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역사

< 담배


담배의 역사를 설명한 항목.

1 기원

마약으로서의 담배보다는 역사가 일천하지만 오랜 과거로부터 존재했다.

서기 7세기경 마야 신전의 벽에, 이미 제사장이 담배를 피우는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 담배에 대해 말할 때 담뱃잎을 피운다는 개념을 떠나서 어떤 종류든 풀이나 약초 등에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아들이는 '흡연' 문화는 기원전에도 인류 곳곳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씨라는 게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서 사제가 있는 신전 같은 곳에서 처방받아서(불까지 붙여줘서) 피우거나 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 원주민들의 전설에 따르면, 너무나 못생겨서 남자들이 다 피하는 것에 비관자살한 여자가 죽기 직전 '세상의 모든 남자들과 키스하고 싶어요'라는 소원을 빌었고 그녀가 죽은 자리 위에서 생겨난 것이 담배라고 한다. 뭐, 소원은 확실히 이룬 것 같다(…). 그리고 여자들하고도 키스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서의 주인공은 기생으로 죽어서도 남자들과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그녀의 무덤에서 담배가 자라났다고 한다. 아마 위 이야기가 담배와 함께 전해진 모양이다. 아무튼 다들 한 맺히거나 욕망에 충만한 소원이라서 저주까지 묻어나왔나 보다. 말 그대로 죽음의 키스

흔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주술의식에 사용하던 것을 서양(유럽)인들이 기호품화 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나 신대륙 발견 이전부터 이미 남유럽에서 자생했었다는 설도 일부에서 제기된다. 어쨌건 15세기~16세기 대항해시대 돌입과 함께 기호품으로 전 세계로 급속히 전파된 것은 사실이다.

2 서구권 상륙

담배가 유럽의 문헌에 가장 처음 언급되는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를 통해 원주민에게서 잎담배를 받아온 뒤였다. 영국에선 16세기 후반에서야 귀족인 월터 롤리가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는데, 물론 당시에는 담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고, 원주민들에게 받아온 담배만으로 피워야 했다. 당연히 담배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골초가 된 롤리는 방에서 몰래 혼자 피웠다. 어느 날 하인이 우연히 보니 주인 머리에서 연기가 나는 것에 기겁하고 다른 하인들에게 주인 머리에 불이 난다고 말하는 통에 하인들이 물을 가득 가져와 그냥 머리에 끼얹어버렸다.(...) 자연 발화 방지 이게 얼마짜린데 ㅜ

막상 담배가 알려지긴 했어도 유행이 되는 것은 반세기나 지나서였다. 본격적인 담배 경작의 시초로 평가되는 것은 프랑스인장 니코약초로서 담배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담배의 주요 성분인 니코틴의 어원 또한 이 사람이다.

초기에는 시가만 있다가, 시가잎을 자르다가 남은것을 종이에 말아 피우는 궐련, 담배잎을 절여 파이프 등에 넣고 피우는 파이프 담배 등이 생겨났다. 물담배 역시 넓게 보면 파이프 담배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에 말하는 담배는 대개 궐련이다.

흡연자와 비흡연자와의 대결은 이미 담배 보급 초기인 15세기부터 존재했다. 이때 열었던 토론회를 보면 지금과 매우 흡사한데 비흡연자는 입냄새, 건강 악화, 비흡연자에 대한 피해 등을 주장한 반면, 흡연자들은 입이나 손이 심심할 때 달랠 수 있다거나 초면에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옹호했다. 보급 초기에는 성적 흥분을 유발시킨다 하여 악마의 도구로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력을 감퇴시킨다.

담배는 인삼과 더불어 지력을 소모하여 땅을 상당히 척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여성이 담배를 피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컸는데, 여성의 흡연은 남녀평등의 상징이라며 여성 흡연을 적극 권장하던 움직임도 이 때 일어났다. 럭키 스트라이크는 당시 PR의 달인이었던 에드워드 베네이즈[1]는 심리학자 A.A. 브릴과 함께 여성 흡연은 여성 해방의 상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담배 소비량을 크게 늘렸다. 이상론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쓰이는게 아니라는걸 보여주는 사례. 이 광고 이후로 늘어난 흡연량 때문에 폐단으로 인해 건강을 해친 자들 또한 크게 늘었으며 베네이즈의 아내도 폐암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PR로 인해 저지른 폐해[2]를 생각하면 인과응보.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군대의 정식보급은 물론 미군은 아예 전투식량에 담배를 포함해 공급하는 통에 전세계에 걸쳐 대량으로 골초를 양성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시 미군이 지급하던 K-Ration의 경우 끼니마다 4개비씩의 담배가 레이션에 공식 포함되어 있다. 미국서 나온 전시광고들을 보면 남녀공히 대놓고 흡연을 권장하며 여성이 담배를 물고 있는 장면들도 광고에 많이 나온다. 공식적으로 미군은 술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대신 담배와 커피를 병사들에게 적극 권장했는지라...
우측 K 레이션 사진을 보면 4개비씩의 담배가 아침, 점심, 저녁 분량으로 포함

반면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는 흡연 자체를 혐오했고 여성흡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독일은 오히려 흡연하는 병사들이 담배 지급량이 적어 불만이었다는 안습전설이 전해지며 특히 SS 친위대 출신의 지휘관들은 흡연 자체를 막는 경우마저 있어서 부하 흡연자들은 더욱 불쌍한 처지였다. 윈스턴 처칠이랑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독한 시가 흡연자라 혐연자를 이겼다카더라 사족으로 패전 후 독일에선 미군의 담배가 대용화폐로 사용되기도 했다.

3 한국 상륙

조선에는 임진왜란일본으로부터 고추, 호박, 고구마 등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엔 남령초(南靈草), 연다(煙茶), 연주(煙酒)등 다양하게 불렸다. 현재 남아있는 문헌 중 가장 오래된 담배 언급은 1614년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약초로 와전되어 있다(…). 서구와는 다르게 말아 피우는 시가 대신 파이프 담배라 할 수 있는 '곰방대'부터 들어왔다. 조선시대 담뱃대의 길이마저 반상과 권력의 차이를 반영했으며 양반님네들이 피우던 장죽이 서민들에게 넘어오면서 곰방대로 간소화되었다. 담배라는 이름은 조끼같은 이름처럼 일본이 유래인데 영어 tabacco의 일본식 표기인 タバコ가 담바고로 전해진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 처음 담배가 들어왔을 당시에는 담배에 위아래를 따지는 예절이 없어서 신하들마저 너도나도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조회를 하는 정전이 너구리굴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서당에서도 훈장학도가 같이 맞담배를 피우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손자에게 담배 피우라고 해놓고 귀엽다고 칭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래에 기술된 것처럼 광해군 때부터 맞담배를 금지하였다. 광해군은 지독한 혐연가였으며 "내 앞에서 담배 피우면 너님 뒤짐"을 시전하여, 이 때부터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한국의 예절이 되었다. 또한 나중엔 담배 때문에 하도 화재가 자주 생겨서 금연령을 내린적도 있었다고 한다. 정조는 담배 예찬가였는데 또 아들 순조는 혐연가였다고 한다.

실학자 이익이 자신이 접한 것들을 여러 주제에 걸쳐 기술한 성호사설에 담배에 관한 부분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많이 유행된 것은 광해군(光海君) 말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담파국(湛巴國)이란 나라에서 들어온 것인 까닭에 속칭 담배[湛巴]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가 태호 선생(太湖先生)[3]에게, “지금 이 담배란 것이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입니까?”고 묻는다. 태호 선생은, “담배란 가래침이 목구멍에 붙어 뱉아도 나오지 않을 때 유익하고 구역질이 나면서 침이 뒤끓을 때 유익하며,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고 동작이 나쁠 때 유익하고 가슴이 조이면서 신물이 올라올 때 유익하며, 한겨울에 추위를 막는 데 유익한 것이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또, “그러면 담배는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다는 말입니까?”고 묻는다. 태호 선생은, 〈몸에 이롭고 해로움을 따진다면〉 해가 더 심할 것이다. 안으로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듣고 보는 것까지 해쳐서 머리가 희게 되고 얼굴이 늙게 되며, 이가 일찍 빠지게 되고 살도 따라서 여위게 되니, 사람을 빨리 늙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 담배는 유익한 것보다 해가 더 심하다고 하는 것은 냄새가 나빠서, 재계(齋戒)하여 신명(神明)을 사귈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재물을 없애는 것이 둘째이며, 세상에 일이 많은 것이 진실로 걱정인데, 지금은 상하노소를 막론하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여 한시도 쉬지 않으니 이것이 셋째이다. 만약 이런 마음과 힘을 옮겨서 학문을 닦는다면 반드시 대현(大賢)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글에 힘쓴다면 문장도 될 수 있을 것이며, 살림을 돌본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역(周易)》에, ‘상륙(上六)은 오르는 이치에 어두우니, 곧고 바른 데에 한결같이 쉬지 않는 것만이 이롭다.’ 했다.”고 답하였다.” - 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 남초(南草)편

보다시피 담배가 대단히 해롭다며, 오죽하면 담배 구하러 다닐 시간에 공부하고 돈 벌면 뭐라도 되겠다며 까고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에 대단히 담배가 널리 퍼져 있던 것과, 흡연이 영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인식 역시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담배가 해롭다는 이유로 제시된 내용이 오늘날의 상황과 매우 비슷한 것이 담배 피우면 건강에 안 좋고 돈 많이 드는 건 당연히 옛날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째 담배의 유익한 점으로 거론된 얘기들도 오늘날 흡연자들의 변명과 비슷하다

구한말(대한제국기)에 이르면 그 곰방대조차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간소화된다.[4] 궐련은 개화기를 전후에서 생긴 것으로 보이며, 초기에는 독하고 비린 맛이었으나 이후로는 1mg 등 약한 담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타르함량 10mg 이상의 담배는 팔지 못한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10mg 이상으로 팔리는 다비도프, 럭키 스트라이크 등도 모두 타르 함량을 상당히 깎아내 출시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5년에는 일제에게 빚을 갚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에 '금연 동맹선언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빚이란 일종의 강제적 차관으로,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간 차관을 떠안겨 생겨난 빚이었다. 금연하여 담배값을 아껴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고, 완전히 끊을 건 없이 몇 달간만 담배값을 모으면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기생들이나 고종도 운동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 운동은 결실을 맺어 실제 일부 빚을 갚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수가 틀어지자 또 차관을 떠안기는 바람에 결국 실패. 천하의 개쌍놈들... 이때 발생한 웃지 못할 아이러니로, 담배를 끊은 사람들 상당수가 대용품으로 은단을 구입했는데, 이게 일본 수입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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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최초로 자체제작한 담배는 1945년 광복을 기념해서 바로 만들어진 승리 담배. 그 다음으로 동년의 장수연이 이어졌고, 이듬해 1월에 백두산, 무궁화, 백구 등이 생산되면서 국산 담배 역사가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덤으로 한국 담배 가운데 긴 역사를 자랑하는 것은 1949년[5]에 제조가 시작되어서 1981년 11월에 단종된 군용담배 화랑이다.

참고로 북한 담배는 한국산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지독하다고 한다. 경수로 공사 일로 북한에 가서 일하던 한국 관계자들이 북한 측 인사들과 어찌 친해져서 담배를 교환하여 서로 피웠더니 북한 관계자는 "뭔 놈의 담배가 피우나마나한 느낌이냐?" 반응이었고 한국 측 관계자들은 담배 피우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독한 거에 놀랐단다. 월북군인(...) 찰스 로버트 젱킨스의 회고록을 보면, 북한에서 담배라고 지급해 준 물건들은 하도 금방 타들어가서 침으로 축축이 적시지 않으면 단 3모금도(...) 빨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젱킨스가 언급하는 이 시기는 북한의 나름 리즈시절이라는 1970년대인데.... 안습....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어른들에게 선물로 담배를 10갑 단위로 사다 드리는 문화가 있지만, 북한에서 담배는 선물을 넘어서서 뇌물로까지 써먹을 수 있는 귀하신 몸이다. 사용처도 다양해서 기차표를 얻는다거나(...) 시장에서 자리를 얻는다거나, 열차에 짐을 싣는다거나[6], 심지어는 사업상 고위간부에게 뇌물을 바칠 때에도 담배가 등장한다. 북한 국내에서도 이런저런 담배들이 생산되지만, 가장 인기있는 것은 이른바 고양이 담배라 불리는 영국 RBH사의 CRAVEN "A"로 북한 내에 합작공장이 건설되어 이곳에서 담배를 생산한다. 장마당에서 보통 1갑에 3,000원 정도에 팔린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규정상 현금으로 지급되는 월급은 아무리 당간부라도 1만원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보면[7] 엄청난 고가상품이다. 보통 북한 중산층들이 월 생활비로 15~20만원 정도 쓴다는 점을 감안해도 한국에서 1갑에 3~6만원 하는 수준. 다만 요즘에는 고양이 담배는 한물 갔고, 2012년 즈음부터 중국산 '장백삼' 담배가 주요 뇌물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중앙당 최고위층 간부들에게는 양담배가 올라가고....

남한에서는 그나마 정책적인 노력에 힘입어 흡연율이 조금씩 줄고 있는 추세지만, 북한은 아직도 아시아 2위의 흡연율을 기록할 정도다. 북한 매체에서 말로는 금연정책을 취한다고 떠들지만, 애초에 먹고 살기 힘든 주민들이 건강 따위를 챙길 리가 없다. 어떻게든 낙을 찾으려 마약 구매도 서슴치 않는 판이다보니 차라리 담배를 피우는 게 애교로 보일 지경(...) 더군다나 아직도 담배 자체가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인식 개선이 쉽지 않다.[8] 당장 국가원수라는 인간이 방송에서 버젓이 담배 꼬나물고 다니는 것만 봐도... 어쩌면 통일이 된 후에 가장 골치아픈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4 담배 = 명약?

과거 편두통, 매독 등에 효과가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유명하였다. 북미 원주민들 사이에서 한국의 인삼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대로 유럽에도 이어지게 된다. 유럽의 몇몇 고서적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의 인삼을 소개하면서, "북미 원주민들 사이에서의 담배와 같이 인삼은 한국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불린다"는 소개도 종종 있을정도이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 그 당시 담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알 수 있다. 담배 잎을 럼주에 침지시켜 마시며 열병을 이겨내는 묘사가 실제로 나온다. 물론 실제로 했다가는 니코틴 중독 때문에 골로 가기 딱이다. 작중 설명으로는 '흑인들은 모든 병을 담배 잎으로 치료한다'라고 하는데(…). 사실, 담배를 약으로 쓰던 시기는 담배보다 훨씬 더한것도 약으로 쓰던 시기이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환자 개개인의 목숨보다는 치료가 되는가 안되는가에만 초점을 맞추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오늘날 의학이 발달하고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인권이라는것이 생겨난 이후부터는 당연히 환자를 한방에 골로 보낼 수 있는 그러한 위험한 물질은 효과 유무를 떠나서 사용을 안하는 추세로 흘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초에 쓰여진 경악전서에서도 연(烟)이라는 이름으로 담배를 써놓았는데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저자가 골초였다는 야사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담배가 중국 남부에서 퍼지기 시작해 북상했다고 한다.

과거 유럽에서는 담배 급성중독[9]의 약으로 사과식초를 사용했다고 하니, 혹시 담배로 인해 저런 증상을 겪는다면 한번 시험해봐도 무방하겠다. 저것들은 담배와는 다르게, 해가 될것은 없으니 말이다.

1970년대까지 집안 식구들이 배가 아픈 아이에게 담배를 물렸던 적이 있었다. 과학적으로 보면 당시 구충제가 널리 퍼지지 않았던 시점에서 뱃속에 기생충이 너무 많이 자라있는 경우에 담배를 피움으로써 잠시 기절시킨 것. 담배연기는 기도를 통해 들어가는 것 이외에도 식도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70년대에서는 아이들이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뭐 이 시절 시골에서는 양귀비도 약으로 쓰여서 어린아이가 아프면 이 가루를 달여마시게 했던 적도 있긴 하지만.

물론 이상의 담배 예찬론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대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오늘날 담배는 건강에 나쁜 기호품일 뿐이다.
  1. 1891~1995.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로 알려졌으며, 든든한 아침식사로 건강해지자는 PR로 베이컨 소비량을 크게 늘린 경력이 있다. 더불어 104세라는 경이로운 장수를 누리며 갔다.
  2. 위에서 말한 베이컨 소비량 증가로 고지혈증이 크게 늘었으며, 과테말라를 기점으로 하는 미국의 과일 유통 회사를 위해 선거로 당선된 좌파 정권을 단 몇문장만으로 공산당과 내통했다고 누명을 씌워 쿠데타로 몰락하게 만들기도 했다. 체 게바라가 미국에 학을 떼게 만든 사건. 이런 영향력 때문에 괴벨스가 이자를 책을 탐독했다는 말도 있다.
  3.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스승인 태호 이원진을 가리킨다. 이 분은 청백리로 유명했고 제주목사를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탐라지를 저술했는데, 제주 목사 시절에 헨드릭 하멜의 표류를 경험했다.
  4.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간소화된 것이었으며(비슷한 이유로 갓의 크기도 제한되었다.) 그전까지는 권력과시용으로 긴 곰방대를 피는 경우가 많았다.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 조롱하려고 평민들도 낚시대처럼 긴 곰방대 피우라고 하자 양반들이 역성을 내는 장면이 나온다.
  5. 5월에 판매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6월에 제조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약간의 차이는 있다. 다만 창군이 이뤄진 1948년에는 제조가 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6. 북한 열차에는 개인 수화물 제한 규정이 있어서 규정 이상의 짐을 싣지 못하게 되어 있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인당 손가방 2개 정도.
  7. 아무리 잘 나가는 국가기관이나 외화벌이 기업이라 해도 임금의 대부분은 식량을 비롯한 현물로 지급하게 되어있다. 북한이 아직도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부분.
  8. 북한 체제가 권력과 부를 과시할만한 수단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예를 들어서, 집과 차량은 아직도 법적으로는 개인 소유가 불가능하고, 시계나 각종 명품들은 북한 사회에서 딱히 알아봐 줄 사람도 없거니와 잘못 걸리면 된통 얻어맞기 십상이다. 손전화 정도가 그 역할을 대체할까 싶지만, 북한 내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휴대폰 종류라는 게 워낙 한정되어 있다 보니...
  9. 구토, 두통, 심하면 기절까지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