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 프랑스

(비시 정부에서 넘어옴)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18세기19세기20세기~
고대 ~ 중세앙시앵 레짐프랑스 근대 정부 체제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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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프랑크 왕국서프랑크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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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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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트 왕국메로빙거 왕조카롤링거 왕조카페 왕조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비시
서고트 왕국독일령
아르모리카브르타뉴아키텐 왕국노르망디 공국1차 프랑스 식민제국2차 프랑스 식민제국
프랑스국
l'État français
나치 독일괴뢰국
대통령기[1]국장
[2]
1940년 ~ 1944년
표어Travail, famille, patrie
(노동, 가족, 조국)
국가원수여,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3]
위치프랑스 남부
수도법적수도 파리
임시수도 비시
정치체제의회제
국가원수대통령
언어프랑스어
주요사건1940년 건국
1942년 횃불 작전
1944년 멸망
통화프랑
성립 이전프랑스 제3공화국
멸망 이후나치 독일 점령기 프랑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0 ~ 1944년 사이 남프랑스에 존속한 나치 독일의 사실상의 괴뢰정부. 하지만 사실상 괴뢰 같았다고 하더라도 비시 정부는 독일군이 강압으로 설치한게 아니라 페탱이 의회의 동의를 얻어 권좌에 올라 탄생한 직계 정통 정부이다. 국호는 전과 다름없이 프랑스였지만 해외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와 구분하기 위해 비시 프랑스라 부른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비시 정부(Régime de Vichy)라 통용.

어원인 '비시'는 임시 수도를 오베르뉴에 소재한 비시(Vichy)라는 도시에 두고 있어서 그렇다. 법적 수도는 여전히 파리였다. 국가 수반은 제1차 세계대전전쟁 영웅이었던 앙리 필리프 페탱이다. 유럽 최후의 파시스트의 스승이다.

비시 프랑스의 깃발로 알려지는 파시스트 돋는 쌍날도끼가 그려진 깃발은 대통령기이고, 공식적으로 비시 프랑스는 이전에 쓰이던 삼색기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참고로 저 쌍날도끼의 자루 부분은 나폴레옹시대 당시 프랑스 제국군의 원수 지휘봉이다.

2 역사

본래의 프랑스 제3공화정은 나치의 침공으로 패퇴를 거듭하다 1940년 6월 13일파리마저 함락되어 6월 21일 정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 결과 3/5에 해당하는 북프랑스가 통째로 나치 통치에 넘어가고 나머지 2/5의 남프랑스가 자치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프랑스에 세워진 친독정권인 비시 프랑스다.

표면적으로 이 신정권은 노동, 가족, 조국을 기치로 내세우며 은행가와 대지주 등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얻고 독일과의 공조 하에 나름대로 대전기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등, 패전국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주권이 독일에 종속되어 제 입김을 내지 못하고 내적으로도 의회기능이 멈춰버리는 등, 국가로서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국가 수반인 페탱은 본래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망 높은 영웅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뛰어난 활약상에 힘입어 원수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4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격렬한 항전주의자였던 부하 샤를 드 골 등에 반해, 페탱은 나치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주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폴 레노(Paul Reynaud)가 페탱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1940년 7월 10일 페탱이 입법과 행정 전권을 쥐고 통치하는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 개전 다음날 입대했던 페탱은 2차 세계대전을 제 3의 보불전쟁이란 틀로 이해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군에 참패하면서 나폴레옹 3세와 20만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히자, 새로이 수립된 임시정부는 항복을 선언했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파리코뮌을 독일군과 함께 공격하여 진압하였다. 이후 50억 프랑의 엄청난 배상금을 조건으로 강화협정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는 전후 재건을 위한 발판이고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들로 본듯하다. 이탈리아까지 참전하면서 영국이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영국이 그대로 함락되고 독일이 전 유럽을 장악한다는 쪽에 베팅한 것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반현대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페탱에게, 비시 정권은 평소에 페탱이 바라던 프랑스의 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폐기하기 이전의 비시 내각진을 보면 태반이 테크노크랏, 즉 관료들과 교수들로 전전부터 활동하던 파시스트는 보이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왕당파 정도나 듬성 듬성 보인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부정적인 입장이 팽배한 터여서, 패전을 기회로 프랑스를 개혁하자는 여론이 매우 강했다. 여기에 패전 책임을 공화정에 떠넘기려는 프랑스 군부의 의도는 덤. 페탱에게 프랑스 민주 정치의 몰락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결국 페탱 정권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이 되었다. 페탱의 노력으로 비시 프랑스 지역 거주민들이 독일군에게 살육당하거나 전쟁 수행에 징발당하는 사태는 일단 모면할 수 있었지만 물자를 빼앗겼고 유대인들은 다른 나치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끔살당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의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었다는 것을 이유로 비시 프랑스 정부가 그래도 유대인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진주만 공습 전까지 중립국이었던 미국 혹은 비교적 유태인 탄압이 덜했던 이탈리아 등 해외로 탈출하는 행렬이 묵인된건 사실이나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특히 1942년 독일군이 모든 협정을 위반하고 비시 프랑스 치하의 영토를 불법점령하자 비시 프랑스가 저항을 포기하고 주권을 내주면서 유태인 박해에도 가속이 붙었다. 독일군의 점령 이후인 1943년에 독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일할 노동자들을 선발해서 독일로 보내는 강제 노동 제도(STO)가 시행되었을 때에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다만, 독일은 200만의 노동자를 요구했는데, 협상을 통해 프랑스 전쟁포로 11만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60만의 노동자를 보내는데 그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숫자가 징용된게 사실이라 이 때문에 비시 정부의 인기는 더 떨어지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기존 공화정과의 단절을 위해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폐지되고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새 구호가 등장하였으며 혁명과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느도 각종 상징에서 사라졌다. 반영국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해서인지 잔 다르크 숭배 열풍도 불었다는데 왠일인지 우리가 잘 아는 갑옷입고 칼 든 모습이 아니라 농가 처녀처럼 차려입은 모습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는 점령자인 나치 독일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여자는 집에 있어야지 하는 고루한 사상의 짬뽕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숭배는 왜 하는데? 그리고 영국군이 포함된 연합군이 루앙을 폭격하자 영국에게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가 그려진 포스터를 붙이며 잔 다르크를 죽인 그들이 또 온다면서 반영감정을 부추겼다.[4] 사실 반영 감정이 심해진건 어느 정도는 영국이 스스로 자초했다고 봐야 한다. 가령 영국 대륙 원정군이 프랑스를 포기하고 브리튼 섬으로 패주하자 페탱 본인을 비롯한 프랑스군 지도부는 배신감을 느꼈으며, 1940년 휴전 협정 직후 영국 해군이 불법적 적대 행위를 일삼자 전우를 버리고 가는 걸로도 모자라서 심지어 뒤통수까지 친다며 영국인들은 믿을 놈들이 아니라는 인식을 제대로 박아주었다. 1941년 영연방군이 비시 프랑스 치하였던 시리아를 침공하여 자유 프랑스에게 넘긴 사태도 한몫했다.

상술된 것처럼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사상으로 제3공화정 후반기에 그나마 향상되었던 여성의 노동 조건을 도로 악화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면 수백만의 포로들이 그대로 독일에 남아 있었으니 가정을 먹여살리려면 누군가는 나와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여자들이었기 때문.원수님이 숫자 세는걸 깜빡하신 모양이다

한편 이와중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이 이끄는 반공 십자군에 참여하기위해 의용군인 LVF(Légion des Volontaires Français)에 가담하기도 하였고 비시 정부가 레지스탕스를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친독 반공 민병대(Milice)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전후에 숙청당한다. 특히 수장인 조세프 다르낭은 전후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아예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인 기 사예르 라는 사람이 '잊혀진 병사' 라는 회고록을 남겼는데,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읽어보자. 어머니가 독일계이며, 알자스 로렌에 살던 사람이다. 후일 포로로 잡혀 연합군에게 조사받을 때 징집이 아니라 자원입대라고 하자 프랑스 조사관들이 배신자라며 광분하다가 독일계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듣고 대충 이해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순수 프랑스인이었다면 전후 처리에서 크게 피를 봤을 듯하다.

한편 1942년 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프랑스 중부의 리옹(Riom)이라는 도시에서 특별 재판을 벌였다. 이는 1940년 패배의 책임을 죄다 3공화정에 떠넘기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것이다. 가믈랭을 제외하면 군인 신분으로 피고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 전 총리인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앙드레 레옹 블룸(André Léon Blum), 폴 레노, 전 내무장관 조르주 망델(Georges Mandel), 전 항공장관 기 라 상브르(Guy La Chambre), 전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등이 '피고'가 되었다. 한창 재판을 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재판은 중단되고 피고들은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버렸는데 조르주 망델은 예외였다. 이 사람은 휴전협정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로 피신했다가 결국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재판이 중지된 이후 레지스탕스가 친독 인사들을 연이어 암살하자 인질로서 총살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이 유대인이기도 했고.

연합군이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프랑스군이 항복하자 빡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2년 11월독일군이 비시 프랑스 관할지역을 점령하면서, 비시 프랑스는 명목상으로는 계속 존속했지만 사실상 나치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다. 비시 정부의 수반인 페탱과 요인들은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후 이리저리 연합군을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1944년 8월 독일의 지그마링엔(Sigmaringen)으로 압송당해 기능정지가 되어 버린다.[6] 페탱은 억류 내내 히틀러에게 조국으로 보내줄 것을 청원했지만 묵살당했다. 1945년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비시 프랑스는 완전히 소멸한다.

3 소멸 이후

당신이 실제로 적의 선전에 봉사하지 않고 또한 당신의 글이나 연설, 행동이나 제스처를 통하여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패배 뒤에 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약한 점령기간 중에, 협력을 가장하여 우리나라를 타락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굶기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자유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동족을 고문하고 인질을 총살하고 우리의 천재들과 문명의 지독한 적에 대항하여,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당신은 우리 국민들이 준 신뢰에 기초한 프랑스의 지성으로서 당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거나, 진실로 가슴속 깊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애국적 위엄에 부합하는 언동을 하였다고 느끼는가?

- 1944년 독일점령으로부터의 해방 직후 프랑스의 '작가 및 극작가 협회'가 그 회원들에게 답변을 요구한 다음과 같은 질문서의 일부

전범 재판에서 페탱은 조국에 남아 어떻게든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국민을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페탱은 국가 반역죄(제75조)와 '의회제도를 멸시하고 히틀러에 협조한 간첩죄(제87조)'로 기소되었으나,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재판정에 서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재판장에 입장해서 그가 청중을 향해 경례를 하자 청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답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드골은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라고 촌평. 영관급 시절 드골의 직속상관이 페탱이었고 페탱은 드골을 매우 아꼈으나, 결국 두사람은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판결은 끝내 사형으로 났다. 일설에는 14대 13이라는 간발의 차로 났다고 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페탱은 너무도 충격을 받고 기절했다 한다. 1차대전에서 구국의 영웅이고 고령인 점 등을 감안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페이드라루아르 지방 방데 주 서쪽에 위치한 절해고도인 일드외 섬으로 유형에 처해졌다. 그곳에서 페탱은 1951년에 95세의 고령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시 프랑스가 무너지고 임시정부를 거쳐서 성립된 제4공화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시 정권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다. 비시 정부의 총리이자 2인자였던 피에르 라발 총살. 내무장관이자 반공 민병대장 조제프 다르낭 총살. 점령지 정무관 페르낭 드 브리농 총살. 우선 페탱을 비롯해 독일에 부역한 중죄가 있는 인사들이 가차없이 처단당했다. 이때 피에르 라발은 조국의 총탄에 죽을 수 없다며 사형을 거부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중태에 빠진 상태에서 총살장으로 끌려갔다. 그의 유언은 "프랑스 만세"였다고.

프랑스의 권위있는 연감인 퀴드(Quid) 2003년판의 조사에 따르면 사형이 선고된 나치협력자 6763명,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나치협력자가 782명, 징역형(강제노동형, 징역형, 금고형을 포함)을 선고받은 나치협력자는 89779명에 실제 징역형이 부과된 자는 3만 8천여 명에 이른다.

전후의 안습한 경제, 군사적 상황과 몇달마다 내각이 갈려나가는 정치적 혼란, 식민지 전쟁으로 나름 힘들었던 제4공화정에게 비시 프랑스의 멍에는 그 어떤 명분보다 강력한 당위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초반에 대부분의 프랑스 식민지들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자유 프랑스는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물론 자유 프랑스의 세력이 비시 프랑스에 비하면 극히 미미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자유 프랑스에 대한 식민지 지역의 협력도 펠릭스 에부에 같은 식민지인 출신에 행정관들의 설득과 자유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1942년에 점령하고 나서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언제나 물자는 부족했고, 언제 전선이나 독일의 공장으로 동원될 지 모르는 위기상황에서, 또 식량이 부족하여 배급제도가 실시되는 준전시 상황에서, 대다수의 대중들은 비시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수용했다. 일부 대중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비시 정권을 지지했을 것이다.

전쟁 중 자유 프랑스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나치의 압제에 용감히 저항한 프랑스 인민들과 레지스탕스' 이미지를 선전하는 프랑스를 까는 사람들도 있다. 당장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수를 불리고 활발하게 군사 작전을 하기 시작한것도 독일이 패퇴해가고 '프랑스가 확실히 해방될 조짐'이 보이고 나서부터였지, 그 이전까지 레지스탕스는 프랑스의 인구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고 지지도 못받는 중소 조직이었다.

사실 비시 프랑스 외에도 나치 치하의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역사에 기록된 것과 같이 점령군인 독일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하는 자들의 비율이 훨씬 많았다. 독일 군인들과 어울려 한자리에서 파티를 하는 프랑스인들의 사진이 공공연히 발견되는 판. 그것이 전후에는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상당한 굴욕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었기에 비시 프랑스 관련인물들을 일종의 희생양 삼아 가혹할 정도로 처벌했다는 주장이다.[7][8]이는 전쟁 중 똑같이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SS만 희생양 삼아 군적 말소를 비롯해 큰 처벌을 내리고 일반 국방군은 '나치에 이용당한 정직한 군인들' 정도로 정상참작하다시피 했던 독일에 대한 비난과 비슷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비시정부의 하급 관료였고 심지어 페탱에게 훈장까지 받았다는 것이 그가 죽기 직전인 1994년 밝혀졌으나, 그 자신은 1943년부터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페탱의 무덤에 꽃을 두는 관례를 폐지하는 등 다른 면모를 보였다. 언론플레이에 노련한 미테랑은 청년 시절 실수할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전력이며, 젊은 시절의 작은 일탈이 대통령 직무 수행에 차질을 빚을 만큼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연한 태도를 취하여 불길을 끌 수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4 기타

나중에 같은 추축국이 되는 타이 해군과 해전을 벌인 전적이 있다. 결과는 비시 프랑스 해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내 일본이 개입하게 되었다.
  1. 국기는 그대로 삼색기이다. 여기선 자유 프랑스와의 구분을 위해 도끼 문양 국장이 그려진 대통령기를 사용.
  2. 지도상의 6번 'free zone'에 해당하는 영역. (좀더 간략화한 지도.)
  3. 원수(元首)는 앙리 필리프 페탱을 가리킨다. 원쑤가 아니다
  4. 영국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측도 프랑스 국기에 잔 다르크의 십자가를 넣어서 잔 다르크를 숭배했다. 자유 프랑스측은 잔 다르크가 영국에 맞선 건 영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했을 뿐이며 지금의 프랑스에 쳐들어온 적은 백년전쟁 때처럼 영국이 아니라 독일임을 강조했고 비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적에게 팔아넘긴 부르고뉴파와 똑같다고 주장했다. 사실 영국에서도 19세기 이후로는 잔 다르크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5. 가믈랭도 페텡의 공화정 폐지에 반대했다가 미움을 받은게 커서 재판에 끌려나왔다고 한다.
  6.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민간행정은 여전히 비시정부가 관할중이었다.
  7. 그나마도 독일 군인에게 강간당한 매춘부 등 애먼 피해자들을 머리를 강제로 깎고 폭행하는 등 정당한 전후처리가 아닌 단순 화풀이에 가까운 모습이 많이 보였다(https://fr.wikipedia.org/wiki/Femmes_tondues 참조). 도리어 비시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던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주로 우익 진영 심지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샤를 드 골에까지 붙어 살아남았으며, 이는 68 혁명때까지 계속되었다. 친일파들이 이승만한테 붙어서 반공투사로 변신한 것이 생각나면 기분탓이다
  8. 현재도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프랑스의 공화국 전통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세력으로 여전히 프랑스에서 큰 세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 프랑스의 극우 정당 국민전선은 아예 비시 프랑스를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문란한 공화국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모델 정도로 여기고 있다. 68 혁명을 프랑스 몰락의 원인으로 보고 그 해결책으로 무슬림 이민자와 동성애자를 지목하여 이들을 추방하고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할 것을 제시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풍조, 페텡의 망령이 프랑스 정치계의 엄연한 주류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한국으로 치면 역센징들이 원내에 진출하는 거 . 나치괴뢰 빠는게 딱 프랑스판 역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