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정의
고대 로마 제국에서 유행했던 검투대결에 출전하는 선수. 현대로 치면 프로레슬러나 격투기 선수로 비유할 수 있다. 검투수도 이 것이 모티브.
경기장에서 칼이나 그물, 삼지창 등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종의 격투가로 야생 동물(주로 사자), 다른 검투사, 범죄자 등과 싸웠다. 흔히 원형경기장(=콜로세움)에서 싸우는 모습이 유명하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로 유명하지만, 모든 경기가 패자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변의 자유가 적었다는 점에서 검투사보단 검노라는 번역이 더 맞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래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듯 노예 아닌 검투사들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어폐가 있다. 특히나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고 살생을 피하는 하나의 스포츠로 발전한 이후에는, 유명 검투사들은 최상급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2 유래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BC 1세기에 그리스 역사가 니콜라우스는 본래 에트루리아의 제사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썼다. 한 세대쯤 후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BC 310년에 캄파니아가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기록에서 에트루리아 설과 캄파니아 설이 계속 번갈아 나오는데, 현재는 로마식 검투경기 자체는 캄파니아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검투사가 되는 자격조건은 따로 없었다. 초창기에는 전쟁포로나 노예를 검투사로 훈련시켜 죽고 죽이게 했지만 나중에는 일반 시민들도 검투사로 자원하여 프로모터와 계약을 맺고 직업으로 삼거나 심지어 귀족 자제들도 검투사를 업으로 삼는 등 흐름이 많이 바뀐다. 실력좋은 검투사는 요즘의 연예인내지 스포츠스타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케인 벨라스케지우스 vs 도스 산토리우스 물론 아무나 받지 않았으며, 이들은 지원할 때 몽둥이로 맞고 쇠사슬로 묶고 불로 지지고 칼로 죽여도 좋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 반란 등이 일어나기도 한것을 보면 노예 출신인 제정 이전의 검투사들의 삶은 자유민 출신의 후대의 검투사에 비한다면 비참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은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격파하고, 잡아온 로마 군단병 포로들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검투 경기를 시켜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건 복수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이기도 했는데, 원로원은 이 부분에서도 분노했다. 이런 추모경기 등등은 높으신 분들만 주최할 수 있는 거라서(...)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검투경기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이후 기독교가 로마에서 득세하면서 검투경기는 부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열성 관중의 맥은 쉽게 끊이지 않았으므로, 서기 4세기와 5세기의 황제들은 거듭해서 금지령을 발포했고 결국 6세기에야 전 제국에서 완전히 맥이 끊긴다. 애당초 검투경기에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들었기에 재정이 악화된 로마제국 말기에는 더이상 검투경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투사들의 검투 경기는 기사들의 토너먼트 경기로 대체되었다.
3 검투사의 특징
세간의 사람들이 흔히 '검투사' 하면 떠올리는 대로, 검투사는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를 벌이는 잔혹한 직업이었다. 다만 모든 경기에서 패자를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로 양성할 전쟁 포로들이 넘쳐났던 공화정 초기의 검투 경기에서는 무자비하게 패자를 죽이는 경향이 높았다. 어차피 검투사 양성소에 공급되는 노예는 차고 넘쳐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제정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으로 '패자를 무조건 죽이는 검투 경기를 금한다' 라고 명했지만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공화정 초기에 높았던 검투사의 사망률은 검투 경기가 절정에 달한 제정 중기까지 서서히 감소해갔으며, 제정 말기에 다시 치솟았다. 점점 관중들과 황제가 사망자 없는 시시한 경기에 질렸기 때문이다.
검투사들의 사망률이 높았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한다. 대략 한번의 검투 경기를 치를 때마다 최소 20명의 검투사가 죽어나갔다. 투입되는 검투사의 숫자가 평균적으로 많아봐야 백명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원 사망(50명)까진 미치지 못해도 상당히 높은 숫자다. 게다가 신참 검투사는 보통 1년 내로 사망하기 마련이고, 운이 좋아 1년을 넘기더라도 3년 안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앞서 언급한 검투사 20명의 비문을 해석해보면 8명이 아예 처음 싸워본 신참 검투사였고, 베테랑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검투 경기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실력이 좋은 베테랑 검투사가 신참을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는 것을 싫어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종이 한장 차이 승부를 좋아했다. 그래서 검투사는 무조건 비슷한 실력대의 검투사와 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1] 베테랑 검투사끼리의 전투는 서로 몸값이 높고 양성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일단 승패가 결정되면 쉽게 죽이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베테랑 검투사들은 경험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 같은 양성소의 동료끼리 싸울 경우, 한솥밥을 먹은 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죽이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경험이 얼마 없는 신참에게 그런 노련함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 신참 검투사들의 경기는 한 쪽의 사망으로 끝나곤 했다. 물론 베테랑들에게도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승리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에 경기 도중 상대가 사망하는 일이 제법 발생하곤 했다.
검투 경기의 패자를 처분하는 것은 보통 관중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관중이 보기에 경기 내용이 지루했다면 패자는 거의 무조건 죽었다. 반대로 지더라도 경기가 흥미진진했다면 관중은 검투사를 살리려고 했다. 이런 경우 검투사는 졌지만 살아서 콜로세움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관중이 패자의 목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 결정권은 황제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경우 관중들이 살리고 싶어하는 검투사를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역시 성격이 꼬였다 또 관중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는 경우 보통 주최자나 심판이 패자의 목숨을 결정했다.
검투사들에게 있어 어떤 황제를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베테랑 검투사라 해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목이 날아가는 일이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가령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검투 경기에서 승리한 검투사들을 다른 양성소에 팔아버렸다. 이게 왜 문제냐면, 승리한 검투사들은 시설이 좋고 비교적 대우를 받는 황제 직속 양성소에서 열악한 사설 양성소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특이하게도 죽는 순간의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패배한 검투사의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잔혹 학자. 그냥 사형장 참관하면 되는 거 아닌가 콤모두스 황제는 같은 양성소의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기를 머뭇거리며 소극적으로 싸우자 격노해 모든 검투사를 한꺼번에 투입시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명령했다.나는 잘 싸우는데 니들은 왜 그렇게 못하냐 이건가
하지만 모든 황제가 다 검투사들에게 잔인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례적인 케이스도 있었는데, 티투스 황제의 경우 프리스쿠스와 베루스라는 두 명의 검투사가 치열하게 싸운 끝에 서로 동시에 항복하자, 종려나무 관과 목검을 하사해 두 명의 검투사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었다. 쌍방 승자 판정을 내린 것이다.난 살고 싶어! 너와 함께!
로마 제국이 서서히 몰락해가던 4세기 즈음에는 검투사로 공급할 노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검투 경기에서 이기는 조건이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4 검투사의 실력
검투사는 온 로마에서 최고로 검술 실력과 싸움 기술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검술 훈련 말고도 진지 구축이나 숙영에 관련된 잡다한 기술을 배워야하는 군단병과 달리 검투사들은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검술 실력은 당연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검투사들은 목검으로 나무를 타격하는 기초적인 훈련에서부터 달리기, 통나무 들어올리기, 푸쉬업 등의 살인적인 훈련량을 하루도 빠짐없이 소화했다. 하루라도 쉬면 나태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훈련을 소화하는 것은 신참 검투사부터 나이 든 베테랑 검투사까지 예외가 없었다.
검투사도 군인과 마찬가지로 찌르기 검술을 구사했다. 로마군이 주류로 삼은 글라디우스 자체가 단도의 형태이며,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효과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투사들은 베는 검술 역시 높은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거기에 방패를 들고 싸우는 소드 & 버클러 타입의[2] 검술이 스탠다드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병종에 따라서 삼지창이나 그물 등의 다른 무기를 들고 싸우는 법을 배웠다.
검투사들의 실력과 충성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황제들은 은퇴한 검투사를 근위대에 뽑거나 내전에 검투사 부대를 투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검투사들의 전투는 무조건 실전이었다. 서로 봐주거나 짜고 치는 경기는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검투 경기는 조 추첨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관중들이나 검투사들이나 자신이 정확히 누구와 싸우게 될지는 경기 날짜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가령 자신이 레티아리일 경우 주로 세쿠토르나 무르밀로와 싸우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투사들은 평소 양성소에서 훈련하면서도 훗날 자신과 싸우게 될 검투사 그룹의 기술이나 실력을 눈여겨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러 검투사 양성소가 참여할 정도로 큰 경기의 경우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끼리 싸우기 때문에 검투사들을 곤란하게 했다. 같은 병종이라 해도 상대방의 스타일에 따라 싸우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방과 싸울 경우 실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상대방이 어떤 유형의 전술을 구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큰 경기에 투입되는 검투사들은 서서히 탐색전을 하며 경기의 흐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5 병종 구분
5.1 동물과 싸우는 사람
"베스티아리"라고 불렀는데, 사실 엄밀히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는 존재만을 그렇게 불렀으므로 베스티아리는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들은 대개 수입해온 흔치 않은 동물들과 싸웠다. 모두 위험한 맹수들이기에 이들은 활과 창, 횃불, 갑주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스코틀랜드산 사냥개들을 대동한 채 맹수들과 대결했다.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하지만 동물이 이길 확률도 약간 있었다.
맹수를 따돌리기 위한 통로나 엄폐물 등의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보다 정면으로 맹수에게 대항할수록 더 많은 환호를 받았으며 때로는 오늘날의 투우처럼 짐승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리는 등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선수도 있었다. 심지어 곰 이나 사자 를 맨손으로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합의 결과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없는 거 보니 졌나보다.[3]
상금과 명예를 위해 싸우는 베스티아리는 용기의 증명이라고 하여 젊고 용맹한 사내에게 권장하기도 했으며, 네로나 콤모두스는 직접 베스티아리로 나서서 맹수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런 상금 경기를 하는 베스티아리를 위한 훈련 교실도 존재했다.
- 로마 황제인 콤모두스도 이걸 자주 했으며, 기린,얼룩말같은 강력한 동물들도 잘 조지고, 코끼리도 3마리나 잡았다고 하며,[4] 대략 시속 70km 정도로 전력질주하는 타조를 활로 쏴 맞추기도 하는 등 싸움이나 사냥 실력은 매우 좋았다.
- 또 다른 베스티아리의 타입으로, 종종 중범죄자를 맹수와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사실상 처형이기 때문에 맹수를 죽이더라도 끝나지 않고 범죄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 투입시켰다.
보스러시시누가요이이것은 다른 검투사 경기에 비해 별로 흔한 경우는 아니다. 죄수로서 맹수와 싸우는 자들은 훨씬 빈약한 무장을 했고 심지어는 맨몸에 가까운 상태로 경기장에 내쳐졌다. 한 명의 죄수를 처형하는데 두 마리 이상의 맹수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한 숫사자는 이런 식으로 200명 이상의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게 매우 야만적인데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잔혹하게 처형당하였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ㅡ나서 이 형벌을 폐지해달라고 콘스탄티누스에게 청원. 하여 폐지되고 만다.
- 베나토레스(Venatores)는 사냥꾼으로 역시 야수와 싸웠으나, 정면의 싸움이 아니라 사냥을 보여주는 타입이다. 또한 야수를 길들여서 여러가지 트릭을 보여주곤 했는데, 사자 아가리에 팔을 집어넣는다든지 코끼리를 로프 위에서 걷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경기의 흥을 돋구었다. 오늘날 동물조련을 통한 서커스에 가까운 식. 이들 역시 사람과 싸우지 않으므로 글래디에이터로 취급하지 않는다.
5.2 사람과 싸우는 검투사
이들은 무장과 전투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무장과 전투법으로 다른 부류의 검투사들과 싸웠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와 비슷하다. 원래 검투사 경기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원혼을 기린다는 희생제의 개념에서 전쟁 포로들을 잡아와서 시작한 것이고, 또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터의 모습을 재현해보인다는 목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검투사 타입들은 승패의 흥미로움을 더해주기 위해 다양하게 늘어가는데, 병종 간에 일방적인 승패가 가려지지 않도록 밸런스 패치가 가해졌다. 더 유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를 줄이는 식으로 페널티를 주고, 불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나 무장을 더 늘리고 숫자를 늘리는 식. 보통 얼굴과 팔다리는 철저히 보호했는데, 치명상으로 인해 경기가 일방적으로 흘러가 지루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흉부-복부의 방어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결정타를 먹일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비키니 아머?! 불리한 병종이라면 흉부-복부의 방어까지 철저했지만 유리한 병종이라면 갑옷 그런 거 없다.
- 레티아리(넷 파이터) : 어부 검투사, 검투사 병종 중에서 가장 승률이 높았고 어부를 흉내내어 그물과 삼지창, 단검을 사용하였다. 상대를 그물로 얽어서 꼼짝못하게 하고 삼지창으로 찔러죽이는 것은 필승 패턴. 워낙 승률이 높은 강한 병종이다보니, 왼팔을 덮는 팔의 갑옷(마니카)나 목과 아랫쪽 얼굴을 덮는 고정식 어깨 방패(갈레루스), 허리띠 외에는 방어구가 없이(겉옷을 입는 경우는 게이 또는 여장남자 컨셉이 붙게 된다.) 알몸으로 싸웠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머리 방어구인 투구조차 없었다. 그래도 상당히 승률이 높고 강한 병종이었다.
- 녹시 : 죄인 검투사. 녹시 경기는 보통 한쪽은 무기 하나를 가지지만 눈을 가리고, 다른 쪽은 맨손이지만 눈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종종 둘 다 눈을 가리고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각각에게 심판 한명씩이 붙어서 자기편 녹시에게 상대의 위치를 가르쳐줬다. 이때 군중들은 소리를 질러서 가르쳐주거나 거짓으로 가르쳐주면서 재미를 보았다. 죄인에 대한 처형으로 무기를 든 죄인과 맨손의 죄인이 대결하는 경기도 있었다. 대개 무기를 가진 자가 승리하지만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자가 무기를 반납하고 이번에는 자신이 맨손이 되어 새로운 도전자와 싸워야 했다.
- 안다베타에 : 말 등에 올라타서 싸운다. 카타프락토이와 비슷한 수준의 중무장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투구에 눈구멍을 뚫어놓지 않았다는 것. 중세 기사들의 주스트와 비슷하게 싸우지만 상대를 볼 수 없다.
- 에퀴테스 : 로마 기병 스타일로 시작했지만 이후 보다 검투사 스타일(한쪽에만 갑옷류를 걸치고 반대쪽은 벗는다.)로 바뀐다. 일단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싸우다가 이후 창을 버리고 말에서 내려 검으로 싸우며, 다른 종류의 검투사와는 잘 싸우지 않았다.
- 에세다리 : 전차를 타고 싸우는 검투사. 이는 카이사르가 영국 원정을 다녀오면서 켈트인들과의 전투경험을 토대로 하여 생겨났다. 대규모 전투를 흉내내는 형태의 검투시합에서 등장했다고 한다.
- 갈리 : 갈리아에서 유래한 스타일로 '갈리아인'이란 뜻. 창, 투구, 그리고 작은 갈리아 방패를 든다. 갈리아가 로마 의 적일 때 유행이었다가 갈리아가 로마 영토가 된 후 사라진다.
- 호플로마키 : 호플로마키는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에서 온 이름으로 트라키아 기원의 트라키안, 삼니움족 기원의 삼니테스와 투구의 장식과 병기의 차이로서 구분된다. 호플로마키는 흔히 그리스 투구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초승달 모양의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글라디우스나 창을 잡고 구리로 된 라운드 실드를 들었으며 트라키안은 그리핀 형상이나 높은 깃털 장식의 투구에 원형 혹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작은 방패인 파뮬라에 시카라고 불리는 곡선 날을 가진 숏소드를 들었으며 삼니테스는 깃털 장식의 면갑을 쓰고 타원형 방패인 스쿠툼에 숏소드를 들었다.
- 라퀴에아리 : 레티아리와 비슷한데, 그물 대신 올가미를 사용하고 단검이나 삼지창을 든다.
- 미르밀로니스 (또는 무르밀로) : 물고기 모양의 투구를 쓰고 물고기 모양의 가슴갑옷을 걸친다. 글라디우스와 로마 군단병 스타일의 긴 방패가 무장. 컨셉이 물고기이기 때문에 어부 컨셉인 레티아리와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 파에그니아리 : 채찍, 곤봉을 갖고 있으며 왼팔에 방패를 묶어두었다.
- 프라에그나리 : 오프닝 담당. 나무 칼(검투사 자유의 상징)로 싸우는 동안 주변에서 각종 악기로 음악을 연주한다.
- 프로보케이토레스 : 군단병의 무장을 적당히 생략한 형태로 서로 싸우게 된다. 정강이받이는 왼쪽만, 팔목가리개는 오른쪽만, 장식을 대폭 생략한 투구에 흉갑을 입고 방패와 검으로 싸운다.
- 디마카에리 : 그리스어 기원으로, 단검이나 곡도 두자루를 든 검투사. 갈리아식 투구와 정강이 받이를 착용했다.
- 사지타리 : 궁수. 당연히 투기장에서 인간 상대로 싸우는 건 아니고 동물들 상대로 베스티아리들이 판 벌여놓은 상태를 정리할 때 썼다고(쿠오바디스 참조.) 한다. 활은 파르티아-페르시아 식의 곡궁.
- 시소레스 : 가위처럼 생긴 두날단검(약간 벌린 가위처럼 칼날이 두개 있다. 단검 스타일의 바라기?)으로 싸우는 검투사. 상대 무기를 빼앗는 식으로 싸웠다고 한다.
- 세큐토레스 : 레티아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수 있도록 변형된 미르밀로니스로 미르밀로니스와 비슷한 수준의 중무장인데 목적에 맞게 투구는 그물에 잡히지 않도록 매끈매끈하고 삼지창에 찔리지 않도록 눈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덮는 형태이며 그 눈구멍도 극히 작다. 다만 레티아리가 원체 세므로, 다리 위의 레티아리 한명을 양쪽에서 세큐토레스가 잡으러 가는 형태의 매치도 있었다고 한다.
- 트라에키스 : '트라키아인'. 호플로마키 수준의 무장을 갖춘다. 머리 전체를 가리는 투구와 흉갑을 입고 있으며, 무장은 트라키아 특산의 구부러진 검. 갈리가 정치적인 이유(갈리아도 이제 우리편!)로 사라진 자리를 채웠다.
5.3 여성 검투사
Gladiatrix[5]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는 문헌 기록을 남기는 로마 식자층이 남자들의 미덕(전투 기술과 체력)을 겨루는 검투 경기에 여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남성의 미덕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의 다음 시를 보면 당시 식자층 남성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여성 검투사들은 모든 훈련을 경험했고, 플로라 축제에서 트럼펫을 불 가치가 있지만 더 큰 꿈을 가지지 않고, 아레나에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않는다면 정숙한 부인들이다. 당신은 투구를 쓴 여성에게서, 자신의 성을 버리는 여성에게서, 힘으로 쌓은 업적에 기뻐하는 여성에게서 얼마나 겸손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략) 그녀가 교관이 그녀에게 보여준 대로 타격을 반복, 연습할 때 얼마나 씩씩거리는지, 그녀가 투구와 무릎을 감싼 두꺼운 나무 보호대의 무게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보라. 그녀가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서 오줌을 눌 때 웃기지 않은가?”
이외에도 철학자 세네카,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 등을 비롯해 많은 로마 시대 지식인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비난하는 기록들을 남긴 것을 찾아볼 수 있고, 후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는 이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여성 검투사들의 존재 여부와 생활 양식에 대한 정보들은 문헌 기록이 없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템즈 강 유역의 할라카르나소스(고대에는 비슷한 이름의 도시가 많았다)에서 발견된 두 여성 검투사의 시체와 함께 매장된 장비, 그리고 두 사람을 묘사한 부조 및 기록은 생활상을 추측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두 여성 검투사는 아마존과 아킬레이아라는 간지나는 이름이었으며, '상위 랭크'의 검투사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여성 검투사에게도 등급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또 이 부조는 이들의 '신화적인 경기'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승부의 경우 무승부로 끝났고, 둘 다 살아서 경기가 끝났다고 한다. 검투사 만화 백합판
또한 '콜레기아 이우베눔', '루두스 마그누스' 등의 당시 검투사 양성소에서 여성들의 훈련 공간이 발견되는 등, 분명히 여성 검투사들을 전문으로 양성하는 곳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구역의 비중 차이를 볼 때 흔하지는 않고 대단히 드물게만 열렸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로마 제국이 굉장히 넓었으니만큼 지역별로 또 격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함부르크에서 발견된 여성 검투사상은 아예 상의 탈의상태로 나오는데, 이런 자료는 또 여성 검투사들이 성적 대상으로서 취급받았을 거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젖가슴을 드러낸 모습은 여자 노예들에게도 흔했기에 하급 여자 검투사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역시 아직까지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당시 여자 검투사들의 위상이나 경기 방식을 완전히 추측하기는 힘들다.
6 기타 이야기거리
- 로마 최초의 검투경기는 기원전 264년이었다. 집정관이 주최한 최초의 공식 경기는 기원전 105년이었다.
- 검투가 벌어지는 콜로세움의 수용인원은 5만명, 전차경기를 하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은 26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 서기 80년에 완공된 콜로세움 개장을 축하하는 경기에서 하루에 5,000마리의 동물이 죽었다. 개장 후 100일간 죽은 동물의 총수는 90,000마리에 달한다.
- 콜로세움의 지하에는 동물우리와 검투사대기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 콜로세움에는 1.5m까지 물을 채울 수는 있지만, 새어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최소한 두 번의 모의해전이 벌어졌다. 콜로세움 이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나우마키아"라는 저수지가 해전장으로 쓰였는데 이 저수지의 넓이는 20만 제곱미터였다. 한번의 행사에 19,000명의 검투사들이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 그리스도교 탄압 당시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교도를 콜로세움 한 가운데에 묶어놓고 사자를 풀어놓아 뜯어먹히게 만들었다는 학살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6] 사실 중세 시대에 콜로세움의 공간을 이용해서 민가로 불하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프란지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사들여서 요새화해서 성채로 삼기도 했다. 바위를 빼다가 건축자재로 써버리는 일도 잦았다. 순교자가 생긴 장소에 대해 보여주는 기독교적 숭배와는 영 딴판인 취급이었던 것이다. 사실 콜로세움이 종교적 성소로 여겨지게 된 것은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가 난 성소[7]라고 선포하면서였다. 하지만 베네딕토 14세의 주장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으며, 16세기 이전에 기독교가 그와 같은 입장을 보인 적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흔히 생각하는 거와 다르게 네로 황제 때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원래 네로 얼굴로 된 거대한 거상이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그 거상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경기장을 지어서 콜로세움[8]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 다만 그리스도교 탄압과는 별개로 그리스도교쪽에서 검투를 엄청나게 혐오한건 사실이다. 콜로세움 쪽에서 검투 경기를 반대하다가 분노한 관중들에게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검투 경기에 대한 혐오가 늘어나는 순환그리고 마침내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검투 경기가 금지되면서 이 노력은 결실을 이룬다. 비록 검투 경기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스포츠적 요소가 강하기는 했으나, 사람의 목숨이 오락거리로 쓰이는 건 고대인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윤리적으로 논란거리였기 때문이다.
- 사냥꾼이 사로잡아 로마로 보내는 코끼리는 10마리 중 9마리 꼴로 가는 도중에 죽었다. 마지막 1마리도 투기장에서 죽는다.
- 이미 로마시대 투기장의 수요로 인해 누비아(수단)의 하마, 메소포타미아(이라크)의 사자, 북아프리카의 코끼리가 멸종되었다. 북아프리카 코끼리는 현재의 아프리카 코끼리와는 교배가 불가능한 별개의 아종으로, 사하라 사막으로 인해 남쪽의 동족들과 생태학적으로 분리되어 왜소화가 진행된 종. 어깨 높이 2미터 가량의 작은 코끼리였다.
- 싸움 이외에 투기장에서 벌어진 진기한 흥행으로는 표범이 마구를 달고 전차를 끈다든가, 훈련된 코끼리가 황제의 관람석 앞에 무릎을 꿇고 코로 라틴어를 쓴다든가, 곰과 들소가 싸운다든가, 황소와 코뿔소가 싸운다든가 하는 것들이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 희귀했던 흑인끼리의 싸움, 난쟁이와 여자의 대결 등도 있었다.
- 투기장의 관중석에서는 오늘날 야구장에서처럼 잡상인이 차가운 음료수, 빵, 소시지 따위를 팔며 돌아다녔다. 콜로세움 개장식 같은 축하 행사 때는 황제가 관중에게 음식과 음료를 한턱 쐈다고 한다.
- 엄지를 밑으로 향하는 것이 패자의 숨통을 끊으라는 표시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희박하다.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1693년판 번역본)"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 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라고 쓰고 있다.
- 전차경기는 어린애들 사이에도 인기여서 양이나 염소, 개가 끄는 이륜차를 타고 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 전차가 트랙을 도는 회수는 가로대 위에 매달려 입에서 물을 뿜는 돌고래를 뒤집고, 가로대 위의 공을 밑으로 내리는 것으로 표시했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히는 로마 시내에 있던 대전차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행해진 것이 콜로세움에서도 행해진 것처럼 와전된 것이다.
- 검투사의 주식은 보리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밀은 사람들이 먹는 곡식이었고 보리는 가축의 사료였기는 하지만 딱히 검투사를 가축으로 취급해서가 아니라 근육을 강화하는데 보리가 밀보다 더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패배자가 살아서 '스폴리아리움(시체실)'로 실려오면 관리인들이 숨통을 끊었다. 간혹 경기장에서 목숨을 부지한 패배자는 다음 경기에 다시 나갔다.
- 검투사가 자유를 얻으려면 용맹을 떨쳐 루디스라는 나무 칼을 받아야 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프락시모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받은 그 칼.
검투사 만화에서 가이우스랑 크레스켄스가 받은거기도 하다
- 루디스를 받아서 자유인이 된 검투사도 계속 검투사를 업으로 삼아 남아있을 수 있는데, 이를 루디아리라고 불렸다. 하지만 루디아리가 항상 싸움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며, 검투사의 교관이나 심판, 기타 검투 관련 업무에 취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루디아리는 루디스를 받을 정도로 용맹할 뿐더러 경험이 많아서 훌륭한 쇼 엔터테이너, 진행자로 여겨졌고 인기가 많았다.
- 여자가 검투사가 되는 것은 서기 20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 서기 326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죄인을 투기장에 내보내는 형이 금지되었다.
- 서기 404년에는 최소한 제국의 서쪽 절반에서는 검투사의 경기가 완전히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검투 경기를 즐기는 관중들은 그 후에도 남아있었으며, 최후의 검투경기가 벌어진 것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한참 뒷날인 서기 536년(또는 576년)이다.
- 동물끼리 싸우게 하는 경기도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소년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호랑이 VS 사자의 경기도 있었는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거의 무조건 호랑이가 이겼다고 한다. 이는 통상적으로 호랑의 크기가 더 큰 경우가 많았고, 앞쪽 한발은 땅에 붙이고 남은 한발만 휘두르는 경우가 많은 사자와 뒷발로 버티고 서서 두 앞발을 모두 휘두르는 호랑이의 전투 방법의 차이라고 한다. 결국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어린 암컷 호랑이와 장성한 숫사자가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경기 중 상처로 인해 피를 흘리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검투사들의 체형은 근육질 보다는 살집있는 뚱뚱한 체형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는 회칼에 찔릴 일이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살집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검투사들을 묘사한 벽화들을 보면 현대의 종합격투가들처럼 근육질의 식스팩 복근을 가진 몸짱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7 대중 문화 속의 검투사
꼭 주인공이 검투사일 필요는 없다. 투기장이 주요 장면으로 묘사되는 작품이면 족하다. 단 후자의 경우 어떤 맥락에서 투기장이 묘사되는지 기술할 것.
7.1 영화
- 글래디에이터
- 데미트리우스와 검투사
- 영화 성의의 시퀄, 칼리굴라 시대, 기독교 신자인 코린트의 데미트리우스(전작 성의의 남주인공에게 기독교를 전도한 노예)는 예수가 남긴 의복을 지키려다가 근위대와 싸우고, 그 벌로 검투사가 된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교리 때문에 검투시합에서 이기고도 상대를 죽이려 하지 않자 칼리굴라가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이 자에게 매력을 느낀 메살리나가 아깝게 그냥 죽이지 말고 호랑이 4마리와 싸우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살아날 기회를 얻는다.
7.2 드라마
7.3 만화
- 웅심 ~비르투스~ - 이 만화 이후로 넷상 검투사의 의미가 살짝 달라졌다.(...)
7.4 소설
7.5 게임
8 관련 항목
- morituri te salutamus - 로마시대 검투사들이 황제앞을 행진하면서 외치던 인사
- 콜로세움
- 네로
- ↑ 단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신참이라 해도 검투사로서의 재능이 뛰어나 상대할 적수가 없는 검투사는 베테랑 검투사와 붙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신참 검투사가 베테랑 검투사를 상대로 승리하는 일도 벌어졌다.
- ↑ 엄밀히 말하면 소드 & 버클러는 아니고, 그와 비슷한 느낌의 검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고대 로마의 검술이 전부 실전되어 정확히 어떤 타입의 검술을 구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 ↑ 도적수괴 나 기타중죄인 을 이런식으로 처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거대한 코끼리가 아니고, 북아프리카산 난쟁이 코끼리라고 어깨 높이 2미터쯤의 작은 종이다. 현재는 멸종. 물론 큰 코끼리와 비교해야 작고 약하지 사람보다는 훨씬 더 강하다.
- ↑ 복수형은 gladiatrices
- ↑ 이런 식의 처형법은 영화 쿼바디스에서 잘 묘사되었다.
- ↑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
- ↑ 거상은 라틴어로 콜로수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