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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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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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신라의 괴뢰국가 (속국)
보덕국
신라의 대항(반란) 국가
장안국
신라
新羅 [1]
130px
군기인장
400px
위치대동강원산만 이남의
한반도 전역
존속기간A.D.676[2]~935[3](259년)
수도서라벌
정치체제전제군주제
국가원수[4]
국성경주 김씨[5]
언어신라어,고대 한국어
종족예맥, 한족, 말갈족
종교불교, 도교, 유교, 샤머니즘
주요사건676년 삼한일통, 통일신라 성립
689년 녹읍 폐지
757년 지명을 중국식으로 변경[6]
780년 신라 하대개막
822년 김헌창의 난
828년 청해진 설치
892년 후삼국시대 개막
성립 이전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성립 이후태봉,후백제,신라
멸망 이후고려

1 개요

신라가 고구려,백제,가야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신라

문무왕 대로부터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의 약 200여 년간을 한국사 최대 전성기를 이루었고 또한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삼국통일전쟁대 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역사상 임진왜란 종료 이후의 조선 후기와 더불어 가장 외침과 전쟁이 적었던 시대다. 외부가 안정된 뒤에는 잉여의 역량이 내부로 쏠리면서 매우 스펙터클한 역사가 진행된다. 크게는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중대[7]와 귀족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하대[8]의 두 시대로 분류된다.

2 시대 구분과 명칭 문제

삼국사기의 신라 정통 사관의 영향을 받거나 남한북한의 대립으로 인해 남쪽이 정통이라는 의미로 이 통일신라가 존속하던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라의 세력권은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북방은 고구려를 고스란히 계승한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통일신라가 존속하던 시대를 '발해고'에 나오는 북국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남북국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마이너한 분류명을 더 들어보자면, 1000년이나 지속된 세계사적으로도 손에 꼽을 왕조이므로 통일신라 대신 '후기 신라'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9] 그런 한편 통일신라의 오류를 피하고 시대상을 살리는 측면에서 '대신라(大新羅)' 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비슷한 예로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았음에도 이후 왕건이 건국한 왕씨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편의상 고구려라고 부르는 중이며, 고조선도 원래 조선이라고 부르는게 맞지만 이성계가 세운 훗날의 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그냥 고조선이라고 부르듯, 그리고 발해(대진국)이라는 명칭으로 건국했으나 역시 발해로 몽뚱그려 부르고 있듯이 여러가지 편의성 면에서 그냥 신라로 용어 통일이 이뤄졌다. 다만 676년 이전과는 달리 신라한반도의 지배권을 가져갔으니까 이전보다는 품격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대신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10]

3 국호

영어Later Silla/Unified Silla
한자統一新羅
한국어통일신라

3.1 통일신라 명칭 논란

백제고구려, 신라만 하더라도 당장 삼국시대에 역사상으로도 이미 존재했었던 국호였었다. 백제는 기록에서도 百濟, 伯濟로 표기됐으며 다른 사료에서도 십제(十濟)가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高句麗, 高勾麗, 高駒麗, 高句驪(고구려), 高麗(고려), 句麗/句驢(구려) 등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는 서라벌(徐羅筏),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등으로 불렸으며, 같은 국호를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탈해 이사금 시기에는 계림(鷄林)을 국호로 정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504년에 지증왕이 신라를 공식적인 국호로 정했다. 어쨌거나 이후 신라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으므로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사실 후대사람들이 신라를 평가하고 호칭한 것이다.

4 정치

통일 직후(신라 중대)에는 여러 모로 왕권이 강력했으나, 국가의 재정비 및 절대왕권 확립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절대왕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신라 하대)에는 너도나도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차츰 혼돈 국면으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일부 지역에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역량이 충분했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도 있었으나 골품제를 끝까지 내버려둬서인지 아니면 천 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는지 그 영광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890년경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는 궁색한 지경에 이르며 그 이후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서기 935년에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나라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왕조의 문을 닫는다. 이러한 신라 하대의 상황이 제국이 된 이후의 로마와 굉장한 싱크로(!)가 있어서 비상한 연구 대상이다.

하지만 국가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든 지역의 종교를 국가가 주관하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인식이 자리잡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신라 중대의 개혁에 더해 골품제만 없앴더라면 진정으로 한민족으로써의 정체성이 완벽하게 자리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어떤 사회든 신분제가 제대로 개혁되려면 머리 꼭대기부터 한바탕 뒤집어져야 하므로, 골품제는 결국 고대부터 국가를 쭉 유지했던 신라 1000년 역사의 정체성이자 어쩔 수 없는 멍에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11] 무엇보다 당대에는 육두품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계층을 제외한 민중 레벨에선 골품제를 지금처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12]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골품제 자체는 사라졌으나, 수세기 후 유교적 질서가 본격적으로 채택되기 전까지는 왕권과 왕실의 권위가 날로 떨어져 신라시대에 비해 척신 등에게 휘둘리는 부작용이 커진 점도 감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13]

국가체제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는 나라의 새로운 행정체계인 율령제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율령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견당사를 통해 급격히 중국화한 일본이나 당의 행정 체계를 거의 본뜨다시피 한 북쪽의 발해 등과 비교해볼 때 신라는 당이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구축한 통치체계를 꾸준히 계승하고 있었다. 하대에도 계속된 이 같은 전통의 고수는 신라의 정부체제가 기존의 갑절 이상 넓어진 영토에서도 충분히 기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끝내 골품제 혁파 등 구습 혁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렇게 다 좋은데 유독 정치판의 막장급 다툼을 오점으로 평가하며 신라를 폄훼하는 시각도 있다. 특히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 연속 반란고려 무신정권 이전까지 한국 반란사의 한 획을 그었다.[14] 그런데 이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옆나라 당과 일본(헤이안시대)과 비교해도 딱히 큰 차이가 있어보이진 않는 것 같다.[15] 단지 신라 자체의 역사로 한정지으면 최후반 100여년간은 그 전대와 비교해 집권 귀족세력간의 권력다툼에 다소 심하게 치중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거기서 그대로 망하지 않고 재도약을 꾀할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었으나 막판의 반란이 너무 대규모라 이겨내질 못했다.

당시의 왕과 인물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신라/인물 참조. 여담이지만 통일신라 중기 무열왕 직계 국왕들(무열왕~혜공왕)의 수명들이 하나같이 짧은 편이다. 50대에 사망한 무열왕(59세), 문무왕(56세)를 제외하고 신문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국왕들은 50세를 넘기고 생존한 임금이 없다.

5 영토

고구려 영토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느낌도 있지만 사실 이건 '상실'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것이, 애당초 고구려 영토는 발해가 고스란히 계승[16]해 간 데다 농경을 중심으로 했던 신라는 척박한 대동강 이북의 땅이 그다지 필요 없었고 결정적으로 신라의 주 타겟은 백제였다. 즉 백제와는 역사 내내 애증(?)으로 엮인 관계였으나[17] 고구려에 대해서는 좀 심하게 보태 중국(즉 평범한 관계의 다른 나라)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 게다가 고구려는 당, 신라는 백제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간에 대규모 충돌을 벌일만한 여력도 없었다.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백성들을 거의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전쟁을 벌였지만 백제 멸망 후의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나선 것도 한 예다.[18]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주체는 당이다. 실제로도 백제 멸망 후에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의 통치에 격렬한 저항을 했고 그 대가로 대우가 훨씬 박해졌지만 고구려의 유민들은 오히려 신라군과 연합하여 당의 안동도호부와 전쟁을 치뤘다.[19]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와 연합하여 싸우게 된 것은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애시당초 삼국시대 당시 서로간의 쌓인 온갖 감정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에 비해서 고루려와의 분쟁이 적은 편이었고[20] 심지어 신라가 고구려를 자기들의 어려움을 도와줄 협력 대상으로 생각했을 정도지만[21]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매우 달랐다. 백제의 경우는 고구려와도 마찬가지지만 왕이 노비 출신 무사에게 이 잘리고 잘린 머리궁궐 계단 아래 가매장당하는 막장을 보았다.[22]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약화를 틈타 왕실의 숙원이던 한성 지역 수복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충청도 지역 기반 귀족세력의 비협조와 역량 부족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신라 진흥왕에게 갖다 바친 격이 되니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이에 반해 신라 입장에서는 숙원인 소백산맥 이남 지금의 경상도 지역 통합을 위해 가야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기 위해 사사건건 군대를 가야에 파견하는 등 방해공작을 펴온 백제와 성왕이 눈엣가시였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신라에서는 백제군이 서라벌 바로 근처까지 쳐들어 올 정도로 징하게 싸웠을 뿐 아니라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23] 이 증오가 얼마나 깊었냐면, 훗날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는 자리에서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이 왕자 부여융에게 매섭게 채찍질하고 을 뱉는 일이 있었다.[24] 실제로 현장을 체감하지 못하는 사회 상층부에 쌓인 미움과 증오가 이런 정도인데,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며 서로 약탈, 겁간하고 싸워 죽여야 했던 하층부 평민들의 서로의 대한 증오는 어떠했을까?

새로이 편입한 구 고구려령에 대해서는 9주 5소경 중 고구려 멸망 전의 영토를 삭주(朔州), 명주(溟州)로, 고구려 멸망 후의 영토를 한주(漢州)로 이름하여 복속시켰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경우 초기에는 당이 안동도호부를 세워 차지하다가 나당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축출시켜 편입하기도 했고, 뒤에는 발해의 관할로 들어간 듯 한데, 그럼에도 이들 남북국에서 평양 일원은 국경으로 밀려난 변방이 되어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신라도 옛 고구려의 수도인 이 지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2정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도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계가 있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한 고려 때까지는 말갈족 등 이민족들이 기승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최근에는 황해도의 재건 및 평안남도 지역으로의 진출 등이 패강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발해가 점령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평양 지역이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당시 황폐화되었고, 신라대동강 이남 지역의 개발을 통해 서서히 평양 방향으로 영향을 넓혀나갔다는 주장. 특히 이러한 개발의 중심이 되는 예성강 ~ 대동강 구간은 고려태조 왕건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6 화려한 불교 문화

문화적으로 들어가보면 실로 그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스킬을 보유했던 시기. 유행이 바뀌거나 전쟁이 나면서 소실된 탓도 있지만 당시 기술은 현대에도 복원이 매우 어렵다. 당시 기술자들은 가 터졌겠지만 문화적으로는 역대 그 어느 시기에 비해도 꿀리지 않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조금만 뒤져봐도 공밀레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는 아티팩트 천지다.

특히 불교문화는 크게 번성했다. 뒤를 계승한 고려도 불교국가였지만 그 역량과 유물의 섬세함의 수준은 오히려 통일신라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다.[25] 특히 고려와 가장 비교되는 것이 불상의 완성도인데, 국사 교과서에 사진을 곁들여 아주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자. 불국사석굴암 등 신라, 아니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불교 유산들과 명승고찰은 대부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도 신라 못지 않은 불교국가여서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을 뿐더러 이 시기에도 흥왕사 보제사같은 거찰이 많이 세워졌고, 황룡사같은 신라 거찰들도 잘 번성했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교종선종의 대립 탓에 신라처럼 왕실이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입장은 못 되었다. 다만 고려가 통일신라보다 역사가 2세기 더 길었던 만큼 질적으론 달리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남아있는 유물은 고려가 더 많다.

7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초원과 보석광산>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26]

세계와의 무역도 비교적 활발했으며[27] 장보고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 진정 아시아이탈리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사실 당과 일본 모두 삼국 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 집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역관광당했고, 통일 뒤 통일신라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가적인 공격 기도를 멈췄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사이메이 덴노 시기에 대규모로 신라를 침공했다가 국가 병력의 반을 날려먹는 수양제급 병크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고(…), 이후 8세기에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추진됐으나 발해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끝끝내 당시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통일 직후의 전성기 신라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아마도 실행했다면 사이메이 덴노 시즌 2 확정[28]. 오히려 신라에서 일본을 털러 올까봐 두려워했다는 당대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 때.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붙은 이 시기의 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29]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동경→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한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8 역대 군주

신라 중대 및 하대에 해당한다.
신라 중대일 경우에는 태종무열왕 부터 혜공왕 까지,
신라 하대일 경우 에는 선덕왕 부터 경순왕 까지 이다.
자세한건 신라/왕사 문서 참조.

9 관련문서

  1. 통일신라는 이전 삼국시대의 신라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시대구분용으로 현대에 쓰이는 통칭이다.
  2. 삼국통일을 한 시점
  3. 제 56대 왕 경순왕고려항복한 시점
  4. '황왕' 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오직 신라의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어로 직역하면 'Emperor King'.
  5. 신라왕조 초기에는 박석김 3성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다. 후삼국으로 다시 쪼개진 뒤 박씨가 다시 왕에 오르기도 했다.
  6. 경덕왕이 고친 이 때의 지명 대부분이 1200년 이상 지난, 현대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7. 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었던 시대. 혜공왕이나 선덕왕 시대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8. 원성왕계가 왕위를 잇는 시점부터 멸망까지.
  9. 이 명칭은 그렇다면 왜 통일 이전의 신라를 '전기 신라'로 부르지 않느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통사, 조선전사, 조선단대사 에서는 '후기 신라와 발해'로 장이 구성되기도 한다.
  10.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발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11. 요컨대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더라손 쳐도 이런 신분질서가 완화되길 기대할 순 없다는 이야기. 고려조에 신분질서가 완화된 것은 호족 출신이 새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이다.
  12. 그리고 뒤이은 고려시대만 해도 고려사에서 가장 신분제가 틀에 박힌 문벌귀족 시절이 백성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 이후 개나소나 권력을 잡는 무신정권부터는 나라가 개막장화된다. 그리고 신라 말기 때의 막장스러운 상황에서는 그런 거 없고 민중 봉기가 일어나는 등 반신라세력이 급속도로 증가한다. 그런데 문벌귀족 시대가 진짜로 백성들에게 가장 나은 시대였는지는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단지 시기적으로 가장 유리했던 시기(국초+대외적 혼란) 아니냐라는 부분은 차처하더라도,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낫게 평가한 시대라서 훨씬 고평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려사를 기록한 사람들 입장에서 무인들이 활동하던 시대나, 자신들이 비판하고 나선 친원파의 시대를 좋게 평가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즉, 신분제의 고고화가 백성들이 살기 좋았다는 것은 근거가 한참 부족하다. 오히려 역으로 국가의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인 신분제가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합당한 설명이다.
  13. 고려와 달리 신라는 적어도 척신이 권력을 쥐고 흔들진 않았다.
  14. 참고로 백제의 경우도 고구려에게 쳐발린 후기에 문주왕-삼근왕-동성왕 3연타로 왕이 시해당했고, 고구려도 안원왕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 천수를 누리고 죽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치상황이 막장이었다.
  15. 당쟁등을 언급하면서 한국사를 분쟁의 역사로 몰아세우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즐겨 써먹던 여론몰이 수법 중 하나이나, 정치가 있는 곳에 다툼은 필연이다. 중국만 해도 60여개에 달하는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65년 정도며 진시황 이후의 통일왕조만이 300년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천년 이상 존속시켰다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세력과 다이묘(막부)의 정치적 농단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가끔씩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마스코트에 불과하였고, 결정적으로 무슨 무슨 막부 하는 세력들 모두가 천황의 명목상 신하이기는 하되 실상은 서로 항쟁하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즉 따지고 들면 통치체제가 외침과 내란에 맞서 건재하게 유지됨에 있어서 한반도만큼 안정적인 지역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는 말. 당장 신라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항했거나 사대했던 국가들만 따져봐도 이는 간단하다. 신라는 , 고려는 , 조선은 .
  16.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이 최근 학계에서 점차 대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7. 그냥 원수 사이라고 보면 된다.
  18. 이건 사실 당이 고구려에 집중하는 동안 백제 지역을 확실하게 지배하려는 전략의 일부였다. 백제 멸망 후 당이 정도로 스팀을 받았겠지만, 최대한 전력의 온존을 꾀하며 고구려 멸망 및 구 백제 지역의 확보를 노린 것이다.
  19. 백제부흥운동의 경우에는 나당연합군으로 아예 깔아뭉개 버렸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일부 지원하는 등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 물론 당나라가 물러간 후에는 외면했지만.
  20. 사실 고구려와 신라도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았다. 동천왕대에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은 적도 있었고, 내물왕 시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을 요청하여 왜군의 침입을 저지한 뒤 이후 신라 영토에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주둔하는 등 고구려의 간섭을 당한 적이 있었다.(이후 눌지왕 시기에 신라에 있던 고구려군을 모두 몰아냈지만) 게다가 광개토대왕 사후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맞서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진흥왕 때 한강 유역 차지 이후 한강 유역 일대를 놓고 고구려군에게 한강 유역 일대를 공격받으며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 사이에 전쟁이 매번 벌어질 정도였었다.
  21. 대야성 함락 직후 김춘추가 당이 아닌 고구려부터 간 이유, 물론 이 기대는 백제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가 고의적으로 무리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즉 거절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깨진다.
  22. 일본 기록에 상세하게 나온다. 성왕관산성 전투 당시 신라 무사 도도(?)라는 자에게 살해당했다.
  23. 대야성 전투 당시 성주 김품석의 부인이 김춘추의 장녀 고타소였고,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왕녀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서 왕녀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에, 김춘추의 다른 딸처럼 '공주'나 '부인(신라시대 왕실 여인에게 붙여진 '부인'이란 호칭은 공주나 왕비와 동일시된다. 가령 진평왕의 왕비는 마야부인으로, 김춘추의 딸이자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는 지소부인으로 불린다.)'으로 불리지 않고 '고타소랑'이라 기록된다.
  24. 당시 김법민은 "이전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원통히 죽여 옥중에 파묻은 일이 있다. 그것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앓게 하더니, 오늘날 네 목숨은 내 손에 있구나."라고 말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쓰여진 삼국사기 안에서 피냄새와 증오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이런 문장도 드물다.
  25. 물론 고려의 근본은 지방 세력인 호족의 연합 정권이였기 때문에 지방색이 신라에 비해서 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26.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같지 않았다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외국에서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 하다. 지금도 서양에선 우리를 고려(Korea)라고 부르는 것처럼
  27.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대륙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이었던 이유도 있다.
  28. 신라에 대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 당은 주로 서쪽 토번, 일본은 동북방의 아이누족과 대치국면에 들어갔다. 토번은 송첸캄포 대왕 때 크게 성장하여 안 그래도 한반도쪽에 신경쓰느라 바쁜 당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을 비교적 일찍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토번은 당이 막장테크를 타자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털어버린다.
  29.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