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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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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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홍병기황싱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위정척사파
柳麟錫 1842. 1. 27~191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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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의병장이자 유학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위정척사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인물. 어찌보면 최익현의 열화판이라고도 볼 수있다. 굳이 열화판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후술할 내용 참조.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호는 의암(毅庵)이다.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출신.

제천에서 나온 의병대장으로도 유명하며, 실제로 제천시에서 한방도시와 함께 홍보용으로 많이 내거는 인물이다.

2 생애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화서 이항로와 교분을 맺고 있던터라 선생은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심취한다.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과 함께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3 의병 운동의 전개

1893년에 제천 장담으로 이사했으며, 이곳이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이후 을미사변이 터지고 단발령까지 겹치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유인석 역시 이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1895년 5월 2,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의병항쟁의 준비단계를 밟는다.

유인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후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였으나, 반격이 지속되자 유인석은 이들을 영월로 모두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의병들의 간청으로 의병장에 오르게 된다.

이후 충주성을 점령하고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였으며, 이후 관군의 반격에 지쳐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퇴각했다.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고 김홍집 내각이 축출되자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전언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부가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또한 망국 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고집을 부렸다.

이후 제천전투에서 크게 패하고는 제천성을 상실했다. 이후 의병들을 이끌고 소규모 전투를 행하면서 서북으로 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관군의 압박이 이어졌으며, 이후 서간도로 망명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일제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도 좋은 이유였지만, 동시에 유인석은 청의 군사적 원조도 기대하고 있었다.

서간도에서 무장세력은 불법인지라 그곳 관리는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며, 이에 유인석은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의병진을 해산한다.

4 이후의 행보

1897년 3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곧 다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다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황해도평안도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향음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서 존화양이 의식은 계속 고취시켰다.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이 맺어지자 1908년 7월에 연해주로 망명을 떠났으며,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경술국치에는 이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3년에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우주문답을 저술했으며, 1914년에는 서간도로 돌아갔다가 1915년에 관전현의 방취구(芳翠溝)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 유학자로서의 모습

유인석의 사상과 지향점은 전형적인 구시대의 유학자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 그의 저서 우주문답은 그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의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은 중국을 종주로 하며 이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유인석은 아주 분명히 주장한다.

'중국'은 나라가 한가운데 있어서 그 행하는 바가 상달인데, 상달이란 도리에 통달하는 것이다. '외국'은 치우쳐 변두리에 있는 나라이며 그 행하는 바는 하달인데 하달이란 형기를 이루는 것이다. 상달은 중국의 장기요, 하달은 외국의 장기이다. 이것이 서로 달라지게 된것은 풍기와 품격이 서로 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국은 역사 이래 일찍 문명을 이루었으며 성군이 나왔고 성현과 철인이 이어져 윤리, 예악, 제도, 문물과 도덕 경술이 빛났기 때문에 당연히 상달은 중국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중국의 풍토이며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문명하다는 곳이라는 것이다. 반면 외국은 거칠고 치우친 곳에 있으며 문명이 늦게 시작했고, 도리도 밝지 못하며 형기의 사욕을 추구하여 좋은 음식, 사치한 옷, 웅장한 집, 예리한 무기, 기이한 재주와 교묘한 술책 등으로 우위를 다투기 때문에 하달의 외국이 된다. 또한 공리에만 급하며 욕심만 많아서 천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유인석이 직접 우주문답에 저술한 중국과 외국을 보는 그의 기본 시각이었다.

유인석은 중국이 실하면 외국이 복종하고, 중국이 허하면 외국이 침범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하달'이 갈수록 심해져서 하늘에 전기시설 놓고 땅에는 철로를 만들고 배와 차로 사람을 해치고 천지인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난국'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돌파한다는 계책이라는 것으로 "다른 방도가 없다.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중화질서와 도덕의 회복이다

그가 우주문답에 써놓은 마땅한 세계 질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중국을 '제왕'이 다스리는 것은 천지개벽 이래 세워진 대일통의 규범이며, 중국이 외국을 '통할'하고 일국이 만국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올바른 이치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라는 것이 하늘이 낙서(洛書)를 내려주어 구주(九疇)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성들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것은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이며,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법을 의논하는 것은 도를 없애고 기강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써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국다운 것은 황제로서 대통을 세우고 공자로서 '종교'를 삼으며 오륜을 지키고 전통적인 의발을 준용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빼놓지 않았다.

유인석은 정치에서 두 가지를 가장 중요시 했는데, 법치를 하지 말고 '선정'을 베풀라는 것이었으며 '정전(井田)'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나라를 위해 도(道), 덕(德), 학(學), 정(政), 형(形), 문(文), 무(武)를 강조했다. 그는 삼강오상의 도를 근본으로 하여 육경과 사서를 강학하여 도덕을 이룰 수 있다고 했고 이로써 옛날의 이상적 통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면 나머지 일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했다. 유인석은 복고를 통해 강국이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삼대의 학제를 회복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을 들었다.

6 평가

유인석은 자신의 최고 신념이었던 위정척사까지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 1910년대 이르러서도 결코 봉건적 복고 세계관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만이 정의이고 반드시 다시 구현해야 할 사회정의이자,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위정척사의 대표격인 최익현보다도 어찌보면 극단적인 복고를 외쳤던 인물이었다. 결국 격동의 시대에서 뒤쳐지고 자신의 길만을 고집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인석은 사실 의병 활동 당시 평민 출신 지휘대장이기도 했던 김백선을 '양반에게 항명했다'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병크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는 조금 더 복잡한 사건이었는데, 김백선이 항명한 안승우는 정작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양반 가문 출신의 의병장이었으며, 안승우 본인 역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이었다. 김백선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원군을 안 보냈다며 칼을 빼들고 항명하다가 군기 문란죄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일본군에게 패퇴할 당시 김백선은 요청했지만 안승우는 원군을 보낼 상황이 못되었고, 대신 다른 의병장들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보내겠다고 해놓고 결국 보내지 못했거나, 기껏 보낸 원군이 정작 전투를 기피하고 퇴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대거 잃고 분노한 김백선은 알려진 대로 본영으로 돌아가 안승우에게 칼을 빼들며 분노했고, 진작부터 김백선을 곱지 않게 보던[1] 유인석은 군율 위반으로 김백선을 처형했다.

또한 나라 구하겠다고 모여든 의병들 중에서 동학도를 싸그리 골라내서 반역도라고 처형한 것 역시 그 시대의 유림 인식의 보편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7 관련 항목

  1. 당시 유인석 진영에서는 김백선이 자기가 이끌던 포수들과 함께 독립을 한다느니, 심지어 김백선이 윗선을 다 엎어버리고 자기가 대장이 되려 한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