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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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동명성왕(東明聖王) /추모성왕(鄒牟聖王) / 추모왕(鄒牟王) 중모왕(中牟王) / 동명성제(東明聖帝)/백제 태조(百濟 太祖)[1] | |
성 | 고(高)/ 해(解)[2] | |
휘 | 추모(鄒牟) / 추몽(鄒蒙) / 주몽(朱蒙) / 중모(中牟) / 중해(衆解) / 상해(象解) / 도모(都牟) / 도모(都慕) | |
생몰년도 | 음력 |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40세) |
재위기간 | 음력 |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18년) |
1 개요
휘는 추모(鄒牟), 추몽(鄒蒙), 주몽(朱蒙),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牟), 도모(都慕)의 다양한 기록이 있다. 이는 모두 같은 순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음차해놓은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주몽이라는 이름은 고유어를 한자로 음차할 때 일부러 '朱蒙'자[3]를 붙인 이름이다.
모두루 묘지명에는 추모성왕(鄒牟聖王)으로 기록되어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엔 추모왕(鄒牟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선 '동명성왕의 이름은 주몽(朱蒙)이고 혹은 추모(鄒牟)라고 불린다.'라고 적혀있다.
삼국유사나 민간에선 동명제(東明帝) 혹은 동명성제(東明聖帝)라는 시호로 불렸다. 삼국유사에선 고주몽을 거의 일관되게 동명제라고 부른다. 고려사에선 고려국왕이 동명성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는 기사가 있다.[4]
이름들의 유래를 알아보면
- 추모(鄒牟): 삼국사기,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 주몽(朱蒙):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 중모(中牟):삼국사기[5]
- 중해(衆解): 삼국사기
- 도모(都慕): 신찬성씨록[6]
- 도모(都牟):
- 상해(象解):
- 추몽(鄒蒙): 삼국유사(왕력편)
생부인지 계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명성왕은 일단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도 몇몇 고구려와 백제계열 성씨의 조상으로 나타나며, 여기에 도모(都慕)[7]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하는 각 사료들의 원문이다.
생각컨데,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광개토대왕릉비』 제 1면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本紀 第一)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문무왕이)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생략)...그대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생략)...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하박(河泊)[8]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결락)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夫餘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
『모두루 묘지명』
2 생애
2.1 탄생 설화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 신화에 의하면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강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 전하고 있다.[9][10]
어느날 해모수가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보고는 꾀어내서 함께 하룻밤을 지냈으나 다음날에 혼자서 승천해 버렸다고 한다.[11] 유화부인은 중매도 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하백에게서 쫓겨나 떠돌다가 태백산 우발수까지 밀려났다가 동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의 사연을 알게 된 금와가 유화를 거두어서는 궁 안으로 데려와 방안에 두었다.
이후에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유화의 몸을 내리 쬐었는데, 유화가 아무리 이를 피하려 해도 햇빛은 계속 유화의 몸을 비추었다. 그 이후에 유화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괴상하게도 알을 낳았다. 금와왕이 알을 돼지나 짐승에게 주거나 들판에 내버려도 짐승들이 알을 해치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였고,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릴 수가 없어 결국 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 즉 주몽 이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한 대소[12]를 비롯한 동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피살당할 뻔 했고, 부인 예씨와 모친 유화, 그리고 예씨의 뱃속의 아이 유리를 남긴 채[13] 오이,마리, 협보 등의 친구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리를 이끌고 자신이 하늘의 자식임을 이용해 자라와 물고기로 다리를 만들어 큰 강을 건너 동부여를 탈출하였다.
이후에 동명성왕의 일행은 졸본 땅에 도착하였고, 훗날 이곳을 도읍으로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국 설화는 광개토왕릉비에도 나와있다.[14]
2.2 건국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本紀 第一) 시조 동명성왕(始祖 東明聖王)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왕조를 개창했고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졸본 땅은 말갈에게 자주 약탈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말갈족을 물리쳐서 그들이 다시는 졸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두번째 아내를 맞이하게 되는데 삼국사기에선 두번째 아내의 이름은 소서노라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서노가 재물이 많아 주몽이 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15] 조선시대때 작성된 동국통감에선 주몽이 졸본부여에 오자 그곳의 왕이 그를 큰 인물이라 여겨 자신의 둘째 딸을 주어 결혼하게 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지 4년째 되던 날에 궁실과 성을 쌓았고 근처에 있던 비류국왕 송양을 굴복시키고, 비류국을 다물도로 삼았다. 다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관련 기사.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소국들을 병합하여 도시로 만들었다.
冬十月 王命烏伊 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겨울 10월, 임금이 오이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
十年 秋九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고, 그래서 동명성왕 사후에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와 그 두 아들 비류, 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2.3 죽음? 승천?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9년 9월 40살때 승하하여 용산(龍山)에 임금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왕은 홀본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이후 온조왕이 기원전 19년에, 대무신왕이 서기 20년에 각자 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다. 백제 이후에도 고려, 조선 역시 평양에 동명성왕의 사당을 만들어 제사지냈다는 자료가 많다.
하지만 그가 승천했다는 설화들도 굉장히 많은데 어느날 도성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왕이 옥채찍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서 채찍을 모셔서 묘를 썼다고 전해진다.[16] 참고로 이 옥채찍은 송양을 굴복시킬때 사용한 홍수를 없앨때 사용한 물건 같다는 설도 있다. 또다른 설화로는 기린을 길들였으며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17]는 설화가 있다. 평양에는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이 남아 있었으며, 고려 말엽에는 민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또한 동명성왕이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조천석이라는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 동명성왕은 평양에 와봤을 리가 없는데 왜 평양에 유물이 이렇게 많을까?라는 을 가질수 있는데 기린굴은 몰라도, 조천석 정도는 평양에 있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동명성왕은 살아 생전에 요동성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 성의 사당에서는 동명성왕의 갑주와 창을 모셔두고 있었다. 후대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봤을 때,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뒤 시조신으로 동명성왕을 모시고, 이후 고려가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평양을 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창이나 칼도 아니고, 국조가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어마어마한 성물을 옛 수도라고는 해도 수도가 아니게 된 곳에 계속 두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한편《고려비기》라는 책에서 조천석은 연개소문이 초청해서 중국에서 불러온 도사들이 깨버렸다고 써져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멀쩡히 평양에 남아 있다는 말도 있다. 통일이 돼야 확인해볼 수 있을 듯.
평양에는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동명왕릉이 있다.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1994년에는 크게 개건을 하였다. 단군릉 수준의 막장은 아니지만 상당히 큰 규모로 만든 편.
3 숭배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요동성이 당에게 공격을 받는 기록에서, 요동성에는 그의 창과 갑옷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무녀가 있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무녀의 예언을 듣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 무녀가 "주몽이 기뻐하시니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했지만 결국 함락됐다.[18] 동명성왕의 유물에 관련된 기록이 남은건 요동성 뿐이지만, 나라의 시조신인 만큼 요동성에만 이런 사당이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주요 도시마다 사당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19] 무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사 의식에는 무속 적인 요소가 강하게 있었던 듯 하며, 왕건의 상으로 추측하여 초상이나 상(象)을 만들어서 모신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20]
그 이름에 걸맞게 신궁(神弓)이라고 불리었으며, 물레 위의 파리를 쏘아 잡았다거나 송양과 나라를 두고 재주를 겨룰 때 1백보 바깥의 옥가락지를 깨었다는 등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양궁 선수들을 가리켜 '주몽'이라는 표현을 언론에서 쓸 정도로 현대 한국에서도 명궁의 대명사로 통한다.
조선시대에는 평양에서 단군, 기자와 함께 평양의 삼성(三聖)으로 모셔지고 있었다.[21] 드물지만, 현재에도 동명신(東明神)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있다. 2006년 방영했던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그리고 정말 여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국사와 세계사를 따로 배우기 때문에 동명성왕이 마치 신화속 인물쯤 오래된 인물로 생각하지만, 위의 연도를 보면[22] 고대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비슷한 연배다.[23]
4 정체에 대한 논란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존중해 동명왕보다 추모왕이라는 칭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향인지 동명왕과 추모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설이 생겨났다.
참고로 동명왕 전설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나오는 부여 건국설화와 상당부분 일치하며, 백제의 왕족들의 성씨를 보면 주몽은 일단 부여계라는 게 거의 정설이다. 즉, 고구려의 건국왕인 주몽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부여의 건국설화인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고리국→부여, 부여→고구려로 이동하는 부분도 그렇고 설화 자체가 거의 똑같아 상당부분 동명왕전설을 차용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평가받는다.
이때 일부에서는 고주몽이라는 이름에서 '주'는 난쟁이 주이며 '몽'은 어리석음을 뜻하는 몽으로 중국쪽이 추모왕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성은 해씨에서 고씨로 고쳤다 하나, 아들인 유리명왕 대부터는 다시 해(解)씨(《삼국유사·왕력》)로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 왕계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동명왕만이 아니라 이후 고구려 왕족의 계보도에서 여러 문제가 발견되기 때문에 해씨 고구려설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아마 주몽의 원래 성씨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터인데 6대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를 차용하게 되면서 건국왕의 성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혹은, 해씨를 쓴 게 맞으나 원래는 방계였던 태조대왕계가 고씨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추모왕계에 대한 신성화의 과정에서 동명왕이 고씨임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면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도 자연히 고씨가 되기 때문에 해씨를 성으로 썼던 역사가 묻힌 거라는 것이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도 초기 왕족보에서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가 삼국시대 중기에 가서야 정립되기 시작한 걸로 생각되기 때문인 듯. 또한 중기부터 왕위를 확립한 왕족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계에 조작을 가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기에 고구려 시조 주몽에 대해선 논란이 클 수 밖에 없다.
후한서에 나오는 '고구려후(侯) 추'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선 이 '추'라는 인물은 우리 측(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라고 적혀있다. 유리명왕 본기에 자료가 존재한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고구려와 부여 설화 차용과 관련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동명성왕의 건국설화, 즉 하늘신이나 하늘신의 아들이 강의 신의 딸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주변의 사악한 왕의 미움을 받다가 도망쳐서 왕국을 세운다는 내용의 설화는 중앙유라시아의 건국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벡위드 교수는 스키타이, 흉노, 몽골, 투르크를 비롯한 유목국가뿐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나 중국의 주나라 등 중앙유라시아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주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건국설화로 삼고 있다고 한다.
4.1 훗날 매체에서의 동명성왕
- KBS 사극 근초고왕 1화에 백제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주몽이 등장했다. 이덕화가 연기한 이 주몽은 활은 하나도 안 쏘고 칼질만 보여준다. 오히려 명사수 액션을 보여준 건 정애리가 연기한 소서노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二年夏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三年春三月 황룡이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경사스런 구름이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짙은 구름과 안개가 끼다
四年秋七月 성곽과 궁실을 짓다
六年秋八月 신기한 참새가 궁전에 모이다
六年冬十月 행인국을 정복하다
十年秋九月 난새가 왕대에 모이다
十年冬十一月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삼다
十四年秋八月 동명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다
十四年冬十月 부여에 토산물을 주다
十九年夏四月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도망해오다
十九年秋九月 동명성왕이 죽다
6 관련 인물
- ↑ 일본 신찬성씨록 기준 온조의 친아버지 설채택시 백제측에서 올린 묘호
- ↑ 동사강목에 따르면 부여에서 거주할 때의 성은 해씨이며 고씨는 고구려를 건국할 때 바꾼거라고 한다.
- ↑ 비하적 표현이라고도 본다. 무지몽매 할 때 쓰는 '우매할 몽(蒙)' 을 쓰므로. 상식적으로 중국측 기록에서 이민족의 우두머리를 좋게 표현할이유도 없고.
- ↑ 고주몽이 고려 후대에가서 신격화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다, 고려사,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에도 동명성제와 관련된 자료가 나온다.
- ↑ 신라 문무왕이 안승을 왕으로 봉할 때 언급
- ↑ 일본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성씨에 관한 책
- ↑ 일본어 음독은 とも. 출처 : [1]
- ↑ 하백을 의미.
- ↑ 아마도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추정된다. 나라의 시조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는 일은 고대 국가에서 상당히 흔했기 때문. 또한 해모수의 '하늘'과 유화의 '물'이라는 상징으로 볼 때, 고구려의 뿌리는 농경사회라는 설이 있다.
- ↑ 삼국유사 왕력 동명왕 부분에서는 주몽이 '단군(壇君)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단군은 단군왕검과는 한자가 다르다.
- ↑ 구삼국사를 보고 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등장인물만 같고, 내용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탄생설화가 전한다.이규보의 동명왕편
- ↑ 후의 대소왕.
- ↑ 이때 뱃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부러진 칼조각을 남기는데, 관련된 내용이 그리스의 테세우스에 대한 설화와 거의 같다.
- ↑ 다만 광개토왕릉비는 왕의 권위와 그의 신성함에 대해서만 적혀있을 뿐 시련에 대한 언급은 없다.
- ↑ 나중에 보면 알지만, 예씨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기 때문에 중혼일지도 모른다.
- ↑ 다만 그의 뒤를 이은 유리가 사실 태자신분이 아닌 찬탈자로써 주몽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정설이 아니고 기록이 불분명하기에 그런 설이 있다는 정도로 알면 좋겠다.
- ↑ 다른 곳에서는 용을 타고 올라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진다.
- ↑ 작가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서는 이 전설을 차용해서 요동성에 창과 활과 갑옷이 있는 사당이 있었고 요동성은 이것만 믿다가 털린후(...) 사당과 유물이 통째로 불에 타는 걸로 서술한다. 그런데 작중에서 활은 공간 이동을 해서 안시성으로 날라간후에 이세민을 저격하여 최종적으로 눈을 멀게하고 산산히 부서진다.
- ↑ 요동성은 크고 중요한 성이긴 했지만 최외곽지역의 성이자 비교적 후기에 편입되었던 곳으로 고구려의 전통적인 영토는 아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내지에는 더 상징성이 큰 시설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 고려도경의 내용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도 고구려시대와 비슷한 방식의 초상, 상 숭배가 내려오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 ↑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돼서 제외되었다.
- ↑ 이는 물론 확인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 ↑ 둘이 비슷한 연배지만 한쪽은 명확하게 존재하는 인물로 확인되고, 다른 한명은 그 존재의 진위가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면 역사 기록과 그 보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