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登之戰 | ||||
Battle of Baideng |
"마땅히 번쾌(樊噲)를 참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일찍이 사십만의 장병을 이끌고 계셨던 고제(高帝)께서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에 처하셨는데, 오늘날 번쾌는 오직 병사 십만으로 흉노(匈奴)를 유린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더욱이 진(秦)은 흉노 정벌에 지나치게 국력을 낭비해서 진승(陳勝) 등이 반기를 드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제 오늘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번쾌는 태후의 면전에서 아첨하여 천하를 동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사기(史記)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
중국 위키백과나 여러 책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은 백등지위(白登之圍). '백등산에서의 포위' 정도의 의미인데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Battle of Baideng이라고 하여 '백등전투' 라는 일반적인 전투로 작성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백등지전(白登之戰)으로 표기하면서 일반적인 전투를 일컫을 때 쓰이는 지전(之戰)이라는 표현을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지만 터키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Istanbul Military Museum)에서는 The Siege Of Baideng 이라고 하여 '백등산 포위전' 이라고 정확히 한정시켜 표현하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경우 아예 항목이 없어서 참조를 할 수가 없고 일본어 위키백과의 경우 白登山の戦い(백등산의 전투)로 표기하고 있다. 그 외에 평성지치(平城之恥), 즉 평성의 치욕으로 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본 항목은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백등지위의 뜻에 맞게 하여 '백등산 포위전' 으로 항목을 우선 작성하고, 추가로 백등지전 · 백등지위 · 백등산 전투 · 평성지치로 검색해도 찾아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백등산 포위전 | ||
날짜 | ||
BC 200년 | ||
장소 | ||
중국 산시성 북부 대동(大同)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한(漢) | 흉노(匈奴) |
지휘관 | 유방 주발 유경 진평 근흡 관영 하후영 | 묵돌 한신 조리 왕항 좌우현왕[1] |
병력 | 32만 | 40만 |
결과 | ||
흉노의 승리, 한군의 탈주 | ||
기타 | ||
중화제국에 대한 흉노의 우위 확립 |
목차
1 개요
기원전 200년 현재의 산시성 대동 부근인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에서 벌어진 한(漢)과 흉노(匈奴)의 전투. 문헌 상 양측의 병력이 도합 72만으로 언급되는데,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상당한 전력이 서로 맞붙어 흉노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초에는 반란을 일으키고 흉노의 앞잡이가 된 한왕 신(韓王 信)을 정벌하려는 유방(劉邦)의 원정이었지만 이후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제국의 시대를 활짝 열어 유목사(遊牧史)의 흐름에서는 실로 기념비적인 대사건인 동시에, 초한대전(楚汉战争) 이후 이제 막 유일무이한 전중국 통일 제국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 전한(西漢)으로서는 개국 초기부터 입게 된 최악의 시련. 이후 수백년간 이어진 한제국과 흉노가 벌인 대사투의 서막을 열게 된 전투이다.
2 배경
2.1 흉노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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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염(蒙恬) |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흉노는 중국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문헌에 기록되는[2]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주로 조(趙), 연(燕) 같은 나라들과 엮이는 일이 많았으나 조나라의 장군 이목(李牧)에게 대패를 당한 이후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곧이어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시황제(始皇帝)의 명령을 받은 진나라 명장 몽염(蒙恬)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 하투(河套) 남쪽의 영역을 모조리 진나라의 판도로 만들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흉노 외에 동호(東胡)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월지(月氏)가 번성하였는데 그 동호조차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를 못해 북쪽으로 옮겨가서 살아야 했을 정도니, 흉노로서도 무얼 손 써보기가 힘겨운 상황이었다.
인고의 세월이 지난 후에 사악한 환관 조고(趙高)의 농간으로 몽염이 죽고, 진나라가 너무나 엄격한 법치주의로 무너지며 진승 · 오광의 난의 발생하고 초한쟁패기에 이르는 대혼란기가 되자, 진나라의 변경을 지키던 죄수들을 감시할 인력도 사라졌고 이에 국경의 병력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 흉노는 서서히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였으며, 몽염 때문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영역을 되찾기 시작했다.때마침 흉노는 두만(頭曼)에 이어 묵돌(冒頓)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얻게 되었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수장의 존재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황이 변하는 유목민들[3]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혼란이라는 좋은 때에 좋은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탈취할 만큼 강력한 지도자였던 묵돌은 동호와 월지를 모조리 격파하여 삽시간에 흉노를 북방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만들었으며, 과거 몽염에게 잃어버렸던 영역을 다시 되찾아오고 마침내 현재의 산시성 위린시(楡林市) 부근과 허난의 옛 요새에 이르렀다.
묵돌은 연나라 지역과 대(代)의 영역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활 시위를 당길 수 있는 병력만 30만에 이르러 이전의 흉노와는 전혀 다른 강력함을 보이게 된 것이다.
2.2 한나라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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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의 항우와 유방 |
흉노가 쇠약하던 시기에서 절정의 세력으로 치고 올라가는 모습과는 반대로, 당시 중국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진나라 말기부터 이어진 지나친 부역과 토목 공사로 백성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으며, 진승의 난 이후 초한전쟁이 벌어지며 그 고난은 절정에 이르렀다. 초한전쟁은 전중국을 아우르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었고, 사방에서 유랑민들이 들끓었으며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시 백성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언급들은 다음과 같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滎陽)에서 몇 해 동안 대치했으나 승패가 나지 않아 젊은 군사들은 오랫동안 행군과 군사작전에 동원되어 싸움이라는 진저리를 치고 있었고, 늙고 허약한 자들은 군사들의 양식을 운반하느라 피로가 극도에 달해 쓰러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中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흉흉한 것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나와 한왕이 싸워 자웅을 결한다면 천하의 백성들과 그 자제들이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 中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국이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묵돌이 스스로 강성해질 수 있었고,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군사만도 30여 만에 달했다. -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 中
"이제 오늘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번쾌는 태후의 면전에서 아첨하여 천하를 동요시키려고 합니다!" - 사기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中
고조가 동원에서 돌아와 미앙궁(未央宮)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노하여 소하(蕭何)에게 말했다."지금 천하는 흉노의 침략과 제후들의 모반으로 동요되어 몇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성패를 알 수가 없소. 이렇게 긴박한 와중에 어찌하여 궁실을 과도하게 축조한 것이오?" -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中
즉 이제 막 헬게이트에서 벗어나려는 참이었으므로,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전중국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평정한 통일 진 초기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BC 202년 해하 전투 이후 한나라는 명실공히 통일제국이 되었으니, 아무리 사정이 좋지 못하다 하여도 상당한 군사를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에 흉노는 통제할 수 이는 범위를 넘어서 강해져 있었다.
3 전개
3.1 한왕 신의 배신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의 황제 유방 역시 흉노의 침입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유방의 눈에 들어온 적임자가 바로 한왕 신[4]으로, 그는 초한전쟁 기간 동안 유방을 따라다니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유방은 한신의 봉국을 태원(太原) 이북으로 옮겨 치소를 진양(晉陽)으로 삼아 코 앞에서 흉노의 공격을 막는 임무를 맡겼다.
이미 당시부터 한신의 관할 지역은 흉노가 수차례 공격해오는 위험지역이었는데, 한신은 보다 방어가 용이한 마읍(馬邑)[5]으로 치소를 옮겨주길 원했고 유방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해[6] 가을, 흉노의 묵돌은 대군을 이끌고 마읍으로 침공해왔다. 선우가 직접 군단을 이끌고 온 것이니 산발적인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공격이었고, 한신은 흉노에 수차례 사람을 보내 싸움을 막고 강화 협상을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한신이 그렇게 당혹스러운 지경에 놓였을때, 한나라의 군사들 역시 한신을 구하기 위해 출진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된 점이라면, 흉노와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지만 한신이 너무 자주 흉노에 사절을 보냈다는 점이었다. 유방은 이때문에 혹여나 한신이 흉노에 항복하려는것은 아닌지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 훈계를 했는데, 문제는 유방의 의심병에 마찬가지로 의심병이 도진 한신 역시 "혹시 나를 모반 혐의로 죽이려는게 아닐까" 하고 겁을 먹고 흉노에 투항해버린 것이다.[7]
한신이 배신한 다른 이유로는 공신인 자신을 별 볼일 없는 북방으로 보내 흉노나 상대하도록 한 유방의 배신에 분노해 배신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의 자업자득.
당연히 그 즉시 마읍은 흉노를 막기 위한 수비기지에서 흉노 선우를 위한 선물이 되어버렸고, 묵돌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태원까지 진격하였으며, 한신의 군사 역시 태원으로 진격하였다.
이전까지 흉노와 싸우면서 투항을 한 병졸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한왕 신은 전한 건국 이후 단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명이었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흉노를 막기 위해 유방이 점찍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배신을 했으니, 이 충격은 웬만한 정도로 끝날 차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3.2 유방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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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진격로 |
당연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유방은 BC 200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동제(銅鞮)[8]로 진격하여 한신을 박살내고 한신의 부하였던 왕희(王喜)의 목을 베어버렸다.
일단 한신은 패전을 한 상태에서, 분노한 유방을 피해 흉노로 도망쳤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것은 한신이 거느렸던 병사들이었는데, 백토현(白土縣) 출신의 장사꾼이었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은 이 한신의 패잔병을 수습해서 군사력을 갖춘 후, 옛 조나라 왕족의 후손인 조리(趙利)라는 인물을 왕으로 추대했다.
물론 조나라 왕족을 왕으로 세웠다고 해서 한나라의 상대가 될리는 만무했다. 이들의 목적은 도망친 한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흉노에서는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을 보내 각각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양까지 진격하게 했는데, 유방은 이 군대 역시 물리쳐 버렸다. 흉노군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한군은 기세를 타고 그들을 쫒아 이석(離石)[9]에서 또다시 전투를 벌여 흉노군을 무찌르는데 성공했다.
흉노군은 패잔병을 어찌어찌 수습했으나, 한군은 누번(樓煩)에서 전차병과 기병을 앞세워 흉노군을 재차 격파하였다.[10] 이 시점까지는 한군은 계속 흉노군을 상대로 승전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묵돌의 유인책이었고, 워낙 날씨가 추운데다 심지어 눈비까지 내린지라, 많은 한나라 병사들은 동상에 걸려[11] 손가락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유방에게 흉노의 우두머리인 묵돌이 대곡(代谷)[12]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방은 계속되는 승리로 자만심에 빠져 경계심을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은 듯 하다. 유방 본인은 진양에 머물면서 일부러 사자(使者)를 10명이나 흉노의 진영에 보내 정탐을 하게 하는 치밀한 모습을 보인것.
하지만 묵돌은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한나라의 사자가 온 것이 무슨 의도인지 간파했고, 일부러 건장한 병사와 튼튼한 말은 될 수 있는대로 숨기고 비루먹은 말과 노약자만 사자의 눈에 보이게 하였고, 눈에 본 것만 믿은 사자들은 돌아와 한결같이 "흉노 저 놈들, 골골대는것 보니 한번 치면 날라가겠습디다." 하고 보고를 올렸다.
결국 이런 보고가 이어지자 유방은 심리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묵돌의 낚시에 걸리고 만 것. 이때 마지막으로 낭중(郎中) 유경(劉敬)이 사자로 흉노의 진영을 다녀오고, 묵돌의 속임수를 눈치채고 유방에게 간언을 올렸다.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한다면, 이는 마땅히 자신들의 장점을 부풀려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이 가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루먹은 가축과 노약자들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단점을 일부러 보여주어 우리 한군을 유인하여 매복전으로 승리를 취하려는 기병계(奇兵計)입니다."
하지만 유경이 그 말을 하였을때는 이미 한나라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던 참이었고, 출전하는 와중에 재수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긴 유방은 유경에게 "이 색히, 아가리만 살았구나!" 라고 욕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돌아와서 손봐줄 요량이었는지, 유경에게 족쇄와 수갑을 채워서 광무(廣武)에 가둬두고 말았다.
3.3 포위
당시 32만의 한군은 주로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자를 통한 정찰로 승기를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유방은 전군을 휘몰아쳐 공격해 왔다. 그러나 추위가 너무 심해서 병사들의 손실도 만만찮은 상황에서, 아직 한군의 전력이 모두 집결하지 못했을 무렵에 유방은 평성에 도착을 했다.
병력은 많지만 아직 전부 한 곳에 모이지 못했고, 적의 지휘부가 도출되어 있는데다 적군이 추위로 지친 상황. 묵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40만의 기병을 모조리 동원하여 한군을 몰아넣었고, 곧 평성 부군의 백등산에서 유방이 이끄는 군대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한군은 이미 최악의 날씨때문에 병사들이 동상에 걸릴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지만, 바로 흉노의 주력을 격파할 수 있을것이라고 여겼기에 무리해서 진군을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제 포위가 되어버리자 그동안 참고 있었던 악조건은 곧바로 뼈가 시리게 다가왔다.
물론 포위된 한군과 포위망 밖에 있는 한군 역시 서로 협력을 해서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겠지만, 묵돌은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일주일간 물샐틈없이 유방의 주력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외부와 연락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포위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제 식량의 공급이 문제가 되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주력군은 포위망에서 굶어 죽게 될 판이었다. 흉노군은 포위망의 서쪽에서는 백마를, 동쪽에서는 청색의 말을, 북쪽에는 흑색의 말을, 남쪽에서는 붉은 말을 타고 있어 그 위세가 당당했다.
이때 호군중위의 직책으로 유방을 수행하고 있던 진평(陳平)이 계책을 내었다. 묵돌의 아내인 연지(閼氏)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서 설득을 해보자는 계책이었는데, 구차하긴 했지만 굶어 죽을 순 없었으므로 진평의 제안을 따라 많은 보물을 연지에게 보냈는데, 이에 혹한 연지는 묵돌을 설득했다.
"양국의 군주가 서로를 곤궁한 지경에 몰아넣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는 우리는 이곳에 살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나라의 왕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선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무리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해도 그 말 때문에 수십만 대군을 물리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묵돌도 고민하고 있던 점은 있었다. 당초에 협력하기로 했던 왕황과 조리는 흉노의 군사들과 다시 합류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정작 이때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한나라와 다시 손을 잡고 뒤통수를 치게 되면 꽤 골치아픈 상황이 될 수도 있었으므로, 묵돌은 굳이 무리수를 놓치 않고 연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만 노골적으로 포위를 모조리 푼것은 아니었고, 한 곳의 포위망을 약하게 풀었다.[13]
이때 때마침 백등산에서는 크게 안개가 끼었다. 포위망의 한 곳이 풀린것을 본 유방이었지만,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노심초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그 길을 지나게 했는데, 안개 탓인지 흉노군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때가 돼서야 한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개가 끼었다고 해도 그 대군이 모두 움직이면 들키는건 시간문제다. 이에 진평은 강노(强弩)에 두 개의 화살을 메겨 밖으로 향하게 하며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한군이 움직이게 했다.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흉노를 향해 강노를 들이밀고 걷는 숨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포위망에서 탈출한것을 깨달은 유방은 곧바로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하후영(夏侯嬰)은 오히려 그런 유방을 제지하고, 병사들에게는 계속 화살을 장전하게 하고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14]
이렇게 하여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흉노군을 피해 평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군이 탈주한데다 마침 한나라의 대군이 추가로 도착하자, 묵돌도 군사들을 거느리고 떠났다. 유방은 씁쓸한 기분으로 귀환하면서 유경을 풀어주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4 결과
한참 절정기의 세력을 과시하던 흉노를 전한은 꺾지 못했다. 묵돌은 이후 마음 놓고 중국의 북방을 유린하였지만, 이미 패전을 당했던 유방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유방은 이를 염려하여 유경에게 대책을 물었고, 유경은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사람들이 지쳐 우리는 저들을 무력으로 물리칠 수 없다. 그러나, 장구하고 원대한 미래를 계획하면 우리의 후손은 저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우선 지금은 유방의 맏딸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보내 묵돌의 아내로 삼게 하고, 많은 보물을 주어 적당히 다독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에 노원공주는 이미 조왕(趙王)의 장오(張敖)의 아내였다.
유방은 유경의 이러한 계책에 대해 "좋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여후(呂后)는 밤낮으로 울면서 유방을 설득했다. 아무리 대국적인 결정이라고 해도 여후가 이렇게까지 하자 유방도 차마 진짜 딸을 보내지는 못하고, 결국 다른 여자[15]를 데려와 공주라고 속이고, 유경을 통해 선우에게 보내 혼인을 하게 하면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16] 이때부터 한나라는 매년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술,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했다.
화친 이후 유방은 유경의 제안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으로 인구 10만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화친에도 불구하고 한신, 왕황, 조리 등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수시로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5 영향
이 전투의 영향은 실로 막대한데, 사건 자체만 봐도 황제가 포위되어 여자에게 구걸하여 간신히 탈주하고, 이후 가짜 공주를 보내 속이면서까지 화친을 해야 했던 엄청난 흑역사였다. 그러나 진짜로 중요한 점은 한순간의 쪽팔림 정도가 아니라 이 전투 이후로 적어도 100여년간 한은 흉노에 대하여 저자세로 나가야 했다는 점이다.
유경의 제안으로 흉노와 화친을 맺게 된 한나라였지만, 실제로는 그 후에도 흉노는 수차례 군사를 보내 한의 변경을 유린했다. 이는 유방이 죽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여후는 묵돌에게 대놓고 조롱을 받았지만 이를 참아야 했다. 한문제 시절에도 전한은 흉노에 저자세로 일관했으며. 적어도 군사력 부분에서 흉노는 분명하게 초기의 한나라에 있어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향후 한나라의 군사 대전략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흉노의 유인 → 포위 전술에 말려들어 패배한 이 전투의 임팩트가 너무나 막대했기에 이후 한문제, 한경제(漢景帝)에 이르러서도 흉노를 상대로 한 전쟁은 주로 쳐들어온 상대를 막는 정도에 급급했지, 역으로 공격해 들어가는것은 정신나간 행위로 치부되며 실현되지 못했다. 한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넘어 흉노의 영역으로 진군해 나간 것은 건국 70년 후, 위청(衛靑)의 진군부터였다.
이후 한나라는 길고 긴 시간을 조용히 참으며 문경지치의 시대를 거쳐 포텐셜을 터뜨리는데 성공했고, 한무제의 시대에 곽거병 등이 흉노 땅을 역으로 헤집어 버리는 복수에 성공했고, 후한 대에 이르면 흉노는 대단히 약화되어 남흉노(南匈奴)의 경우 한나라의 속국 정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수모를 참으며 힘을 모으면 자손들은 그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는 유경의 말은 긴 미래로 보면 어쨌든 실현되게 된 셈.
흉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리즈시절 그 자체. 진나라 때문에 밀려난지 불과 몇십년 사이에 세력을 엄청나게 확대했고, 결국은 한나라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 때문에 흉노의 역사를 다루는 책, 글 등에서는 무조건 언급하고 지나가는 전투다. 이후 수백년간 물고 물리는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사실상 이 전투로 시작되었다고 무방하기에 흉노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비중을 가지고 있다.
흉노의 입장을 떠나 유목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 전투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이후 2,000년간 지속되는 중국의 제국과 북방 유목민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따라서 유목사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에도 항상 언급되는 전투. 여하간 자세한 전개 과정까진 아니더라도 전투 자체는 상당히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6 한신, 팽월, 영포 등이 전투에 나섰으면?
이 전투에 대한 패전의 원인을 이야기할때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가 유방의 토사구팽으로 명장들이 죽어버려 군사라고는 모르는 유방이 나가 발려버렸다는 식의 이야기다.
하지만 bc 200년 당시에는 한신, 팽월(彭越), 그리고 영포(黥布) 모두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토사구팽을 당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오직 한신 밖에 없었다.
이 당시 한신은 바로 직전해인 BC 201년, 모반 혐의를 받고 진평의 계책을 참고한 유방에게 사로잡혀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떨어져버린 상태였다. 그 후에는 두문불출 하며 유방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고 두려워 하고, "내가 관영, 주발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 ㅠㅠ" 하고 불평을 늘어놓던 시점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한신에게 30만이 넘는 군대를 맡긴다고 생각을 해보자. 잘못하면 묵돌로 인한 흉노의 위협은 귀여울 정도(……)의 헬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시당초 '한신의 출전' 은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지휘관이 아니라 유방을 따라가는 정도라면 가능 할 수도 있겠지만,[17] 당시 한신은 병을 핑계삼아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군을 한다면 병은 구라라는 이야기를 스스로 입증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한신이 진짜로 예전처럼 작정하고 나섰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는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진 못해도 최소 패전은 면하지 않았을까.
또한 팽월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시작점이 진희의 반란에 본인이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는데, 이때의 원정에 본인이 참여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초한전쟁 중에 팽월은 주로 항우의 뒤치기를 하고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활약을 했고, 항우와 정면으로 맞붙은 전투는 해하 전투 밖에 없었다.
또한 영포는 거록대전 등에서 활약을 했지만, 얘는 반란을 일으켜서... 영포의 반란을 유방이 진압한 것 때문에 유방을 띄우는 사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진압군이 반란군에 비해 유리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보급, 머릿수 동원, 명분, 신뢰도, 피로도 등) 점에서 영포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유방도 그리 맹탕은 아니다. 그 항우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 만 해도...실제 백등산 전투에서도 유방은 묵돌의 유인책에 대해 어느정도 의심을 하고 사자를 파견하는 등의 혜안은 보여주었다. 묵돌이 더한 너구리여서 그렇지…… 하지만 유방은 묵돌의 속임수에 넘어갔으며 병사들을 무리하게 끌고가서 참패한 것은 유방 본인의 실책이다. 유방이 맹탕이 아니라고 하나 유방이 전쟁에서 그렇게 능수능란한 것이 아닌것은 분명한 사실. 상대가 뛰어난 탓[18]도 있다.
그 시점에서 유방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판단은 아예 평성으로 진군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즉 평성으로 진군한 이상 승리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개인의 군사적 능력보다는 차라리 병종(兵種)의 차원으로 가야할 일이고, 지휘관의 영역은 유인하는가, 유인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쪽이 맞을 것이다.
묵돌은 필승의 고지로 한군을 유인하기 위해 책략을 사용했고, 유방 역시 이에 대해 사자를 파견하여 적을 정탐하는등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묵돌은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한군에게 있어 재앙이 되었다.
- ↑ 인명이 아니라 작위명이다.
- ↑ 흉노는 문헌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문헌은 당연히 중국의 문헌이다
- ↑ 단석괴나 묵철의 경우를 보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존재하자 세력을 순식간에 키우면서도 그 지도자가 사라지자 눈깜짝할 사이에 몰락하기도 했다
- ↑ 그 유명한 회음후 한신과는 동명이인 사이로, 다른 사람이다
- ↑ 산서성 삭현
- ↑ BC 201년
- ↑ BC 201년 9월
- ↑ 산시 장치(長治)현
- ↑ 산시성 뤼량(吕梁)
- ↑ 이때는 주발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한다
- ↑ 정확한 언급은 열에 한둘
- ↑ 산시성 대동의 동쪽
- ↑ 사기나 자치통감에서는 '한 곳의 포위망을 풀었다' 고만 나와 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유방에게 달아날 길을 주려는 생각이었는지, 일단 한군이 포위망 바깥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려는 참에 기습 공격을 하려는 의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한군의 행동을 보면 적어도 한군은 후자의 목적이 있지 않은가 하고 의심한듯 보인다
- ↑ 패전에서 가장 큰 병력 손실이 있을때는, 우왕좌왕 하면서 퇴각하는 와중에 추격군에게 공격을 당하는 일이다. 이 점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 ↑ 가인(家人)의 자식을 보냈다고 나오는데, 안사고는 서민의 딸을 데려다가 공주라고 이름을 붙혔다고 설명했다
- ↑ 사마광은 묵돌은 자기 아버지도 때려잡았는데, 이제와서 장인이라고 한나라를 공격 안하겠나? 하고 멍청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물론, 이미 장오와 결혼한 노원공주를 장오에서 뺏어 주려고 했던 일도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깠다
- ↑ 훗날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한신은 병을 핑계로 삼아 종군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종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종군 할 수는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 ↑ 숨기는 것도 막상 말을 하는 게 쉽지,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기병이라 왔다갔다 하기 좋아 좀 쉬울 수도 있겠지만 유방처럼 정탐을 보내서 확인하는 경우에는 그리 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