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만주의 역사 | |||
고대 | 중세 | 근세 | 근현대 |
연(燕) | 고조선 | 동호 | 예맥 | 숙신 / 퉁구스 | |
진(秦) | |||||
전한 | 흉노 | ||||
후한 | 선비 | 고구려 | 부여 | 읍루 | |
조위 | |||||
서진 | |||||
전연 | |||||
전진 | 물길 | ||||
후연 | |||||
북연 | 두막루 | ||||
북위(북조) | 거란 | 실위 | 말갈 | ||
동위 | |||||
북제 | |||||
북주 | |||||
수(隋) |
중국의 역사 | ||||
후한(동한) | → | 위진남북조시대/육조시대 | ||
삼국시대 | → | 서진 | ||
위 |
魏
1 개요
인구 | 4,932,000명[1] |
수도는 허(220)[2]→낙양(220). 존속 기간은 220~265년, 5대 46년.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황제를 낀 조조가 기반을 닦고, 그 아들 조비가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자신들도 권신 사마씨 일족에게 휘둘리다가 후한과 같은 운명을 맞는다.
위의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칠해진 국가. 어라? 파란색일 텐데? 삼국 중 두번째로 면적이 제일 넓다.
물론 이렇게 칠해진 강역에는 거품이 존재하는데, 반독립국이었던 요동이나, 남흉노과 세력권이 겹치는 그리고 50년 후에 러시 들어오는 유주와 병주 서북단, 그리고 마초와 한수의 반란을 제압하고도 심심하면 촉에 붙었던 서량지방은 실제로 세력권에 넣기 몹시 애매하다. 다만 삼국 중에서는 가장 거품이 덜하다. 위 지도를 보면 오나라와 촉나라도 그럭저럭 커보이지만 실제로 촉, 오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미치던 지역은 표기된 면적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특히 장강 이남 지역는 개발도 덜 됐고 토착민들의 세력이 강해 잦은 반란이 일어나는 등 여러모로 촉, 오의 온전한 영토였다 보기 힘들다. 삼국의 실효 지배 범위를 나타낸 아래 지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 명확해진다.
파일:Attachment/위(삼국시대)/Example 1.jpg
후한 13주 중 알짜 중의 알짜만 빼먹었고, 인구수나 생산력 또한 오, 촉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당장 지도에 글자수만 봐도… 《후한서》에 등재된 263년에 이미 443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동시대 촉의 5배, 오의 2배에 달하는 인구수다. 따라서 천하의 7~8 할을 먹었다고 보는 학자까지 있을 정도. 물론 나중에 사마씨에게 고스란히 헌납합니다.
2 역사
200년 | 관도대전 |
213년 | 조조가 위공으로 책봉 |
216년 | 조조가 위왕으로 책봉 |
220년 | 조비가 황제로 즉위, 위나라 개국 |
227-234년 | 제갈량의 북벌 |
249년 | 고평릉 사변 |
254년 | 조방의 친위 쿠데타 발각 |
260년 | 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 |
263년 | 촉한 정벌 |
265년 | 조환의 선양 → 서진 |
위나라는 조조가 후한으로부터 위공(魏公)의 봉작을 받으면서 공국(公國)으로서 건국되었다. 그리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의 봉작과 구석을 받으면서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본래부터 조조는 후한의 승상으로서 후한의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왕국을 건국하고 후한과는 완전히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함으로서 후한 정부의 위상은 완전히 실추된다. 위가 왕국의 체계를 갖춘 이후 후한은 명목상으로는 존속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형식만 남게 돼버렸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위의 왕위를 잇는다. 그리고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껍데기만 남은 후한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천자의 제국이 되었다.그리고 얼마못가 조비가 죽은 뒤 조비에 이어 조예가 제위에 올랐고, 처음에는 조진, 조휴 등 황제 일족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조진은 성인병으로 얼마 못 가 죽고 조휴는 오나라 군에 대패하여 분사.
조예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위나라는 직계 혈통이 끊어져버린다. 게다가 조예가 양자로 들여서 새로 황제가 된 조방의 혈통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이 실추하게 된다.
사마의가 공적을 세워 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자 조진의 아들인 조상에게 실권을 주어 황제 일족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사마의에게 무난하게 정권을 빼앗겼고, 조조와 조비 대의 공신들의 후손들이 사마씨로 갈아타면서[3]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조방은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정권을 잡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허무하게 실패하고 자신이 폐위당하고 만다.
사마사는 화족 조모를 데려다가 제위에 올렸다. 조모는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정권을 잡자, 역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사마씨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사마씨의 군대에 시해당하고 만다. 사마소는 아예 꽤나 먼 황족 조환을 데려다가 제위에 앉힌다. 이로서 황실은 완벽하게 사마씨의 꼭두각시화 되고 조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촉한이 사마소에 의해 제거되고 나서는 바로 2년 만에[4] 허울만 남아있던 조위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 황제였던 조모와 조환의 모습이 후한 헌제의 안습, 처절함과 매우 똑같아서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좋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위나라 역시 천하를 한두해 다스린 것은 아니고, 사마씨 세력 역시 위나라의 모든 신하들을 다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위나라 말기에 사마씨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은 관구검과 문흠, 제갈탄, 이풍 등으로 손꼽아보면 적지 않게 많다. 하지만 이런 '반 사마씨 세력'이라고 해서 어떤 통일성이 이나 연결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대규모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그저 중구난방으로 단독으로 거병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들의 역량도 사마씨에 크게 못 미쳐서 사마씨에 대항하는 반격 계획은 번번히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렸다. 오히려 이를 명분으로 하여 사마씨는 반대 세력을 숙청할 수 있게 되었고, 조위 황실의 명운은 점점 깎여나가게 된다.
말기에는 사마씨에게 실권을 빼앗겼으며, 사마씨의 서진에 선양을 해주고 멸망하게 된다. 사마씨는 위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사마씨 일족들의 힘을 키워주었으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지만 그 이후의 결과는…
수도는 선양 직후에는 후한의 마지막 수도 허(허창)를 그대로 썼으나 곧 낙양으로 천도했다.
3 정치
진군(陳羣)이 주창한 구품관인법이 만들어졌다. 대개 위나라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라면 이것을 꼽으며, 세계사(교과) 시간에 후한 말기나 중국 삼국시대에 넘겨짚고 가는 것도 사실상 이 제도 뿐이다(...).
구품관인법의 정비로 관료제가 발달하여 관리 서열의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었다. 하지만 구품관인법의 중정제가 일으킨 부작용으로 호족의 귀족화가 나타나게 되고, 귀족의 대두로 정치가 귀족들에게 좌우되기 시작한다.
위의 약점은 황통으로 위나라의 황통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조비는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아우들을 매우 의심하여 직계 황족들을 시골의 봉지에 연금시켜 사실상 감금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조예의 사망으로 황실의 혈통이 위기를 겪었으며 황제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가져왔다. 사마씨가 정권을 탈취하는 틈을 얻을 수 있었다.
4 군사
후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둔전제와 세병제가 실시되었다. 조조의 강병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위나라는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갖추었다.[5] 군법이 매우 엄격하여 군사적인 배신자는 가족까지 연좌제에 걸어서 벌을 줄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내지둔전은 조위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도겸은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아 서주경내에 둔전을 실행해 효과를 거두었고, 유주의 공손찬도 역경에서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비축했다. 그러나 대규모로 둔전을 운용한 것은 조조 정권이 처음으로 조조는 이들을 참고삼아 대규모로 내지둔전을 실시했다.
조위의 둔전은 본래 민둔과 군둔의 구분이 없었는데 근대 학자들이 서술과 연구의 편리를 위해 민둔과 군둔으로 구분지었다. 사실 둘을 명확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민둔과 군둔의 공통점은 군량공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군사편제를 따랐다는 것이다. 유사시에는 민둔의 노역자들도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오와 촉의 변경지대 둔전객들은 방위의 임무도 겸했으며, 내지 둔전객들은 반란등이 일어 날 경우 징집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경제가 회복되며 이들을 군역과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단순 병력의 질과 수로는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문제는 전선. 워낙 세력이 크다보니 단순 촉, 오뿐 아니라 다른 이민족등등도 고려해야 했기에 압도적인 수로 적을 밀어버린다거나 하는 모습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이게 반영이 되지 않아서 삼국지 13처럼 반란군이나 이민족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창작물에선 정말 압도적이다.
5 문화
후한 말기의 전란으로 소실된 문화를 재발굴 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위는 여러모로 후한의 문화를 계승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호족 세력이 발달하여 귀족화 되면서 귀족적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조조,조비,조식 삼부자를 필두로 하여 문학이 발달하였는데, 건안문학이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화려한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귀족 남자들 역시 패셔니스트하게 노는 것을 즐겼던 모양. 하안은 얼굴에 분칠을 했다고 하고, 조예는 소매가 짧은 옷을 입거나 머리를 길게 길렀다고 한다. 물론 식자 샌님 들은 이를 안 좋게 보았다. 이러한 사치 풍조는 서진으로도 이어지면서 귀족 세력의 강화와 비례하여 더욱 심하게 악화되었고 결국 석숭, 왕개 같은 인물들이 나타나게 된다.
후한 말기에 널리 퍼져 세력화 되었던 민간도교가 민간의 도인들이 왕과 귀족들에게 초빙을 받는 식으로 제도권으로 편입되면서 귀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후에 귀족 사회에 청담사상이 유행하는 기반이 되었고 오석산의 약해 같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중천왕 시기 관나부인의 기사에 따르면, 위나라에서는 장발의 미인이 인기였던 듯하다.
6 역대 황제
대수 | 재위기간 | 묘호 | 시호 | 성명 | 약력 |
사후 추존 | 고황제(高皇帝) | 조등(騰) | 조조의 조부, 중국 유일의 환관 황제. 생몰년 미상. | ||
사후 추존 | 태황제(太皇帝) | 조숭(嵩) | 조조의 아버지, 조등의 양자. 193년 사망. | ||
사후 추존 | 태조(太祖) | 무황제(武皇帝) | 조조(操) | 사실상 위나라의 초대 군주. 155년 출생, 220년 사망. 66세. | |
1대 | 220-226년 | 세조(世祖)/고조(高祖)/태종(太宗) | 문황제(文皇帝) | 조비(丕) | 위나라의 초대 황제. 187년 출생, 226년 사망. 40세. |
2대 | 226-239년 | 열조(烈祖) | 명황제(明皇帝) | 조예(叡) | 정상적으로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 205년 출생, 239년 사망. 35세. |
3대 | 239-254년 | 애황제(哀皇帝) | 조방(芳) | 사마사에 의해 폐위. 231년 출생, 274년 사망. 44세. | |
4대 | 254-260년 | 고귀향공(高貴鄕公) | 조모(髦) | 사마소에 의해 시해. 241년 출생, 260년 사망. 20세. | |
5대 | 260-265년 | 진류왕(陳留王) 원황제(元皇帝) | 조환(奐) | 사마염에게 선양. 246년 출생, 303년 사망. 58세. |
7 창작물
전통적으로 위나라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최종보스의 역할을 맡았는데,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과 인재풀, 경제력 등에서 최종보스의 역할을 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세력이 없다. 특히나 건국자인 조조의 카리스마로 인해 넘사벽의 최종보스란 기믹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력.
그렇다고 주연이 되기엔 작가의 내공을 많이 요구하는데, 우선 위의 건국자인 조조의 삶이 너무 파란만장하다보니 조조가 죽으면 위나라 얘기가 심심해진다(…). 조조가 온갖 삼국의 영웅들과 싸우는 모습을 읽고 난 다음에 가끔씩 촉이나 오가 쳐들어오는 거 보면 아무래도 좀 허전하다. 이렇기에 주로 위나라 중심의 창작물에선 조조 사후에 사마의를 주연으로 대두시키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필히 사마씨의 찬탈로 이어지기에 위빠로선 허무해진다(…). 즉, 위나라를 주인공으로 하려면 조조라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공백을 잘 메우는 것이 중요하다. 조조가 죽자말자 작품을 끝내면 된다.
삼국지 시리즈에선 최강의 세력으로 등장해왔다. 현실적인 세력의 균형을 나타낸 삼국지 13에선 막강하다. 다른 세력이 홀로 상대하기엔 힘들다. 아직 조위가 정식으로 건국된 후의 시나리오는 없지만, 실상 조위가 건국된 것이나 다름없는 조조의 하북 차지 후의 시나리오에선 정말 답이 없다. 실제와는 달리 조조에 반대하는 반란군이나 적대 이민족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조조가 모든 하북과 중원에 빽빽히 밀집해 있는 도시들의 병력을 전부 다른 세력 침공에 동원할 수 있기에 동원력부터가 다른 세력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비로 관우,장비 같은 애들 잘 활용하면 이길수도...
- ↑ 군인까지 포함한 숫자로 위략에 의하면 삼국시대 말기 군인의 숫자는 50만명이었다고 한다.
- ↑ '허창'은 수도였던 시기 조비에 의해 생겨난 말이다. 자세한 건 허창 항목 참조.
- ↑ 조모가 시해되는데 큰 공을 세운 왕침과 함께 진의 례를 제정한 순욱의 아들 순의, 조위를 무너뜨리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가규의 아들 가충, 그외 진교의 아들 진건, 악진의 아들 악침, 배잠의 아들 배수, 왕창의 아들 왕혼 등등 많은 개국공신 후손들이 이때 조씨를 버렸다. 조조가 무덤에서 보면 통곡할 노릇일지도.
- ↑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위세를 올려서 선양을 받을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 ↑ 영토가 북쪽에 위치하여 북방의 유목민족들이랑 거래가 많았다. 그래서 그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조위는 막강한 기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