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영등포역에서 피난 기차를 타다가 헤어진 남매가 33년 만에 재회하여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시단 소식을 듣고 만세를 외치며 기뻐 우는 모습. 사진이 실렸던 기사 원문 (이중현 기자[1] 촬영.영상에 나온 모습 ) |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공식 홈페이지
그 당시의 영상이 있는 KBS 공식 유튜브 채널
30주년 특별 다큐멘터리
30주년 특별 생방송 중 상봉 영상(유철종 박사의 나레이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 ||
이름 | 한국어 | [2] |
영어 | [3] | |
프랑스어 | [4]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 |
소장·관리 | 한국방송공사(KBS) 국가기록원 한국갤럽조사연구소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2015년 | |
제작시기 | 1983년 |
목차
1 개요
한국방송공사(KBS)에서 1983년 6월 30일부터 동년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했던 프로그램. 단일 생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을 갖고 있다. 이 당시 KBS 내부인력(아나운서, PD, 조연출, 음향, 조명스태프 등)과 전화를 받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까지 합하면 이 기간 동안 동원된 인력만 1천 명에 육박한다.
KBS 방송 역사상 제대로 수신료 값을 한 사례를 꼽자면 반드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특히 당대 KBS는 말로는 공영방송이라고 하지만 수신료를 비싸게 거두고 광고도 받으면서도 국산 만화영화 제작은 안하던데다가 땡전뉴스로 매일같이 정권찬양보도를 하고 프로그램 상당수도 미국이나 일본 프로그램의 포맷도 베끼는 그야말로 돈이 아까운 방송사로 악명(다만 프로그램 표절 건은경우는 부산이나 울산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나 언론-방송업계 종사자에게나 알려진 수준이기는 했다. 언론에서 일부 기사를 내기는 했지만)이 자자했는데 이 방송으로 잠시나마 그 악명을 잠시나마 떨쳐냈을정도. 물론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떨친 수준에 불과하기는 했다(...) 당시에는 KBS1에 광고 편성을 하던 시절이었음에도[5] 따로 광고를 편성하지 않았으며, 후술하는 내용에서 보듯 5일간의 특집연속생방송 및 이후 방송 중 각 지역방송국 아나운서들은 자기 지역에 출연한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방송에 내보내려고 난리를 쳤기 때문에 광고는커녕 겨우 3분짜리 노래 한 곡 걸어놓고 아나운서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설운도는 KBS 공식 노예(?)가 되었으며, 노래가 나가는 중에도 메인 카메라는 계속해서 사람 찾는 벽보들을 한 장이라도 더 내보내기 위해 공개홀 객석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고 사람들은 카메라 앞으로 몰려들었다.
요즘은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남북으로 갈라진 가족들만을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헷갈리기 쉬운데, 이 프로그램은 남한 내의 이산가족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2 프로그램 기획
2.1 배경 : 남한 내에서의 이산가족은 왜 생겼는가
과거 20세기 중후반의 대한민국에서는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경찰 당국이 추산한 이들 '이산가족'의 수는 약 1050만 명에 달했다. 1980년대 초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약 4천만 명이었으니 네 집 걸러 한 집 꼴로 이산가족이 있었던 셈.
이산가족은 6.25 전쟁을 겪으며 가장 많이 생겨났지만, 실은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체계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1930년대의 조선농업통제정책과 자원수탈, 전쟁공출 등으로 인해 안 그래도 가난하던 조선 사람들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된 것. 이들 중 먹고살기 힘들어 도시로 나온 농민들은 경성이나 원산 같은 큰 도시의 산기슭과 하천변에 판잣집을 얼기설기 엮어 살았는데 이를 '하꼬방'이라 한다. 한편으로 이 당시 만주나 일본으로 돈 벌러 나가거나 혹은 징용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귀국하며 이산가족이 된 사례도 의외로 있다.
민중의 궁핍은 1944년 일제의 배급체제가 붕괴하며 더욱 가속화했고, 해방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1946년~1947년에는 콜레라 같은 유행병이 돌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전국적인 식량품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대가족 제도 하에서 한 입이라도 덜고자 장성한 자식은 돈 벌러 도시로 나오고, 어린 자식은 좀 나은 친척집에 수양아들·딸로 가기도 했다. 그러다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왕래가 힘들어졌고, 그 길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사례가 많다. 이들의 경우는 한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해 창씨개명 했던 이름인 '가즈오', '야에꼬' 등으로 서로를 찾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
물론 6.25 전쟁을 겪으며 난리 통에 헤어진 경우는 훨씬 많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강제적인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온갖 종류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사람 무리에 휩쓸리거나 포격을 피해 각자 달아나거나 하는 갖가지 사연으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전쟁 통에는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고 이것은 전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한반도에선 신문, TV, 라디오, 전화 등 대중매체라고 할 만한 것이 미약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번 헤어져버리면 서로 만날 길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인터넷만 빼면 있을건 다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전화와 TV는 1970년대까지도 일부 계층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6]이었고, 라디오는 TV에 비하면 비교적 저가라서 보급이 어느 정도 되긴 했지만 방송채널이 제한적이라 이산가족 찾기에는 그다지 많이 활용되지 못했다. 신문은 상대적으로 접하기는 쉬우나 1990년대 초까지도 대부분의 신문이 국한문혼용체로 한자투성이였기 때문에 한자를 알지못하면 어려웠다.[7] 다시 말해 이 당시에 매체라 할 수 있는 것들 자체가, 공유할 수 있는 환경과 인원이 제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생활고로 인해 헤어졌다가 소식이 그대로 두절되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식모살이를 가거나 도회지 공장에 나간 사람들인데 심지어는 명절에 집을 찾아갔더니 그 새 이사를 가 버려 이산가족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사글세를 못 내 방을 빼고 쫓겨나면 충분히 가능했던 일들이다.
이처럼 온갖 사연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당시 한국에는 넘쳐나고 있었지만, 1980년대 초의 한국은 지금과 같이 인터넷은커녕[8] 전화보급망조차도 1권의 전화번호부로 1개 도를 아우를 정도로 정보가 원활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결정적으로 당시 전화번호 체계는 2015년 현재처럼 지역번호가 단순화된 것이 아니라 같은 도 안에서도 시군별로 전화번호가 제각각[9]이라 더더욱 찾기가 힘들었다. 예를 들면 경상남도의 경우 마산, 창원, 진해의 전화번호 앞자리가 전부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한번 흩어진 가족이 서로 작정하고 만나기는 매우 힘든 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1983년 이전에도 이산가족들은 그나마 가장 널리 알릴 수 있는 미디어 수단인 신문을 활용하여 서로를 찾고자 했다. 구인광고란에 직접 광고를 내거나, 혹은 주요 일간지에서 가끔 추진하는 '사람 찾기' 기획을 통해 서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해 왔던 것. 그러나 신문의 경우 당시까지만 해도 국한문 혼용에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이라 생각만큼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간혹가다 정부에서 주민등록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행정기관이나 경찰을 통해서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에는 이게 불가능했다. 일단 주민등록 제도는 일제가 전시 총동원령을 선포한 1942년에 도입해서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주민등록자료가 전부 확보돼있었다. 하지만 해방과 전쟁의 혼란통속에서 호적을 포함한 행정문서가 사라진 경우도 많았고, 게다가 전후복구에도 허덕이던 당시 정부는 이산가족찾기에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관공서를 통해서 뭘 해본다는건 힘들었다. 참고로 전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해서 정부에게 관리하기 시작한게 1968년부터이며, 주민등록증은 1970년에 처음 발급되었다. 주민번호가 도입된 이후에도 자료가 전산화가 안돼있고 각 읍/면/동사무소에 따로 보관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자 하면 직접 자신이 발품을 팔면서 전국을 뒤져야 했다.
그나마 1980년대 초 경찰이 보유중인 각종 주민등록 자료들이 전산화되면서 빠른 검색이 가능해졌고, 1982년부터 치안본부(경찰청)에서 이산가족 희망자에 대해 이름으로 검색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름만으로는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서 어지간한 희귀 성씨가 아닌 이상은 이것만으로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2.2 프로그램 기획
이러한 사정 때문에, 휴전 30주년인 1983년 6.25 특집주간에 공영 미디어인 TV의 파급력을 이용하여 남한 안에서만이라도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을 찾아보자는 의도의 프로그램이 기획된다. KBS는 그 이전부터도 당시 냉전하에서 미수교지역이라 교류할 수 없었던 소련령 사할린, 중국[10], 북간도 등의 동포들과도 이산가족 라디오 방송을 알음알음 주선해 오고 있었는데, 이것을 6.25 휴전(혹은 정전(停戰)) 3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에서도 추진해보자는 기획이었던 것.
그리하여 라디오를 통해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라는 기획이 6.25 주간 중에 방송되었는데 청취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TV방송을 통해서도 한 번 추진해 보자는 기획이 나왔고, "스튜디오 830"[11]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진행해서 아홉 가족을 방송에 초대했으나, 여기서는 단 한 명의 상봉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이에 자극받은 담당 PD가 이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따로 특집방송으로 편성하자는 기획안을 내놓았고, 그 결과 6월 30일이라는 애매한 날짜에 편성된 것이다. 즉 원래 이 프로그램은 단발성 6.25 전쟁 33주년(휴전 3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지금도 이런 아픔이"라는 특집방송 중 제2부에 해당되는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코너로, 1시간 30분 정도 가량 진행한 후 마감뉴스를 내보내고 0시 30분 경 그 날의 방송을 종료할 예정이었다.
2.3 출연진
- 메인 진행 : 유철종, 이지연, 김동건, 신은경
- 유철종 박사 : 1932년생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출신으로, 원래 기업HRD 교육 전문 강사지 KBS 아나운서가 아니다. 이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상단에 언급된 아침방송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던 MC였기 때문에 발탁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전문 진행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산가족 방송 진행은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담당PD가 "평소대로 허허 웃고만 있어도 됩니다."라고 설득, 진행자로 나서게 되었던 것. 때문에 당시 아나운서들이 추구했던 '반듯함'보다는 현재의 'MC'에 가까운 푸근한 진행이 가능했고, 이 덕에 실제로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 출연진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인터뷰를 수월케 했다. 거기에 시청자들과 같이 울고 웃는 공감효과는 덤. 전문 진행자가 아니라서 가슴 아픈 장면이나 돌발 상황이 터지면 말을 잇지 못하고 '허허...'라든가 '아이구...' 같은 감탄사만 연발하는데 이것이 의외로 시청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 이지연 아나운서 : 1947년생 전북 익산시 갈산동 출신으로 KBS 성우 김태연 씨의 아내이기도 하며, KBS에서 주로 활동하긴 했지만 KBS 소속 아나운서는 아니다. 1969년 이리기독교방송국(現 전북 CBS)에 입사하여 1969년부터 1979년까지 기독교방송(CBS)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였으며, 언론 통폐합 때 프리랜서를 선언하였다.[12] 따라서 1983년 당시엔 프리랜서 아나운서로서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역 KBS 아나운서로 있는 이지연 아나운서와는 동명이인으로 애초에 연배부터가 현 이지연 아나운서의 아버지인 방송인 이상벽씨와 동년배. 또한 이지연 아나운서 자신도 전쟁 중 오빠를 잃은 실제 이산가족이기도 하다. 전쟁 통에 헤어진 오빠는 이북에서 인민배우가 되었고,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서울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 진행 덕택에 국민포장에도 여러 번 서훈되었으며, KBS 열린음악회 초기 MC를 비롯하여 이후 여러 방송에서 MC를 맡았다. 현재는 주로 노인대상 프로그램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베테랑 MC이며, KBS 제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과 NS홈쇼핑 '이지연의 명품보감'에서 MC를 맡고 있다. 더불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자 프리랜서 아나운서 중에서 최고 연장자이다.
- 김동건 아나운서 : 1939년생으로, 본인부터가 고향이 황해도 사리원인 실향민이다. 그래서 황해도가 고향인 이산가족이 말을 못 이으면 엄청 자세하게 물어본다. 해방 후 월남하여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동아방송(DBS)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1968년 동양방송(TBC)으로 이적했다. 그 후 1973년 KBS로 이적했으며[13]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명실 공히 KBS의 간판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주요 프로그램은 '11시에 만납시다'로 거의 10년 가까이 진행된 장수 프로그램이며, KBS 가요무대는 중간에 7년 공백을 제외하면 1985년부터 무려 30여 년간 진행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활동이 뜸해졌다가 최근에는 다시 KBS 가요무대를 진행 중. 그리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31년 동안 진행했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 신은경 아나운서 : 1958년생으로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입사, 당시로서는 서구적인 마스크로 주목받아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진행으로 화려한 커리어를 시작하여 MBC의 백지연과 함께 80년대 방송가의 여성 아나운서 지분을 양분하던 후덜덜한 경력의 소유자. 특히 이창호 아나운서와 함께 19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했고, 동시기에 박성범 당시 보도본부장과 KBS 9시 뉴스를 진행했다.[14] 이후 1993년 유학길에 올랐다가 1995년 박성범과 결혼하여 기업인,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 서브 진행 : 손석기, 황인우, 박용호, 원종배, 정미홍, 유애리, 강성희 등등, 기타 서브 진행은 확인되는 대로 추가바람.
- 손석기 아나운서 : 1952년생. 충북 영동 출신으로 1976년 동아방송(DBS)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언론 통폐합으로 KBS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1991년 SBS 개국 당시 SBS 개국 멤버로 합류, SBS에서 스포츠 뉴스와 모닝와이드 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1998년에는 SBS 아나운서 팀 팀장과 2000년 SBS 아나운서 팀 부국장을 역임했다.
- 황인우 아나운서 :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입사. 신은경 아나운서와는 동기. 현재도 성신여대와 SBS 방송아카데미 교수직을 맡고 있어서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비교적 익숙한 얼굴일 것이다. 그 이쁘장한 아줌마 맞다. 손석기 황인우 두 사람의 얼굴은 이 날 이후로 보기 힘들어지고 목소리만 나왔다. 이산가족방송 통틀어 제일 뺑이쳤다.
- 박용호 아나운서 : KBS 박태원 아나운서의 아버지. 1990년대 KBS 제1라디오 저녁종합뉴스와 KBS1 7시 뉴스네트워크, 6시 내고향 등을 진행했고, 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인천 지역에서 당선, 정치판에도 잠시 몸담았다.
- 원종배 아나운서 : 동양방송 출신 아나운서로 언론통폐합 이후 손석기 아나운서와 마찬가지로 KBS에서 활동했다. 올드비들에게는 '사랑방중계' 진행자로 잘 알려져 있고, 현대의 위키니트들에게는 장학퀴즈 진행자로 기억되는 얼굴이다. 장학퀴즈가 MBC에서 EBS로 넘어갈 즈음인데, 사실 그 이전에 KBS 2TV '중학퀴즈'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 정미홍 아나운서 : 현재는 종편채널 TV조선으로 이직했는데, 최근 앵커 자리에서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다(...).
- 유애리 아나운서
- 강성희 아나운서
- 황인용 아나운서 : 과거 동양방송의 간판 아나운서였으며[15],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잠시 활동했다. 해당 방송이 방영됐을 시기에도 KBS에서 활동했다. '안녕하세요 황인용·강부자/김미화입니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프리랜서로 전환하면서 주로 MBC에서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파주 헤이리에 음악감상실을 운영하며 내레이터로 간간이 활동하고 있다.
- 강부자
3 생방송
방송이 본 궤도에 오른 7월 4일 오전 9시, 방송의 오프닝+멘트+초반부 1시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 오프닝은 4일차까지 상봉했던 가족들 중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장면들만 모아놓았다.[16] 오프닝 타이틀곡은 유명 재즈가수 패티김의 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상시편성 이후에는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으로 교체된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하는 '삽입곡' 항목 참조.
- 이 날 방송은 방송 직후의 아수라장[17]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KBS 본사와 각 지역방송국간의 합이 맞춰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이전보다는 진행이 매끄러워졌다. 전날인 일요일 낮방송은 시청률 78%를 찍은 상태였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부터 시작해서 전국의 모든 이목이 KBS1로 쏟아진 것.
- 3~4일 정도 방송을 진행하고 나자 어느 정도 가락이 붙은(?) 지방방송국 아나운서와 제작진들이 자기 지역 국 공개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내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지역 국의 몇 번 출연자가 우리 지역의 ○○○ 씨를 찾는다고 했는데, 준비해 주시는 동안 몇 분이라도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식. 그리고 이 날부터 서울 부조에 있는 PD가 사정없이 잘라버린다.
3.1 6월 30일 : 생방송 개시
9시 뉴스와 정규 프로그램이 끝난 10시 15분, 부조정실의 큐 사인과 함께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초기 방송포맷은 사전에 신청 받은 이산가족 중 150여 명[18]을 공개홀에 모셔 놓고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자세히 소개하는 형태였다. 또한 각 지역 국을 연결하여 지방 소재 이산가족의 사연도 소개하고, 양측 방송국에 있는 사연을 대조하여 맞을 경우 전화통화 및 지역 국 간 이원중계를 해 보는 방식이었다. 또한 그전부터 이미 이산가족찾기 사업을 벌이고 있던 적십자사[19]와 KBS 제1라디오, 치안본부[20] 전자계산소를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사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본래 목적은 이 쪽에 가까웠다.
- 당시 방송시설과 장비는 현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조악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다중 방송은커녕 지역 국 간 2원 방송으로 연결하면 KBS 서울 여의도 본사 스튜디오나 다른 지역국들은 오디오만 믹싱해서 들어가고 비디오를 화면으로 띄울 수 없어 화면에서 빠져야 했다. 미국이 같은 시기 뉴스쇼에서 3곳을 동시에 연결하여 화면을 띄우고 다원방송을 할 때, 한국은 송출중인 1개화면 위에 반쯤 wipe-out을 한 뒤 그 위에 다른 지역 국 송출 화면을 screen-overlay로 입혀 겨우 2원 방송 '흉내'나 내는 수준이었다.
- KBS는 본관의 여의도 스튜디오(1976년 준공되어 당시로서는 겨우 7년 된)와 별관(1980년 준공된 구 TBC 건물)이라는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장비의 운용 노하우는 미국과 일본에게 여전히 뒤처지던 상황이었다. 또한 방송자막은 '수파'라 불리던 아날로그 텔레시네 작업이었기 때문에, 현재처럼 컴퓨터 키보드로 두들겨 금방 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단에 있는 타이틀 캡쳐에서 보듯 캘리그래피(손글씨)로 일일이 써서 스캔하거나 혹은 활자로 자막작업을 거쳐 화면에 띄워야 했다. 그래서 방송 초반 3일간은 화면에 지역 국 표시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 자세히 보면 서울 송출화면과 지역 국 송출화면간의 화질차이가 굉장히 현저한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장비는 일본 못지않은[21] 것이었으나 지방방송국은 카메라 2~3대에 조명도 조악했기 때문에 화이트밸런스도 심도도 엉망이고, 대전 같은 곳은 대도시 지역총국인데도 불구하고 연결할 때마다 오디오 하울링 쩔어 주는 곳도 있었다. [22]
어쨌든 시청자 반응은 뜨거웠다. 10대의 전화를 스튜디오에 설치하고, 생방송을 진행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전화통에는 문자 그대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송에 고지된 10개의 회선 외에도 KBS 사무국[23], 나아가 781~784국으로 시작하는 KBS의 모든 전화회선이 온 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서울과 지방대도시 전화국[24]에 전자교환기(DDD)가 설치된 이래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방송을 보던 이산가족들은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까지 사전 출연약속 없이 무작정 여의도 KBS 스튜디오로 몰려왔다. 유철종 MC가 '빨리 KBS로 달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언제든 나오실 수 있어요'라는 멘트를 여러 차례 했던 것도 이런 반응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산가족들은 그저 방송에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의지한 채 무작정 여의도로, 여의도로 찾아왔던 것. 정보의 소통이 부족하던 시절, 미디어의 위력은 이산가족들에게는 단비와도 같던 소식이었다.
KBS는 원래 약 1시간 30분[25] 정도로 계획되어 있던 생방송을 다음날 새벽 2시 45분경까지 긴급 연장해서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했고, 이어서 보도본부24시[26]를 방영하며 이 날 방송을 종료했다. 그러나 이 날 방송은 사전 신청자의 극히 일부만 소개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진행자들은 '언젠가 다음 기회에 꼭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겠다.'는 멘트를 하며 방송을 마쳤다. 이때만 해도 방송이 11월까지 가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5시간 30여분 동안 총 29 가족이 서로 만났다.
이렇게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은 5일간 밤낮으로 이어졌다. 이 5일간의 릴레이 생방송 동안 시청률은 78%를 찍었고[27] 500여 명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3.2 7월 1일~7월 10일 : 긴급편성 릴레이 생방송
날이 채 밝기도 전... 1만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KBS 본관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전날 미처 방송되지 못한 이산가족들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송국으로 달려온 이산가족들로 방송국에 등록하고자 여의도를 찾았다. 이에 본관 공개홀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프로그램 출연 및 이산가족 문의전화로 방송국의 전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KBS의 편성책임자는 다음날인 금요일 밤에도 기존 정규편성을 취소하고 연속생방송을 하루 더 연장했다. 전날보다 회선을 5대 더 늘려 총 15대의 전화를 놓았으나 물론 이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진행자로는 전날 밤 철야를 해 가며 방송했던 유철종, 이지연, 손석기, 황인우 중계조가 이 날 밤에도 계속해서 투입되었다. 당시 유철종 박사는 옷도 못 갈아입었다. 또한 KBS 뉴스파노라마와 사랑방중계를 진행하던 원종배 아나운서가 긴급 투입되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공개홀이 비좁아지자 KBS 본관 한 가운데에 있는 중앙홀[28]에 좌석을 마련하고 여의도 내에서도 이원중계를 시작했다.
특히 이 날 밤에 방송을 보면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직장에 지각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한다.[29]
- 3일차 : 08:30 ~ 19:30
흥행대박을 직감한 KBS가 간판 에이스 아나운서들을 모두 투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철종 MC, 이지연 아나운서가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토요일 아침까지 방송을 하고 나자, 현실적으로 더 이상 진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40분간 뉴스 및 다른 프로그램이 잠시 나간 후 교대 진행자가 투입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KBS 종일방송 때 사람 교대 안 해주는 건 여전하다. 그리고 이 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종일편성[30]이 가능했는데, KBS는 10분짜리 정오뉴스를 제외한 모든 정규프로 편성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생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지금처럼 주5일제는 아니었으나 토요일은 '반(半) 공일(空日)'이라고 하여 오전근무 및 오전 수업[31]만 했기 때문에 이 날 시청률은 문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프로그램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한 특종인 것이었다. 당시 이산가족 방송중계를 보면 큐시트가 있는 TV쇼 포맷은 이미 방송 1일차에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사실상 방송사고의 연속중계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혹시나 자기 혈육이 나올까봐 TV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이산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방송을 보고 있으면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여기서 박수소리가 터지고 저기서 얼싸안고 우는 감동의 드라마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던 것. 33년이나 묵은 한 맺힌 인간드라마는 최소한의 큐시트도 필요 없었다. 실제로 이 날 방송은 전체 방송기간을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웠다. 당시 방송을 보면 PD들의 고성과 온갖 현장잡음이 오디오에 섞여드는데 혼돈 그 자체(...)
7월 2일과 3일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TV 앞으로 몰려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의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식사도 잠도 거른 채 KBS 앞에서 노숙하다시피 했고 진행자와 제작진들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김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방송을 진행했다. 2, 3일차는 중간 뉴스시간 총합 1시간 정도만 제외하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저녁 7시 30분까지, 거의 21시간을 연속 방송한 셈. 이 때문에 방송국으로 나와서 이틀 밤낮을 지새운 이산가족들이 힘들어하자 부산에서는 어느 시민 한 분이 음료수 500병을 사다 돌리기도 했다.
이 항목 맨 위에 걸려 있는 만세 부르는 오누이도 이 날 오후에 출연했다. 하단 항목 참조.
- 4일차 : 09:30 ~ 19:40
아래 외교부 공개 문서에서도 보듯,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이 호재를 당연히(?) 활용하고자 했는데 당대 국풍81이 억지흥행은 했지만 워낙에 평판을 말아 잡수신 탓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으니 이거만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소재거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첫 날 방송과 다르게 이 날부터 오프닝과 엔딩 멘트에 다분히 북한을 압박하는 지금 보면 상당히 아스트랄함을 느낄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간다.(정확히는 3일차 클로징부터.) 재미있는 사실은 이날부터 오프닝과 엔딩 멘트를 진행자들이 반드시 원고 종이를 손에 들고서 읽으면서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방송작가가 써 주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32] 사실 이전에도 흥분한 출연자들 중 일부가 "김일성이 이 XXX야, 니가 민족의 아픔을 아느냐" 하며 욕설을 하는 장면이 생방송을 탄 적이 몇 번 있지만, 아무래도 이건 흥분한 이산가족들의 넋두리에 가까운지라...
또한 이 날부터는 직업군인 출연자도 두어 명씩 등장하는데, 군부대에도 출연자를 찾으라는 협조공문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방방송국으로 달려온 부사관이 두세 명 출연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전라남도가 위수지역인 XX사단 상사이고 다른 사람은 전방에서 달려온 부사관이다. 깡통모자에 칼 각이 잡혀있고 엉엉 우는 와중에도 '전두환 각하'와 기회를 준 연대장과 사단장에게 감사하다고 반드시 언급하는 것은 덤...역시 군대다.
- 5일차 : 09:10 ~ 21:00
미처 소개하지 못한 8000번대(서울)부터 전날에 이어 계속 방송했다. 심지어 방송을 종료하기 위한 멘트를 하다가 말고 지역 국을 연결해 한 가족이 더 만나기도 했다. 이 날 클로징부터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삽입곡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6일차부터는 이산가족들의 빗발친 요구로 그간 녹화된 테이프를 KBS 여의도 본사 중앙홀과 각 지역방송국 로비에서 재방영했다고 한다. 인터넷 VOD 재방송은커녕 지역 공청 채널도 없던 시절이다 또한 KBS 제1라디오(HLKA)는 TV와 별도로 이산가족 방송을 진행해서 70여 가족이 더 상봉할 수 있었다.
- 7일자 : 22:00 ~ 익일 06:15, 10:00~17:00
이후로 메인MC 유철종-이지연, 교대MC 김동건-신은경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날부터는 KBS 제1TV와 제1라디오에서 동시 생방송을 시작했다. 단파 라디오를 통해 중공에서도, 쏘련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라는 깨알같은 멘트가 인상적.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타이틀과 삽입곡으로 들어오고, 방송 앞뒤로 80년대식 지금 보면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내레이션이 붙기 시작했다.(...)
7일차 이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33]라든가 국토통일원[34] 장관이라든가 하는 높으신 분들이 출연하기도 했고, 이 방송에 대해 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체제선전이 대폭 강화되었다.여기가 북한이냐...
또한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되는 스테레오타입의 상봉(6.25 때 헤어져서 갖은 고생 끝에 혈육의 정을 나누는 상봉)은 생방송 화면 위에 오버레이로 전쟁 기록영화 장면을 씌우고 슬픈 BGM을 깔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띄우려고 노력했고, 같은 이산가족이라도 전쟁 후의 생활고로 헤어졌다든가 단순 가출 사례 등은 상봉 장면이라도 냉정하게 잘랐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한 명이라도 더 내보내라고 난리치는 판국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사례일수도 있을 것이다, 방송이 안정화되면서는 눈물바다 대신 되레 왜 안 찾았냐고 역정부터 내거나, 서로 가는귀가 먹어 본의 아니게 만담을 하는 출연자들도 있고, 이를 보고서 방청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장면도 간간이 나온다. 진정한 의미의 휴먼 드라마.
- 8일차
- 9일차
- 10일~11일차 : 22:00 ~ 익일 08:30, 09:00~12:00, 13:00~19:00
유철종, 이지연 MC가 밤 시간 중계를 진행하고 뉴스와 드라마가 나간 후 익 일 9시부터 김동건, 신은경 조가 다음날 낮 시간대를 진행했다.[35] 특히 이 날은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KBS 본사를 위성으로 연결[36]해서 상봉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이 날 위성중계를 통해서도 세 가족이 만났다. 한국에 있는 딸이 미국에 있는 엄마를 모니터 화면으로 보면서 "엄마 얼굴 한 번 만 만져보자."하며 통곡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방송분. 상봉 장면은 35분 22초부터 또한 방송 말미에 윤덕수 정치부 기자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바로 전두환이 이날 오후 예고 없이 KBS를 방문했기 때문. 전두환이 방송에 나와서 한 마디 할 수도 있었지만 이산가족 찾는 데 방송을 1분이라도 더 할애하라는 식으로 강조하는데 그거 리포팅 할 시간에 몇 가족 더 소개하겠다는 썩은 미소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실제 방영분 보면 리포트 정말 길다.
3.3 7월 15일 ~ 11월 14일 : 상시편성 생방송
정부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국민운동(새마을 운동과 같은)으로 추진키로 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통과됨에 따라, 기존의 KBS에 접수했던 사람들은 모두 새로 접수를 해야 했다. 접수는 각 행정단위(시, 군, 구청) 민원실과 여의도 KBS 본사에서 받았으며, 이들 신규접수 명단은 모두 책으로 인쇄되어 시, 군, 구청 민원실과 KBS 옆 만남의 광장[37]에서 본인과 관계자가 열람할 수 있었다.
이후 KBS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상시편성으로 전환했는데, 주로 금요일 밤부터 방송하여 주말 종일방송 릴레이를 하는 식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라디오 등을 통해서도 상시편성을 진행했다. TV의 경우 특정한 시간대를 두고 편성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냥 편성 비는 시간대에는 다 집어넣었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주로 아침방송 종료 후 저녁방송을 시작하기까지, 혹은 오후 10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의 정파 시간대에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8월 15일 광복절 전후와 추석을 앞두고는 특별생방송을 사나흘 간 편성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릴레이 방송은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동안 단일주제 연속 생방송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서울 KBS 본관뿐만 아니라 각 지역방송총국을 SNG로 연결해서 생방송하는 기법도 이 때 활성화되었다. 현재와 비교해볼 때 조악한 방송기술이지만, 이 당시의 난장판에 가까운 실황과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 굵직한 이벤트를 거치며 한국의 방송중계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
4 출연자들의 사연
생방송 과정에서 눈물겨운 에피소드가 워낙 많아서 별별 사건이 많이 일어났으며, 출연자들이 혼절해버리거나 아나운서들조차 눈물을 참지 못하는 장면도 여러 번 있었다.
4.1 만세를 부른 오누이
이 항목 맨 상단부에 있는 사진의 주인공들. 7월 3일 방송. #실제 방송장면 보기
황해도 신막에서 살던 가족이 1947~1948년경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며 재산을 몰수당하고 누이가 먼저 월남해서 용산에서 살다가 6.25가 터진 후 모든 가족이 월남했다고 한다. 그러다 1.4후퇴 당시 한강 부교를 건너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탈 때[38] 헤어진 후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39]
이 장면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논할 때 상징적 장면으로 꼭 언급된다. 당시 이 오누이 중 오빠는 오열하며 "어머니 아버지 다 살아 계셔! 고맙습니다, KBS 만세!"를 정신없이 외쳤는데 그 와중에 "대한민국 만세!"라고도 했고, 다음날 아침 본방송의 타이틀에 나왔다. 어쨌든 KBS 찬양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출연자와 달리 비교적 말도 조리있게 하는 편이다[40]
이 장면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1983년 당시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혈연의 끈끈함, 드라마틱한 상봉, 거기에 부모님이 살아 있다는 기쁜 소식, 북한 정권의 압제와 남한 체제를 찬양하는 요소 등 압축적으로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5공 시절에는 체제 선전용으로 저 장면을 많이 써먹었다. 그리고 독재정권이 무너진 1987년 이후(제6공화국)로는 좀 다른 의미로 많이 써먹었다. 어쨌든 KBS측으로서는 자신들에게 만세를 불러주는 그림이 나오니 홍보는 톡톡히 된다.
4.2 넌 김씨가 아니야! 허씨라고!
7월 5일 오후 허현철, 허현옥씨 남매의 상봉 장면. #지역국 연결 확인장면 #인터뷰 장면 두번째는 PD가 약을 거하게 빨았다.
허씨 남매의 경우는 허현옥씨가 자기 이름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오빠 허현철씨가 "넌 김씨가 아니야, 허씨야! 개도 자기 이름은 아는데,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살았어..." 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특히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모두들 알아야 한다고!"라고 하는 장면은 지금도 이산가족 찾기 홍보 방송에서 심심하면 써먹는다.
이 상봉은 제주와 대전의 지역 국을 연결하여 만난 사례였는데, 방송 첫 날 허현옥(당시 출연 이름은 김정애)씨가 화면에 소개된 것을 보고 허현철씨가 지역방송국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제주방송 첫 연결 및 허현옥 소개 장면 그리고 나흘이 지난 후 가까스로 지역국을 다시 연결시켜 대조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잠깐 상봉이 이루어진 후 시간관계상 제주 쪽 출연자들 사연 소개로 마이크가 넘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KBS 서울 본사의 부조정실에서 사연소개를 뎅겅 자르고, 다시 제주와 대전을 연결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리고 PD가 약을 빨았는지 생방송 중에 전쟁 기록영상과 구슬픈 BGM을 삽입했고, 결과는 위에 쓴 대로 눈물바다. PD 입장에서는 이거 사연 팔이(?)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인터뷰를 다시 붙였던 것 같으나, 실제 연출의도 이상으로 너무나 기막힌 사연이었던 탓에 대박(?)을 친 것. 게다가 당시 방송을 진행하던 (자신도 역시 오빠를 이북에 두고 온 이산가족이었던) 이지연 아나운서가 끝내 울음을 못 참고 생방송 도중에 무대 뒤로 빠져서 울음을 터뜨렸을 정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이자, 혈육의 정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허씨 남매는 2013년에도 유철종 박사, 이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3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에 출연해서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당 에피소드를 녹화한 여유만만 녹화장이 바로 30년 전 방송을 진행한 그 공개홀이라고 한다.
기타 유명한 장면은 별도 항목으로 추가바람.
4.3 그 외 각종 사연들
- 7월 3일 낮방송 중에는 급기야 #스튜디오에서 만나 얼싸안은 가족이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피난 와중에 부모의 손을 놓쳐 천애 고아가 된 뒤 식모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온 중년 여자가 가족을 찾은 뒤 "왜 나만 버렸느냐"며 울부짖자 칠순이 넘은 고령의 모친이 충격에 못 이겨 공개 홀에서 실신한 것이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쥔 채 응급처치를 하고 의무실에서 사람을 부르고, 타 지역 국 연결 중에 잠시 흘렸던 눈물을 미처 닦지 못한 광경(김동건 아나운서 자신도 이북이 고향인 실향민이다.) 등이 그대로 TV전파를 타고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또 전국이 울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날 다른 상봉가족에게 아나운서들이 "지금 어머님께서 혈압이 있어요!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시고..." 하며 출연자들을 애써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 박○○ 자매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전쟁 이후 생활고로 각각 다른 집에 양녀로 보내져 헤어진 케이스인데, 이들 자매 중 한 명을 입양한 가정이 바로 시인 노천명의 집이라고 한다. [41] 이 자매는 7월 9일 방송에서 만나게 되었다.
- 접수를 하러 왔다가 공개홀이나 여의도광장에서 바로 만나게 된 케이스도 여러 건이었다. 개중 몇몇은 공개홀로 초대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이 계속 벽보를 떼 가서 대체 어느 놈이 이러는가 하고 보려니까, 나랑 똑같은 이름들을 써놓은 플래카드를 갖고 있더란 말이지요...그래서 만났습니다."라는 출연자도 있었다.
- 워낙 어릴 적에 헤어져 이름밖에 기억을 못하거나 혹은 자기 이름조차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서로 "마을에 큰 나무가 있었고, 외삼촌댁이 ○○리에 있었고"라고 기억해내는 것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고, 서로 전쟁 때 입은 각종 흉터 등을 지역 국 간 TV카메라에 보여주며 확인하는 사례도 많았다. 위의 허현철 허현옥 남매의 경우도 허현옥씨가 자신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흐린 날 이발소 집으로 입양되었다'는 것만 가지고 서로 확인한 사례.
- 6.25 외에도 해방 직후 일본이나 만주에서 귀국하면서, 혹은 38선 분단 이후 월남하면서 헤어진 케이스도 상당히 된다. 특히 경기, 강원도 북쪽과 일부 황해도 쪽에 살던 가족들 중 이런 사례가 많다.
- 아주 어릴 때 헤어진 사람들의 경우는 한국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희미하게 기억나는 일본식 이름으로 찾는 사례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데, 당연히 창씨개명의 영향이다. 또한 한국지리나 국사 교과서에서 그냥 배우고 넘어가는 '시대별 인구 이동' 항목이 실제로 어떠한 역사적 비극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여러 번 확인의 기회를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3번이나 동명이인으로 확인되어 결국 찾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 가족을 만나서 우는 것도 우는 것이었지만, "KBS 방송국 감사합니다."라든가 "대한민국 만세"나 심지어 "전두환 대통령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다. 앞의 두 개는 몰라도 대통령 만세를 외치는 장면은 지금 시각으로 봐서는 상당히 괴상하게 느껴진다.
- 김일성에게 욕설을 퍼붓거나[42]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 1.4 후퇴 후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다 실종된 14세 아들 이대식을 찾는 노파가 #출연했었는데, 2015년 3월 28일자 그것이 알고싶다 '소년북파공작원 - 우리는 총알받이였다' 방송에서 밝혀낸 바로는 소년 북파공작원으로 이용되어 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리고 실종 60년 만에 국가에선 1952년 사망한 것으로 통보. #기사 링크
- 설운도씨가 기억하는 케이스 중에는, 방송 출연자 중 상복을 입고 온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출연자의 어머니께서 이산가족이라 매일같이 KBS 공개홀로 나오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는데,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혹여나 어머니가 찾으시던 가족이 나올지 몰라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것이라고.
5 방송 외적인 사항들
5.1 여의도 만남의 광장
그리고 KBS 본관 앞은 물론이고 여의도광장[43]은 불과 하루 사이에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7월 1일 KBS 중앙 홀에서 밤을 새기 시작한 이산가족들은 폭증하는 신청으로 인해 KBS에서 더 이상 접수를 받지 않게 되자 KBS 본관 건물 벽과 기둥에 스스로 벽보를 써서 붙이기 시작했다. 벽보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본관의 손닿는 부분까지 모두 도배되어버렸고, 벽보공간은 점차 여의도광장 앞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벽보를 붙이다 말고 상봉한 운 좋은 케이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맛비를 맞아가며 바닥과 입간판에 벽보를 붙여놓거나, 혹은 직접 벽보를 앞뒤로 매달고 다니며 애타게 가족들을 찾고 있었다.
7월 9일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범정부 차원의 국민운동으로 전환되자 현재의 한국산업은행 부지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하여 지역별로 섹션과 천막을 설치하고 이산가족 찾기 명부를 갖다놓았다. KBS는 11월에 방송이 종료된 후에도 이 '만남의 광장'을 다음해 여름까지 꼭 1년간 유지했으며, 그 동안 사무국의 이산가족 담당 업무도 계속했다고 한다.
방송인 이상벽과 만남의 광장을 찍은 사진작가 조인환 등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벽과 바닥에 수없이 붙어 있는 종이가 어느 한 장 남이 붙인 것 위에 자기 것을 덧붙이는 사람이 없었다며, 그 당시 사람들이 자기가 애타게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배려하는 마음씨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5.2 삽입곡
대표적인 노래라면 이 두 곡이 있는데, 위 영상은 KBS 계정에서 직접 올렸다.(...)
- 1일차 방송에는 중간 중간에 가수들이 출연해서 가요무대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부분이 있었다. 첫날은 현인과 김연자가 출연해서 애수 띤 노래를 불렀고, 아나운서들은 이 사이에 잠깐 쉬면서 PD의 지시를 전달받거나 하는 일종의 브릿지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 의도는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제작진들은 곧 알 수 있었는데,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방청객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던 것.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 또한 이산가족이니... 게다가 2일차로 넘어가면서 공개홀이 이산가족과 방송 제작진들, 그리고 신문기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탓에, 김연자씨는 2일차에는 16시간동안 대기하면서 노래 딱 한 곡 불렀을 뿐이었다. 이후에는 BGM만 걸어놓고 카메라워크로 방청객의 벽보를 훑는 연출만 하다가, 상시편성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다시 가수가 등장해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설운도는 이 때부터 공개홀 붙박이가 되었다(...)
- 초기 타이틀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이 방송 이전까지는 그렇게까지 유명한 노래는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곽순옥이란 가수의 노래로, 1964년에 방영된 라디오 드라마 '남과 북'(극본: 한운사)의 주제곡이었다. 1983년 방송을 계획했던 당시에, 이 타이틀곡을 원곡가수인 곽순옥에게 맡기고자 하였으나 당시 곽순옥이 홍콩에 거주하고 있었던 관계로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패티김이 대신 불렀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위 영상과 같이 곽순옥 본인이 직접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여기서는 '남과 북'이라는 원래 이름으로 나온다.) 드라마 '남과 북'은 신영균,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신일룡, 원미경이 주연한 리메이크도 나왔다. 이후 MBC에서 90년대 초반에 박상원, 이미숙, 길용우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었을 때에는 원래 제목인 '남과 북' 대신 이 노래의 제목이 타이틀을 차지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뜻밖에 20년 후인 2000년대에 들어서 예능에서 뭔가 안습한 상황이 발생할 때 효과음으로 쓰이게 되었다.
- 상시편성 이후에는 타이틀이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으로 교체된다. 설운도는 KBS의 '신인 탄생'이란 방송을 통해 1981년 데뷔했으나 2년 가까이 무명에 가까운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설운도의 소속 회사에서 TV에서 이 방송을 보고, '이거다!' 싶어서 '아버지'라는 곡을 하루 만에 개사해서 녹음한 후에 방송국에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폭발한 스케줄 표를 보고 가족들이 모여 울었다고 회상한다. 왜 설운도였냐고 하니 회사 측에서 하는 말이 '그 때 스케줄 비어있는 가수가 설운도밖에 없었다.'라고(...). 방송 초기에는 가사도 다 못 외워서 매니저가 앞에서 가사를 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설운도 본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루 종일 공개홀에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기다리다가 PD가 찾으면 즉시 무대로 올라가서 큐 사인 떨어지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 방송기간 동안 '잃어버린 30년'을 무려 천여 회 정도 불렀는데, 객석에 서 있으면서 이런저런 사연도 그 자리에서 보고 듣고 같이 울고 하다 보니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나고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고...
- 이외에도 이때다 싶었는지 대세를 편승한 많은 노래들이 발표되었다. #이 노래 이름은 제목부터 아예 '이산가족'이다.(...)[44]
- 그리운 금강산, 따오기 등 가곡이나 동요 등도 삽입곡으로 들어갔다.
- 후일 KBS에서는 '잃어버린 30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을 포함하여 각종 가수들이 부른 삽입곡들을 레코드로 발매했다. 앨범 제목부터가 잃어버린 30년 설운도씨는 이 앨범을 아직도 집에 모셔놓고 있다고.
5.3 해외 반응
방송의 반응이 워낙 뜨거웠던 데다가 냉전시대에 갖는 역사적 의미도 다분했기 때문에 미국, 일본 등 제1세계 매체에서 주요 토픽으로 다루었다. #영상보기 유네스코 출품작인 이 영상에서는 AP의 텔레타이프 타전과 미국 ABC의 7월 3일 보도, 그 외 일본 TBS의 보도가 들어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이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북한의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 장면도 들어 있다.
#이 홍보 영상에도 13분부터 ABC 뉴스 나이트라인, NHK 토요리포트 보도 장면이 들어있다. 그런데 NHK 토요리포트에서 당시 KBS 뉴스 9 오프닝을 내보내는데 하필 그건 NHK 뉴스센터 9시 타이틀 수파 디자인을 베낀 거다. (...) NHK 관계자들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생각해보면 그냥 흑역사.
5.4 대북 심리전?
2014년 3월 26일에 비밀 해제된 외교부가 1983년도에 작성한 문서에는 본 프로그램을 대북 심리전과 안보 교육용으로 활용할 것을 각국 재외 공관에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특별생방송을 기획, 진행한 KBS와 정부는 인도적 문제로 접근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터넷 매체 '통일뉴스'의 #외교문서 공개내용 보도에 따르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태생적으로 심리전용 기획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실제 방송내용을 복기하여 보면 이 문서는 릴레이방송이 개시된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연속생방송 날짜가 틀려 있다. 종일특집편성 생방송은 7월 4일까지 지속되었고, 7월 5일부터 상시편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초반 3일간은 땡전뉴스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대북심리전 뉘앙스를 풍기는 멘트를 찾아볼 수 없다.[45] 실제 멘트에서 체제선전과 심리전용으로 보이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3일차 중반부 김동건 아나운서의 진행부터인데, 1, 2일차 방송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1일차에는 언제 방송하겠다는 내용도 없이 '다음에 다시 한 번 이런 기회를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3일차까지는 '원래 이렇게 길게 방송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라고 하는 진행멘트가 여러 차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편성기획 상의 종일생방송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외교문서 공개와 실제 방송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방송이 철저히 심리전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나, 흥행으로 인해 각 외교공관에 이산가족 찾기 컨텐츠를 체제선전 및 대외심리전용으로 활용하라는 문서가 하달된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그리고 7월 10일에는 아예 범국민적 운동(새마을운동 같은)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주관이 되어 추진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러한 대외적 압박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1984년 한강 대홍수 당시 북측 적십자는 남측에 구호물자와 쌀을 전달하였고, 1985년에는 적십자를 통한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된다.
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당국과 KBS는 프로그램 관련 기록물 전반을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키로 하였으며, 마침내 2015년 10월 9일(현지시각) 유네스코에서는 한국의 유교책판과 함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 녹화 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기록유산은 총 13개 항목에 이르며, 이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것이다. KBS는 깨알같이 이 뉴스를 다음날 아침 뉴스광장 탑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453시간 45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연속 생방송 기록이라는 특징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고발하고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방송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관련 방송기록 이후 두 번째이다.[46][47]
7 그 외
- 방송기간 동안 5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를 찾았고, 방송에서는 100,952건이 접수되었으며 그 중 53,536건이 방송되고 결과적으로는 10,187명의 사람들이 서로 만났다.
- 이산가족이 생긴 지 30년(휴전 기준)이 지나다 보니 헤어질 때 어린이였던 사람들도 대체로 각자 가정을 이뤘는데,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보니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가족들 주변에서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 연예인 가운데에도 이산가족이 많았고, 이들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 가족을 찾으려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기도 했다. 배우 김해숙의 어머니가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김해숙과 나란히 인터뷰하기도 했다. 배우 故 김인문이 전화로 가족을 확인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개그맨 엄용수(현재는 KBS 희극인 협회장)는 30주년 기념 특별 방송에 출연해서 당시에 누님을 찾고 있었는데, 혹시 자기가 집에 갔을 때 누님이 방송국을 찾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식구들이 돌아가며 24시간 방송국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 의외로 만난 후에 오히려 갈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생활수준이나 사는 환경이 비슷한 이산가족끼리 만나는 경우는 그런대로 관계가 유지되지만, 가족 중 한 쪽이 재혼을 했거나 극빈층으로 떨어진 경우는 오히려 집안 문제가 커져서 외려 연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전쟁의 비극.
- 한편 임권택 감독의 영화 '길소뜸'은 위에서 말한 '이산가족이 만난 뒤의 후유증'을 냉정하게 그려서 화제가 되었다. 극중 신성일과 김지미가 만나는 여의도 광장은 당시의 실제 화면을 그대로 이용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 이산가족 찾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 지금 기준으로 보면 좀 뜨악한 장면들이 있는데, 전두환 찬양 같은 모습도 그렇지만 서로 거리낌 없이 주소나 전화번호를 방송에 대고 교환하는 모습이 보인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없던 시절이고 인터넷이 없어서 어차피 신상털이도 못하던 시절이긴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저래도 되니 싶은 장면들. 또한 지금 세대들이 보면 알아듣기 힘든 것 중 하나가 "화천군 ㅇㅇ면 000번"이라고 지역이름+번호를 대는 것인데, 이 당시는 서울과 직할시(현 광역시), 일부 대도시급에만 전자교환기(DDD)가 설치되어 있었고 현재처럼 국번+전화번호 체계(ex: 02-782-4000)였으며 중소도시나 읍면지구에는 여전히 사람이 교환하는 수동교환기 방식이었다.
- 2014년에 개봉한 황정민, 김윤진, 오달수 주연의 한국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흥남 철수 때 헤어진 아버지와 여동생을 찾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생방송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을 SNL 코리아에서 패러디를 했다. 물론 약간의 섹드립과 신동엽 멘트 중 광고가 나간다는 고증오류가 좀 있었다 카더라.
- 국제시장에서는 방청객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가 죄다 커다란 흰색 도화지인데, 실제로는 베이지색 혹은 연두색 마분지에 매직으로 쓴 손 글씨다. 이 실물 플래카드는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30여년이 지나 이제 매직으로 쓴 글씨는 상당히 바래 있다. 방송기록을 본 후 실물을 보면 생각보다 종이가 작다고 느끼게 되는데, 스케치북 크기 수준밖에 안 되기 때문. 이는 1983년 당시 한국 사람들과 경제발전 이후 21세기의 한국인 간 신체 사이즈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방송에 등장한 노인들의 경우 이 작은 마분지로도 어깨가 다 가려질 정도.
- KBS에서는 추석이나 설날 때마다 이때를 회고하는 프로그램 등을 내놓는다. 2013년 5월 1일 KBS 2TV '여유만만'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3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메인 진행자였던 유철종, 이지애 MC와 출연자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분들 중 하나인 허현철, 허현옥 남매를 초청해 특집방송을 꾸렸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다들 정정하시다흥미롭게도 현재 여유만만 녹화 장으로 쓰이는 공개스튜디오는 30년 전 이산가족 찾기가 생방송으로 진행된 바로 그 장소인 KBS 본관 스튜디오 공개홀이다.
가장 최근에 방송된 프로그램은 KBS1에서 2015년 9월 25일 오전 "추석특집 만남의 강은 흐른다"이다. 이산가족 찾기 당시 대자보들을 복원해 붙여놓은 KBS 광장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실제 당시에 상봉한 가족들과 함께 출연은 했지만 상봉하지 못한 분들도 함께 출연했다. 연령대는 대부분 80~90 사이.
- ↑ 이 사진을 촬영한 후 불과 3개월 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
- ↑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 ↑ The Archives of the KBS Special Live Broadcast "Finding Dispersed Families"
- ↑ Les archives du programme spécial KBS “Retrouver les familles dispersées”
- ↑ 자세한건 블록광고 항목 참고
- ↑ 1980년대 중반에 KBS에서 인구 센서스 통계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표준 남성을 선정했는데 아내 및 두 아이와 함께 살며 집에 전화가 없는 40대 남성 가장이었다.
- ↑ 1970년대 초반까지는 정말로 조사빼곤 전부 한자였으며, 1980년대는 비교적 쉬운말은 우리말로 적는 수준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한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랬기 때문에 1988년 순한글을 표방하는 한겨레신문의 창간은 엄청난 사회적 충격이었다.
- ↑ 인터넷의 전신인 PC통신은 이 방송 2년 후인 1985년 데이콤에서 '생활정보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선보이지만, 이게 대중화되는데도 10년이 넘게 걸렸다.
- ↑ 서울, 6대 광역시, 제주도의 지역번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나 나머지 8도는 시/군마다 지역번호가 달랐다. 경기도를 예로 들면 고양시가 0344, 수원시가 0331이었으며, 이런 식의 4자리 지역번호가 136개나 있었다가 무려 2000년 7월 2일에 와서야 지금의 체계로 바뀌었다. ㅎㄷㄷ... 자세한 것은 지역번호 항목 참조
- ↑ 당시에는 대만식 표현인 중공(中共)이라는 명칭을 썼다.
- ↑ 아침마당의 전신격인 프로그램으로 1987년 봄 개편 때 "가정저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1년 봄 개편 때 현재의 "아침마당"으로 바뀌었다.
- ↑ 그래서 해당 방송 초기에 전주KBS나 대구KBS를 호출할 때 대구기독방송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 ↑ 1980년 언론통폐합 때 이적한 경우가 아니다.
- ↑ 다만 신은경은 주말뉴스에 투입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 동양방송이 언론 통폐합으로 폐국 될 때 TV/라디오 통틀어 가장 마지막 방송이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최후의 콜로 유명한 아나운서였다.
- ↑ 상단의 오누이 상봉 장면도 나온다.
- ↑ 유철종 MC가 훗날 실제로 이렇게 회고했다.
- ↑ 그러나, 실제로는 800명 넘게 접수하여 관객석까지 이산가족이 꽉 채웠다.
- ↑ 30여 년 동안 적십자를 통해 3천 여 가족이 만났다고 한다.
- ↑ 현재의 경찰청
- ↑ 방송 장비가 죄다 최신식 일제였다.
- ↑ 이런 기술적 차이의 또 다른 예는 88올림픽 이후인 1990년대 초반까지 ID영상과 넥스트 영상은 본사에서는 80년대 초반부터 움직이는 영상으로 썼지만 지역 국은 정지영상이나 스틸을 송출하는 정도였다.
- ↑ 현 시청자본부 총무국
- ↑ 현재의 KT가 한국전기통신공사이던 시절의 명칭.
- ↑ 생방송 진행 과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편성해서 최장 1시까지 연장할 계획은 있었다고 한다.
- ↑ 현재의 KBS 뉴스라인과 KBS 마감뉴스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자정 종합뉴스
- ↑ 1981년 언론통폐합 이후 (방송사가 두개뿐이니까) '못해도 2등'이라는 나태한 의식이 팽배해 있던 80년대 KBS, 그것도 KBS1에서 이런 시청률을 기록한 건 정말 대단한 거다.
- ↑ 현재도 남아 있는 어정쩡한 공간. 원래는 NHK 요요기센터를 건립하고 운영한 노하우를 가진 기술진들이 이를 더욱 발전시킨 설계를 적용하여 입체대도구가 한 번에 이동 가능한 6개의 스튜디오가 리볼버식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의 병크로 인하여 실무자들이 유럽에 견학하러 간 사이에 설계가 변경되어버렸고, 현재도 이곳은 로비도 아니고 홀도 아닌 어정쩡한 높이와 넓이를 지닌 공간이어서 카페 몇 개와 라디오 오픈 스튜디오가 들어와 있다. 어차피 지금은 신관 뒤에 KBS홀이 또 생기면서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 ↑ 2002년 월드컵을 생각하면 된다.
- ↑ 당시는 24시간 방송을 하지 않았고, 평일에는 아침 5시 30분~10시, 저녁 5시 30분~자정 전후까지 방송했고, 토요일에는 아침5시 30분~10시까지 방송한 후 3시간 정도 쉬다가 다시 낮1시부터 시작, 자정 전후까지 방송했다. 아침방송과 저녁방송의 중간에는 정파 시간이라고 하여 TV를 틀면 치직거리는 소음 외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 혹은 컬러바 송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이후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오늘 오후의 방송순서'라는 자막과 함께 오후에 방송할 프로그램과 배경으로 한강 풍경 등이 나오기도 했다. ) 종일방송 포맷은 일요일과 공휴일, 그리고 특별 실황중계(재난방송 등)시에만 사용되었다. 물론 전두환의 해외순방 귀국 환영식 같은 건 짤 없이 전파낭비해가며 중계해줬다.(...)
- ↑ 놀토문화가 정착된 건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2005년부터이다.
- ↑ 진행자의 멘트에서 언급됐듯이, 방송 4~5일차 즈음이 마침 7.4 남북 공동 성명 11주년이 되는 때였다. 때가 때이니 7.4 남북공동성명을 구실삼아 대북 비난 멘트를 날릴 수 있었다.
- ↑ 당시 총재인 유창순 그 자신도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의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높으신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공개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 ↑ 현재의 통일부
- ↑ 일요일 낮 시간대가 비는 것은 전국노래자랑 때문.(...) 어찌 보면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도 잘라버리는 시청률 끝판 왕 국민 예능 전국노래자랑의 위엄 이때는 송해 선생님이 사회 보시기 전이다. 뭐야 이거(...) 참고로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MC를 맡기 시작한 건 1988년부터.
- ↑ 미국 ABC 방송국에서 지원해줬다.
- ↑ 여의도광장이 복잡해지니 현재의 KDB산업은행 부지에 아예 '만남의 광장'을 따로 마련했다.
- ↑ 한강인도교는 6.25 전쟁 발발 3일 후에 폭파되어 복구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고, 기차는 한강 이남까지만 운행했다.
- ↑ 나중에 이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가족 중 한명은 예전에 죽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 ↑ 전두환 대통령 만세라고 언급한 출연자도 실제로 있었고, 나중에는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등장한다.
- ↑ 하지만 본인이 고생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양녀라기 보다 식모로 들어간듯..
- ↑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들은 전쟁의 원흉인 김일성이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하다. 개중에는 김일성에게 복수하겠다고 군대에 말뚝 박아서 상사 말년차인 출연자도 있었다.
- ↑ 현재의 여의도공원 전체가 아스팔트 광장이었다.
- ↑ 이 노래를 부른 전미경씨는 12년 후 드라마 장녹수에 삽입된 장녹수라는 노래로 유명하다.
- ↑ 2일차에 정치부 기자가 출연하여 남북분단 연혁을 잠깐 설명하는 장면은 있지만, 상봉장면이 계속되면서 리포트는 흐지부지된다(...).
- ↑ 다만 이 경우에는 방송 외에도 서류, 증언 등이 함께 등재되었다. 순수하게 방송물이 주축이 되어 등재된 것은 최초.
- ↑ 최초의 영상물 등재는 2001년에 등재된 메트로폴리스이다. 1927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