젝스키스

(젝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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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및 프로듀서
양현석지누션원타임빅뱅싸이에픽하이
이하이악동뮤지션WINNERiKON젝스키스블랙핑크
CL박산다라---
배우
차승원강동원최지우김희애장현성정혜영
구혜선손호준유인나남주혁김희정이종석
이성경갈소원임예진김새론서정연고준희
기타
강승현지이수케이티 김안영미유병재오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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젝스키스
블랙키스화이트키스
은지원이재진김재덕강성훈고지용장수원
젝스키스
그룹명젝스키스
Sechs Kies[1] [2][3]
멤버은지원, 이재진, 김재덕, 강성훈, 고지용[4], 장수원
활동기간1997년 4월 15일 ~ 2000년 5월 20일[5]
2016년 4월 14일[6] ~
소속사대성기획 (現 DSP미디어) (1997~2000)
YG엔터테인먼트 (2016~)[7]
팬덤옐로우키스
Yellow Kies[8]
로고200px [9][10]
링크공식 사이트
공식 팬클럽
공식 페이스북
공식 유튜브
V라이브
왼쪽부터 이재진, 은지원, 강성훈, 김재덕, 장수원
서울가요대상 대상
H.O.T.
We are the future
(1997)
젝스키스, H.O.T.
커플, 빛
(1998)
조성모, 핑클
For your soul, 영원한 사랑
(1999)

Sechs Kies[11] 여섯 개의 수정

1 소개

H.O.T.에게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1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12]이자 20세기의 전설로 남았다가,[13] 16년이 지난 21세기에 화려하게 컴백한 그룹.[14]
팬덤 문화의 시초[15]이면서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아이돌 그룹.

1997년 대성기획(현 DSP미디어) 소속으로 데뷔&활동하였으며 이후 2016년 YG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활동을 재개한 6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활동 당시 H.O.T.와 함께 가요계 아이돌 돌풍의 쌍두마차였다. 공식색은 노랑이다.

그룹명 '젝스키스'는 독일어로 여섯 개의 수정[16]이라는 뜻으로, 팀 내에서 멤버 세 명씩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로 구분했지만 활동을 거듭하면서 이 컨셉은 초창기 컨셉으로 남는다. 젝스키스의 약칭인 '젝키'로도 주로 불리곤 한다. 공식 색은 노란색이며 팬클럽은 옐로우키스(옐키)이다. 1997년 4월 15일에 데뷔해 2000년 5월 20일 공식 해체했고, 2016년 무한도전 토토가 2를 통해 완전히 재결합하게 된다.[17] 이후 고지용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이 YG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18]

전 소속사인 DSP미디어는 젝스키스와 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지금까지 젝스키스 상표권을 신청한 바도 없다.[19] YG엔터테인먼트와는 계약서를 작성했고 상표권 또한 YG 측에서 정식으로 등록해 젝스키스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젝스키스를 검색하면 알 수 있다

2 평가

2.1 인기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1세대 아이돌로, 보이그룹 H.O.T.와 양강구도의 라이벌 구도를 이루기도 했다. 다만 H.O.T.에 비해 인기나 팬덤 규모가 낮게 평가되고 활동 기간이 짧아 다소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지만, 젝스키스의 활동 기간까지 (1998년~2000년 초) 같은 1세대 아이돌인 신화god보다 훨씬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20] 해체 또한 인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활동 기간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줄곧 정상권에 있었고, 다수의 음악 방송 1위를 비롯해 각종 가요 시상식 본상은 물론 98년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최정상급 아이돌이었다. 데뷔 초 10대 여성 팬덤이 상당했으며 활동할수록 젊은 여성 층과 남성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매년 단독 콘서트를 개최해 매진을 기록하였으며 2000년 해체 발표 후 드림콘서트(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고별 무대에 약 5만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21]음악 외적인 예능, 연기, 뮤지컬 등의 활동이 미비했던 당시에도 데뷔 초부터 고정 예능에 출연했고, 멤버 전원이 라디오 DJ를 하였으며, 영화, 뮤지컬에도 출연했고 젝키의 이름을 붙인 상품도 출시한 바 있다.

2016년 재결합 후 상당한 규모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 활동 당시에 보유했던 기존의 팬덤[22]이 여전히 건재함과 동시에 재결합 소식 이후 새로운 팬덤이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이할 점은 젝스키스가 오랜 공백을 딛고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어린 팬층[23]을 적지않은 비율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인데, 때문에 팬들의 연령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편이며 아이돌 팬덤 중에서도 독특한 케이스.[24]
[1]
[2]

3년이란 짧은 활동 후 16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떠나지않은 수많은 팬들과 지금의 세대가 아닌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로운 팬층까지 유입시킬 수 있는 저력있는 그룹으로 설명 될 수있다.

2.2 외모

1세대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멤버들의 외모가 매우 출중한 편으로 멤버 모두가 자연 미남이다. 90년대 활동당시에는 카리스마 넘치고 남자다운 은지원, 뚜렷한 이목구비의 이재진, 김재덕과 곱상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강성훈, 고지용, 장수원의 조화를 잘 이루었다. 특히 고지용[25]의 외모는 두고두고 회자되었으며, 다른 멤버들도 각기 다른 매력의 외모로 사랑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외모구멍이 없었던 셈. 재결합 이후 16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않은 외모[26]와 몸매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살인미소'의 원조였던 강성훈은 냉동인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변치않은 외모를 보여주었고, 특히 이재진은 샤이니 태민이나 엑소 카이 등 현재의 남자 아이돌들과 비교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으며[27] 김재덕은 귀염성 있는 미모와 동안으로 흔히 말하는 덕후 몰이상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는 현재 어린 소녀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 이유이기도 한데, 지난 토토가1에 비교해서 어린 시청자들이 90년대 가수를 보고 팬이 되어버리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2.3 음악

H.O.T와 달리[28] 대중적인 컨셉과 노래로 팬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3년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정규앨범만 5장으로 히트곡 수가 상당한데, 타이틀곡만 대중들에게 홍보하고 수록곡은 팬들만 듣는 요즘의 아이돌 앨범과는 달리, 각 앨범당 수록곡까지 2~3곡은 히트를 쳤다. 심지어 3집의 경우, H.O.T.를 필두로 한 아이돌 가수 중 최초로 한 앨범에서 3곡이 공중파 1위를 차지하는 신기록을 세운다. 대중성 끝판왕 아이돌 대체로 타이틀 곡으로 파워풀하고 카리스마 있는 댄스곡을 선보이며, 후속 활동으로 발라드와 부드러운 템포의 곡으로 활동으로 조화를 이루며 여러 색깔을 보여주었다. 립싱크가 많았던 활동 당시에도 격한 안무속에서도 라이브 무대가 많았으며 무리없이 소화하기도 했다. 그 중 폼생폼사기사도, 로드 파이터, 커플, Com' Back 등은 시간이 지나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젝스키스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타이틀 곡으로 활동하지 않은 앨범 내 수록곡 중에도 명곡이 많은데, 특히 기억해줄래, 너를 보내며, 예감과 같은 미디움 템포의 발라드들이 많이 꼽힌다. 특히 당시 오락실을 휩쓸던 펌프 음악뫼비우스의 띠가 대표적으로 사용되서 큰 인기를 모아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하다.

3 멤버

블랙 키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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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원
1978년 6월 8일
리더, 메인래퍼, 서브보컬
이재진
1979년 7월 13일
서브래퍼, 리드댄서, 서브보컬
김재덕
1979년 8월 7일
리드래퍼, 메인댄서
화이트 키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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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훈
1980년 2월 22일
메인보컬
고지용
1980년 7월 1일
서브보컬, 서브래퍼
장수원
1980년 7월 16일
서브보컬

4 결성 배경

은지원과 강성훈이 제일 먼저 캐스팅되었고, 그 뒤를 이어 장수원, 이재진, 김재덕, 마지막으로 고지용이 젝스키스에 들어왔다.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를 K-pop 최초의 유닛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활동도 허용이 안되고 완전체로만 활동해야 했던 당시 분위기 상 실제 유닛으로 활동한 적은 없다. [31] 활동목적이 아닌, 컨셉과 파트를 둘로 나눈 것으로, 실제로 데뷔 초엔 블랙 키스는 검거나 짙은 옷, 화이트 키스는 희거나 밝은 옷을 입고 나오곤 했으나 이후엔 이마저도 별 구분 없이 멤버 전원이 옷을 통일하게 되었다.

블랙키스와 화이트키스를 나누게 된 비화가 2016년 9월 10일 콘서트 Yellow Note에서 밝혀졌는데, 멤버들 중 유일하게 이재진만이 알고 있었다. 일본 그룹 V6가 멤버들끼리 나이차가 심해서 연령대를 기준으로 20th Century(토니센)와 Coming Century(카미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화보 찍을때 멤버가 6명이라 블랙 키스는 아래, 화이트 키스는 위에 세웠고 은지원과 강성훈이 각 센터를 맡는 편이었는데, 딱히 자리가 정해졌던게 아니라 같은 앨범활동시기때 찍은 사진들도 멤버들 위치가 제각각이다.

당시 은지원과 강성훈은 하와이에서 유학 중이었고 은지원은 클럽 DJ[32]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호연 사장이 은경표 PD(젝스키스 이름을 지어준 그 PD 맞다)와 같이 하와이에 놀러왔었는데, 은지원이 일하고 있던 클럽 사장과 이호연이 친분이 있었다.[33] 이호연은 클럽 사장에게 남성 듀오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하자 사장은 은지원과 강성훈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호연은 클럽에서 즉석 오디션을 본 뒤[34] 공식적으로 두 사람에게 가수 활동을 제안하였다. 제안을 승낙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둘은 듀엣 데뷔를 예정으로 대성기획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H.O.T.가 캔디로 대박이 터진 것을 목격한 사장이 듀엣에서 6인조 아이돌로 노선을 변경하고 급히 추가 멤버 모집을 시작하였다.
장수원은 본래 친구 따라 오디션에 따라갔으나 정작 친구는 떨어지고 본인이 합격한 경우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아이돌 가수들의 합류 과정과 비슷하지만 정말 특이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수원다운 것은, 오디션장에서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장수원이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로봇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학창시절에는 부산에서 춤으로 유명했고 당시에 이주노의 소속사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이재진과 김재덕을 스카우트해왔다. 당시 사장이 이주노 사무실에 찾아와서 둘을 보고는 김재덕만 뽑아갔지만, 이후 이재진도 합류하게 된다.[35]
마지막으로 학교 얼짱으로 유명했던 고지용이 강성훈의 추천으로 합류했다.[36]

2016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 밝힌 바에 따르면, 사실 이 멤버 결성에는 멤버들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초기 멤버인 은지원과 강성훈을 제외한 모든 멤버 구성은 강성훈이 OK 했어야 했다고 한다. 듀엣에서 6인조로의 갑작스런 노선 변경에 강성훈이 '그럼 나 안 하겠다'고 반발하자, 당시 사장이 "네가 OK한 사람으로 뽑겠다"며 설득했다.[37] 그래서 강성훈이 오디션장에서 이호연 사장 옆에 앉아 이야기하며 멤버들을 뽑았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한 강성훈의 컴백 자서전 부분은 각주와 같다.[38]
강성훈이 라디오스타에서 멤버별로 밝힌 일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장수원은 오디션 장에서 할 줄 아는게 없다고 말하는 순수함이 마음에 들어, 강성훈이 사장한테 귓속말로 "쟤 픽스 하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덕은 워낙 춤을 잘 추니 사장이 처음부터 OK 했다. 근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은 김재덕 얼굴을 보고 뽑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강성훈이 해명하길, 얼굴이 아니라 사투리가 너무 쎄서 오해했다고 밝혔다.
이재진의 경우, 강성훈 생각에 김재덕이 각기춤을 잘 추는 반면 이재진은 웨이브를 잘 춰서 조화가 맞아 보였다고 한다. ( 이호연이 6명 멤버 중 퇴짜를 놓았던 인물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 했다고 한다. 이 점을 보면 이재진의 영입은 강성훈의 역할이 큰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기존 인터뷰 등에서 밝혔던 바에 따르면, 이재진의 영입은 은지원과 김재덕이 사장과 매니저를 설득한 덕분이다. 99년도 출연한 서세원쇼에서나영상 14분부터, 컴백 자서전의 김재덕 부분이 그러하다.[39] 참고로 이호연 사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낸 유일한 멤버가 이재진[40]인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
고지용은 강성훈과 초등학교때 부터 친구인데, 강성훈의 추천으로 젝키에 합류하게 됐다. (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호연이 처음 얼굴 보자마자 바로 OK 해서 멤버로 영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날 강성훈의 고지용에 대한 발언은 부정확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지용이 강성훈한테 가수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했다'라는 것은 상당부분 전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편집상의 문제라고 보인다. 고지용은 자서전에서나 인터뷰에서나 늘상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언급해왔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에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즉, 강성훈의 말에서 '고지용이 가수를 하고 싶어했다' 라는 것은 먼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자기 의견을 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강성훈의 제안을 거절하고 난 뒤 설득 끝에 승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
DSP가 젝키 활동 중에 가장 잘 한 게 멤버 구성이었는데 그것조차 강성훈의 역할이 컸다 다만 고지용을 제외하고는 저런 인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DSP 인맥이긴 하다[41][42]

5 음반 및 활동

젝스키스/음반 및 활동 문서 참고.

6 해체

젝스키스/해체 문서 참고.

2000년 5월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해체를 발표했다. 당시엔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팬들은 이호연이 강제로 찢어놔서 해체당한 것이라 믿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내용을 인터넷에 퍼뜨리고 있다. 하지만 멤버들이 직접 밝힌 바 등을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하면서 해체에 대해 수차례 말했는데, 그것들이 전부 위 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7 정산 문제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 참고.

당시 젝스키스의 인기에 비해 멤버들이 적게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달에 100만원 벌었다거나, 젝키로 소속사가 번 돈이 수백억이라는 등의 과장된 허위 사실도 퍼져있다. 훗날 멤버들이 직접 밝힌 바와 90년대 당시 소속사의 수입 규모에 대해서 위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8 DSP 관련 루머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고.

2016년 무한도전을 통해 젝스키스가 재결합한 이후, 각종 사이트에 '우리 젝스키스 멤버들이 과거에 이런 일을 당했다'며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맞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상당부분 허위 사실과 과장이 섞여 있어 문제다. 심지어 그 내용을 영어로 작성해 해외 팬들한테 까지도 퍼뜨리고 있는데, 이 역시 허위인 부분이 많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가 위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9 해체 이후

2000년 공식 해체 이후부터, 2016년 재결합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기술합니다.

9.1 젝스키스

2000년 7월 31일, O2MUSIC이라는 음악사이트를 통해 팬송 "Thanks"의 mp3파일과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Thanks" 뮤직비디오 Youtube 링크

2001년 5월 25일, 강성훈의 솔로 1집 앨범 <비상(飛翔)>의 수록곡 "지난 1년 동안은..."에 이재진, 김재덕, 강성훈, 고지용, 장수원 다섯 멤버가 참여했다. 해체 후 1년 간의 심경을 담은 노래로, 김재덕이 작사, 장수원이 작곡하였다.

2003년 4월 18일, 이재진의 솔로 2집 앨범 <002 J2>의 수록곡 "우리(遇離)-만남과 떠남"에 이재진, 김재덕, 강성훈, 장수원 네 멤버가 참여했다. "지난 1년 동안은..."과 마찬가지로 젝스키스 팬들에게 바치는 곡이다.

2013년 12월 14일, 전 소속사인 DSP의 패밀리 콘서트 "DSP 페스티벌"에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 세 멤버가 젝스키스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9.2 은지원

해체 이후 가장 성공적인 솔로 활동, 예능을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G-Production이라는 자회사를 세워 음반을 냈으나 대중적으로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집은 댄스 위주, 2집부터는 자신이 꿈꾸던 힙합 쪽으로 본격적인 전환을 한다. 3집부터 드렁큰 타이거와 손잡고 활동하여 타이틀 곡 '만취 in melody'를 상당히 성공시킨다. 이후 1박 2일에서 은초딩 캐릭터로 망가지며 자리매김하여 신서유기 등 예능에서도 큰 인기몰이를하였고, 소속사를 차려 길미, 타이푼 등과 함께 힙합 트리오 클로버로 활동하며 가요계 활동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고, 2016년 4월 젝스키스 재결합과 함께 아이돌은각하로 돌아왔다. 그런데 130820일자 화신 방송을 보면, 은지원은 "그룹 젝스키스로 활동할 때는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팀 해체 후 난 지금까지 소속사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아는 형들과 함께 회사를 꾸렸는데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한 경우도 많다. 받을 것 못 받고 틀어지고 하면서 지낸 세월이 14년이다"라고 밝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9.3 김재덕, 장수원

두 멤버는 J-Walk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잔잔한 발라드와 미디움 템포 등의 장르를 내세워 인기몰이를 했다. 특유의 중저음 톤으로 젝키 때보다 훨씬 발전한 장수원[43]의 보컬이 주력이 된 그룹이다. 2004년 후세대 아이돌이자 한때 회사 후배였던 클릭비의 멤버들과 함께 JNC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군 입대 전 마지막 음반 발매 이후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가 2013년 9월부터 활동을 재개하였다. 장수원은 사랑과 전쟁 2의 아이돌 특집 3편으로 복귀하였고 미생물에도 출연하며 호세최악의 발연기돌 호우트리오를 뛰어넘은 발연기의 전설이 되었다(...). 오죽하면 방영일과 그 다음날 토요일까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달성했을까(...).

현재 J-Walk로서 가수 활동은 주춤한 상태이나 장수원로봇 연기로 불리는 특유의 발연기를 아예 컨셉으로 잡고 예능 및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김재덕은 군복무를 같이한 것을 인연으로 함께 동거까지 하게 된 토니안이 운영하는 티엔네이션엔터테인먼트에서 음반 제작부서의 프로듀서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9.4 강성훈

발라드 가수로 선회하여 4장의 음반을 내는 등 2004년까지 솔로 활동을 지속했는데, 2002년 2집의 "My Girl", 2003년 3집의 "아껴둔 이야기" 등이 사랑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뒤 2014년 4월, 젝스키스 데뷔 17주년 기념 "커플" 리메이크 음원을 발표했다. 공백기 동안 병역 비리에 연루돼 재입대 처분을 받고 사기 혐의로 피소되는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유흥비에 쓰려고 지인들에게 11억 원을 사취했다는 의혹을 받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는데, 속사정을 알고 나면 오히려 강성훈이 억울한 면이 크다. 관련 기사. 2009년 여름 한류사업을 추진했는데, 사업자금을 투자하기로 해준 창업투자회사가 총 12억 원을 받아먹고 잠적해버렸다. 이미 사업에 10억 원 상당의 돈이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사업을 차질 없이 진행해야 했고, 이를 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사채를 쓰면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물론 사채를 쓴 것은 본인의 불찰이나, 터무니없는 고금리가 매겨진 사업자금을 다 변제하지 못해 사채업자(...)로부터 사기 혐의를 받은 것이 마치 스포츠카 때문에 지인들의 돈을 갈취한 것처럼 과장되어 여러모로 안타까움이 크다. 사건 때문에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 현재는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활동 재개를 위해 준비 중이다. 이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사기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다행히 4월에 젝스키스 컴백 및 무한도전 측의 요청으로 MBC 출연 금지가 해제되어 무한도전에 출연할 수 있었다. 또한 복면가왕에도 출연했다.

9.5 이재진

해체 이후 DOUBLE J(1집), Go back(2집), 충전(3집)등 주로 댄스곡으로 활동했다. 2005년 솔로 3집을 끝으로 방위산업체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일을 맡아 착실히 복무하였지만 2007년, 싸이를 비롯해 병역 비리 사건이 크게 터지면서 이재진도 서류상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재입대 처분이 내려져 병역 비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나 이재진의 경우 근무에 소홀하였거나 빽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부에서 지시한 업무를 하였을 뿐이므로 억울할 수밖에 없다. 2008년 8월에 현역으로 재입대하였으나 재입대 직전 홀어머니를 잃으며 우울증을 앓는 등 건강에 큰 이상이 생겼고, 급기야 2009년 3월에는 치료를 위한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아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군 복귀 후 수색대로 보직을 변경해 성실히 복무하였고, 전역한 날의 모습은 몸도 마음도 전보다 많이 건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8월 전역 이후 일본 유학을 위하여 일본어를 공부해왔다고 하며, 자신의 원래 전공인 그림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을 tvN 단독 취재에서 밝히기도 했다. 2013년 1월, 매부인 양현석의 도움을 받아 프랜차이즈 식당의 대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나 그 식당은 1년도 안 돼서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는 동생의 아이를 돌보는 유모 생활을 하며 대학에서 미술을 배우고 있다.

9.6 고지용

젝스키스 해체후의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한 영상.

해체 이후 인터넷 방송 DJ와 연기자 데뷔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2001년 KBS 드라마 '쿨'에 캐스팅됐다가 취소된 뒤로 사실상 연예계와 인연을 끊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업을 하고 있다. 초기에는 철강 관련 사업으로 알려졌으나 이것은 지인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던 것이 와전된것으로 알려졌으며, 최근 장수원이 밝히기로는 에너지 관련 사업이라고 한다.[44] 다른 멤버들과 달리 일체의 방송 활동을 하지 않아 많은 언론 매체는 물론이고 은지원 등 전 멤버들도 근황을 궁금해 할 정도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45] [46] 은지원 말로는 젝키 멤버 전체가 16년째 연락이 안 되고 있다고 했으나 장수원과는 연락이 닿았으며 강성훈과도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기에 연락을 하고 지낸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고지용 항목 참조.[47] 2013년 11월에 의사 허양임과 결혼했고 2014년 10월 경에 득남했다.

10 재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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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가 2 게릴라 콘서트에서 다시 만난 6개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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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에 출연한 5개의 수정

해체 이후 지금까지 팬들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간간히 젝스키스의 재결합 가능성을 논하기도 했다. <20세기 미소년>을 비롯한 예능 프로그램 출연분을 보면 활동 기간에 멤버들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다른 그룹에 비해 비교적 안 싸우고 항상 여섯 명이 몰려 다니며 재미있게 지냈다"고 얘기했다. 2016년 복귀 이후 드러난 일화들을 보면 리더인 은지원의 리더십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고[48] 덧붙여 하와이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은지원-강성훈,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강성훈-고지용, 부산에서 같은 댄서팀에서 날린 김재덕-이재진까지 데뷔 이전부터 쌓은 소소한 친분들도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 등 멤버들에게 패널들이 직접 재결합에 대한 질문을 하는 등 관심을 받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2014년 무한도전 토토가 캐스팅 과정에 젝스키스 멤버로서 장수원과 김재덕이 등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90년대 가수들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높아진 상태에서 god는 재결합해 신곡을 발표했으며 S.E.S. 역시 토토가 이후 현역 못지않은 큰 관심을 받고 있어 당대 아이돌의 아이콘이었던 젝키의 재결합설이 주목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연예계와 인연을 끊고 있는 고지용의 복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또한 이재진, 강성훈, 장수원, 김재덕은 재결합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은지원은 당시 중립적이고 조심스러운 입장이고, 고지용은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니[49] 당시로서는 재결합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이후 2016년 3월 31일, 마침내 젝키의 재결합을 알리는 기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은지원의 확인까지 이뤄지며 젝스키스는 16년 만의 재결합 무대에 서게 된다. 다행히 강성훈은 사기죄 불성립에 의한 무혐의 처분과 무한도전 제작진의 요청으로 2016년 4월 7일로 출연 정지가 해제되었다.

다만 재결합 기사를 낸 신문사가 무한도전 측에서 요청한 엠바고를 어긴 것으로 알려져 콘서트 일정 변경 가능성이 대두되었고, 결국 무기한 연기되다가 4월 14일에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토토가2 - 젝스키스 문서 참조.

6월에는 고지용을 제외한[50] 5인이 16년만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YG 엔터테인먼트 대표 양현석과 두 차례 회동을 가진 것으로 보아, 콘서트 이후에는 고지용을 제외한 5인 체제로 완벽한 재결합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멤버들의 소속사가 다르다는 문제점이 남아있어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관건이다. 젝키는 소속사와의 불화는 있었을지 언정 멤버들 간에 큰 불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활동 의지만 강하다면 소속사 문제는 원만히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5월 11일 5명 전원이 YG와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DSP시절의 무계약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51] 이래서 인생 길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YG에서 젝스키스 상표권을 등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각에서는 경쟁이 극도로 심화된 음악시장에서 추억팔이로 장사하냐는 비아냥도 있고, 정규 앨범의 간격이 긴 YG 시스템과 YG의 일탈 이미지를 우려하는 의견도 있으나, 팬덤에서는 DSP의 언플과 활동 방해를 막을 수 있는 대형 기획사라는 점에 만족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장의 처남이 소속된 그룹이니 대우도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 골수 팬들은 20~30대가 되어 구매력이 커졌고, 무한도전을 계기로 신규 10대, 20대 팬도 상당수 유입되었으니 YG 입장에서도 마냥 도박인 것이 아니라는 평이 많다. 실제로 젝스키스는 대한민국 공연의 상징인 올림픽 체조 경기장을 단독 콘서트로 9월 10일, 11일 양일을 매진시켰다. 이는 적어도 2만 2천 명 이상의 인원으로, 평균 표값이 11만원~15만원을 호가했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와이지 입장에서도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절대로 손해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체조 경기장을 양일 매진시키는 아이돌 그룹은 손에 꼽히며, 신인 그룹을 체조 경기장을 매진시킬 정도로 키우기까지 드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생각해보면 와이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복덩이인 셈. 매제가 돈 벌이가 될 줄이야 역시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현석이

다만 젝키 전원이 각각 소속사가 있어 개인 활동은 각자의 소속사에서 하되, 젝키 5인의 활동에 한해 YG의 지원이 있을 예정이다.[52]

다만 6월에 계획했던 콘서트는 연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새 소속사에 들어온 이상 바로 콘서트를 열기보다는 적절한 방송활동과 음반준비를 통해 확실하게 콘서트를 하는게 더 나으리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6월 1일 라디오스타로 본격적인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이재진의 말대로 결성부터 활동, 해체, 그 이후 멤버들의 행보와 인생의 부침까지 총망라한 토크쇼. 물고 물어뜯는 케미 폭발 이재진 개인기도 폭발

6월 10일에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재결합 이후 첫 음악방송 무대를 치렀다.[53] 2곡 빼고는 반주까지 모두 라이브 세션으로 이뤄진 무대에서 'Com' Back'+'기사도'+'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 3곡을 메들리로 부르고, 토크 후에는 '연정', '너를 보내며', '커플' 3곡을 잇달아 불렀다.

6월 19일[54] 판타스틱 듀오장수원을 제외하고 출연했다. 본선(?)에 진출한 세 팀 중 '엄마 따라 젝키' 팀과 '기억해줄래'를 열창했다. 너만을 느끼며'를 부른 김민종 팀을 261: 277로 이겼다. 평소에 판듀 보는 위키러는 추가 바람. 이로서 지상파 3사 퀘스트 완료!

연기되었던 콘서트를 9월에 개최한다는 YG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날짜는 9월 10, 11일이며 장소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8월 17일 젝스키스 V앱 채널이 개설되었고 18일 첫 방송을 했다. 제목은 SECHSKIES LIVE NEWS로 콘서트 관련 소식을 전해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뉴스를 가장한 젝키의 아무말 대잔치(...) 에..또

8월 25일 멤버인 이재진, 강성훈이 YG와 개별 계약도 체결하였다.

9월 13일 이데일리에서 '젝스키스가 10월 2일 SBS 인기가요에 출연한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YG 측에서 결정되지 않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10월 1일 SBS에서 생방송된 2016 부산원아시아페스티벌 개막공연에 출연했다.

10월 7일 자정에 콘서트에서 선공개한 신곡 '세 단어' 디지털 음원이 공개되었다.

11 단독 콘서트

개최일콘서트명장소관객 수비고
1997.12.21젝키의 크리스마스서울 특별시 세종문화회관7,600석(2회X3,800석)예매 5시간만에 매진
1998.02.22젝스키스 앵콜 콘서트서울 특별시 올림픽체조경기장11,000석안전 사고대비 28억원 보험
1998.02.28전국 투어 콘서트부산 광역시 KBS 홀4,000석(수용 인원 참고)
1998.03.08전국 투어 콘서트울산 광역시 KBS 홀3,000석(수용 인원 참고)
1998.03.14전국 투어 콘서트광주 광역시 구동체육관3,000석(수용 인원 참고
1998.03.22전국 투어 콘서트부천시 실내체육관5,400석(수용인원 참고)
1998.03.28전국 투어 콘서트대구 광역시 우방타워랜드대공연장2,500석(수용 인원 참고)
1998.04.05전국 투어 콘서트대전 광역시 엑스포아트홀1,500석(수용 인원 참고)
1998.12.24젝키의 크리스마스2부산 광역시 사직실내체육관14,100석(수용 인원 참고)사직야구장에서 변경
1999.02.06울산 콘서트울산 광역시 KBS 홀3,000석(수용 인원 참고)
1999.02.21대구 콘서트대구 광역시 경북대학교대강당4,900석(수용인원 참고)
1999.02.25~02.27Sechs Kies 99 Live Concert대한민국 서울 특별시 KBS 88체육관19,000석(5회X 3,800석)
2000.02.28Sechs Kies Live Concert 2000대한민국 서울 특별시 올림픽체조경기장11,000석
2016.09.10~09.11Yellow Note대한민국 서울 특별시 올림픽체조경기장22,000석(2회X11,000석)티켓팅 5분만에 매진

12 수상 경력

12.1 1997년

  • 제13회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본상
  • KMTV 가요대전 -신인상
  • 제8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
  • MBC 10대가수가요제 10대 가수상
  • KBS 가요대상 -본상
  • SBS 가요대전 -10대 가수상

12.2 1998년

  • 제9회 서울가요대상 본상
  • 제9회 서울가요대상- 대상
  • MBC 한국가요제전 -10대 가수상, 30세 미만의 국민이 뽑은 인기 가수상
  • KBS 가요대상 -본상, 청소년 부문 올해의 가수상
  • SBS 가요대전 -10대 가수상
  • 대한민국 연예 예술상 - 남자 부문 청소년 중창 가수상
  • KMTV 가요대전- 인기 가수상
  • 제14회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본상

12.3 1999년

  • 01월 26일 KBS1 사랑의 리퀘스트 - 감사패 수상
  • 제15회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본상
  • 제10회 서울가요대상 -본상
  • MBC 10대가수가요제 -10대 가수상
  • KBS 가요대상 -본상
  • SBS 가요대전 -10대 가수상
  • KMTV 가요대전- 본상

13 가요 프로그램 1위

13.1 1997년

기사도
12월 7일 SBS 《TV가요20》 1위
12월 14일 SBS 《TV가요20》 1위
12월 21일 SBS 《TV가요20》 1위

13.2 1998년

기사도
1월 4일 SBS 《TV가요20》 1위
1월 11일 SBS 《TV가요20》 1위 (5주 연속, 왕중왕)

Crying Game
7월 7일 KBS 《뮤직뱅크》 MVP

Road Fighter
7월 28일 KBS 《뮤직뱅크》 MVP
8월 4일 KBS 《뮤직뱅크》 MVP
8월 18일 KBS 《뮤직뱅크》 MVP (통산 3주)
8월 23일 SBS 《인기가요》 1위
8월 30일 SBS 《인기가요》 1위 (2주 연속)

무모한 사랑
9월 8일일 KBS 《뮤직뱅크》 MVP
9월 15일 KBS 《뮤직뱅크》 MVP (2주 연속)
9월 27일 SBS 《인기가요》 1위
10월 11일 SBS 《인기가요》 1위 (통산 2주)
10월 20일 KBS 《뮤직뱅크》 MVP (통산 3주)

커플
11월 10일 KBS 《뮤직뱅크》 MVP
12월 19일 MBC 《음악캠프》 1위
12월 20일 SBS 《인기가요》 1위

13.3 1999년

커플
1월 2일 MBC 《음악캠프》 1위
1월 3일 SBS 《인기가요》 1위 (2주 연속)
1월 9일 MBC 《음악캠프》 1위
1월 16일 MBC 《음악캠프》 1위 (3주 연속, BEST OF BEST, 통산 4주)

너를 보내며
1월 26일 KBS 《뮤직뱅크》 MVP

Com' Back
8월 31일 KBS《뮤직뱅크》 MVP
9월 7일 KBS 《뮤직뱅크》 MVP (2주 연속)
9월 12일 SBS 《인기가요》 1위
9월 19일 SBS 《인기가요》 1위
9월 21일 KBS 《뮤직뱅크》 MVP
9월 26일 SBS 《인기가요》 1위 (트리플 크라운)
9월 28일 KBS 《뮤직뱅크》 MVP (2주 연속, 통산 4주)

예감
10월 19일 KBS 《뮤직뱅크》 MVP
11월 7일 SBS 《인기가요》 1위
11월 9일 KBS 《뮤직뱅크》 1위 (통산 2주)
11월 21일 SBS 《인기가요》 1위 (통산 2주)

14 트리비아

  • 멤버 전원이 자연미남이다. 3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동안이다. 멤버 전원이. 다만 이재진은 점을 뺐다.
  • 역대 가요계 라이벌을 대표하는 한팀으로 아이돌그룹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라이벌구도를 그리고 있었으며[55] 현재에도 언론에서 한팀이 언급되면 높은 확률로 같이 언급된다. 충성심이 높은 아이돌팬 특성상 상대그룹에 대해 악감정이 높아 확실한 타도세력이 많았던것도 사실이며,[56]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존재한다. 이는 젝스키스가 저평가 받은 이유중 하나.[57] 그 당시에도 단지 막강한 1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가수만도 못하다는 후려치기를 많이 당했다. 참고로 당시 인기를 보면 H.O.T.보다 적은 것은 맞지만, 젝키에 대적할 수 있는 다른 아이돌은 없었다. 확실한 2인자로서 H.O.T.의 라이벌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 H.O.T. 팬들과 젝스키스 팬들의 신경전은 매우 치열해, 심할 때는 경찰까지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58] 팬들의 직접적인 싸움이 워낙 격렬해서 항상 구급차가 상주하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이 격렬했던 만큼 큰 사고도 많았다.[59] 하지만 양 기획사 입장에서는 라이벌 구도를 통해 동반 상승효과를 얻으며 많은 인기를 모으게 돼서, 서로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SM 이수만 사장이 고맙다며 젝키 매니저한테 밥도 사주고 등도 토닥여주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60]
  • 원래 그룹 이름 후보들이 하나같이 주옥같다. 마그마, 용암, 등. 특히 육계장이 유력했던 모양이다. 이에 맞춰 공식색도 빨간색이 될 뻔 했다. 그룹 초기에 공식색이 노랑 말고도 빨강이 포함되었던 것은 이 영향이다. 이 사실을 접한 MBC 은경표 PD가 젝스키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은경표 PD는 이호연사장과 96년도에 하와이로 놀러갔었는데, 이때 이호연이 은지원과 강성훈을 스카우트 해왔었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이 이호연 앞에서 오디션을 볼 때, 은경표 PD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젝스키스라는 이름을 괜히 지어준 것이 아니었다.[61] 콘서트 Yellow Note에서 후보였던 이름들을 언급했다. 은지원육개장이 건강식이니 괜찮다고 아무말을 밝혔다. 이랬다면 팬들은 빨갱이나 건더기로 불렸겠지
  • 1999년 11월 29일 평양에서 2000 평화 친선 음악회에 참가했다. 멤버 강성훈을 여성으로 알고 혼성 그룹으로 표기하여 여러 사이트에서 화제가 되었다. 2008년 놀러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매니저 등은 모두 한국에 남고 이호연 사장만 동행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말을 잘못하면 체크를 해, 그 기준을 넘으면 북한에 억류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핑클이랑 젝키 10명이서 한방에 둘러앉아 있을 때, 도청될지도 모르니 서로 말 조심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은지원이 갑자기 '나는 공산당이 싫어' 라고 하더니, '이거 고지용이 한거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은초딩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된 듯... 2015년 해피투게더에 성유리가 출연했을 때, 당시 평양에서 젝스키스와 찍었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TV에 평양이라 하면 단골로 나오는 장소다ㄷㄷ
한편 뮤직비디오를 감독 사비로 찍게 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정확한 사실 관계는 어떤 신인 감독이 로드 파이터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기네 회사에서 비용을 전액 부담해 뮤비를 찍고 싶다고 DSP에 연락했을 뿐이다.(출처:#) 놀랍게도 그 감독이 YG 뮤직비디오 전담 감독인 서현승이다. 뱅뱅뱅, 판타스틱베이비, 내가제일잘나가 등 1억뷰 이상의 뮤비를 다수 보유한 감독이다. 해체 16년 후 젝키가 YG로 오게 됐으니 사람 인연이란 것이 참 희한하다.
  • 데뷔 당시 고지용이 어떤 곡으로 활동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은지원이 이 곡으로 무대에 오르자고 밀어붙였다. 그렇게 폼생폼사는 수록곡1로 묻힐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3.5집을 준비할 당시 이호연 사장은 은지원의 똥고집에 머리를 썩히다 은지원의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는 말에 결국 두손두발 다 들었다. 그렇게 "커플"이 3.5집 타이틀곡이 되었다.은지원의 선견지명 괜히 착한독재라 불리는 게 아니다 커플 때에는 사장이 반대하는 것이다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참고로 커플의 작곡가 마경식은, 노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슬래쉬메탈 그룹 아발란쉬의 보컬이었다.가창력이 엄청나다 커플 이미지는 1도 안 떠오르는 모습이었다ㄷㄷ 사실 커플이 원래는 타이틀곡으로 지정 안됐다고 해서 소속사와 이호연 사장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마경식은 작곡가로서 그때까지 제대로 된 히트곡이 없었다.# 게다가 기존에 해오던 음악과 정반대 느낌의 곡을 작곡해왔다. 우려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반면 3.5집의 '너를 보내며'를 작곡한 김석찬은, 얼마 전에 핑클내 남자친구에게로 초대박을 쳤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너를 보내며' 노래 자체도 충분히 타이틀곡으로 지정할만한 퀄리티다.# 회사 측에서는 커플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회사가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은지원의 선구안이 뛰어났던 것이다. 젝키의 대부분 뮤비가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커플 뮤직비디오는 사무실 문짝이 나오는 등 유독 저퀄리티다. 전술한 바와 같이 커플 타이틀곡 문제로 사장이랑 대판 싸운 것이 사실이라면, 뮤비 퀄리티가 유독 그런 것이 이해가 간다.
  • 데뷔 당시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 메인보컬인 강성훈조차 보컬 레슨을 받지 않고 평소 노래 실력 그대로 데뷔한 거다.[62] 장수원은 해체 후에 피눈물을 흘리듯이 연습하여 득음했다. 춤은 위에 각주에 달아놓은 이재진의 컴백 자서전 원문을 보면 꽤 기간을 들여 연습한 것으로 보인다. 팔 뻗는 것만 반 년 연습했다는 말도 있다. H.O.T. 데뷔 후 급히 멤버들을 모아 데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재진과 김재덕이 유명한 춤꾼이었고, 은지원의 랩 실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서로서로 품앗이하듯 가르치고 배웠다. 한 마디로 멤버들이 각자 타고난 외모와 재능이 뛰어났다. 이게 전부다. 춤은 구멍이 한 명도 없다. 게다가 안무 대다수(데뷔 때는 전곡)를 이재진과 김재덕이 직접 만들었다. 안무가 비용 굳히기
  •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멤버들조차 정확한 수익 분배를 모르는 상태로 활동했기에, 일부 팬들은 젝스키스로 번 돈을 핑클에게 투자하느라 젝스키스의 살인적인 스케줄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며 비난을 했다.[63][64] 실제로 상당수의 젝스키스 팬들은 핑클을 싫어했고 팬덤 간의 사이도 나빴고, 핑클에 대한 안티활동도 심했다#. 물론 젝스키스와 핑클 당사자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 공연 갔을 때 방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고도 했고, 이효리가 10minute으로 활동할 때 은지원과 콜라보 무대를 한 적도 있다.# 은지원의 곡 'Love론'을 이효리가 피쳐링 해주기도 했다. 실제로 각 팀의 리더인 은지원과 이효리는 친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김재덕은 2015년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당시 같은 소속사였던 핑클과 친하게 지냈으며, 가끔 술도 한 잔 했었다고 말했다.# 2012년 3월 25일 SBS 정재형 이효리의 유 & 아이에서는 이효리와 은지원이 같이 출연했다. 이효리는 당시 젝키와 H.O.T.의 1위 대결에서 젝키가 지면, 같은 소속사라는게 뭔지 우리가 뭔가 진 것 같고 눈물이 났었다고 밝혔다. 은지원도 핑클이 어디 대결 나가면 잘하라고 응원했다고 말했다. 동료 연예인들을 깎아내려서 좋을 게 없으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젝키 멤버들은 소속사에 불만이 있었다거나 소속사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는 종종 언급했어도 핑클에게 악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2016년 6월 1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전 소속사의 관심이 핑클에게 옮겨지고 우리는 홀대받은 것 같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물론 핑클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전 소속사에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핑클도 무계약 상태에서 활동했고 활동기간 중 높으신 분들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이 있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젝키보다 대우가 좋았다는 것이지 딱히 공주 대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핑클도 하루 평균 2시간씩 자며 스케쥴을 다녔다.[65]# 다만 핑클은 젝키보다 후발주자라서 더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이긴 했다.
젝키와 핑클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젝키와 달리 핑클은 소속사와의 사이가 좋게 끝났다.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 이효리가 출연해서 말하길, 당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데뷔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갈때도 DSP가 싸이더스랑 연결시켜주는 등 매우 원만히 헤어지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옥주현은 2015년 핑클회동 당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며 당시 소속사 직원들에게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66] 기타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실에 누워있을 때, 핑클 4명이 모두 찾아와서 이호연 사장이 좋아하던 노래 "루비"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이런 차이에 대해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젝스키스는 김기영 라인이고 핑클은 길종화 라인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DSP이호연 사장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으로 김기영과 길종화 2명이 있었는데, 이 두명이 서로 세력다툼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둘은 고등학생 때부터 이호연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학 학비까지 대주며 키웠다.# 다만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진 시점 전후로 해서 둘 다 DSP를 나왔다. 김기영 라인은 젝스키스, 클릭비, SS501로 알려져 있고, 길종화 라인은 핑클, 카라로 알려져 있다. 김기영과 핑클은 거의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김기영의 경우,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젝키 멤버들이 해체이유에 대해 말할 때 사장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매니저(김기영)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기영 본인 인터뷰에서도 해체 이후 젝키 멤버한테서 전혀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면 길종화의 경우, 2012년 본인 결혼식 때 옥주현이효리가 축가와 사회를 맡을 정도였다.# 이효리는 길종화가 나와서 차린 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는데, 당시 계약금을 받지도 않았고, 계약이 오래전에 끝났는데도 계속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기사 성유리는 2015년 인터뷰에서 "종화 오빠 생각이 많이 난다"며, "S.E.S. 친구들을 보면 요정같고 귀여운 장난을 치곤 하던데, 우리는 네 명이서 힘을 모아 매니저 오빠를 괴롭혔다. 그래서 오빠들이 저희 때문에 힘들어 했다"고 털어놨다.#
  • 2007년 8월 20일 핑클이진이 야심만만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말했다. 데뷔전 연습생 시절 사장님이 보고 있으면 열심히 연습하다가 사장님이 나가시면 딴 짓을 했는데, 당시 젝키한테 선물이 쌀자루로 몇개씩 오면 그때 그걸 풀어봤다고 한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 있으면 양심상 하나만 챙기고 다시 다 정리해놨다고 한다. 영상을 보면 헛나온 이야기에 자기도 당황하고 있고, 계속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01:02:40 정도부터 보면 된다
  • 이재진의 매제이자 젝키의 현 소속사 사장은 한국 연예계에서 대형기획사 양대산맥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의 수장이다. 그 덕분에 눈치 안 보고 공중파에서 해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이호연 사장은 몇년째 거동불가능한채 말도 못하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고, DSP는 이호연이 쓰러진 후 많은 직원이 나가거나 쫓겨나서 현재 젝키 시절 직원은 거의 없다. 회사 자체 상황도 암울하다. 이에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눈치를 볼 대상 자체가 이제는 없다시피 한다.
  • 2016년 젝스키스의 재결합 후 YG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했어야 한다는 언플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젝키 팬들은 분노하여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67].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쳐먹게 되었다. 이호연에 관해 정산, 해체, 대우 등에 있어 퍼진 평판과 루머가 악플의 발단인데, 각 주제에 대해 서술된 바(정산, 해체, 각종 루머)를 보면 맞는 말도 있지만 상당부분 과장되거나 틀린 말이 있는 점은 문제다. 하지만 젝키 시절 잘못한 점이 없다 할 수 없고,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 사장에 대해 악플로 도배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고 비쳐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호연 사장을 욕받이로 세워놓고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 DSP 측의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현재는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젝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인 것이다. 사장이 바뀐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놀랍지 않기는 하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렇게 네이버 메인에 뿌릴 내용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뿐이다.
사실 이 정도면 이호연 엿먹일려고 일부러 저런 기사 썼다고 볼 수준이다. 최다추천 댓글 내용을 보면 맞는 말도 있지만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가 있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전부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 이 언플에 대해 젝키 팬들은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에게 병문안 겸 인사 가는 것 자체도 말이 안된다고 본다. 하지만 젝키 팬덤이 이호연과 각주와 같은 최악의 관계인 것이지[68], 아래에 보듯이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런 나쁜 사이는 아니다.
젝스키스가 해체 이후 직접 이호연에 대해 언급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은 2013년 DSP 페스티벌에 참석해서 공연을 펼쳤다. 은지원은 "사장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장님은 늘 우리가 무대를 하면 뒷편에 서서 함께 해주셨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다"라며 "사장님 덕에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며 "의리"를 외쳤다. 이어 김재덕 역시 "이호연 사장님의 빠른 쾌유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덕은 O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가 있기까지 DSP라는 기획사가 있었고, 또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출연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영상 22초부터 강성훈은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 "팬들은 (이호연 사장님을) 안 좋아하지만 DSP 사장님이 젝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이재진의 경우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팬이 글을 남기자, 답글로 "호연이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69] 기타 김현중의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더라도 90년대 SM가수들이 지금도 수시로 이수만을 찬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호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편이다. 활동 당시의 많은 스케쥴, 정산문제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이수만은 지금도 정상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이호연은 병상에 몇년째 누워만 있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2016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해체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와의 사이가 나쁜 것이 원인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이외 팬들은 이호연과 소속사는 젝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고, 젝키 멤버 본인들 매력과 능력으로 떴다며 염치없는 소리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점을 잊은 듯 하다. 소속사가 키우는 것이 아이돌이다. 일단 멤버 하나하나 잘 뽑아서 데뷔시켰고[70], 비싼 작곡가들한테 곡을 잘 받아와서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명곡들이 많으며, 확 몰아부쳐서 가수를 띄우는 능력도 좋았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기타 목차 참조. 팬들 논리는 작곡가가 곡을 만든거지 이호연이 한게 뭐냐고 욕하는데,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가 좋은 작곡가로부터 대박날만한 곡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 능력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성공이 결정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게 블랙스완같은 망곡을 주며 못 띄우는 것만 봐도, 소속사 사장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외 이호연 까는 용도로 '젝스키스라는 이름 조차 MBC PD가 지어줬는데 이호연은 한게 뭐냐'는 말이 많은데, 그 MBC 은경표 PD가 이호연 인맥이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을 스카웃 했을 때, 이호연이 하와이에 간 이유가 은경표 PD랑 놀러간 것이었다. 사장이랑 친분이 두터우니 고민을 거듭해서 젝스키스라는 끝내주는 이름을 지어준거지, 그런 인맥이 아니었으면 이름을 지어줄 리 없었다. 애초에 데뷔하자마자 H.O.T.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요 방송에 출연한 것은, DSP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당시의 DSP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이후 당시 최고로 인기있던 프로그램들에 젝키가 무수히 많이 출연했는데, 이 역시 소속사의 파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케쥴을 매우 빡세게 돌려 원망을 들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몰아부쳐 H.O.T.를 따라잡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2011년 해피투게더 해당영상 6분 20초부터). 근본적으로 DSP 자체가 거의 이호연 사장의 파워,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71]
  • 토토가 2 열풍으로 인해 재입덕한 팬들과 새로 입덕한 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네이버 검색창에 입덕만 쳐도 연관 검색어에 '은지원 입덕', '젝스키스 입덕', '젝키 입덕' 등이 나올 정도로 인기 몰이 중이다. 3.5집 수록곡 '커플'은 2016년 5월 6일 뮤직뱅크 케이 차트에 14위로 진입했으며 다음주인 5월 13일에는 3계단 상승한 11위에 올랐다. 또한 2016년 5월 보이그룹 브랜드 평판 빅데이터 분석 결과, 수많은 현역 아이돌들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사실 이재진은 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 카더라.
  • 무도 방영을 전후로 유튜브에 젝키가 출연한 90년대 예능 영상들이 올라왔다. 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젝키를 모르고 산 사람들은 90년대의 예능에 신기해 하고 있으며, 몇몇 신규 팬들은 덕질하려고 봤다가 화질 때문에 놀란다 카더라. 사실상 90년대 후반의 예능 프로그램에 다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도 유튭에 젝키 치면 다양한 젝키가 나온 예능들을 볼수 있다. 비록 몰카가 많기는 하지만 이런 화질(480i)로 팬질을 했다니. 99년 경에 방영된 SBS 퍼니퍼니에서 홍진경가방을 뒤지는 영상까지 있다(...). 장수원 햄버거.
  • 2016년 6월 24일 방송된 MBC FM4U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에 룰라김지현채리나가 출연했는데, 채리나는 룰라 시절 후배들을 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사연을 밝혔다. 채리나는 혼낸 적은 없고 혼난 적은 있다며, 젝스키스 인사를 안 받아준다고 그쪽 대표님인 이호연 사장한테 혼났다고 말했다. 이어 채리나는 “그때 당시 저희가 선배인데 젝스키스가 인사를 건성으로 하더라. 그래서 받아주기 싫었다. 이후에는 친해져서 오해를 풀었다”며 이야기를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 DSP에 1996년 입사후 20년 이상 근무 중인 장진희 이사는, 2012년도 인터뷰에서 입사 초기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기나 정황상으로 봤을 때 젝스키스의 이야기다.기사 참고로 기사에서 홍보하는 데뷔 임박한 그룹이 에이젝스인데, 이호연이 뇌출혈로 회사를 떠난 후 DSP에서 내놓은 첫번째 그룹이었다. 선배 젝스키스와 SS501을 잇는 그룹으로 기대가 높았으나 결과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장진희 본부장이 DSP미디어에 입사한 것은 1996년 가을. 지인의 소개로 이 회사 기획 파트에 입사해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가내수공업 수준을 면치 못했던 당시 연예계에서 기획이라는 근사한 단어는 이내 사라졌다. "일당백이 아니면 회사도 저도 버틸 수 없었어요"라는 당시 그에게 최근 분업화ㆍ산업화ㆍ세계화 등을 거듭하고 있는 최근 연예 기획사의 변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변변한 숙소가 없던 시절 지방 출신 멤버들 밥을 차려주기 일수였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 팬 관리에 마케팅ㆍ정산까지 모두 수기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스케줄 오갈 때 맞춰서 밥을 해놓으면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었죠. 저까지 허기를 느낄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쌀을 하도 많이 넣어서 밥통이 터진 적이 있을 정도였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죠."
온라인 뱅킹이 도입되기 전이라 매일 은행에서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매일 가족처럼 사무실에서 마주치다 보니 멤버들은 누나처럼 그를 따랐고 연애상담부터 가족문제까지 시시콜콜하게 회사의 대소사는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음이 숙연해지죠. 한번은 여자친구 선물 포장을 부탁하는 멤버도 있었어요. 워낙 가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잔무를 도맡아 하는 평사원이던 그가 기획 파트를 총괄하는 본부장이 되는 동안 국내 가요계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버스와 교문 앞을 서성이던 길거리 캐스팅 대신 온라인 오디션이 등장했고 가수를 보기 위해 기획사 사무실 근처를 배회하던 팬들은 유튜브와 트위터로 자신의 스타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가 기억을 더듬자 남자 아이돌 발전사라는 책 한 권이 완성되는 듯했다.
"젝키와 클릭비는 변변한 연습실도 없었어요. 연습생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타고난 재능만 가지고 무대에 오른 경우죠. SS501 데뷔 때부터 오디션의 개념이 생겼어요. 통과한 친구를 전문 트레이너가 붙어 노래ㆍ춤ㆍ연기 같은 걸 훈련을 시켰죠."
  • 2000년 6월 16일 피자의 아침[72]방송내용을 보면, 소속사 측은 행사에 있어서는 멤버들에게 70%를 준다고 항변했는데,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를 보면 2015년 택시 방송에서 장수원이 행사 한번에 멤버당 300만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젝스키스의 1회 행사료를 계산해보면, 2570만원이다. 99년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S.E.S.가 행사 1회당 1000만원을 받는다고 쓰고 있는데[73], 이보다 많은 액수다. 당시 대졸신입 월급 평균이 130만원 할때이니, 2570만원은 굉장히 큰 액수다. 오늘날로 치면 7000만원 가량의 가치다. 오늘날 아이돌 중 이 정도 액수를 받는 팀은 찾기 힘들다.[74]
  1. 독일어.
  2. 다른 표기로, Sechs를 6으로 표기한 '6kies'와 젝스키스를 줄인 '젝키'가 있다.
  3. 영미권 외국인의 경우, 영어식 발음 그대로 읽는 참사(...)가 자주 발생한다. 원래 발음은 ( zɛks kiːs )다. 오죽하면 팬들이 발음법 영상까지 만들었다
  4. 현재 직장인이라 YG와 따로 계약하진 않았으나, 여건이 되는 한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기회가 된다면 무대에 설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했다. #인터뷰영상1, #인터뷰영상2
  5. 2000년 5월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해체를 선언했고, 이틀 뒤인 5월 20일 드림콘서트에서 마지막 무대를 가졌다.
  6. 무한도전 토토가2 게릴라 콘서트 날짜 기준
  7. 3년 계약을 맺었으나, 장수원은 종신계약을 원했다고 한다.
  8. 영어+독일어, 참고로 노랑은 독일어로 Gelb(발음: 겔프)
  9. 수정 모양, 멤버 수인 6, 젝스키스 첫 글자인 S, 그룹명이 모두 들어가 있다.
  10. 멤버 이재진이 디자인에 참여했다.
  11.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제흐스키스(ch는 일반적으로 [x]로 발음되며, 파열음 앞의 s는 [ʃ]로 발음된다.)
  12. 소방차를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DSP의 이호연 사장인데, H.O.T.가 아닌 소방차를 아이돌의 시초로 본다면 젝스키스는 소방차의 직속 후배라는 정통성도 있다. 데뷔 해인 1997년 2집까지는 언론이 붙인 라이벌 느낌이 있었지만 98년 3집부터는 정말 H.O.T.와 맞설 만큼 성장했고 3.5집 "커플" 시절에는 공동 대상을 수상했다.
  13. 아직 20세기2000년에 해체되었다.
  14. 컴백 후 첫 신곡이 발매되자마다 음원차트 1위 올킬을 달성시켰다. 이전 활동시기에는 음원차트가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첫 음원이 대박을 거두며 컴백을 이루게 된 것
  15. 옐로우키스 항목 참고.
  16. 'Kies'에는 수정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장 널리 쓰이는 뜻은 '자갈', '돌멩이'다. 여섯 돌멩이. 정확히 '수정'의 의미를 나타내려면 'Kristall'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다. 독일어라서 실감이 잘 안 난다면 영어의 'stone'을 생각해보면 된다.
  17. 하지만 고지용은 사업으로 인해 활동에서 빠졌기 때문에 완전체는 아니다.
  18. 기존에 소속사가 있던 멤버들은 젝스키스와 관련된 활동만 YG가 담당하고, 기타 솔로 활동은 기존의 소속사가 담당한다. 연예계에서 은퇴한 고지용도 음반과 공연에 한정된 활동 참여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어, 고지용의 복귀 유무도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19. 참고로 그동안 DSP가 젝스키스 해체하고 나서 찌질하게 상표권 등록을 수차례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퍼져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DSP에서 젝스키스 상표권 등록을 신청한 사실이 없고, 어느 이상한 기업체에서 신청했다 거절당한 내역만 있다. [3]
  20. 신화 멤버 전진은 2008년 솔로앨범 인터뷰에서 H.O.T.젝스키스는 큰 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기사참조 2016년 MBC 2시의 데이트 박경림에 출연한 신화 멤버 김동완은 젝스키스의 컴백이 신경 쓰이냐는 질문에 젝키가 H.O.T.와 당대 그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팬덤이 굉장히 거대했기 때문에 지금 바람이 불고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고 답한 바 있다. 영상참조 god 멤버 데니안 역시 데뷔 직후였던 1999년 1월 당시의 젝스키스를 대선배 내지 인기스타로 회고하였다. 기사참조기사참조 실제로 신화는 으쌰으쌰 활동 당시인 1998년에 젝스키스와 함께 1위 후보에 올랐었으나, 3위를 한 바 있으며,영상참조 god는 젝스키스가 4집 활동을 마무리 한 직후인 2000년 1윌 초에 첫 1위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21. 당시 젝스키스 팬덤은 7만 석 중에 4만 8천 석을 차지하였으며, god는 1만 5천 석을 차지하였다. 젝스키스의 이 규모는 H.O.T., 서태지와 아이들의 뒤를 이어 역대 드림콘서트 팬덤 규모 3위에 해당된다. 참조
  22. 90년대후반 최정상급 대규모의 팬덤
  23. 젝스키스가 데뷔할 무렵 전후에 태어난 세대
  24. 무한도전 토토가2로 젝스키스를 접하고 유튜브 등으로 과거 활동 모습에 흔히 말하는 입덕을 하는 팬들이 많았다. 현재 카페에는 03학번과 03년생이 공존하며, 97년생과 97학번이 대화하는 건 거의 일상적 풍경이다.
  25. DSP의 3대 꽃미남으로 꼽힌다. 나머지 두명은 클릭비의 유호석과 SS501김현중.
  26. 멤버 모두가 3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동안이다.
  27. 이재진의 경우,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로 더 각광받게 된 남방계 미남상이라 쟈니스계 일본 아이돌이나 근래 데뷔한 SM 아이돌을 연상시키는 외모다. 그래서 리즈시절 사진이 넷상에서 매우 화제가 되었다.
  28. 1990년대 후반이라 젊은층을 겨냥한 세기말 컨셉이 주를 이른 시기였다.
  29. 팀 내 형(78~79년생) 라인이며 주로 랩과 안무를 맡았는데, 2집 이후로는 김재덕을 제외하고 보컬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30. 팀 내 동생(80년생) 라인이며 주로 보컬을 맡았는데, 2집 이후로는 고지용이 래퍼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31. 최초로 유닛활동을 한 그룹은 OPPA이다.
  32. 젝키로서의 은지원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은지원이 20세기 미소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간단한 안무가 아닌 본격적인 댄스는 젝키를 하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33.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34. 강성훈의 컴백 자서전을 보면, 그 자리에 은경표 PD도 있었다. 젝스키스라는 이름을 괜히 지어준 것이 아니었다. 원문: 연달아 몇 곡인가를 더 불렀는데, 창피해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자리에 계셨던 분이 DSP 이호연 사장님과 은경표 PD였다. 춤을 다 추고 나자, 사장님은 "너희들 가수가 되고 싶니?"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오디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춤과 노래를 선보였던 나는 엉겁결에 "네!" 하고 크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곧 연락하마."
  35. 이재진 컴백 자서전 원문: '내가 너희들 춤추는 데모 테이프, 서울에 있는 우명한 기획사에 쫙~ 돌렸다.' 1996년, 매니저를 자처했던 친구가 그랬다. 한편으론 창피한 생각에 걱정도 됐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 "너희들의 춤추는 모습이 맘에 드는구나. 연락 한번 부탁한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뜻밖에도 양현석형과, 이주노형, 그리고 OK뮤직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양현석형은, "춤을 인상깊게 봤으니 방학이 되면 꼭 한번 만나자" 라는 말까지 해주셨고, 이주노 형은 당장 압구정동에 있는 ING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겨울방학이 되자, 우리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주노형을 만났다. 그때 마침 DSP 사장님이 우리들을 보셨고, 재덕이는 새로 결성되는 그룹의 멤버로 뽑혔다. 주노형은 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머지 친구들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3여년을 함께 동거동락했던 친구들. 웬지 친구들을 배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재덕이는 젝키의 멤버로, 나는 주노형 사무실의 백댄서로 서울생활 을 시작하게 되었다. 재덕이를 포함한 젝키 멤버들은 주노형 사무실에 자주 놀러왔다. 처음 멤버들을 봤을때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주노형 사무실에서 만난 지원이형은 복고풍으로 잘 차려입은 세련된 모습이었다. 성훈이는 귀여우면서도 남자답고 귀티가 흘렀다. '서울애들은 다 저런가?' '서울에서도 한가닥들 하는 애들이겠구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수원이도 깔끔한 인상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저렇게 잘생긴 아이들만 모아놨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한꺼번에 모여 있는 이들을 봤을때의 충격이란. 잘생기고 세련된 외모에다가, 노래나 춤솜씨도 수준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맘 속에도 부러운 마음이 일어났다. 앞에서도 말했덧이 처음에는 재덕이만 뽑혔다고 해서 부러워하진 않았지만 서서히 소외감이 들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당시 재덕이는 멤버라는 이유로 빳빳한 수표를 용돈으로 받았다. 밥먹으러 갈때도 웬지 나는 덤으로 끼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연습할 때 열심히 따라서 연습했고, 내가 아는 것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몇달 후, 매니저인 기영이 형이 나를 따로 불렀다. "그 동안 너를 지켜봤는데....멤버들에게 춤도 잘 가르쳐 주고 하더구나. 우선. 팀에 합류하는 게 어떻겠니?"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 대답은 YES 였다. 그렇게 나는 젝키의 새로운 멤버가 되었고, 처음으로 빳빳한 수표를 용돈으로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
  36. 사실 추천이라기보다 강성훈이 가수데뷔를 위해 귀국했을 때 오랜 친구였던 고지용이 마중을 나왔는데, 이호연 사장이 첫눈에 보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이때 강성훈이 계속 설득했지만 열 번 이상 고사했고, 막판에 결국 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37. 이날 이 사실을 안 김재덕은 멘붕이 왔다..
  38. 원문: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창 5명에서 6명 정도의 댄스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멤버의 수가 6 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사장님,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멤버가 그렇게 많은 그룹에서는 노래부르기 싫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튀어나왔는지 겁도 없이 사장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수의 꿈을 접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사장님은 나를 설득하시는 한편, 어머니를 만나 내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품은 가수의 꿈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나의 마음을 돌려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성훈아, 비록 어리지만 사장님과 이미 한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쉽게 네 꿈을 접을 수 있겠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어머니, 한번 해볼게요. 그 대신, 열심히 할 게요." 그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은 지금의 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부터였다. 착하고 세련된 느낌의 수원이, 워낙 춤을 잘 추는 재덕이형과 재진이형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한 지용이. 지용이는 전교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때부터 나와 붙어다니던 춤꾼 중에 춤꾼이었다. 이렇게 여섯 명이 모이자,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잘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39. 컴백 자서전의 김재덕 부분 원문: "재덕이는 내일부터 연습하자!" 아쉽게도 나만 뽑히게 되었다. 주노형 사무실에서 약 3일을 머는 동안 DSP 이호연 사장님이 우리들의 춤을 보시더니 당시 구상중이던 젝키의 멤버로 나를 점찍게 된 것이다. 난 한번도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다. 퀵실버 멤버들 중 누구는 뽑히고 누구는 떨어지고.... 정말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꽤 고민이 되었다. 원하던 가수가 된다고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냥 부산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니... 일단 팀에 합류했다. 주위에서는 "네가 잘 되어야지 친구들도 도와줄수 있다"란 말씀을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린 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누가 되더라도 웃음으로 보내주자라고... 다행히 재진이가 함께 남았다. 재진이는 주노형 사무실에 있으면서 백댄서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젝키멤버로 사람이 부족했다. 연습하던 한 친구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다른 능력보다 춤추는 능력이 있으면 좋은 자리였다. 난 기회는 이때다 싶어 매니저인 기영이형에게 부탁해서 재진이를 다시 한번 봐달라고 졸랐다. "춤도 잘 추지만 생각이 깊은 아이예요." 함께 있던 지원이형도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그 동안 주노형 사무실에서 봤던 이미지가 꽤 좋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기영이형도 마음을 돌렸다. 그리곤 사장님께 허락을 받아 재진이를 젝키의 5번째 멤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40. 싸이월드 방명록에 호연이란 이름을 가진 팬이 글을 남겼는데, 이재진이 "호.연.이라.."라며 불편하다는 티를 냈다
  41. 위 라디오스타 방송을 계기로, 팬들은 젝키를 만든 것은 강성훈이고 이호연은 1도 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고지용을 제외하고는 이호연 공이 크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은 이호연이 하와이에서 직접 데려왔다. 김재덕,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픽업해오며 DSP와 인연을 맺었다. 다만 이재진은 이호연이 코가 크다고 뽑기 싫어했는데, 은지원과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 장수원의 경우 기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사장 또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했다. 고지용은 강성훈 친구라는 사실 덕분에 알게 됐으니 강성훈 공이 크다
  42. 참고로 핑클 멤버 이진과 성유리도 오디션에서 옥주현이 OK해서 뽑았으며 멤버들 보컬 트레이닝도 옥주현이 했다. 그리고 이들의 클릭비 건너뛰고 직속 후배인 SS501 역시 끼리끼리 혹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인데다 김규종을 제외한 모두가 추천으로 들어왔다. 인맥으로 장사하는 회사였다. 대체 이 기획사는 뭘 했던 거지? 핵심인물 뽑아놓고 나머지는 그 인맥으로 채워넣었다. 근데 그런 멤버들이 항상 대박이었던 점이 함정
  43. 젝키 시절 장수원의 파트는 상당히 적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 때문에 찾기는 쉬운데, 정말 잠깐 부르고 바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2집부터는 랩 담당 은지원마저 노래를 하다보니 보컬을 나누기가 더욱 애매해졌다. 보통 1절에서 강성훈이 혼자 다 부르는 부분의 2절을 반씩 나눠 불렀고, 그게 파트의 끝이다.
  44. 그러나 무도에서 나온 모습으로는 의류 디자인 관련 회사로 추정된다고 한다.
  45. 모 연예 매체에서 스토커 짓까지 하며 겨우 만나 인터뷰 요청을 하였으나 이런 거 안 한다고 매몰차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46. 나중에는 스타뉴스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사업가로 돌아온 고지용
  47. 무한도전 토토가 2 젝스키스 편에서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사업가로서의 진중한 이미지와 연예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상충되기 때문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48. 아래 트리비아 항목에도 있지만 커플을 타이틀 곡으로 지정하기 위해 사장과 담판을 지었다는 소문이 있다. 당시 이호연에 대한 소문을 생각하면 꽤나 고압적이었을테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 갓 20살 전후의 사회경험도 없는 젊은이에게는 더더욱.
  49. 장수원, 김재덕, 강성훈은 고지용과 꾸준히 연락했고, 은지원과 이재진은 이 세 사람을 통해 소식을 주고 받았다. 은지원, 이재진이 워낙 연락을 잘 안하는 성격인데다괜히 장수원이 장허브, 장연락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고지용의 유학이 겹쳐 여러모로 다시 연락하기 애매했다. 해체 후에 고지용과 이재진. 은지원이 만난 적이 있지만 본인들이 기억 못하는 모양인지 16년 만에 만났다고 했다(…).
  50. 고지용은 토토가2에 곡절 끝에 출연했지만 이것이 자신의 연예계 복귀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미리 선을 그었다.
  51. 당시 대성기획이 SM처럼 젝스키스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젝스키스라는 명칭을 상표권 등록했다면, YG와의 계약 과정에서 그룹 명을 사용하지 못하게 법적 소송을 걸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DSP는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은 물론 상표권을 등록하지도 않았다. 인생사 새옹지마.
  52. 참고로 이재진은 군 전역 이후 사실상 연예계와 인연을 끊은 상황이었지만 재결합 이후 개인적으로 YG 소속이 되었고 강성훈 역시 YG와 계약을 맺음으로서 YG 소속이 되었다..
  53. 무한도전이나 판타스틱 듀오는 엄밀히 말하면 예능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컴백 앨범 발매 전까지는 사실상 유일한 음악방송 무대가 될 듯하다. 라스도 고품격 음악방송을 표방하고 있으나 은지원이 태클걸었다
  54. 12일 방송에는 그야말로 얼굴만 비친 듯한데 본방으로 본 개나리 위키러는 추가 바람.
  55. 현재에도 젝스키스 vs H.O.T만한 라이벌 구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56. 당시 아이돌 그룹의 팬들은 가장 화력이 막강했던 H.O.T. 팬들의 눈치를 보느라 젝스키스 견제가 심했다. 또한, 핑클의 경우 팬덤 간의 사이가 워낙 안좋았다. 당시 아이돌 팬덤에서 젝스키스는 공공의 적 취급이었다.
  57. H.O.T팬이란 이유만으로 젝스키스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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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당시 팬덤들의 싸움은 3층에선 풍선을 터뜨리려고 압정을 뿌리고, 면도칼이나 못으로 현수막을 찢고, 우산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던지고 몸싸움을 하는 등 요즘 인터넷 상에서의 키배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성별도 안 따졌다 공연장에서는 팬석만이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으며, 공연장 내에서 이동할 때조차 같은 팬덤 여러 명이서 무리지어 다니며 서로를 보호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당시 팬덤은 임원진을 내세워 기강을 무섭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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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강성훈의 컴백 자서전 원문: 연달아 몇 곡인가를 더 불렀는데, 창피해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자리에 계셨던 분이 DSP 이호연 사장님과 은경표 PD였다. 춤을 다 추고 나자, 사장님은 "너희들 가수가 되고 싶니?"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오디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춤과 노래를 선보였던 나는 엉겁결에 "네!" 하고 크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곧 연락하마."
  62. 같은 회사 직속후배 출신인 후배 보이그룹후배 걸그룹 역시 보컬 트레이닝이 없기로 유명했다. SS501은 춤이랑 랩 담당 멤버마저 없다 핑클은 성악 전공이었던 옥주현이 다른 멤버들 보컬 트레이닝을 했다. SS501은 결국 사비로 배웠고, 나중에 후배들도 사비로 연습시켰다고 한다. 전통을 잘 지킨다.
  63. 다만 냉정히 말해 첫 아이돌로 번 돈을 다음 아이돌한테 투자하는건 기획사로서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팬들이 기획사보다 더 전문가 행세를 할 정도로 아이돌 시장에 빠삭하지만, 당시에는 아이돌이 처음 도입되던 시기였고 그런 투자 자체를 이해못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64. 2000년도 젝키 콘서트와 핑클 콘서트의 날짜가 가까웠는데, 젝키는 옷이 2~3벌인 반면 핑클은 옷이 8벌이나 바뀌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팬들이 소속사를 매우 비난했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미 99년 말부터 해체 이야기가 오가던 상황이었으니 핑클 만큼의 투자는 현실적으로 없던 것이 당연했다. 또한 남성가수보다 여성가수의 의상 종류가 더 많은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65. 하지만 아무 탈 없이 소화해서 매니저가 천하장사라고 불렀다고..
  66.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
  67. 2016년 5월 6일 기사가 올라왔으며, 댓글 수는 오후 3시 40분 기준 3,978개. 그 와중에 네x버는 기사 순위 내리는 중.
  68. "미친 개호연 새끼 뒈지는 날 우리젝팬들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핀다."는 문구(사진)정도는 애교라고 볼 정도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있었다.# (D.S.P 두고 보자 / 개좇십창 창녀 썅클 / 썅클은 창녀래요 / 뻑큐 씹탱 개호연 / 이호연 죽여라 / 창녀 핑클 / 이호연 너 나랑같이 죽자 / 이호연 너의 정력에 무릎을 꿇는다 / 이호연 제삿상에 옥돼지 머리 놔주마. / - 호연씨 사랑해요. 당신의 효리가 - / 이호연 너의 그녀들을 찾으려면 창녀촌으로 오너라 / 나는 개호연이다 나는 미친놈이다 나는 오늘 뒈졌다 속보 6월18일 2시 이호연 젝키팬에게 맞아 사망.이지, 아래에 보듯이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 정도로 나쁜 사이는 아니다.) 오늘날 이수만, 양현석, 박진영한테 저런 것하면 잡혀갈 수준이다. 인터넷에서 유언비어 유포도 심했는데,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주작 수준이 낮아서 믿을 사람이 없을 정도이긴 하다.# # # # # # # 이외 해체날에는 조영구 그랜져 새차를 이호연 차로 생각하고 다 부셔서, 이호연이 조영구한테 1100만원을 물어줬다.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 방송을 보면 해체 당시 사무실 경호회사 직원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고 있다. "18일..농성을 부리고 여기에다 계란 세례나 밀가루, 식초 이런 것들을...난동을 부려가지고...."
  69. 젝키 결성 당시 6명 중 유일하게 이호연이 탐탁치 않아했던 멤버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영상 14분부터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70. 2016년 라디오스타 방송을 계기로 팬들은 강성훈이 젝키를 만들었고 이호연이 한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전술한 멤버 항목에서 보듯이 막상 내막을 살펴보면 고지용을 제외하고는 이호연 공이 크다.
  71.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72. MBC에서 방송한 아침 뉴스 프로그램으로 여기서 '피자'의 의미는 PD와 기자가 함께 만드는 아침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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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참고로 이 리포트는 이상호 기자가 취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