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

國民主義, 'Nationalism'

1 개요

내셔널리즘, 국민주의는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존재하는 국민(Nation)을 우선하는 정치적 이념이자 사상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로 번역되기도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자유주의적인 다민족 국가에서는 주로 문화의 일치를 기준으로 동질적인 사회지향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구획하여 타자와 구분되는 하나의 정체성과 국가를 공유하는 국민집단인 'Nation'의 개념을 토대로, 이 공동체에 걸맞은 독립적인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내셔널리즘이 나타나고, 독일, 폴란드 등에서는 전제적이며 전통적으로 언어적, 혈통적 일치를 보였던 국가에서의 ethnic group을 'Nation'으로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이후 한족 중심의 권익을 위해 만주족을 배제한 Nation을 설정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한 내셔널리즘이 나타났으나, 현재는 전체 중국인을 포괄하는 중화민족이라는 Nation을 설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Nation'과 'Ethnic group', 'Nationalism'과 'Ethnic nationalism'은 각각 '민족'과 '민족주의'로 번역되었으며, 이 번역에는 굉장히 논란이 많은데, 한국에서 '단일민족국가' 같은 단어에 들어있는 "민족"이란 개념[1]에 가장 일치하는 것은 분명 'Ethnic group'이지만 민족주의는 'Ethnic group'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Nation'의 파생어 'Nationalism'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기준으로 'Ethnic nationalism'이란 단어가 따로 존재하며 실질적으로 한국어의 민족주의란 단어에 가장 가까운 의미는 이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Nationalism'이란 단어의 번역이 약간 애매해지는데, Nationalism을 국가주의라고 번역하기에는 국가주의는 'Statism'이라는 별개의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Nation-State를 국민-국가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Nationalism=국민주의'. 뭐가 이리 복잡해 Ethnic nationalism은 그렇기에 이 사상을 늦게 받아들인 나라들은 적어도 학술적으로는 구분하려 애쓰며, 예로 일본은 굳이 구별하기 위해 'Ethnism'을 '민족주의'로, 'Nationalism'을 '내셔널리즘'으로 구별하고자 했더니 이젠 '민족주의'를 '혈통주의' 등으로, '내셔널리즘'을 '애국주의', '국수주의', '민족정복주의' 등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번역을 포기하면 편하다.

내셔널리즘은 공통적인 특성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의 확립 및 타자와의 구분을 전제로 하므로, 내부 공동체의 단결과 타자로부터의 독립 등에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단결을 해치는 내-외부 요소나 타자에 대한 배척이 이루어지므로, 공격적으로 이기적, 배타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 사상이기도 하다.

다른 이데올로기와는 다르게 내셔널리즘이란 그 개념이 모호하며 다른 이데올로기와 잘 합쳐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근ㆍ현대의 거의 모든 신생 독립국가들을 탄생하게 한 이념이기도 하지만,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분야의 갖가지 담론을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로 소환시켰던 그 파괴적인 힘은 도리어 양차 대전을 비롯하여 증오와 피로 얼룩진 20세기의 수많은 분쟁을 만들어냈다.

내셔널리즘은 봉건제의 붕괴에 따른 절대왕정의 등장에 그 기원을 두며, 나폴레옹때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Nationalism'이며, 시대에 따라서 그 뜻이 변화해온 것이 민족주의이다. 여느 사상들이 그렇듯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자유주의 시대때는 국민 국가 형성을 위한 국민주의로, 제국주의시대에는 우월한 민족이 당연히 세계를 지배해야 하는 국가주의로, 우리나라와 같은 식민 시대였던 국가에서는 다른 민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저항적 내셔널리즘으로, 그 후로는 양차대전의 나치즘과 파시즘으로도 변화했다.

2 역사

혈통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민족(Ethnic group)의 개념은 고대부터 있었고 개중에는 유대인처럼 수천 년을 유지한 경우도 있지만[2], 'Nationalism'은 근대에 'Nation'의 개념을 기본적으로 인식하면서 태동한다. 'Nation'은 흔히 '국가',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그것 외에도 '국민'의 뜻을 지니고 있다. 국민의 공동체 의식이 동질적인 '민족'을 구성하며, 이들이 건설하는 국가가 '국민 국가(Nation-State)'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학술적으로 쓰이기 시작한것은 유럽에서는 17세기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대륙의 외부 세력(숙적인 프랑스나 여타 가톨릭 세력 등)들과 맞서면서 영국인이라는 배타적 집단의식이 형성되고, 그것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국 국가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민족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에서 만들어 낸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국민 국가 건설'의 관념은 전통적 계급구도를 뒤엎어 놓은 시민혁명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계몽사상이 보급되면서 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를 갖는 시민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이전의 봉건제도에 의한 분절성을 극복하고 통일적인 국가가 성립하는 데 강한 추동력이 되었으며, 지식 및 교육의 확산과 정치 참여 계층의 확장과 함께하며 유럽 각국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학술적개념이 생긴 과정은 매우 다르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들이 서구 식민 지배자에게 저항하기 위한 결속의 근거를 삼기위하여 발전한 것이다. 이른 시기의 예로는 미국 독립전쟁이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열풍이 있고, 19세기 후반에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저항을 위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로 출발한 일본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침략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꽤 흥미로운 사례이다. 어쨌든 근대에 민족주의를 도입한 국가, 세력이 한둘이 아니고 그들이 받아들인 방식도 다양하므로 이들을 간단히 일률화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자들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세력 양쪽 모두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었다.

사실, 'Nationalism'으로서 통합된 국가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셔널리즘은 비슷한 언어, 비슷한 문화만 공유하고 있으면 대단히 넓은 범위의 인간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버릴 수 있다. 민족주의의 위력으로 인해 혈연에 기초한 씨족이나 부족, 귀족이나 노예와 같은 계급 제도, 종교, 지연 등의 다른 사회적 연결 고리는 분명 상당히 약화하고, 적어도 같은 민족 내부에서는 균질적인 사회가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닌가?"라는 구호 때문에 '내부 갈등'은 줄어든다. 결국, 같은 규모라면 외부로 투사할 수 있는 국력이 엄청나게 달라지며, 설사 규모가 크다고 해도 민족주의로 묶이지 않은 국가는 국가라는 개념이 거의 솜 무더기 처럼 흐리멍덩하게 인식된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 국가와 민족주의가 완성되지 않은 국가를 비교하면, 후자는 거의 "나라 꼴도 못 갖춘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므로 후발 국가의 지식인들에게는 "같은 민족이라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나라를 건설하자."는 민족주의가 그럴듯하게 보이게 된다.[3]

그런데 'Nation'의 개념이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우생학, 인종차별 등과 결합하면서 혈통적인 민족의 개념인 'Ethnic group'이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는 사건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동아시아는 특히 역사적인 연고가 오래되고 내부의 단결력이 뚜렷하며 이미 공간적인 구획이 확고한 국가들이 존재했으므로, 근대 일본의 번역어인 '민족(民族)'을 혈통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20세기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이러한 독립 국가 건설의 열풍을 유럽에 적용하여 제국들의 해체를 위해 이용하였으나, 아시아와 아랍 등지에 큰 파급을 미치면서 민족주의를 다시 한 번 고조시켰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3.1 운동 등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족/개별 국가(Nation)를 넘어 국제적인(International) 노동자의 단결을 추구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도 제국주의에 대한 공세를 위해 각국의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의 식민지가 독립하였고, 유럽 지역이 막대한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는 동안 1960년대까지 독립 열풍이 몰아닥치면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들이 스스로 단결을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하였다.

3 학술적 논란

한국에선 민주주의의 도입이후 이 민족주의의 성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민족주의가 세계화에 꽤나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민족주의 개념을 들여왔고 서양사학계에서 꽤 주목을 받는 탈민족주의 관점에 따르면 민족주의란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아온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근대에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이라 설명하기에 [4] 들여와 한국인의 머릿속에다 정착만 시키면 민족주의를 차근히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서구식 민족주의는 전통 민족주의를 몰아내기 시작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는 특히 근대에 서구의 이념을 수입한 경우인 동아시아 등에서 전통을 배제하는 경우 쉽게 일어난 일이다.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민족 비슷한 개념이 확립되어 있었다. 전근대의 동아시아 문명권은 조공과 책봉이라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중화문명'의 기치 아래 그 중심인 중화와 그 변경인 수많은 조공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선이 소중화를 내세우며 명나라 외 나머지 국가들을 죄다 오랑캐 취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민족'이라는 개념을 학술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민족'이라는 별칭을 써서 분리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일본이 개화기를 거치면서 'nation'이라는 단어를 '민족'[5]이라고 번역하면서 비로소 민족주의가 동아시아의 학술적 어휘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단, 서구에서 나타나게 된 민족주의와 비교하면 학문적 결실부터가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서구 유럽에 비하면 모호했다. 사상 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얻은 서구 국가들처럼 엄청난 결속과 맨파워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세계사를 연구하면 다들 나름대로 민족 관념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있었으나 순수 학문적 영역에서만 비교해도 서구에서 나타나게 된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애초에 고작 조세나 도시 간의 이질성 같은 문제만으로 칼을 거꾸로 잡았던 것이 고대의 민족주의다. 대표적으로 유럽, 중동, 중국 등을 살피면 제대로 된 민족주의의 등장 전에는 알렉산더처럼 이민족이 세금을 낮추어 준다고 하자 칼을 거꾸로 잡거나 같은 민족인 이웃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계투를 벌여 몰살하는 경우가 흔했다.서구 민족주의가 퍼진 후에는 세계에서 이런 일들이 크게 감소했다. 충성심도 보통 민족보다는 국가나 왕이 그 대상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고용된 게르만족들도 같은 민족들을 죽이는 것에 별 고민을 하지 않았다. 이는 서구식 민족주의가 흥했던 시대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서구식 민족주의 사상이 퍼지기 전에는 서로를 증오하다가 서구식 민족주의가 퍼진 후에는 일반적으로 가까운 민족들끼리 적대감이 약화되거나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 공격을 당하면 분개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게르만주의나 슬라브주의 등이 흥했던 시대를 보면 얼마 전 과거까지 서로 죽이던 이웃들끼리 급속도로 관계가 개선되기도 했다.1차 세계대전 참조, 물론 큰 틀에서의 이야기라 예외적인 경우들도 있었다. 사실 크게 갈 것도 없이 하나의 민족이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싸우는 현상이 흔했는데, 서구식 민족주의 사상이 퍼진 이후 과거에 비하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생겼다는 점만으로도 고대 민족주의 관념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등 원래는 가깝게 느껴져도 닥치고 무력이었다.

일본은 세계 2차대전 이후에 이것을 오역이라고 일컬은 뒤 '국가주의'로 수정하여 이후의 교과서에는 민족주의란 단어를 교과서에서 제거했으나,[6]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국, 중국 등은 사회문화적 서구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자신들의 체제와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하였기에 서구 사회를 재해석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들여오거나, 아예 거부해서라도 자신들의 전통적 정체성을 지켜고자 했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체제를 싹 갈아엎은 뒤, 이 민족주의 개념으로 세계대전을 내기도 했으며[7], 이후, 미국이 일본을 강제로 보통국가화, 탈군국주의화 하면서 유럽식 민족주의(Nationalism)로 변화해간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고 세계주의가 시작되면서 미국 등 인종차별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나라들이 앞장서서 민족주의를 향해 철퇴를 가하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면 소수민족들이 자국 내에서 스스로 파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나라, 특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일수록 뭉쳐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의 수많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깊은 나라나 민족은 민족주의 타파 움직임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고 특히 한국, 중국, 일본 같은 민족적 특수성이 강한 나라나 존속이 위협받을 위기에 처한 민족들은 민족주의를 우대하고 유지해 민족을 지켜나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민족사학을 대표적으로 예시를 들자면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왕조 정통성론이나 종족 및 혈통 관념과 조상 숭배 등 역사 속에서 민족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선험적인 관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중국은 중화사상을 응용하여 '중화민족'이란 신생개념까지 만들어내며 소수민족 융합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일본은 이제와서는 어느정도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안정되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는 아이누, 류큐인등을 차별하는 등 야마토 민족을 우대해 사회적 문제가 되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근대 이전의 유럽 국가들도 그와 비슷한 자국 의식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창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 서구의 민족주의란 그런 모호한 개념을 넘어선 사상적 개념, 즉 17세기 유럽의 근대적 국민 국가(민족 국가, Nation-State)의 토대가 되는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타국과의 엄격한 구분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기보다는 동아시아의 세계 체제 내에서 한자, 불교, 유교 등의 보편 문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이는 민족주의에 의한 분화라기 보다는 이미 고대서부터 다르기 때문에 딱히 민족주의가 아니어도 다르다는 것을 인지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유럽과 동아시아 등은 역사적 배경이 크게 다르므로,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입각한 민족주의 이론으로는 동아시아 등의 민족 관념을 설명하는 것이 무리라고 주장한다. 설사 그것이 근대적 민족주의의 형태는 아니었을지라도, 이미 민족에 준하는 어떤 관념이 있어서 그것이 근대의 변혁기를 거쳐 현대의 동아시아 민족주의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서양에서 말하는 'Nation'과 동양에서 말하는 민족은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유대인 특유의 속성을 반영한 시오니즘처럼 기존의 근대 내셔널리즘 이론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민족의 특수한 발전양상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혈통적인 차원의 공통점으로 민족주의에 접근하는 이론은 특히 많이 두들겨 맞았다. 이스터 섬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이주, 교역같은 상호 간의 인적 교류 행위를 전제로 하여 형성되고 변화해 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치 독일의 아리아인 순혈주의나 반대로 환빠들의 '사실 XX족은 한민족'과 같은 주장은 지양해야 할 사상 중 하나이다. 굳이 그러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1775년, 당시에는 영국과 크게 다른 혈통적 집단이라고 볼 수 없는 미국이 독립의지를 품고 영국과 전쟁한 사건이 '민족주의(Nationalism)'의 주요 사례로 꼽히는 것처럼, 혈통상의 민족조차도 꼭 한개의 민족국가만을 만들어 모두 거기에 소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또한, 한민족(韓民族)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국가라 하지만, 이 한민족(韓民族)들은 크게 대한민국, 중국[8], 미국[9], 일본[10]등으로 가서 살고 있고, 북한이라는 같은 민족적 집단과 적대중이며, 실질적인 분단국가이다.

아무튼, 민족주의는 근대 담론과 함께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의가 많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니 궁금한 사람은 나무위키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직접 책과 논문같은 것들을 읽고 다양한 의견을 찾아보자. 일단 유럽 근현대사,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한 근대 세계사, 한국사 전반 등을 공부해야 하는 후덜덜한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4 내셔널리즘의 특징

4.1 장점

내셔널리즘은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동질성을 강조함으로써 결속력을 도모하고 위기 상황에서 하나의 국가 혹은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위기대처능력은 바로 민족주의가 처음으로 태동한 프랑스 혁명 직후의 프랑스에서부터 입증된다. 혁명기의 혼란과 연이은 외침을 겪으며 민족주의적 의식이 고취된 당대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를 '우리들의 국가'로, 프랑스인들은 '우리네 동포'로 인식하였으며, 이는 자국과 자민족을 여전히 '국왕의 국가'이자 '국왕의 신민' 정도로 여기던 주변국들과 명백히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국가를 향한 애국심과 거기에서 비롯된 전쟁수행에대한 협력, 반-자발적 징병제 등으로 나타나 나폴레옹 제국과 프랑스 대육군(La Grand Armée)이 대영제국신성로마제국(후의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등 당대의 열강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패권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위기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위력을 증명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교전국인 소비에트 연방이다.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적 사고보다는 국경을 초월한 계급 간의 연대를 강조해왔으며[11], 실제로 소련 초기 러시아의 수많은 역사적 위인들이 공산주의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격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초기의 암울한 전황 속에서 스탈린이 선택했던 방법은 러시아의 독립과 근대화, 조국전쟁 등 역사적인 승리의 순간들에 자리하였던 러시아의 영웅들을 부각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재허용하는 등 민족주의적 사고에 기초한 것이었다. 조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한 극단적인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의 저항정신을 고취해 끝내 나치를 파멸로 몰고 간 원동력은 결국 허울뿐인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보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였던 셈이다.

또한, 민족주의는 약소국이 외세의 압제에 맞설 기회를 제공하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항적 민족주의(혹은 방어적/해방적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침탈을 경험한 피식민국가들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왔다. 당장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주의[12]는, 반대방향[13]에 있는 공산주의[14]와 함께 항일 저항운동의 핵심 키워드였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 교육이나 창씨개명 등에 맞서 한민족의 얼을 지키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고.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후발주자가 (열강 구도가 굳어졌던) 근대 이후 국제사회의 판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후의 카드(Game Changer)였다. 오랫동안 수십 수백 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져 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고 유럽사회의 열강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유럽 사회를 강타한 민족주의의 확산이었다.[15] 이러한 독일 민중의 민족주의적 신화는 수백 년간 주위 열강들에 의해 분열된 채 변방으로 취급받던 국가가 불과 한 세기 만에 유럽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심지어 양차대전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깽판을 벌이고 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유럽의 지도 국가로 자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4.2 한계점

민족주의는 태생적으로 집단의 공통점을 추구하기에,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천편일률적인 몇 가지 기준으로 정의하려는 경향성을 나타내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기준, 즉 민족성에서 벗어나는 모든 가치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프로이센독일 제국의 전통에 집착하면서 민주주의는 독일 민족의 민족성에 반하는 서구(영·프)의 가치랍시고 배척하다가 끝내 나라를 말아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이 좋은 예시이다.

그뿐만 아니라 과도한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국수주의전체주의로 변질할 위험성이 있다. 물론 이처럼 극단적인 이데올로기가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자국민 혹은 자민족에도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한 세기 동안 전 세계가 수많은 희생을 통해 체득한 바 있다.

항일 유격대 시절의 투쟁논리와 소위 '민족해방전쟁'을 근거로 주체사상선군정치를 발명, 반미-반일-반제국주의 논리까지 버무려서 인민 세뇌에 써먹고 있는 북한도 가까운 예이다.[16] [17]

또한, 다민족 국가에서는 단결이 아닌 골칫거리 중의 하나. 조율을 제대로 못 할 경우 내전으로 치닫게 되어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경우도 있고, 제노사이드 혹은 그에 준하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져 그 국가에 대한 국제 여론이 매우 나빠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후투족과 투치족이 내전을 벌여 수십 만명이 죽어 나간 르완다 내전, 7개[18]의 국가로 분열한 유고슬라비아 등이 있다. 현대의 중국 또한 자국 내의 민족 분규를 해결하는 데 '55개의 민족[19]이 화합하여 만들어내는 중화민족'의 개념을 창작하여 티베트, 위구르 문제 등을 강압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가 강성해질수록 그 민족의 근간이 되는 역사를 '민족의 역사'라는 하나의 줄기로 묶어내려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문제는 현대 민족국가들 대다수가 근대에 형성된 것이므로 근대 국가와 민족 관념을 자꾸 고대사로 확장, 투영시킴으로써 그 역사에 대한 소유권과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민족을 초역사적 실체로 보지 않는 이상 이런 태도는 역사학 연구에서 지양해야 할 태도이며, 그 저변에는 대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이 그 대표주자로서, 애초에 한족이란 개념부터가 한이란 이름에서 보이듯 서로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던 춘추전국시대를 끝장낸 진나라의 강력한 통일정책이 한나라로 이어지면서 생긴 민족개념이다. 그 외 동북공정 문제와 고구려, 발해 역사가 한국 역사냐, 중국 역사냐 따위의 소위 역사 분쟁은 이미 한국 사회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다. 물론 한국 사학계도 이에 대해 ', 에 대한 고구려의 승리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 등 민족주의를 도구로써 활발히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민족을 정의하는 관점에 따라 "저런 놈들과 같은 수준에서 진흙탕 싸움을 하면 안 된다"[20]라는 주장과 "그렇다고 한민족의 역사를 강탈하려는 시도를 좌시하면 안 된다"[21]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때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자본주의 맹아론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담론 또한 한국사학계에서 민족주의와 근대가 갖는 위상이 어땠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각 항목 참고.

또한, 한 민족이 여러 나라에 퍼져 있을 때, 강성해진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이 사는 땅은 다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히틀러와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였다. 결과는 둘 다 폭망... 1차 대전만 해도 세르비아인이 사는 땅은 무조건 세르비아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세르비아 과격주의자들의 총성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고대사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확대되어 엄청난 영토를 "원래 우리 땅이었다."란 논리로 요구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입으로나마 이런 개드립을 치고 있고 간도회복 드립 치는 환빠들도 이에 해당한다.[22]

더군다나 21세기 현대의 관점에서 EU의 발족,영미권 국가간의 문화적,언어적 동질성 등과 인터넷으로 인한 개방화,세계화와 항공,운송수단의 발달로 인한 국경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면서 나라가 극단적잉 상황이 오지않는 이상 선진국들을 기점으로 현대에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는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과학적으로 봐도 유전적으로 가까운 그룹에 속할수록 유전자에 의한 유전적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23][24]

여담으로 이러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스스로를 탈민족주의자나 반민족주의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둘의 개념은 약간 다르긴 한데 항목 참조.

4.3 평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침해할 수 있는 사상이라면 어떤 사상이라도 엄정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이데올로기 중 "민족주의를 빼놓고는 근대사를 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가장 보편적이고 확고부동한 성공을 거둔 것이 민족주의였고, 악용하면 세계인에게 가장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전체주의 탄생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유럽연합의 대두 역시 그런 정치적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민족주의는 어떤 분명한 이론적 체제나 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입맛에 부합하도록 멋대로 끼워맞추는 경향이 강하다. 정치적으로는 독재나 전체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심지어는 사회주의와도 결부되어 특정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웃긴건 저항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이들에 반대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많은 나라들은 민족주의를 자기의 입맛에 맞추어 사용했고, 그것은 제국주의로도, 또는 그것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로도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 결과를 놓고 보면 당시의 민중들을 쉽사리, 그리고 강력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깃발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지금도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국가간 대항전, 특히 한일전에서 일본을 응원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의 됨됨이, 인성과 상관없이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것이며 심지어는 야유를 받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행실이 나쁜 인물이라도 한국을 응원한다면 그의 인기는 올라갈 것이다. 그의 올바름이나, 그 전까지 했던 공적이나 잘못에 상관없이 민족주의 하나에 휩쓸려 쉽게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또다른 예로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경우를 보자.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 사후[25]에 1년이 머다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쿠테타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1981년 상황을 보면 실업률이 13%에, 인플레이션이 130%였다. 아르헨티나 광장에서는 매일 시위대가 들끓었고 각 주요 도시에서는 격렬한 데모가 벌어졌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갈티에르는 지지율이 50~60%로 훌쩍 뛰어오른다. 당시 아르헨티나엔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비록 참패하고 국민이 실망하기 전까지였지만.

이처럼 민족주의는 선동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상당히 자주 악용된다. 자신이 어떤 사안을 생각없이 당연시 하고 있다면, 이성적으로 그 당위성을 반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5 한국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개 그렇지만 민족주의가 강한 편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에는 환빠 등 소수를 제외하면 의외로 민족주의 사상이 적은 편이라며, 그 예시로 국뽕 등의 단어가 유행하는 근래의 자국 혐오 분위기를 꼽는 사람들도 있는데, 애초에 환빠는 민족주의자들조차 포기한 사이비교 신도들일뿐 지나친 민족주의를 전제한 과도한 주장들이 산재해 있기에, 그것들로 인해 민족주의를 자연스레 체득해온 입장에선 그 사상들을 당연스럽게 여길 수 있어, 외부의 지나친 민족주의는 경계해도 자신의 집단의 행동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환빠들을 국뽕이라며 경계하는 사람조차 배타적으로 타국의 주장 등을 옳지 못하며 자신들의 주장이야말로 옳다고 할 수도 있다. 민족주의적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자국 혐오'인지 아니면 '민족주의 그 자체에 대한 혐오'인지는 각자 판단해야 한다.

외부인 유입이 적은 대륙 끝의 반도라는 지리적 요인과 장기적인 쇄국 정책으로 인한 인적 교류의 단절, 비교적 안정된 강역을 유지하면서 큰 분열없이 중앙 집권적 통치를 유지하고 통된 통치집단을 유지했다는 역사적 요인과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외세에 의한 큰 흔들림으로 더욱이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조선 사람은 하나의 동포라는 논리가 어렵지 않게 먹혀들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 말기에도 외국에 대해 격렬한 배타성을 보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소중화적 사상을 포함해 조선과 이미 죽은 명나라를 제외하면 모두 저열한 오랑캐라고 생각해 청, 일본, 서양 모두에게 배타성을 보이기도 했다. 또 일제강점기라는 흑역사를 거치면서 일본 및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외세와 소통하기보다 독자노선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외세'를 '궁극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세력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26].

그리고 군사정권시기에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민족주의의식을 함양하는 프로파간다와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내부의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 그것의 법통성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정부(와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함, 북한과의 적대상황과 이북의 미수복영토에 대한 주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고 교육계나 사학계 정치계에서도 민족주의가 크게 두드러진다. 당장 위인전만 펴봐도 민족 얘기가 안 나오는 한국 위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러한 민족주의 마인드는 나이에 상관 없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현재도 외국어(특히, 일본어) 단어만 써도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짱개쪽바리, 양키 등의 비하적 표현도 인터넷 공간에서 자주 보인다. 또 단군의 후손으로 지칭되어지는 확인되지 않는 반만년 역사[27]를 굳게 믿고[28],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표현이나 한국사 수능필수과목지정에 대한 목소리도 매우 높다. 과거를 알고자하는 지식욕이나,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행해지는 역사교육에 그치지 아니하고 공식적으로 '창의적(?)인 역사의식 함양.', '민족의식 함양.', '우리나라의 찬란한 역사 교육.'등의 민족주의적 슬로건을 매번 역사교과서 개정 때에 외치는 것만 봐도 역사란 것이 결국 가르치는 목적이 사실에만 의거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교과서를 만들 때, '모종의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또한, 교육이 수동적으로 행해지기에, 학생들은 이리저리 휩쓸려갈 수 밖에 없다. 고로 객관적 사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가르쳐주고 학생들이 스스로 이론을 정립해가는 교육이 필요한데, 현재의 세계사적인 역사의 흐름이나 최소한 주변 국가의 역사관에 대한 이해와 연구조차 거부하는 자국사교육은 한국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국내 결집을 위한 배타주의만 키우게 되기 쉽다. 또한, 어린 시절에 주로 읽는 동화책 등에 들어가있는 민족적 전래설화 또한 민족적 동질감을 길러 한편으로는 선민사상을 잉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한편으로 현재 한국에서 그나마 토론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이지, 그 기반이 되는 '민족'에 대해서는 별로 논해지지 못해,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 이에 대한 합의 없이는 민족담론에 대한 논의에 해를 끼친다. 예컨데, 과거에는 고구려 등의 북방계와 신라 등의 남방계의 서로 다른 씨족이 섞여왔으며, 한편으로는 조선은 중기까지 제주도 사람들을 같은 문화와 언어지금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다르니, 권리를 가진 백성으로 취급하지 않고 대형 선박 건조 금지, 본토로의 이주 금지, 특산품의 생산 할당량을 정해 진상하기를 강요하는 등 같은 민족이라 생각해오지 않았었다가 개화기를 맞이하며 인식이 변화해오는 등 지금의 한민족(韓民族)이라는 공동의식도 시대가 바뀌면서 완성된 것이다. 즉, 옛날에는 서로 남남이었던 사람이 하나의 민족이 된 것인데, 그렇다면 왜 현재는 불가능한지에 의문을 품고 국제주의(internationalism[29])나 세계주의[30]에 투신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민족 내에서도 지역감정으로 인해 분열해 새로이 배타적 집단을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정작 논쟁의 중심이 되는 민족의 기준에 대해서 혈통인지, 문화인지, 종교인지, 언어인지에 대해 제각각의 기준을 세우고 논쟁에 임하기에, 서로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로, 조선족의 경우에는, 같은 '혈통'이므로 같은 민족이며, 동포로 맞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정서적인 '문화'가 워낙 이질적이어서 숫제 한국에 돈 벌러 온 한국말 좀 쓰는 중국인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정작 그들의 소속감 또한 제각각이기에, 이 경우에는 두 주장 모두 민족주의에 의해 나온 것이고, 민족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나온 다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한국에 귀하한 외국인, 외국에 귀화한 한국인 등에 대해, 때로는 이중잣대까지 써가며 그들의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시도 등은 비단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인식하는 사회 전체에 많이 존재한다.

에초에 민족(Ethnic group, Nation 두 단어 각각)이라는 단어 자체가 몹시 넓은 영역을 일컫는 말이므로 이러한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6 내셔널리즘적인 지도자들

소말리아의 전 대통령 아덴 압둘라 오스만 다르
포르투갈의 전 대통령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나치 독일의 전 총통 히틀러
김일성은 본인에 대란 정치적 지지를 위해 민족주의를 상당히 많이 이용했고, 이후 이 수법은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박정희는 내부 정책에서 민족주의를 잘 활용했으나, 미국이나 일본과 외교정책을 수행할 때에는 한-일 수교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때문에 이 당시 박정희를 반대하던 세력은 오히려 박정희를 반민족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의 중장년층이 가진 민족주의는 박정희의 영향이 강하고, 청년층이 가진 민족주의는 노무현의 영향이 크다.
만주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일제 군인. 세계 최종전쟁에서 일본 민족이 아시아 민족을 대변하여 승리해야 된다는 상당히 왜곡된 민족주의자.
조지아계이지만 러시아 민족주의자였다. 항목 참조.
실제로 공산주의자였고 7~80년대 공산 정권 시기 소련과의 외교에서는 일방적인 소련 일변도의 외교 정책을 펼쳤으나 내부적으로 불가리아 내부 다수의 불가리아계를 우대하고 소수 터키계를 억압하는 자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어째 대부분 좋지 않은 사람들 뿐이다.

7 민족주의 음악

국민악파로도 불린다. 19세기 후~20세기 초 즈음해서 나타난 형태로, 러시아 5인조를 비롯해, 체코의 드보르자크야나체크, 스메타나, 핀란드의 장 시벨리우스, 후기 낭만파로 분류되기도 하는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 이에 속한다.

8 관련 항목

  1. 혈통, 언어적 일치의 공통점을 가지는 민족.
  2. 현대 유대인은 혈연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고 유대전통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좀 더 광의적인 개념이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오래 진행되면서 유럽계 유대인과 중동계 유대인으로 나뉘기도 했고, 유대교 전통을 따르게 된 유대인의 배우자나 유대인의 입양아 등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등 혈연적으로는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그들 중 일부는 이를 분별해,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최소 3개 있다는 사설도 존재할 정도.
  3. 이런 나라에서는 '국가 전체'보다는 씨족, 부족 같은 혈연 집단의 이익이나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정 계급의 이익이 '매우 당연하게' 우선시 된고 그것이 정당화된다. 이에 지식인이라면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대책으로서 이미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적어도 그렇게는 보이는) '민족주의'를 제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쉽게 보인다.
  4. 예로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이 과거부터 내려져온 것이 아닌, 근대 시기 인쇄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발명된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였다고 말한다.
  5. 여기서 민(民)은 ethnic의 개념이 아닌, 전근대적인 앙시앙레짐에 대응하여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고 그 권리를 바탕으로 민주적 참정을 통해 국가를 이끌어가는 자유주의ㆍ민주주의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ㆍ구성원을 뜻하는 개념이고, 족(族)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민족이라는 어휘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것, 이른바 혈통(Ethnic)을 강조하며 언어와 같은 문화, 역사, 관습 등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을 뜻한다.
  6. 위키백과 일본어판과 일본내 일부의 서적의 경우는 그냥 '내셔널리즘'이라는 원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7. 식민지 침략에 대한 항쟁이나 식민지 확보(일본의 경우)에 따라 아시아주의, 대동아 공영권등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등으로 변화하여, 더이상 'Ethnic group'이라고도, 근대유럽의 'Nation'이라고도 못할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됐었다고 할 수 있었다.
  8. 조선족, 신조선족.
  9. 한국계 미국인, 재미교포.
  10. 재일 한국인, 조선적.
  11.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표어나 수많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직들을 상기해 보자.
  12. 일제의 핍박을 주도하는 '일본 민족'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 "한민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주장.
  13.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지향했던 사람도 많다. 일종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
  14. 일제의 파시즘을 선도하는 '제국주의 부르주아'에 맞서 "노동자의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
  15. 독일 제국 항목에도 잘 설명되어 있지만,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이 보수적·전통적 가치를 중시했던 것과는 별개로, '독일 민족국가'는 귀족계급보다는 소상공인을 비롯한 독일 민중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16. 다만 북한은 사실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북한이 한'민족'인 대한민국, 아니 당장 북한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 자국민에게조차 어떻게 대하는지만 돌이켜봐도... 외국인이나 소수민족, 한민족의 전통적 가치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몰라도, 아예 전 국민을 서열화하며 개인의 자유를 탄압하는 태도는 민족주의보다 오히려 타락한 전체주의에 가깝다. 괜히 중국 일각에서 북한을 파시스트 국가라 부르는게 아니다.
  17. 또한 김일성 민족등의 리론이론을 만들기까지 하며 한민족과의 차별성(기존의 조선민족은 단순히 호칭이 달랐을 뿐이었지만. 김일성 민족은 김일성을 시조로 하는 민족이라고 울부짖는다.)을 드러내는 모습은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본디 같은 민족인 한민족을 상대로 한) 반민족행위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18. 코소보를 국가로 포함했을 경우. 포함하지 않았을 경우 6개.
  19. 자세히 알아보면 부족에 가까운 개념이다. 중화민족이야말로 진정한 (다른 국가에서 보편적의미로 쓰는)민족이라는 것이다.
  20. 일례로, 박노자는 고대 역사에 현대의 국가나 민족이란 개념을 대입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과연 고구려인들이 신라인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애초에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에게 '하나의 민족'이란 개념이 있었을까? 예컨대, 삼국통일 당시 신라 입장에서는 결국 고구려나 백제나 당나라나 다 외국이자 견제 대상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애초에 말도 서로 통하지 않아 통역관까지 두는 판국이었으니. 참고할만한 기사
  21. 당대에도 삼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음은 물론 삼국통일도 삼한일통이라고 일컬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혹은 고구려 이남의 여러 국가들은 적어도 최소한의 동질성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조선은 고조선의 계승을 공식적으로 자처한 나라이고, 고려와 조선이 현대 한국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유럽이나 중동처럼 수많은 민족이 대이동해 지역내에 섞인 케이스도 아니고, 한반도와 만주만을 무대로, 서로 유사한 유전적 특성이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온 연속성 있는 역사를 굳이 특정 시점에서 구분 지으려는 시도부터가 서구 중심적인 민족주의 담론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22. 물론 환빠가 아니라도 이를 주장할 수도 있으며, 보통 유명한 환빠는 백두산 천지, 간도 정도의 크기를 초월한 영역을 주장한다.
  23. 사실 같은 그룹에 속하고 환경 등 일반적인 독립 변수들이 같다면 같은 그룹에 속한 다른 집단들끼리의 차이보다 동물들처럼 개체 간의 차이가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쉽게 설명해서 시베리아 호랑이 100가 있는 집단 A와 시베리아 호랑이 100마리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집단의 숫자는 별 의미없다가 있는 집단 B는 집단이 A와 B로 다르다고 해서 대다수 호랑이들의 경우에는 그리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각 집단에서 유독 특별한 호랑이들이 있을 수는 있다.
  24. 하플로그룹 등이 같을 때 능력 차이가 나타난다면 일반적으로 유전보다는 환경에 의한 차이일 확률이 높다.
  25.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면 후안 페론이 1960년대 중후반에 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던 급진시민연합 정부에 반발하여 군사정권이 들어섰다가 1970년대 초에 군사정권이 끝나 시기를 틈타서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로 귀국한 다음에 대선에 출마해 16년만에 권좌에 복귀, 그러나 후안 페론은 이미 고령인지라 건강이 안 좋았고 결국 대통령 취임 1년도 채 안된 1974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이사벨 데 페론이 뒤를 이어받았는데 이사벨 데 페론은 보수주의적 재정정책을 펴면서 인기를 잃고, 페론주의 좌파도 탄압하면서 욕만 먹고 1976년에 쫓겨났고,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 경제를 살린답시고 외채를 끌여올렸다가 오히려 고금리 정책과 오일쇼크가 겹쳐져 임금인상률은 턱 없이 낮아, 경제는 오히려 처참하게 망하게 되었고, 페론주의자나 좌파,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인기를 잃었고 인기를 끌여올리려 군사정부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26. 민족주의가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는 집단과 타 집단을 구별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그 본질 상, 배타적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생각하면 특이한 일은 아니다.
  27. 단기 기원이 서력기원전 2333년 이라는 무리한 설을 어떻게 받아들이더라도 반만년은 되지 않는다.
  28. 상투적으로 '반만년 역사의 한국'과 '중국 사천년(한국에서 사천년이며, 중국에서는 더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보통 천년 단위로 올라간다. 오천, 육천.)의 신비'라는 어구가 붙는다. 어떤 학설을 지지하건 간에 한국사가 중국사보다 오래되었을 가능성은 정말 거의 없지만, 서로가 군비경쟁을 하듯이 역사를 확장(?)하고 있다.
  29. 명칭에서 보듯, 민족을 초월해 소통하겠다고 하는 주장.
  30. cosmopolitanism, 세계의 모든 사람은 동포로서, 같은 공동체를 이룬다는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