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변천 과정과 역사를 정리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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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1982년도부터 1993년도까지의 대학 입시 제도였던 대학입학 학력고사는 무조건적인 암기만을 강요하는 형식이었다. 수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부터 1992년까지 7차례의 수능 실험 평가를 시작한 뒤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제도다. 당시의 주관기관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아니라 국립교육평가원이었기 때문에 현재 KICE는 관련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학력고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학입학 적성검사[1]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1990년~1992년까지 7차례에 걸쳐 실험평가[2]가 실시되었다. 수능은 과거의 예비고사, 학력고사 등과는 달리 많은 준비/개발 기간을 거쳐서 시행된 시험이다.

기존의 암기식 대입학력고사와는 달리 단순 암기에 의존하는 평가보다는 사고력 중심의 평가를 지향하기 때문에 초창기에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수능 도입 첫 해인 1994학년도의 수리탐구2 영역의 시험문제는, 학력교사 시절에는 무조건 외워야 했던 부분들이 문제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복잡한 도표를 외워서 푸는 것과, 문제에 나온 도표를 보고 해석(이해)하며 푸는 것을 비교해보면, 수능은 (정확한 암기력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적절한 자료나 정보를 보고 답을 구할 수 있는 이해력을 측정하고 평가하려는 시험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리탐구1 영역의 수학적인 문제들도 공식을 대입하여 단순히 풀 수 있는 형식과는 거리가 있는 비비꼬인 편이었다. 언어영역의 경우엔 출제범위가 교과서를 벗어나 있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993년 언론의 제목을 보면 “탈교과­통합 출제, ‘산교육’ 기대”(국민일보) “암기식 탈피 탐구교육 전기로”(서울신문) “암기 위주 즉답형 학력고사 한계극복”(세계일보) “비정상 교육 풍토 쇄신의지 담아”(한겨레) 등 꿈과 희망이 흘러 넘친다. 한국 교육문제점들이 201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기에 수능시험도 도매금으로 비판을 자주 받음에도 불구하고, 문항의 완성도 자체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편이다. 내신문제만 보던 중학생들이 수능문제를 보면 컬쳐쇼크를 받기도 한다.

실험평가의 자매품으로는 시험 체제에 변화가 있을 경우에 실시하는 예비평가, 그리고 6월과 9월의 모의평가가 있다. 예비평가는2003년에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예비평가에서 실시되었으며, 2012년에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예비평가가 실시되었다. 모의평가는 워낙 유명하니 서술하지 않는다.

2 5차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

1994년 대학 입학 예정자부터 시작하였다. 1993년에 실시한 1994학년도 수능은 일년에 두번(1차: 8월20일, 2차: 11월 16일) 본 뒤 자기에게 유리한 한 개의 성적만 선택하여 대학에 제출하는 방식이었으나, 1,2차간 난이도 조정에 대실패해버리는 바람에,[3] 이듬해부터는 1회로 축소되었다. 덕분에 94학번은 전국단위 대입시험을 한여름에 봤던 유일한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1996학년도 수능까지는 200점 만점을 유지하다가, 1997 수능부터 2004 수능(=2003년 실시)까지 1교시 언어영역(60문항 90분 120점), 2교시 수리탐구1(30문항 100분 80점, 2002년부터 수리영역으로 변경), 3교시 수리탐구2(80문항 120분 120점, 2002년부터 사회/과학탐구영역으로 변경), 4교시 외국어영역(50문항 70분 80점)의 400점 만점 체제가 유지되었다. 2001 수능부터는 5교시 제2외국어영역(30문항 40분 40점)이 선택과목으로 추가되었다.

영역별 배점은 언어영역 60점, 수리.탐구영역(Ⅰ) 40점, 외국어영역 40점, 수리.탐구영역(Ⅱ) 60점이었다, 1997수능부터는 배점이 영역별로 두 배가 되어 총점이 200점에서 400점이 되었다.

초창기의 수능은 기존의 학력고사와 비교해 볼 때 시험 스타일에서부터 여러 모로 다른 시험이었기에 수험생들의 체감 난이도는 상당히 높았다.[4] 또한 기출문제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수능스러운 문제와 더불어 과거 학력고사의 느낌이 나는 문제도 종종 출제되었다.

또한 이 시기 수리탐구2(현재의 사탐+과탐)영역의 분량은 실로 방대하였다. 당시의 교과목 체계로 9~11개 과목을 보아야 했다. 일단 공통과목만 보더라도 당시 과목으로 국민윤리(현재의 윤리와사상+도덕),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정치경제, 과학I(현재의 생물1+생물2의 일부 + 지구과학1 + 지구과학2의 일부 수준), 과학II(현재의 물리1+물리2의 일부 + 화학1 + 화학2의 일부 수준)과목을 수능을 보는 학생이라면 계열 관계없이(예체능 학생들까지도!) 공부를 하여야 했으니 말 다했다.

선택과목이란 아예 없었고 이 모든 과목을 필수로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고만해 미친놈들아
그나마 94년 수능은 문이과 구분이라도 없었기에 이게 다였는데, 거기에 95 수능부터는 문이과 구분까지 생기면서 문과 학생은 사회문화, 세계지리를 더 공부하여야 했고 이과학생은 물리, 화학을 더 공부하여야 했다.[5] 참고로 당시의 과학과목은 현재처럼 ⅠⅡ식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문과 학생은 과학2(상)(현재의 물리1), 이과학생은 그냥 '물리'(현재의 물리1+물리2)라는 과목을 공부하는 식이었다. 현재의 생물1은 과학1(상), 현재의 지학1은 과학1(하)라는 과목으로 계열구분 없이 1학년때 이수했다.

덤으로 수리탐구2에서는 여러 과목을 섞어서 출제한 문제들도 일부 출제되었다. 애초에 수능시험을 도입할 때 취지 중 하나가 통합적 사고력이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가능했다. 한 예로 1997년 인문계 수리탐구2 34-35번 문제를 보면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신항로 개척 중 쓰여진 기행문 일부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지문을 보고 풀어야하는 34, 35번을 풀기 위해서는 두 문제 모두 세계사 및 세계지리 지식을 둘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 요즘처럼 자신의 선택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하듯 특정 몇 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다가는 망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풀어야 했던 문제를 만들 과목의 조합이 많다보니 학생들의 학습부담만 놓고 보면 6차보다 훨씬 크고, 7차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6]

이러한 살인적인 분량은 최상위권 학생들에게 조차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일례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로 유명한 장승수씨[7]는 96학년도 수능 인문계 전국 5위(추정)를 기록하고 서울대학교 인문계 수석까지 차지했지만 자신의 책에서 "과학 문제 중에 몰라서 아예 찍은 문제도 있었으며 실점의 절반 이상이 과학 과목이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전국 5등짜리가 몰라서 찍은 문제가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갈 것이다. 시험 자체의 난이도도 상당히 높아서 중상위 이하의 문과생 대부분을 아예 물포자, 화포자로 만들어 버렸다.

2.1 1994학년도 수학능력시험 (1993년 8월 20일, 11월 16일)

최초의 수능이었던 1994학년도 수능은 대학별고사(본고사) 이전에 학생의 실력을 1차로 평가하는 예비고사의 성격을 지녔다.[8] 또한 8월과 11월에 수능시험을 각각 치러서 둘 중 나은 점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9] 참고로 이때의 입시 전형으로는 내신+수능(+본고사)의 정시전형(1월 이후)[10]과, 정시 이전에 내신+수능으로만 학생을 뽑는 특차전형(12월)이 있었다.(당시 수시전형은 없었다.) 특차전형의 응시가능 기준컷(보통 백분위 점수를 이용)은 상당히 높았으며, 특차전형 합격자는 정시 응시가 불가능하였다.[11][12] 초중고 12년 공부가 한 날 한 시 시험으로 결정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에 따라 시행된 제도였는데, 제대로 된 준비가 없이 시행하였기에 두 시험의 난이도가 크게 차이났으며,[13] 표준점수 제도가 없어서[14]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1995학년도부터는 한 해 1번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하였다. 이로서 94학번은 핫팬츠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대입시험을 봤던 유일한 세대가 되었다.

또한 이 해 수능은 문/이과 계열분리가 없이 공통으로 출제되어 (선택 과목 없이) 예체능계열을 포함한 모든 수험생이 같은 시험문제를 풀었으며, (본고사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몇몇 대학을 제외하면) 대학교 입학도 문/이과 교차지원이 가능했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을 더 배운 이과 계열 학생들이 유리했다.[15] 지금 기준으로는 당시 시험 범위 교과목이 많은 편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문/이과별 심화과목[16]과 제2외국어, 한문, 실업(상업.공업.농업)/가사, 예체능 과목은 수능 출제 범위가 아니었던 관계로 오히려 기존의 학력고사에 비해 쉬워진 면도 있었다.[17]

당시 인터넷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배치표조차 없었고, 거기에다가 그 전과 다르게 대학별로 다른 날짜에 정시 전형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면서 복수지원이 가능해진데다, 그것도 모자라 요즘같이 가군, 나군 이런 것도 없이 입시 일자만 다르면 원서를 무제한으로 낼 수 있었기 때문에[18], 94학년도 입시는 엄청난 카오스에 빠지게 되었다.[19] 결국 서울대를 제외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들이 다 털렸다.[20] 500점 만점 기준으로 350점대 학생들이 연세대, 고려대에 정시로 합격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성균관대의 경우 서울대, 연고대와 다른 날짜에 전형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서울대, 연고대에 지원한 일부 학생들이 안전하게 성균관대에도 지원을 하게 되면서 성균관대의 경쟁률이 대폭 상승하였다. 그 외에도 서울지역의 경우, 동국대, 한국외대, 세종대, 홍익대 등이 가장 많은 대학들이 전기 정시모집을 하는 날과 다른 날에 전형을 실시하면서 수험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경쟁률이 크게 올라가는 진풍경을 보였다. 그리고 대학은 엄청난 전형료 수입을 올렸다. 특히 1월 12일에 홀로 전형을 한 세종대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높은 경쟁률을 보여 전형료 수입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93년 신문기사

서울대의 경우 1000점 만점 중 400점이 본고사이다 보니, 최고점 불합격자와 최저점 합격자가 심하면 200점까지 차이나는 등 본고사 점수에 따라 변별이 컸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수능 162점(200만점)이 본고사를 잘 보아서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 162.8점이 본고사를 잘 보아서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하였다.

2.2 1995학년도 수학능력시험

1995학년도 시험은 1994년 11월 23일에 실시되었으며, 이때부터 수능을 연 1회 실시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이유때문에 인문, 자연, 예체능 3가지 시험으로 실시되었다. 예체능이 94학년도와 동일한 출제범위였으며, 인문, 자연계열은 여기에 해당 영역의 과목이 추가되었다.
94학년도 1차 시험보다는 어렵게, 94학년도 2차 시험보다는 쉽게 출제되었다.
전국 수석은 200점 만점 중에 194점[21]을 맞은 부산과학고의 정성택 군.당시 신문기사
그리고 성적표가 뒤바뀌어 통지된 사건이 있었다.당시 신문기사

또한 2006학년도까지 수요일날 실시되었다.

2.3 1996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역대 수능 시험 난이도 중 콩라인[22]


1996학년도 수능은 1995년 11월 22일에 실시되었다. 제도는 전년도와 동일했고, 마지막 200점 만점 수능이었다. 1997학년이 역대 최악의 불수능으로 워낙에 유명한데다, 200점 만점 시절이라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96 수능 역시 상당한 불수능이었다. 전국수석이 188.7점인데, 400점으로 단순환산하면 377.4점이다. 이과 164점(400점 환산 시 328점)이 0.6%였다. 특히 언어영역이 94년, 95년보다 매우 어렵게 출제되어 수험생들은 1교시부터 멘붕에 빠졌다.

엘리트 DC인
파일:Attachment/대학수학능력시험/역사/99.98.jpg
수리가형 1등급 컷 68점/100점 (이는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이다. 당시엔 등급제가 없었다. 등급제는 한참 뒤에 도입되었다.) 96수리의 위엄

2.4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전설적인 난이도를 자랑하는 수능 시험

단지 문제 난이도만 높았던 것이 아니다. 95 ~ 98학년도 수능은 역대 수능 사상 시험범위가 가장 넓었다. 즉 수험생이 공부해야 하는 과목 숫자가 가장 많았던 수능이었다. 게다가 모두 필수과목이었다. 참고로 99학년도 수능부터 선택과목제도가 도입되면서 과목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게 된다. 고작(?) 6~7과목[23]만 치르는 현재의 수험생들이 보면 기절초풍할지도 모른다.

한편 96학년도 수능에서부터 등장한 탐구영역에서의 과목간 통합형 문제가 97학년도 수능에서 본격화 되었다. 그리하여 예컨대 <물리와 생물이 결합된 문제>, <물리, 화학, 지구과학이 결합된 문제>, <국사, 세계사, 세계지리가 결합된 문제> 등이 마구마구 출제되었다. 요즘처럼 자신이 선택한 과목만 치르는 시스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24]

계열출제범위 (모두 필수[25])
문과국어, 영어, 수학[26], 과학Ⅰ-상[27], 과학Ⅰ-하[28], 과학Ⅱ-상[29], 과학Ⅱ-하[30], 정치경제, 사회문화,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국민윤리
이과국어, 영어, 수학[31], 과학Ⅰ-상, 과학Ⅰ-하, 물리, 화학[32], 정치경제,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국민윤리
예체능국어, 영어, 수학[33], 과학Ⅰ-상, 과학Ⅰ-하, 과학Ⅱ-상, 과학Ⅱ-하, 정치경제,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국민윤리

총 4교시로 구성되었다.

교시시험영역
1교시언어영역[34]
2교시수리 · 탐구영역(Ⅰ)[35]
(점심)
3교시수리 · 탐구영역(Ⅱ)[36]
4교시외국어영역[37]


1996년 11월 13일 실시되었다.

처음으로 400점 만점 제도를 도입한 수능으로 수능 역사상 가장 난이도가 높았다.

여러 가지 수치가 그 비범함을 말해주는 수능이다. 400점 만점에 373.3점을 받은 제주 대기고의 학생이 자연계 전국 수석을 차지했으며,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부로 진학하였다.[38] 자연계 차석 (전국 차석)은 371.7점이었다. 인문계 수석은 370.2점, 여자 수석은 368.7점(재수생, 자연계 전국 5등)이었다. 총점 기준으로 전국 4%[39]가 원점수 400점 만점에 인문계 279점, 자연계 286점이었다. 1%선은 인문계 308점, 자연계 313점에서 형성되었다. 참고로 당시 서울대 법학부의 입학 평균 성적은 330점 근방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320점만 받아도 서울대의 웬만한 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 점수였다.[40] 한편 300점만 받아도 서울대 중하위권 학과를 갈 수 있었다. 280점이면 연고대 하위권, 240점만으로도 중경외시와 육군사관학교를 갔고, 반타작인 200점으로도 건동홍급이였다.[41]

과목별로 언어영역의 경우에는 120점 만점에 97점 정도(100점 만점에 81점)가 상위 4%정도였으며(당시에는 등급의 개념이 없었다) 110점 이상(100점 만점으로 91.67점)이 전국에 487명(전 수험생의 0.06%, 자연계 217명, 인문계 269명, 예체능계 1명)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어려웠다. 만점은 존재하지 않았고 116~118점인 수험생이 인문계 7명, 자연계 3명이었다.

특히 수리 · 탐구영역(I)[42]에서는 계열 통합으로 80점 만점에 22.92점(전체 평균 100점 만점에 28.65점)이라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였다.[43]

만약 80점(당시 수리 만점)을 받았을 경우 표준점수식으로 계산하면 자연계 187점, 인문계 205점(....). 자연계에서 60점(100점 만점에 75점)이면 1% 수준이었다. 72점 이상(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은 자연계에서 205명(0.06%), 인문계에서 66명(0.02%)이었으며 예체능계에서 1명이었다. 78점 이상이 자연계 10명, 인문계 1명... 97학년도 수능의 난이도에 초점을 맞춘 98수능 대비 모의고사 수리영역 문제들은 괴이한 발상을 요구하는데다가 지저분하기까지 해서 아직도 수리영역의 레전드로 남아 있다.

수리 · 탐구영역(Ⅱ)도 매우 심각하여 120점 만점에 100점 이상(100점 만점에 83.33점)을 받은 수험생이 인문계 294명(0.07%), 자연계 468명(0.13%)이며 110점 이상은 인문계 5명, 자연계 13명밖에 없다. 인문계는 80점(1/3을 틀린 경우)을 받아도 상위 3.7퍼정도였고 자연계도 82점에 3.7%정도였다. 역시 만점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1997 수능이 유별나게 어려웠던 것은 논술을 제외한 대학별 본고사가 완전히 폐지된 첫 해이기 때문에 수능이 본고사를 대체할 성격을 띠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공부를 아무리 하더라도 수능은 풀 수 없다"며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그 때문인지 98학년도 수능은 97학년도 수능에 비해 매우 쉽게 출제되었다(...) 97학년도 수능이 너무 어려웠다는 반성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이 수능부터 수리탐구영역(I)에서 주관식 단답형 문제가 최초로 출제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지금의 주관식 문항과는 조금 달랐는데, 당시에는 25~30번까지가 주관식 문제였고, 25~29번은 두 자리의 정수가 답이며, 음수가 허용되어 음수이면 음의 자리에 마킹을 해야 했다. 또한 30번 문제는 소수 둘째 자리까지 표시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29번 문제는 0.08%의 정답률으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기출 문제집을 풀다가 소수점까지 표시하란 문제가 튀어나오면 이 시절 나온 문항이란 이야기다. 이러한 주관식 답안 표시는 2005년 수능 이후 전 문항 '세 자리의 자연수'로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2.5 19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범위와 각 교시별 영역은 97학년도 수능과 동일하다.

1998 수능은 그 이전의 수능들에 비해 난이도가 상당히 낮아졌다. 일단 총점 1등급 컷(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틀린 것이다. 당시에는 등급제가 없었다. 등급제는 한참 뒤에 도입된다.)에 해당하는 상위 4% 점수가 인문계 338점, 자연계 343점으로 전년도에 비해 50점 이상 치솟았다. 수험생들은 1년전 수능에 맞춰진 모의고사에 1년간 익숙했던지라 자신의 점수가 급등해서 딱 하루 기분이 좋았다가 다음날 학교 갔다가 개나소나 300점 넘은 걸 보고급좌절(...)[44]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물수능은 아닌 게, 98년 수능이 쉬웠다기보단 전년도의 97년 수능이 지나치게 어려웠기 때문. 실제로 6차(99년~04년) 수능들과 비교하면 98년 수능도 어려운 쪽에 속하는 수능이다. 당시 언론 보도 등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점수 인플레로 진학지도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떠들어 댔지만, 현재 수능이 저런 난이도로 출제된다면 오히려 엄청난 불수능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실제로 원점수 390을 넘은 수험생은 전국에 30명이었다. 게다가 1998학년도부터 2001학년도까지가 베이비붐 세대로 재학생수가 지나치게 많아져서 수험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도 있다.

한편 이 해부터 수시모집이 본격 시행되는데, 수시모집에서는 수능 성적을 그다지 많이 고려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서울대학교의 경우 수시모집 예비 합격생은 수능 성적이 상위 10% 안에만 들면 최종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1997년 12월 2일에 서울대학교 사상 최초의 수시모집 예비 합격생 348명[45]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이 가운데 330명이 최종 합격을 하였다.[46]

1998년 2월을 기점으로 여야 정권이 교체되면서 진보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1998년 수능 시험의 난이도 하락 추세는 그대로 수년간 이어져 진보 정권이 주관한 첫 시험인 1999년 수능, 2000년 수능, 2001년 수능까지 지속적으로 난이도는 하락세였다.

98년 수능을 마지막으로 6차 교육과정으로 넘어가게 된다.

3 6차 교육과정(1999학년도~2004학년도)

6차 교육과정이 적용된 1999학년도 수능부터는 사회/과학탐구영역에 수능 사상 처음으로 선택과목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이에 따른 조치로서 표준점수제도가 수능에 도입되었다. 문과생은 공통사회(57점)+선택사회(15점)+공통과학(48점), 이과생은 공통사회(48점)+공통과학(48점)+선택과학(24점)의 시험을 치렀다.

또한 95 수능부터 이어지고 있었던 예체능계열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예체능계열 시험 응시자들은 언어와 외국어는 다른 계열 응시자들과 시험을 똑같이 보고, 수리영역에서는 공통수학(현 고1수학) 100%, 사회/과학탐구영역에서는 공통사회(72점)+공통과학(48점)의 시험을 봤다. 12학번 예체능 수험생들은 미적분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공통사회, 공통과학은 문이과 학생 모두가 응시해야 했으며 7차교육과정에서 문이과 학생들이 준비하는 시험 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범위가 넓었다. 2002년 수능부터는 영역별 점수를 반영하는 대학이 늘어나서 수험생들의 부담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예를 들어 공통사회를 보면 일반사회(현재의 고1 사회에서 지리를 뺀 부분) / 한국지리(고1 사회 지리+한국지리+경제지리) / 국사(국사+한국근현대사) / 윤리(도덕+전통윤리+윤리와 사상)를 공부해야 했다. 때문에 외우기를 잘 못 하는 이과생들은 당시 공통사회 과목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놀라운 건 이게 그나마 5차에 비해서 과목이 대폭 줄어 든 것이라는 거.

공통과학은 외형상으로는 1학년 과정의 1개 과목이었지만, 물리, 화학, 생물, 지학의 주요 부분을 수록하고 있어 실상은 4개 과목과 다름없었다. 문과생에게는 여전히 부담이 됐겠지만 그나마 5차 수능보다는 공부하기 수월했었고, 이과생에게는 5차와 비교할 때 특히 물리, 화학이 거의 통편집 당한 수준인데다 자신이 선택과목으로 공부한 Ⅱ과목의 공통과학 문제는 완전 껌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이과생들 상당수는 공통과학을 만만하게 보기도 했다. (02수능 때처럼 어려울 때는 공통과학이 제대로 뒷통수를 날렸다.)

선택과목의 경우 문과생은 정치 / 경제[47] / 사회문화 / 세계사 / 세계지리 중 택1, 이과생은 물리2 / 화학2/ 생물2 / 지구과학2 중 택1하도록 하였다.

최초로 선택과목 제도가 도입되면서 선택과목의 유불리를 보완하기 위하여 표준점수라는 것도 최초로 도입되었으나, 6차수능에서는 표준점수가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택과목이 하나밖에 없는 데다 그것도 10문제(문과)/16문제(이과)밖에 안 되었고 무엇보다도 원점수가 성적표에 찍혀 나왔으며,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에서 원점수를 많이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과목에 따라 약간의 표준점수 차이는 있었다. 예를 들면 문과에서는 경제가 표준점수에서 가장 유리했으며 사회문화가 가장 불리한 편이었다. 또 이과에서는 물리2가 가장 유리했고 생물2와 지구과학2가 가장 불리한 영역으로 꼽혔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어도 지금처럼 응시집단 수준 봐 가면서 선택과목을 고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과목을 순수하게 고를 수 있었다. 적어도 선택과목을 뭘 골랐느냐에 따라 만점자가 11%가 되느냐 1%가 되느냐의 문제는 없었으니까.

3.1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차 교육과정 수능이 처음으로 실시된 1999년 수능을 기점으로 수능의 난이도는 눈에 띌 정도로 평범하게(?) 조정되었다.[48] 이렇게 평이한 난이도는 2000학년도 수능으로 이어졌으며 2001학년도 수능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한다.
이 해 수능 시험에서는 처음으로 만점자(400점)가 등장하였다. 오승은(한성과학고 3학년) 씨였다.[49] H.O.T.가 누구예요?

3.2 200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전년도에 이어 역시 평이하게 출제되었다. 자연계열을 기준으로[50] 언어,수리,외국어 등 주요 3개 영역의 원점수 전국 평균이 10.8점 상승했고[51], 인문계열 역시 5.1점 소폭 상승했다. 그 외에도 2000학년도는 87만명이 수능에 응시해 역대 최다 수험생수를 기록한 수능이다. 이 해 수능 시험에서도 두번째로 만점자(400점)가 등장하였다. 박혜진(대원외고 3학년)씨였다.[52]
과목별로는 언어영역만 상당히 어려워 언어영역의 만점자가 전국에서 10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115점 이상이 전국에 300명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과목은 상당히 쉬웠다. 예로 자연계 수리의 경우에는 만점자가 3.9~4%에 육박했다.

3.3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계속해서 쉬워지던 수능 시험의 난이도는 이 해에 절정에 달한다. 이과 전국 언수외 평균 23.2점, 문과는 26.7점이나 상승한 것이다. 99수능, 00수능과 비교하면 이과는 34점, 문과는 31.8점 상승한 것. 01 수능에서는 문이과를 통틀어 66명에 달하는 만점자가 속출, 변별력을 상실한 물수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11월 현재까지 최다 만점자가 배출된 수능이다. 비교적 물수능이었다고 평가되는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의 만점자 수를 간단하게 쳐바르는 2001 수능의 위엄 이 때의 명언 : "00년 수능은 언어만 어려웠고, 01년 수능은 수학 한 문제만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 전까지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일부 수험생들이 막상 01 수능에서 평소의 점수를 받고 재수로 돌입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오르비스 옵티무스의 설립자인 이광복(lacri)이 대표적. 심지어는 수능 만점자가 내신 때문에 서울대 법대 정시모집에 떨어지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거꾸로 공신의 대표 강성태는 물수능의 덕을 봤다고 평가된다.

이때 사회적으로 수능 시험의 난이도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나왔다. 더 쉽게 출제해서 대학의 과도하게 경직된 서열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어느 정도 난이도는 유지해야 대입시험으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쉽게 출제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면서 그 다음해 시험은 비교적 어렵게 출제된다.

수학 등의 과목에서 쉬운 문제에 높은 배점을 하고, 어려운 문제에 낮은 배점을 하는 소위 역배점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01 수능에서 처음으로 제2외국어영역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물수능이라는 당해 수능의 특징과 처음 실시하는 시험이라는 특성, 그리고 수능 제2외국어 영역은 총점에 합산되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치루는 시험인데다 반영하는 대학도 없다는 특성 때문에 전설이 되었다. 이 해 치룬 제2외국어 시험 중 압권은 바로 중국어. 01 수능 중국어 시험은 중국어를 하나도 몰라도 한자만 조금 알면 누구나 40점 만점에 30점 이상의 고득점을 할 수 있다는 전설이 되었다. 관련글 아무리 훗날 제2외국어 아랍어 문제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나왔다 해도 당시 시계 문제 (17번)를 넘지는 못했다.

3.4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헬게이트 오픈

지난해의 물수능을 지나치게 의식했는지 02 수능에서 갑작스러운 난이도 상향조정을 단행한다. 98년 이후 쉬운 수능에 포인트를 맞춰 공부한 학생들은 여기에 대규모 크리를 맞으니, 상위 50%의 총점이 전년도에 비해 66.8점이나 하락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상위 50%가 아닌 전체 응시 집단으로 확대하면 하락폭은 더 커진다. 문과는 무려 98.2점, 이과는 91.3점이나 대폭 하락한 것이다. 그것도 언수외 3개 영역에서만 말이다. 100점 가까이 전국 평균이 내려간 것.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 영향으로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2001년도 수능이 난이도 조절에서 실패함에 따라 어느 정도 난이도가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쉬운 수능'이라는 큰 기조 하에서 약간의 난이도 상승 - 총점 평균 약 10~20점 정도의 하락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전년도 입시에서 수능 만점자가 서울대 법대를 탈락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인해 '그래도 만점자는 서울대 법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의 난이도 상승' 정도로 예상하고 있던 것이 당시 일반적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런 예측을 가볍게 뛰어넘는 점수 하락폭이 나온 것.

소위 불수능. 이 때에는 전년도와 완벽히 대조되는 명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이렇게 앞부분에서 이런 문제가 나올 리가 없는데" "이건 평상시에 보던 문제가 아닌데"

6차 수능에 한정해서 최고 난이도이다. 2002년 수능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대충 5차 시절의 98년 수능과 비슷한 난이도였으며 97년 수능보단 상당히 쉬웠다. 일단 97년엔 수석이 370점대였으나 02년엔 390점 넘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며, 97 수능 항목에 나와 있는 주요 대학 커트라인 및 실제 시험지를 보면 97수능과는 난이도 비교 자체가 무리.[53] 다만 01년이 수능 역사상 최고의 물수능이었던지라 변동폭이 심해서 충격이었을 뿐.

3.5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차 교육과정의 마지막 두 해인 2003학년도와 2004학년도 수능은 비교적 난이도 조절에 성공한 편이었다. 사실 03년과 04년 수능은 응시자 평균점수로 가늠할 수 있는 난이도에 있어서 물수능인 01 수능보단 불수능인 02 수능으로 볼수있다. 다만 02 수능은 전년도인 01 수능이 만점자가 수십 명에 달하는 수능 역사상 최악의 물수능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점수가 폭락하여 불수능이 된 특이한 경우이고, 03과 04 수능은 이미 02 수능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딱히 논란이 없었던 것. 만일 02 수능도 01 수능과 같은 물수능이었다면 03과 04 수능도 논란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 수능에 있어서 절대적 난이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예년 대비 난이도 변동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f(x)뿐만 아니라 f'(x)도 중요한 법 난이도 혼란은 어차피 그대로였다(...)
그러나 03 수능에서는 소수점 점수 반올림으로 인해 대학 당락이 좌우되는 문제가 일어나 소송으로까지 이어져서 그 이후 소수점 배점을 아예 폐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해에는 전년대비 이과 언수외 전국 평균이 2.3점, 문과는 1.1점 하락하는데 그쳐 그나마 널뛰기 난이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전년도에 이어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 수능부터 모의평가가 도입되었다. 그 이유는 위에 나온것 처럼 난이도 조절에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3.6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04 수능에는 언어영역에서 오답으로 인한 대학수학능력시험 중 사상 최초의 복수정답 인정이 일어났다.

과탐이 엄청나게 어려웠다. 이과와 문과는 주요 3개 영역 전국 평균이 전년대비 17.5점, 15.9점 상승했지만 그래도 99~01수능보다는 어려웠다 보는게 일반적 견해.

사실 2004학년도까지는 전 영역의 점수를 더해 총점을 산정하는 식의 전형이 주가 되었으므로 언수외만 따로 떼어 본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난이도는 주로 총점 기준으로 얘기되었는데 이 해에는 언수외에서 상승한 점수가 과탐에서 모조리 깎아먹혀 총점의 상승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선 수능 수험생들의 경우처럼 5개 영역 모두 똑같은 중요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과의 경우 공통사회 미반영, 문과의 경우 공통과학 미반영 전형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54] 이과생은 공통사회를, 문과생은 공통과학을 아예 버려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55] 결론적으로 02~04년간의 세 수능은 대충 비슷한 난이도로 묶이는 편이다.

역시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4 7차 교육과정(2005학년도-2016학년도)

복불복, 눈치 게임

7차 교육과정 수능은 간단히 저 두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6차 교육과정까지는 공통과목 및 공통범위가 많다보니 문이과 구분 없이 어려우면 모두가 어렵고, 쉬우면 모두가 쉬운 수능이 되었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으로 들어오면서 수시 및 수능 영역 점수 부분 반영이 정착되고 선택과목이 보다 세분화되고 문이과가 공통으로 배우고 수능을 치는 영역이 크게 줄어들면서 전체적 특징이 어떻다고 딱 잘라 정의내리기 보다는 각 과목별로 어떤 특징이 있고, 그 과목별 조합이 최상의 조합이었는지 최악의 조합이었는지 평타쳤는지로 결과가 상이하게 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삼사. 즉, 6차까지는 물을 먹어도 다 같이 먹고 빅엿을 먹어도 다 같이 먹는 제도였는데, 7차는 같은 시험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각 조합에 따라 누구는 물을 조금만 마시고 누구는 익사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예를 들어 6차까지는 국사 과목이 엉망으로 출제된다면 문이과 구분 없이 전부 여기에서 물을 마시고 들어가지만, 7차에서는 이과는 당연히 해당 없고, 문과에서도 국사를 선택한 학생들만 물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탐 2개 영역 반영 대학에 지원할 계획이고 국사는 애초에 심심해서 선택한 버린 사탐 2개 영역 중 1개 였다면 물을 마실 일도 없지만, 이게 주력 과목이었다면 물을 홀로 마시게 된다.

6차에 비해 더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과목은 언어영역 하나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 그나마 이거도 2009년 언어영역 난이도가 급상승 하에면서 별로 쉬워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수리와 외국어의 경우 전반적으로 난이도가 상승했으며, 수리 가형과 나형, 탐구 영역의 아스트랄한 난이도 밸런스 조정은 7차 교육과정 하의 수능에서 매년 문제를 일으켜 왔다. 탐구영역에서 기술한 대로, 너무 쉽게 나와서 만점자가 몰릴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1등급 받은 사람(=만점인 사람) 비율이 2등급 커트라인까지 먹어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리저리 복불복인 제도.

이 문제는 표준점수 제도와 대학 입시중 수리 가형/나형 반영비율의 아스트랄함, 그리고 각 대학별로 상이한 탐구과목 반영비율에 기인한다. 즉 이과학생이 지원할 수 있는 대학중 수리 가형/나형을 모두 반영하는 대학이 있을 경우, 상대적으로 쉬운 나형이 오히려 깔아주는 베이스 학생들 덕분에 표준점수가 대폭 높아져 나형 표준점수 >>> 가형 표준점수(+보정 환산점수)라는 환상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이 덕분에 나형 과탐이라는 변태적인 공부를 하게 되는 학생들을 양산하게 된다. 그리고 탐구과목의 선택은 사실상 복불복으로 변해버렸다.(…)

이로 인해 교육부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사교육을 증가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4.1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7차 교육과정에 따라 05년 수능부터는 수능시험의 과목과 규정이 대폭 개정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탐구영역에서 있었는데, 우선 실업계 학생들을 위한 직업탐구가 신설되었고, 수능시험 응시자는 과학탐구/사회탐구/직업탐구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응시하도록 되었다. 사실 7차교육과정에서는 문이과 구분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과학탐구/사회탐구/직업탐구 중 하나만을 택해 응시하도록 제도가 변경되면서 이때부터 자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문과생, 역사와 사회를 전혀 공부하지 않는 이과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학교에서도 문과에게는 과학교육을 거의 하지 않고, 이과에게는 역사/사회/지리 교육을 거의 하지 않게 되어 문이과간 구분과 배움의 장벽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만점은 4개의 탐구과목을 응시할 때를 기준으로 언어, 수리, 외국어 각각 100점 만점에 탐구영역 4과목 50점[56]씩을 합쳐 500점이다. 이외에도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 아랍어와 한문이 추가되었다. 이 수능부터 2009학년도까지 수험생수가 엄청나게 급감한 상태에서 응시를 하게 된다. 역시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수능 제도의 개선 자체는 좋았지만, 탐구영역이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사회탐구 영역이 너무 쉽게 출제되어 어지간한 사탐 1등급 컷이 48점 이상에서 잡혔고, 일부 과목[57]은 2등급이 아예 먹혀 2점짜리 한 문제만 틀려도 바로 3등급으로 주저앉는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수리와 외국어는 대체로 6차 수능보다 어려워졌으며, 특히 외국어 영역의 경우 그 동안 독해 위주의 공교육이 중시하지 않았던 어법과 어휘에서 문제가 대거 출제되어 난이도가 급상승하게 되었다. 또 이 해 휴대폰을 이용한 조직적인 수능 부정사건이 처음으로 밝혀서 수험생 200여명의 성적이 무효처리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다음 수능인 06 수능부터는 시험장에서의 전자기기 소지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이때부터 언수외(국수영)를 제외한 탐구 영역, 제2외국어 영역이 단일 유형이 되었다.

4.2 200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06 수능은 11월 당시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때문에 시험 일자가 16일에서 23일로 미루어졌다. 언어영역은 물수능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언어 1등급 컷이 100점 만점에 98점, 2등급 컷이 95점이었으며 언어영역 전국 평균이 76점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2009/2011수능 언어영역의 전국 평균은 64점이었다. 무려 12점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소는 전년까지만 해도 보너스 스테이지로 인식되었던 사회탐구 영역의 반전이었다. 대부분의 등급컷이 40점 초반에 잡히면서 모의고사에서 사탐 1등급을 받던 학생들이 본수능에서 3~4등급 받는 현상이 숱하게 나타났다. 이 해부터 본격적으로 윤리, 국사가 지나치게 난해하게 출제되기 시작했으며, 이전까지 '교과서만 봐도 만점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사회문화는 말장난과 통계가 난무하게 되었다. 역시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 수능은 수요일에 실시한 마지막 수능이다.

4.3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2007 수능은 난이도가 평이했으므로, 중위권 수험생의 변별력도 같이 올라가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언어는 쉬웠으나 과탐이 어렵게 출제되어서 과탐의 표준점수가 70점을 웃돌았고, 물리2 만점자는 전국에서 9명 나왔다. 역시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이 수능부터 지금까지 목요일에 실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문제지 배송을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수능시험을 원활히 치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4.4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능 등급제

08 수능은 '수능 등급제'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하지만 당시 문제였던 것은 '등급제 정책' 자체였기 때문에 항목이 아예 따로 개설되어 있다.

진보 성향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추진한, 수능 등급제는 혁신적인 정책인만큼, 많은 논란이 뒤따르던 제도였는데, 그 다음해에 보수 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바로 폐지되었다.

2008 수능은 표준점수백분위를 기재하지 않고 성적표에 등급만을 표기하여, 오직 수능 등급만이 입시 자료로 쓰이게 되어 저주받은 89년생, 죽음의 트라이앵글[58]등의 신조어가 생겨났다. 1~2점 차이가 나는 학생들 사이에는 별다른 실력차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10~20점 차이가 나는 학생들의 실력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린 꼴. 09년 수능부터는 다시 표준점수제로 환원되었다. 역시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물리2 과목에서 복수정답이 있었다. 이로 인해 처음에서 없다고 말했던 평가원장이 결국 복수정답을 인정하면서 사퇴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하여 등급이 바뀐 성적표가 다시 배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여담으로 이 수능은 역대 수능 중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은 수능 시험이다.

4.5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등급제가 폐지되고 표준점수제로 바뀐 09 수능은 전체적인 난이도와 변별력이 괜찮았다고 평가되지만, 수리영역에서 불쇼가 펼쳐졌다. 07, 08년처럼 1등급이 90점대 초반에서 갈릴 줄 알았던 수리는 1등급 컷이 가형 82, 나형 79점으로 전년 대비 18, 16점이 떨어지면서 희대의 불수능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 해 많은 학생들이 "이런 걸 어떻게 100분 내에 다 풀어"라며 점심시간에 탄식과 눈물을 쏟아냈다. 당시 수리 영역 성적이 그대로 상위권 대학 배치표와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 또한 외국어의 난이도가 전년에 비해 상승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사회문화에서는 4%라는 사상 최악의 정답률을 기록한 문제도 있으며[59](사회·문화 항목 참조), 경제에서는 괴악한 계산 문제가 대거 출제되어 1등급 컷이 37점으로 나타났다. 근데 웃기는 건, 수능 역사 상 가장 괴랄맞은 난이도를 지닌 시험임에도 전 영역 만점자가 나왔다는 것(...) 무려 7년 만의 기록이라고 한다. 당시 환일고에 재학 중이던 박창희 군이 특기자 전형임에도 불구하고 총점 570점[60]으로 표준점수 사상 최고점을 기록하여, 2000학년도 이후 최초의 전 영역 만점자가 되었다.

서울대 의예과에 진학한 박창희 군은 자신의 성적표를 공개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대학수학능력시험/역사/8974.jpg

4.6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0 수능은 대체적으로 물수능이라는 평을 들었던 시험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려웠던 09수능과 11수능 사이에 끼여서 상대적으로 물수능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라 볼 여지도 있다. 수리 영역의 난이도를 제외하면 평이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모두의 뒤통수를 친 영역은 수리 영역, 특히 '나'형으로 09 수능의 불수리에 비하면 너무 쉬운 나머지 수리를 삐끗해서 재수한 학생과 수리에서 잭팟이 터진 학생의 대비가 극명했다. 사탐에서는 점점 교과 내용을 벗어난 과목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해였다. 특히 국사법과 사회. 평이한 난이도를 보였으나, 전년도와는 다르게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 해는 6월, 9월 평가원은 어렵게 나왔는데 11월 본수능에서는 쉽게 나왔다는 의견[61]들이 있었다.

수시 1학기 모집이 폐지되어 전년도에 비해 수험생이 증가하였다.

2004학년도와 2008학년도에 이어 지구 과학Ⅰ 19번 문제에서 복수정답이 나오기도 하였다. 기사

4.7 201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1수능은 올해 수능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평가원장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언수외 모두 어려웠다. 적어도 점수와 변별력만으로 보면 2005수능 이래 가장 이상적인 시험이었다. 다만 외국어가 너무 극혐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언어영역은 6월, 9월 모의평가에 비해 어려워졌다. 다만 언어영역은 쉬워졌다는 학생들도 많다. EBS에서 70% 연계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EBS를 한 번도 안 봤는데도 98점을 맞았다는 학생들도 있는 실정. 수리영역 가형은 9월보다 약간 쉬운 수준이었고, 수리영역 나형은 6월, 9월보다 어렵게 출제되었다. (그러나 수리영역 자체의 난이도를 수능에 한정짓는다면 2009년 수능에 버금가는, 최상의 난이도로 출제되었다. 특히 수리 가형은 1등급 컷이 79점에 잡히는 사상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만점자는 고작 35명이었다. 나형은 그나마 쉽게 출제되었다.)

특히 외국어에서 수능 역사상 최악의 불쇼가 펼쳐졌다. 게다가 외국어 사상 최악의 정답률을 기록하는 문제도 등장하였다. 빈칸추론 26번 문제는 정답률 12%를 기록했다.이게 그 문제다. 문제의 출처가 된 책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 기록은 바로 3개월 전 9월 모의평가 빈칸추론 28번 문제(심리학 관련지문)의 18%를 갈아 엎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3번 찍고 장렬히 한 문제를 날려먹었는데, 이 문제 해결의 키워드는 본문이 아닌 선택지에 대한 세밀한 추론이었다. 실로 이 문항이 왜 빈칸 추론인지 곱씹어 볼 수 있게 해준 문항이었고, 수험생들은 충격을 먹었고 평가원은 여기에 맛을 들여서 이 때부터 빈칸의 변별력이 미친 듯이 높아지게 된 기념비적인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답은 5번, 그러니 빈칸 추론을 풀 때, 특히 비연계라면 최대한의 여유시간을 갖고 모든 선택지를 철저히 해석하는게 주 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9월보다 다소 쉽게 나온 수리 가형의 만점자는 전국 35명으로 전체 응시자의 0.02%에 그쳤다. 언어 영역 역시 0.06%, 외국어도 0.21%에 그쳤다. 이는 2005수능 이래 역대 최저 수치이다. 언어는 08수능에서 기록한 역대 최저 1등급컷인 90점을 찍었고 외국어 역시 06수능에서 기록된 역대 최저 1등급컷인 91점을 90점으로 갱신했다. 그리고 대망의 수리 가형은 09수능에서 기록한 최저 1등급컷인 82점을 79점으로 떨어뜨렸고 백분위 100% 컷은 90점. 다만 나형은 전년보다는 어려웠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평이했다. 사회탐구영역의 정치(교과)가 어렵게 출제되어 1등급컷이 38점에서 형성되었다.(메가스터디 집계 정답률 50% 이하 문제가 11문제...)

한편,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 아랍어가 처음으로 표준점수 100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최고점이 90점에 형성되었다. 이 해 수리 가형 응시자의 주요 3개 영역 전국 평균은 168.9점, 수리 나형 응시자는 162.2점인데 이는 지난해 대비 각 각 12.7점, 7.8점 떨어진 것으로 역대 7차 수능중 가장 낮은 수치다. 이로 인해 전년도에 이어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탐구영역을 제외한 언수외 영역 만점자로 따져도 단 11명이었다.(이과 언수외 만점자는 한 명도 없다. 전부 문과.)

더욱이 이 시험은 난이도 자체도 문이과를 막론하고 극혐이란 소리가 절로 나올 수준이었는데, 여기에 불량샤프의 문제가 겹치며 최악의 환경에서 치러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로 수능샤프는 최고의 품질로 신뢰를 받던 샤프였는데 이 시험에서는 한 글자를 쓸 때마다 뚝뚝 부러지는 샤프심으로 인해 제대로 문제를 풀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혹자에 의하면 수리영역에서 도저히 샤프로 문제를 풀 수 없어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풀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4.8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2012학년도 수능부터 2007년 개정 교육과정 (속칭 7.5차 또는 8차 교육과정)이 적용되면서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다. 수리영역의 경우 나형의 시험범위에 '함수의 극한'/'다항함수의 미적분'이 부활한 것이 가장 쇼킹하다. 재수생, n수생들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중. 하지만 다항함수의 미적분은 난이도도 수열/극한이나 순열/조합에 비해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라서, 실제로는 범위는 많아지고 난이도는 낮아진 셈.

가/나형에 공통적으로 '행렬과 그래프', '모평균의 추정', '중복조합', '다항정리' 등이 추가되었으며[62], 가형에는 '일차변환'이 부활되었다.

탐구영역은 종전 4과목에서 3과목만 응시하도록 바뀐다. 탐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자신이 어려워했던 과목 하나를 뺄 수 있는 만큼 수험생들에게는 유리하다.
서울대를 제외한 학교의 경우 원래부터 2~3개의 과목만 요구했던 만큼 과목 선택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의 경우 사탐에서는 여전히 국사를 요구하며, 과탐에서는 I과목 2개와 다른 II과목 1개[63]를 요구하기로 결정되었다.

2012년도 수능부터 하도 징징거리는 학생들이 많아서[64] OMR 판독에 기존의 판독기가 아닌 이미지 스캐너가 도입된다. 이미지 스캐너는 기존과는 달리 컴퓨터 용 사인펜으로 마킹한 것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답안지에 있는 모든 흔적을 인식한다. 즉 예비마킹이든 연필 표시든 답란에 흔적을 남기면 마킹으로 간주된다. 이번 수능은 중복표기가 넘쳐날듯 잘쓰던 OMR을 징징거리는 몇몇 놈들 때문에왜 바꿨느냐는 의문이 많은데 항간에는 이미지 스캐너 회사와의 비리가 있다카더라. 수리 가형 응시자의 언수외 전국 평균은 전년 대비 16.5점, 나형 응시자 기준으로는 15.2점 상승해서 185.4점, 177.4점이 됐다. 이는 각 185.0점, 178.3점을 기록한 07수능과 비슷한 수준이다. 나형 기준으로 하면 오히려 12수능이 약간 더 낮다. 이로 인해 2012학년도에서는 전영역 만점자가 무려 30명에 달하였다.

4.9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3수능은 대체로 무난했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언어영역의 등급컷은 9월 모평때와 마찬가지로 또 98점[65]에서 형성되었다. 수리 가형은 객관식은 어려웠지만 주관식이 상대적으로 쉬워서 등급컷이 92점으로 높게 형성되었다. 수리 나형은 2012학년도처럼 마지막 문제를 제외한 다른 문제들은 평범한 난이도로 냈지만[66] 25번 문제와 29번 문제에서 엄청난 오답률을 기록하여 등급컷은 92점으로 형성되었다. 외국어영역은 9월 모평급의 헬 난이도를 선사해주셨다. 어법 2문제에서 빈칸 유형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오답률이 발생했고[67], 고난도 유형으로 유명한 빈칸추론 문제 역시 난해한 내용과 선지의 비유적 표현 때문에 매우 낮은 정답률을 보여주었다. 또한 2012학년도와는 달리 수능특강과 인터넷 수능에서 연계가 많이되어 체감 연계율도 매우 낮아졌다. 하지만 1등급컷은 93점에서 형성되었다.[68]
만점자는 이과 3명 문과 3명으로 총 6명이다.

탐구영역은 대부분 헬게이트였다. 다만 윤리는 1등급컷이 48점에서 형성되었고, 지구 과학Ⅰ은 1등급컷이 50점에서 형성되었다.

4.10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수리영역,외국어영역(영어)의 명칭이 국어,수학,영어로 변경된다. 명칭의 변화는 교과서 개념 위주로 출제한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또한 국/영/수가 쉬운 시험(A형)과 어려운 시험(B형)으로 나누어져 응시한다. 국어와 수학을 모두 B형으로 선택하는 것은 불가하므로 문과학생은 BA조합으로, 이과학생은 AB조합을 많이 선택하였다.

탐구영역은 일본의 대학입학센터시험과 비슷하게 유사과목을 통폐합하여 사회탐구는 '경제', '세계사', '윤리'은 유지하고 '법과사회', '정치', '사회문화'가 '일반사회'로 통합되고, '국사'와 '한국근현대사'는 '한국사'로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는 '지리사회'로 하고 과학탐구는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명'을 각각 I과 II을 통폐합을 하고 직업탐구는 '농업정보관리', '농업이해', '농업기초기술'는 '농생명산업'로 '공업입문', '기초제도', '프로그래밍', '디자인일반'는 '공업', '상업경제', '정보기술기초', '컴퓨터일반', '회계원리'는 '상업정보', '수산일반', '수산해운정보처리', '해양일반', '해사일반'=>'수산.해운', '식품과영양'과 '인간발달'는 '기사.실업'로 통합하였으나 큰 반발로 인해 탐구영역 개편은 결국 백지화될 뻔했으나 과학탐구은 현행유지을 하고 사회탐구는 '사회문화', '경제', '한국지리', '세계지리', '세계사'는 그대로 유지 되었고 '동아시아사'는 세계사에서 분리 되었고 '국사'와 '한국근현대사'는 예정대로 '한국사'로 통합 되었으며 '경제지리'은 폐지 되었고 '윤리'는 '생활과윤리'와 '윤리와사상'으로 분리 되었고 '법과 사회'와 '정치'는 통합하여 '법과 정치'가 되었다. 직업탐구는 17개 과목 중에서 '농업정보관리', '정보기술기초', '수산일반', '해사일반', '식품과영양', '디자인일반', '프로그래밍' 등 7개가 폐지 되었다.

또한 제2외국어/한문영역은 2014학년도 부터 수능에서 분리 시키는 대신 이 영역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학회나 유관기관에서 시험을 개발해 대입에 활용하도록 했지만 수험생 선택권을 오히려 제한한다는 이유로 무산 되었으며 결국 최종 개편안은 제2외국어을 유지을 하면서 여기에 이번 학년도 부터 베트남어가 새롭게 추가되면서 제2외국어 과목은 9개로 늘어났다. 충남외고 베트남어과와 동남아 국제결혼을 의식한 듯 하나 현실은 아랍어 열풍의 재림(...)

국어와 영어는 5문항씩 줄어들어 각각 각 45문항으로 바뀌며, 기존 언어영역에 있던 듣기평가가 폐지되고 영어듣기는 22문항으로 늘어난다. 수학은 문항수와 출제범위 등의 변동은 없으나, A형이 기존의 나형, B형이 기존의 가형에 해당하며 한 그림으로 두 문제를 만드는 세트형 문항이 추가되었다. 탐구영역은 최대 2과목만 선택 가능하며 문항수와 시간은 변동이 없다.

일각에서는 20년만의 대수술이라는 처음과는 달리 용두사미식 개편이라고 하기도 한다.
참고로 원래 2014수능 개편은 예정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이 1년만에 나오면서 그에 따라 고교 교육과정이 변했고 그에 맞추어 수능 개편안이 나온 것이다.
새로 바뀌는 2014학년도 수능에 대비한 예비시행평가가 2012년 5월 17일,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의 2학년 재학생들을 상대로 시범적으로 치뤄졌다. 기출문제

한편 77세의 나이로 2014학년도 수능을 응시하는 할머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이과 기준으로 국어 A형부터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여주더니 6월, 9월 모의고사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로 수학 B형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멘붕시켰고, 영어 B형마저 EBS 연계율은 높았지만 문제는 어려워 답을 못 찾는것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만들었으며, 가장 많은 우려와 기대를 불러일으키던 과탐마저 극혐의 난이도로 확인사살을 꽂았다. 다만 사회탐구 영역은 물수능이 판이 쳐서 가장 낮은 1등급 컷이 46점의 한국지리였다. 사탐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최소한 예년 이상으로 어려웠다는 평이며, 특히 생물과 화학은 전통의 이과 상위권 학생들의 점수밭이었지만 해당 과목에서 좆망해 의대를 노리던 학생 여럿이 꿈을 접었다.

세계지리 8번 문항(3점)이 복수정답이 있었다. EUNAFTA를 비교하는 문제였는데, 지도상에는 '2012' 라고 적혀 있었던 것.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2년까지 NAFTA 회원국의 국내총생산이 EU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천재교육, 교학사에서 출판한 교과서를 토대로 출제한 문제인데다 소거법으로 정답을 골라낼 수 있고, 지도 하단의 '2012' 라는 숫자는 2011년 교과서 배운 수험생에 2012년 상황 물은 것이라고 밝히며, 수능에서는 교과서 및 EBS 교재가 사실보다 우선한다는 이유로 고교 과정에서 최선의 답은 EU의 국내총생산이 NAFTA보다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라며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소송까지 휘말려 버렸는데, 제 1심에서 법원이 평가원 측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항소한 제 2심에서는 소송한 수험생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문제 자체를 오류라고 판정한 것. 결국 평가원은 상고를 포기하고 해당 문항의 오답자 전원을 정답자 처리하였다. 결국 입시 결과가 뒤바뀌게 되었다.

또한 일부 시험장에서는 불량한 CD로 인해 영어 듣기 평가를 억울하게 망쳤다고 전하는 수험생들도 있었다.

국수영탐 만점자는 BAB사 선택자 (문과) 32명, ABB과 선택자 (이과) 1명[69] 계 33명으로 집계되었다. 전체적으로 사탐이 물, 과탐이 불로 나온 영향이 큰 듯.

4.11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 수준별 수능이 폐지된다. 이로서 수준별 수능은 바로 흑역사 인증. 메가스터디 손주은이 입시설명회에서 했던 "A·B형, 이 제도 1년만 하고 바로 없어지든지,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아예 시행도 안하고 없어질 제도"라던 독설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또 NEAT의 대입 미반영 역시 확정되면서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영어는 45문항에서 듣기가 17문항으로 줄어들고, 독해가 28문항으로 다시 늘어났다. 또 영어 독해 난이도의 주범으로 불리던 빈칸추론이 4문제로 축소강제 너프되었다.

시행 후 평가는 난이도 조절, 사건사고 양면에서 역대 최악의 수능. 난이도 측면에서 영어 및 수학은 역대급 물수능[70], 국어 B와 과탐은 말그대로 불지옥이라는 양극단을 오갔다. 거기다 영어와 생명과학2에서 사상 초유의 1수능 2복수정답 사태가 터졌고, 수학A에서는 문제집과 동일문항 출제라는 사고가 터졌다.

4.12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2015년 11월 12일 시행되었다. 수준별 A•B형 체제로 시행된 마지막 시험이다. 이후에는 국어는 통합, 수학은 계열별로 분리되어 시행된다.

국어 영역에서는 전년도의 난이도에 비해서는 난이도가 쉬웠지만 전체적으로는 어려운 시험의 난이도를 보였다. 비문학 지문의 난이도는 15 수능과 유사했지만 문학이 쉬워 체감 난이도는 낮아졌다. 또한 너무 쉬운 난이도에 변별력이 없다고 비판받던 영어 영역에서 평가원의 화끈한 뒤통수로 수많은 학생들이 변별당했다. 6월과 9월에 시행되는 평가원 모의시험은 그해 수능의 예고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모의시험은 쉽게 내고 수능은 어렵게 내면서 모의시험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다. 물리2에서는 만점자 비율이 11%가 나와 완전히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며 한 문제만 틀려도 3등급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생명과학2는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하는 등 탐구 영역에서 과목별 난이도 편차가 상당한 시험이었다.

2016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16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문과 9명, 이과 7명이다. 그리고 16명은 전원 서울대에 합격했다.
이과의 경우 전원 서울대 의대행이라 이탈 가능성이 없어보이며 문과 역시 서울대와 비견되는 대학이 없으므로 이탈하지 않고 전원 서울대에 등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저작권 문제로 기사 링크로 대체
[1]

5 시행 예정

5.1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 이과 구분의 폐지가 제안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3가지 형태의 안이 나왔다.

1안현행[71]대로 국어, 수학의 A/B형을 유지하고 사회/과학탐구를 문, 이과 각각 구분하여 치르는 것
2안국어, 수학의 A/B형 구분을 없애되 수학에 선택과목을 추가하여 약간의 차별성을 두고, 사회/과학탐구 선택과목 중 문과는 사회 2과목/과학 1과목, 이과는 사회 1과목/과학 2과목을 각각 선택하여 응시하도록 하는 안
3안문, 이과의 구분 전체를 폐지하여 국어,수학,영어,사회,과학,한국사(+제2외국어)의 6~7개 과목을 문,이과 모두 필수로 응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 사회,과학은 1학년 수준으로 출제된다고 한다.

만약 2, 3안이 채택될 경우, 2004 수능 이후로 13년만에 문이과가 사과탐을 동시에 치는 상황이 된다.[72] 이때 2,3안의 경우 국어, 수학 수준별 수능이 폐지[73]되고, 위 모든 안에서한국사(교과) 과목이 사회탐구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되는 것은 공통된 점이다.

그러나 문, 이과 구분의 폐지는 2021학년도까지로 유보되고, 최종 개편안은 1안과 2안의 혼합형으로 결정되었다. 국어와 영어는 수준별 시험이 폐지되고 수학은 이전처럼 가/나형 체제로 환원된 것. 또한 사회탐구/과학탐구는 여전히 분리. 한국사(교과) 과목은 다른 과목과 달리 절대평가로 시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6 시험 일자

1994학년도 수능1993년 8월 20일 금요일[74],
1993년 11월 16일 화요일[75]
1995학년도 수능1994년 11월 23일 수요일[76]
1996학년도 수능1995년 11월 22일 수요일
1997학년도 수능1996년 11월 13일 수요일
1998학년도 수능1997년 11월 19일 수요일
1999학년도 수능1998년 11월 18일 수요일
2000학년도 수능1999년 11월 17일 수요일
2001학년도 수능2000년 11월 15일 수요일
2002학년도 수능2001년 11월 7일 수요일
2003학년도 수능2002년 11월 6일 수요일[77]
2004학년도 수능2003년 11월 5일 수요일[78]
2005학년도 수능2004년 11월 17일 수요일
2006학년도 수능2005년 11월 23일 수요일[79]
2007학년도 수능2006년 11월 16일 목요일[80]
2008학년도 수능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2009학년도 수능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2010학년도 수능2009년 11월 12일 목요일
2011학년도 수능2010년 11월 18일 목요일[81]
2012학년도 수능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2013학년도 수능2012년 11월 8일 목요일
2014학년도 수능2013년 11월 7일 목요일[82]
2015학년도 수능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2016학년도 수능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2017학년도 수능2016년 11월 17일 목요일 예정
2018학년도 수능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예정
2019학년도 수능2018년 11월 15일 목요일 예정
  1. 혹은 대학교육 적성검사
  2. 대학수학능력시험 실험평가
  3. 1차 시험이 너무 쉽게 나와서, 본고사 치는 학교에 안갈거라 석달간 수능만 죽어라고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도 2차 시험때 성적이 좋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4. 본고사도 1994학년도에 같이 부활하였고, 따라서 예전에 실시한 본고사는 당시로서도 거의 15년전 일이라 비교할 수가 없다.
  5. 여기에 생물, 지구과학이 빠진 이유는 당시 교육과정상 이과생들은 이 두 과목 중 학교가 선택한 1과목만 선택해서 배우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 수리탐구2(사회/과학탐구)영역에서 6차는 공통과학/공통사회가 존재했지만, 7차는 아예 이런 문이과 공통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7. '막노동꾼에서 서울대 수석합격'이라는 타이틀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분으로, 이후 2003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
  8.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정부의 유도 및 준비 부족 등의 이유로 대학별고사를 포기하였고, 결국은 애초에 대학별고사를 치르려던 40개 학교 가운데 단 9개 대학교(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가톨릭대, 포항공대, 수원가톨릭대, 한성대)만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대비 문제집을 판매한 출판사만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후 대학별고사를 보는 곳만이 상위권 대학교라는 이미지가 생겨서, 이듬해에는 좀더 많은 학교에서 본고사를 실시하였다.
  9. 그래서 8월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은 상위권 학생들은 9월부터는 더 이상 수능에 신경쓰지 않고 본고사 대비에 집중하였고, 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11월 수능은 8월 수능에 비해 훨씬 어렵게 나오면서 8월 수능에 비해 더 높은 점수를 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카더라.
  10. 정시전형도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졌다.
  11. 서울대에 원서를 낼만한 성적을 받은 우수학생연고대에서 선점하기 위한 전형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당시 서울대는 특차전형을 통한 학생 선발이 없었다.)
  12. 8월의 1차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고 특차전형 응시를 결정한 학생들은 9월부터 입시공부에서 사실상 해방되었다. 이 경우엔 자그마치 한 학기를 놀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학교는 갔겠지만 공부는 안 했겠지. 하지만 내신이 있으니 공부를 안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특차전형에 합격하면 서울대 응시는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서울대 원서를 낼 수 있는 점수를 받고도 그 기회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을까? 어쩌면 연고대 특차전형 응시자들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몰라 공부하기 싫어 귀찮아 나 서울대 안 가. 서울대 무시하는 시크한 수험생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위의 공상과는 별개로, 난이도가 확 올라간 2차 수능 이후 대학별고사 준비에 부담감을 느끼며 특차 지원 쪽으로 돌아선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또한 1차 수능 점수가 아쉬웠던 학생들 가운데 어렵게 나온 2차 수능에서 성적을 만회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대학별고사 준비에 매진한 학생들도 많았다.
  13. 200점 만점의 시험에서, 1~2차 수능에서 받은 점수차가 20점씩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나온 2차 수능에서 오히려 점수가 올라간 학생들도 소수 있었다.
  14. 원점수와 백분위만 제공했고 대다수 대학들은 원점수를 사용했다
  15. 심화과목을 배운 이과 학생이 문과 수학/과학 문제를 보면 아주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쓰고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이겠지.
  16. 예를 들면 공통/인문계 국어계열 과목은 국어, 문학, 문법, 작문이 있었고, 사회계열 과목은 국민윤리, 국사,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 사회문화, 세계지리가 있었다. 이과계 학생의 이수범위는 이 목록의 글씨가 기울어진 교과가 빠진다. 그런데 94학년도 수능에서는 문/이과 공통으로 출제 범위가 정해졌기에, 문과 심화 교과목은 제외되었다. 이과의 경우, 수학과 과학 과목의 출제범위가 절반에서 2/3정도로 줄어들었다.
  17. 그래서 본고사에 선택과목이 있는 학교를 노리는 상위권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제2외국어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 외에도 수능에서 배제된 여러 과목들은 내신에서도 무시당했다. 거 수능에도 안 나오는데 적당히 합시다. 대입시험 준비해야지, 이런 과목 기말고사 공부하는데 시간 많이 쓸 필요 없잖아?
  18. 같은 날 시험(면접) 보는 학교에 중복 지원만 금지되었다. 그래서 실제 중하위권 학생의 경우 5~6개 이상 원서를 쓰는게 기본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3 담임교사들도 죽어나갔다. 요즘같이 인터넷으로 접수하던 시절도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원서 쓰고 학교장 직인 찍고 사진에 철인 찍고 생활기록부 복사해서 원본대조필 찍고, 거기에 수능 성적표도 원본을 봉투에 넣어 제출했는데 학생이 원서를 많이 쓰는경우 원본이 몇장 없으니 성적표 역시 복사하고 원본대조필 교장 직인 찍어서 넣어야 했다. 이런 반복 작업만 학생 한명당 대여섯번씩 해야 된다고 생각해 보자. 거기에 자기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진학 지도까지 하려고 하면...
  19. 백분위 점수로는 대략적인 지원가능권 예측 이상은 불가능했다. 결국은 안전 위주의 하향지원과 대담한 상향배짱지원이 난무하였다.
  20. 한양대 전자공학과가 미달되었다.
  21. 400점 만점 환산시 388점
  22. 1위는 아래 나온 것 처럼 1997학년도 수능
  23. 국영수 + 한국사 + 선택2과목 (+ 제2외국어)
  24. 이러한 탐구영역의 통합형 출제는 전면 선택체제로 전환된 7차교육과정하의 수능에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25. 당시 수능엔 선택과목 제도가 없었다.
  26. 일반수학 + 수학Ⅰ
  27. 오늘날의 생물1보다는 수준 높고, 생물2보다는 수준 낮음
  28. 오늘날의 지구과학1보다는 수준 높고, 지구과학2보다는 수준 낮음
  29. 오늘날의 물리1보다는 수준이 높고, 물리2보다는 수준 낮음
  30. 오늘날의 화학1보다는 수준이 높고, 화학2보다는 수준 낮음
  31. 일반수학 + 수학Ⅱ
  32. 각각 오늘날의 물리II, 화학II와 비슷한 수준이며, 이과 학생들은 과학II를 이수하지 않았다.
  33. 일반수학 + 수학Ⅰ
  34. 오늘날의 국어영역이다.
  35. 오늘날의 수학영역이다.
  36. 오늘날의 과학탐구영역 + 사회탐구영역이다. 이 때에는 문/이과 모두 과학탐구 및 사회탐구에 응시해야 했으며, 과학탐구와 사회탐구가 수리탐구영역(Ⅱ)라는 이름 하에 한 영역으로 묶여 있었다.
  37. 오늘날의 영어영역에 해당한다.
  38. 이후 물리학과를 전공선택하고 서울대를 수석졸업한 뒤 MIT로 유학갔다.
  39. 이 시기에는 등급제가 없었으므로 전국 4%는 1등급 컷이 아니다. 성적표에는 오직 원점수만이 찍혀 나왔다. 참고로 등급제는 2002학년도부터 도입되었다.
  40. 참고로 당시 대학입시에는 오늘날의 수시제도가 없었고, 특차(수능위주 선발)와 정시(수능+논술+학생부)제도만이 있었는데 서울대는 특차제도가 없었으며, 정시제도만 있었다. 수시모집은 1998학년도부터 서울대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일부 학교에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41. 이를 6차의 불수능으로 회자되는 2002 수능과 비교해 봤을 때, 2002 수능 원점수 320점으로는 서울대를 붙기는 커녕 지원자격(총점 1등급 - 전국 4%, 인문계 320점 초중반, 자연계 350점 근처)도 없어서 아예 원서를 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42. 이 당시에는 수리 · 탐구영역(I)이 현재의 수학이고, 수리 · 탐구영역(Ⅱ)는 과학탐구사회탐구가 합쳐진 과목이었다. 배점은 문과와 예체능계열은 과탐 48점, 사탐 72점. 이과는 그 반대였다.
  43. 때문에 수학을 반타작 정도만 해도 다른 과목을 잘 보면 상위권 대학에 진학 할 수 있었다.
  44. 더구나 1998학년도 수능 시험 실시일 이틀 뒤에 우리나라가 IMF 사태를 맞게 되어 사회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45. 한 학과당 1~5명. 예컨대 인문대학 소속 학과들은 대부분 1명이었고(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는 2명) 법학부가 5명이었다.
  46. 18명은 수능 성적이 상위 10% 안에 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47. 5차과정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정치경제라는 이름의 한 과목으로 묶여 있었으나, 6차과정부터 분리되었다.
  48. 그 이유는 정권이 바뀌어, 진보 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49. 서울대 물리학과 진학 후 2013년 현재 하버드대에서 생물물리학 연구중이며 네이처에 논문을 냈다.
  50. 04수능까지는 영역별로 인문/자연/예체능 계열에 따라 성적을 따로 했다.
  51. 6차 수능은 언어 120점 수리 80점 외국어 80점 체제이지만 7차 수능과의 비교를 위해 언-수-외 모두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 값을 사용하였다
  52.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김앤장 변호사로 있다.
  53. 97수능은 점수도 점수지만, 이때는 사탐, 과탐 선택과목 구분도 없던 시절이다.
  54. 교차지원시 수탐II 영역에서 만점이 72점인 영역만 반영
  55. 예를 들어서 99년도 수능과 04년도 수능을 5개 영역 합산 총점 비교를 해 난이도를 가늠해보는 것은 이런 이유로 문제가 있다. 99년도 수능과 04년도 수능 난이도를 총점 비교로 난이도를 비교하고 싶다면 문과는 국영수+사탐, 이과는 국영수+과탐 - 이렇게 4개영역 비교를 하는 쪽이 정확하다.
  56. 직탐은 최대 3과목(컴퓨터 과목 1개 + 전공 과목 2개)
  57. 윤리, 한국지리. 그리고 이후 두 과목은 난도가 어려울 땐 지나치게 어렵게 나오고, 쉽게 나올 때에는 1컷이 48이나 50이 되는 등 지나치게 쉽게 나오게 되어 버렸다.
  58. 2008년 이후의 입시생은 내신, 수능, 논술 및 대학별 고사를 치뤄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작 이 세 개 시험이 완전한 균형, 즉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어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 불린다.
  59. 11 수능 수리 가형에서 동 정답률의 문제가 한 개 나왔지만 이 경우는 주관식 문제.
  60. 당시 서울대 의대 평균이 565점 전후였는데 15점 정도 남기고 합격했다.
  61. 특히 언어 영역, 수리 영역
  62. 기존 舊 7차 교육과정의 수리가형 심화과목이었던 확률과 통계이산수학에서 넘어온 내용이다
  63. 물리1, 화학1, 생물2와 같은 조합을 말한다
  64. 수능 끝나고 나면 예비마킹만 했다는 수험생이 학교에 적어도 1명은 나오기 마련.
  65. 3점 하나만 틀려도 2등급이 된다.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과 비교되는데, 그래도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은 3점짜리 하나 틀렸다고 2등급이 나오지는 않았다.
  66. 그래도 2012학년도보다 문제의 난이도는 높다.
  67. 사실 20번 문제는(홀수형 기준) A는 안봐도 3개있는게 답이라고 생각한 덕에 그 오답을 고른 사람이 약 80%이었다.
  68. 92점을 맞은 사람은 백분위 상으로는 96인데, 실제 등급은 2등급이다.
  69. 참고로 유일한 이과 만점자는 의대를 지망했던 삼수생인데, 정작 서울대학교 의대는 떨어지고 연세대학교 의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
  70. 수학B형의 경우 100점을 맞아야 1등급이었고, 영어의 경우엔 3점짜리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이다.
  71. 2015년도 개편안
  72. 6차 교육과정에서는 국어와 영어가 선택 없이 공통이었고, 수학은 문이과를 나누었다. 사탐과 과탐은 '사회·과학탐구영역(수능에서는 수리탐구II영역)'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있었는데 문과는 고1사회와 고1과학 72문항+심화선택사탐(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계사, 세계지리 중 택1) 8문항, 이과는 고1사회와 고1과학 70문항+심화선택과탐(물2, 화2, 생2, 지2 중 택1) 10문항으로 되어 있었다.
  73. 기존 수리영역 시절에도 가/나형 분리 체제였던 수학 과목의 수준별 수능까지 폐지된다는 것은 문·이과의 실질적인 구분 자체를 없애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듯 하다. 마침 2017학년도 수능부터 적용될 새 교육과정 수학 과목에서 대대적인 격변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물리기도 하고...그런데 일부 기사에서 나온 말인 "수학을 현행 A형 수준으로 통일하겠다."는 말은 변별력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높으신 분들이 또 어떤 장잉력을 발휘하여 수학의 난이도를 나눌지 모르는 일
  74. 수능 역사상 유일하게 금요일, 그리고 8월에 시험을 치렀다. 당연히 수능 역사상 제일 빨리 치러진 수능이다.
  75. 수능 역사상 유일하게 화요일에 시험을 치렀다.
  76. 수능 역사상 2006 수능과 함께 제일 늦게 치러진 수능이다.
  77. 이 날 2002년 한국시리즈 3차전이 잠실에서 열렸었다.
  78. 8월에 치러진 1994 1차 수능을 제외하고 수능 역사상 제일 빨리 치러진 수능이다.
  79. 원래 11월 16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로 인해 1주일 늦춰졌다. 1995 수능과 함께 수능 역사상 제일 늦게 치러진 수능이다.
  80. 이 때부터 수능일이 목요일로 변경되었다.
  81. 원래 11월 1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로 인해 1주일 늦춰졌다 빼빼로데이에 수능을 치를 뻔 했는데 아쉽다.
  82. 참고로 이 날짜는 11월의 첫 주 목요일이며 또한 11월의 첫 번째 목요일이다. 첫 주와 마지막 주는 그 달에 4일 이상이 포함되는 주로 계산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