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vs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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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에서 지역감정과 관련한 주요 떡밥. 갖가지 병림픽의 향연이 난무한다. 대한민국 지역감정의 알파이자 오메가!![1] 그래서 문단이 가장 길다.

정치학자 최장집의 말에 따르면, 사실 이 문제를 영남 vs 호남의 문제로 보는 것 자체가 허위의식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 제국 vs 조선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기계적인 중립을 가지는 것이 진정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없듯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단지 어린아이들 다투는 거 말리듯 "둘 다 잘못이야"라고 넘기는 것은 사회과학적 분석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듯이, 영호남의 갈등이라기보다는 호남 차별, 호남 비하가 본질에 가깝다.[2] 과거에는 영호남의 불균등한 정치적, 경제적 격차 탓에 더더욱 그런 면이 컸지만, 그 격차가 줄어든 편인 지금도 일베 등 인터넷 상의 지역혐오 발언의 비율은 호남에 대한 것이 영남이나 기타 지역에 대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분석된다. 여전히, 아니 과거 이상으로 인구의 격차가 커졌다거나, 여론을 주도하는 특정 세력이 있다는 점 등도 원인일 수 있다. 호남에 대한 증오심과 정치적 공세가 합해지고, 이에 대해 반작용이 나오면서 민생과는 관계없는 허구적 - 하지만 때로는 실질적인 갈등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 갈등구도가 생긴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7~9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어 더 이상 수습을 못할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영화 《황산벌》이나 《위험한 상견례》 등 각종 매체에서도 이와 관련된 블랙코미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 대구광주를 중심으로 화해분위기로 가고 있다. 예를 들어 2013년 달빛동맹[3]결성, 2015년에 대구 2.28민주운동[4] 기념식(광주광역시장, 전라남도지사 참석),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대구광역시장 참석)에 상대 지자체장들이 참석한 사례, 광주은행, 대구은행의 업무협약체결, 양쪽 시장들의 각자 교환 근무[5] 등이다. 또한 두 광역시의 화해 움직임에 힘입어 대구경북광주 간에도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끼리나 도,시의 지방의회 의원 사이에서 의외로 매우 활발한 교류가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을 스스로 기념하는 명칭인 88올림픽고속도로, 일명 광대(...) 고속도로의 명칭을 4차로 확장을 기념하여 양 지역 화합의 상징인 달빛고속도로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인들의 행보를 가지고 지역감정이 적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애초에 2010년대 이후 심각해지는 지역감정은 인터넷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혐오발언이 행해지면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부모 세대의 탓이라고만 보기에도 어려운 면이 있다. 여혐, 남혐, 제노포비아 등 한국사회(와 전세계)에서 유행하는 증오의 열풍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인터넷에서 보여지는 풍경과 현실에서의 풍경은 사뭇 다른데 인터넷 사용자중 특정지역을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호남, 영남지역 사람들뿐 아니라 아무 상관없는 지역사람인 경우가 매우 많다. 오히려 영남과 호남은 지역적으로 가까워 서로 혼인도 많이하고 전학도 많이 다닌다. 인터넷에서 사투리 어쭙잖게 흉내내며 타지역 사람들끼리 지역드립 치는것을 보면서 지역갈등을 처음 느낀 사람도 있을정도니. 있을 정도가 아니라 요즘 젊은세대는 대부분이 인터넷에서 지역갈등을 처음 느낀다.

2 기원

여러 가지 설이 있다.

2.1 역사

영남호남지역감정이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여기는 설이다. 우선 삼국시대만 봐도 신라와 백제가 국가의 형태로 존재했다.

하지만 경상도, 전라도라는 개념은 고려 때에 이루어졌고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역감정은 아래에 서술할 기호 vs 서북 대립이 주축이었다. 영남호남의 대립은 상대적으로역사가 짧은 편이다.

간혹 고려훈요 10조에서 "차현 이남의 공주강(금강) 밖의 사람들을 벼슬 자리에 두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고려 때에도 호남 지역을 차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차현 이남의 금강 밖'이라는 곳이 딱히 어디라고 결론을 내리기가 상당히 애매하다. 실제로 기록대로 하자면 충청남도 남부 지역도 포함된다.

정작 경상도, 전라도라는 행정구역 개념은 고려 후기 때에 정립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실제로 왕건 시대 때 오히려 전라도 출신의 사람들을 높은 관직에 많이 등용했다. 뒷날 왕건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혜종은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인 장화왕후나주의 호족 가문의 딸이었다. 그리고 후대 왕들도 호남 출신의 사람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래서 훈요 10조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설, 실제로 차별했던 지역은 왕건을 괴롭혔던 호족 가문의 사람들이 많이 살던 청주 지역이었다는 설, 또는 당시의 해양도에 속했던 전라남도 지역을 제외한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와 그 근방 지역인 전라북도충청남도 남부 지역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조선 때의 기록을 근거로 조선 때에도 호남 지역을 차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런 기록들을 다 따져보자면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나쁘게 평가한 기록들이 있으니 모든 지역들이 다 차별을 당한 셈이 된다.[6] 오히려 조선 때에는 한양(지금의 서울 중심주)을 중심으로 기호지방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지역과의 대립이 두드러졌으며, 실제로 홍경래의 난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그 이전에 애당초 전근대의 기록을 가지고 지역차별을 정당화하는게 정상인가?

일제강점기 때에도 기호지방평안도 지역과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오죽하면 윤치호기호지방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 평안도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을 보면서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리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기호지방평안도 지역이 서로 대립하는 사이에 영남이나 호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하자면 신라 사람들은 오늘날 경상도+강원도가 아니고, 백제 사람들은 오늘날 경기도+충청도가 아니며, 고구려 사람들은 오늘날 이북 5도가 아니다

2.2 정치적 갈등

지역감정의 시초는 언제일까? 보통 1960년대부터라고한다. 이것을 선동하여 선거에 이용한자는 누구일까? 박정희? 김대중? 1971년대선부터 지역주의 투표가 생겼다고 한다. 박정희는 63년도부터 지역감정을 선동 하였다.우리 경상도 사람 대통령으로 한번 뽑아보자

또한 1965년 당시 국회의장이였던 이효상은 '현 정권은 경상도 정권이다'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현 정권은 경상도 정권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남 vs 호남 대립은 별로 없었으나, 1969년 10월 13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김대중 신민당 의원 등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중 정확하게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연설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향신문 이것은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이 노골적으로 지역에 호소하는 선거를 했다는 점과 그 당시 정관계인사와 기타 정치경제적 자원배분에 있어 과도하게 영남에 편향된 점도 한몫했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가 10월 9일 경상도를 방문 당시, 찬조연설자는 "경상도 사람 좀 대통령으로 뽑아보자"는 발언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김영삼조차도 "71년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다."고 말했을 만큼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영남에서 60% 내외의 비율로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호남에서도 박정희 후보의 지지가 50% 이상 나왔으며, 제주 지역에서는 70%가 넘는 주민들이 박정희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해당 지역들은 이협우, 김종원 처럼 반공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학살을 저지른 악인들로 인해 해당 지역들이 이념 문제로 한 차례씩 큰 피해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지역들로, 5대 대선 당시 박 후보의 과거 좌익 전력을 문제 삼는 윤보선 후보를 거부한 것에 더 가깝다.

문제는 71년도까지만 해도 타 지역에는 지역감정이 없어서 박정희에게도 상당한 투표를 주었고 나아가 호남에서도 박정희를 상당히 찍기도 했지만 정작 영남지역은 이미 71년 대선당시부터 대구경북지역의 73%라는 몰표(타지역 유입 인구포함)로 30년 전부터 몰표가 시작되었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보면 67년도의 경우도 경남 경북 부산 모두 60프로 이상의 준몰표가 있었다. 나아가 지역구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박정희 정권내 제대로 치루어지 3번의 선거중에서(물론 이 경우도 부정선거가 많았지만) 63년과 67년의 경우 경남북에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석권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효상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권의 농간이 경상도에서 제대로 먹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반사작용으로 야권에서 경상도 정권 타도하자는 말도 나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박정희 정권이 정치경제사회적 자원배분에 있어서도 특정지역에 대한 편중을 통해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치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경향신문은 이 무렵 1964년 사장 이준구가 구속되고, 정권에서 신문사 강제경매를 밀어붙여 기아산업(기아자동차)에 인수되어 정권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1969년3선 개헌이 확정된 해로, 해당 보도는 오히려 여권이 71년 차기대선을 염두에 두고 마타도어물타기를 한 정황이 의심되고 있다. 온 국민이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한 진짜 심각한 지역감정 유발 사례는, 7대 대선 때, 인망높았던 이효상 국회의장이 "경상도 대통령" 발언을 노골적으로 했던 모습이다. 오히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국가기관 중앙정보부에서 대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지역감정을 조장했던 정황이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다.

이후 1987년 대선에서 6월 항쟁 이후 국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투표)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87년 이후 각 정당들이 아예 도 단위를 지지기반으로 구성되는 현상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치에서 파당간의 갈등은 이념적 차이가 적을수록 별 것 아닌 일을 구실삼아 격렬히 대립하는 경향이 있다. 이보다 더 자세한 언급은 어떠한 이유로 항목이 통째로 폭파되기도 했기 때문에 토론을 거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고 합의된 바 있다.

박정희 vs 김대중 대립이 아니라 김영삼 vs 김대중 대립도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경상남도 거제시 출신의 대통령 김영삼전라남도 신안군 출신의 대통령 김대중의 이른바 YS vs DJ의 정치적 갈등도 한몫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때 이들 두 사람은 1987년 대선 전까지만 했어도 박정희유신정권에 맞서 싸워왔던 재야인사이자 운동가로 민주인사들 사이에서도 이들의 뒷받침이 되어주었던 편이었다.

그러나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으로,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져서 이 때를 계기로 서로간의 갈등으로 격화되었으며 동시에 대선 때 인물공격과 지역감정을 들추게 되면서 이들 두 사람의 영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1990년 김영삼이 민주정의당과 3당 합당을 하여 민주자유당(속칭 민자당)을 창당하면서 호남을 고립시켜 영남에 기반을 잡게 되고 홀로 남은 김대중은 민주당을 통해서 호남에 기반을 잡게 되면서 사실상 정치적 갈등도 포함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1992년 대선에도 이어져서 호남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90% 이상 지지했고, 영남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최소 60% 이상[7][8] 표를 주는 등, 이 대선에서부터 영호남의 인식차이가 확연히 드러난 편이며, 이후 각종 인재 등용 및 인사 정책과 예산 배정 및 프로젝트 수주까지 영남의 강세가 이어지면서 호남에서 느끼는 박탈감은 아직[9]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1997년 15대 대선에서도 호남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90% 이상 투표했으며 영남권에서는 대략 10% 정도의 표를 얻었다.[10] 반대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경우 영남권에서는 약 50 ~ 70%[11]정도의 표를 주었다.[12][13] 참고로 이회창은 경상도 출신이 아닌 충청도 출신이었지만 민정계의 영향이 남아있던 한나라당이라는 것에 힘입어 530만 표 이상의 지지를 영남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14]어차피 이회창-이인제 두 후보 모두 한나라당 계열에서 나왔으니 영남권 유권자들은 두 명 합쳐 80 ~ 85%의 표를 준 셈이다.

정치평론가들은 87년 체제를 자주 현대 대한민국 정치를 설명할 때 사용한다. 87년 체제의 기본은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제도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는데, 이에 대권 유력주자였던 삼김과 일노는 각자의 셈법으로 공천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지역정당 체제를 그리며 합의하였다. 결국, 그 이전부터 지역구도가 87년 체제 이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하는 데에 87년 체제가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3당 합당의 결과로 4당 4지역의 구도에서 전라도와 반 전라도의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 지형을 적극적으로 확대재생산하기 위해서 여권에서 일으킨 것이 초원복집 사건이다.

초원복집 사건에서도 1971년 때와 같이 안기부가 깊게 연루되어 있었다. 결국, 한국에서의 지역감정은 그 시작이 무엇이든지 간에 정치적 술수에 의하여 크게 증폭된 것이 사실이다.

2.3 경제적 갈등

영남호남의 대립이 경제적 갈등에 의해 일어났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역은 곡창지대로서 농업이 발전하였고, 특히 을 집중 생산하는 한반도의 밥줄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농사 밖에도 서해 남단과 남해를 낀 해안에서 어업이 발전하여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 때문에 후삼국시대후백제가 국토가 훨씬 넓은 고려를 상대로 군사/경제적으로 우세를 점하며 싸울 수 있었으며[15] 임진왜란때 전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당하면서도 방어하면서 역전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명장들의 으로 최대 곡창지대 전라도를 지켜내면서 보급이 끊기지 않았기 때문.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본진이나 앞마당이 공격받아서 병력이나 건물이 털리는 와중에도 확실한 멀티 하나를 지켜냈기에 꾸역꾸역 버티면서 역전할 발판을 마련한 것.

그래서 궁핍했던 일제강점기 시기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만주로 많이 떠났지만[16], 호남의 경우 인구유출이 별로 없었다는 말도 있다. 호남은 곡창지대였던 연유도 있지만, 당시 호남의 대지주이자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준호가 전남 영암에서 900정보(270만평) 규모로[17] 간척사업을 하여 세운 학파농장에서 5,000명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만큼, 굳이 만주로 가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방안(대안)을 마련해준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간척 사업기간 및 그 이후에도 만주로의 인구유출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학파농장이 해준 것.[18]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중공업 공단을 집중 유치, 발전하여 인구가 많이 늘어난 영남 지역과 달리, 호남 지역은 농업 이외에는 뚜럿한 산업자원 없이 쇠퇴를 거듭하게 된다. 물론, 영남 지역의 해안이 상대적으로 수심이 깊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편이기 때문에 항만을 건설하기에 유리한 측면은 있지만, 교과서에 기술된 거점중심 개발의 확대과정 이론과, 현실에서 사람들이 직접 겪어 본 예산 지원, 사업 프로젝트 선정에는 차이가 있었던 측면이 더 컸다. 호남 지역은 바다의 수심이 얕은 편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편이기 때문에 대규모 항만이 발전하기 어려운 지형이라고는 하나, 공단을 조성하지 못할 만큼 악조건은 아니었기 때문. 무엇보다, 광양만 지역처럼 수심이 깊은 편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대규모 공업단지와 항만이 발전할 수 있는 곳 조차도, 포항제철 창립자인 박태준 선생이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았다면, 발전이 힘들었을 만큼, 한국의 경제발전에서는 지형적, 기술적 여건 외에 당국관계자, 즉 사람도 매우 큰 변수였다.[19] 이후 여수, 광양 지역에 여수 공단이 조성되기 시작한 게 1962년, 여수 국가 산단 조성이 완료된 것이 1979년이고, 광양 국가 산단 조성이 시작된 것이 1982년이다. 즉, 박정희 및 전두환 시절에도, 호남 지역에서 항구로서의 입지가 좋은 여수, 광양에는 산업 단지가 조성되었고, 이들 지역은 1980년대 후반 부터 이미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고소득 지역이 된 건 옳은 얘기지만, 박태준이라는 상식과 합리적인 사고를 갖춘 유력자가 없었다면, 더 훗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전남 동부지역 일부를 제외한 서해안 일대나 광주,목포,전주등 호남 주요 도시들은 개발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 호남 내부에서도 서부와 동부의 지역감정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앞서 말한 쌀농사 중심의 곡창지대라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어쨌든 쌀을 생산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굶주리는 것은 뻔하고, 특히나 아직까지 농업 생산량에 한계가 있던 60~70년대 대한민국 상황에서 중공업 발전을 통한 경제발전과 국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전라도가 계속 쌀농사를 짓지 않으면 국민들을 먹여 살릴수 없었다. 이 때문에 공업 공단은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 경부선 라인을 따라 집중 육성할 수 밖에 없었다. 전라도에서 돈벌겠다고 논 메워서 공장 지었다간 국민 전체가 굶을 수 밖에 없던 상황인 것. 이 때문에 어쩔수 없이 전라도는 농업 생산력 유지라는 목적하에 지역개발이 막혀버리고, 경부선 라인의 공업발전을 통해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전국의 인력이 빠져나가는 동안 전라도는 성장동력을 잃고 쌀농사 짓는 멀티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 완숙기에 접어들자 정작 도태되고 고립되어 내수외에는 소비 대안이 없던 한국의 농업기반을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라는 슬로건과 함께 제조업 올인으로 경제정책을 밀어붙이고 전라도의 거의 유일한 산업기반인 농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FTA등을 통해 점점 약화되고 이제와서 산업기반을 바꿀 수도 없는 전라도의 경제적 몰락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호남의 낙후가 군사 정권의 의도라는 것은, 60-70년대 당시 한국의 주된 수출 라인은 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라인이라는 점, 이로 인해 일본과 가깝고, 미국으로 나가기 쉽고, 들어오기도 편한, 남동 임해 지역에 중화학 공업이 집중된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해석이 과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전술한 식량 확보의 차원에서 현실적인 선택임은 맞지만 이를 정확히 해명하고 소외되는 지역에 대한 대책과 해결책을 강구해야할 정치권이 오히려 이를 이용해, 공업 집중으로 인한 경제발전 결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했으며, 다른 사람애써 공들여 해놓은 일들도 자신들 덕분에 발전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색을 냈던 모습들이, 이러한 논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게다기 이후 정치권들도 정부에 의한 공업 육성 투자등에서 소외되어버린 지역들에 대한 투자도 지역논리에 휩싸여 버리게 되면서 더욱 꼬여버린 것이 현 상황이다.

실제로도 (여수, 광양 제외) 호남이 경부축이나 남동 임해 공단에서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발전이 지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더 심화 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2.4 5.18 민주화운동

제5공화국으로 인해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지역감정이 심해졌다고 보는 견해이다.

쿠데타로 인한 군사독재를 반대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이던 광주 지역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일어나게 되어 호남 지역이 특정 지역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제5공화국대통령경상도 출신이었던 데다 그가 의도적인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 영남 출신 군부대를 파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 여부에 앞서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데는 그런 극단적인 수단 외에도 이미 검증된(?) 방법론도 많았기 때문. 그리고 당시 광주에 파견된 군부대 중 7공수는 전북 익산에 위치해 있었고(현재도 익산에 위치) 부대 구성의 40%는 호남 출신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군은 예나 지금이나 출신지를 기준으로 부대를 구성하지 않는다. 즉, 진압을 과감히 할 수 있는 조처가 아닌, 지역감정 조장 목적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진짜 큰 문제는 지난 과실(過失)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사실의 여부와 무관하게 극단적으로 특정 지역을 깎아내리려고 들고, 불문곡직(不問曲直) 북한군광주 암약을 주장하며 왜곡하려는 행태들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으로 인한 갈등이다. 다양한 국민의견 수렴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종국에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죄없이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명분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부분. 예전에는 어떤 나라의 정치인들이 조상들의 행적을 미화하고자 엉터리 발언을 밀어붙였지만, 우리나라에서까지 이런 모습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면, 한국 사회의 단합을 좀먹게 되는 악질적인 요인이 될 위험까지 있다.

다행히, 현재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언급하며 직접 참가하여 조문을 하고 있고 당시 사상자 유가족들에게 보상을 하고 있지만, 당시의 악몽과 상처가 아무는 것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1.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때문에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감정 항목보면 알겠지만 영호남정도면 그냥 친구수준이다.
  2. 이에 대한 통베충 드립이나 기타 영남 비하들은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작용이든 반작용이든 쓰레기라는 점에는 다를 바가 없다. 고담대구는 좀 별개데, 이건 인터넷 유머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작태를 긍정적으로 봐줄 수는 없고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어짜피 이젠 고대유물
  3. 대구의 옛지명인 달구벌의 '달'과 광주의 순우리말인 빛고을의 '빛'의 합성어
  4. 1960년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이 야당후보 유세에 참가하지 말고 등교하라는 지시에 항의해서 일으킨 시위로 나중에 4.19혁명으로 계승된다.
  5. 당시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이 대구광역시 일일시장으로, 김범일 대구광역시장이 광주광역시 일일시장으로 근무했다.
  6. 경기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도들은 반역향 으로 찍혀 도 명칭이 바뀌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7. 당시 14대 대선 당시 영남 득표를 설명하자면 김영삼의 지지기반인 PK지역에서는 최소 70% 이상 지지를 얻었지만 TK 유권자들의 성향은 미묘하게 달랐다. 일부 민정계 인사들이 들어가 있던 정주영통일국민당에게 보수 성향 표가 갈려 그나마 저 정도 얻은 것이다. 또 김대중 비토 성향은 그대로 이어져 심지어는 PK출신 박찬종 후보에게도 밀려 대구,경북 한정 사실상 꼴찌였다.
  8. 반대로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오히려 김대중이 부산에 있던 호남 이주민과 일부 젊은 층의 표심으로 2위, 박찬종이 3등을 차지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한 역풍의 영향도 있었는지 정주영이 제일 득표율이 낮았다. 민정계 세력들 일부가 다시 뭉친 있던 정당에 부산 유권자들이 표를 주기 어려웠던 것도 있다.
  9. YS는 문민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호남출신의 황인성 전 전북지사를 임명하여, 대선 후에 나타날 수도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국민통합을 담당할 내각 조율을 황 총리에게 맡기고자 했었다. 10개월 후, 쌀시장 개방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 총리가 물러닌 후에는 소신과 개혁 이미지가 강한 법관 이회창을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10. 김대중은 대구경북권에서 대체로 10% 중반대의 표를 얻었다. DJP 연합으로 맺어진 자유민주연합 유력 의원의 지역구가 그랬는데 박태준포항시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김중권영양군, 울진군 지역의 경우 3자 대결에서 10% 중후반대를 기록했을 정도.
  11.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2위로 낙선한 이인제가 경선 결과 불복 후 탈당하여 신당 창당 후 독자 출마하자 이회창의 표를 적게는 20%, 많게는 40%까지 잠식했다.
  12. 문민정부 출범 후 그 당시 대구, 경북 지역의 정서를 대략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자민주. 김영삼 및 민주계 세력들이 민자당을 창당해 들어온 이후로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이었던 민정계 출신 정치인들을 서서히 축출해가기 시작했다. 아예 집권한 뒤로는 사정(司正) 바람으로 부정 혐의가 있는 경북 출신 주요 정치인을 몰아낸 여파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에 이어 5.18 특별법 제정까지 대구 경북지역이 민자당에 바라본 시선은 매우 따가웠다. 오죽하면 킹메이커라 불린 선거전략가 허주가 영국에서 체류 중인 DJ에게 면담을 요청했을 만큼 경북에서는 집권당의 TK 추락에 대한 위기의식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1995년 첫 지방선거에서 대거 자리를 내줬고 이듬 해 15대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신한국당은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김종필이 일부 민정, 공화계 의원들과 민자당을 탈당하고 만든 정당인 자민련에 패한다.
  13. 다만 TK와 PK간의 소지역주의 대결양상은 전부터 있어온 사실이었고 TK 추락사건이란 용어는 93년도 개각 및 사정(司正) 바람 후 조선일보 시사만화에서 나온 용어였다.
  14. 오히려 YS는 경선에서 패한 후 승복하지 않고 탈당하여 독자 출마한 이인제를 암묵적으로 지원한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아예 거제 등 경남 일부 지역에서는 이인제가 1위를 한 곳도 있었다.
  15. 후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충청도남부 일부인 반면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 중부 전체였다.
  16. 현재 조선족들의 출신지를 보면 함경도 출신들이 가장 많고(주로 연변) 그 다음은 평안도 출신들(주로 요녕성),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의외로 경상도 출신들이 꽤 많다고 한다.
  17. 오늘날 읍이나 면이 대개 80만평 ~ 250만평 정도 되는 크기이다. 즉 큰 읍면 한 곳 넓이의 물을 메워 전부 논밭으로 바꾼 것.
  18. 그는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친일파이다.# 한편, 그를 긍정하는측에서는 '이 학파농장의 일과 민족자본(호남은행)을 설립한 공적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6.25 동란 당시 잡혀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방 직후 노무자 대표들의 노임지급 요구에도 성실히 응해 품삯을 두둑히 챙겨주었던 것도 인심을 얻었던 이유'라고 주장한다.
  19. 여기에는 당연히, 이전부터 쌓여있던 주요 국가 정책을 지휘할 정부요직 및 경제요직에 깔려있는 TK인맥에 비해 전라도에는 정부요직에 올라간 사람 자체가 없었던 것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