 이들, 그의 아들 말라야케투 등 그의 온 인맥을 동원해 인적 자원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찬드라굽타가 어떻게 난다 제국을 이길 정도로 급작스레 힘을 길렀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고. 하여튼 요렇게조렇게(?)[9] 해서 수도 파탈리푸트라(지금의 파트나)를 점령하고 차나키야는 다나 난다를 죽이라고 직접 지시하고 난다 왕조를 멸망시켜 땅을 통째로 계승해갔으며 동쪽의 마가다 왕국을 계승함으로써 동인도에서의 패권을 쥐어잡았다.

이렇게 동인도를 평정한 찬드라굽타는 그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일궈놨고 셀레우코스가 떼어갔던 페르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알렉산드로스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쳐들어온 것에 초 치러 갔는데, 알렉산드로스의 기상은 어디 가고 계속 털리는 모습만 보이다가 결국 마우리아에게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 등의 땅을 떼어주고 기원전 303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땅까지 모조리 털어서 넘겨주고 반강제로 마우리아의 동맹국이 되고 딸을 찬드라굽타에게 넘겨줘야 했는데, 찬드라굽타는 그 대가로 500마리의 코끼리만을 선물했다(...). 이 일의 영향으로 마우리아의 명성은 널리 퍼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스 등에서 외교사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래부터 발달되어 있던 인도의 기반에 더해 '인도의 마키아벨리'[10]라 불리는 재상 차나키야와 멸망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정치제도 사례, 그리스의 외교사절 메가스테네스의 도움에 힘입어 마우리아 궁정을 매우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만들며 크기를 끊임없이 넓혀가고, 최초의 통일 인도국가를 만들 거대하고 찬란한 나라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세의 침략이 인도 사상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어낸 것이다.

찬드라굽타는 25년의 치정 말의 압도적인 기근에 절망에 빠져 왕좌를 아들 빈두사라에게 물려주고 기근을 예언했던 바드라바후를 따라 자이나교 수행자가 되어 굶어 죽는다.[11] 빈두사라는 마우리아를 남인도까지 상당히 넓히고 드라비다의 영역, 타밀의 영역과 칼링가를 남기고 인도를 점령했는데, 그때 당시 남인도의 왕국들이 마우리아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 후 그는 굳이 더 이상의 침략 전쟁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힌두교를 믿었다고.

이후 찬드라굽타의 손자이자 마우리아 왕조 3대 왕인 먼치킨 아소카 왕이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소카 왕은 남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발전시켰다. 아소카 왕이 한창 전쟁활동을 벌이던 기원전 265년경,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그러나 그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은 약 10만 명으로 엄청난 규모의 살육이 펼쳐졌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치른 칼링가 전투가 끝나고 적국 마을에 들어서니 피가 발목까지 들어차고, 아이들이 고아가 되고 죽은 가족 때문에 미쳐버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맨 밑의 타밀족 땅을 남기고 모든 전쟁을 중단하게 된다.

아소카 왕은 불교를 믿기 시작했고 포교하는 것에 힘써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며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불교를 퍼다나르기 시작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스리랑카, 티베트, 동남아, 중국, 한국,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 불교의 아힘사 사상을 깊이 따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와중에 비폭력, 비전쟁 법률을 제정하고 강제노동, 사냥 등을 금지시켰다. 또한 최초의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만들고 수의사 제도를 만들어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했다.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고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는 등 인프라를 확립했다. 거기에 여러 가지 규정들을 인도 전역의 동굴이나 석판에 확실히 박아 아소카의 칙령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안티오쿠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 등 헬레니즘 지역의 통치자 이름도 발견된다.

그러나 아소카 왕 이후 마우리아는 풍선 바람 빠지듯이 쪼그라들고(...)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의 장군이었던 푸샤미트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푸샤미트라가 세운 슝가왕조는 약 100년 뒤(BC 80년경)에 슝가왕조의 대신(大臣) 바스데바에게 멸망한다. 배신으로 흥한 자 배신으로 망하리라

2.1 역대 국왕

3 영향

초대 왕은 자이나교, 2대 왕은 힌두교, 3대 왕은 불교에 귀의했다. 콩가루?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시대는 확실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아소카 왕은 왕자를 이웃 나라 실론으로 보낸 일을 비롯해 상좌부 불교동남아시아에 전파하였다. 대승 불교상좌부 불교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대승 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중요시하였고, 상좌부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요시하였다. 인도 불교의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인 산치 불교 유적도 마우리아 왕조 시기인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헬레니즘 문화권과의 교류 역시 매우 활발했다. 애초에 태생부터 헬레니즘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일이었으니. 마우리아는 외국에 널리 불교도 퍼뜨리고 외교사절을 통해 교류하기도 하고, 멸망할 즈음 되면 박트리아의 내분으로 인해 인도-그리스 왕국이라는 파이널 퓨전 신기한 나라도 나온다.

4 트리비아

이 문서의 최초 버전참 비범하다(…). 임팩트로 따지면 나무위키 문서 중에서 탑텐 안에 들지 않을까 할 정도. 그러다 반달로 간주되어 생성 후 1분 6초 뒤에 삭제되었다가 다른 기여자들의 내용 추가로 지금에 이르렀다.
  1. 한국말로 공작왕조. '마우리아'라는 단어가 공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
  2. 밑 부분의 조그만 영역은 타밀 족의 나라였던 타밀라캄. 그 외에도 촐라 왕국이 끝까지 저항했다.
  3. 인도 역사상 가장 넓었던 인도 제국은 정작 인도의 식민지 시절이라는 게 함정(...) 그 밖에 무굴 제국은 이슬람에 몽골을 계승했으니 외부에서 쳐들어온 케이스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 '외부' 라는 건 시대에 따라 바뀌므로 외부니 내부니 논할 수 없다.
  4. 하지만 당대의 그의 어릴 적 기록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고 후대의 산스크리트어 문헌이나 그리스어, 라틴어 문헌으로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이 당시 헬레니즘 문명에선 찬드라굽타를 산드라코토스나 안드라코토스로 불렀다.
  5. 그리스식 이름인데 그건 여기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이 그리스·라틴 문헌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특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의 것이 많다.
  6. 현재는 탁실라라고 하는 유적이다.
  7. चाणक्य(Chanakya). 차나키아라고도 하고 차나캬라고도 한다. 카우틸랴와 비슈누굽타라는 필명도 있다.
  8. 알렉산드로스 대왕 항목을 참고하면 알렉산드로스는 이 철군에서 엄청난 수의 군사를 잃었다.
  9. 아마 게릴라 방식으로 점령했을 거라고 한다.
  10. 《아르타 샤스트라(अर्थशास्त्रम्)》라는 현존하는 인도 전근대 유일의 정치서를 저술했는데, 아르타(실리)라는 이름부터 느껴지는 이 책은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국가 경제, 장관 발탁, 전쟁, 세금 부과와 분배 방법), 심히 현실적인 내용(국민 대상 정보기관 제도 장려, 요인 암살 장려, 뇌물 장려(!)) 등으로 막스 베버에게 《군주론》이 부랄을 탁! 치고 갈 울고 갈 진정한 마키아벨리주의라는 평을 받았다.
  11.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미생물을 포함한 극단적인 불살을 추구하는 이 종교는 아사를 최고의 경지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