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안정환
목차
1 경력
1.1 클럽
1.1.1 부산 대우 로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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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의 활약상. |
K리그의 중흥을 이끈 트로이카의 테리우스
마치 로베르토 바지오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인 말총머리로 대표되는 시절로, KBS 예능프로에서 밝히길 미용실 갈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 기른 머리라고 한다. 나중에 자르려니 구단에서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이미 트레이드 마크가 된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98년에 데뷔하자마자 그 해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뽑혔고, 1999년에는 14골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초로 비우승팀 MVP에 오르게 된다. 1998년에는 미드필더, 1999년에는 포워드로 뛰었는데, 이는 사샤 드라쿨리치가 부산에서 수원으로 이적한 여파로 보인다.
안정환은 리그 MVP 혹은 득점왕을 달성하면 유럽으로 진출을 추진한다는 계약을 대우 로얄즈와 맺고 있었는데, 1999년에 대우가 파산하고 구단이 현대 산업개발로 넘어가면서 구단은 부산 현대 아이콘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현대 산업개발(현산)은 K리그 최고의 스타인 안정환의 가치를 포함해서 대우 로얄즈를 인수한 것이기 때문에 안정환이 리그 MVP가 되자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안정환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은퇴를 하겠다는 초강수를 두었고, 현산은 반시즌을 더 뛰는 대신 유럽 이적을 추진하기로 합의를 본다. 이후 안정환은 2000년에 반시즌 동안 10골을 넣는 활약을 한 뒤, 해외 진출을 추진한다.
흔히 알려지기를 안정환의 해외 진출은 국책 사업의 일부였고, 대우 구단의 지원 사격에 의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고 일본에서도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는 데 그냥 개소리다. 축협 레벨에서 좋은 선수를 외국으로 내보내 선수 레벨을 올리는 시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어느 정도 레벨에 오른 곳이라면 어느 나라든 다 하고 있다. 또한 상술했듯이 안정환의 해외 진출은 구단 차원에서 반대하고 있는 일이었다. 안정환의 해외 진출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실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안정환에게 온 오퍼들이 하나같이 세리에 A,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라 리가 등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게 이를 증명한다.
처음 안정환은 라 리가의 레알 라싱 산탄데르와 계약을 추진했고 사인까지 48시간을 남겨두고 있었지만, AC 페루자 칼치오가 중간에 안정환을 낚아챈다. 이 사태를 레알 라싱은 분노하면서 부산에 항의하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결국 안정환은 페루자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 행보가 안정환의 커리어를 결정적으로 망가트리게 된다.
안정환의 팬들은 이를 많이 안타까워하는데, 대우가 도산하지 않았다면 안정환은 00 시즌을 반년 뛰지 않고 바로 해외 진출을 했을 것이고, 임대라는 불안정한 신분이 아니라 완전 이적으로 이적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축구 선수의 해외 진출을 지원 사격할 정도로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선수 계약금 외에도 5천만원을 주고 대우 라노스 광고에 안정환을 출연시킬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 안정환이 처음 레알 라싱과 페루자의 계약을 거절한 이유가 바로 임대 신분이었고, 안정환의 목표가 명문 구단 혹은 최고의 환경 같은 게 아니라 유럽의 큰 무대에서 뛴다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단이 조건만 절충하여 잘 협상한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조건(주전 보장, 유럽 어딘가의 큰 리그)을 맞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1.1.2 AC 페루자 칼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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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자 VS 유벤투스 동영상 |
안정환은 우여곡절 끝에 세리에 A에 임대 생활을 하게 된다. 임대료는 당시 돈으로 40만달러다. 안정환은 첫 경기에서 원래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첫 경기를 뛰었지만 결과는 영 아니었고, 둘째 경기는 잠깐 뛰고 끝났다. 이후 10경기 가량을 벤치만 달구게 된다. AC 페루자는 안정환이 입단하기 전에 일본의 나카타를 2년 임대로 쓴 적이 있었다. 이때 나카타의 마케팅 효과가 상당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경기날에는 일본인 수백명이 관전을 하러 왔고, 유니폼과 관련 상품도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루자의 가우치 구단장은 기행과 돈독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한국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축구 팬에도 관련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가우치 구단장은 처음 안정환을 임대할 때 그의 상품성에 주목한 걸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안정환은 현빈을 얼굴로 바르고 장동건과 원빈을 액면가로 맞먹었는데다[2] 축구도 잘 했고 MVP까지 먹었으며 구름 관중을 몰고다닌, 말그대로 당시 K리그 최고의 스타였다.[3] 더구나 한국의 경제력은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이었기 때문에, 유니폼 팔이에 딱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우 그룹의 스폰서까지 생각하면, 자기들 입장에서는 축구 변방의 아시아 촌놈 하나 데려다 임대로 쓰는 것 치고는 굉장한 이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뭐병이었다. 한국은 IMF였고, 대우 그룹은 도산한데다, 대부분의 한국 축구팬은 해외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고, 더구나 경기를 방송해주지도 않았다. 당연히 구름 관중은 커녕 한 명의 한국인도 경기를 보러 가지 않았고, 상품도 팔리지 않았다. 이걸 보고 빡친 가우치는 안정환을 쓰지 말라고 코스미 감독에게 지시를 했고, 결국 부상자로 자리가 날 때까지 안정환을 쓰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이 내용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안정환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안정환을 마케팅 보고 데리고 온 것도 맞고, 나카타를 보러 일본에서는 수백명이 오는데 한국인은 한 명도 오지 않는다고 갈군 것도 사실이고,.# 유니폼이 안 팔린다고 갈군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정환이 벤치를 달군 게 정말 가우치의 지시인지는 2016년 현재에는 출처를 찾기도 어렵고, 그저 전후 사정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정도다.
더구나 안정환은 완전히 이적을 한 게 아니라 임대를 온 상태였고, 미필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은 북한으로 혼동될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그 시대에, 인종 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당시 이탈리아에서 안정환은 인종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고, 이에 대한 에피소드도 여럿 남아있다. 또한 당시 세리에 A는 세계 제1위의 리그였고, K리그는 당연히 한참 하위 리그였다. 페루자도 중하위권 정도의 팀으로, 상위권에서 선수를 임대하거나 선수가 개판이 아닌 이상 대부분 임대 선수는 로테이션 혹은 서브로 활용된다. 안정환의 입장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코스미 감독은 "안정환은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재능을 지닌 선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기회를 많이 줄 수 없어 안타깝다."라는 립서비스를 했다.[4]
14라운드에 드디어 교체 출전한 안정환은 이후로도 계속 출전 시간을 늘려갔다. 코스미 감독은 안정환을 포워드로 쓸 생각이었지만, 안정환은 K리그에서도 미드필더였고, 2선에서 치고 올라가는 플레이를 했지 1선에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공미로 다시 돌리자 성적이 괜찮아졌고, 리그 후반에는 투톱 아래의 1 공미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4골과 1번의 어시스트, 3번의 MotM, 2번의 주간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그리고 다음 해, 안정환은 임대 신분에도 불구하고 등번호 10번을 달게 된다. 당시 등번호 10번이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팀의 에이스가 주로 다는 번호로, 안정환의 처음 등번호가 8번이었던 걸 생각하면 코스미 감독의 구상 안에 안정환이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6월, 페루자는 안정환의 완전 이적을 현대에 요청한다. 이적료 1백만 달러에 연봉 70만 달러. 선지불한 임대료 40만 달러에 세금 등을 감안하면 2백만 달러를 웃돌게 된다. 안정환도 이 요청을 환영한다. 애매한 임대 입장에서 완전 이적이 된다면 등번호도 10번을 달았겠다, 첫해 후반에는 거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기에 자신의 자리를 굳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적은 무산이 되고, 안정환은 다시 임대 신분으로 남게 된다. 결국 2년차에도 1~4라운드까지만 어정쩡하게 출장하고 한참을 벤치만 달구다가 18분, 8분, 33분, 11분, 1분 등 장난하나 생색내기 수준으로 출전을 했고, 17라운드 1분에 이후 2라운드 벤치 달구기가 충격이었는지진짜 빡쳤는지 20라운드와 21라운드에 폭풍 활약을 하여 2연속 경기 MotM에 뽑히게 된다. 하지만 그 다음 라운드 바로 귀신같이 벤치로 가고, 그 이후에도 간보기 식으로 조금씩 출장하게 되다가 결국 2002년 월드컵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페루자는 이미 안정환을 라치오로 보내기로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5] 참고로 01~02 시즌의 라치오는 6위로, 페루자는 8위였다. 2002년 월드컵에 히딩크호에 승선한 안정환은 히딩크의 주문인 활동량과 체력을 키웠고, 당시 오노 사건으로 국민 감정이 고조된 미국과의 경기에서 헤딩 동점골을 넣더니 마침내 16강에서 당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이탈리아를 골든골로 침몰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회술하길, 안정환과 주변 사람은 이 활약으로 모든 고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스쿼드는 역대 최강 수준이었고, 그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뛰는 안정환이 카테나치오를 뚫고 말디니를 상대로 헤딩을 따내 부폰에게서 골든골을 넣었으니, 당연히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크게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안정환이 골을 넣고 운 건 단순히 골든골을 넣은 게 아니라, 임대 생활과 인종 차별의 설움을 딛고 드디어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안정환은 이탈리아에서 크게 평가를 받게 된다. '배신자로.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가 16강에서 탈락하자, 가우치 구단주와 코스미 감독, 페루자는 물론이고 이탈리아가 공황에 빠진다. 당시 이탈리아가 유력한 우승 후보인 것도 문제지만, 한국의 전적 자체도 충공깽 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2002년 이전의 한국은 16강은 커녕 월드컵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팀이었다. 그런 팀이 16강에 올라와 심지어 우승 후보인 이탈리아를 이겼다. 게다가 우주 방어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뚫고 골을 넣은 건 자그만치 세리에A 중하위권 팀에서 임대 생활이나 하며 서브로 뛰는 듣보잡 아시아인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자존심이 개작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우치 구단주는 그 충격에 헤어나오질 못해 이탈리아 공영 방송에서 안정환에 대한 엄청난 인신 모독을 퍼부었고, 당장 안정환을 방출할 것이며 그러한 배신자에게 결코 급여를 지불할 생각이 없다고 거품을 물었다. 심지어 감독인 코스미조차 너무나도 충격을 먹고 안정환의 방출을 구단주에게 요구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구단에선 안정환에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마라, 오면 이탈리아 훌리건 마피아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할 정도였으며[6], 안정환이 현지 적응을 위한[7] 수단으로, 1년 연봉을 퍼부어 구입한 고급차는 이탈리아 훌리건에게 완전히 박살나고, 이탈리아에서 짐을 정리할 때도 아내가 대신 가야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안정환의 몸값이 10배[8]가 뛰었다는 소식이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의 언론지에 났고 다음날 머리가 식자 상황 판단이 선 가우치 구단주는 다시 이탈리아 공영 방송에서 이 모든 게 오해라고 말하며, KBS 9시 뉴스에까지 나오 아들과 함께 한국 언론에 직접 사과와 해명을 하고 또 안정환의 빠른 구단 복귀를 요구했다. 코스미 감독도 충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안정환은 충공깽에 빠진 상태였고, 게다가 사태를 수습하기엔 안정환의 몸은 한국에 있었다. 더구나 안정환의 에이전트인 이플레이어의 안종복이 안정환에게 이빨을 까며, 페루자는 놔두고 자기들끼리 이적을 진행하자고 말한다. 이런 사고가 가능했던 건, 안정환은 원래 페루자에 임대가 되어 있었고 임대 기간이 곧 끝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선 협상권은 계약할 때부터 페루자에 있었던 데다, 페루자는 냉정을 찾자마자 바로 거래 조약에 있는 완전 이적금을 현대에 보내 안정환을 완전 이적시켰다. 물론 현대는 이미 기간이 지났다며 생깠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씨알도 먹힐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안정환이 이 상황을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 현대와 안종복은 페루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안정환이 자기 선수라며 절대 복귀시킬 수 없다고 말했고, 안정환은 안종복만 콱 믿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훌리건의 난동 등으로 완전 충공깽에 빠진 상태라 어떻게든 이탈리아에서 탈출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페루자도 그럼 세리에A가 아니라 EPL에 이적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안종복은 이를 씹고 프리미어 리그의 블랙번과 단독으로 협상을 진행한다. 한편 페루자도 런던으로 사람을 보내 안정환과 접선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안정환을 만날 수 없었고, 빡친 가우치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여 제소에 들어간다. 또한 이적 기간이 끝나기 전에 안정환을 이적시키기 위해 볼튼과 협상을 진행한다.
결국 영국에선 같은 날에 안정환의 이적 확정 뉴스가 2개가 뜬다. 하나는 안종복이 진행한 블랙번 행이고, 또 하나는 페루자가 진행한 볼튼 행이었다. 결국 2002년 월드컵으로 EPL은 물론이고 파리 셍제르망이나 AT 마드리드 등 세계 유수 클럽의 이적 제의가 있던 안정환의 상품 신뢰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블랙번조차 페루자가 부담스러워 히딩크의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워크파밋이 안 나왔다는 말로 안정환의 이적을 무산시킨다.[9] 결국 이적 시장 데드라인이 끝나고, 안정환을 파는 데 실패한 가우치는 분노하여 FIFA에 국제 소송을 제소한다. 결국 FIFA는 일주일만에 페루자의 손을 들어주는 데, 더 가관인 건 현대와 대한축구협회는 그 일주일동안 안정환을 도와주기는 커녕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애당초 질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현대는 일본 연예인 기획사인 PM에 안정환의 소유권을 고작 150만 달러에 훌러덩 넘겨 버렸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한국돈으로 36억원의 빚을 지게 되고, 안종복은 에이전트 자격 영구 박탈만 받고 입을 쓱 닦는다. 결국 순식간에 국제 미아에 36억원의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PM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다. PM은 현대와 페루자에 추가로 돈을 더 주고 36억원의 빚을 청산한 다음 안정환의 소유권을 완전히 사서 3년동안 J리그로 임대 보낸다. 이 계약에는 시미즈로의 임대는 물론이고 광고 수익과 예능 출연 등의 수입을 모두 갖기로 한 계약이었다. PM은 이 3년을 통해 100억원의 이익을 창출했다고 한다.
안정환은 훗날 이 사건을 굉장히 후회한다고 술회하며, 페루자로 돌아갔어야 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사건은 안정환의 순진함과 임대 기간 종료의 절묘한 시간 차이, 세리에A 임대 선수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이라는 드라마와 가우치 구단주의 멘붕, 갑작스러운 몸값 상승을 두고 페루자와 현대의 이적료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 그리고 안종복의 무책임이 빚어낸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가우치 구단주는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외국에서도 가우치하면 안정환 방출 사건이 꼭 따라오게 된다.[10]
하지만 이탈리아 여론이 꼭 안정환에게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축구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만큼 역대급 스쿼드를 상대로 골을 넣은 안정환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으며, 결국 안정환은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에 학을 떼서 끝끝내 이탈리아로 가지 않았지만 안정환이 이적할 때면 늘 세리에A 명문 구단의 오퍼가 들어오게 된다.2002년 월드컵에 치를 떨면서도 의외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안정환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있다.
훗날 이탈리아의 언론과 몇몇 감독들도 상품성 때문에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방출당해 외국의 하위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가 있다.며 안정환을 언급하면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넌지시 했다.상품성 때문이 아닐텐데?
1.1.2.1 세리에 A 시절의 평가
[기록출처] Rai sport , La Gazzetta dello sport , Kataweb , Lega Calcio
- (00/01)SEASON 선발=9 교체=6 명단=25 제외=9
- 1R-선발출전 10R-명단포함 19R-명단제외 28R-선발출전
- 2R-교체출전 11R-명단제외 20R-명단제외 29R-선발출전
- 3R-명단포함 12R-명단제외 21R-명단포함 30R-선발출전
- 4R-명단제외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선발출전
- 5R-명단제외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선발출전
- 6R-명단제외 15R-선발출전 24R-명단포함 33R-교체출전
- 7R-명단제외 16R-교체출전 25R-선발출전 34R-선발출전
- 8R-명단제외 17R-명단포함 26R-명단포함
-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교체출전 =(15P/4G/1A)
- [출전경기 평점 및 기록]
- 1R -- (무) 레체[H] 5 (Rai) , 5 (Gazzetta) , 5.5 (Kataweb) = 54분
- 2R -- (패) 라치오[A] - (Rai) , - (Gazzetta) , - (Kataweb) = 18분
- 14R - (패) 브레시아[H] - (Rai) , - (Gazzetta) , - (Kataweb) = 8분
- 15R - (패) 유벤투스[H] 6 (Rai) , 6.5 (Gazzetta) , 6.5 (Kataweb) = 풀타임
- 16R - (승) 레지나[A]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26분
- 23R - (무) 나폴리[A]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22분
- 25R - (패) 볼로냐[A] 5.5 (Rai) , 6 (Gazzetta) , 5.5 (Kataweb) = 60분
- 27R - (무) 아탈란타[H] 6.5 (Rai) , 7 (Gazzetta) , 7 (Kataweb) = 48분/1G/MOM
- 28R - (승) 바리[A] 7.5 (Rai) , 7.5 (Gazzetta) , 7.5 (Kataweb) = 풀타임/1G/1A/MOM
- 29R - (승) 밀란[H] 6 (Rai) , 6.5 (Gazzetta) , 6 (Kataweb) = 70분
- 30R - (무) 우디네세[A] 7 (Rai) , 7 (Gazzetta) , 7 (Kataweb) = 81분/2G/MOM
- 31R - (무) 브레시아[H] 6 (Rai) , 6.5 (Gazzetta) , 6.5 (Kataweb) = 풀타임
- 32R - (패) 유벤투스[A] 5.5 (Rai) , 6 (Gazzetta) , 6 (Kataweb) = 풀타임
- 33R - (무) 레지나[H]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37분
- 34R - (패) 베로나[A] 6 (Rai) , 6.5 (Gazzetta) , 6 (Kataweb) = 76분
- ※ 통계 평균평점 6.230 (라이 6.076, 가제타 6.346, 카타웹 6.269합산)
- ※ 총 860분 소화, 경기 MVP 3회, 풀타임소화 4회, 시즌통계 유효슛팅률3위(43%), 시간대비 득점률 2위(1위는 셰브첸코), 28R 주간베스트11 선정, 30R 주간 베스트11 선정
- ※ 비고 (명단제외 사유)
- 11R~12R : 국가대표팀 차출 (한일전) 및 약혼식일정 때문에 방한
- 19R~20R : 국가대표팀 차출 (UAE 두바이컵 - 덴마크전)
- (01/02)SEASON 선발=4 교체=11 명단=28 제외=6
- 1R-교체출전 10R-교체출전 19R-명단포함 28R-명단포함
- 2R-선발출전 11R-명단제외 20R-교체출전 29R-명단포함
- 3R-선발출전 12R-교체출전 21R-선발출전 30R-교체출전
- 4R-교체출전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명단포함
- 5R-명단포함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명단제외
- 6R-명단포함 15R-교체출전 24R-선발출전 33R-명단제외
- 7R-명단포함 16R-명단포함 25R-명단포함 34R-명단제외
- 8R-명단제외 17R-교체출전 26R-교체출전
-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명단제외 =(15P/1G/1A)
- [출전경기 평점 및 기록]
- 1R -- (패) 인테르[A]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18분
- 2R -- (무) 라치오[H] 6 (Rai) , 6.5 (Gazzetta) , 6.5 (Kataweb) = 풀타임
- 3R -- (무) 베로나[A]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77분/1A
- 4R -- (패) 우디네세[H] - (Rai) , - (Gazzetta) , - (Kataweb) = 12분
- 10R - (패) 파르마[A]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18분
- 12R - (패) 키에보[A] - (Rai) , - (Gazzetta) , - (Kataweb) = 8분
- 14R - (승) 베네치아[H] 6 (Rai) , 6.5 (Gazzetta) , 6.5 (Kataweb) = 33분
- 15R - (패) 볼로냐[A] - (Rai) , - (Gazzetta) , - (Kataweb) = 11분
- 17R - (승) 피오렌티나[A] - (Rai) , - (Gazzetta) , - (Kataweb) = 1분
- 20R - (승) 베로나[H] 7 (Rai) , 7.5 (Gazzetta) , 7 (Kataweb) = 40분/1G/MOM
- 21R - (무) 우디네세[A] 6.5 (Rai) , 6.5 (Gazzetta) , 7 (Kataweb) = 풀타임/MOM
- 23R - (승) 레체[H] - (Rai) , - (Gazzetta) , - (Kataweb) = 15분
- 24R - (패) 로마[A] 5.5 (Rai) , 5 (Gazzetta) , 5.5 (Kataweb) = 67분
- 26R - (패) 피아첸자[A] - (Rai) , - (Gazzetta) , - (Kataweb) = 14분
- 30R - (패) 유벤투스[H] 6 (Rai) , 6 (Gazzetta) , 6 (Kataweb) = 16분
- ※ 통계 평균평점 6.210 (라이 6.120, 가제타 6.230, 카타웹 6.280합산)
- ※ 총 511분 소화, 경기 MVP 2회, 풀타임소화 2회, 20R 주간 베스트11 선정, 20R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선정(RAI UNO), 20R 월간 베스트골 3위기록(1월), 평균평점 용병 150명중 9위기록(용병랭킹)
- ※ 비고 (명단제외 사유)
- 11R : 국가대표팀 차출 (세네갈 평가전, 크로아티아 평가전)
- 27R~29R : 국가대표팀 스페인전지훈련 합류 (튀니지 평가전, 핀란드 평가전)
- 31R~34R : 월드컵대표팀 독일전지훈련 합류 (코스타리카 평가전, 스코틀랜드 평가전, 잉글랜드 평가전)
이탈리아웹 평점
00/01 시즌 : 5 - - 6.5 6 6 5.5 7 7.5 6.5 7 6.5 6 6
01/02 시즌 : 6 6 6 - 6 - 6 - - 7 6.5 - 5.5 6
- ※ 출장했던 30경기중 포워드로 올라가서 뛴 경기는 단 6경기, 나머지 경기는 모두 투톱 밑에서 중앙 공미로 뛰었다.
축구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게 안정환의 세리에 A 성적과 실력이다.
안정환이 대한민국 축구계의 레전드인 건 사실이지만, 2002년의 골든골 이후 커리어가 내리막을 치달았기 때문에 이를 두고 거품이다 VS 그냥 재수가 X라 없는 거다라는 의견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과연 안정환이 세리에 A에서 잘했는가, 못했는가.
성적이 좋았는가, 나빴는가.
이 두 부분을 놓고 간단히 말하면
1. 잘했다.
2. 성적은 보통이다.
안정환의 성적은 00/01시즌 4골 1어시, 01/02시즌 1골 1어시다.
굉장히 초라해보이는 성적이다. 그런데 잘했다?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선 안정환의 성적을 논하기 전에 고려할 점이 있다.
첫째, 안정환은 세리에A에서 공격수가 아니었다. 안정환의 포지션은 3-4-1-2의 1에 해당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혹은 3-5-2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플레이했다. 안정환이 세리에 A에서 뛴 경기는 총 30경기로, 이중에 6경기만 포워드로 뛰고 나머지 24경기는 공미로 뛰었다. 이 위치는 소위 말하는 플레이메이커 혹은 찬스메이커의 자리다. 즉, 골을 넣는 게 안정환의 역할이 아니었다.
둘째, 안정환의 평균 평점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안정환은 00/01 시즌과 01/02 시즌에서 모두 평균 6점대의 평점을 기록했는데, 세리에A에서 평균 6점대의 선수는 상위 25%에 해당한다. 또한 01/02 시즌의 안정환의 평균 평점은 150명의 용병 중의 9위였다. 또한 안정환은 골을 넣지 않고도 경기에서 MOM을 받은 적이 있이 있는데, 높은 평균 평점과 기록은 안정환이 골 외적으로 경기에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려준다.
셋째, 00/01 시즌에 페루자에서 가장 골을 많이 넣은 선수가 Z. 브리자스다. 그런데 Z. 브리자스는 36경기를 뛰었고 2번 교체를 뛰었으며 총 9골을 넣었다. 안정환? 안정환은 15경기를 뛰었는데 이중에 6번이 교체였고 30분도 못 뛴 경기가 4번인데 4골을 넣었다. 그 해 시간대비 득점률이 리그 2위였는데, 단순히 수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격수로 봐도 Z. 브리자스에게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넷째, 안정환이 출전을 제대로 못한 것은 주전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잘 모르는 소리다. 00/01 시즌에 안정환은 3~13라운드까지 출전을 못했는데 이는 2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안정환의 상품성이 생각보다 너무 낮았고(페루자는 영세 구단이다. 유망주 팔아 운영하는 구단이라 스폰서없는 선수, 중계권 안 나오는 선수, 유니폼 안 팔리는 선수, 비싸게 안 팔릴 선수는 안 쓴다) 2. 안정환의 축구 개념이 이탈리아 수준보다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안정환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 자기가 한 게 축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K리그에서는 본인(미드필더)이 공격수에게 공을 주면 공격수가 알아서 골을 넣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전원이 함께 움직인다고. 토탈 사커라는 게 K리그엔 아예 없다고. 그러면서 이탈리아 시절 초기에 구단 스태프가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안정환이 출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주면서 계속 교육을 시켰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후반기에 완전히 주전 자리를 잡았고 01/02 시즌에는 팀 에이스 번호인 10번을 받는다.
다섯째, 그럼 01/02 시즌은 왜 출전을 못 했는가? 간단하다. 페루자는 안정환의 완전 이적을 현산에 요청했다. 하지만 현산은 영세 구단인 페루자가 제시하는 가격에 안정환을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플레이어의 안종복은 에이전트로써의 실력이 영 아니올씨다였다. 그는 과거에 유상철 해외 진출을 말아먹은 전적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별로였다. 여하튼 결국 안정환은 6개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면서 페루자에 계속 임대하게 된다. 생각해보자. 6개월 단위로 임대되는 선수를 누가 주전으로 쓰겠는가? 그냥 땜빵으로 쓰는 거다. 실제로 안정환은 20~21라운드를 연속으로 MOM을 받았지만 22라운드는 출전하지도 못했고 23라운드에는 고작 15분 뛰었다. 무슨 경쟁자가 메시급도 아니고 안정환이 팀의 10번이고 그 선수가 2경기 연속 MOM을 받았는데 다음 경기를 내보내지 않고 그 다음 경기를 15분 내보내는 게 과연 실력의 문제일까?
여섯째, 안정환은 월드컵이 시작하기 2주 전에 이미 라치오로 이적할 가계약이 된 상태였다. 참고로 라치오는 세리에 칠공주의 일원이고, 라치오 몰락이라 불리는 01/02 시즌에도 중상위권은 찍은 팀이었다. 쉽게 말해 안정환의 이적은 사우스 햄튼에서 토트넘이나 아스날로 이적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안까의 주장에 따르면 이 이적은 2년 동안 30경기 고작 1400분 남짓 풀타임 6경기에 겨우 5골 2어시한, 중하위권 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난 군 미필 동양인 공격수를 상위권팀에서 영입하는 미친 짓이라는 소리다. 애당초 안정환이 공격수가 아니라는 점에서부터 에러고, 음식 적응을 못해 강제 다이어트하던 시절이라는 걸 보면 더 웃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안정환은 분명 리그 레벨에서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기회를 줬는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도 아니고, 기회가 왔는데 잡지 못한 것도 아니다. 기록을 보면 안정환은 기회 자체가 적었을 뿐더러 기회가 올 때마다 두각을 드러냈고, 기록상으로만 봐도 필드에서 뛸 때는 주전 ~ 에이스급 실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기량 역시 세계 최고 리그인 세리에 A의 중위권 팀의 사무 국장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구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때문에 안정환은 페루자 이외에도 세리에 A에 갈 팀이 있었고, 그 팀도 세리에 칠공주인 우디네세, 라치오 등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알아주는 구단이었다.본인이 이탈리아 죽어도 싫다고 그래서 그렇지
하지만 결국 페루자에서 중용되는 일 없이 라치오로 이적 가계약이 된 상태에서 월드컵을 맞이하고, 16강에서 골든골을 넣은 뒤, 안정환의 커리어는 멸망했다.
1.1.3 J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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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에서 패소하고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결국 돈의 흐름에 따라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한 J리그의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한다.[11] 이 당시 일의 대해 안정환은 훗날인 2012년 은퇴 기자회견에서 블랙번 로버스와 계약을 체결했지만, 소유권 문제로 워크퍼밋이 발급되지 않았고, 그 때 체결한 계약서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는 그 때 블랙번으로 이적했다면, 자신의 축구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계약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거니 재능이나 축구 인생이야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라고만 보기에는 구단주의 병크가 너무 심각했다. 더군다나 이미 현지에 있던 집에 폭도들이 난입해서 물건들을 부수며 난리를 치고 가족살해 협박까지 하는데 누가 페루자로 돌아가고 싶어했겠는가?"란 측의 의견도 있고, "구단주의 병크가 심각한 거야 심각한 거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안정환의 이적 당사자인 페루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블랙번으로 가야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다른 데 가면 될 일이지, 굳이 본인이 가고 싶은 블랙번을 택한 건 안정환이다. 자업자득이라고까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안정환만 구단주의 강짜에 억울하게 희생된 재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하는 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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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고, 팀은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한 뒤, J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라와 레즈를 꺾고 2003년 우승에 이어서 2연패를 달성한다. 이 때 안정환은 25경기 출전, 12골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J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요코하마 F. 마리노스는 안정환이 우승을 이끈 2004년 이후, 현재까지도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1.1.4 유럽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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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이적료를 모두 갚은 후 계약이 끝난 2005년 여름에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 프랑스 르샹피오나의 FC 메스로 이적하였으나 안습한 팀 전력으로 인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이때 메츠의 경기를 보면 9-0-1 포메이션이 뭔지 알 수 있다. 박주영의 AS 모나코 FC가 커피라면 메츠는 TOP야.
참고로 당시 메츠가 얼마나 막장이었냐하면, 16라운드 시점에서 1승 6무 9패(....)로 리그 19위였다. 그 시점에서 안정환은 6번 선발 출장에 3번 교체 출전을 했고, 1골만 넣은 상태였다. 프랑스 축구 전문지조차 팀이 막장이고 출장 시간도 적으니, 빨리 팀을 나가 반 시즌이라도 임대하려는 팀에 이적하는 게 훨씬 낫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특히 안정환의 플레이 성향 상, 팀의 전력이 막장이면 같이 막장이 되는(...)[12][13] 걸 보면 진즉에 떠나는 게 맞긴 맞았다.
메츠에서의 계약은 1년이었는데, 원래 구단은 2년짜리 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안정환은 1년 계약을 원했는데, 프랑스에 계약한 것 자체가 독일 월드컵 문제로 현지 적응을 미리 꾀했기 때문이다. 1년 계약이 끝나면 영국으로 갈 생각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왜 그렇게 영국을 좋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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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초, 독일 분데스리가의 MSV 뒤스부르크로 이적하나 몸상태가 워낙 좋지 못해 출전을 많이 하지 못하였다. 10년 뒤 마리텔에서 밝힌 바로는 안정환 자신은 분데스리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적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인 핌 베어벡이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니 독일에서 현지적응을 하고 있으면 월드컵 엔트리에 뽑아 주겠다는 얘기를 했고, 안정환이 수락해서 이적한 것이라고 한다.
이걸 보면 안정환은 월드컵 출전에 목을 걸었던 걸 알 수 있는데, 메츠로 이적한 것부터 시작해서 뒤스부르크에 가기까지의 2년을 전부 독일 월드컵을 고려해서 이적하였다. 상식적으로 본인에게 안 맞는 리그인 분데스리가를 월드컵 보내준다는 이유로 간 것이 단순히 생각하기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안정환에게 있어서 국대는 클럽보다 훨씬 중요했던 걸로 보인다. 마리텔에서도 안정환은 나라를 위해서 뛰었다라는 말을 자주하고, 일본에서도 안정환이 애국심이 굉장히 강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치 평가 기준이 국대에 맞춰 있을 정도다.
당시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적인 문제가 심각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안정환은 이제 국가대표에서도 풀타임 못뛴다, 후반기 조커다 등의 운운을 했고 실제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안정환을 한 방을 노리는 공격수로 썼고, 2010년 월드컵때는 더욱 더 심해져서 허정무 감독이 안정환은 중~후반 20분 정도 남겨놓을때나 쓸 수 있다고 언급할 정도.
하지만 세간의 시선과는 다르게 2006 FIFA월드컵에서는 토고전에 후반 역전 중거리 슛을 넣는 등[14]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에이전트사의 미숙한 일처리로 인해 6개월동안 무적신세가 되었고, 이후 블랙 번이나 여러 구단의 오퍼가 있었는데, 나이가 30줄이 되고 기량도 하락하면서 유럽 생활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과의 생활을 더 중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며 2007년 K리그로 복귀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했다.
안정환은 프랑스 리그1에서 2005년 7월 29일 첫 경기부터 2006년 1월 29일까지 총 24경기에서 17경기 출장했고, 10번 선발 출장했으며 5번 풀타임으로 뛰고, 골은 PSG와의 경기에서 1골, FC 소쇼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출전 시간은 총 1007분.
분데스리가에서는 2006년 1월 28일 첫 경기부터 2006년 5월 13일의 마지막까지 총 15경기에서 12경기 출장했고, 3번 선발 출장에 1번 풀타임으로 뛰고, 1번 풀 타임을 뛰었으며 총 420분을 뛰었다. 기록은 2골 1도움으로,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1도움, 베르더 브레멘과 빌레펠트와의 경기에서 각각 1골을 넣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주전으로 뛰지 못했다는 얘기와 달리, 사실 리그1와 분데스리가에서 뛴 시간 자체가 길지 않았다. 다만 부상 등의 문제로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사실이라, 풀 타임으로 뛴 시간이 적은 건 맞다. 위의 기록에서 프랑스 리그1과 분데스리가의 시간이 겹치는 2006년 1월 28일에 이미 안정환은 분데스리가에서 첫 번째 경기에 나갔고, 2006년 1월 29일의 프랑스 리그1 마지막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1.5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 삼성 블루윙즈 입단 초기에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부활의 기미가 보였으나, 노쇠한 기미를 드러내며 주춤했다. 2군에서 연습경기를 하던 도중 FC 서울 서포터에게 가족에 대한 인신공격을[15] 당한 후, 경기장을 빠져나와서 항의를 하다가 퇴장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 1천만원 징계를 받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안정환을 깠지만, 사정을 다 안 팬들은 그 FC 서울 서포터들을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깠다고... 그런데 FC 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들은 안정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16] 특히,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수호신의 간부로 활동한 적이 있어 반응이 더 안 좋아졌다.
이로 인해 전국의 수많은 안느빠들을 적으로 돌리게 됨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연고이전으로 욕을 먹는 FC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은 덩달아 전국의 서포터들에게 그야말로 쌍욕을 쳐먹게 되었다. 또한, 수원의 서포터 그랑블루를 포함한 다른 팀의 서포터들도 "북패서포터 주제에 감히 한국축구의 영웅인 안정환을 까다니!"라고 말하며 공공의 적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수원의 서포터인 그랑블루는 안정환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문에 안정환을 응원하는 광고를 냈다. 참고로, SBS 뉴스도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안정환이 욕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안정환의 항의를 '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안정환은 해당 건을 부인에게는 경기 중의 시비문제로 벌금을 받은 것처럼 이야기했고,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사실,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에도 안정환이 좀 더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 훈련을 무단이탈하고 벌금징계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FC 서울의 클럽송을 제작한 바 있는 가수 신해철은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북패라는 신랄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강하게 비판했고, 인연이 있어서 서울을 응원했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응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 정도로 축구계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파장이 심대했던 사건이었다.
수원에서 기록한 성적은 25경기 5골. 수원이 안정환에게 몸값으로 지불한 액수가 10억 가량으로 추정되는 만큼 기대이하의 성적이었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안정환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침 2008년 부산 아이파크에 황선홍 감독이 부임하면서 안정환에게 친정팀 복귀를 권유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몸값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했다. 부산은 최대 4억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안정환 측은 10억을 요구하면서 다시 해외진출설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안정환은 6억, 계약기간 1년에 친정팀 부산으로 이적을 하게 된다.
1.1.6 부산 아이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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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에서는 경기력이 매우 좋아졌으며 주로 4-2-3-1 포메이션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이 때 부산의 골 결정력은 안습 그 자체였는데, 안정환이 찔러준 킬패스로 인한 골키퍼 1:1 찬스를 잘 살렸으면 안정환이 08년 K리그 도움왕이 됐을 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팀 상황이 좋지도 않은데 더럽게 공 끌고 접어댄다는 의견도 있었다. 후반기에 팀 전력 보강이 됐을 때에는 연이은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부산은 10년전 리즈로얄즈 왕조 시절의 팀이 아니었다. 계약이 끝난 2009년 안정환과 재계약을 천명했으나 부산이 연봉으로 제시한 2억5천을 거부하면서 수차례 협상이 모두 결렬되었다. 이 액수를 놓고 넷상에서도 말이 많았다. 안정환 네임밸류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낮다는 측과 부산 살림살이에 저정도면 최고 대접이란 측이 팽팽히 맞섰다.[17]
이때 안정환은 좀 미묘한 상태였는데, 수원에서 부산으로 이적할 때는 이적료가 발생했다. 때문에 부산은 안정환을 데려오기 위해 수원에 안영학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해야했다. 반면 부산에서는 FA신분을 획득했기 때문에 자칫 부산은 호구다른 팀 좋은 일만 하고 끝날 가능성이 다분했는데...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안정환은 팀을 이탈하고 중국 슈퍼 리그, 일본 J리그, 중동클럽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 안정환은 J리그의 오퍼를 거절하고 중국 다롄스더로 이적한다.
1.1.7 다롄 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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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시즌 다롄 스더에서 3개월 단기 계약으로 활약하다가 계약을 연장하여 2009년도 시즌을 끝낸상태. 2010년 말까지 계약을 연장하게 된다. 활약은 절정의 회춘모드로, 현지에서 별명이 다롄의 왕(大連的王). 09 시즌 단기 계약에는 6골 2도움이라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2010 시즌에는 2009시즌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미드필더로 활약 하면서도 두자리수 골 기록인 10골 4도움을 갱신하며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다. 이런 활약 속에 다롄은 시즌 3위까지 올라가서 아시안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기대해볼만했으나 안정환이 상대 수비의 태클로 무릎에 부상을 입어 이후 경기들을 쉬었는데 다롄이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리그 6위로 마무리해야했다. 거기다가 리그 최고 용병 1위에 선정되는 포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2010년, 다롄과의 계약이 만료된 상태로 다롄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있으며 재계약 K리그 복귀 혹은 스페인 진출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다롄과 재계약했다.
무엇보다 안정환 본인이 마음 편히[18] 축구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한 듯 싶다. 이때 안여돼쉬밍 구단주도 안정환을 좋아해서 안정환을 위한 최고급 저택까지 제공했을정도.
2012년 1월 19일, 성남 일화 천마의 유니폼 발표회때 신태용 감독이 2002년의 무직인 국가대표 삼인방(안정환, 김남일, 송종국) 중 한명을 영입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한 명이 안정환으로 밝혀졌다. 이 발언 이전에도 안정환 영입과 관련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듯. 그러나 성남 이적이 좌절된 신태용 감독은 아쉬워하면서, 나랑 밥 먹을 때는 100% 올 것처럼 말하더니 은퇴했다고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1월 26일, 안정환의 에이전트사에서 안정환의 은퇴 결정을 발표하면서 팬들의 기대는 안타까운 마무리를 지었다. 1월 31일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축구의 한 역사를 그린 공격수의[19] 여정은 13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1.1.8 클럽 통산 기록
시즌 | 소속 구단 | 소속 리그 | 경기 | 득점 |
1998 | 부산 대우 로얄즈 | K리그 | 33 | 13 |
1999 | 35 | 21 | ||
2000 | 20 | 10 | ||
2000 ~ 2001 | AC 페루자 칼치오 | 세리에 A | 16 | 4 |
2001 ~ 2002 | 17 | 1 | ||
2002 | 시미즈 에스펄스 | J1리그 | 15 | 7 |
2003 | 39 | 19 | ||
2004 |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31 | 14 | |
2005 | 15 | 7 | ||
2005 ~ 2006 | FC 메츠 | 리그앙 | 16 | 2 |
MSV 뒤스부르크 | 분데스리가 | 12 | 2 | |
2006 ~ 2007 | 2. 분데스리가 | 0 | 0 | |
2007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 26 | 5 |
2008 | 부산 아이파크 | 28 | 6 | |
2009 | 다롄 스더 | 중국 슈퍼 리그 | 26 | 6 |
2010 | 24 | 10 | ||
2011 | 15 | 2 | ||
통산 | 365 | 131 |
1.2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새긴 판타지스타 |
2002 FIFA 월드컵 한국 / 일본 - 16강전 : 대한민국 vs 이탈리아 연장 후반 12분 (117분) 골든골(역전골) 득점 장면. 2002년 6월 18일 화요일 22시 50분 ~ 23시 경, 대전 월드컵 경기장. |
1997년에 있었던 중국과의 A매치에서 21세의 나이로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되며 데뷔전을 치뤘고 1999년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첫 A매치 득점을 성공했다. 2001년에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을 때 각종 밀고 당기기와 길들이기를 거쳐서 대표팀에 승선했다. 히딩크가 자서전에 언급한 바로는 자존심을 건드리면 반응하는게 꼭 호마리우와 비슷하다고. 또한 히딩크는 당시 안정환을 스타 의식에 젖은 선수로 판단하여 처음에는 일부러 외면했다고 한다.[20]
2002 FIFA 한일 월드컵 직전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날카로운 중거리 슛과 1대1 상황에서 감각적인 칩샷으로 2득점을 하면서 한국의 4-1 대승을 이끌었다. 동영상 이 때,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손꼽혔던 윤정환 前 사간 토스 감독 (現 울산 현대 감독)과의 콤비플레이는 일명 "투정환 전술"이라고 불리면서 지금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2002 FIFA 한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
2002 FIFA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는 후반에 황선홍과 교체돼서 들어가서 크루이프 턴으로 수비수를 따돌리며 슛을 하고 두번의 묵직한 슛을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예지 두덱이 가까스로 막아내는 등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별리그 2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헤딩으로 동점골을 득점하며 국민 영웅이 되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포르투갈전에선 선발로는 처음으로 나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 역습상황에서의 1대1 찬스를 넣지 못했다는게 다소 아쉬웠지만 상관없이 한국은 1-0으로 승리,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는 골든골을 성공 시켰다.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를 바꾼 골이자 FIFA 월드컵의 이변으로서 거의 반드시 꼽히기도 하며 안정환 커리어에서 가장 역사적인 골이기도 하다. 전반전에 힘들게 얻어낸 페널티 킥을 실축했지만, (강하고 낮게 잘 차긴 했지만 이 당시 부폰이 잘 막았을 뿐이였다.)[21] 후반 종료 직전 극적인 골든골을 득점하며 한국의 최초 월드컵 8강 진출을 견인했다. 준준결승전(8강전)인 스페인전에서도 선발로 나와서 풀타임+연장전까지 소화했다. 승부차기에서는 네번째 킥커로 나와서 골을 성공시켰다. 16강 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중앙을 노려서 넣었는데[22], 꽤 대단한 담력이라고 할수 있다. 준결승전(4강전)인 독일전에선 후반 교체로 들어가서 독일 수비진을 괴롭혔지만 팀은 안타깝게 패배, 결승진출에 실패한다. 3, 4위 결정전이었던 터키전에서는 선발로 나와서 득점까지 했으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이였고 현재 오프사이드 룰 기준이였다면 인정되었을 골이였다![23] 경기 내내 중거리슛을 여러번 날리며 공격진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으나 뤼슈튀 레츠베르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 덕분에 골을 넣는데는 실패하고 팀은 3-2로 패배, 4위로 만족해야 했다.
2003년 5월 한일전 원정에서 결승골을 넣은 후 세레머니를 하는 장면. 한달 전 홈에서 일본을 상대로 1-0으로 패배한 우리 대표팀은 안정환의 이 골에 힘입어 원정에서 1-0으로 이기며 복수에 성공했다.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조별리그 2차전과 3차전인 UAE와 쿠웨이트전에서 각각 한 골씩을 넣었다. 여담으로 안정환이 뛴 아시안컵은 이 대회가 유일했는데, 국대 커리어 내내 여러모의 사정으로 아시안컵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24].
여담으로 나이키가 2004-2005 시즌 때 선보였던 일명 '로또' 유니폼 탓에 이런 사진도 찍혔다. 19금
2006 FIFA 독일 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 토고전에서 역전 중거리슛 결승골을 득점하며 첫 원정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다. 동영상 이어 조별예선 2차전 프랑스전에서는 후반 교체로 나와서 경기 내내 밀리던 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히딩크 감독의 평가대로 그야말로 5단 기어 같은 활약.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도 사실 중원에서 안정환의 감각적인 원터치 윙패스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박지성과 함께 월드컵 통산 3골로 대한민국 역대 국가대표 선수들 중 가장 득점을 많이 한 선수.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최종 명단에 선발되기도 했으나, 허정무 감독의 판단에 의해서[25][26]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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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9일에 있었던 쿠웨이트전에서 국가대표로서 은퇴식을 가졌다. 한편 우리 대표팀은 쿠웨이트를 상대로 2-0으로 승리를 거뒀다.
2 플레이 스타일
양발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몇 안되는 선수이며,[27] 플레이 스타일은 전형적인 트레콰르티스타[28]이고 플레이 특성상 공격형 미드필더나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다. 그러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거치며 많은 이들에게 원톱형 스트라이커로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때는 공격진에 사람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정상급 팀의 수비 앞에서 공격을 잘 이끌어나가는 등 절정의 경기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공 소유가 많이 필요한 탓에 팀컬러를 맞추기 어렵기도 하고 안되는 날은 공을 오래 끌면서 곱게 종이를 접다 팀 전체를 나락에 떨구는 등 단점도 있다.[29] 그렇게 대단한 피지컬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크루이프 턴과 백숏을 조합하여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킨 안느턴이 유명한 개인기이며[30] 골을 넣은 후 결혼 반지가 있는 위치에 키스[31]하는 세레모니가 유명하다. 국가대표팀에서 극적인 골을 많이 넣고,[32] 투입 직후 경기 흐름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33] 대표팀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던 선수였고 명실상부한 2002년 월드컵 에이스였다.[34]
드리블 뿐만 아니라 슛도 강하고 좋았다. 유효슈팅 비중이 높았고 대부분 낮고 강하게 깔렸다. 틈만 나면 박스 밖에서도 중거리슛을 자주 때렸다.[35] 2000년 한일전 원정에서 넣은 중거리 선제골, 2002년 스코틀랜드전에서 그의 첫골[36],이나 2006년 월드컵 토고전에서 중거리슛 역전골[37]등이 그 예이다. 특히 측면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는 매크로 플레이에 이어서 아크 좌우에서 때리는 슈팅의 성공률은 상당히 높았다. 특이사항으로는 데드볼 상태에서도 슛을 감아찬 경우가 적고 회전이 없는 슛을 선호했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백숏 또한 상당히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특히 박스 내에서 슈팅을 날리는 척 헛다리를 짚고 그대로 백숏을 해서 수비수를 제치고 바로 때리는 슛이 일품이었다.(상술한 스코틀랜드전 첫골) 또한 칩샷의 달인이었으며 이 칩샷으로 멋지고 우아한 슈팅으로 골키퍼와의 1대1 상황에서 깔끔한 골을 넣곤 했다.(스코틀랜드전 두번째 골[38]) 레알 아시아의 델피에로
원래 헤딩을 기피하던 스타일이였지만 이탈리아 진출 후 헤딩 기술과 과감함이 많이 늘었다. 페루자 시절부터 헤딩골도 자주 넣기 시작했고 2004년 오만과의 친선전에서는 다이빙 헤딩 골까지 선보였을 정도로 진화했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팬들에게는 2002년 월드컵 미국전 헤딩 동점골과 아마 한국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골인 이탈리아전 연장전 역전 헤딩 골든골이 가장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종이접기 하느라 패스를 잘 안했다는 세간의 인식이 있는데 이는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한정된 부분으로, 공격전개시에는 이런 인식과 달리 공격형 미드필더/섀도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 뛰던 선수 답게 패스도 수준급이며 시야도 넓었다. 중앙에서 자신의 볼 소유로 수비를 끌어들이고 측면으로 공간을 열어주는 윙패스는 일품이었고 패스 성공률 또한 매우 높았다. 또한 크로스도 잘 올렸는데, 1999년의 멕시코전에 윙포워드로 뛴 안정환은 숏 패스 뿐만이 아니라 크로스도 상당히 정밀하고 날카롭게 올리는 걸 볼 수 있다. K리그로 턴한 부산 아이파크 시절에 패스하는 걸 보면 원터치 패스부터 스루 패스까지 끝내주는 정확도를 보여준다.[39]
그리고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튼튼하고 강력하다 못해 거친 멘탈을 가지고 있으며 승부욕도 아주 강하다. 2002 월드컵 3-4위전 터키전이 끝나고 다른 선수들은 모두 터키선수들과 같이 어울려서 관중들께 인사하고 세리머니하고 있을때 혼자 라커룸으로 들어가서 패배의 아쉬움에 씩씩댔다고 한다. 중국에 진출해서도 곱상한 얼굴을 보고 텃세를 부리겠다고 중국 수비수들이 거칠게 태클을 하거나 트래쉬 토크를 하자 문자 그대로 밟아(...)버렸으며 퇴장돼서 나가면서 벤치의 옆유리를 걷어차서 박살내버렸다. 그 이후로 중국수비수들은 물론 팀원들도 대하는게 달라졌다고... 이런 일화들은 당연히 안정환이 성격이 더럽다는 게 아니고 성숙한 멘탈을 가졌지만 의외로 그라운드 위에선 한 성깔 한다(...)는 뜻이다. 보면 알겠지만 충분히 먼치킨이다(...)
현재 남아있는 영상들을 보면 아주대, 대우 로얄즈, 페루자 시절인 20대 초중반까지는 치달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영상을 보면 K리그 시절에는 주력으로 포팅 지역까지 뚫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며, 페루자 시절에도 치달을 하는 영상이 있고, K리그 시절에는 빠른 발이라고 평가 받았다.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80831/1p9e8v02.html 하지만 2002년 이후에는 치달하는 모습이 확 줄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주력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보인다.체력도 안 따라주고
원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공격력과 패스 능력에 모두 뛰어났지만, K리그에서 득점왕 경합을 하고, 한국 스트라이커 계보에 언급될 정도로 공격력이 준수했고 제공력도 좋았기에 포워드로 종종 기용되었다. 하지만 이동국 같은 정통 스트라이커는 아니었고, 골잡이 스타일도 아닌 데다가 피지컬도 좋은 편이 아닌데다 몸싸움도 싫어했다. 수비들과 몸싸움에 들어가면 밀려나는 경우도 잦았다. 남아있는 영상 기록을 보면 몸싸움을 패스와 테크닉으로 회피하고, 2선에서 주력으로 치고 들어가 동료에게 패스를 주는 타입이고, 골문 앞에서는 돌파하기보다는 L자형으로 이동해서 수비를 돌아가거나, 패스를 주고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가거나, 틈만 나면 중거리 슛을 쏘는 등 몸싸움을 가급적 피하고, 몸싸움에 들어가면 수비수에게 많이 밀리는 등 피지컬에서 딸리는 게 명확히 보인다.[40]
이처럼 포워드에서 뛰기보다는, 좋은 포워드가 받쳐주는 상황에서의 세컨드나 공미, 아니면 윙어로 기용되었을 때 좋은 플레이가 많이 나왔는 데, 준수한 공격력[41]이 오히려 독이 된 건지 가는 클럽마다 포워드로 기용될 때가 많았다. 그리고 팀의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원톱으로 뛸 때는 대략 시망(...)인 경우가 종종 나왔다. 크랙 경향은 강했지만 혼자 해먹을 수 있는 타입은 아니고, 같이 보조를 맞출 플레이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위권 클럽을 가면 죽을 썼고, 좋은 선수가 갖춰진 국대에서는 강한 팀을 상대로도 빛을 발했다. 말년에 다롄 스더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건, 환경 문제와 심적 문제도 있지만 다롄 스더의 전력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합하면 포워드에게 공을 수급하면서 필요하면 골을 넣을 수 있는 결정력을 지닌 9.5번의 선수로, 9번에 필적할 공격력이 있고 수비수를 따돌릴 테크닉도 있었으며 10번을 할 패스 능력마저 있었고, 뛰어난 감각으로 골을 만들어내는 재주도 있었지만 9번을 할 만한 피지컬은 없고, 중원에서 활동하기에는 수비력이 떨어지는 선수였다. 필연적으로 좋은 센터 포워드, 좋은 팀원과 보조를 맞춰야 했지만, 이탈리아 방출 사건 이후 클럽 경력이 완전히 꼬여 좋은 팀을 만나지 못했다.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건 주로 전력이 충실한 팀에 속해서 제 플레이를 할 수 있거나, 강한 팀과 상대해 크랙 기질을 발휘할 때였다. 좋은 조언자가 옆에 있어 결정적인 실수만 피할 수 있었다면, 더 높은 곳에 갈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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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담으로 온갖 패러디와 약빤듯한 개드립으로 가득 찬 와싯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내용으로 구성된 편이다.
- ↑ 영국에서 뽑은 월드컵 미남 축구 선수 3위였다. 1위는 베컴, 2위는 피구. 호주에서는 4위로 뽑혔다. [2]
- ↑ 황선홍, 홍명보, 유상철 등은 J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 ↑ 이동국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동국의 독일 진출도 비슷한 난항을 겪으며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동국은 부상을 회복하면서 6개월 임대됐을 뿐이라 팀에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고 안정환과 달리 독일 선수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다가 그냥 돌아오게 된다.
- ↑ 2연속 MotM을 받고도 출전 시간이 줄어든 건 이와 연관이 없진 않을 것이다.
- ↑ 이게 단순한 협박인지 진지한 충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안정환은 구단에서 직접 온 얘기였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걸로 보인다.
- ↑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의 한국의 인지도는 진짜 듣보잡이라 한국 영상이 나올 때는 북한 영상이 대신 나올 정도였다. 안정환이 때빼고 광을 내는 데 돈을 많이 쓴 건, 비슷한 급으로 놀아야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정환은 동료들이 패스를 안 하고 인종 차별을 하는 등 적응기에는 마음 고생이 굉장히 심했다고 말한다.
- ↑ 안정환이 처음 페루자에 임대올 때 40만달러였고, 한 시즌을 뛰고 완전 이적에 이적료 100만 달러와 연봉 70만 달러 제안이, 그리고 다시 한 시즌이 지나려는 2002년에 블랙번과 350만 계약을 맺고 FIFA의 벌금이 400만 달러였으니 안정환은 정말 2년 만에 몸값을 10배는 불린 게 된다.
- ↑ 안정환의 소속이 불분명해서 영국 노동청이 워크파밋 발행을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2013년에 안정환이 김현회와의 칼럼에서 말하길 진짜 이적 실패 이유는 블랙번이 페루자의 행보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 해외 일간지에서도 한국 축구 영웅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고 해고 당해(sacked, perugia as korea's goal hero as italy blames fifa conspiracy for shock exit)라는 문구가 1면에 실렸다. 안정환의 골든골도 해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월드컵 20대 충격골(20 Goals That Shook the World)에 나온다.
- ↑ 정확하게는 PM이란 연예기획사에서 소유권을 구입해서 시미즈에 임대 형식으로 보낸 것. 이적 후 빚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외향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PM과의 계약 때문에 일본 쇼프로에도 자주 출연했다. 물론 빚을 다 갚고는 안 나갔지만.
- ↑ 안정환은 골 욕심이 굉장히 많지만, 2선에서는 킬 패스를 정확하게 쭉쭉 뿌려줄 정도로 원터치 숏 패스 기술이 뛰어나다. 또 페널티 킥 에리어 쪽에서는 자신이 해결해려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고 또 중거리슛이 특기라 슈팅 범위가 굉장히 넓지만, 무조건 쏘고 보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동료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 킬 패스와 크로스를 날린다. 여기에 피지컬도 안 좋아, 테크닉으로 수비수 2~3명은 벗겨내도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지는 못한다. 좋은 공격력은 위치 선정 + 테크닉 + 슈팅 기술에서 나오는 거라 자신의 킬 패스나 크로스를 받아줄 동료나 자신의 침투를 도와줄 동료가 없으면 팀과 같이 나락으로 추락한다(...)
- ↑ 사실 팀의 전력이 막장인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건 골키퍼밖에 없다(...) 박지성조차 QPR로 가니 순식간에 개먹튀로 전락하는 게 축구다.
- ↑ 이 골로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득점자가 된다. 2010년 박지성이 타이를 이룸
- ↑ 일명 권오크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친과 부인, 특히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이었다.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은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아니라 술먹고 깽판치던 아저씨들이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tvn에서 방영하는 용감한 기자들이라는 프로에서 해당 상황의 녹화가 방송된 적이 있는데 명확하게 여자 목소리다.(하지만 욕설 부분은 삐 처리되어서 들을 수 없다.) 참고로, 이 때 부인과 가족들이 관전을 하고 있었다!
- ↑ 사과를 하긴 했는데 대상이 안정환이 아니었다.
- ↑ 이후로도 부산은 쪼들리는 형편 탓에 쓸만한 선수는 계속 팔아치우고 풋사과만 끌어모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했다.
- ↑ 페루쟈 임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선 일개용병에 불과했으며 골을 못넣는다고 감독에게 질책까지 들어야했다. K리그 복귀 후에는 연봉만 많이 먹는 폼이 떨어진 노땅에 불과했다. 근 10년 마음고생 하다가 팀의 에이스로 대접을 받는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 ↑ 트레콰르티스타라는 말이 거의 쉐도우 스트라이커 수준으로 공격에 치중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뜻한다. 국대에선 원톱으로 주로 나왔지만 리그에서의 안정환은 주로 트레콰르티스타였다.
- ↑ 당시 안정환은 어떻게든 현지 적응을 하려고 파스타를 먹고 명품을 이월상품으로 걸치며 겉으로 때빼고 광내던 시기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완전 스타지만, 사실 이때 안정환은 부산의 완전 이적 거부와 가우치 단장의 로스터 관여 등으로 제대로 뛰지 못하고 있던 때라 똥줄이 타고 있었다. 참고로 머리 스타일이 장발에서 뽀글이(..)로 바뀐 건 히딩크와 만난 이후다.
- ↑ 안정환 본인은 이 코스 선택을 자신의 판단 미스라고 술회했다. 부폰은 키도 크고 팔도 길고 반사신경도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막힐 가능성을 고려해서 아예 구석 높은 곳으로 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사실 모든 페널티킥은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 높은 곳으로 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실축 위험이 크다는 게 문제니 안정환의 판단을 마냥 비판할 수도 없다.
- ↑ 스페인의 주전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중앙을 노렸다.
- ↑ 안정환에게 패스가 갈 때 이천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어서 오프사이드로 판정됐었다. 허나 이 당시 이천수의 포지셔닝은 안정환이 패스를 받는데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현재 개정된 오프사이드 기준으로는 문제가 없다.
- ↑ 1996년 당시에는 너무 어렸고, 2000년에는 페루자에 갓 이적한 후 경기에 자주 나오지 못해서 뽑히지 않았다. 2007년는 수원에서 그야말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던 시절이라 베어백 감독의 고려대상이 아니였고, 2011년에는 은퇴 직전이라 이미 국대와는 멀어진 뒤였다.
- ↑ 이 당시 안정환은 교체로 들어가도 한 15분 정도만 뛸수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 ↑ 참고로 안정환 본인은 인터뷰에서 다롄에서 거의 풀타임으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 슈퍼리그와 월드컵의 수준이 다르긴 하지만, 리그를 거의 풀타임으로 뛰고 있는 선수가 과연 15분밖에 못 뛸 정도의 체력이라 월드컵에 한 경기도 못 나간 건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 ↑ 주 발이 오른발이라 페널티 킥은 오른발로 차지만, 코너킥이나 프리킥을 오른쪽 측면에서 찰 때는 왼발로 찬다.
- ↑ 9.5번 포지션이라고도 하며, 최전방보다는 약간 처진 위치에서 경기를 조율함과 동시에 볼을 다루는 테크닉과 공격수로서의 득점력도 갖춘 스타일이다. 이런 스타일로 유명한 선수가 에릭 칸토나나 로베르토 바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등이 있다.
- ↑ 안정환이 몸싸움을 싫어해서 드리블 연습을 엄청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안느턴(종이접기)이 잘 될 때는 정말 화려하긴 했다. 가장 환상적인 종이접기는 부산 시절 전남과의 경기(위 동영상 37초부터)에서 박스 안 각도도 나쁘고 수비수도 많은 좁은 지역에서 내줘야죠, 하는 해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 종이를 접어 대다 기록한 골일 것이다.
- ↑ 많이 시도 하는 경우에는 종이접기라고 까이기도 했다.
- ↑ 물론 손에 반지를 착용하고 축구를 하지는 않는다. 부상을 우려하여 장신구 착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 ↑ 두 차례 한일전 결승골, 월드컵에서 동점골과 역전골.
- ↑ 일례로 2006년 독일 월드컵 프랑스 전 때 원사이드 게임이었던 경기가 안정환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어느정도 대등한 경기로 바뀌었다.
- ↑ 전술적 에이스는 유상철이었다.
- ↑ 중거리를 많이 찬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정환은 틈만 나면 중거리슛을 쏴서 수비를 위축시키고, 이를 통해 공격진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용도로도 자주 사용했다. 덤으로 유효 슈팅도 많이 나와 골키퍼를 위축시키는 데다, 종종 골도 넣었으니 일석삼조격.
- ↑ 위 동영상 3분 32초부터
- ↑ 수비수에 약간 맞고 들어가긴 했지만 전체적 코스에 그다지 영향을 주진 못했고 안 맞았어도 아마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 ↑ 위 동영상 4분 8초부터, 오른발잡이가 왼발로 저런 정교한 슈팅을 한다는 것이 놀랍다.
- ↑ 게임이긴 하지만 2001~2002 시즌의 페루자 안정환의 FM 능력치는 패스와 크로스가 16이었다. 아래에 안정환이 후이 코스타 같은 플레이를 한다는 건, 유럽 기준으로도 패스와 스루 패스가 좋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버전이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안 되지만, FM 2016의 기성용이 패스 16, 크로스 12다.
- ↑ 본인은 독일은 잘 안 맞는다고 했고, 처음에는 스페인의 레알 라싱으로 가려고하는 등 피지컬이 딸리는 걸 잘 인식하고 있다.
- ↑ 참고로 경기당 골 생산력은 0.36골로,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후이 코스타가 0.12골,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0.4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