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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1대 궁예 | ← | 초대 태조 왕건 | → | 2대 혜종 왕무 |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이 외에 왕건과 인연 깊은 충남 논산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이 있다. | ||
묘호 | 태조(太祖)[1] | |
시호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 | |
연호 | 천수(天授) | |
능묘 | 현릉(顯陵) | |
성 | 왕(王) | |
휘 | 건(建) | |
자 | 약천(若天) | |
배우자 | 신혜왕후(神惠王后), 장화왕후(莊和王后),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신정왕후(神靜王后), 신성왕후(神成王后), 정덕왕후(貞德王后) | |
아버지 | 왕륭(王隆) | |
어머니 | 위숙왕후(威肅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877년 1월 4일 ~ 943년 5월 29일 |
양력 |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67세) | |
재위기간 | 음력 | 918년 6월 15일 ~ 943년 5월 29일 |
양력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26년) | |
출생지 | 신라 송악군 사저 | |
사망지 | 고려 개경 정궁 신덕전 |
목차
1 개요
후삼국시대의 명장이자, 삼한을 통일한 통일왕조 고려의 건국자.
877년, 송악(개성)에서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였는데 후백제의 해상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는 등 매번 신출귀몰한 전략을 세워 후고구려의 영토를 대폭 넓히는 공로를 세웠다. 왕건은 그러한 공적으로 인하여 한창 젊은 나이에 후고구려의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가 점차 포악해지고 학정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그를 진정한 왕의 재목으로 보아 추대하기에 이른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제거하고 제위에 올라 연호를 천수(天授),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후 삼국 중에서도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거듭 대전하였고 왕건도 자못 패전하여 공산전투에서는 애신인 신숭겸을 잃기도 하였으나 신라가 그의 친화적 자세에 스스로 항복해오고 이후 후백제 왕 견훤이 장남 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뒤 투항해오자 936년, 마침내 후백제와 결전하고 승리를 거두어 한반도의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통일 전쟁사로 보자면 신라 문무왕 이후로 2번째로 통일 국가를 건국한 지도자인데, 신라의 경우는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때 당나라 군사력을 상당히 빌린 것에 비해 왕건은 자신의 재량, 즉 덕치와 무략 등을 발휘하여 외세 개입 없이 자력으로 통일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그가 고려 왕조를 성립케하고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이래 우리나라는 오늘날까지 단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다.[2]
1.1 성장기
이름이 스포일러 개성 왕씨로,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의종대에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한다.[3] 그리고 그들은 돈이 많았다. 6대조 강충은 집에 천만 금을 쌓아 놓았을 정도였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즉 왕건의 선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중원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세력가였다.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륭이며 후에 후고구려의 궁예왕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 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계속 올라갔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해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중요지역인 무진주의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 나주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최고의 공적이었다. 훗날 오랜 세월인 지난 후에 견훤이 탈환하기는 하였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해전에 능한 반면, 견훤은 제해권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왕에 다음가는 지위인 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 먼치킨급...
1.2 고려 건국
후에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세력있는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 모의를 인정하고 죄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란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의 일부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왕건을 일부러 걸고 넘어져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내 위세에 눌려서)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 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 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고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1.3 견훤과의 대결
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왕건의 초상화. 문명 4에서의 왕건 모습은 여기서 따온 듯하다. |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들을 잘 구슬려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후백제왕 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충돌한다. 그러나 양 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후백제에 붙어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삼년산성에서 왕건이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호족들이 후백제로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온화했던 성품의 왕건도 이 때만은 법을 굉장히 엄격하게 시행했다.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이고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였다. 칼 대신 철퇴로 죽인 이유는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는 처형법이기 때문... 정사에서도 왕건이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시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또 후백제왕 견훤 역시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왕건을 몰아 붙였다.
이 때에 왕건은 견훤에게 수 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만 명, 연구에 따라 2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왕건은 신숭겸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가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게다가 견훤이 여세를 몰아 부하 장수 상귀로 하여금 개경 앞바다를 공격해 왔을 때에는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었다.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왕건은 일생 일대의 위기에 부딪혔다.
이후에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싸움을 수 차례 벌였다. 사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백제에게 패권을 내주다시피 했었지만 발해 유민의 합류로 그 전력을 다시 회복했다. 양측의 세력이 비슷하여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던 중,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8천의 적군을 무찌르고 견훤의 여러 장수와 책사들을 사로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신라 정책이 토착 세력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반면에 견훤은 서라벌을 공격하고 신라 왕을 자결케 한 사건 때문에 신라인들과 여러 호족들의 반감을 샀다. 견훤은 이 기점에서 크게 기가 꺾여 버렸는데 고창 전투로 입은 피해를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나라가 분열되면서 후백제는 서서히 세력을 잃어갔다.
결국 후계자 문제에 휘말려 아들이었던 신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였는데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하여[4]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5][6]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서,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정도의 뉘앙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은 10살 차이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에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태자가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이 또한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훨씬 압도하였다.
1.4 후삼국 통일과 말년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 |
이 때에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 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건이 발해계 잔당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년만에 종결시켜 삼국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 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 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무척 아꼈던 충복이었던 강직한 재상 박술희와 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조를 남기고 사망하였다.[7]
1.5 최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재위 26년째인 서기 943년 5월 정유일,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나라 문제와 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훼이크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혼란스런 한반도를 통일하고 오백년 고려의 왕업을 다진 이 영웅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웃더니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완전 쿨함
사실 관련 기록이 여기서 완전 끝나는 건 아니고, 500년 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왕씨 몰살을 했을때 왕건이 이성계 꿈에 나타나 화를 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는 현릉에 안장됐는데, 이후 고려가 여요전쟁, 여몽전쟁을 하면서 왕건의 유골도 적에게 능욕당함을 막기 위해 강화도 등지로 여기저기 이동해야 했다.
2 능력
-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
부인 29명
당대에 왕건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년 동안 시달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견훤보다는 한 수 아래였던 듯.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장기인 해전에서도 비록 나중에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주를 빼앗기는 등, 나중에는 견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궁극의 화친 능력과 유화력.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영향권에 들게 하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왕인 경순왕도 아군으로 끌어들여 신라를 자신의 편으로 붙게 했다. 또한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킨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도 토착 호족 세력의 마음을 빼앗은 덕분에 가능했었다. 놀라운 수준의 화친 능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았다(...). 패왕색의 패기 물량 앞에 장사 없지
이런 결과는 물론 정략이나 용인술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토대가 되는 왕건 자신의 인화력이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항우와 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3 정치 스타일
고려의 통일 이후 왕건에게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에 대한 처우 문제였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대로 방치할 경우 최소로는 왕권 위협, 최악으로는 독립해서 내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용해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해 나갔다.
우선,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 사성 정책, 역분전 정책이 있었다. 정략결혼은 이 항목에 들어올 위키러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호족들이 상당히 많은지라 왕비가 수십명이었다. 왕후가 6명에 부인이 23명. 당연히 정략 결혼에는 신체적인 한계가 있었고, 이를 보완하는 것이 사성정책이다. 사성(賜姓)이란 글자대로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이 있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 충성을 얻는 것이다. 또한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역분전 정책도 사용했다. 그리고 지방마다 일부러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아 호족들이 기존에 누리던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 사심관 제도를 썼다. 상수리 제도를 기초로 삼는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식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는 것이다. 피같은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에 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기인 제도로 자살하는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사심관 제도는 중앙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자치(정확히는 지방에 준 행정, 치안상의 특권. 즉, 기득권)가 막장일 경우[8] 연대책임을 물게 하는 제도였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 확대를 막으려 했다.
숭불정책을 실시했으며, 이러한 친불교성향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이라는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9][10] 그리고 애초에 신라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국민의 대다수인 불교신자와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덤으로 훈요 10조에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건 지금의 전라도를 뜻한다며 지역드립을 유발시키는 곳에 자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2대 왕 혜종이 전남 나주 출신 호족의 외손자라는 것과 신숭겸, 최지몽 같은 측근들의 존재를 간과한 것이다. 태조 왕건에 대한 대중역사서를 썼던 김갑동 교수는 흔히 훈요십조의 이 내용이 전라도 지역을 가리키는 것을 해석 문제로 보고 친궁예 세력이 발호했던 청주지역이나 후백제 세력의 마지막 저항이 있던 충청도~전주 일부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훈요 십조에 따르면 공주강 이남이라는 말은 영산강유역은 따로 분류될수 있기 때문에 노령산맥 이상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충남 일부와 전북지방에 해당될 수도 있다. 한마디로 공주강 지금 금강 이남전체를 뜻하는게 아니라 "상당히 큰 세력인 후백제(견훤)와 궁예 세력을 들여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왕건의 예언이 맞게되었다. 고려의 멸망을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씨였으니. 다만 이성계 자신은 함흥 출신이고 그 아버지, 할아버지도 북방 군벌이었으니 상당히 오래 전에 본관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다. 이 때 사신들을 귀양보내고 낙타들을 만부교에서 굶겨 죽였다. 이러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데 발해가 과거 거란과 친하게 지내다가 거꾸로 멸망당한 사실이 있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많이 유입이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해 유민들은 왕건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멀리 보기 보단 가까이에 있는 이득을 취하는 왕건의 특성상 그에겐 최선의 선택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란를 적대시 함으로서 길고 긴 전쟁의 불씨의 씨앗이 되었다. 성호사설에서도 왕건의 선택을 비판하기도 했다.
4 평가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셨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키셨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셨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셨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셨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우셨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북한 분단까지 천 년간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고려-조선 교체기처럼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대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민족 포용책을 썼고, 적국에 대해 매우 관대한 면도 그렇고, 무신정권 시절 이런 가치를 내세운 반란세력이 있긴 했지만 왕건 이후엔 지역에 기반을 둔 신라나 백제의 부흥운동 같은 게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시대가 열렸으며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수백 년 후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다시 등장하였고, 이를 통일한 것이 고려이며, 국호부터 정책까지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영토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을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통일의 시조로 본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발해 및 발해부흥운동을 돕지 않아 한국사에서 만주가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있다. 926년 발해 본국의 붕괴는 아직 여유가 없었다지만, 후백제를 멸한 이후에도 정안국이나 흥료국 같은 발해 후속국들이 지원을 요청해오면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고, 단지 귀순해오는 일부 유민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11]
또한 적극적인 혼인 동맹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명으로, 이쯤 되면 혼인 동맹의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가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긴 했으되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론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그가 건드렸다가 덜컥 임신한 사람들을 많이 들였다는게 된다. 서전원부인의 경우 그나마도 가문도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부친이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다. 결혼동맹이 이렇게 막장이 되자 그 가치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 왕가와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기도 했고 근친혼이 성행하게 된다. 더불어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도 걸작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외가의 성을 따른다.[12] 이는 그 딸이 딸을 낳아도 딸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되면 그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문제는 이게 당대 가치관으로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것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쪽이 힘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못됐다. 그렇다면 사돈가문을 힘있는 가문을 들였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이뭐병. 당시가 건국초이고 호족 세력이 강한만큼 황주 및 개경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경주 세력과 맺어주어 개경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결국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졌다.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의 업적과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분명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 한국인들에게 왕건의 인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몇몇 위인들[13]보다는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듯 하다. 문명 시리즈에서도 여러 차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한국 유저들은 왕건이 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을 등장시키라는 반응이 많았고 결국 짤렸다. 그 외에 고액권 지폐 인물선정 등 일종의 인기투표가 있을 때도 1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드라마 태조 왕건 하나가 대히트했었지만 그 외에 왕건이 높은 비중으로 등장한 드라마도 하나도 없었고, 은근히 존재감이 부족하다.
5 왕건 상
1993년 북한 개성 태조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 10년 8월 1일에 고려 태조의 어진과 동상을 능 곁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 동상으로 보인다. 머리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14] 위의 상에는 성기가 매우 작게그럴 리가 왕건의 그것이 작았을리가 없어 표현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부인 29명을 두고 초탈?한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표현이다.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 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나체 상에 옷을 입히는 형태의 상은 토속신앙의 조각상의 양식이라고 한다.# 그렇게 왕건은 진짜 미륵이 되었다
6 아내와 자녀
- 같이 보기 - 고려시대의 호족들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명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땐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귀족을 외가를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쟁탈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15]
6.1 왕후
- 제1왕후 : 신혜왕후 류씨(정주[16] 호족 류천궁의 딸)
- 제2왕후 : 장화왕후 오씨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
- 아들 : 2대 국왕 혜종 무
- 제3왕후 : 신명순성왕후 유씨(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
- 제4왕후 : 신정왕후 황보씨(황주 호족 황보제공의 딸)
- 제5왕후 : 신성왕후 김씨(신라 왕족 김억렴[19]의 딸)
- 아들 : 추존왕 안종 욱(헌정왕후 황보씨의 남편)
- 제6왕후 : 정덕왕후 류씨(정주 호족 류덕영의 딸)[20]
- 아들 : 왕위군
- 아들 : 인애군
- 아들 : 원장태자(흥방궁주의 남편)
- 아들 : 조이군
- 딸 : 추존왕후 문혜왕후(추존왕 문원대왕의 아내)
- 딸 : 추존왕후 선의왕후 유씨(추존왕 대종의 아내)
- 딸 : OO공주(의성부원대군의 아내)
6.2 후궁
- 후궁 : 헌목대부인 평씨(경주 호족 평준의 딸)
- 아들 : 수명태자
- 후궁 : 정목부인 왕씨(명주 호족 왕경의 딸)
- 딸 : 순안왕대비[21]
- 후궁 : 동양원부인 유씨(개국공신 유금필의 딸)
- 아들 : 효목태자 의
- 아들 : 효은태자 원
- 후궁 : 숙목부인 O씨(대광 명필[22]의 딸)
- 아들 : 원녕태자
- 후궁 : 천안부원부인 임씨(문신 임언의 딸)[23]
- 아들 : 효성태자(정종의 사위)
- 아들 : 효지태자
- 후궁 : 흥복원부인 홍씨(홍규의 딸)
- 아들 : OO태자 직
- 딸 : OO공주(태자 왕태의 아내)
- 후궁 : 대량원부인 이씨(협주 호족 이정언의 딸)
- 후궁 : 후대량원부인 이씨(협주 이원의 딸)
- 후궁 : 대명주원부인 왕씨(명주 호족 왕예의 딸)
- 후궁 : 광주원부인 왕씨(대광 왕규의 딸)
- 후궁 : 소광주원부인 왕씨 (왕규의 딸)
- 아들 : 광주원군
- 후궁 : 동산원부인 박씨(순천 호족 박영규의 딸이자 후백제의 초대 왕 견훤의 외손녀. 정종의 정비 문공왕후, 문성왕후와는 자매지간)
- 후궁 : 예화부인 왕씨 (왕유의 딸)
- 후궁 : 대서원부인 김씨(서경 호족 김행파의 딸)
- 후궁 : 소서원부인 김씨 (김행파의 딸)
- 후궁 : 서전원부인[24]
- 후궁 : 신주원부인 강씨[25](아찬 강기주의 딸)
- 후궁 : 월화원부인(대광 O영장의 딸)
- 후궁 : 소황주원부인[26]
- 후궁 : 성무부인 박씨(평주 호족 박지윤의 딸)
- 아들 : 효제태자
- 아들 : 효명태자
- 아들 : 법등군
- 아들 : 자리군
- 딸 : OO공주(경순왕의 아내)
- 후궁 : 의성부원부인 홍씨(개국 공신 홍유의 딸)
- 아들 : 의성부원대군(정덕왕후 류씨의 사위)
- 후궁 : 월경원부인 박씨(박수문[27] 의 딸)
- 후궁 : 몽량원부인 박씨(박수경[28]의 딸)
- 후궁 :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대광 O선필의 딸)
7 오늘날의 왕건
7.1 드라마 태조 왕건
왕건(태조 왕건) 참조.
7.2 그 외 한국의 사극들
재밌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긴 하지만 왕건이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다름 아닌 용의 눈물.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후손들을 죽였으니 너 역시 벌을 받으리라!"라며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회성 등장이지만 어쨌든 등장은 등장이니.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그를 위협한 이야기는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이 당시 배우는 성우 출신 탤런트인 김경응 씨. 김경응씨는 또 회안대군 방간의 아들인 이맹종 역할로 출현하였다. 즉 1인 2역. 그리고 훗날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최영의 조카이자 이성계 암살사건을 주도한 김저 역할로 출연해서 역시 조선 건국세력과는 대척점에 서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제일 백미는 태조 왕건에서는 자기 자신의 부하 장수인 박수문 역할로 나왔다.
이 야사는 용의 눈물과 비슷한 시대를 다룬 정도전(드라마)에서도 약간 반영이 되어 나온다. 다만 왕건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고, 조선을 건국한 직후 이성계가 옥좌에 앉아 있다가 '네 이놈!!'하고 꾸짖는 환청을 듣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 "목소리만이라도 최수종을 까메오 출연하는게 어떨까?"라는 농담성 제안이 넷 상에서 나돈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최수종이 아니라 당시 음향 제작진 중 한 명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고. 대신 직접적으로 왕건이 묘사된게 아니라서 이 야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왕건의 목소리인지 잘 모를 듯하다. 용의 눈물 때와는 달리 여기서의 이성계는 호통소리를 듣고도 "뭐? 뭐?"라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좀 더 역전의 용사다운 모습으로 나왔다. 보면 뭐? 보다는 머?에 가깝게 발음해서인지 은근히 개그스럽다.[29]
사실 왕건 입장에서는 이성계에게 극도로 빡칠 만한 게, 왕건 역시 쿠테타로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이 된 뒤 두 나라를 항복시켜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성계처럼 자기가 무너뜨린 나라의 왕족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다.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확실히 기록된 전 왕족은 후백제의 양검, 용검 정도인데 양검과 용검은 불효자+역적이라 사실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간들인데다, 이들의 아버지인 견훤부터가 이들을 죽이라고 왕건에게 종용했다. 신검 또한 결국 왕건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인간도 불효자+역적 괴수 입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죽는 게 당연하고, 이후 후백제의 견씨나 신라의 김씨, 박씨, 석씨 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으니(...)[30] 특히 경주 김씨의 경우 경순왕의 백부의 딸이 왕건의 5비인 신성왕후가 되었으며, 특히 제8대 현종 이후의 고려 왕들은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는 현종이 신성왕후의 아들인 안종 왕욱의 사생아이기 때문.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고려 중기 이후 경주 김씨는 김부식이 실권을 잡으면서 고려의 최대 문벌 귀족으로 부상한다.
그런데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호족 세력들의 연합 정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왕건이 왕좌에 앉아 있다 해도 어느 가문을 찝어서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압박할 상황이 아니긴 했다.[31] 왕씨 학살은 이후 태종 이방원이 이건 "그거 아버지 뜻 아님ㅇㅇ" 발언을 시작으로 차츰 완화하기 시작하였고 문종때 가면서 왕씨에 대한 탄압 정책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천추태후에도 왕건이 등장한다. 천추태후가 어릴때 혼령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고, 태조 시절의 노신 최지몽이 나타나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등장했다. 방영될 당시에 일부 시청자들이 최수종을 까메오로 쓸 것이지...하는 아쉬움을 보였다. 대조영이라고 오해를 받을까봐 안 나왔다 카드라 이렇듯 사극에서 높은 빈도로 등장하고, 또 등장하는 극의 비중도 높은 역할로 등장하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 비하면 한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고려왕조의 창업군주 치고는 태조 왕건 때를 빼면 사극에서 주역으로 나온 적이 없다. 역사적 비중에 비하면 사극에서의 대접이 매우 박한 편. 제국의 아침, 천추태후나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등장한 것처럼 '과거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나 극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2016년에 SBS에서 방송하는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조민기가 이 인물을 맡았다.
또한 1970년에도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조왕건>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궐기하여 고려를 세우는 과정을 영화화한 듯.
7.3 시드 마이어의 문명
(문명 3에서의 왕건)
위의 어진과 뭐가 닮았다는거지?
(문명 4에 등장하는 왕건)
이게 뭐야 몰라 무서워 화내면 더 무섭다.#
이상하게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계속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한국 팬들은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을 지도자로 하게 해달라고 여러번 건의했으나... 3이나 4 모두 왕건이 한국의 지도자. 하지만 5에서는 세종대왕이 나왔지 게다가 3에서는 대머리로 등장한다. 베타버전이 더 무섭 시대가 변하면서 더 안습해진다. 친일파 스타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청자와 고려 인삼만이 알려진 탓이 아니냐는 분석과 시드 마이어가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태조 왕건이라서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태조왕건을 봤으면 최수종이 나와야지 이런 양반이 나오겠냐 사실 Korea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고려왕조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조선왕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국가의 역사를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왕건이 지도자가 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긴 하지만. 대신 문명 5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4에서의 지도자 특성은 재정적, 방어적. 어정쩡한 특성이라고 하는 유저도 있는 듯한데 아무래도 '방어적' 특성 때문에 그런 듯하다. 하지만 재정적 특성이 꽤 괜찮은 특성이고 특성 잘 이용해서 굴리면 꽤 할만하다. 자세한 건 문명 4 워로드 항목의 첫 카테고리 참조. 물론 후속작의 세종패대왕의 포스에 비하면 후달리지만 절대로 '구린' 지도자는 아니다. 애당초 문명 4에서는 '구린' 지도자는 없다. 해당 항목에도 나온 얘기지만 확장팩에서 '공격적, 방어적'이라는 괴이한 조합으로 변경된 일본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저 왕건의 모습을 보고 아무리 봐도 중국인같이 생긴 왕건의 얼굴을 보자 "이게 뭐야! 나의 왕건은 이렇지 않아!", "아놔 지금 한국인 무시하나요?" 등의 반응을 보이는 네티즌들이 대부분인데, 사실 저 얼굴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증이 잘 된 얼굴이다. 왕건의 얼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기우(氣宇)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용안(龍顔) 일각(日角)에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으며, 기우(器宇)가 크고 깊으며, 말소리가 크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동사강목
얼굴은 일각(日角)의 상에 턱이 모나고 이마가 넓었으며 간국(幹局)이 크고 깊었다. 음성이 우렁차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제세(濟世)의 도량(度量)이 있었다.- 삼국사절요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풍채의 인물이었던 듯. 아무래도 태조 왕건으로만 왕건을 접해서 저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7.4 천년의 신화
2000년에 출시된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인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려측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기마 영웅으로 칼을 휘둘러 공격하는데 공속이 느린 편이지만 임진록2의 곽재우 분신술과 비슷한 보호신장 기술을 가지고 있다. 게임 속 얼굴과 캐릭터 조형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묘사된 왕건의 모습을 따 왔다.
7.5 김성한 작가의 소설 고려태조 왕건
김성한 작가 한국사 역사소설 | ||||
요하#s-2 | 왕건 | 이성계#s-13.3.1 | 7년전쟁 |
7년 전쟁으로 유명한 김성한 작가 소설. 이성계와 요하의 뒤를 이어 나온 3번째 역사소설이다.
흔히 왕건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인 왕건의 이미지인 德을 강조한 소설. 1980년대에 나온 소설이지만 궁예를 재평가하는 시대를 앞서간 모습을 보여줬고 훗날 드라마 태조 왕건에 영향을 줬다. 김성한 작가는 세달사의 위치를 강원도 영월이 아닌 개성부근으로 가정했고, 여기서 어린 선종과 왕건이 조우한다. 사실상 궁예와 견훤까지 조명한 후삼국시대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은 절판되었다가 최근 2016년 2월에 재출간되었다. 총 5권.
7.6 KBS의 인형극 쌍룡검
1978년 KBS에서 방영한 인형극 쌍룡검의 주인공이 왕건이다. 여기서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설화부터 시작해서 신라 왕자 궁예가 애꾸가 되는 에피소드,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라는 설화 등도 다 나오는지라 정작 주인공 왕건의 등장 장면은 상당히 늦은 편이다. 어린이용 인형극이었지만 관련 설화들도 상세히 설명되고 내용도 드라마틱하고 캐릭터들의 개성도 뚜렸한 상당한 수작이었다. 이 인형극을 기억하는 세대는 드라마 왕건보다 오히려 더 나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7.7 그 외
KDX-2 충무공 이순신급의 4번함인 DDH 978은 왕건의 이름을 따서 왕건함으로 명명되었다. 정작 함에서 구르는 수병들은 왕견함으로 부른다 왕건이 장수로서 보여준 먼치킨급 활약과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기를 평정한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높이 평가받아 이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 ↑ 조선시대에는 이성계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왕태조(王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다.
- ↑ 물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이 확립된 것은 한참후의 일이었다.
- ↑ 고려사 서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외가 쪽 시조인 자칭 성골장군 호경(신천 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이 백두산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 개경의 부소산(송악산) 왼쪽 골짜기에 정착해서 살다가 여산신과 결혼해 산신이 된 후 옛 부인을 찾아와 자식을 두었는데, 그 자식의 자손 중 거사 보육의 막내딸 진의가 고려로 온 당 숙종과 결혼해 작제건을 낳았고, 그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 ↑ 실제로 이후 후백제를 칠 때 견훤도 동행했는데 견훤이 있는 것을 본 후백제 장수 중 일부가 "어? 저기 우리 대왕님이 계시네?" 하고는 그대로 항복했다. 이는 후백제 내에서 인망은 신검보다 견훤이 한 수 위라는 사실
물론 어차피 질 거 미리 항복하자는 심보도 있을 수 있다. - ↑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 ↑ 말만 상보라 부른게 아니라 진짜 적국의 전왕+신라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빈털터리에 아무 힘도 없는 거지노인인 견훤에게 집도 주고 재산도 넉넉하게 지급해 주었다.
- ↑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항목참조.
- ↑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게 한다던가 아니면 지방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정부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린다던가 하는 경우
- ↑ 사실 조선 이전엔 유교보다 불교가 더 선호되었다. 유교를 믿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어려운 한자를 일반 백성들이 익히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가차원에서 한글과 그림을 이용하여 인,의,예,지,신,충,효 와 같은 유교의 기본 덕목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살기도 팍팍한 민중들에게는 차라리 내세에 대한 믿음이나 현세를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이 더 잘 먹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개인신앙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했다. 팔관회나 연등회같이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규모는 아니여도 흉년이 들거나 하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국가차원에서 여는 불교행사도 있었고 국가차원에서 건립한 사찰도 어느정도 있었다.
- ↑ 또한 유교가 본격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띄기 시작하는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유교는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지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종교로선 불교가 선택되고, 실제 통치 이념은 유교에서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성리학이 등장하기 전의 고려에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형태를 띄지만, 성리학 도입 이후인 공민왕대에 들어서면 유학자들이 가차없이 불교를 비판하여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이후 조선이 건국되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음으로서 불교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 ↑ 사실 이는 외교에 관한 일로 볼 수 있는데, 발해 부흥국들은 대놓고 거란의 적대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을 지원하게되면 당대 최강국 거란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취적인 건국초기라지만 거란 역시 전성기였던 터라 그 아무리 전쟁에서 잔뼈가 굳은 왕건이라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 거란이 고려에게 대놓고 시비걸며 서경이북을 내놓으라던 성종시기 고려의 조정은 서희가 나서기 전까지 바짝쫄아 서경이북을 할양하기로 마음먹었던것만 봐도..
- ↑ 가령 드라마화로 인지도가 있는 천추태후의 경우 왕건의 친손녀이지만 성씨는 할머니에서 따 온 황보씨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인 경종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 ↑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
- ↑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검증이 된다.
- ↑ 사실 왕건이 무조건적으로 정책을 위해 부인들을 많이 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장화황후 오씨의 경우도 정책 때문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왕건의 부인 숫자는 왕건의 여성편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 현재 개풍
- ↑ 홍주(현재 홍성) 호족 홍규의 딸
- ↑ 승려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 ↑ 경순왕의 큰아버지
- ↑ 제1왕비 신혜왕후 류씨와 같은 가문으로 신혜왕후가 자식이 없이 세상을 뜨자 같은 가문에서 왕비를 들인걸로 추정된다.
- ↑ 왜 시호가 왕대비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 ↑ 현재 경남 진주가 아닌 충북 진천이다. 명필의 성은 전해지지 않으며 임씨로 추정하고 있다.
- ↑ 시호에 천안이 들어가지만 천안출신이 아니며 경주출신이다.
- ↑ 왕건의 29명 부인 중 유일하게 성씨와 가계, 출신, 후손등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 ↑ 아들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신명순서왕후의 아들을 양아들 삼아 길렀는데 그 아이가 훗날 광종이다.
- ↑ 성씨는 전해지지 않으나 시호로 보아 황보씨로 추정하고 있다.
- ↑ 박지윤의 아들이며 박수경의 형
- ↑ 박지윤의 아들이며 박수문의 동생
- ↑ 다만 그래도 무섭긴 무서웠는지 얼마동안 용상에 앉는걸 꺼려했다.
- ↑ 여담으로 왕건과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비슷한데 둘 다 지방 세력가에서 출발해서 아버지와 함께 자기가 뒤엎은 나라에 투항했고 거기서 무공을 세워 세력을 쌓은 뒤 왕위에 올랐다. 단 끝은 왕건이 더 좋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 ↑ 대신 그의 아들이자 4대 임금 광종이 이 일을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