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아마기 카츠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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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명김활란(金活蘭)
일본명아마기 카츠란(天城活蘭, あまぎ かつらん)
출생1899년 1월 18일, 인천광역시
사망1970년 2월 10일, 서울특별시
학력이화학당 고등과 졸업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 졸업
보스턴 대학교 철학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 박사
종교개신교(감리교)
부모아버지 김진연, 어머니 박도라
형제3남 5녀(8남매) 중 여덟째

1 소개

친일반민족행위자

金活蘭. 창씨개명한 이름은 아마기 카츠란(天城活蘭). '아마키'라고 잘못 읽는 인터넷 자료가 있지만, 정확한 발음은 아마기(あまぎ)가 맞다.

김활란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설립자는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다. 1886년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1]을 설립했고, 1910년 제4대 교장 룰루 프라이가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신설했고[2], 1925년 제6대 교장 앨리스 아펜젤러[3]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했다. 1946년 제7대 교장 김활란이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다시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교육인, 언론인. 이화학당 졸업생,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교장[4]이며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5],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이지만 악질 친일매국노이기도 하다.

2 트리비아

2.1 출신

1899년 1월 18일인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월(...), 어렸을 적 이름은 '김기득'이다. 개신교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 했다. 그래서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6]

참고로 현재 개신교는 성공회 외엔 세례명을 쓰지 않지만 당시엔 감리교에서도 현지화된 세례명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당시엔 교파와 무관하게 필명이나 호처럼 세례명을 붙이는 경우가 꽤 많았다.

2.2 학력

1907년 인천 영화학당에 입학했다가, 1908년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고등과로 옮겼고,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다.

1922년 조선감리교 감독이었던 웰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에 편입해 철학, 교육학, 웅변학 등을 공부하고 1924년 6월에 졸업했다. 10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해 1925년 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1931년 10월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계몽'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덴마크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덴마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정말인'의 경제부흥론"이라는 논문을 써서 1931년 6월에 발표했다.

2.3 일제강점기 사회활동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고등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이화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계몽과 복음 전도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모임인 망월구락부가 직업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위원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7]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준비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운동과 인권운동에 힘쓴 동시에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땄는데,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이다. 이듬해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김활란의 행적은 상당히 '개념인'이었다.

1936년 이후 악질 친일파로 변절했다. '아마기 가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하고, 매일신보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엄청 많이 썼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모윤숙, 노천명 등이다.[8]

특히 전시체제에 가면 갈수록 더욱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심지어 김활란은 자신의 여제자마저 일제의 돈을 받고 정신대위안부로 팔아넘겨 성매매알선 행위를 했다.[9]

2.4 광복 이후 활동

광복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12월에는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담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은 후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47년 3월 김구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자, 강사를 맡았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우익진영이 전국 각지의 애국청년들을 건국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기관이다. 김활란 이외에도 이인, 조소앙, 김학규, 지청천, 안재홍, 신익희, 박순천, 이은상, 양주동, 정인보 등등 강사진이 대단히 화려했다. 매 기수마다 1개월 단기교육 형태로 운영되던 양성소는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해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김도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 사장을 맡았다.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과 한국여학사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1961년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해 농촌기독교전도활동을 전개했고, 대한기독교교육자협회 회장, 전국복음화운동 명예회장, 한국기독화운동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63년 8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부문상과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유언은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기독교인답게 이원론적, 영혼불멸적인 사상이 담긴 유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

모윤숙이 주도하여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다는데, 문제는 이 낙랑클럽이 겉으로는 여성들의 민간 외교단체라지만 사실상 유사 매춘 그룹이라는 지적이 많다는 것. 김활란은 기독교인이자 여성운동가의 핵심적 인물이고 더욱이 명문 여자대학교의 학장까지 하던 사람이 유사 매춘그룹의 총재를 했다는 어이없는 결론이 나오는 셈. 게다가 낙랑클럽의 여성들이 대부분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자기 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의 아름답기만 했던 영혼과 인생, 청춘을 미군의 성노리개로 넘겨주고 이승만 정권과 미군 상층부에게 돈을 받고선 외교했다고 우기는 것이니.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신대와 위안부 지원 강요로 인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라는 지옥에 희생된 제자들을 비롯한 동포 여성들에게 단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았다.

3 평가

김활란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나뉜다. 하나는 한국 여성 박사 1호로 여성계몽운동 및 인권 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와, 다른 하나는 대표적인 친일파 여성으로 큰 비난을 받는다.

이화여자대학교개신교계에서는 김활란의 친일행적에 대해 변론을 하고 있다.# 링크에서의 변론 내용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선 학생들 일부를 희생시켜야 했다라는 내용으로, 말 그대로 전체주의적 사고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13살~25살 여제자들을 성노예로 강제징집한 것이 과연 교육자의 길인가. 더구나 김활란은 자신들의 여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낸 대가로 일제가 주는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순복음교회 관련지인 월간 신앙계에선 2000년 20세기 한국 개신교 위인 20인으로 그녀를 넣었다가 엄청난 비난을 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한민국 정부 직속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양대 초대형교회인 금란교회는 김활란이 1957년 조직한 금란전도대에서 시작했으며 금란이 의 이름 중 앞뒤의 2글자를 딴 교회이다. 그리고 그 금란교회의 활약상은... 김홍도(목사) 참조. 2015년 3월 30일 아이엠피터 블로거 '개신교의 봉은사 친일사찰 비판, 자격 있나'

YWCA의 설립자라는 점에서도 인상이 좋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체야 말로 문화 규제와 탄압에 앞장서는 페미나치 집단으로 비난받고 있으니...[10]

이대생들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 있는 김활란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실상 이화여대의 흑역사 취급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대 학생들이 벌이는 시위에 의하여 김활란의 동상은 계란을 얻어맞고 페인트 테러를 당하는 등 말 그대로 흑역사로 확정되었다.

'김활란여성지도자상'도 있는데, 수상의 요지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을 위해 헌신한 여성 지도자'에게 주는 상이다. 응?

한국 역사 상 중요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적극적이고 뚜렷한 친일 행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서정주와 비슷한 위상이다. 여자 서정주 친일 지식인의 양대산맥

4 관련 문서

  1.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 세 학교 모두 이화학당이 뿌리이다.
  2. 1912~1914년에 걸쳐 이화학당을 유치원, 보통과, 중등과, 고등과, 대학과로 나누었다.
  3.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딸
  4. 초대 교장(메리 스크랜튼 부인)부터 6대 교장까지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맡았다.
  5. 정확히 말하면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종합대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할 때의 총장. 이화학당~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까지 더하면 제7대 총장이다.
  6. 참고로 '헬렌(hellen)'의 중국어 음역은 '赫楞(hèléng)'으로 본디 '혁릉'이 되어야 맞다. 활란은 한국식 한자음으로 음역한 것이다.
  7. 박헌영의 부인이자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던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
  8. 이와 반대로 친구였던 나혜석은 이걸 거부했다.
  9. 이전 버전에서 "정신대와 위안부는 차이가 있다. 정신대는 노동착취고 위안부는 성적착취이니 김활란은 위안부와 관련 없다"고 하나, 이것은 오류. 정신대도 여의치 않으면 위안부로 배치되었고 위안부 피해자들 일부도 정신대로 배치되었다가 위안부로 재배치 된 경우가 있다.
  10. 더구나 김활란은 일본 정신대 실체(일부가 위안부라는 성노예가 됨)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냈다. 이런 악덕 포주같은 사람이 여성인권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