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Wiener Philharmoniker, 영어: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프랑스어: Orchestre philharmonique de Vienne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줄여서 '빈 필하모닉', 더 줄여서 '빈 필', '비엔나 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빈 필, 비엔나 필이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영어권에서도 Vienna Phil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와 함께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다.
목차
1 역사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오케스트라들도 오페라극장 등에 존속되어 있거나 황족 혹은 귀족 등 높으신 분들 전용의 악단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수준높은 악단으로 평가받은 것이 빈 궁정오페라극장 소속 관현악단이었는데, 이 악단이 오페라 반주에만 쓰기는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라는 지휘자가 '그럼 연주회용으로도 굴려보자' 고 생각하고 1842년에 결성했다.
첫 연주회는 같은 해 3월에 궁정 무도회장이었던 레두텐잘에서 열었는데, 비록 궁정극장 악단을 모체로 했다고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최초이자 그 당시 유럽에서도 거의 없던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니콜라이는 창단 직후 1848년까지 상임 지휘를 맡았는데, 사임 후 한 동안 객원 지휘로 돌리다가 1854년에 칼 에케르트가 두 번째 상임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에케르트도 1857년에 물러났고, 그 뒤로 침체기에 빠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악단 안팎에서 계속 비판이 오갔고, 결국 단원들 스스로가 악단 운영과 지휘자 초빙 등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자주 운영 체제를 도입해 재출발을 꾀했다. 이 때부터 빈 필에 초빙되는 모든 지휘자는 직위에 관계 없이 단원들의 찬반 투표로 뽑히고 있다. 이 제도로 처음 뽑힌 상임 지휘자는 1860년 취임한 오토 데소프였고, 같은 해 공연장을 레두텐잘에서 케른트너토어 극장으로 옮겼다. 1869년에는 악단의 주요 후원 단체였던 빈 음악협회가 여러 크기의 공연장을 포함한 새 건물을 지었는데, 빈 필도 공연장을 이 협회의 대강당으로 옮겼다.
1875년에 데소프가 사임한 후 후임으로 선출된 한스 리히터는 1898년까지 20여년간 빈 필의 상임지휘자로 재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리히터는 바그너의 제자였지만 스스로의 음악적인 식견에 근거해 바그너파, 브람스파 음악을 고루 연주했다. 리히터는 브람스와 브루크너 등 당대 작곡가들의 여러 중요한 관현악 작품들을 초연했다. 리히터는 1882년에 잠시 사임했고 후임으로 빌헬름 얀이 들어갔지만, 얀이 불과 1년 만에 악성 눈병으로 실명하는 바람에 다시 복귀해 1898년까지 재차 상임으로 재직했다.
리히터의 후임으로 거론된 경륜이 있는 지휘자들은 대부분 펠릭스 모틀과 헤르만 레비 등 친바그너 계열이었는데, 당시 빈 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친브람스 계열의 거두인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가 바그너파의 취임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에 브람스와 친분이 있었던 구스타프 말러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빈 국립 가극장과 빈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말러는 취임 후 자신의 교향곡들 뿐 아니라 기존 작품도 대대적인 편곡을 가해 연주하는 등 꽤 파격적인 스타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악단 조련 실력은 전임자들 못지 않았고, 1900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 연주회에 초빙되어 창단 이후 최초의 국외 공연 기록을 남겼다.
말러가 1901년에 대내외의 비난 등으로 인해 사임한 뒤에는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가 후임이 되었지만, 헬메스베르거도 1903년까지 단기 재임에 그쳤다. 이후 상임 지휘자 제도를 아예 없앴지만, 1908년에 궁정오페라 음악 감독이었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초빙하면서 사실상 상임 지휘자나 마찬가지인 '정기 지휘자(Abonnementdirigent)' 라는 새 직책을 만들었다. 이 직책은 1933년에 최종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바인가르트너의 후임으로 1927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영입되었다. 빈 필에서 3년간 재임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거절하고 베를린 필에만 전념했다.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인선에 다소 난항을 겪었던 빈 필은 클레멘스 크라우스를 후임으로 선출(1930년)했다. 크라우스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외손자라는 후광과 잘 생긴 외모와 위풍당당한 풍채로 빈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그의 지휘 역량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고, 3년 후인 1933년 빈 필은 크라우스의 반발 속에서 아예 정기지휘자직(Abonnementdirigent)을 폐지했다.
1920년대부터는 빈 외에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곧 상주 관현악단으로 고정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악단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그로 인한 사회 정세의 불안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고, 특히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시키자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선전가들은 이 악단의 즉각 해체를 주장했고, 유대인 단원들은 망명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중진들이 악단의 존속을 여러 차례 간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호칭과 함께 단원들의 병역 면제와 안정된 수입의 보장 등이 약속되었다. 하지만 여타 제국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빈 필도 나치나 독일군을 위한 자선 공연이나 선전 집회 등에 참가해 의무적으로 공연을 해야 하는 대가를 치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을 계속 했지만, 빈도 베를린 등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의 중요한 폭격 목표가 되어 연주회가 취소되는 등 다소간의 안습을 면치 못했다. 그나마 베를린 필과 달리 공연장이 개발살나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고, 소련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벙커에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종전 후에는 다른 추축국 소속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군정 당국에 의해 인원 정리가 행해졌고, 나치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이나 반나치 지휘자들도 속속 복귀해 무대에 섰다. 동시에 그 동안 빈 필을 지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 등의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출연했고, 데카나 EMI 등의 음반사와도 녹음 작업을 재개했다.
해외 공연도 전쟁 전보다 더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는 아예 '빈 필하모닉 주간' 이라고 정해놓고 정기적인 순회 공연을 개최하고 있고 한국에도 베를린 필보다 더 자주 와서 연주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이 악단이 셀링 포인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 2006년에는 오스트리아 조폐국에서 악단 명칭이 들어간 24캐럿 금도금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항공에서도 자사의 A340 여객기에 이 주화와 악단 이름을 도색한 기체 한 대를 빈~도쿄 노선에서 비정기 운항하고 있다.
2 역대 상임/정기 지휘자
- 오토 니콜라이 (Otto Nicolai, 재임 기간 1842-1848. 상임)
- 칼 에케르트 (Carl Eckert, 재임 기간 1854-1857. 상임)
- 오토 데소프 (Otto Dessoff, 재임 기간 1860-1875. 상임)
- 한스 리히터 (Hans Richter, 재임 기간 1875-1882, 1883-1898. 상임)
- 빌헬름 얀 (Wilhelm Jahn, 재임 기간 1882-1883. 상임)
-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재임 기간 1898-1901. 상임)
-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 (Joseph Hellmesberger (Sohn), 재임 기간 1901-1903. 상임)
-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Felix Weingartner, 재임 기간 1908-1927. 정기)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ängler, 재임 기간 1927-1930. 정기)
- 클레멘스 크라우스 (Clemens Krauss, 재임 기간 1930-1933. 정기)
3 특징
오스트리아 최초로, 그리고 서양 음악사를 통틀어서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 출발한 최초의 악단들 중 하나라서 역사적인 가치도 매우 중요한 악단이다. 다만 단원 전원이 빈 궁정오페라(왕정 붕괴 후에는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이라 본직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태생적인 한계도 있었는데, 초기의 부진은 이러한 겸직에서 오는 과중한 연주 업무에서 왔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러한 2중 단원 체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일단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이라는 것이 '국립' 답게 철밥통이라는 특례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듯. 그래도 국립오페라 관현악단과 빈 필의 행정 업무는 아예 별개로 취급되며, 특히 빈 필 운영에 대한 사항에 대해 국립오페라 측에서 함부로 뭐라고 했다가는 즉시 역관광을 당할 정도로 엄격한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다. 대신 오페라 공연과 관현악 공연 모두를 공평하게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관현악단 단독 공연은 주로 한낮(12시 전후)에 개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낮 공연은 프랑스어로 마티네(Matinée), 저녁 공연도 역시 프랑스어로 수아레(Soirée)라고 공연 목록에 표기하고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로는 낮 공연의 비중이 높아지자 마티네 표기를 그냥 정기연주회(Abonnementkonzert)로 바꾸고 저녁 공연만 수아레로 표기하고 있다. 낮에 정기연주회를 가진 뒤 저녁에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반주를 뛰는 1일 2회 공연도 드물지 않다.
자존심이 징하게 센 만큼, 신규 단원 입단도 전세계 관현악단들 중 가장 까다롭기로 악명높다.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이라도 빈 필 단원을 겸직하려면 오디션은 물론이고, 붙어도 오랜 시간 동안 선배 단원들에게 도제식으로 연주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음악성이 좋다고 해도 악단과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내쳐지는데, 이렇게 쫓겨난 단원들이 다른 악단에 들어가니 수석으로 대번에 합격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정도라는게 ㅎㄷㄷ.
단원 모두가 두 개 관현악단을 겸직해야 하는 특이한 구조 때문에 베를린 필 만큼 단원들의 실내악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여러 편성으로 조직된 실내악단들이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바릴리 4중주단이나 빈 콘체르트하우스 4중주단, 빈 8중주단, 빈 모차르트 앙상블 등은 음반도 여럿 남겨 지금도 회자될 정도. 베를린 필과 빈 필의 관악 주자들로 구성된 목관 5중주단인 '앙상블 빈-베를린' 도 독특한 하이브리드 실내악단으로 유명하다.
3.1 악기
운영 체제 외에 쓰는 악기도 다른 악단들과 차별화되는데, 특히 관악기의 경우 아예 빈 음악에 특화된 19세기 구식 모델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시대연주 단체들이 쓰는 완전 오래된 메커니즘의 악기들은 아니고, 목관악기의 경우 금속제 키(key)가, 금관악기의 경우 호른과 트럼펫, 튜바는 밸브가 달린 것이라 겉보기에는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소리를 들어보면 즉시 구별이 되는데, 물론 이후 계속되는 연주 편의를 위한 개량 절차가 모조리 쌈싸먹힌 악기들이라 연주에 엄청난 애로사항이 꽃핀다. 특히 오보에와 호른은 다른 오케스트라의 악기들과 형태나 소리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오보에의 경우에는 19세기 후반의 빈 오보에(Wiener Oboe)를 쓰고 있는데, 외관도 현대 오보에와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매우 독특한 소리를 갖고 있다. 비브라토가 별로 없는 강렬하고 메마른 소리가 특징으로, 국악기 중 피리와 비슷한 음색이다. 다만 빈 필과 작업한 모든 지휘자들이 이 독특한 소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데, 칼 뵘 조차도 경쟁 악단이었던 베를린 필의 전설적인 오보에 수석 주자였던 로타 코흐 스타일의 오보에 사운드를 선호했다. 다만 80년대 후반 이후에 입단한 단원들은 기존의 날카로운 음색과는 다른 상당히 순화된 사운드를 내고 있고, 악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브라토도 많이 사용하려 하고 있다.
호른의 경우에도 F조 싱글 호른의 일종인 빈 호른(Wiener Horn)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보에와 마찬가지로 외관상으로 다른 호른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밸브/피스톤 없이 연주하던 초기 호른인 내추럴 호른에 있던 크룩 모양이 남아있는데, 악기를 연주하면서 호흡과 함께 악기 내부에 입김 형태로 들어간 물을 뺄 때 크룩을 빼고 악기를 돌리는 식으로 빼도록 되어 있다. 다른 오케스트라들의 상용 악기인 Bb/F조 더블 호른에 비해 고음역 연주에 상당한 힘이 드는데, F조 관이 저음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고음에서는 손가락으로 밸브를 조작하는 운지법보다 입술의 움직임 만으로 음을 조절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금관악기나 마찬가지겠지만, 밸브나 피스톤, 슬라이드(트롬본 한정)의 도움 없이 마우스피스에 갖다댄 입술 만으로 다양한 음정을 내는 것은 숙달된 프로 주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과제다. 빈 호른이 연주 중에 삑사리를 많이 내는 것은 결코 단원들의 기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크게 연주할 때는 다른 호른에 비해 상당히 무겁고 거친 소리가 나오고, 밸브를 사용하는 현대 호른과 달리 피스톤 밸브를 사용하기 때문에 음 사이에 텅잉 간격을 크게 두는 것도 특징이다.
다만 이 빈 호른은 빈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빈 호른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이 점차 사라져 버리면서 1970~90년대에는 일본 악기 제조 업체 야마하에 특별 위탁 제작해 납품받기도 했다. 하지만 빈 필에서 연주하는 호른이 특색있는 음색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 빈 교향악단의 호른 주자들도 빈 호른으로 악기를 바꾸었고, 또 이곳저곳에서 이 독특한 호른에 관심을 보이면서 오스트리아 토종 관악기 제작 업체인 안드레아스 융비르트가 1997년부터 빈 호른 생산을 재개하면서 야마하 대신 융비르트의 빈 호른이 자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융비르트 제작의 빈 호른은 19세기에 활약한 빈 호른의 명수였던 레오폴트 울만이 사용했던 악기를 복제했기 때문에 야마하나 여타 빈 호른과 모양이 약간 다르다. 이 융비르트제 호른은 빈 필 수석 호르니스트 볼프강 톰뵈크가 앞장서서 보급했는데, 다만 2010년대 들어서는 융비르트제 호른이 아닌 기존의 야마하 혹은 다른 업체의 빈 호른을 쓰는 주자들이 더 많은 것을 볼 때 반짝 보급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고음역이 많은 곡의 경우 고음 연주에 젬병인 빈 호른 대신 고음역 연주가 용이한 고음용 데스칸트 호른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의 작품은 까다로운 고음이 많기 때문에 빈 필에서 고음용 호른을 사용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베토벤 교향곡의 경우 보통 2번, 6번, 7번, 8번에서 고음용 호른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음용 호른의 사용 여부는 연주자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같은 곡이라도 고음용 호른을 사용하는 주자도 있고 빈 호른을 사용하는 주자도 있다. 또 고음용 호른은 빈 호른처럼 지정된 악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원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브랜드의 악기를 취사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타악기도 옛날 모델 위주로 갖추고 있는데, 특히 팀파니나 베이스드럼, 스네어드럼 등 북 종류는 플라스틱이 아닌 동물 가죽을 북면으로 쓰고 있다. 팀파니의 경우 페달로 쉽게 조율하는 요즘 모델 대신 북통 가장자리에 붙은 핸들들을 돌려 조율하는 모델이 기본인데, 페달 팀파니를 꼭 써야 하는 곡을 제외하면 항상 이 구식 모델을 고집한다. 이렇게 악기에서부터 '전통 중시' 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현악기는 다른 악단들과 비교하면 악기 자체는 동일하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정기 지휘자로 있을 때 빈 필이 빚어내는 현악기 소리가 너무 좋아서 베를린 필과 악기를 바꾸어 연주하는 시도를 했는데, 베를린 필이 빈 필 악기를 잡고 연주해도 그런 소리는 안나왔다고 한다. 결국 악기의 차별성이 아닌 빈 필만의 독특한 연주법 계승이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을 듯.
3.2 배치
같은 맥락에서 악단의 악기와 연주자 배치도 보수적인데, 지휘자를 중심으로 왼쪽에 바이올린 파트들을 놓고 오른쪽에 비올라 파트를 놓는 19세기 정통 유럽식의 배치법을 고수하고 있다. 크게는 전통 독일식 배치지만 세부적으로 볼 때 빈 필 만의 고유한 특색이 있는 배치를 띄고 있다. 주요 공연장인 빈 음악협회 대강당을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해당 공연장에 맞는 음향을 연구한 끝에 이런 배치가 정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콘트라베이스와 금관악기의 배치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보통 금관악기는 목관악기 뒷줄에 왼쪽에 고음인 트럼펫을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가면서 저음인 트롬본-튜바 순으로 배치하지만, 빈 필은 거꾸로 튜바-트롬본-트럼펫 순으로 배치한다. 호른의 경우에는 트럼펫 오른쪽에 앉는 것이 빈 필의 전통적인 배치이다. 호른의 경우 무대 우측에 위치하건 좌측에 위치하건 오른쪽에 수석이 앉는데 이는 호른의 벨 사운드가 연주자의 오른쪽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빈 필은 호른이 무대 우측에 위치하면서 수석이 가운데 쪽에 앉는 방식이다. 빈 필 이외에는 거의 유래를 찾기 힘든 희귀한 배치이다.
콘트라베이스는 금관 바로 뒤에 일렬 배치되는데, 통상 콘트라베이스가 맨 오른쪽이나 왼쪽 귀퉁이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계단식으로 무대가 높아지면서 양쪽 면적이 좁은 음악협회 대강당의 무대 특성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빈 필이 해외 순회공연을 갈 경우 이렇게 콘트라베이스가 가장 뒤에 배치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도 이런 의견을 뒷받침한다 볼 수 있다. 콘트라베이스 뿐만아니라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일렬로 펼쳐져 있는 경우 앙상블 측면에서는 마이너스가 되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플러스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콘트라베이스 이외에도 첼로도 앞라인에 두 풀트씩 네 명이 일렬로 앉아 연주하도록 배치하고 있고, 호른도 음악협회 대강당에서는 그냥 한 줄에 2~3대 배치하지만, 콘체르트하우스같은 더 넓은 무대 공간을 가진 공연장에서 공연할 경우 가급적 일렬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 악단과 오랫동안 작업하며 친분을 쌓은 명지휘자들의 경우 본인이 선호하는 배치 방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의 경우에는 초기에 빈 필을 객원지휘할 때는 악단의 전통 배치법을 따랐지만 빈 필에서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고 난 197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에게 익숙한 미국식 배치법-통칭 스토코프스키 배치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3.3 빈 신년음악회와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
3.3.1 빈 신년음악회
3.3.2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
2004년부터는 베를린 필의 여름 야외 음악회인 발트뷰네 콘서트를 벤치마킹했는지, 쇤브룬 궁전의 야외 무대에서 5월 혹은 6월에 특별 무료 야외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2004~06년 까지는 '유럽을 위한 음악회(Konzert für Europa)' 라는 제목의 자선 음악회 형식으로 개최되었다가, 2007년 한 해 쉰 다음 2008년부터는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Sommernachtskonzert Schönbrunn)' 라는 제목으로 개최하고 있다.
그 동안 거의 본격 클래식만 줄창 연주한 보수적인 악단이 탱고나 스타워즈등 대중적인 곡들도 과감히 선곡해 공연하고 있어 반응이 꽤 좋은 모양. 신년음악회에서 앙코르로 요한 2세의 왈츠가 연주되고 발트뷰네 콘서트에서 파울 링케의 '베를린의 공기' 가 연주되는 것처럼, 이 음악회에서도 요한 2세의 왈츠 '빈 기질' 이 고정 앙코르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DVD와 BD 같은 영상물에만 실어주고 음반에서는 빠진다는 게 함정
유럽에서 베르사유 궁전 다음으로 크고 아름다운 쇤브룬 궁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최근에는 원조격인 베를린 필의 발트뷰네 콘서트보다 더 잘나가는 느낌이 있다. 음반도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4 음반/영상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미친듯이 많이 낸 베를린 필 만큼은 아니지만, 이 쪽도 물량 면에서 전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들 쏟아내고 있다. 특히 상임 제도가 없는 악단 특성상 지휘자들의 면면이 대단히 화려하다.
물량 면으로 이 악단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한 인물들을 가늠할 수 있는데, 비록 중기에 트러블이 생겨 급짜식하기는 했지만 카라얀도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많은 음반과 영상물을 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 시기가 베를린 필과 오히려 갈등을 겪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으로 맞물려 있는데, 마지막 공연과 녹음도 이 악단과 같이 했다.
카라얀 이외에는 동향인 선배였던 칼 뵘과 미국인으로 갑툭튀했지만 어느새 레귤러가 된 레너드 번스타인,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 역시 미국인이었던 로린 마젤 등이 빈 필과 음반을 많이 남긴 지휘자로 손꼽힌다. 카라얀과 뵘, 아바도, 마젤의 경우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겸무했기 때문에, 악단 구조상 빈 필과도 많이 어울리게 되어 녹음 기회도 많아진 듯.
올드비 지휘자들도 숫자는 적지만 그래도 여러 종류의 명반들을 내놓은 바 있다. 바인가르트너나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한스 크나퍼츠부슈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 참고로 보수적인 단체답게 첫 음반도 1928년에야 나왔다. 당시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이었던 프란츠 샬크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6번과 8번, 레오노레 서곡 3번 세 곡이었는데, 그나마 전기 녹음 기술이 도입되고 만들어진 탓에 베를린 필의 초기 녹음보다는 음질히 한결 나은 편.[1]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 약15년간 데카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데카와 전속 계약은 악단에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보여진다. 데카는 DG, EMI에 비해 오페라에 비중을 크게 두었다. 반면 DG는 비용이 많이 드는 오페라 녹음을 가급적 자제하고 관현악곡 위주로 카탈로그를 구성해 나가는 전략을 취했다. 베를린 필과도 전속계약을 맺었고, 독일권의 우수한 지휘자들을 영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DG가 보유한 지휘자들로는 카라얀, 뵘, 쿠벨릭, 요훔 등이 있었다. 데카가 보유하고 있는 지휘자들의 네임밸류는 DG, EMI에 비해서는 후달린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빈 필은 최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한스 슈미트-이셰르슈테트와 녹음했다.
2002년에는 전업 지휘자도 아니고, 본업이 증권 투자자이자 언론인인 길버트 카플란이 자신의 유일한 지휘 곡목인 말러의 교향곡 2번을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해 충공깽을 선사했다. [2][3]
사실 193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으로 어렵던 시절 미국의 한 부유한 실업가가 빈 필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회고에 의하면 그 지휘자(?)는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4박자로 지휘했으나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고 한다.
매년 신년음악회 역시 꼬박꼬박 CD/DVD/블루레이로 출반되고 있다.
5 비판
원체 실력과 유명세를 겸비한 악단이라 쉽게 깔 수는 없는 본좌급 단체지만, 단원 선정과 관한 두 가지의 암묵적인 원칙을 20세기 중반 지나서까지 고수했기 때문에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풀렸지만, 한 때 비 유럽 혈통과 여성 단원은 뽑지 않은 것.[4] 실제로 스기야마 야스토라는 일본인 튜바 연주자가 빈 필에 입단하려고 했다가 '실력 부족' 이라고 떨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유가 말도 안되는 것이었는데, 빡친 스기야마가 미국 유수의 관현악단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서 오디션을 보고는 즉시 튜바 수석으로 임명됐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 필 단원 명부를 보면, 오랫동안 상근 단원의 국적과 성별이 거의 오스트리아 남성으로 유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후 나치 당원 혹은 골수 친나치 성향의 단원들이 강제 퇴단당하고 전쟁의 여파로 실력있는 오스트리아 남성 연주가들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슬금슬금 외국인 단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미국 출신의 트롬본 주자 윌리엄 맥엘헤니가 이렇게 들어간 비오스트리아계 단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미국 뿐 아니라 이웃 독일과 프랑스, 영국, 벨기에,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등 중동부유럽 단원들이나 우크라이나 출신 단원들까지도 볼 수 있다. 백인 이외의 인종과 혼혈인 연주가들의 입단도 조금씩 허용되고 있는데,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빌프리트 카즈키 헤덴보르크가 2004년에 제1바이올린 정단원으로 입단한 것이 최초 사례였다. 그의 동생인 첼리스트 베른하르트 나오키 헤덴보르크도 2011년에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으로 입단해 약 3년 간의 견습 과정을 거쳐 2014년에 첼로 정단원으로 입단했다.
하지만 단원들의 국적이나 인종 문제보다 더 심하게 비판받은 것이 여성 연주자의 입단 거부였는데,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음악 단체들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성 연주자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하프의 경우 안나 렐케스라는 여성 연주자를 1970년대에 영입한 적이 있었지만, '비정규 단원' 이라는 어정쩡한 직함이었고 텔레비전 공연 중계 때는 카메라가 손만 비추는 등(...) 여러 모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렐케스의 정단원 자격은 1997년에야 인정되었고, 몇 년 뒤 은퇴했다. 렐케스의 후임 역시 여성 하피스트인 샤를로테 발체라이트였다. 또 몇 년 뒤 스페인+프랑스계 남성 하피스트인 하비에르 드 메스트르가 갑툭튀한 뒤에도 공동으로 하프 파트를 맡았고, 이후 메스트르가 솔로 활동을 위해 퇴단한 뒤에도 2014년 현재까지 정단원으로 재직 중이다.
하프 외에 다른 파트의 여성 정단원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2007년에 입단한 비올라 연주자 우어줄라 플라이힝어-2015년 현재 우어줄라 루페로 개명-였고, 이어 제1바이올린 연주자 이사벨 바요(프랑스)와 비올라 연주자 다니엘라 이바노바(불가리아), 하프 연주자 아넬렌 레나에르츠(벨기에)가 2010년에 입단했다. 2011년에는 창단 이래 최초의 여성 악장(콘서트마스터)으로 불가리아 출신의 알베나 다나일로바가 뽑혀 화제가 되었다. 악장이 제1바이올린 파트의 수장일 뿐 아니라 관현악단의 예술적 측면에 관한 대표자 역할도 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나일로바의 악장 임명으로 빈 필 단원 자격에서 성별에 관한 장벽은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 셈.
같은 해에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올레샤 쿠릴랴크도 제1바이올린 주자로 정단원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2012년에는 첼리스트 우어줄라 벡스가, 2015년에는 제1바이올린 연주자 알리나 핀하스, 제2바이올린 연주자 파트리치아 콜과 플루티스트 카린 보넬리가 견습 기간을 마치고 정단원으로 입단했다. 2016년 10월 현재 빈 필의 여성 단원들은 제1바이올린 네 명(다나일로바, 바요, 쿠릴랴크, 핀하스)과 제2바이올린 한 명(콜), 비올라 두 명(루페, 이바노바), 첼로 한 명(벡스), 하프 두 명(발체라이트, 레나에르츠), 플루트 한 명(보넬리)으로 총 11명이다. 이외에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들 중 빈 필 정단원 연수를 받고 있는 이들 중에 제2바이올린 연주자 아델라 프라시네아누가 포함되어 있어서, 프라시네아누가 정단원으로 승급되면 한 명 더 늘 예정이다.
여성 지휘자의 초빙도 다른 악단들보다 훨씬 늦었는데, 2005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시모네 영이 최초로 기록되었다. 라이벌인 베를린 필이 1887년에 영국 출신인 메리 웜의 지휘로 처음 공연했던 것과 비교하면 120년 가까이 늦은 셈인데, 몇몇 노장 혹은 보수적인 단원들은 익명으로 '여성 단원이나 지휘자가 많아질 수록 빈 필의 유구한 전통은 훼손될 것' 이라고 언론에 말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음악의 경우에도 베를린 필 등 다른 단체보다 훨씬 적게 다루고 있다. 단원 선정과 마찬가지 논리로 비유럽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 횟수가 대단히 적은데, 그나마 지휘자로 워낙 많이 등장했던 번스타인과 앙드레 프레빈, 1990년대에 몇 차례 연주된 필립 글래스의 작품 정도가 예외에 속한다. 베를린 필의 수장이기도 했던 아바도도 1980년대 후반에 리게티와 노노, 불레즈, 림 등의 곡을 지휘했지만, 이것 역시 단발성에 그쳤다.
이 쪽 애호가들의 경우, 차라리 독일의 앙상블 모데른처럼 애초부터 현대음악 전문 단체로 출발한 클랑포룸 빈을 더 선호하는 듯 하다. 빈 필 자체의 보수적인 분위기 외에도 쓰는 악기 자체가 대부분 구식이라, 현대적인 주법을 응용하기 무척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도 이런 레퍼토리 편식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
6 흑역사
'제국 관현악단' 이었던 만큼, 빈 필도 베를린 필이나 여타 나치 치하 활동 악단과 마찬가지로 흑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 항목에도 썼지만 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 단원들이 해고당했고, 이들 중 망명에 성공하지 못한 여섯 명이 게토 혹은 강제수용소에서, 두 명이 해직 후유증과 핍박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쫓겨난 유대인 단원들 대신 자리를 메꾼 연주자들 대부분이 골수 나치빠였다는 점 역시 이 악단 최악의 치부로 기록된다. 제3제국 당시 107명의 베를린 필 단원들 중 나치 당원은 겨우 여덟 명에 불과했지만, 빈 필에서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기 전에도 이미 25명의 단원들이 나치 당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비율은 1942년까지 꾸준히 늘어나 당시 전체 단원 123명 중 절반 약간 못미치는 60명의 단원들이 나치 당원들이었다.
이 나치 병합 시기 동안 빈 필의 단장은 콘트라베이스 단원이었던 빌헬름 예르거가 맡았는데, 나치 당원에 친위대원이라는 가히 환상적인 스펙을 갖춘 극렬빠였다. 물론 악단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른 대가라고 관대히 봐줄 수도 있겠지만, 이들에게 쓸려나간 다른 음악인들의 운명까지 생각해보면 절대 불가능하다.
베를린 필과 마찬가지로 빈 필도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나치 관제 단체라든가 독일군 위문 공연 등을 수행했는데, 이 역시 단원들의 병역 면제 등 혜택을 존속시키기 위한 계약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악마의 계약이었던 셈이다. 결국 패전 후 단장 예르거를 비롯해 극렬 나치로 여겨진 단원들은 베를린 필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군정 당국에 의해 해고되었고, 이 공백을 메꾸는 데 또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게다가 모체인 국립오페라의 경우, 빈 필과 다르게 극장이 폭격으로 산산조각나고 단원들의 사상자 비율도 훨씬 높아서 거기서 끌어오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니 제로섬이나 마찬가지였을 듯 하다.
그나마 뒤늦게야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한 베를린 필과 달리, 이 쪽에서는 계속 함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 대해 악단이 아예 침묵한 것은 아니었고, 2000년 5월 7일에 오스트리아에 있던 나치의 강제수용소 중 가장 악명높은 곳이었던 마우타우젠의 채석장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 음악회에 출연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공연한 것이 간접적 속죄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져 화제가 된 바 있다.
결국 비판 여론을 의식했는지, 2013년 1월에 악단 측에서 역사학자/음악학자들인 베르나데테 마이어호퍼, 프리츠 트륌피, 올리버 라트콜브에게 1930~40년대의 악단 활동사를 재조사하도록 위탁했다. 약 두 달 간의 재조사 결과가 3월 초에 발표되었는데, 주된 정보는 빈 필의 나치 당원 비율과 유대인 단원들의 해직/사망 사례, 나치와 결탁해 치른 공연 등이었다. 이들 정보는 대부분 이미 2차대전 종전 후 음악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연구/공표한 것이어서 딱히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이것을 악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주목받았다. 관련 기사
7 동양인 지휘자
비유럽계 작곡가 작품을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빈 필의 연주회 무대에 동양인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2차대전 이후 부터였다. 동양 출신으로 빈 필의 정기 초빙 지휘자가 된 첫 번째 인물은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였고, 말년병장화 되었다고 종종 까이는 1990년대 이후에도 출연 빈도는 여전히 높다.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는 메타와 더불이 빈 필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동양인 지휘자로 꼽힌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동양인 최초로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5] 2000년대 후반에 식도암 판정을 받아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 이어 이와키 히로유키와 코이즈미 카즈히로 등의 일본 지휘자들도 예정되었던 지휘자가 병에 걸리는 등의 상황 때문에 급히 대역 등으로 섭외되어 공연하기도 했다.
한국 출신 지휘자로서 빈 필을 지휘한 인물은 정명훈이 2010년 현재까지 유일하다. 게다가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네 곡과 세레나데 두 곡,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 가 담긴 네 종류의 CD도 출반했는데,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다른 유럽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관계가 많이 멀어진 상태. 안익태가 훨씬 먼저 지휘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빈 필이 아닌 빈 교향악단(Wiener Symphoniker)이었으니 김칫국 금물.
8 빈 필하모닉 축구클럽 (Philharmonischer Fußballklub Wien)
사내 축구동아리인 빈 필하모닉 축구 클럽(Philharmonischer Fußballklub Wien)이 있다. 공식홈페이지
호른 수석인 로날트 야네치치(Ronald Janezic)가 회장 겸 매니저 겸 감독을 맡고 있으며 트럼펫 수석인 마르틴 뮐펠너(Martin Mühlfellner)가 부회장 겸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금관악기 단원은 거의 전원이 축구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 거의 강제가입 수준인 듯.
회장 겸 매니저 겸 감독인 야네치치는 역대 팀 득점 471골 중 28%인 132골을 기록하여 팀 역대 득점 1위에 올라 있고, 전성기 시절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의 주포였다. 최근에는 젊은 클라리넷 수석 다니엘 오텐자머(Daniel Ottensamer)가 놀라운 속도로 치고 올라와 현재 누적 100골로 팀 역대 득점 2위에 올라있다.
남성 단원이 많아서인지 타 오케스트라와 대전시 승률이 높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대전이 잦고 그 다음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등 오스트리아 지역 오케스트라와 경기가 많다. 때때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등 독일 오케스트라와도 간간히 경기가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과 경기가 상당히 잦다.- ↑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의 첫 녹음은 아직 구식 어쿠스틱 녹음을 쓰던 1924년에 이루어졌다. 이것까지 소급해도 베를린 필보다는 늦게 녹음에 뛰어든 셈.
- ↑ '억만장자가 돈으로 연주했다' 라는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지만, 카플란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말러리안이자 유명한 말러 수집가이기도 하다. 20대때 말러 2번 교향곡을 들은 이후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로 말러 교향곡을 들으러 갈 정도로 말러에 대한 애착이 뛰어나며, 도이체 그라모폰에 말러 2번 교향곡을 취입하기 전에는 말러 2번 교향곡을 이해하기 위해 말러2번교향곡이 연주회가 있는 곳이라면 영국서부터 호주까지 갈 정도로 열정이 엄청났다. 줄리어드 대학서 부터 게오르그 솔티의 개인 과외까지 카플란이 말러를 연주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은 엄청났으며, 세간에 알려진것처럼 '돈으로 구입한 전세계 악단을 지휘하는 물질주의자' 와는 거리가 먼 클래식에 열정이 있는 인물이다. 그냥 돈으로 악단을 매수했다면 어떻게 그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말러 2번 교향곡이 18만장이 팔린 배스트 샐러가 될 수 있었을까?
- ↑ 카플란이 빈필을 지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업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과거 말러의 악단이었던 빈필이 말러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개정안을 가장 먼저 녹음&연주해야 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카플란은 부활의 여러 스코어를 비교 500여 개의 문제점을 개선한 개정안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로 말러 2번 교향곡을 어느 지휘자보다도 잘 이해한 아마추어 지휘자로 알려져있다.
- ↑ 모두 풀리긴 했으나 다른 악단에 비해 실행이 늦고, 상대적으로 여전히 장벽이 높다.
- ↑ 빈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직은 시기에 따라 역할과 권한에 차이가 크고, 지휘자가 임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문경영인이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1956년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에 취임했을 때, 서베를린 시민들이 결국 카라얀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베를린 필 자리를 이용해 먹었다고 분개했을 정도니 당시 빈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의 위상은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직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한동안 경영인이 음악감독을 맡았지만 80년대 마젤이 취임한 이후 아바도, 오자와, 벨져-뫼스트 등이 이 자리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