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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9월 25일자 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브라우히치.
▲ 컬러로 복원한 사진.
히틀러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브라우히치. |
목차
1 개요
이름 | Heinrich Alfred Hermann Walther von Brauchitsch (하인리히 알프레드 헤르만 발터 폰 브라우히치) |
출생 | 1881년 10월 4일, 독일 제국 베를린 |
사망 | 1948년 10월 18일, 서독 함부르크 |
복무 | 독일 제국군(1900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군(1933년 ~ 1945년) |
최종 계급 | 육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대전 폴란드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
주요 서훈 | 기사 철십자 훈장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 초기에 활약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전임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취 장군이 추문에 연루되어 해임된 후 육군총사령관이 된 뒤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실력 있는 장교를 대거 발탁하여 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나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히틀러의 미움을 사 숙청된 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 제1차 세계대전
1881년 10월 4일 실레지아 출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 베른하르트 폰 브라우히치는 프로이센 왕국의 기병대장이었고 아들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 역시 군인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1895년 포츠담 소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0년 포병소위로 임관하였다. 9년 뒤인 1909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였고 1910년에는 엘리자베트 폰 카르슈테트(Elizabeth von Karstedt)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1913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대위였던 브라우히치는 육군 제16군단의 참모장교로 배속되었다. 이후 베르됭 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겪으며 실전 경험을 쌓아 나갔고 전공을 인정받아 종전 시엔 1918년에는 소령으로 진급,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2 전간기
독일 제국이 패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제로 군축이 시행되었으나 브라우히치는 군에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종전 직후에는 전쟁성의 포병부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자신의 전공 분야인 포병 교리를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알려져 있다. 1925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1927년에는 대령이 되어 육군 훈련부로 배속되었다. 4년 뒤인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3제국을 수립할 때 당시 중장이던 브라우히치는 동프로이센 지방을 관할하는 사령관이었다. 이때 그는 동프로이센에서 활동하는 나치당원인 에리히 코흐(Erich Koch)[1]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브라우히치는 처음부터 나치당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도 있던 데다가 그는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유화 정책을 펼쳐 주민들에게 인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인종 정책을 펼치는 나치당이 활개치게 방조해서는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도 있었다. 코흐와 브라우히치의 갈등은 계속 이어지는데 결국 브라우히치는 하인리히 힘러와도 마찰을 겪게 되었다. 힘러가 동프로이센 지방에 있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 자리를 무장친위대 인원들로 채우려 했는데[2] 브라우히치가 그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무장친위대가 진주하는 것은 무산되지만 힘러는 앙심을 품고 이를 히틀러에게 일러바쳤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없었고 1936년에는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이때 히틀러와 브라우히치의 관계를 바꾸는 일이 하나 일어났다. 브라우히치는 1910년에 결혼해 자녀까지 두고 있었는데 나치당에 반대했던 그가 출세를 위해 아내를 버리고 나치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젊은 여성과 결혼하려고 한 것이다. 지독한 금욕주의자였던 히틀러는 타인이 이혼하는 것을 굉장히 좋지 않게 보았지만 브라우히치가 이혼하려 드는 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재혼 비용으로 8만 마르크를 빌려주었다. 결국 브라우히치는 아내를 차 버리고 재혼에 성공했다. 물론 히틀러에게 진 빚은 그대로 있었고 이후 히틀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원래 그는 나치당 자체는 혐오했으나 재군비 정책에는 찬성하던 인물이었고, 히틀러의 연설 능력에 반해 히틀러도 개인적으로 지지하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 이혼 건으로 후대에는 기회주의자라고 씹히는 계기를 스스로 만들지만.
1938년에는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취 장군이 게이라는 일명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터졌고, 독일 국방군 내에서 고위직에 있던 프리취 장군,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이 쫒겨나고 내부 인원이 물갈이되며 국방군은 히틀러에게 종속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브라우히치는 프리취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3] 동시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나치당에 반대했던 루트비히 베크처럼 그도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에 반대했으나 뮌헨 협정이 성공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집어먹힌 뒤에는 국방군 내 분위기가 대외적으로 매우 호전적인 모습을 띠게 되고 브라우히치도 이에 동조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베크는 브라우히치에게 '만약 히틀러가 계속 체코슬로바키아를 넘본다면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모든 육군 장군참모들을 사퇴시킬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지만 결단력이 없던 데다 히틀러에게 빚까지 지고 있던 상황인지라 브라우히치는 결국 체코 합병을 묵인해 버렸다.
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폴란드 침공 ~ 유고슬라비아 침공
▲ 1939년 바르샤바에서 아돌프 히틀러(右)와 함께.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브라우히치는 육군총사령관이란 직위의 특성상 일선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침공 작전의 수립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때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에서 잡힌 포로들을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폴란드 침공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하자 브라우히치와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패닉에 빠졌다. 당시 서유럽에서 최강의 육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를, 폴란드 침공이 끝난 지 1년도 안 된 데다가, 기갑 전력도 빈약했고 재정비가 크게 필요했던 독일군을 가지고 침공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 결국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암살해야겠다는 계획마저 세울 정도였다.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만나 프랑스 침공 날짜를 미뤄 줄 것을 간청하지만 당연히 히틀러는 격노했고 브라우히치를 휘하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가루가 되도록 씹어댔다. 히틀러에게 실컷 욕 쳐먹고 물러난 브라우히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슬프게도 현재 독일군 보병의 사기는 1차 대전 때보다도 떨어져 있다. 1917-1918년과 비슷한 불복종의 증상이 있어 왔다.The aggressive spirit of the German infantry is sadly below the standard of the First World War ... [there has been] certain symptoms of insubordination similar to those of 1917–18."
그러나 웬일인지 히틀러가 침공 날짜를 뒤로 제껴버리면서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 암살 작전을 일으키기도 뭐한 뻘쭘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다시 침공 작전 수립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940년에는 베저위붕 작전을 성공시켜 노르웨이, 덴마크를 정복했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 침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A집단군의 참모장으로 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기갑 부대를 주공 삼아 아르덴 숲을 돌파하자는 낫질 작전(Sichelschnitt)을 제출했다. 만슈타인의 상관이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동의하고 이것을 다시 육군 참모본부에 올렸으나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낫질 작전 자체가 실효성이 없고 지나치게 도박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만슈타인을 야전의 군단장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버려질 뻔한 낫질 작전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채택되었고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낫질 작전을 적극 수용해야 했다. 낫질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침공은 독일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침공 후 브라우히치는 원수로 진급했다.[4]
프랑스 침공 후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대영제국) 침공 계획을 수립했고[5] 브라우히치는 "영국놈들은 필패할 거임"이라 자신했지만 공군 루프트바페는 영국 공군보다 전력이 약해 제공권을 확실히 휘어잡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결국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도 독일 공군의 패배로 끝나 버렸다. 체면이 구겨진 브라우히치는 1941년에 개시된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성공시키며 이미지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군이 워낙 약체여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 그리스 아테네의 유적을 둘러보는 브라우히치(왼쪽에서 두 번째).
2.3.2 독소전쟁
▲ 1941년 4월 빌헬름 카이텔(左), 브라우히치(中), 아돌프 히틀러(右).
1941년 3월 브라우히치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를 약 3달 정도 앞두고 이런 연설을 했다.
모든 병력은 이 투쟁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것이며, 따라서 잔인함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출처
또다른 독일군 원수인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이 전쟁에서 우리는 소련의 국경을 몇백 km 뒤로 후퇴시키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라, 아예 소련을 절단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비슷하다. 브라우히치가 진심으로 소련을 혐오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이런 연설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비난의 여지는 충분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로 독소전쟁이 개막했고, 브라우히치는 여기서도 독일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소련군을 초기에 박살내고 다녔다. 브라우히치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독일의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여기서 폴란드 일대에서 벌어지는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학살 행위를 조장하거나 묵인했다. 반대하는 장교들에게는 따를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한편 브라우히치는 군사 작전의 시행에 일일이 간섭하는 히틀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브라우히치를 위시한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일대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지하 자원이 많은 데 대해 눈독을 들이고 모스크바에 전략적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당연히 브라우히치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 가해지는 공세는 불안정했다.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페도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의 후퇴를 허가한 책임을 물어 브라우히치는 육군총사령관에서 경질되고 히틀러가 스스로 육군총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독일군에는 재앙이 덮쳤다..
원래부터 심장병을 앓고 있던 브라우히치는 독소전쟁 기간 중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잦았고 육군총사령관에서 해임된 이후에는 다시 히틀러를 만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브라우히치를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병자 같은 놈"이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고 다녔지만 정작 브라우히치는 와병 중에서 총사령관 업무를 수행하려고 했을 만큼 성실했던 인물이었다.
이후에는 프라하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6] 이후 히틀러에게 현역 복귀를 희망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5년에 종전을 맞이했다.
2.4 전후
▲ 1945년 11월 25일 뉘른베르크에서의 브라우히치.
1945년 영국군에 체포된 브라우히치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기소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브라우히치는 다른 4명의 장군과 연대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에 각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독일 국방군은 히틀러에게 멋대로 휘둘렸던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고, 깨끗하게 전쟁만 수행했던 군대이며, 유대인 학살 등을 저지른 것은 무장친위대였다"는, 즉 국방군 무죄론, 깨끗한 국방군이란 변명의 시초가 되었다. 물론 벨라루스 초토화작전만 봐도 이 변명은 상큼하게 분쇄된다. 히틀러를 만났을 때부터 종전 때까지 그 치졸하고 비겁한 성격은 어디 안 가는 듯.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에 대한 예심이 진행되던 중 폐렴으로 인해 1948년 함부르크 소재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독일 잘츠기터(Salzgitter) 묘지에 묻혔다.
3 평가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이후 육군총사령관을 맡았던 국방군의 초기 주요 인물이며 전간기에는 포병 교리의 발전, 육군총사령관이 된 후에는 독일군의 기갑 전력 확충에 노력했으며 능력 있는 젊은 장교들을 대거 등용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군이 연전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발터 폰 라이헤나우, 빌헬름 카이텔 같이 과도하게 나치당을 추종하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참모장교 출신이던 프란츠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둘 다 히틀러가 작전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할더보다 브라우히치가 히틀러와 더 사이가 가까웠으므로 작전에 관해서는 총참모장인 할더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관리자로서 히틀러를 상대하여 독일 육군 참모본부가 히틀러의 중구난방이고 함량 미달인 작전 변경을 가능한 한 줄이고 최대한 효율적인 방향으로 작전을 짜 나간 덕분에 작전 독립성도 확보하고 초기의 연전연승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육군총사령관에서 경질된 후에도 와병 중에 총사령관 업무를 수행했을 만큼 히틀러 입장에서는 내치기엔 아까웠던 인물.
그러나 이혼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결단력도 부족했다. 자신의 지위,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히틀러에게 빚진 돈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모로 히틀러에게 잡혀 사는 모습을 보였다. 독소전쟁 초반에는 히틀러가 작전을 망치는 것을 싫어하여 여러 번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칼자루를 쥔 쪽은 히틀러이므로 모스크바에서 패한 이후에는 그냥 나가리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국방군 장교들에게 인종 학살을 명령했으면서도 전범 재판에서는 "우린 히틀러 따까리였음 ㅠㅠ"이라 징징대는 걸 보면 옹호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것 때문에 국방군 무죄론을 주장하는 저서, 영화 등이 나오게 되었다. 후대에 비겁한 기회주의자라고 욕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듯.
4 기타
- 아들 베른트 폰 브라우히치는 루프트바페에서 장군까지 진급했다. 물론 그도 뉘른베르크 재판에 끌려나왔다.
- 독소전쟁 중인 1941년 7월에 영내 음주 사고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음주로 인해 "영내 싸움, 하급자 학대, 상관 폭행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성범죄"가 일어나고 기강이 매우 흐려진다고 우려했다. 총사령관마저 지적할 정도면 당시 군 기강이 해이한 정도가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듯하다. 출처
5 진급 내역
- 1900.03.22 - 소위(Leutnant)
- 1909.09.18 - 중위(Oberleutnant)
- 1913.12.18 - 대위(Hauptmann)
- 1918.07.15 - 소령(Major)
- 1923.06.01 - 중령(Oberstleutnant)
- 1928.04.01 - 대령(Oberst)
- 1931.10.01 - 소장(Generalmajor)
- 1933.10.01 - 중장(Generalleutnant)
- 1935.10.01 -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38.02.04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0.07.19 - 원수(Generalfeldmarschall)
- ↑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잔혹한 탄압 정책을 펼쳤던 인간쓰레기. 참조
- ↑ 당연히 유대인 등 나치당의 인종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몰살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 ↑ 원래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될 것이었으나 라이헤나우가 알아주는 나치 빠돌이였던지라 국방군이 슈츠슈타펠과 동급의 나치당 휘하 사설 무장 조직으로 굴러떨어질 것을 염려한 장군들, 특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격렬히 반대하여 브라우히치가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 ↑ 이때 일본군 육군의 장성인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만난 적이 있다.
- ↑ 이때 영국 침공이 성공했다면 브라우히치는 영국의 총독으로 임명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 ↑ 루트비히 베크는 이 작전이 실패한 후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