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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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폴 매카트니
PAUL MC CARTNEY
분야음악
입성날짜2012년 2월 9일
위치1752 Vine Street
MBE
이름제임스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출생1942년 6월 18일
신체181cm, 72kg, B형
소속쿼리멘 (1957~1962), 비틀즈 (1963~1970), 윙스 (1971~1981)
포지션베이스, 드럼, 기타, 피아노, 보컬
장르, , 로큰롤, 일렉트로닉, 클래식, 재즈

1 개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일생의 파트너, 필생의 라이벌 존 레논과 함께 전 세계 대중음악의 위대한 아이콘

Sir James Paul McCartney, MBE. 비틀즈의 멤버였으며,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로 불린다.

세계 최고 골드 디스크 기록을 60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 가장 돈이 많은 연예인 등의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국 차트에서 유일하게 솔로[1], 듀엣[2], 트리오[3], 콰르텟[4], 퀸텟[5], 그리고 자선 밴드[6]의 모임으로 1위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1965년에는 비틀즈의 멤버로서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1997년 3월 11일에는 단독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으며(그래서 "폴 매카트니 경(Sir Paul McCartney)" 혹은 "폴 경(Sir Paul)"이라고도 불린다.) 1992년에 폴라음악상을 수상했다. 오오 폴 오오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성했다. 2012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되었다.[7]

현재의 리이슈 (Reissue)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신의 앨범의 음질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폴이 그걸 직접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한 게 그 시초라 한다.

또 자신의 파트인 베이스를 비롯하여[8] 피아노 등 많은 악기들을 잘 다룬다. 그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 는 전곡이 폴의 독주로 채워져있으며 후에도 그런 시도를 자주 보여줬다. 심지어 조지 마틴은 드럼 실력이 기술적으론 (롤 주법에 한해서) 비틀즈의 드럼 담당인 링고 스타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9] 누누이 말하지만 링고는 잘못이 없다 난 우리 학교 2등인데 같은 반 애는 전국 1등이래 정도?

특이하게도 '폴'이 중간이름임에도 '제임스'가 아닌 '폴'로 불린다. 집안에서도 태어나서부터 폴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도 정확히 잘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동생 피터 마이클도 중간이름 마이클로 부르는 걸 봤을 때 아일랜드계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폴 매카트니 본인이 추측하였다.

2 경력

2.1 비틀즈 (1957 ~ 1970)[10]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 문서 참조. 여기서는 간략하게 폴 매카트니 위주의 설명만 한다.

2.1.1 결성에서 정상까지

훈남 시절의 폴 매카트니.

1942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으며 댄스 밴드의 리더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선물한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지만 윗입술에 경련이 생기자 이 트럼펫을 어쿠스틱 기타와 바꿨는데 이 기타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 매리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고 후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존 레논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부터 존 레논과 함께 쿼리맨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58년 조지 해리슨의 가입으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프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구성된다. 이후 이름을 '더 비틀즈(The Beatles)' 로 바꾸고 스튜어트 서프클리프가 탈퇴한 뒤 피트 베스트가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현재 알려진 비틀즈의 기본 체제가 확립된다.

초기에는 존 레논과 함께 레논-매카트니 체제라는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로큰롤에 기반을 둔 이 둘의 음악은 서로에 의해 조율되었다. 하지만 존 레논이 개인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지향했다면 폴 매카트니는 대중적이고 듣기 좋은 음악을 지향한 편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음악에는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가 바로 둘 사이의 대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Yellow Submarine' 이전까지만 해도 이 둘의 협력은 계속되었고 8번째 음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페퍼 상사)' 에 수록된, 비틀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A Day in the Life' 는 이 둘의 곡을 합친 곡이었으며 당시 존 레논의 재혼으로 혼란을 겪었을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 를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11] '페퍼 상사' 와 'Magical Mystery Tour' 는 폴 매카트니의 주도 아래 제작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후기에도 폴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을 이끌려고 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그렇지만 무조건 폴의 탓만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은 후부터 비틀즈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노 요코와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폴은 와해를 막기 위해 노력한 거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결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소통의 문제.

2.1.2 불화와 분열

'The Beatles' 를 발표할 무렵 비틀즈 멤버들의 대립은 극심해진다.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은 폴 매카트니와의 대립으로 비틀즈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데려오면서 시작된 대립은 비틀즈 해체 이후까지 계속된다. 게다가 폴 매카트니는 완벽한 녹음을 추구했기 때문에 음악을 녹음할 때 30~40번씩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런 일에서도 멤버들의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뭉치자는 취지 아래 계획된 'Abbey Road' 와 'Let It Be' 에서도 멤버들과의 충돌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1970년도에 폴 매카트니가 견디다 못해 비틀즈를 탈퇴하며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앞서 말했듯이 비틀즈 해체는 누구 하나의 잘못만이라고 보기 어렵다. 매우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 당시 정신적 지주였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으로 비틀즈는 매일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리더인 존 레논은 그룹에서 흥미를 잃고 점점 멀어지고[12] 나머지 멤버들은 지쳐있었는데 이에 폴 매카트니는 본인 나름대로는 밴드의 분열을 막겠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시하며 주도하는 등) 노력한 것이었다. 폴이라도 나서서 주도하지 않았으면 아마 비틀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직후 해체됐을 것 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독선으로 느껴졌던 것.

게다가 비틀즈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존 레논이 1968년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를 공표한 이후부터는 스튜디오에 나올 때 옆에 꼭 오노 요코를 끼고 등장하거나 아예 스튜디오에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스튜디오에서 요코는 조지 해리슨이 먹으려고 놔둔 과자를 먹으며 침대 매트를 가져와서 누워있으면서, 사사건건 끼어들며 "아티스트인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녹음하고 있는 음악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되었다."라며 음악적인 부분에 훈계를 하고 멤버들이 연주 중인 앰프를 깔고 앉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였고 존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특히 조지와 폴) 오노 요코를 매우 싫어하게 된다. 때문에 후에 폴은 아내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고 조지는 존과 요코 앞에서 존이 존경하던 밥 딜런까지 얼마나 요코를 안 좋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존은 이때 요코를 변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워낙 맞는 말이라

'Let It Be'를 녹음할 때는 나머지 새 멤버들이 애플 레코드의 매니저로 추대한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며[13] 폴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폴의 곡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넘겼고 필 스펙터는 폴이 예전의 화기애애한 시절로 돌아가자며 단순한 밴드 사운드로 작곡한 원곡을 자신의 장기인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사용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서 곡의 장르 자체가 바뀌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들은 폴은 분노하여 앨범의 발매를 계속 반대하다가[14] 밴드 탈퇴 선언 직전인 1970년, 타이틀을 'Get Back'에서 'Let it Be'로 바꾼다는 조건으로 앨범 발매를 허락했다고 한다 또한 훗날 자신이 생각한대로의 사운드를 수록한 'Let It Be Naked' 앨범을 내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과의 대립은 비틀즈 해체 후 7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고 조지 해리슨은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라고 말하는 오노 요코에게 "3인조 밴드야" 라고까지 말했다(이때가 조지와 폴의 사이가 매우 틀어져있던 때로 폴 매카트니를 비틀즈 멤버로 인정 안하겠다는 뜻). 하지만 존과 폴, 조지와 폴은 오히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사이가 완화되고, 오히려 1980년 경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참고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두 사람이 1971년 발표한 솔로 앨범들은 서로에 대한 디스를 담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Ram' 에서 짝짓기하는 딱정벌레 사진을 집어넣었으며 이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를 비유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해당 앨범의 첫 곡 'Too Many People' 의 가사에는 존 레논에 대한 비꼬기가 담겨 있다. 존 레논도 이에 맞받아쳤다. 자신의 앨범 'Imagine' 의 부클렛 내부에는 폴이 'Ram' 에서 양의 뿔을 당기는 포즈를 따라하며 돼지의 귀를 당기는 사진을 넣었고 폴 매카트니를 디스한 곡 'How Do You Sleep?' 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위와 같은 예화들 때문에 존과 폴의 불화가 존 레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링고의 중재 노력이 빛을 발해 폴이 먼저 화해를 제스쳐를 취하게 되고 1974년 경에는 연주도 함께하게 된다. 갓링고

1974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해리 닐슨,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Stand By Me'를 함께 연주한 음원.
<A Toot and a Snore in '74>라는 이름의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물론 화해를 하긴 했지만 예전만큼 허물없이 지낸건 아니었다.1975년부터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션을 돌보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던 존 레논은 20대 시절처럼 연락도 없이 갑자기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는 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폴도 "지금은 20대도 아니고 비틀즈 시절도 아니야" 라는 존의 말에 상처받아 나중에 자신의 말에 후회한 존이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등 티격태격 하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와 달리 교류도 꽤 있었으며, 존이 죽기 전에는 사이가 많이 회복됐었다. 폴은 존 레논이 살고있는 다코타 아파트에 자주 놀러갔으며 어느날은 함께 술을 마시며 TV에 나오는 SNL 방송을 보면서 출연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물론 둘이 술에 많이 취한 상태라 결국 그 계획은 무산 됐지만.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가 McCartney II 앨범을 발표할 때 'Coming Up'을 듣고 좋은 싱글이라고 칭찬했으며 폴 매카트니 역시 존 레논이 5년의 공백기를 깨고 Double Fantasy를 발표했을 때 응원차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는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완성되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존 레논의 홈 레코딩 노래들이 수록된 두 개의 테이프를 받았는데, 한 테이프에는 (폴,조지,링고가) 작업을 마치고 발표한 "Free as a Bird"와 "Real Love"가 수록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테이프에는 "Now and then" (원제:I Don't Want to Lose You)와 "Grow Old With Me"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테이프의 겉면엔 "for Paul" 이라고 급하게 휘갈겨 쓴 존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존은 훗날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기도 했으며 [15] 폴은 존이 죽었을 때 추모곡 'Here Today' 를 작곡하기도 했다.

2.1.3 비틀즈는 계속된다 :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아직까지도 비틀즈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는 듯 폴 매카트니는 발매되지 않은 비틀즈의 곡들을 재발매하려고 애쓰고 있다.

2003년에는 본래 의도대로의 사운드로 비틀즈의 곡을 복원하기 위해 'Let It Be... Naked' 를 발매하기도 했다.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을 못마땅해한 폴의 원래 의도대로 곡을 다시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노래들을 다시 편집했다. 수록곡과 곡 순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Carnival of Light' 를 발매하려 하고 있으나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이 반대해 성사되지 않고 있다. 'Carnival of Light' 는 14분 가량의 곡이라고 하며 현재 비틀즈 곡 중 가장 긴 곡인 'Revolution 9'(8분 가량) 보다도 2배 가까이 긴 곡이다.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생전에 조지 해리슨이 이 곡을 무척 싫어했다는 이유로 이 곡의 발매를 반대하고 있다.

존 레논이 죽은 이후에는 존 레논의 유족과 화해했고 오노 요코를 초청한 자리에서 존 레논의 곡을 부르기도 했다. 존이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매카트니의 이름으로 된 곡을 매카트니-레논으로 바꾸려 한다는 논란이 펼쳐졌지만 굉장히 왜곡된 것으로 폴 매카트니가 바꾸려고 한 것은 오직 'Yesterday' 한 곡 뿐이었다. 'Yesterday' 는 완전히 폴 혼자서 만든 곡이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일이 크게 왜곡되어 모든 곡들을 바꾸려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Hey Jude' 마저도 존 레논이 작곡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치욕까지 경험을 해야 했다.

비틀즈 노래들의 판권을 되찾기 위해 요코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실패했지만...

비틀즈의 노래를 새로 리믹스해 재탄생시킨 앨범 'LOVE' 로 다시금 전 비틀즈 멤버로서 그래미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열린 현지 시각 7월 28일 0시 50분 경에 피날레 무대에 등장하여 'The End' 와 'Hey Jude' 를 열창하였다.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의 전설이니 어찌 보면 마땅한 일[16]. 개막식에 참석한 관중들이 함께 후렴구인 "나나나 나나나나~" 를 외치는 떼창 장면은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2.2 Wings & 솔로 활동 (1970 ~ 현재)[17]

훈훈한 윙스 시절의 폴 매카트니. 투어 때 장발로 무대에 많이 섰다.

폴은 비틀즈 탈퇴를 발표하고 일주일 후인 1970년 4월 17일, 가족을 주제로 녹음한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폴은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모두 혼자서 다루었다. 폴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는 그저 하모니와 백보컬만 할 정도로 앨범의 기획부터 녹음, 믹싱까지 모두 폴 혼자서 해낸 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까지 오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비틀즈 해체를 폴이 발표하고 뒤이어 바로 솔로 앨범을 냈다는 점에서 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하여 비틀즈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비틀즈가 해체된 이후인 1971년, 폴은 아내 린다를 비롯한 몇몇 세션맨들과 작업한 'Ram' 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1, 2위에 오를 정도로 히트를 했다. 하지만 앨범 뒷면에 있던 딱정벌레의 짝짓기 사진 때문에 존 레논과 한바탕 디스전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How Do You Sleep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뒤 폴은 자신과 린다 매카트니,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을 주축으로 윙스(Wing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윙스의 자세한 역사는 역시 해당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윙스의 명의로 발표된 첫 앨범 Wild Life는 믹싱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게 하려는 의도로 발표되었다. 실제로 몇 번의 테이크만 사용하여 만들어 수수한 느낌이 든다. 다만 차트 성적이나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특히 '윙스'라는 이름의 낮은 인지도 탓이라고 생각한 폴은 윙스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 때까지 Paul McCartney & Wing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Paul McCartney & Wings로 이름을 바꾼 윙스는 1973년 'Band on the Run'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폴 매카트니의 가장 성공적인 솔로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명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차트에서도 폴의 솔로 앨범 중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위를 하기도 했다. Band on the Run으로 윙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폴 매카트니는 1975년 발매된 Venus and Mars부터 다시 밴드의 이름을 Wings로 되돌린다. Venus and MarsWings at the Speed of Sound의 연이은 대성공을 거둔 윙스는 Wings over Europe, Wings over America 투어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인다. 이 시기 윙스는 브라스 밴드를 동원하여 재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팝 음악을 주력으로 하였다. 1976년 히트한 "Silly Love Songs"와 "Let 'Em In"가 그 대표적인 예.

1977년 11월 발매한 싱글 "Mull of Kintyre"는 영국 사상 최초로 판매량 200만 장을 넘기며 1977년 크리스마스 차트 1위, 1977년 최다 판매 싱글은 물론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폴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기록을 모두 가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18] 윙스는 1979년의 투어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를 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한편, 윙스의 투어 활동을 한창 하던 1980년 5월에는 자신의 이름으로만 발매한 두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II를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1970년 발매된 McCartney처럼 폴 본인이 앨범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서 진행하였다. 이 앨범은 기존의 록이나 재즈풍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일렉트로닉 테크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차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영국과 미국에서 1위와 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80년 12월 8일, 폴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발생한다. 바로 한 때 최고의 음악적 파트너였던 존 레논이 뉴욕에서 피살당한 것. 존의 죽음을 계기로 폴은 자신의 신변에도 문제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며 1981년 윙스를 해체시키고 다시 솔로로 전향한다.[19]

다시 솔로로 돌아온 폴은 1982년작 'Tug of War'를 통해 또 한번 찬사를 받는다.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앨범으로, 비틀즈 시절의 멜로디 감각이 제대로 나타난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폴의 팬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폴의 솔로 시절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앨범 쯤은 'Band on the Run' 과 함께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원더와 함께한 곡이 두 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Ebony and Ivory다.

이듬 해 발표된 1983년작 'Pipes of Peace' 이후 폴은 다소 축 처진 중년 분위기의 곡을 발표하게 되고 톱스타의 자리를 지키기 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발표하는 성향을 굳히게 되었다.[20] 1986년작 Press to Play는 흥행면에서 폴 매카트니 답지 않게 흥행하지 못한 앨범으로 손꼽히며, 폴 매카트니도 꽤 충격을 받고 다음 작품인 Flowers in the Dirt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게 된다. 그 덕분인지 이 앨범은 영국 음반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89년 Flowers in the Dirt 앨범이 발매된 후부터 폴 매카트니는 10년 만에 투어를 재개하게 된다. 1989년 7월 26일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1990년 7월 29일 미국 시카고 공연까지 총 103회의 공연이 진행되었던 "The Paul McCartney World Tour" 이후로 폴 매카트니는 1993년 Off the Ground를 발매한 이후 "The New World Tour"를 진행한다.[21] 1994년부터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Anthology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서 앨범 발매는 물론 투어도 중단한다. 그러다가 1997년, 비틀즈 시절의 느낌과 폴 매카트니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는 곡들로 채워진 Flaming Pi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 미국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차트 성적도 영국과 미국에서 2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하지만 Flaming Pie의 발매 후에도 폴 매카트니는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폴의 아내 린다가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1998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폴 매카트니의 투어는 2001년 Driving Rain이 발매되면서 다시 진행된다. "Driving World Tour", "Back in the World Tour" 등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후자는 라이브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2005년에는 음악적으로 꽤나 좋은 평가를 받은 폴 매카트니 표 발라드 앨범인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가 발매되며, 2007년에는 반대로 강렬한 록 사운드 위주의 Memory Almost Full이 발매된다. 2010년부터는 다시 전세계를 도는 투어가 개시됐으며, 2015년 현재에도 폴 매카트니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솔로 시절에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써냈다. 윙스 시절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가인 'Live and Let Die'[22], 'Band on the Run', 'Jet', 'Silly Love Song' 등의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70년대에 엘튼 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빌보트 차트 1위를 기록한 게 솔로 시절의 폴 매카트니이다. 또한 솔로 전향 이후에도 스티비 원더와 듀엣으로 부른 'Ebony & Ivory' 를 히트시켰으며 마이클 잭슨과 듀엣으로 부른 'Say Say Say', 'The Girl is Mine' 도 유명하다.

비틀즈 시절 벌어들인 돈보다 윙스 시절에 벌어들인 돈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일단 솔로 폴 매카트니의 정점은 윙스 시절에 만든 'Band on the Run' 앨범이라는 게 중론. 'Jet', 'Band on the Run' 등 솔로 폴 매카트니의 최고 히트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음악적으로도 폴 매카트니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앨범이다. 하지만 이후의 음반들도 폴 매카트니의 천재적 멜로디 실력이 잘 드러나있다. 'Tug of War'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 앨범 중 정수로 꼽히는 명작.

3 음악적 성향

앞에서 언급했듯 존 레논에 비해 대중성이 강한 곡을 썼으며 한국 내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한 비틀즈의 곡도 대부분 폴 매카트니의 곡인 편이다.

일부 팬층에서 존 레논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존 레논의 독자적인 사상, 실험정신, 극적인 삶과 죽음 등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폴 매카트니가 대중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걸 좋아하고 대중적인 히트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해서 그의 음악성을 레논의 아래로 볼 수는 없다.

락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페퍼 상사' 를 구상하고 컨셉을 주도한 것 역시 폴 매카트니이며 대중적인 곡들만이 아닌 실험적인 곡들도 많이 만들었다. 오히려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준 것만으로 보면 그는 존 레넌보다 더 화려한 면모를 자랑한다. 그가 작곡한 'Helter Skelter' 가 헤비메탈의 시초가 된 것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1980년에 테크노 음악을 시도했었다.[23]

레논 역시 그가 대중적으로 만든 곡들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레논의 행동은 폴의 재능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지 않고 결국엔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게 되어 츤데레적 성향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다. 'Obladi Oblada' 를 들으며 "이게 노래니?" 하다가도 'Here, There And EveryWhere' 을 들으며 감탄에 잠기는 츤데레(?) 레논을 상상해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폴 매카트니는 다양한 음악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클래식 음반도 5여장 냈으며 Fireman이란 가명으로 일렉트로니카 음반을 3장 냈었다. 전에는 모두 호평을 받았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대개 일반 앨범들에 비해선 잘 안알려져 있고 평가도 장르 평론가 사이에서는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평작 정도는 된다는게 중론.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에 비해 음악적 시도나 실험정신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최근에는 오히려 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그의 음악적 능력과 그 진가가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사실 비틀즈 전성기 시절 평가는 폴>=존이었다가 레논 사후 존>=폴이 된 것이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 폴=존이 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냥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모차르트베토벤을 비교하는 일과 마찬가지. 허나 먼 훗날 폴마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게 된 뒤라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비교 우위는 또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4 이야깃거리

4.1 가족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트럼펫과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어린시절 폴 매카트니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24]는 간호사였는데 폴 매카트니가 15살이 되던 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는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존 레논과 유대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형제 관계로는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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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는 1969년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1967년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비틀즈의 팀에 합류하였고 린다와 폴은 서로 첫눈에 반하여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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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습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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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린다는 1998년에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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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와의 사이에서는 2녀1남을 두었다. 장녀 메리는 사형제의 어머니로 살고 있으며, 차녀 스텔라 매카트니는 성공한 의류디자이너이다. 막내아들 제임스는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크게 뜨지는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의 그룹 비틀즈 츨신이니... 본인도 유명세에 대한 욕심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듯. [27]
2014년 11월 6일부터 서울 대림 미술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은 2015년 4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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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2년 헤더 밀즈[28]라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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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4.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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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폴 매카트니는 여느 영국인과 같이 육식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채식주의는 신체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이러한 생각은 린다와 결혼을 한 이후인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던 1975년의 어느 날, 폴과 린다 매카트니 부부는 한 식당에서 양고기를 먹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양고기를 먹던 도중 밖에서 평화롭게 초원을 거니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길로 폴과 린다는 채식주의 및 동물애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물론 식단을 갑자기 바꾸는 과정에서 꽤나 힘들었지만 끝내 성공했다고 한다.

현재는 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열성 채식주의자다.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함께 다니는 스태프들도 공연 준비와 공연 기간 동안은 채식만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도살장 문이 유리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라는 영상을 만들어 현대 축산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바 있으며,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 모피 시장에서 개와 고양이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중국 공연은 절대 하지 않을것을 선언했고,[30] 2008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4.3 사망 음모론

폴 매카트니 사망설 문서 참조.

4.4 기타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 교향시를 작곡하면서 악보를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폴 매카트니가 메모지나 종이에 쓴 노래 원고들을 보면 가사를 쭉 적고 위에 코드를 표기하거나 가사 따로, 코드 따로 적어놓았다. 현재도 클래식 곡이 아닌 일반 팝곡을 쓸 때는 악보에는 잘 쓰지 않는다. 사실 프로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들도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또한 젊은 시절 엄청난 골초였다. 사실 비틀즈 멤버들 다 그랬으나 담배 뿐만 아니라 연기를 흡입하는 형태의 마약을 좋아했는지 비틀즈 멤버들 중에 가장 대마초에 중독된 멤버였다.[31] 다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LSD는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는 손자, 손녀, 그리고 늦둥이 막내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다 끊었다고 한다.

왼손잡이이다. 굳이 왼손잡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이야 왼손잡이도 양손, 오른손잡이 같이 정상에 속하지만 약 20년 전에는 왼손잡이는 장애인과 동급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 풍조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도 과거에는 자식이 왼손잡이면 기겁을 하면서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시키던 풍조가 있었으니... 실제로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를 본 첫인상이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무슨 연주를 한다고'였다고 한다. 게다가 1950년대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정도라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그냥 왼손으로도 칠 수는 있다. Chaos and Creation in Abbey Road 영상을 보면 Twenty Flight Rock을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고 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에는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태원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음악 장르에 편견을 가져선 안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폴 매카트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즉흥적으로 지어서 내뱉은 말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퍼져버린 것. 누가 김억삼씨 아니랄까봐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이틀 앞두고 데이비드 베컴이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토하셨다. 여담이지만, 리버풀 출신으로서 에버튼 FC의 팬이다. 최근 에버튼 FC가 재정위기로 고생하고 있어서 에버튼 FC의 팬들은 그가 구단을 인수해주길 바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라이브 공연이 경험이 많은 음악가로,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곡들을 부른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20곡 내외를 부르는 데 반해 폴 매카트니는 공연 한 번에 앵콜 두 번을 포함해 쉬지않고[32] 35곡 정도를 부른다! 거기다가 내한 때는 곡들 사이 텀에 악기를 교체할 때, 기타 끝 쪽을 잡고 한 손으로 올리는 묘기를 하는 등 건장함을 자랑한다. 만 74세임에도 대단히 정정하다고 볼 수 있다.

시트콤 프렌즈 시즌4 마지막편의 결혼식 장면에서 로스 겔러의 시아버지 역할로 특별출연 제의를 받았었으나 바빠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폴은 시트콤 30 ROCK에 특별출연하게 된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에 카메오로 등장할 예정이다.

2016년 2월 15일 래퍼 타이가가 개최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파티에 참석하려다가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나는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주최측에서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을 원한다'면서 쫒았다고. 이에 폴 매카트니는 '어떻게 하면 VIP가 될 수 있느냐, 히트곡을 더 내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영상 황당해하는 Beck과 푸파이터스의 표정이 백미거 주최자 얼굴 좀 봅시다. 폴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이민을 가는 경험이었을듯 하다. 레논-매카트니 캐미를 이룬 전설적인 인물인데... 한국으로 치면 골든디스크나 MAMA 시상식 이후 뒤풀이 파티에서 조용필이 쫒겨난 느낌.. 이분은 조용필 이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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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있다. 2000년대 증후반 공연 영상에 꼭 얼굴을 비추는 맴버들로 오른쪽부터 기타를 맡고 있는 Rusty Anderson(흑발)과 Brian Ray(금발), 드럼을 담당하는 Abe Laboreil Jr.(스킨 헤드+수염), 키보드를 담당하는 Paul 'Wix' Wichens(가장 왼쪽의 탈모인). 곡마다 어우러지는 화음들이 도드라지는 폴 매카트니 작곡의 노래 특성상 각각의 멤버들이 백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Brian Ray는 폴이 피아노를 연주할땐 베이스를, 폴이 베이스를 잡으면 일렉기타를 연주한다. Hey Jude 인트로때는 템버린을 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드러머 Abe는 위 사진도 그렇고 영상을 보면 엄청난 고도비만이다. 뒷목의 살이 접힌게 보일 정도. 때문에 드럼을 치는게 매우 힘겨워 보이기도 한다...

4.5 콜라보레이션

마이클 잭슨의 앨범 Thriller에 수록된 'The Girl Is Mine'

폴 매카트니는 윙스 해산 후 1980년대에 완전히 솔로로 전향하였지만, 여러 뮤지션과 교류하며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남겼다. 1982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 Ebony and Ivory를 부르고 마이클 잭슨과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를 발표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 Flowers in the Dirt 앨범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하였고, 'No More Lonely Nights'나 'We Got Married'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하기도 하였다. 스티비 원더는 이후 폴 매카트니의 2012년작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의 '"Only Our Hearts'란 곡에 하모니카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장 좋아하는 현대 밴드로 라디오헤드더 킬러스를 꼽았다. 오?! # 폴은 개인적으로 라디오헤드에게 콜라보를 제안하고싶지만 라디오헤드가 너무 바빠 거절할까봐 제안을 못하겠다고 했었다.#

2014년에 게임 데스티니의 곡들을 공동작곡하였다. 특히 Hope for the Future라는 제목의 싱글도 발매했다. 게임팬들의 반응은 노래는 좋은데 황금기를 누리던 인류가 미지의 적에 의해 몰락해버린 배경인 게임하고 맞지 않는 가사가 문제라고 한다.

리한나의 싱글 'FourFiveSeconds'에도 기타 반주(...) 피처링으로 참여하였다.

카녜 웨스트와의 콜라보 'Only One'이 공개되었다. 오토튠이 인상적이다.

5 내한

폴 매카트니/내한 문서 참조

6 솔로 디스코그래피

6.1 앨범

6.2 싱글

6.2.1 빌보드 1위

6.2.2 빌보드 2위

  • Live and Let Die (1973)
  • The Girl Is Mine (Duet with Michael Jackson) (1982)

6.2.3 빌보드 3위~10위

  • Another Day (1971)
  • Hi, Hi, Hi (1972)
  • Helen Wheels (1973)
  • Jet (1974)
  • Junior's Farm (1974)
  • Let 'Em In (1976)
  • Maybe I'm Amazed (1977)
  • Goodnight Tonight (1979)
  • Take It Away (1982)
  • No More Lonely Nights (1984)
  • Spies Like Us (1985)
  • FourFiveSeconds (2015)[33] [34]

6.2.4 빌보드 11위~20위

  • Venus and Mars/Rock Show (1975)
  • Getting Closer (1979)
  • All Day (2015)[35]

폴 매카트니의 솔로시절 히트곡들은 윙스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7 참고 문서

  1. Pipes of Peace
  2. "Ebony and Ivory" with Stevie Wonder
  3. Mull of Kintyre, Wings
  4. "She Loves You, The Beatles
  5. "Get Back", The Beatles and Billy Preston
  6. Do They Know It's Christmas? Band Aid 2
  7. 비틀즈 멤버 중 가장 늦게 헌정되었다.
  8. 폴은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피크 피킹을 핑거링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한 연주자이다.
  9. 화이트 앨범 녹음 당시에 일어난 일로 이 시기는 비틀즈 멤버들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과 오노 요코의 출현,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불화가 극에 달한 시기로 링고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탈퇴했다. 그래서 'Back in U.S.S.R' 과 'Dear Prudence' 는 링고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폴이 직접 드럼을 담당했다.
  10. 쿼리멘 시절 포함.
  11. 이때부터 불화가 '시작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중기로 접어들며 존과 폴의 음악적 성향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조지는 소외되는 현상들이 발생하다보니 팀워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
  12. 제일 먼저 비틀즈를 떠난 것도 존 레논이었다. 두 차례나 비틀즈 탈퇴를 멤버들에게 언급했다고... 지치다 못해 결국 비틀즈를 놓게 된 폴이 나중에 공식 발표만 했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 비틀즈는 해체됐던 상황.
  13. 당시 폴은 장인이자 법률가인 리 이스트먼에게 애플의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고 존과 요코는 당시 판권업자들에게 있던 저작권을 원가수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음악계의 로빈 훗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앨런 클라인에게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다.(이후에 앨런 클라인의 연속된 병크로 앨런의 본성을 돈독 알게 된 존 레논이 그를 비판하는 곡을 쓰기도 했다.) 이 때 조지와 링고는 폴이 이제는 자신의 처가까지 비틀즈에 끌어들인다며 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14. 이 때 존 레논은 "그는 최악으로 녹음된 짐들을 받았지만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내가 들었을 때 나쁘지는 않았다"라며 필 스펙터를 두둔했다.
  15. 존이 폴을 디스하려고 요코와 함께 작곡한 'How Do You Sleep?'은 존이 나중에 아주 많이 후회한 곡이다.
  16. 폐막식에서는 영상을 통해 존 레논이 등장함.
  17.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
  18. 1960년대 최다 판매 싱글은 비틀즈의 "She Loves You"로 대략 130만 장이 팔렸다. 또한 "Mull of Kintyre"의 기록은 1984년 밴드 에이드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가 298만 장을 기록하며 깨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현재도 "Mull of Kintyre"는 영국 내에서 최다 판매 싱글 순위 3위에 올라있다. 참고로 1위는 1997년 엘튼 존이 "Something About the Way You Look Tonight" / "Candle in the Wind 1997"로 기록한 477만 장이 최고.
  19. 물론 이 시기에 폴이 일본 공연차 방일했을 때 대마초를 소지하던 것이 적발되어 추방되는 사례 때문에 데니 레인을 비롯한 윙스 멤버들의 피로감도 해체의 원인이었다.
  20. Pipes of Peace는 Tug of War와 동시에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그런데도 차트 성적이나 평단의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아이러니.
  21. 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Tripping the Live Fantastic"이며, 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Paul is Live" 앨범이다.
  22. 건즈 앤 로지스가 커버 앨범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 곡이다. 이 곡은 007 매니아들에게 최고의 주제가 중 하나로 뽑히고 있다.
  23. 'McCartneyII' 앨범 수록곡 'Temporary Secretary'.
  24. 폴이 밝힌 바로는 'Let it be'에 등장하는 'mother mary'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를 뜻한거였다고.
  25. 마이클이 어린시절 뒤뜰에서 기타를 치던 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폴 매카트니의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앨범의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
  26. 당시 린다는 딸을 한명을 둔 이혼녀였는데, 폴은 그 딸은 정식으로 입양하였다.
  27. 아버지의 앨범인 Driving Rain에 공동작곡한 곡이 있다. 문서 참고.
  28. 지뢰사고를 당해서 지뢰 해체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지만 틀린 사실로 경찰 오토바이와 부딪혀서 왼쪽 발목 아래가 날아갔다. 현재 의족 착용 중. 하지만 지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
  29. 그런데 헤더 밀즈는 몇 해 뒤 이걸 다 탕진했단다.
  30. 하지만 후에 폴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공연을 해보고싶다고 말했다. 근데 중국에선 일반인들은 Yesterday도 모른다는데 한다면 얼마나 올까
  31. 심지어 윙스 시절 일본 공연을 하기 위해 공항에서 수속을 받다가 아이들 옷가방 아래에서 대량의 대마초가 발견되어 일본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32. 곡들 사이 텀이 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
  33. 리한나의 싱글을 피쳐링
  34. 32년만에 10위 진입으로, 가장 긴 공백 기간을 가지고 10위에 진입한 기록이다!
  35. 미국의 유명랩퍼 칸예 웨스트의 싱글을 피처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