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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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최영의(崔永宜)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 おおやま ますたつ)
생몰년도1923년 6월 4일 ~ 1994년 4월 26일
출생지전라북도 김제
実践なければ証明されず、証明なければ信用されず、信用なければ尊敬されない。

실천이 없으면 증명할 수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받을 수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1]

1 소개

극진회관(極眞會館) 및 극진공수도(極眞空手道)의 창시자

한국명 최영의(崔永宜),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 한국에서는 최배달(崔倍達)로 알려졌지만, 이는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다츠를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대산배달에서 따온 것이다.[2] 주위에서 개명을 권유하는 일본인들이 매우 많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썼다고. 영어권에서는 약칭인 마스 오야마(Mas Oyama)가 널리 알려져있다.

태어난 시기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인 바람에 일본에 있는 항공정비학교[3]에 입학했다가 타쿠쇼쿠(拓殖) 대학에 진학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4]되었다가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치야코(智弥子)[5]라는 일본인과 결혼한 후에 일본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게 된다. 이후 무도가로서 성장하여 극진공수도가로 유명해졌는데 일본에서는 전설적인 격투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의 주인공으로 알려지면서 인기를 더하게된다.

1964년에 실전 무도를 주창하며, 극진회관을 설립해 일본을 대표하는 무도가중 하나로 유명하다.

2 일대기

2.1 20대 청년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일본 패전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산으로 들어가 공수도 수련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항공학교 졸업후 대학도 두군데[6]를 다녔고 최초에는 송도관(쇼토칸;松涛館) 공수도를, 이후에는 강유류(고주류;剛柔流) 공수도를 수련했을 뿐더러 유도검은띠였다[7]. 사실 산에 들어간것도 길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점령군 미군과 치고박고 싸우는 바람에 지명수배 당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무도 수련을 위해 다시 두번째로 입산수도를 결심하는 시기가 있으나 첫번째 입산수도는 도피성이 강했다.이 시절 미야모토 무사시오륜서를 읽으며 무사시처럼 입산수도에 매진한다.아마 도장 깨기도 무사시에게서 비롯된 행동이라 할수도 있겠다.

전일본 공수도 대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무도철학을 언론에 밝혔으나 이게 호응이 좋지 않았던 데다 조선인 출신이라고 시도때도 없이 트집을 잡으며 도전을 받자, 차라리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전일본을 돌며 도장 깨기 시합을 벌였다. 이런식으로 그는 자신의 실전 공수 철학을 증명하려 했다. 대략 이때쯤에 아리아케 쇼고를 제자로 들인 듯 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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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영상 중 하나로 가라데 홍보 차원으로 소를 잡는 영상이 존재했는데 소를 잡는다기보다는 코뚜레를 해놓고 질질 끄는 게 전부이며 뿔을 내리찌는 장면은 편집을 해놔서 가짜라는 말이 팽배하다. 물론 증거는 없지만.

2011년 2월 13일 방영된 SBS스페셜 '무림고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편에 최영의의 '소를 때려잡는 조건'이 나왔다.

1) 100m를 11초에 뛸 수 있을 것.

2) 벤치 프레스 150kg ~ 160kg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3)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 배에 붙일 수 있을 것.
4) 한 손 새끼손가락으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것.
5)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구부릴 수 있을 것.

이걸 다 할 수 있을 때 주먹으로 소를 때리면 소가 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기가 막힌 아들들이 "그러면 아버지는 저 조건이 가능하십니까?"라고 묻자 "가능하니까 소를 때려잡았겠지"라고 대답했다. 소 때려잡는 방법을 보자! 위 방법은 동영상 5분 12초부터. [9][10]

그러나 이는 걸러서 들어야 된다. 황소를 때려 눕힌 영상은 실제로 소를 때려 눕히는게 아닌 극진공수도의 홍보영상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역대 남자 100m 달리기 세계 기록 추이는 1912년부터 1968년까지 10초대를 기록하다 1968년부터 10초대가 깨졌다. 남자 100m 달리기 세계 기록 추이[11]

또한 동전구부기 또한 문제 되는게 동전 마다 세기정도가 극렬하게 갈린다. 당장 한국 동전만해도 500원짜리를 구부리는건 일반인들에겐 엄두조차 못내지만 구 10원권같은 경우에는 일반인중에서도 깨거나 구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전문 그리퍼들이나 스트롱맨 선수들에게는 사실 상당히 쉬운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괜히 그런게 아니라 간간히 힘자랑한다고 동전을 구부리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기무라 마사히코도 같은류의 힘자랑을 하고 다녔다.

또한 소를 때려잡는 영상을 보다보면 소와 싸우다기보다는 싸우기 싫어하는 소를 억지로 코뚜레를 하고 끌고다니는 영상으로 보는게 더 정확하다.

사실 사람이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으려면 한방에 소의 관자놀이를 노려 뇌에 충격을 주어 말 그대로 즉사시키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두개골이 깨져도 소는 미친 듯이 날뛸 수 있기 때문에 최영의 자신의 경우에도 한방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도축장의 소들을 대상으로 몇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연구한 끝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후로도 간간히 일본 내에서도 소를 몇마리 씩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 스페인에 가서도 투우장에서 투우소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12] 최영의가 맨손으로 소를 죽이는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소한 사기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프로레슬러 천규덕은 아예 소 3마리를 때려잡는 이벤트를 벌였다고 하고 웰터급(66kg)의 복싱선수였던 피피노 쿠에바스 역시 푸줏간 일을 할때 맨손으로 소를 도살했다고 전해진다.도대체 소들은 무슨 죄인지... 푸줏간에서 일했던 만큼 경험이 있어서겠지만 체급을 보면 감량한걸 고려해도 그리 큰 체구는 아니었다. 그외 나이지리아 출신 복서 딕타이거나 다른 중남미출신의 복서들도 맨손으로 가축들을 도축햇다는 일화가 수두루빽빽하고 아프리카의 부족경우에도 외지인이 초청받으면 그자리에서 맨손으로 건장한 남성들이 소를 잡기도한다. 심지어 80대 노인이 성난소를 때려잡은 일화가 외신에 소개되었다.제발 그만.. 당장 노익장항목만 가도 노인분들이 맹수를 물리친 일화가 많이 보인다. 우간다의 폭군 이디아민도 비슷하게 어린시절 맨손으로 가축을 때려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최영의의 유명세 덕에 그의 상징처럼 되긴 했지만 위에서 열거한 조건등은 과장이 섞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나 소나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따라하지 말자. 소가 싸움소던 기력을 다한 쇠락한 소던 일반인이 다짜고짜 난타질해서 주저앉을만한 동물은 아니다. 엄연히 동물학대이기도 하고.

사실 이러한 최영의의 웨이트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와카키 다케마루의 영향을 받은것이다. 다케마루는 서구식 웨이트를 처음으로 일본에 전파한 인물 중의 한명으로 일본 보디빌딩 역사의 시초라고할수있다. 최영의와 그의 절친한 선배인 기무라가 다케마루를 처음만났을때 최영의는 그를 내심 작다고 무시했지만[13] 실제 힘겨루기를 해보니 한마디로 개발렸다. 이 일화 이후 최영의는 무엇보다 체격과 파워를 중요시했고 그 이후 동전구부리기나 한손 턱걸이등도 모두 다케마루에게 배워 오랫동안 수련해온 것이다.

2.2 30대

해외의 격투기들을 체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공수도 도장인 '대산도장'을 열었지만 이 최초의 도장은 도장부지 사기사건을 당하며 문을 닫게 되고 이후에 '극진회관'을 창설한다.

1971년 일본의 유명 스포츠 만화가인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가 원작을 맡은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空手バカ一代)의 대히트로 최영의는 단순히 격투기관련 인물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초 유명인사가 되어버린다. 카지와라 잇키와 최영의 선생 사이의 관계는 여러모로 은원이 뒤얽힌 복잡한 사이인데 자세한것은 카지와라 잇키와 그의 만화 인간흉기를 참조하자.

이후 일본 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격투기 바보 캐릭터는 대부분 최영의가 그 모티브이고, 가상의 실전 공수 유파는 극진회관을 모티브로 삼았다. 바키의 '오로치 돗포'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14]

공수도 바보 일대(한국명 무한의 파이터)는 지금도 일본에서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만화지만 작가가 멋대로 군국주의에 대한 옹호나[15] 판타지적인 내용을 그려넣어 왜곡이 많았다. 심지어 총알을 잡는 묘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해 했다고 한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바람의 파이터대야망 같은 만화책 등으로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재미는 그나마 바람의 파이터가 좀더 좋은 편인데 이것도 현실성은 저 멀리 가있고 사실과는 전혀다른 판타지스러운 내용이 너무 많다. 뭐 만화니까 당연한 부분이긴 하다.

나중에 오야마의 실제 생애를 다룬 자서전 등이 발간됨에 따라 그가 한국 태생이며 그의 과거에 대해서 미화된 부분들도 있음이 알려졌으나 여전히 극진회관의 대스승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하지만 만화의 여파로 아직까지 잘못 알려져 있는 일화들을 실제처럼 믿고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딱히 뭐가 잘못 알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가 싸웠다는 상대들이 사실상 2~3류급의 약한 상대들이었기는 하지만, 덕분에 그런 이력때문에 미국 수사기관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2.3 40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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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이후로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매진하여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하루에 최소 10명 이상과 대련 계속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노익장 동영상이라고 도는 걸 보면 4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보다보면 정말 무섭다. 무섭다는 이유에는 크게 몇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게 약속된 대련이 아니라 실제 대련으로 실제로 제자들의 낭심을 걷어차고 살짝이지만 눈을 찌르고 쓰러진 상대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나가려고 한다. 저래도 되는건가?

1994년 향년 70세로 사망했으며 사망원인은 폐암으로 인한 호흡부전. 놀라운 사실은 사망 4~5년 전까지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현역을 추구한 듯...

3 카지와라 잇키와의 애증

태평양 전쟁의 패전건도 있어서 당시 미국인과 대결하여 승리한 최영의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때 마침 카지와라가 최영의에게 접근하여 둘은 친분을 갖게 된다. 꼴마초였던 카지와라는 최영의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친하게 지냈고 그 인연으로 최영의를 작중 등장인물로 두 번 써보게 된다. 이게 반응이 좋았을 뿐더러 당시 격투기붐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카지와라는 최영의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언.

당시 매거진 편집부에서는 토론이 일었으나 이미 논픽션 작품을 다룬 적도 있으니 실존인물이 소재라도 안될 것은 없다는 이유로 연재가 결정된다. 작화를 맡은 건 이미 작중에서 최영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을 그린 츠노다 지로였다. 제목은 공수도 바보 일대.

이 만화가 대히트해서 최영의 개인의 유명세에 비해 정작 도장자체는 그냥 그저그런 수준이었던 극진공수도장에도 입문희망자가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최영의외 친분을 맺고 도장을 들락거리던 카지와라를 따르는 무리가 꽤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작화담당인 츠노다 지로가 오컬트에 흥미를 가져 연재를 끝내고 싶어하게 된다. 사실 이미 그 시점에서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다 써먹은지라 만화는 점점 더 황당무계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영의는 이런 황당무계한 내용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다고 하는데 사실 허황된 내용 중에 반절은 최영의의 저서에서 차용해온 것이고 나머지 반절은 카지와라의 창작이었으니 최영의 측에서도 할 말은 없는 셈이다.

어쨌거나 츠노다의 강한 희망으로 츠노다는 강판한다. 그러나 당시 매거진은 내일의 죠로 연재가 끝나서 더 이상 히트작을 종료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작화를 카게마루 죠야로 교체하는 형태로 연재는 속행된다. 그러나 전기한 것처럼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이미 다 써먹었던 탓에 문하생이었던 아시하라 히데유키를 중심으로 작품을 계속한다. 당시 극진공수도는 해외진출을 주장하는 아시하라파와 보수적인 최영의파로 갈려있었을 뿐더러 카지와라가 아시하라편을 드니 최영의측에서는 이에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일은 그걸로 그치지 않고 최영의외 카지와라가 반씩 출자하여 만든 영화 지상최강의 가라테의 수익분배문제로 최영의와 카지와라는 결별하게 된다. 최영의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렸던 츠노다를 포섭해서 카지와라를 뺀 상태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갓핸드를 그리게 한다. 이에 분노한 카지와라는 편집부에 압력을 넣었고 당시 이미 인기가 하락했던 최영의를 소재로 한 작품자체도 사양세였기 때문에 갓핸드는 고작 9주만에 끝나게 된다. 카지와라는 계속해서 츠노다를 괴롭혔고 이에 츠노다는 자기작품에서 카지와라를 헐뜯는 말을 집어넣었다가 걸려서 카지와라에게 납치당해 사과장을 쓰는 사건(츠노다 지로 사과장 사건)이 벌어진다.

그 후 내일한 격투가 윌리 윌리엄스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매치에서 마침내 최영의가 문하생들과 카지와라를 습격할 거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났고 실제로 습격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카지와라는 최영의에게 사과를 요구하게 되고 최영의가 이것을 묵살하는 형태로 의형제까지 맺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난다.

그러나 카지와라가 병으로 쓰러지자 익명의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받은 카지와라는 금새 그것이 최영의가 보낸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여 잠정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 후 카지와라는 병때문에 은퇴하기로 하고 마지막이자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남자의 성좌에서 심혈을 기울여 최영의를 묘사했고 이것을 최영의도 마음에 들어하여 거의 화해가 이루어진 차에 카지와라가 병으로 죽어서 결국 직접적인 화해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4 격투기에 끼친 영향

앞서 말해 알아두자면 사실 일본에서는 이미 최영의 이상으로 신격화, 영웅화된 인물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미야모토 무사시(이천일류 창시), 카노 지고로(유도 창시), 마에다 미츠요(유도 전파, 브라질리안 주짓수), 우에시바 모리헤이(아이키도 창시)부터 시작해서 미후네 쿠조(유도 10단), 시오다 고조(아이키도 유파 양신관 창시), 와카키 다케마루(웨이트) 등 외에도 동시기에 살았던 기무라 마사히코(유도)나 역도산(프로레슬링 도입)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는 무도가들이 영웅화되었다. 단 일본 격투기의 양대산맥이었던 입식타격기 K-1종합격투기 PRIDE의 출발이 각각 극진공수도와 프로레슬링인 걸 생각해 보면 현대 격투기에만 한정할 경우 그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전 세계를 돌며 여러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제자 중에는 일회성 이벤트로 가르쳤긴 하지만 숀 코너리요르단 국왕 일가도 있고, 장관도 몇명 있었던 듯하다. 그 덕에 유명해진 것도 어느 정도는 있다.

다만, 최영의 무적전설에서 한가지 고려해야할 부분은 그가 세계를 돌며 강자들과 대결했던 당시에는 거의 무명인물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그가 대결을 할 수 있었던 상대도 당대의 진정한 최강자들인 복싱헤비급이나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아마추어 수준의 상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케인 벨라스케즈존 존스가 듣보잡 무술가가 도전한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싸워줄리가 없다. 게다가 최영의 본인이 밝힌 바로도 정말 강한 상대는 눈찌르기나 불알깨기.. 등의 치사한 수법으로 겨우겨우 이긴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예로 미국에서는 프로레슬러와 대결하다 도저히 뭐가 안통해서 치사하게 반칙써서 이겼다거나 10대 청소년에게 싸우다가 몇번 나가떨어지자 방심한 틈을 타 기습으로 이겼던적이 있다. 물론 이긴건 이긴거라지만 덕분에 열받은 관객들의 린치를 피해 도망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일설로는 4~5번 패배했다는 말이 있다. 카포에라를 쓰는 브라질 출신의 노동자와 봉술을 쓰는 요르단 국왕의 보디가드와 10대 브라질 유술 견습생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자서전을 통해 프로 복서나 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웠다고 하는데 대부분 기록에 없는 선수들이다. 프로레슬링은 그렇다 쳐도[16] 복싱의 경우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라도 19세기 선수들까지 연감으로 정리되어있는데 그가 싸웠다는 선수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로 이소룡도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찾아볼 수 있다(홍콩의 고등학교배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적이 있다.). 특유의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긴 했지만 과도한 찬양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빠가 까를 만든다!

최배달이 일생 최대의 라이벌이라하던 '톰 라이스'[17]의 경우 바람의 파이터의 작가 방학기가 무작정 월드클래스급의 복서출신으로 살인주먹으로 유명했다고 설명했지만 하와이, 뉴욕 등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프로 레슬러였으며, 그와 경기를 치른 바도 있는 루 테즈[18]는 톰 라이스가 풋볼선수 출신 선수였던 것은 맞지만, 그가 아마추어 레슬링이나 유도, 가라데 등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며 최영의와 톰 라이스가 겨루었다는 이야기 또한 금시초문이라 밝혔다. 물론 이 부분은 그가 몰랐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방학기의 만화에서는 역도산과 최영의 사이의 감정의 골이 생긴 계기도 역도산 본인이 패배했던 톰 라이스를 최영의가 이겼기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역도산과 톰 라이스는 총 16번이나 경기했으며 5승 5패 5무의 전적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고 있다. 잠시만 남은 하나는?? 이때의 프로레슬링은 지금처럼 WWE와 같은 메이저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각 지방단체들이 순회하며 흥행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역도산, 최영의, 엔도 고기치 등이 이 즈음에 미국에서 활동했으며,[19] 시대특성상 워크를 깨고 시멘트[20]로 돌입하는 상황은 잦았으나 만화 등에서 묘사되듯이 지하에서 목숨걸고 살인경기를 펼치는(…) 상황은 없었으며,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오늘날과 같이 워크가 존재했다. 다만, 초기 프로레슬링은 서커스단과 함께 순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함께 경기 중간중간 격파 시범 등의 기예를 선보였을 가능성은 있으며 비슷한 이야기를 자서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외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실전 레슬링 무도와 같은 개념은 동시대에 남아시아에서 만연하게 퍼져있었다.관련 얘기는 안토니오 이노키항목에 가면 있을것이다. 이곳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서구열강에게 찢기면서 반서구적인 감정과 더불어서 민족심의 고취를 목적으로 이런식의 맨몸격투에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다만 동아시아와 다른 점은 동아시아는 오랜시간동안 폐쇄적으로 이어져온 무술들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면 남아시아는 기존의 전통무술보다는 지금의 무규칙격투기와 프로레슬링 비슷한 포멧으로 경기장에서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누구 하나 쓰러질때까지 싸우는 것에 초첨이 맞춰진 곳이였다.

또한 태극권의 진노인은 아예 루머가 현실이 돼버린 케이스다. 최영의가 태극권의 고수가 있다는 소리에 대결을 하러 갔지만, 70세가 넘으신 분이라 대결은 못하고 일주일간 머물면서 서로의 무술을 보여주고 헤어진 케이스인데 그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흔히 무협소설의 은거 고수 VS 철부지 최영의의 대결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 딱히 그의 실력과 연관된 부분이 아닌 고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 넘버 3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조폭 조필의 무데뽀 정신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5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6 명언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상냥한 게 무도(武道)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없는 힘은 폭력이다.
강한 인간 보다는 약한 인간의 편, 다수 보다는 소수의 편이 되는게 나의 죽기 전까지의 신념입니다.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 - 극진의 이념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말을 조심하며, 마음을 넓게 하고, 효(孝)를 원점으로 타인을 이롭게 한다. - 극진의 정신

7 기타

1960년대에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불러서 "지금 한국에서는 태권도라는 한국 무술이 발전하고 있는데, 당신 무술이 들어오면 태권도가 망한다. 그러니 카라테로 소개하지 말고 태권도로 소개해 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대한뉴스 영상에는 '태권왕 귀국'이란 제목으로 최영의가 한국의 태권도가들을 가르치는 영상이 있었다. [23] 그래서 태권도로 소개가 가능했던 것. 자세한 건 태권도 항목 참조. 최영의는 위와 관련해서 "태권도가 정착하기 전에는 한국에 진출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이 에피소드는 일본의 격투가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있다. 때문에 한국계가 창시했고, 극진회관이나 극진관의 경우 지금도 한국계가 관장이지만,[24] 한국의 극진공수도 역사는 짧은 편이다. 한국에 극진공수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2002년경부터 김경훈 사범에 의해서다.[25] 단 그 이전에도 몇몇 도장에서 개인적으로 극진공수도를 가르친 바는 있다.

그 밖에도 ITF 태권도를 극진회관에 통합을 추진한적이 있는데(!) 이후 ITF 총재였던 최홍희씨가 캐나다로 망명하면서 한국에서 비판여론이 일자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

WTF 태권도 도복 디자인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수도복의 디자인을 바꿔야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을 했는데, 원래 오키나와 공수는 도복이 없이 편한 복장을 하고 수련을 했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유도 도장을 통해 수련되던 시기라서 유도 도복의 디자인을 차용해 만들어진게 카라테 도복이다. 때문에 공수도 수련 형태에 맞는 도복과 보호구를 개발할것을 주장했는데 수련용 보호구는 계속해서 개발이 되어졌으나 공수도 도복은 원래 형태 그대로다. 반면 태권도 도복은 80년대 초반까지 공수도와 같이 유도복 형태이다가 이후 지금처럼 옷깃이 열리지 않는 티셔츠 형태로 바뀐다.

어린시절부터 이런저런 무술에 관심을 두었으며 싸움도 꽤나 자주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힘든 수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 동양인 중에선 나오기 힘든 근육량과 체형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공수도를 배우기 전에도 맨손으로 싸워서 한번에 7명까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고 하니(…) 게다가 스스로도 무도 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할만큼 연습 매니아였다.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이나 방법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근력운동을 통해 근력과 파워를 강하게 만드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산속에서 굶주리며 혼자 수련을 한 에피소드는 만화에서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닭꼬치를 몇십개씩 먹어가면서 영양보충과 근력 단련에 힘썼다고 한다. 심지어는 마을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추스리려고 눈썹을 밀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최영의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무도의 원류를 따져보면 결국은 투쟁의 기술이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는 무도는 과 다른 게 없다'이다. 또한 내공이나 의 존재같이 애매한 추상적인 개념은 죄다 집어 치우고 격투기 기술을 역학적, 합리적으로 체계화 시키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공수도 서적들도 다수 발간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서양에서도 합리적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그냥 인자하고 건장한 중년, 노년 아저씨로 보이지만 실제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진다고 전해진다.

싸움질 좀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눈빛으로 기선제압을 하면 쌈질에서 상당히 우세를 점한다는걸 사실을 보면 눈빛조차도 그의 강함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강력 이미지인 그가 어딘가 아팠을 거라곤 상상조차 안 되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세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예전에 스페인에서 투우 소와 싸울 때 치여서 무릎도 안 좋으셨고, 단련을 너무 혹독하게 하셔서 팔꿈치 관절도 안 좋으셨고, 주먹도 맨날 어머니께서 주물러 주셨고...'라고 했다.

의외일 수도 있지만 높은 수준의 격투가들조차도 격한 시합과 사고로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다. 태권도 선수들의 무릎, 유도와 레슬링 선수들의 손가락 골절, 무에타이 선수들의 갈빗대와 손 골절 등이 대표적 사례이고 이런 모습 덕분에 큰아들은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2010년 2월 13일 방송된 SBS 스페셜에서 의사면서도 틈틈히 격투기 수련을 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같이 연습을 한 동생은 셋째 아들인 최광화.

90년대 초반 '주병진쇼'에 출연했을 때도 손가락 관절 문제 때문에 격파 수련은 안 한다고 술회해서 바람의 파이터 환상이 깨진 사람들이 당시 하이텔 등에서 성토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그의 세아들 또한 학창시절엔 주먹에 일가견이 있어 다들 큰싸움으로 한번 이상씩은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큰아들인 최광범의 후배에게 들은 말로는 최광범씨가 고등학생때 1살 위의 복학생 포함 3명을 상대로 싸움을 했는데 압도적으로 세명을 때려눕혀 전설이 되었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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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70년대에 가라테 바보 일대의 영화판(주연은 치바 신이치)이나 기록영화인 지상최강의 가라테 등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 일본영화는 금지였지만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던 듯 하다.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 국적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중국적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즉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이고 일본에서는 일본인인 기묘한 형태). 신격호와 마찬가지로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의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인[26] 1964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당시 일본과 대사급 외교 관계가 없었던 제3공화국 체제에서는 그의 일본 국적 취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한국 국적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85년까지 이중국적을 허용했으므로 일본 내에서도 그의 한국 국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중국적이지만 이중국적이라 말할 수 없고, 최영의는 한국인이고 오야마 마스타츠는 일본인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경우처럼 중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의의 세 아들은 한국 호적에 올라와 있으며 한국인 부인과의 정식 결혼에서 태어났는데, 장남인 최광범씨가 최영의가 52살에 본 아들이다. 일본 호적에서는 치야코(智弥子) 사이에 3명의 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경우 중혼죄가 있는데, 일본 위키에 따르면 일본 법원에서 한국의 호적과 일본의 호적이 생일이 다르므로 동일인물이 아니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였으면 불가능한 상황. 한국 프로필에는 생일이 1922년 6월 4일, 일본 프로필에는 1923년 7월 27일로 기재되어 있다.

  1. 자신의 강함을 몸으로 실천하고 증명하여 신용을 얻은 오야마가 했던 말이자 극진의 이념. 다만 이건 증명이 아닌 철학적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倍達이라는 이름 자체가 귀화시에 개명을 할 때 명명한 이름이므로 최씨 성에 최배달이라고 붙여서 사용한 적은 없다. 애시당초 '배달'이라는 발음의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다. 고우영 화백의 대야망에서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면서 실제로 사용된 적 없는 최+배달 이라는 조합이 바람의 파이터 등 다른 작품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람의 파이터 자체가 최영의의 영웅화를 위해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상당히 많은만큼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최배달은 최영의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3. 현재는 일본 항공 고등학교.
  4. 이 내용은 최배달의 저작들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내용도 책마다 모순이다. 징용이었다, 학도병이었다, 지원했다로 말이 엇갈리고 실제로는 치바항공대에서는 신풍공격대가 출격한 일이 없다. 그에 대해 철저하게 증언을 바탕으로 과거사를 재구성한 고지마 가즈시(小島一志)와 츠카모토 요시코(塚本佳子)의 조사에 의하면, 그는 치바현 다테야마에 있는 건설현장 함바의 노동자로, 특공대원이 아니라 징용공이었다고 한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5. 배우였던 후지마키 준(藤巻潤, 전격전대 체인지맨이부키 장관 역.)의 누나로 2006년 사망.
  6. 타쿠쇼쿠 대학과 와세다 대학(전쟁 징집으로 중퇴).
  7. 사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대학등 학교에서 유도를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8. 최영의의 자서전/ 회고록 등에 따르면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로 다혈질 적 성격에 최영의 밑에서 배우기 전에도 흠좀무할 정도로 싸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제자 중에 비슷한 타입인 아시하라 히데유키 등이 있는 것을 볼때 제자복을 이런 쪽으로 타고난 듯.
  9. 나열된 단련들을 모두 차력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차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5번 정도나 차력과 연관 지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그냥 트레이닝이다. 달리기, 벤치프레스와 같은 웨이트, 턱걸이와 같은 기계체조류의 일반적인 트레이닝은 다른 무술에서도 중요시 여기는 부분.
  10. 다만 저 5번이 단지 차력이라고만 볼수는 없는 것이 4번과 연관지어보자면 주먹으로 때리는 무도가에게 필요한 악력과 배근력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1. 하지만 이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것이 최영의의 저 말은 11초 대를 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11초 대 쯤 끊으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이란 쪽에 가깝다. 그리고 일본 기준은 아니지만 미식 축구 쪽으로 가보면 근육으로 똘똘 뭉친 덩치 중에서도 11초대 이정도 해먹는 굇수들은 대학 리그 수준에도 널리고 널렸다. 물론 그들이 미국 내 쳬육 계열에서도 신체 스펙만으로는 최상위급에 드는 괴물들이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게다가 저 11초라는 기준 역시 확실치가 못한데 애초에 그는 프로 육상선수가 아니라 무도계 인물이었고 그의 제자들도 죄다 그 계통이었다. 게다가 최영의의 신체적 전성기는 2차대전 종전시기부터 잘해봐야 30대가 기우는 1950년대 후반 정도다. 그 시절에 그 사람들이 제대로 된 측정 장비를 갖추거나 측정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애초에 100m를 뛰었다는게 실제로 공인된 100m경기장을 뛰었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요이 땅! 할때 스탑워치 버튼 누르고 선 밟을 때쯤 다시 눌러봤더니 11초 몇 찍었더라"라는 목격자들의 실제 증언이 다수 있더라도 그게 과연 신빙성 있는 측정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12. 그때 그 시절 스페인에서 그것도 국기인 투우판에서 맨손으로 소 잡겠다고 들어갔는데 만약 거기서도 홍보영화에서와 같은 연출 상황을 보였다면, 지금도 유럽에서는 피 뜨겁기로 유명한 스페인 사람들이 그 꼴을 가만 놔뒀을리가 없다.
  13. 다케마루의 키가 162cm였다한다. 최영의가 173cm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반뼘정도 작은셈.
  14.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모델이 최영의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류의 모델은 최영의가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극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에노 요시지다.
  15. 태평양전쟁에 병사로 징집된 시절에 미군을 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비행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들'이라며 경례하는 장면이 1권에 있었다. 그 때문에 1권보고 불쏘시개 취급한 사람도 꽤나 많다.
  16. 프로레슬링 또한 NWA 산하의 어지간한 지방단체의 경기들은 대부분 기록되어 있으며, 최배달의 최대의 라이벌이라던 톰 라이스는 물론 당시 최영의와 함께 미국에서 활동한 엔도 고키치의 경력 또한 상세히 남아있다. 톰 라이스의 경우 역도산과 경기한 기록은 전부 남아있으나 최영의와 경기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7. 1914년 몬타나 출신, 1996년에 사망했으며, 루 테즈, 보보 브라질을 비롯한 당대의 레슬러들과 겨룬 선수기는 하나 일방적으로 열세여서 무조건 3류 레슬러라 폄하받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1류 프로레슬러는 절대 아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실력이 부족했다 말해선 안되겠지만. 기록이 전부는 아니니까.
  18. '철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실력파 레슬러로, STF, 파워 밤, 루 테즈 프레스 등 여러 기술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9. 이 당시 일본에서 시장 초기개척을 위해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운동선수들이 다수 있었으며, 최영의 또한 이 붐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크다.
  20. 프로레슬링의 정해진 각본을 깨고 선수들이 실전으로 싸우는 상황. 현대 WWE 등을 통해 체계화되기 이전의 프로레슬링에선 꽤 잦은 일이었으며 덕분에 당시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실전 강자들이 탑 프로레슬러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21. 단 패자부활전 당시 스기하라의 차력과 공명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최배달의 자아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
  22. 공수도가 아니라 태권도를 사용하긴 하지만 최배달과 태권도의 관계나, 무엇보다 최달달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면 (...)
  23. 사실 애당초 태권도 자체가 쇼토칸 가라테를 기반으로 재창작된 무술이긴 하지만...
  24. 극진회관 관장은 마쓰이 쇼케이, 한국명 문장규. 극진관 관장은 로야마 하쓰오, 한국명 노초웅.
  25. 단 김경훈 사범은 불미스런 일로 인하여 후에 극진회관에서부터 제명당했다.
  26. 한일국교정상화는 1965년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