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일 | 1989년 8월 29일 |
녹음일 | 1988년 11월 ~ 12월 |
녹음 스튜디오 | 덴마크 라네르스의 Puk 스튜디오 |
장르 | 팝, R&B, 소프트 록 |
러닝 타임 | 47:55 |
프로듀서 | 크리스 토머스 |
발매사 | MCA (US), Rocket (UK) |
엘튼 존/음반 목록 | ||||
Reg Strikes Back (1988) | Sleeping With The Past (1989) | The One (1992) |
너를 위한 앨범이야, 버니 (This album's for you, Bernie)- 앨범 자켓에 써져 있는 문구
목차
Healing Hands 뮤직 비디오.
Sacrifice 뮤직 비디오.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뮤직 비디오.
Whispers 프로모 비디오.
1 개요
Too Low For Zero와 같이 엘튼 존의 1980년대 걸작이자 음악적 역량이 부활한 앨범
엘튼 존의 22번째 정규 앨범.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전에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다.
2 암흑기
엘튼 존에게 1980년대 후반은 힘든 시기였다. 당시에도 왕성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1975년 이후로 10년 넘게 시도했던 약물 중독으로 인해서 신체적으로 영향이 크게 갔었고, 30대 전부를 마약으로 보냈었다. 매년간 정규 앨범들을 발매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대부분 1970년대처럼 커다란 포텐을 터트리지 못했었고, 레이블 사와 계약이행을 위해서 공장의 물건처럼 찍어내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당시 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꾸준히 히트 곡들을 작곡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서 1970년대와 달리 편한 마음으로 앨범을 작업하지 않았고, 음악적으로 역량을 크게 보이질 못했다는 추측이 있다. 거기다 1986년 9월 Ice On Fire 투어를 진행하던 시기에 성대결절이 생겨 그해 9월부터 11~12월 Tour De Force까지 역대 가장 나쁜 상태의 보컬을 보여주었다.[1] 거기다 1987년은 그에게 최악의 해가 된것이 더 선의 악성 루머로 몇개월 동안 엘튼 존을 괴롭히게 되었고, 엘튼 존이 1987년에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결국 그해 9월에 소송을 걸어 1년동안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고, 1988년 10월에 엘튼 존은 승소를 하게 되어 피해 보상은 100만 파운드, 한화로 18억 3천만원정도 받게 되었다. 그 후로 더 선과 악연이 끝났나 싶었지만, 엘튼 존은 1년간 입었던 정신적인 피해와 과도한 약물 중독으로 인해서 엘튼 존 본인의 모습은 나이 40세로 보이지 않을정도로 상당한 노안이었고,[2] 소송 이후에 1개월뒤인 1988년 11월 18일에 아내 '르나타 블로엘'과 이혼을 하게 되어 1984년 2월부터 4년간 이어온 결혼 생활을 끝냈기 때문에 1980년대 후반은 엘튼 존에게 있어선 가장 어둡고 최악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3]
그렇게 약간의 안정을 취하기 시작한 1987년 12월부터 1988년 봄까지 다시 앨범 작업에 들어가 전작 Reg Strikes Back를 작업해서 1988년 6월에 발매되었고, 싱글들도 발매되어 히트를 쳤고, 1988년 7월부터 다시 라이브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해 가수로써 다시 복귀를 했다. 앨범이 발매되고 3개월 뒤인 1988년 9월 6일 영국 런던의 소더비에서 본인의 2,000여점이나 되는 화려한 복장들, 모자들을 포함한 물건들을 경매로 내놓았고, 본인을 다시 되돌아봐 의지를 크게 확고했다. 하지만 당시 엘튼 존은 Reg Strikes Back과 히트 싱글, 다시 진행되기 시작한 투어 활동으로 재기에 성공했어도 1987년 스캔들의 여파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와 실패된 결혼 생활, 30대 전부를 보내온 약물 중독으로 인한 노안의 모습으로 인해서 정신적과 신체적으론 아직 힘든 시기였다.
3 녹음
그렇게 Reg Strikes Back가 발매 되고 5개월이 지난 시점이자, 1985-6년부터 3년간 성대결절과 타블로이드와 싸움, 이혼, 저조한 앨범 판매량, 약물 중독으로 인한 건강 문제 등의 개인적인 온갖 굵직한 문제들에서 벗어나 겨우 안정을 찾은 1988년 11월부터 12월까지 1개월 간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갔고, 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 동부의 항구 도시 라네르스(Randers)에 위치한 Puk 스튜디오에서 작업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1987년에 조지 마이클의 솔로 1집 Faith를 작업한 곳이고, 이러한 이유로 이 스튜디오를 고른것이라고 한다.
엘튼 존의 대부분 1980년대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프로듀서 크리스 토머스가 맡았고, 1985년 19집 Ice On Fire부터 참여한 세션들 거의 빠져나갔다. 덴마크에서 작업된 앨범이라 거의 유럽 세션들이 참여했고, 데이비 존스톤과 1984년 Breaking Hearts 투어부터 키보드를 맡던 프레드 만델을 제외하면 라인업을 완전히 바꾼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4]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일관된 주제를 가진 앨범을 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이후로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제작된 앨범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의 앨범을 다시 제작하게 되었고,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이후로 14년만에 주제를 가진 앨범이 된 것.
그래서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본인들한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1960~70년대 R&B, 소울, 모타운 뮤직을 헌정하는 의미를 담았고, R&B 사운드의 크게 본딴 곡들로 수록되었다.[5] 버니 토핀은 가사들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 1960년대 소울, R&B 음악을 다시 듣게 되었고, '샘 쿡', '재키 잭슨', 아레사 프랭클린, 마빈 게이, 레이 찰스, '스모키 로빈슨 앤 미러클스' 등의 R&B, 소울 뮤지션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간만에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협업을 다시 보여주었고, 오랜만에 특정의 주제로 제작된 앨범이라 서로의 협업이 1970년대 전성기 시절처럼 크게 보였을뿐 만이 아니라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이후로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엘튼 존과 버니 토핀 둘이서만 모든 곡들의 구성을 작곡했다. 1975년 10집 Rock Of The Westies부터 세션들이 작사작곡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에 초기 시절처럼 엘튼 존과 버니 토핀 단둘이서만 모든 구성을 작업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다 싶었지만, 이 앨범으로 통해서 서로의 협업이 다시 제대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앨범부터 엘튼 존의 음악적 역량이 본격적으로 다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를 제외하면 전성기 시절의 탄탄하고 높은 역량과 완성도를 가진 앨범들이 없었고, 앨범들과 싱글들도 꾸준히 히트를 쳤지만, 전성기 시절에 비해서 비교적 빛을 덜 보았지만, 전작 Reg Strikes Back부터 역량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이 앨범부터 전성기 시절을 연상시킬 정도로 크게 부활하게 된 것. 전체적인 구성은 신디사이저의 비중이 크고, 뉴웨이브의 요소를 크게 차용되어 배경을 이루던 1980년대 앨범들과 달리 다시 복고풍 사운드로 돌아가 수록곡들의 밝고 수려한 사운드와 엘튼 존 특유의 부드러운 멜로디 진행으로 1970년대 전성기 시절의 앨범들을 연상시킬정도로 탄탄한 구성을 가졌기 때문에 비슷한 역량을 가진 Too Low For Zero와 같이 가장 뛰어난 엘튼 존의 1980년대 앨범이라고 호평 받는다. 모든 수록곡들은 복고풍의 사운드를 가졌고, 특정의 뮤지션들이 가사에서 언급되거나 헌정을 크게 담았다. 그리고 엘튼 존의 역량 뿐만이 아니라 버니 토핀의 역량도 크게 살아났다고 볼 수 있고, 당시 엘튼 존과 같이 실패된 결혼 생활에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던 시기였기 때문에 상당히 자전적이고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본인들의 통렬한 생각들을 담아서 쓴 내용도 주를 이루고 있다.
엘튼 존의 보컬 또한 젊은 시절을 연상시킬 가성 보컬으로 불렀다. 1986년 성대결절과 1987년 1월 성대 수술 이후로 이전처럼 가성을 쉽게 사용하지 못했고, 바리톤 창법으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이 앨범에선 Reg Strikes Back보다 높은 보컬로 불렀고, 특히 6번 트랙 Stones Throw From Hurtin'은 완전히 가성으로 뒤덮혀 불렀다. 여러모로 당시 엘튼 존의 개인적인 상황들을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6]
4 발매
앨범은 1988년 11~12월에 녹음되었지만, 거의 1년 뒤인 1989년 8월 29일에 발매되었다. 이는 당시 뜨근미지근한 성적을 거둔 Reg Strikes Back 때문에 미국 레이블 MCA에선 앨범을 거의 1년간 발매하지 못하도록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미 1979년 Song For Guy의 참담한 미국 차트 성적 이후로 엘튼 존에게 압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MCA에 나가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Geffen과 계약해 있었다가 1988년에 다시 다시 계약을 맺게 되었지만, 1970년대 후반과 별다를바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엘튼 존은 상당한 불만을 낼수 밖에 없었던 이유[7]
그렇게 1989년 8월 29일에 앨범이 발매되었고, 발매 전의 레이블 사의 만행에 불구하고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호주 앨범 차트 2위, 뉴질랜드 앨범 차트 1위, 프랑스 2위, 스위스 1위로 기록되어 여러 국가에서 5~10위 안에 진입되었고, 영국 앨범 차트에선 오랜만에 1위로 기록되어 플래티넘 3장을 얻어 영국에서 가장 크게 히트친 엘튼 존의 앨범들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선 1974년 8집 Caribou 이후로 15년만에 다시 1위로 기록된 것.[8]
호주 앨범 차트 2위, 뉴질랜드 앨범 차트 1위, 프랑스 2위, 스위스 1위로 기록되어 여러 국가에서 5~10위 안에 진입되었고, 영국 앨범 차트에선 1위로 기록되어 플래티넘 3장을 얻게 되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평론가들에겐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모으지 못했지만, 수많은 팬들한테 커다란 사랑을 받았고, Too Low For Zero와 같이 가장 뛰어난 엘튼 존의 1980년대 앨범으로 평가 받는 경우가 크다.
싱글들은 'Healing Hands', 'Sacrifice',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Whispers', 'Blue Avenue' 5곡이 발매되었고, 'Healing Hands'와 'Sacrifice'는 1989년 8월에 싱글로 발매되어 'Healing Hands'는 빌보드 차트 13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 'Sacrifice'는 빌보드 차트 18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쳤지만 앨범의 성공과 달리 영국 싱글 차트에선 4~50위 안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1990년 5월에 영국에서만 'Healing Hands/Sacrifice' 더블 A면으로 재발매되어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되어 영국에서 가장 크게 히트친 엘튼 존 곡들 중 하나가 되었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3년만에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된 경우이다. 사실 'Don't Go Breaking My Heart'는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곡이고, 본인 솔로 명의로만 발매된 곡이 아니기 때문에 'Healing Hands/Sacrifice' 싱글이야 말로 엘튼 존 솔로로 처음으로 영국 1위로 기록된 곡이라고 볼 수 있다.1991년 로완 앳킨슨 인터뷰에서 이제서야 1위를 가졌냐고 엘튼 존에게 깐족거리면서 까다가 엘튼 존에게 총 맞고 죽기도 했다(...). 거기다 엘튼 존은 깨알같이 좆대가리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뜬다.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는 1990년 5월에 발매되어 세계적으로 그리 히트를 치지 않았지만,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 덴마크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되었다. 'Whispers'는 유럽의 몇 국가에서만 프로모 싱글로 발매되어 프랑스 싱글 차트 11위로 기록되었고, 'Blue Avenue'는 1990년 11월에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서만 발매되었고, 네덜란드 싱글 차트 50위로 기록되어 히트치지 않았다.
5 여담
이처럼 당시 싱글들과 앨범의 상업적인 성공들로 인해서 엘튼 존의 음악적인 역량은 물론 재기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엘튼 존의 신체적과 정신적으론 아직 힘든 시기였고, 그렇게 1990년 중-후반부터 1991년까지 재활 치료를 하게 되어 새 사람으로 변했고, 1992년 23집 The One으로 본격적으로 두번째 전성기를 보내게 되었다.
앨범 커버는 당시 약물 중독과 폭식증으로 인한 망가졌고, 상당한 노안으로 보였던 엘튼 존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아주 드물게도 모자를 벗은 상태로 커버를 촬영되었다. 앨범에 담겨진 본인들의 자서전 식의 내용처럼 어두운 커버에서도 자전적인 의미가 크게 보인다.
엘튼 존은 1989년 8월 인터뷰에서 17집 Too Low For Zero와 같이 가장 좋아하는 본인의 1980년대 앨범이라고 설명했다.[9] 이후에도 강력한 앨범이라고 애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앨범이 발매되고 10년뒤인 1999년에 폴리그램 인터네셔널 레이블에서 리마스터링되어 앨범을 작업하면서 앨범에 수록되지 못하고 싱글 B면에 수록된 Daning In The End Zone과 1989년 고스트 버스터즈 2의 Ost로 수록된 Love Is A Cannibal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여담으로 I Never Knew Her Name, Blue Avenue를 제외한 모든 트랙들은 드럼으로 시작한다.
6 트랙 리스트
6.1 Durban Deep - 5:32
앨범의 오프닝 트랙은 6분에 가까운 러닝타임과 Am으로 구성되어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는 곡. 강력한 기타와 드럼 선율과 같이 동반하기때문에 강력한 느낌이 크게 들고, 리드미컬하고 그루브하게 진행된다. 이 곡은 미국의 1960년대 R&B 흑인 뮤지션 '리 도시'의 'Working In A Coal Mine'에[10] 영감을 얻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동부 나탈주에 있는 항구도시 더반(Durban)의 탄광에서 일하면서 석탄 가루를 마시면서 힘들고 고된 삶을 보내는 광부들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곡의 'Durban Deep'은 더반의 광산 이름이고, 금광에 관한 것이라고 추측이 있다. 라이브 공연에서도 한번도 부르지 않았고, 1998년 폴리그램 인터네셔널 레이블 리마스터링 판 앨범에선 원곡보다 약간 길고 약간의 다른 보컬들로 믹스되기도 했다.
6.2 Healing Hands - 4:21
Bb으로 구성되었고, 경쾌하고 파워풀한 선율로 진행되는 업템포 록 넘버. 전반적으로 상당히 복합적인 구성의 곡인데 처음엔 Bb으로 구성되어 이지 리스닝 계의 흥겨운 멜로디와 코드 진행으로 구성되었고, 코러스는 D로 변환되고, 브릿지 부분은 Gm로 변환되어 진행되고, 다시 바꿔지는 구성이다. 이 곡은 미국의 4인조 보컬 그룹 '포 탑스'의 대표곡 'Reach Out, I'll Be There'의 영감을 받아서 작곡된 곡이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포 탑스의 영향력도 적지 않다고 볼 수 있고, 이전에도 영향을 받거나 언급이 된 경우도 있다.[11] 버니 토핀은 'Reach Out, I'll Be There'의 영감을 얻고 나서, 좀 더 종교적인 내용으로 썼다고 후에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곡은 또한 여성과의 사랑에 대해서 본인들의 통렬한 생각을 담았다고 하던데 이는 중요한 의미로 볼 수 있기도 한다. 엘튼 존은 당시 1984년에 사운드 엔지니어 '레나타 블라우엘'과 결혼해서 4년 간의 결혼 생활 끝에 1988년 11월에 이혼을 하게 되었고, 엘튼 존의 이혼에 이어서 버니 토핀도 당시 모델 '토니 러소'와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3년간의 결혼생활을 보냈었고, 1988~1989년 당시 사이가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버니 토핀은 1972~1976년까지 4년간 함께한 첫번째 부인 맥신 파이벨맨이 있기때문에 이혼과 실패된 결혼 생활의 경험을 잘 알고 있었고, 당시 엘튼 존과 비슷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앨범에선 R&B에 대한 헌정뿐 만이 아닌 실패된 결혼 생활과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본인들의 통렬한 생각도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곡도 본인들에 관해서 상당히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는 추측.
이 곡은 1989년 초~중순에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었고, 곡의 가사처럼 말그대로 구원에 관한 내용을 담았고, 엘튼 존 본인에 관한 자전적인 의미를 담았다. 뮤직비디오는 엘튼 존의 뮤직비디오들은 맡던 감독 러셀 멀케이가 맡았다. 1989년 8월에 앨범이 발매되던 시기에 같이 싱글로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차트 13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 호주 싱글 차트 14위, 캐나다 싱글 차트 8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를 쳤다. 영국에선 45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1990년 봄 BBC 라디오로 통해 인지도를 생긴 Sacrifice가 1990년 5월에 같이 더블 A면 싱글로 재발매되어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되어 영국에서 가장 큰 히트를 친 엘튼 존 곡들 중 하나가 되었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3년만에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되었다. 라이브 공연에선 1989~1990년 Sleeping With The Past 투어의 레파토리로 분류되어 자주 불렀다가 1990년 투어와 1993년 2월 오세아니아 투어 이후로 한번도 부른적 없다.
6.3 Whispers - 5:30
수려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멜로디와 코드 진행이 인상적인 발라드. 곡은 5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에 Eb로 구성되었고, 곡에선 드럼과 기타로 잔잔하게 동반하여 잔잔하게 수려하게 진행된다. 아웃트로는 Ab/Eb, Eb로 천천히 이어지고 조용히 막을 내린다. 이 곡은 앨범을 작업하면서 가장 먼저 작곡된 곡들 중 하나이고, 미국의 R&B 뮤지션 '잭키 윌슨'의 1966년 히트곡 'Whispers (Getting Louder)'의 영향을 받아서 작곡되었다. 그래서 가사도 말그대로 속삭임에 대한 내용. 또한 이 곡은 원래 Sacrifice 싱글 이후로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1990년 5월에 발매된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싱글 B면에 유쾌한 커버작 Give Peace A Chance와 같이 수록되었고, 비슷한 기간에 유럽의 몇 국가에서만 프로모 싱글로 뒤늦게 발매되었다.
당시 프랑스 싱글 차트 11위로 기록. 1990년에 프로모 비디오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사실 1990년에 싱글로 발매된 독자적인 곡 You Gotta Love Someone과 이전에 발매된 엘튼 존의 1980년대 뮤직비디오들의 장면들을 짜집기해서 붙힌 편집 영상이다. 라이브 공연에선 부르지 않은걸로 보이고, 그저 1989~1990년 TV 쇼에서 립싱크로 부른것 밖에 없다.
6.4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 4:50
D로 구성되었고, 리드미컬하고 경쾌한 선율로 진행되는 업템포 록 넘버. 곡에선 다른 곡들처럼 키보드의 비중이 크고, 간주는 멋진 색소폰 솔로로 진행된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와 색소폰 솔로까지 포함해서 전체적인 구성은 마치 1981년 15집 The Fox의 3번 트랙 Just Like Belgium을 연상시킨다는 평도 있다. 다만 좀 더 멜로디컬하다. 이 곡은 특히 앨범의 R&B/소울을 헌정하는 주제를 가장 크게 반영되었고, 대표하는 곡으로 볼 수 있다. 곡은 '벤 E. 킹'이 멤버로 활동한걸로 유명한 보컬 그룹 '드리프터즈'와 소울 뮤지션 '퍼시 슬레이지'의 영감을 받아서 작곡되었고, 가사는 한 연인이 도시의 나이트 클럽에서 즐기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가사에선 소울/R&B 뮤지션 '오티스 레딩'과 마빈 게이의 음악이 클럽의 쥬크박스에서 나오는 묘사도 담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앨범의 전체적인 주제와 헌정의 의미를 가장 크게 담았다. 이 곡은 1990년 초반에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었고, 곡의 가사처럼 한밤중 도시의 나이트 클럽의 장면들을 담았고, 특이하게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엘튼 존은 몇년간 에이즈 인권 운동사로 크게 활약하여 큰 획을 그은 소년 라이언 화이트와 보내는 시간에 집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블 사의 요청에 따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는 추측이 있다.[12]
이 곡은 1990년 5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여러 국가에서 20~30위 안에 진입되어 평타를 쳤습니다. 영국 싱글 차트 47위, 미국 빌보드 차트 28위, 호주 싱글 차트 19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치지 않았지만,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선 2위로 기록되었고, 앨범을 작업한 덴마크에선 싱글 차트 1위로 2주동안 기록되어 덴마크에서 가장 큰 히트를 친 엘튼 존 곡들 중 하나가 되었다. 라이브 공연에선 1989~1990년 Sleeping With The Past 투어에선 한번도 부르지 않았고,[13] 2000년 10월 18일, 10월 20~21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One Night Only 투어에서만 불렀었다.
6.5 Sleeping With The Past - 4:58
타이틀 트랙은 F로 구성된 리드미컬하고 경쾌한 선율로 진행되는 업템포 록 넘버. 곡에선 키보드와 일렉트릭 피아노, 브라스와 같이 동반하고, 브릿지에선 여성 백보컬까지 같이 참여해 꽉찬 구성을 보인다. 이 곡은 앨범을 작업하면서 가장 먼저 작곡된 곡들 중 하나이고, R&B/소울 뮤직의 헌정을 담은 앨범과 마찬가지로 타이틀 트랙은 이 곡은 1960년대 R&B 그룹 '스모키 로빈슨 앤 미러클스'의 영감을 받아서 작곡되었고, 가사는 말 그대로 과거에서 벗어나 더이상 과거처럼 살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엘튼 존은 30대 전부를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지내서 신체적으로 꽤 망가진 모습이었고, 1980년대 중~후반 성대결절, 타블로이드의 싸움, 이혼 등의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버니 토핀도 당시 엘튼 존과 같이 실패된 결혼 생활에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앨범에선 R&B/소울 뮤직뿐만이 아닌 상당히 자전적이고 본인들의 대한 통렬한 생각들을 담은 내용도 주를 이루고 있고, 앨범의 타이틀 트랙은 말그대로 자전적인 요소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라이브 공연에서 1989~1990년 Sleeping With The Past 투어에서만 불렀고, 그 후로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6.6 Stones Throw From Hurtin' - 4:55
그루브하고 훵키한 선율로 진행되는 곡. Bb으로 구성되었고, 리드미컬하고 고전 R&B 리듬을 크게 차용된 곡이라서 전체적인 코드 진행과 분위기를 보면 마치 1975년 Philadelphia Freedom을 연상케 한다. 곡에선 엘튼 존은 완전히 가성으로 뒤덮혀 있는 보컬로 불렀고, 마지막으로 엘튼 존이 완전히 가성으로 부른 곡이기도 하다. 1986년 성대결절, 1987년 1월 성대 수술 이후로 더이상 예전처럼 특유의 팔세토 창법을 사용할수 없고 보컬의 톤이 더욱 낮아졌기 때문에 1987년부터 바리톤으로 창법을 바꿔 부르기 시작해서 이전처럼 가성을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이 앨범과 특히 이 곡에선 197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맑고 높은 보컬로 불러 마지막으로 한번 작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곡은 마빈 게이의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의 영감을 얻어서 작곡되었다.[14]
가사는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을 담았고, 가끔씩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것을 내버려 둔다면 그들은 상황은 좋아질수 없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곡은 앨범 수록곡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발매된 1990년 11월 Blue Avenue 싱글 B면에 발매되었고, 라이브 공연에선 1989~1990년 Sleeping With The Past 투어와 1993년 2월 오세아니아 The One 투어 이후로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원곡이 꽤 높은 보컬로 녹음된 곡에다가 1989년 이후로 보컬이 더욱 중후해지기 시작한 엘튼 존은 당시 공연에서 원곡처럼 높은 보컬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엘튼 존은 1989년 8월 8일 앨범 인터뷰에서 엘튼 존 본인이 앨범에서 가장 애착하는 곡들 중 하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6.7 Sacrifice - 5:04
엘튼 존의 대표적인 1980년대 발라드들 중 하나이자 명곡 중 하나. 이 곡은 Db로 구성된 발라드이고, 곡에선 잔잔하게 동반하는 드럼과 키보드 선율로 더욱 수려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보이고 있다. 이 곡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Do Right Woman, Do Right Man'과 '퍼시 슬레이지'의 영감을 동시에 얻어서 작곡되었고, 가사는 남녀의 갈라져버린 사이에서 일어난 오해와 갈등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당시 버니 토핀과 엘튼 존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자전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엘튼 존은 이미 이혼한 상태였고, 버니 토핀도 위태했던 결혼 생활로 개인적인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R&B/소울 뮤직에 대한 헌정뿐만이 아닌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본인들의 자전적이고 통렬한 생각들을 담아서 쓴 내용도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곡은 버니 토핀의 생각에 크게 반영되어 자서전 식의 내용으로 썼다는 대표적인 곡으로 볼 수 있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당시 이 곡을 작곡하면서 그들의 첫번째 히트 곡 1970년 Your Song을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버니 토핀은 엘튼 존이 곡을 작곡할때 꽤 놀랐다고 한다. 1989년 8월 8일 Sleeping With The Past 앨범 인터뷰에서 이 곡을 엘튼 존과 작곡한 곡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들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버니 토핀은 "전형적인 사랑 노래는 아니지만, 오히려 망가진 결혼 생활과 남녀의 상처 입은 관계는 '희생이 없다'라는 것'이라고. 거기다 이 곡은 1980년대에 좀 처졌던 엘튼 존의 음악적인 역량을 전성기 시절로 부활시킨 대표적인 곡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 곡에서 엘튼 존 특유의 멜로디 라인이 전성기 시절의 곡들처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1989년 초~중순 LA에서 뮤직 비디오로 제작되었고, 곡의 피치가 약간 올라간 상태이고, 가사에서 크게 반영된 내용을 담았다. 뮤직비디오에선 한 남녀가 결혼을 하고 딸을 가진 이후에 서로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서로 갈라지게 되면서 남성이 홀로 딸을 지키고 있는 내용. 뮤직비디오는 엘튼 존의 뮤직비디오들은 맡던 감독 러셀 멀케이가 맡았다. 그리고 당시 제작된 두번째 뮤직 비디오는 영국의 감독 켄 러셀이 맡았지만, 엘튼 존 본인은 그 뮤직비디오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하기도 했다.[15] 이 곡은 앨범이 발매되고 2개월뒤인 1989년 10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차트 18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3위, 호주 싱글 차트 7위, 프랑스 싱글 차트 1위 등으로 여러 국가에서 1989년 후반~1990년 1월에 10위 안에 진입되어 크게 히트쳤고, 당시 8월에 싱글로 발매된 Healing Hands와 같이 앨범 최대 히트곡이 되었다.[16] 하지만 영국에선 55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치지 않아 묻혔지만, 1990년 3~4월쯤에 영국의 DJ 스티브 라이트(Steve Wright)가 BBC 라디오 1에서 방영을 하자 이후에 여러 DJ들이 이 곡을 방영하면서 곡의 인지도가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45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 치지 않은 Healing Hands과 더블 A면으로 1990년 5월에 싱글로 재발매되었고, 1990년 6월에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5주간 기록되어 크게 히트를 쳤고, 플래티넘을 얻었다.
영국에서 가장 큰 히트를 친 엘튼 존 곡들 중 하나가 되었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3년만에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된 경우이자 Don't Go Breaking My Heart는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곡이고, 본인 솔로로 발매된 곡이 아니기 때문에 Healing Hands/Sacrifice 싱글이 데뷔 20년 이후로 엘튼 존 솔로로 처음으로 영국 1위로 기록된 기념적인 곡이라고 볼 수 있다.[17] 라이브 공연에선 1989년 Sleeping With The Past 투어에서 부르기 시작했고, 그 후로 대부분의 투어에서 레파토리로 분류되어 자주 불렀다. 1989년에 처음 불렀을땐 당시 그랜드 피아노 대신에 사용되던 피아노 솔로로 불렀었고, 1992~1993년 The One 투어에서 키보드와 드럼과 같이 동반하여 부른걸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피아노 솔로로 불렀었다.[18]
6.8 I Never Knew Her Name - 3:32
꽤 리드미컬하고 강력한 선율로 진행되는 발라드. 곡은 상당히 복합적인 구성을 가졌는데 G코드로 진행되다가 코러스는 Bb로 변환되고, 브릿지는 Db, F로 진행되다가 코러스로 넘어가고, Bb로 막을 내린다. 이 곡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I Never Loved A Man'에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 가사는 사실상 'I Never Loved A Man'의 여성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고, 엘튼 존의 전 아내 레나타 블라우엘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는 추측도 있다. 라이브 공연에선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6.9 Amazes Me - 4:40
- Eb로 구성되었고, 차분하고 잔잔하게 진행되는 발라드. 곡에선 여성 백보컬과 같이 참여해서 전반적으로 가스펠과 소울의 분위기가 꽤 크게 보여 파워풀한 사운드를 가졌다. 이 곡은 레이 찰스에 대해 헌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버니 토핀은 평소에 레이 찰스를 상당히 존경해왔고 그의 음악에 상당히 공경했기 때문에 이러한 가사를 썼다고 1989년 8월 8일 Sleeping With The Past 인터뷰에서 설명했고,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라고 했다. 라이브 공연에서 1999년 2~10월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된 피아노 솔로 투어의 초기 공연에서만 불렀고, 그 후로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6.10 Blue Avenue - 4:21
Amazes Me처럼 Eb로 구성되었고, 잔잔하게 진행되는 발라드. 곡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고, 처음엔 기타와 키보드가 같이 동반하다가 간주부턴 드럼까지 합쳐져 수려하게 진행된다. 이 곡은 그나마 가장 덜 R&B/소울의 분위기를 가졌고 오히려 스텐더드 팝의 분위기를 크게 띈다고 볼 수 있고, 엘튼 존 본인도 가장 덜 R&B 스타일로 작곡된 곡이자 오히려 본인 스타일로 작곡된 곡이라고 설명했다. 이 곡은 '로이 오비슨'의 1963년 히트곡 'Blue Bayou'에 영감을 얻어서 작곡되었다. 가사는 비운으로 끝나게 된 남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았는데 이는 I Never Knew Her Name처럼 엘튼 존의 전 아내 르나타 블로엘의 실패된 결혼 생활에 대한 내용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 곡은 1990년 11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앨범 수록곡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싱글로 발매된 곡이자 1988년 11~12월 녹음 이후 2년만에 발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만 발매되었고, 네덜란드 싱글 차트 50위로 기록되어 히트 치지 않았다. 라이브 공연에선 1992~1993년 The One 투어에서만 불렀고, 1993년 2월 오세아니아 투어 이후로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7 1999년 리마스터링 CD 앨범의 보너스 트랙 (폴리그램 인터네셔널 레이블)
7.1 Daning In The End Zone - 3:55
D코드로 구성되었고, 비트넘치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업템포 록 넘버. 전형적인 엘튼 존 스타일의 1980년대 곡이고, 앨범의 주제와 별 관계가 없는 곡이라서 그저 싱글 B면에 수록될 전형적인 곡으로 볼 수 있다. 이 곡은 1989년 8월에 발매된 Healing Hands 싱글 B면에 수록되었고, 리마스터링 CD 앨범에서 Love Is A Cannibal와 같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7.2 Love Is A Cannibal - 3:55
비트넘치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업템포 록 넘버. 이 곡은 1989년 10월에 발매된 Sacrifice 싱글 B면에 수록되었고, 1998년 리마스터링 앨범에서 Daning In The End Zone와 같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그리고 1989년 고스트 버스터즈 2의 Ost 앨범에도 수록되었는데 정작 이 곡은 고스트 버스터즈 2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8 세션
보컬, 작곡, 키보드, 백보컬 - 엘튼 존
작사 - 버니 토핀
기타, 백보컬 - 데이비 존스톤
베이스 - 로메오 윌리엄스
드럼 - 조나단 모펫
기타, 키보드, 오르간 - 가이 바빌론, 프레드 만델
색소폰 - 빈스 덴햄
백보컬 - 말레너 지터, 나탈리 잭슨, 모톤에트 젠킨스
페어라이트 CMI, 오디오 파일 - 피터 이버슨
프로듀서 - 크리스 토머스
엔지니어 - 데이비드 니콜라스, 칼 레버, 마이크 니콜슨
마스터링- 그레그 펄지니티
녹음 - 덴마크 라네르스의 Puk 스튜디오. 1988년 11~12월
9 차트 성적 (1989~1990년)
호주 | 2위 |
오스트리아 | 5위 |
캐나다 | 23위 |
네덜란드 | 5위 |
프랑스 | 2위 |
독일 | 9위 |
헝가리 | 25위 |
이탈리아 | 6위 |
뉴질랜드 | 1위 |
노르웨이 | 7위 |
스페인 | 3위 |
스웨덴 | 23위 |
스위스 | 1위 |
영국 앨범 차트 | 1위 |
미국 빌보드 200 | 23위 |
9.1 연말 차트 (1989년)
캐나다 | 63위 |
프랑스 | 7위 |
이탈리아 | 11위 |
스위스 | 23위 |
9.2 연말 차트 (1990년)
호주 | 8위 |
네덜란드 | 82위 |
영국 | 9위 |
10 판매량
호주 (ARIA) | 플래티넘 4장 (280,000장) |
캐나다 (Music Canada) | 플래티넘 2장 (200,000장) |
프랑스 (SNEP) | 플래티넘 (300,000장) |
독일 (BVMI) | 골드 (250,000장) |
이탈리아 (FIMI) | 플래티넘 (400,000장) |
네덜란드 (NVPI) | 골드 (50,000장) |
스페인 (PROMUSICAE) | 플래티넘 (100,000장) |
영국 (BPI) | 플래티넘 3장 (900,000장) |
미국 (RIAA) | 플래티넘 (1,000,000장) |
11 싱글
Healing Hands [UK CD 싱글] / Sad Songs (Say So Much) [Live In Verona] | 1989년 8월 |
Healing Hands [UK 12인치/CD 싱글, US/UK 7인치 싱글] / Dancing In The End Zone | 1989년 8월 |
Sacrifice [UK 12인치/CD 싱글, US/UK 7인치 싱글] / Love Is A Cannibal | 1989년 10월 |
Sacrifice/Healing Hands | 1990년 5월 [UK 재발행] |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 Give Peace A Chance | 1990년 5월 |
Whispers / Unknown | 1990년 중~후반 |
Blue Avenue / Stones Throw From Hurtin' | 1990년 11월 |
11.1 싱글 성적
1989~1990년 | Healing Hands |
영국 | 45위 |
영국 | 1위 |
호주 | 14위 |
독일 | 39위 |
네덜란드 | 60위 |
스위스 | 13위 |
미국 빌보드 | 13위 |
빌보드 AC | 1위 |
빌보드 댄스 | 23위 |
1989~1990년 | Sacrifice |
영국 | 55위 |
영국 | 1위 |
호주 | 7위 |
벨기에 | 2위 |
캐나다 | 19위 |
독일 | 36위 |
아일랜드 | 2위 |
네덜란드 | 3위 |
뉴질랜드 | 19위 |
노르웨이 | 2위 |
스위스 | 23위 |
미국 빌보드 | 18위 |
빌보드 AC | 3위 |
1990년 |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
영국 | 47위 |
호주 | 19위 |
벨기에 | 24위 |
캐나다 | 12위 |
독일 | 45위 |
아일랜드 | 27위 |
네덜란드 | 28위 |
미국 빌보드 | 28위 |
빌보드 AC | 2위 |
덴마크 | 1위 |
1990년 | Whispers |
프랑스 | 11위 |
1990년 | Blue Avenue |
네덜란드 | 50위 |
- ↑ 결국 1987년 1월에 성대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후로 현재와 같은 창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성대수술로 인해서 잠시 노래를 부를수 없던 상황이었다.
- ↑ 마약의 영향으로 인해서 1990년까지 3번이나 머리가 하얗게 셌었다.
- ↑ 당시 상황들이 엘튼 존 본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악성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을 혐오하게 되었고, 엘튼 존의 성격도 이 시점부터 좀 더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 ↑ 프레드 만델도 이 앨범까지 맡았고, 이 앨범부터 참여한 키보드리스트 가이 바빌론은 이 앨범부터 2009년까지 엘튼 존과 함께 했다.
- ↑ R&B/소울 뮤직에 대한 헌정을 담는 아이디어는 1950~60년대 R&B, 로큰롤, 두왑의 헌정을 담은 빌리 조엘의 1983년 9집 An Innocent Man의 아이디어를 빌린것이라고 1989년 8월 인터뷰에서 설명했었다.
- ↑ 물론 이 앨범 이후로 다시 바리톤 창법으로 더욱 깊게 부르기 시작했고, 본인의 보컬과 맞는 키들로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 이후에도 레이블 사와 여러 크고작은 마찰들이 있었고, 특히 2006년 29집이자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후속 앨범 The Captain & The Kid의 작품성이 아닌 오로지 상업적으로만 생각했고, 상당히 탐탁치 않게 여긴데다 홍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 등, 여러모로 거장 뮤지션한테 예의가 보이지 않은 'Interscope' 레이블 사의 만행으로 인해서 엘튼 존이 매우 분노해 'Interscope' 레이블과 계약을 해지하게 되었고, 2010년 30집이자 리온 러셀과 작업한 합동 앨범 The Union이 발매되기전까진 앨범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선 23위로 기록되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처진 성적을 거두었다.
- ↑ 1985년 19집 Ice On Fire도 어느정도 좋아한다고.
- ↑ 앨런 투세인트 작곡
- ↑ 1982년 16집 Jump Up!의 9번 트랙 Where Have All The Good Times Gone?은 1950~60년대 R&B, 소울에 대한 헌정을 담았고, 포 탑스에 대한 언급도 담았다.
- ↑ 뮤직비디오에선 엘튼 존도 애니메이션화로 그려져 나왔고, 당시 폭식증과 약물 중독으로 인한 망가진 모습의 엘튼 존을 상당히 훤칠한 남성으로 그렸다(...)
- ↑ 1990년 TV 쇼에서 두 세번정도 립싱크로 부름.
- ↑ 이 곡은 원래 '스모키 로빈슨 앤 미러클스'가 원곡이고, 엘튼 존도 1977~1979년 투어에서 자주 불렀던 곡이라 마빈 게이 버전이 아닌 스모키 로빈슨 앤 미러클스 버전으로 많이 불렀다.
- ↑ 두번째 뮤직비디오는 한번도 공개되지 않다가 2000년대 후반 BBC 뉴스에서 인터뷰 중에 살짝 공개 되었는데 흑백 영화 분위기로 제작되었고, 엘튼 존은 검은 카우보이 복장에 전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 ↑ 당시 프랑스에선 1위를 26주 동안 기록.
- ↑ 당시 이 싱글로 얻은 모든 금액은 당시 에이즈 재단과 여러 단체에서 기부를 했었다고 한다.
- ↑ 2000년 10월 20~21일 One Night Only에선 밴드와 같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