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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1일 (화) 16:1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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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리 조엘 (Billy Joel) |
본명 | 윌리엄 마틴 조엘 (William Martin Joel) |
국적 | 미국 |
출생일 | 1949년 5월 9일, 뉴욕 주 브롱크스 |
직업 | 싱어송라이터 |
신장 | 166cm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웨버 (1973~1982),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5~1994), 케이티 리 (2004~2010), 알렉시스 로데릭 (2015~) |
자녀 | 장녀 알렉서 레이 조엘, 차녀 델라 로스 조엘 |
활동 | 1964년~ |
데뷔 | 1971년 1집 Cold Spring Harbor |
악기 | 보컬, 건반 악기, 기타 |
장르 | 록, 팝, 피아노 록, 팝 록, 로큰롤, 소프트 록, 클래식 |
링크 | BJ > > |
목차
1 개요
Piano Man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1949년 5월 9일 출생. 미국 뉴욕 주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윌리엄 마틴 조엘(William Martin Joel)"[1]이며 유대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다.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미국인.
작사작곡은 본인이 혼자서 하며 주로 피아노를 기반해서 작곡된 곡들이 대부분이다. 대표곡 Piano Man처럼 서사적이고 애환을 담은 통렬한 가사를 써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남성적인 파워풀한 보컬이 인상적이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하면 엘튼 존과 같이 바로 떠올리는 대표적인 뮤지션. 그를 명칭하는 대표 닉네임은 Piano Man. 1971년 1집 Cold Spring Harbor부터 1993년 <River Of Dreams>까지 총 12집의 정규 앨범들을 발매했으며 12집을 끝으로 앨범 작업에서 은퇴를 했다. 그 이후로 발매된 앨범들은 라이브 실황과 컴필레이션 앨범들.제발 앨범을 다시 내시오!![2] 2007년에 작곡된 싱글 All My Life와 Christmas In Fallujah은 예외지만 팝 음악 작업에서 사실상 은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소련에 방문해 순회 공연을 진행한 첫번째 미국의 뮤지션이기도 하고, 최초로 서방 뮤지션의 공연이 소련 FM라디오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전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RIAA에 따르면 미국에서 6번째로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뮤지션이라고 한다. 또한 그래미상을 총 6회 수상했다. 1985년에 발매된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들 중 하나이다. 빌보드 200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션 16위로 꼽히기도 했다.
199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2006년 롱아일랜드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1년에 그래미 레전드 상을 받았으며 총 6회의 그래미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1993년 버클리 음악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Hon DMus)를 받았으며 총 6개의 명예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2013년에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2013년 12월, 뉴욕의 실내 경기장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특허권을 받아 무한정으로 공연을 진행할 수 있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다. 1978년 12월 14일 첫 공연을 진행한 이후 2016년 8월 기준으로 총 87개의 공연을 진행했다.
2 경력
2.1 초기 시절
2.1.1 피아노 연주자와 밴드 활동 (1964~1970)
15세의 빌리 조엘. 1964년 |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윌리엄 마틴 조엘(William Martin Joel)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유대인 하워드 줄리어스 조엘(Howard Joel)[3], 어머니는 미국 유대인 로서린드 니만 조엘(Rosalind Nyman Joel). 부모는 1942년에 만났고, 4년 뒤인 1946년에 결혼했다. 빌리 조엘은 브롱크스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뉴욕의 레빗타운에 이사를 가서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빌리 조엘이 8살이 되던 해인 1957년에 부모가 이혼했고, 아버지 하워드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가 다른 여성과 재혼해 아들 '알렉산더 조엘'(Alexander Joel)을 얻어 가정을 새로 차렸다.[4] 어머니 로서린드는 재혼하지 않고 자식들을 데리며 지내왔다.
빌리 조엘은 3살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어머니에 의해 피아노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빌리 조엘을 가르쳤던 피아노 교사들 중에서 미국의 피아니스트 모튼 에스트린과 뮤지션 티모시 포드가 있었다. 그렇게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면서 십대때는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총 22번의 경기에서 우승했지만 24번째 경기에서 코가 부러지는 바람에 복서 생활을 중단했다.
고등학생부터 여러 클럽들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면서 시간을 몰두했고, 본인이 다니던 힉스빌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았을때 클래식을 전공했고 로큰롤과 R&B의 다양한 뮤지션들의 음악들도 들으면서 자라 본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빌리 조엘이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가지기 시작한 건 1964년 2월 에드 설리번 쇼에서 방영하던 비틀즈 라이브 영상을 본 것이었다. 비틀즈가 본인을 뮤지션으로 만든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고.
16살이던 해인 1965년에 밴드 "에코스"를 본인 친구들과 같이 결성했다. 당시 곡들을 직접 작곡하지 않고 다른 뮤지션들의 곡들을 커버하면서 부르면서 활동했다. 빌리 조엘은 당시 여러 레이블 사에서 피아노 세션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그룹 샹그리-라스(The Shangri-Las)의 "Leader Of The Pack"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데모로 녹음하기도 했고 이 곡은 이 그룹의 히트곡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그룹의 "Remember (Walking In The Sand)"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정작 빌리 조엘은 당시 정식 곡인지 데모를 녹음했는지 구분을 못했다고 한다.[5]
더 해슬스 (The Hassles). 왼쪽이 빌리 조엘 |
에코스는 1965년에 "Lost Souls"로 이름을 교체했고 1967년에 밴드에서 나와 다른 밴드 더 해슬스(The Hassles)에 들어가게 되어 키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7년 11월 21일에 1집 <The Hassles>을 발매해 정식으로 데뷔했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1969년에 발매된 2집 <Hour Of The Wolf> 역시 마찬가지로 실패,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1967년 11월에 발매된 리드 싱글 "You've Got Me Hummin'"[6]은 빌보드 112위로 1주동안 기록되는 안습한 성적을 보였지만, 더 해슬스의 유일한 빌보드 히트곡이자 유일한 성공이었다.
결국 빌리 조엘은 상업적인 실패와 멤버들 간의 불화로 인해 더 해슬스에서 나왔고 더 해슬스의 드러머 존 스몰과 같이 1970년에 2인조 듀오 아틸라(Attila)를 결성했다. 1970년 7월 27일에 1집 <Attila>를 발매했지만, 역시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올뮤직에서 역사상 최악의 록 앨범 중 하나라는 혹평을 내리면서 아틸라 활동도 접었다.[7] 그리고 1970년 10월에 빌리 조엘이 존 스몰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웨버 스몰과 불륜을 저질러 존 스몰과의 관계도 막을 내렸다.
빌리 조엘은 친구의 아내를 뺏었다는 죄책감과 몇 년간 이어온 상업적인 실패와 이어지던 무명으로 인해서 음악적으로 큰 좌절감을 느껴 이로 인해 우울증도 앓게 되어 어두운 기간을 보내었다. 결국 어원 만주르[8]의 아파트에서 가구 세정제를 한 병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지만, 존 스몰이 바닥에 의식을 잃어 누워있던 조엘을 발견해 서둘리 병원으로 보내서 목숨을 구했다.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주변 동료들이 도와주게 되면서 정신을 차렸다.[9]
2.1.2 Cold Spring Harbor부터 Turnstiles까지 (1971~1976)
1970년에 여러 힘든 고비를 보내다가 여자친구였던 엘리자베스[10]와 뉴욕의 Cold Spring Harbor 항구 주변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1971년 7월에 Family Productions 레이블 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솔로 앨범을 작업했다. 그해 여름에 작업되어 1971년 11월 1일에 1집 Cold Spring Harbor가 발매되어 솔로 뮤지션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 데뷔도 순탄치 않았다. 앨범의 마스터링 중에 턴테이블이 빨리 돌아가는 채로 작업되어 곡의 속도와 빌리 조엘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음이 몇 피치나 올라갔다. 이를 전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발매했다.[11]
1971년 원본 판, Cold Spring Harbor의 1번 트랙 She's Got A Way. |
그 결과 성공은 커녕, 또다시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다. 당시 빌리 조엘이 자신의 앨범을 듣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 음반을 바로 찢어버리고 밖에 던져버렸다고 한다.[12] 결국 빌리 조엘은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프로듀서이자 Family Production 레이블 사의 사장 아티 립,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의 소유자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고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곡들의 저작권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당시 22살의 무명 가수 빌리 조엘한테 서명했다. 하지만 빌리 조엘은 1971년에 Family Production에서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기 때문에 1973년 콜롬비아 레이블 사와 계약 이후, 1977년부터 전성기를 보내면서 발매된 히트 앨범과 싱글들의 커다란 수익을 여전히 받았고, 1986년 10집 <The Bridge>까지 15년 동안 빌리 조엘의 레이블 사로 유지하고 있었다. 빌리 조엘의 경력에서 한동안 붙어있던 혹이었던 셈.
앨범의 사운드 에러와 무관한 "She's Got A Way"와 "Everybody Loves You Now" 등의 싱글도 차트 진입에 실패하여 역시 실패했다. 변함없이 이어진 상업적인 실패, 레이블 사와 계약 문제로 데뷔 초부터 갖가지 문제들을 안고 오히려 더욱 힘들고 순탄치 못한 시기를 보냈다.
센트럴 파크에서 촬영된 사진. 1972년 |
그럼에도 빌리 조엘은 Cold Spring Harbor에 참여한 세션 연주자들과 투어 밴드를 결성해 1971년 11월부터 투어 활동을 시작했다. Family Productions의 계약 문제와 음반 작업으로 인해서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럼에도 빌리 조엘은 다른 레이블 사와 계약을 원했던 상태였다. 1972년 봄까지 <Cold Spring Harbor> 투어 활동을 마쳤고, 1972년에 6개월 동안 로스앤젤레스의 윌셔와 웨스턴 애비뉴의 교차로 근처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빌 마틴이라는 가명으로 피아노 연주자로 일했다. 어떻게든 다른 레이블 사의 계약을 따기 위해서 다시 밑바닥부터 일했던 것.
당시 빌리 조엘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필라델피아 라디오 방송국 WMMR의 음악 감독 데니스 윌렌이 빌리 조엘을 초대해 본인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공연을 진행하게 준비하려 했다. 그렇게 빌리 조엘은 1972년 4월 15일 토요일 밤에 밴드와 같이 공연을 진행하게 될 준비를 했다. 그렇게 라디오 방송국의 스튜디오에서 앨범 수록곡들과 미발매곡들로 구성된 12곡을 불렀고 이 공연은 라디오에서 전파됐다. 특히 이 공연에서 부른 "Captain Jack"가 라디오에서 수차례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싱글로 발매하지 않아도 커다란 인기를 끌었을 정도.
몇개월 뒤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이 라이브 버전을 복사한 여러 테이프를 방영하는 등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고, 그 결과 각종 레이블 사에서 빌리 조엘과 계약을 하기를 원했다. 1973년 1월에 아틀란틱 레이블 사에서 제안이 왔지만, 이를 거절을 하면서 본인이 원하던 콜롬비아 레이블 사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13] 콜롬비아 레이블 계약 이후 8개월 뒤인 1973년 9월 LA의 Devonshire Sound 스튜디오에서 2집 <Piano Man>을 작업했다.
타이틀 트랙 "Piano Man"이 1973년 11월 2일에 리드 싱글로 발매되었고, 앨범은 싱글이 발매되고 일주일 뒤인 11월 9일에 발매되었다. 미국 빌보드 27위, 캐나다 26위, 호주 16위[14]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차트 진입에 성공하여 좋은 성적을 보였고, 이후 미국에서 4백만장 이상이나 팔려 플래티넘 4장을 기록해 큰 성공을 보였다. 앨범 발매 당시 수록곡 "Piano Man", "Captain Jack"과 더불어서 평론가들한테 호의적인 평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무명을 벗어나 정상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Piano Man 뮤직비디오[15] |
"Piano Man"으로 무명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Piano Man"으로 생긴 수익 중 대부분은 빌리 조엘에게 오는건 별로 없었다. "Piano Man"에 참여한 세션 연주자들은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손 꼽히던 전문 세션들이었지만, 몇 년 간 밴드와 활동했던 빌리 조엘은 솔로 가수처럼 정식 밴드가 아닌 세션들과 같이 작업한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느꼈다. 결국 가수 생활도 어정쩡하게 되었고,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던 생계 문제와 <Piano Man>의 성공과 인기를 편승시켜야 할 다음작을 작업하기에 상당한 부담감과 압박을 느꼈다.
그렇게 1974년 봄부터 여름까지 노스 할리우드의 Devonshire Sound 스튜디오에서 3집 <Streetlife Serenade>를 작업해 그 해 10월에 발매했지만, 미국 빌보드 35위, 캐나다 16위, 호주 85위를 기록해 백만장 정도의 판매량을 거두어 "Piano Man"에 비하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싱글들도 크게 히트치지 못했고, 전작과 달리 평론가들은 3집에 대해 혹평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Streetlife Serenade>는 비교적 산만하던 전작에 비해 한층 안정적이고 간결한 음악성을 보이는데 비해 반응이 그렇게 좋지 못했던 것.
<Streetlife Serenade>는 레이블 사에서 <Piano Man>에 이을 편승작으로 작업하라는 반 강요로 시작해 작업된 앨범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빌리 조엘은 평론가와 음악 업계의 껄끄럽고 냉담한 관계가 시작되었다.[16] 그래서 이에 관한 비화와 음악계 산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3집의 6번 트랙 "The Entertainer"를 작곡했지만, "The Entertainer"도 예외가 아니었으므로, 4분에 가까운 곡을 3분 5초로 편집해 싱글로 발매했고, 빌보드 30위 정도 기록되어 크게 히트치지 못했다.
비록 무명에서 벗어났지만, 변하지 않던 생계 문제와 <Piano Man> 이후로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성공, 본인보다 대표곡 "Piano Man"과 "Captain Jack"이 더 잘 알려진 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반 무명에 가까웠던 시기였다. 그래도 1971년 이후로 꾸준히 진행하고 있던 투어 활동, 1974년부터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본인의 입지도를 넓히려고 노력했고, 팬들도 이 시점부터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부터 3년간 이어졌던 로스앤젤레스의 생활에서 벗어나 1976년 1월 뉴욕으로 돌아왔다.
본인의 고향인 뉴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빌리 조엘은 기쁜 마음으로 뉴욕에 관한 주제로 삼은 4집 <Turnstiles>를 작업했다. 콜롬비아 사에선 제임스 윌리엄 가르시오[17]를 영입해 4집의 프로듀싱을 맡았고, 엘튼 존 밴드의 전 멤버들[18]을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스튜디오[19]에서 녹음했지만, 빌리 조엘은 가르시오의 사운드를 맘에 들어하지 않아해 가르시오는 4집의 프로듀싱에서 벗어났고, 대신 빌리 조엘과 편곡자 켄 애셔와 같이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았고, 뉴욕 헴스테드의 Ultrasonic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재녹음했다. 그리고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웨버를 빌리 조엘의 사무 관리자로 세우기도 했다. 4집 <Turnstiles>는 전작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진 음악적인 완성도로 올뮤직에선 별 4개 반이나 줄 정도로 호의적인 평을 받은 수작이다.
특히 돋보이는 수록곡 "Say Goodbye To Hollywood", "Summer, Highland Falls", "New York State Of Mind", "Prelude/Angry Young Man", "Miami 2017"으로 빌리 조엘의 클래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미국에선 빌보드 122위로 기록되어 전작들보다 더욱 크게 실패했고 거의 시망 수준이었다. 하지만 호주에선 12위를 기록했고, 골드를 기록해 어느 정도 크게 면했으며[20] 이 시기부터 팬들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리드 싱글 "Say Goodbye To Hollywood"는 차트 진입에 실패했고, "James"는 네덜란드 16위, 벨기에 22위로 비교적 양호하게 기록했다.
1975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빌리 조엘 밴드의 라인업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1974년 <Streetlife Serenade> 투어에서 베이시스트 '더그 스테그마이어'가 영입된 걸로 시작해 1975년에는 기타리스트 '러셀 재버스', '하위 애멀슨',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 색소폰 '리치 카나타'가 영입되었다. 러셀 재버스는 1979년에 영입된 스티브 브라운과 같이 기타 세션으로 활약했고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는 2004년까지 30년 동안 함께한 대표적인 동료 중 하나이다. 1975년에 구성된 라인업으로 <Turnstiles>부터 선보이기 시작했고, 1988년까지 8년 간 함께했다.
2.2 전성기
2.2.1 The Stranger부터 Songs In The Attic까지 (1977~1981)
1978년 52nd Street 투어. 항상 담배를 물며 간지를 보였다. |
꾸준히 투어 활동을 하고 있던 1977년 여름, 빌리 조엘은 프로듀서 계의 거물인 필 라몬을 영입해 5집 <The Stranger>를 작업했다. 앨범은 1977년 7~8월 뉴욕 7번 거리의 A&R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1개월 동안 작업을 했고, 앨범의 수록곡들은 대부분 1977년 초~중에 먼저 완성된 상태였다. 1973년 2집 <Piano Man> 이후로 큰 성공을 맛보지 못해 5집도 전작들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약세를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 라몬은 빌리 조엘의 음악성을 확실히 짐작하여 큰 기대를 걸면서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1970년대 말 디스코 열풍으로 인해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빌리 조엘의 예상과 5집은 대성공이었다. 미국 빌보드에서 2위로 기록해 처음으로 정상으로 올라갔고, 영국에서도 처음으로 차트에 진입한 앨범이 되어 24위를 기록, 호주 3위, 캐나다 2위, 일본 오리콘 LP 차트 3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10~20위 안에 진입되어 높은 성적을 보였다. 어느 나라에서도 1위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일취월장 그 자체였다. 미국에선 무려 10,000,000장 이상이나 팔려 이후 다이아몬드를 기록했고, 다른 국가에서도 높은 판매량을 보여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기록을 깼고, 1985년에 기록이 깨지기 전까진 콜롬비아 레이블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앨범이 되었다.
싱글들도 앨범처럼 크게 성공했고 "Movin' Out (Anthony's Song)"이 빌보드 17위, 캐나다 11위, "She's Always A Woman"은 빌보드 17위를 기록했으며 1977년 9월에 발매된 리드 싱글 "Just The Way You Are"는 빌보드 3위, 빌보드 AC 차트 1위, 캐나다 6위, 영국 19위를 기록해 빌리 조엘의 첫 히트곡이자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다. "Just The Way You Are"는 커다란 인기를 얻어 2년 뒤 197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곡, 올해의 음반으로 우승했다. 앨범과 싱글의 대성공으로 1977년 이전의 반 무명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슈퍼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어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보내기 시작했다. 1967년 데뷔 이후로 무려 10년 만에 이룬 쾌거. 5집부터 프로듀서로 참여한 필 라몬은 1986년 10집 <The Bridge>까지 참여해 빌리 조엘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해졌다.
1978년에 발매된 6집 <52nd Street>도 <The Stranger>의 상업적인 성공과 인지도를 그대로 편승시키는데 성공해 빌보드 200 1위, 캐나다 1위, 호주 1위, 뉴질랜드 1위, 영국 10위로 기록되어 전작보다 차트 성적이 더욱 높고, 처음으로 1위로 기록된 앨범이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10~20위 안에 기록되어 좋은 차트 성적을 보여줬고, 전체적인 판매량은 <The Stranger>가 더 높지만, 이 앨범 역시 대성공을 거두어 전작의 인지도도 같이 편승하는데 성공했다. 197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Just The Way You Are", <52nd Street>로 두 번이나 우승했고, "Honesty"는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The Stranger>와 같이 가장 큰 영예를 누리게 된 앨범이자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 앨범이 되었다. 1978년 10월에 발매된 리드 싱글 "My Life"은 빌보드 3위로 기록해 앨범의 최대 히트곡이 되었고, 1979년 1월에 발매된 "Big Shot"은 빌보드 17위, 1979년 3월에 영국에서만 발매된 "Until The Night"은 영국 50위, 1979년 4월에 발매된 "Honesty"는 빌보드 24위로 기록되었다. "Honesty"는 북미 지역보다 오히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에선 1위나 올랐다.
1980년 Glass Houses 녹음 당시 본인 저택에서 촬영된 사진. |
<52nd Street> 발매 이후 1년 뒤 1979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7집 <Glass Houses>를 뉴욕에서 작업했고, 4개월 뒤 1980년 3월에 발매했다. 전작들의 커다란 성공으로 승승장구했지만, "Just The Way You Are"로 인해서 빌리 조엘은 하모니카를 부르면서 피아노 연주하는 가수라는 이미지 뿐 만이 아니라 로즈 피아노에 앉아서 차분한 발라드를 부르는 이미지로 인식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강력한 곡들을 부르면서 록커의 이미지를 원했던 바와 달리 발라드 가수라고 생각되는걸 원하지 않았으므로 7집을 더욱 강력한 사운드로 작업했고, 70년대 말부터 유행하던 뉴웨이브와 펑크의 요소도 크게 차용했다.
<Glass Houses>도 빌보드 200 1위, 캐나다 1위, 호주 1위, 뉴질랜드 1위, 일본 오리콘 LP 차트 6위, 영국 9위로 여러 국가에서 5~10위 안에 진입되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대성공을 거뒀다. 빌보드에선 1위로 6주 동안 기록되었고, 연말 차트에선 4위로 올랐고, 7백만장 이상이나 팔려 1980년대 미국에서 41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다음 해 1981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올라 노미네이트,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앨범 후보에 올라 우승했고, 빌리 조엘 본인도 그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 최고의 록큰롤 남성 보컬 상을 받았다. 7집의 싱글들도 역시 크게 히트쳤는데, 빌보드 7위로 기록된 "You May Be Right", 캐나다 4위, 빌보드 19위로 기록된 "Don't Ask Me Why"와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는 빌보드 1위로 기록된 첫 곡이 되었다. 1980년 1월 23일에 발매된 리드 싱글 "All For Leyna"는 영국에서 40위로 오르는데 그쳤지만, 스페인에선 16위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 첫 라이브 앨범 <Songs In The Attic>을 발매했고, 1980년 6~8월까지 미국의 여러 주에서 진행된 <Glass Houses> 투어의 실황을 담았다.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시기에 묻혀있던 1970년대 초기 음악들을 다시 보여줄려는 시도와 팬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시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초기 시절의 곡들만 따로 골라 1970년대부터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11곡들을 골라서 수록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8위, 호주 9위, 네덜란드 1위, 덴마크 9위, 일본 3위로 다수의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해 꽤 히트쳤다. 여기서 4곡이 싱글로 발매되었는데, 1970년대에 원래 싱글로 발매된 곡들을 라이브 버전으로 재 발매된 셈. 차트에 진입된 곡은 2곡이고, "Say Goodbye To Hollywood"는 빌보드 17위, 캐나다 27위로 기록되었고, "She's Got A Way"는 빌보드 17위, 빌보드 AC 차트 4위를 기록되었다. 원곡보다 달리 라이브 버전이 더욱 크게 히트친 경우.
2.3 위기와 새로운 만남
2.3.1 The Nylon Curtain부터 Концерт까지 (1982~1988)
1977년부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1982년 봄부터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982년 4월 15일 롱아일랜드에서 1978년형 할리 데이비슨을 몰다가 오른쪽에서 64km로 달려오던 자동차에 치어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빨간불에 질주하던 차에 부딪혀 빌리 조엘은 몇미터를 날아가 왼손 엄지손가락이 굽어졌고 오른손이 반대 쪽으로 펴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엠뷸런스에 실려가 뉴욕의 한 대형 병원에 입원해 봉합 수술을 해서 회복을 했다.[21] 퇴원하고나서 본인의 손을 다시 이전처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하루종일 피아노를 연주했다.[22] 특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뮤지션으로서 손 부상은 매우 치명적이었고, 당시 의사들은 피아노 연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우려했지만 정작 빌리 조엘 본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어차피 본인은 록큰롤 뮤지션이기 때문에 손이 안되면 팔꿈치로 건반을 치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래도 손 부상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1982년에는 투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23]
그랬던 시기에 뉴욕에서 8집 <The Nylon Curtain>을 작업했고, 그해 9월에 발매됐다. 8집은 뉴웨이브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상당히 차용하여 신디사이저의 비중이 크고 비틀즈의 헌정을 담아 전반적으로 비틀스러운 사운드를 가졌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어두운 면과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비관론 등의 사회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아 작업한 점과 음악적인 완성도도 상당히 치밀해 빌리 조엘의 명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작들이나 다음작들에 비하면 진지하면서 어두운 사운드를 담았고, 기존의 빌리 조엘에 비하면 꽤 독특한 작품.
앨범 작업 몇개월 뒤인 1982년 7월에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와 이혼하면서 1973년 이후 9년 간 이어지던 결혼 생활을 끝냈다. 오토바이 사고와 이혼으로 인한 개인적인 어려움이 본인의 경력과 당시 잘 나가던 전성기 시절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진 않았지만, 8집은 전작들에 비하면 꽤 처진 성적을 거두었다. 미국에선 2백만장으로 전작들에 비하면 판매량이 낮은 편이고, 다수의 국가에서도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싱글들 "Allentown", "Pressure", "Goodnight Saigon"는 미국에서 10위 안에 진입하지 못했고, 여러 국가에서 20~30위 안에 진입했다.[24]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올랐고, 일부 국가에선 큰 성공을 보여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처진 성적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과 대비되는 점.
1982년 12월 29일 <The Nylon Curtain> 투어의 마지막 공연 중 하나이자 롱아일랜드 나소의 베테랑 콜로세움에서 진행된 공연이 1983년 HBO 채널에서 <Live from Long Island>라는 제목의 방영되기도 했고 빌리 조엘의 공연들 중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공연이 되었다.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3년 |
1983년 1~2월 사이 카리브 해로 가던 크루즈에서 슈퍼 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 '엘 멕퍼슨'을 만나게 되면서 사귀었다. 처음에는 엘 멕퍼슨과 사귀었지만, 나이 차이로 인해[25]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사귀었다. 새 연인에 대한 감정으로 인해 본인이 십대였을때 자주 들었던 1950~60년대 R&B, 로큰롤, 모타운 뮤직에 관한 낭만적인 기억까지 회상하게 되어 50~60년대 풍의 곡들을 쓰면서 9집 <An Innocent Man>을 작업했다. 1983년 봄에 뉴욕에서 작업된 9집은 몇개월 뒤 1983년 8월에 발매되어 호주 3위, 뉴질랜드 1위, 일본 오리콘 LP 차트 3위, 영국 2위, 빌보드 200 4위로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되어 크게 히트쳤다.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전작 <The Nylon Curtain>에 비하면 기사회생한 셈.
앨범과 같이 싱글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3년 8월에 발매된 "Tell Her About It"은 영국 4위, 1980년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이후로 두번째로 빌보드 1위 곡이 되었다. 1983년 9월에 발매된 "Uptown Girl"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1위로 기록된 곡이 되었고, 1983년 12월에 발매된 타이틀 트랙 "An Innocent Man"는 빌보드 10위, 영국 8위로 기록, 1984년에 발매된 "The Longest Time", "Leave A Tender Monet Alone"는 차트 20~30위 안에 진입했다. 9집은 1983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1984년 그래미 어워드에 후보로 올랐지만 괴물 같은 넘사벽로 인해 노미네이트로 그쳤다.[26] 1984년 12월까지 <An Innocent Man>의 7곡을 몇개월 간격으로 싱글로 발매했고, 마지막으로 발매된 곡은 마지막 트랙 "Keeping The Faith"은 1985년 초에 차트에 올라 빌보드 18위, 빌보드 AC 차트 3위를 기록했다.
1983년에는 한해 동안 투어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84년 1월부터 <An Innocent Man> 투어로 다시 투어 활동을 시작했다.[27] 1985년 1월 23일에 세계적인 히트곡 We Are The World에 참여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에서 1분 10초에 티나 터너와 같이 부른 턱수염 남성이 빌리 조엘.
1985년 9월 2일에 발매된 첫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RIAA에 의하면 미국에서 총 23,000,000장이나 팔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이 팔린 빌리 조엘의 앨범이 되었다. 동시에 1985년 봄에 녹음된 신곡 "You're Only Human (Second Wind)"와 "The Night Is Still Young"도 그 시기에 같이 싱글로 발매했다. 두 곡 다 싱글 차트 40위 안에 진입해 각각 9위, 34위를 기록했다.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85년 3월에 결혼했고, 그해 12월 29일에 딸 알렉서 레이 조엘이 태어났다. 결혼 생활과 컴필레이션 앨범의 막대한 성공으로 인해 앨범 작업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약 3년 동안 앨범을 작업하지 않았다.
1985년 12월부터 1986년 봄까지 10집 <The Bridge>를 작업했고, 전작들처럼 뉴욕의 여러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앞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된 앨범들과 달리 1978년 <52nd Street>처럼 뉴욕 음악의 방향으로 되돌아가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동시에 뉴웨이브의 요소를 꽤 크게 차용했다. 이 시점부터 빌리 조엘은 작곡에 약간의 어려움을 느껴 9번 트랙 "Code Of Silence"엔 신디 로퍼가 참여하여 작사를 맡았다. 그리고 5번 트랙 "Baby Grand"에서는 본인의 우상인 레이 찰스와 듀엣으로 불렀다. 10집은 빌보드 200에서 7위, 호주 2위, 영국 38위, 일본 2위 등으로 기록해 전작들 만큼은 아니지만, 꽤 크게 성공했다. 10집의 싱글 "Modern Woman"[28], "A Matter Of Trust", "This Is The Time", "Baby Grand" 중에서 가장 크게 히트친 곡은 빌보드 10위로 기록된 "A Matter Of Trust"와 "Modern Woman"이다. "This Is The Time"는 빌보드 19위, 빌보드 AC 1위, "Baby Grand"는 빌보드 75위, 빌보드 AC 3위를 기록했다. 또한 10집부터 빌리 조엘에게 큰 전환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1971년부터 15년간 붙어 있던 Family Productions과 계약을 드디어 끊었다. 당시 콜롬비아 레이블 사의 회장이자 CBS의 사장 월터 예트니코프(Walter Yetnikoff)가 오랫 동안 이어온 거래를 끝내자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압력을 주었고, 이로 인해 Family Productions의 사장 아티 립은 빌리 조엘의 음악 카탈로그와 판권을 조엘에게 팔았고, 1971년부터 15년 동안 이어온 계약을 1986년에 끊었다.[29]
1984년 이후로 2년 만에 투어 활동을 다시 재개했고, 1986년 9월부터 1987년 12월 오세아니아까지 1년 동안 진행했다. 1975년에 결성된 빌리 조엘 투어 밴드 3기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투어가 되었고, 1988년 이후로 기타 러셀 재버스, 데이비드 브라운, 더그 스테그마이어가 밴드를 떠났다. 그리고 <The Bridge>는 필 라몬이 참여한 마지막 빌리 조엘의 앨범이 되었다.[30]
빌리 조엘. 1987년 8월 소련에서 |
1986년 10월부터 빌리 조엘은 소련에서 투어를 진행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고, 약 1년 뒤인 1987년 7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11일 동안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개의 공연을 진행하게 되면서 최초로 소련에서 공연을 진행한 미국의 록 뮤지션이 되었다. 투어 밴드 동료들과 아내, 어린 딸을 데리고 소련에서 투어 활동과 동시에 여행을 즐겼고, 11일 간의 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서 빌리 조엘은 관중에게 조명을 빛추는 것에 대해 몹시 화내 야마하 CP를 뒤집어 버리거나 마이크를 때려 부시는 등 다른 공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과격한 쇼맨쉽을 보였고,[31] 역대 빌리 조엘 투어 중에서 가장 열성적이고 파워풀한 컨디션을 가진 투어가 되었다.[32]
당시 빅터라는 광대를 만나기도 했고 그에 대해서 영감을 얻어 "Leningrad"를 작곡하기도 했다. 해당 곡은 1989년 11집 <Storm Front>의 7번 트랙.[33] 7~8월 공연 실황을 담아서 1987년 10월에 라이브 앨범 <КОНЦЕРТ>로 발매했다.[34] 빌리 조엘은 소련에서의 기억은 소중하다고 여러번 회고했지만, 정작 투어를 진행하면서 무려 백만달러의 적자가 생겨 본전을 뽑지 못했다. 하지만 본인은 돈보다 보내온 경험이 더 소중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고.오오 대인배
1987년은 빌리 조엘에겐 투어 활동만 돋보였던 해였다. 1988년 7월에 일본에 약간의 공연들만 진행한 걸 제외하면, 1988년에는 다시 투어 활동을 멈추었고, 이 시기에는 디즈니 영화 올리버와 친구들에서 테마곡 뉴욕판 하쿠나 마타타"Why Shoud I Worry"를 불렀던 걸 제외하면 별 활동이 없었다. 빌리 조엘에겐 1988년은 조용했던 년도로 봐도 무방하다.
2.4 다시 찾아온 위기와 제2의 전성기
2.4.1 Storm Front부터 River Of Dreams까지 (1989~1993)
1988년 가을부터 1989년 여름까지 뉴욕의 여러 스튜디오에서 11집 <Storm Front>를 작업했다. 1986년 10집 <The Bridge> 이후로 3년 만. 필 라몬 대신에 믹 존스를 영입했고 다른 세션연주자들을 영입다.[35] 이 앨범부터 복고적인 방향으로 음악적인 변화를 가졌다. 전작들과 달리 사뭇 다른 분위기와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빌리 조엘 본인은 이 앨범을 말그대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앨범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8집 <The Nylon Curtain>처럼 사회적인 내용의 비중이 크기도 한데, 특히 We Didn't Start The Fire와 "Leningrad"를 예를 들 수 있다.
그런데 1989년 10월 앨범이 발매되기 전인 1989년 8월에 또 다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빌리 조엘의 매니저 프랭크 웨버[36]를 해고했고 프랭크 웨버를 9천만 달러 횡령의 이유로 고소해 법정 다툼을 벌였다. 1990년 1월에 불공정한 판정으로 프랭크 웨버에게 2백만 달러를 받았고, 그 해 4월에 프랭크 웨버는 3천만 달러를 받기 위해서 맞고소를 했지만, 기각되었고, 전 매니저와 법정 다툼은 1990년에 조용히 끝났다.[37] 법정 다툼이 이어지던 기간에 빌리 조엘은 신장결석으로 1989년 9월 25일에 뉴욕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하기도 했다.[38]
빌리 조엘의 가장 큰 히트곡 중 하나인 We Didn't Start The Fire |
개인적인 어려움이 오고 가던 시기에 <Storm Front>가 그해 10월에 발매되었고, 오랜만에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83년 9집 <An Innocent Man> 이후로 큰 판매량을 보였고, 빌보드 200 1위, 호주 1위, 캐나다 4위, 영국 4위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되었고, 미국에선 1980년 7집 <Glass Houses> 이후로 9년 만에 빌보드 1위로 기록된 앨범이다. 싱글은 "The Downeaster Alexa", "I Go To Extremes", "And So It Goes", We Didn't Start The Fire, "Leningrad", "That's Not Her Style", "Shameless"[39]으로 총 6곡이 1990년까지 발매되었고, We Didn't Start The Fire는 빌보드 1위, 영국 7위, 캐나다 2위로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되었고, 3번째로 빌보드 1위 곡이 되었다.
"The Downeaster Alexa"는 캐나다 25위, 빌보드 57위, 영국 76위로 북미와 유럽에선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일본에선 6위로 기록되었다. "I Go To Extremes"는 캐나다 3위, 빌보드 6위, 일본 1위로 We Didn't Start The Fire 다음으로 큰 히트곡. "And So It Goes", "Leningrad", "That's Not Her Style", "Shameless"는 여러 국가에서 싱글 차트 20~50위 안에 진입되어 왠만한 성적으로 기록되었다. 오랜만에 보인 성공과 앨범도 수려한 완성도의 수작이라는 평을 받게 되어 제2의 전성기를 가졌다.
1989년 여름부터 다시 투어를 재개했고, 그해 12월부터 1991년까지 <Storm Front> 투어를 진행했다. 1990년 6월 22~23일에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진행했고, 이 공연은 제작 과정부터 공연 실황까지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되기도 했고, DVD로 발매되었다.
1991~1992년에는 주로 투어를 진행하며 활동했고, 1991년에 When You Wish Upon a Star를 커버했고, 1992년에 All Shook Up을 커버해서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 1992년 여름에 빌리 조엘은 9백만 달러로 전 변호사 알렌 그루브먼을 사기죄, 수탁책임, 의료 과오와 계약 문제로 소송을 걸었다. 이 건은 1992년 안에 조용히 끝났지만, 정확한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1994년 River Of Dreams 호주판 박스 세트 |
199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2년 가을부터 1993년 봄까지 12집 <River Of Dreams>를 작업했다. 1989년 <Storm Front> 이후로 3년 만에 작업된 앨범이기도 한데, 이쯤 되면 3년 간의 텀을 두고 앨범을 작업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런데 이 앨범이 마지막 팝 앨범이다 <Strom Front>와 유사한 구성으로 작업되었고, 1980년대부터 이어온 주변 사람들의 배신, 은애(恩愛) 같은 자전적이고, 주변인에 대한 비판적인 주제를 삼았다.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곡들로 수록된 음악성과 달리 상반적인 내용을 담은 셈.
앨범은 1993년 8월에 발매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호주 1위, 캐나다 6위, 빌보드 200 1위, 영국 3위 등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되었고, 높은 판매량을 보였다. 싱글은 "The River Of Dreams", "No Man's Land", "All About Soul", "Lullabye (Goodnight, My Angel)" 총 4곡이 발매되었고, 역시 크게 히트쳤다. 타이틀 트랙 "The River Of Dreams"는 영국/미국 3위, 호주 1위, 캐나다 2위로 벨기에, 이탈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10위 안에 진입하여 가장 크게 히트친 빌리 조엘 곡 중 하나가 되었고, 나머지 싱글들도 그럭저럭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다. 1994년 그래미 어워드에 4번이나 후보에 들었지만, 전부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13집을 끝으로 빌리 조엘은 더 이상 정규 앨범을 작업하지 않았고, 팝 앨범 작업에서 은퇴했다고 선언했다. 마지막 트랙 "Famous Last Words"가 이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담은 곡이다. 그것도 다시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갑자기 앨범 작업에서 은퇴한다고 했으니, 팬들에겐 두고두고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되었다.
2.5 투어 활동 (1994~)
2.5.1 Face To Face (1994~2010)
1994년 미국 Face To Face 투어 포스터 |
2001년 Face To Face 투어 |
2009년 Face To Face 투어 |
1994년 7월부터 엘튼 존과 둘이서 진행하는 합동 투어 Face To Face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투어는 빌리 조엘의 아이디어였고, 엘튼 존도 좋은 생각으로 생각해 곧바로 실행했다. 첫 공연은 1994년 7월 8일 필라델피아 PA의 베테랑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고, 이후로 1994~1995년, 1997~1998년, 2001~2003년, 2009~2010년까지 16년 간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일본으로 세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공연들은 항상 스타디움에서만 열렸고, 초대형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엘튼 존 밴드와 빌리 조엘 밴드가 참여해 두 밴드가 함께 했고, 모든 공연의 무대에는 피아노 건반들로 장식되었다. 공연의 첫번째 곡들은 듀엣으로 본인들의 3곡을 불렀고,[40] 이어서 엘튼 존의 15곡, 빌리 조엘의 15곡 정도의 본인 곡들로 각각 불렀고, 마지막에 서로 듀엣으로 약 7곡 정도 불렀던 형식. 합쳐서 총 40곡에 가까운 셋리스트에다 3시간이 넘는 긴 공연이다. 비틀즈의 Birthday, Here Comes The Sun, Back In The U.S.S.R., A Hard Day's Night이나 리틀 리처드의 "Lucille", 제리 리 루이스의 "Great Balls Of Fire" 같은 고전 로큰롤 넘버들도 자주 불렀고, 서로의 곡들을 부르기도 했다. 엘튼 존은 "New York State Of Mind", "Uptown Girl"을 불렀고,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와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엘튼 존/빌리 조엘 듀엣으로 부른 본인들의 곡들은 Your Song, "Piano Man",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My Life", "Just The Way You Are", "You May Be Right", "Uptown Girl", Goodbye Yellow Brick Road, Bennie And The Jets, The Bitch Is Back, Candle In The Wind가 있다. 각자 스타일로 각자의 곡을 부른 것도 꽤 인상적이다. 1998년 투어를 진행하던 중, 당시 빌리 조엘이 병에 걸려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부터 빠져 엘튼 존이 혼자서 공연을 진행했고, 심지어 빌리 조엘 곡들까지 불렀다(!). 물론 빌리 조엘 셋리스트까지 30곡을 혼자서 부른 것은 아니고, "Uptown Girl"과 "Piano Man"만 부른 것.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부터 6월 30일까지 스위스 취리히까지 엘튼 존 혼자서 이 투어를 진행했고, 빌리 조엘은 2001년 투어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9~2010년 투어에서 빌리 조엘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공연을 여러차례 취소했고, 개인적인 불화로 인해서 2010년 시카고, 피츠버그, 보스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여름 공연들을 취소하게 되었고, 2010년 3월 11일 뉴욕 올버니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Face To Face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고, 더이상 합동 투어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5.2 이후 활동 (1994~)
2.5.2.1 1994~2005
<River Of Dreams>로 팝 앨범 작업에서 은퇴한 빌리 조엘은 1994년부터 투어 활동에 집념했다. <River Of Dreams> 투어를 1995년까지 진행했지만, 1990년대에는 오히려 엘튼 존과 Face To Face 투어를 더 많이 진행했다. 거기다 건강 문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 빌리 조엘 밴드로 투어를 진행하던 경우도 이전보다 조금 줄긴 했었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미국의 여러 대학으로 가서 음악에 관한 강연을 연속적으로 하기도 했다.[41]
1994년에 아내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9년 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했고, 친구 사이로 남게 되었다.[42]
1997년에 밥 딜런의 "To Make You Feel My Love", 프레디 스콧의 "Hey Girl"을 커버해 싱글로 발매했다. 비록 앨범 작업에선 은퇴해도 싱글은 가끔씩 발매되던 모양. 각각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에서 9위, 10위로 기록되었고, 다른 국가에선 50위 안에 진입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밀레니엄 공연을 열었다. 30곡을 넘는 셋리스트에 3시간 넘게 진행되던 공연이었고, 이 공연은 ABC에서 스페셜로 방송되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선 밀레니엄 공연에 딱 알맞는 1993년작 "2000 Years"도 불렀고,[43] 공연의 실황을 2000년에 라이브 앨범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으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다른 라이브 버전들은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2000년 10월 2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One Night Only 공연에 출연해서 듀엣으로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2001년 10월 2일에 13집 <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다. 팝 앨범이 아닌 클래식 연주곡들로 수록된 클래식 앨범. 이 앨범은 1999년 6월 오스트리아에서 작업했고, 본인의 이복 동생 알렉산더 조엘과 작업했다. 모든 수록곡들은 빌리 조엘이 작곡했고, 연주는 한국계 영국인이자 빌리 조엘과 오랜 사이를 유지한 피아니스트 주형기가 연주했다.[44]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83위로 기록.
2001년 10월 20일 뉴욕 위문 공연에서 "Miami 2017", "New York State Of Mind"를 불렀다. "Miami 2017"은 뉴욕 아포칼립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곡이라서 당시 공연에서 이 곡의 내용 중 일부가 현실화 되었다고 하지만, (곡 후반부에서 수많은 뉴욕커들이 뉴욕을 떠나 마이애미로 정착하는) 내용과 달리 우린 어디에나 가지 않는다고(We ain't go Anywhere)라고 하면서 관중들에게 커다란 환호를 받았다.
2001~2003년까지 엘튼 존과 Face To Face 투어를 진행하고 나서, 2004~2005년까지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2005년 3월에 알콜 중독성 문제로 베리 포드 센터에 30일 동안 입원했고, 1975년부터 함께했던 초창기 동료이자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와 불화로 잠시 투어 활동을 중단 한 것. 결국 빌리 조엘은 리버티 드비토를 해고했고, 드러머 척 버기를 영입했다.
2005년에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하고 나서 밴드 라인업을 바꾸었고, 2005년 가을 코난 오브라이언 쇼에서 "Vienna"를 부른 걸로 등장하고 나서, 2006년 1월 7일부터 3년 만에 투어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1월부터 4월까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총 12개의 공연을 진행했고, 12개의 공연 실황을 라이브 앨범 <12 Gardens Live>로 그해 6월에 발매했다. 당시 공연에선 한동안 부르지 않던 희귀 곡들까지 포함해 총 30곡이나 매번 공연에서 불렀고, 낮아진 보컬 톤으로 인해서 2006년부터 대부분 곡들의 키를 낮춰서 부르게 되었다.[45]
2.5.2.2 2006~
2006년 1월부터 12월까지 미국, 일본, 영국, 아일랜드, 호주,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의 국가들로 세계적으로 방문해서 투어를 진행했고, 오랜만에 세계적으로 진행된 투어가 되었다. 그해 11월 30일 일본 도쿄 돔에서 진행된 공연은 DVD로 발매되었고, 빌리 조엘의 2000년대 공연 중에서 2008년 7월 16~18일 쉐어 스타디움 공연과 더불어서 유일하게 풀버전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46]
All My Life 싱글 표지 |
2006년 12월 29일 뉴욕의 Legacy 스튜디오에서 신곡 All My Life을 녹음했고, 1993년 <River Of Dreams> 이후로 무려 14년 만에 작곡된 곡이다.[47] 빌리 조엘의 전성기 시절때 함께한 프로듀서 필 라몬이 프로듀싱을 맡았고, 1986년 10집 <The Bridge> 이후로 무려 20년 만이기도 하다. 이 곡은 프랭크 시나트라 풍의 재즈 발라드이고, 당시 아내 케이티 리에게 바치는 내용을 담은 사랑 노래이자 본인에 관한 자전적인 내용도 담았다고 볼 수 있다.[48]
이 곡은 2007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날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B면에는 2006년 4월 뉴욕에서 부른 라이브 버전의 "You're My Home"이 수록되었다. 일본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94위, 빌보드 '핫 싱글 세일스' 차트 1위로 기록.
2007년 12월 4일에 "All My Life"에 이은 두번째 신곡 "Christmas In Fallujuh"을 발매했다. 강력하고 헤비한 사운드의 하드 록 넘버이고, 빌리 조엘 곡치곤 상당히 드문 형태의 곡. 이 곡은 빌리 조엘이 키운 가수이자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캐스 딜런(Cass Dillon)이 부른 버전으로 싱글로 발매되었다. 당시 스튜디오에서 곡이 녹음되고 몇 주 뒤인 2007년 12월 시카고에서 진행된 공연에서 빌리 조엘이 이 곡과 캐스 딜런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작 부른 사람은 따로 있지만, 빌리 조엘은 이 곡을 2008년 12월까지 간간히 공연에서 본인 솔로로 불렀다.[49]
2008년 7월 16,18일 뉴욕의 쉐어 스타디움의 역사를 닫는 마지막 공연을 열었다. 16일과 18일에 두개의 공연을 진행했고, 총 35곡을 불렀다. 당시 공연에선 폴 매카트니가 게스트로 출연해 Let It Be를 불렀고, 빌리 조엘은 백보컬을 맡았다. 이 공연은 2011년에 라이브 앨범 <Live At Shea Stadium: The Concert>로 발매되었다.
2009년 5월 19일 빌리 조엘의 전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가 빌리 조엘과 소니 뮤직를 10년 간의 인세 지불로 소송을 걸게 되어 불화가 생기기도 했다. 2005년에 빌리 조엘이 밴드 라인업을 바꾸게 되면서 리버티 드비토를 밴드에서 영입시키지 않은 이유. 도대체 주변 인물에게 소송 문제가 생긴게 몇번인지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의 곡들에서 한번도 작곡에 도움을 주거나 표기되지 않았지만, "Honesty", "Only The Good Die Young"을 포함한 일부 곡에서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했다.[50] 약 1년이 지난 2010년 4월에 빌리 조엘과 리버티 드비토 간의 소송 문제는 타협적으로 끝냈다.[51]
2012년 12월 12일, 허리케인 샌디의 피해자들과 미국 동부 복구를 위한 자선 공연 12-12-12: The Concert for Sandy Relief에서 곡들을 불렀고, 그중 Miami 2017를 허리케인 피해에 대한 내용으로 가사를 수정해서 불렀다.
2008년 12월 아시아 투어를 마치고 나서 2009~2010년 Face To Face 투어와 2012년 허리케인 샌디 공연을 제외하면 5년 간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케이티 리와 이혼, 리버티 드비토와 소송, 건강 문제 등이 원인. 2013년 4월 21일 호주 시드니, 4월 27일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로 다시 공연을 재개했고, 11월 1일 아일랜드 더블린 공연[52], 11월 영국 공연으로 다시 제대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빌리 조엘, 2014년 |
2014년 1월부터 정규적으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2014년부터 미국에서만 공연을 열었다. 그리고 왠만하면 미국 동부를 벗어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진행했는데, 2013년 12월에 빌리 조엘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무한정으로 공연을 진행해도 된다는 특허권을 받았다. 그렇게 2014년 1월 7일부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독점적으로 공연을 해서 그런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 빌리 조엘이다.[53]
2014년 5월 9일 65번째 생일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했고, 2015년 7월 1일, 빌리 조엘의 65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기념한 공연도 열었다. Honesty를 2008년 11월 18일 일본 공연 이후로 7년 만에 불렀고,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부르기도 했다.
2014~2016년 공연들은 1개월에 3~4번 정도 정도 여는 식이고, 1년 간 약 30개의 공연을 진행한다. 이전에 거의 부르지 않던 곡이나 한번도 부르지 않던 희귀곡들도 가끔씩 부르거나[54] 커버곡도 상당히 많이 부른다. 브라이언 존슨, 스팅, 루퍼스 웨인라이트, 지미 팰런, 아이작 펄만 등의 유명인들도 공연에 참여해 듀엣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2015년 8월 4일에는 빌리 조엘의 단골 공연장 중 하나인 롱아일랜드의 나소 콜로세움의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6년 6월 1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선 올란도 총기난사 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했고, 그 의미로 1985년 히트곡 "You're Only Human"을 불렀다. 1987년 이후 무려 29년 만에 부른 것이기도 하다.
3 내한 공연
2008년 11월 15일 내한 공연에서 부른 Piano Man |
2008년 11월 15일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슈퍼 콘서트를 통해 첫 내한 공연을 했다. 2008년 7월 18일 쉐어 스타디움의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고 나서 11월 12일부터 아시아에서 투어를 진행했고 홍콩 다음으로 한국으로 방문했다. 11월 14일 오후 2시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기자들 앞에서 현대 카드 피켓을 들고 인사했다. 공연은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진행했고 공연은 아무 이상 없이 무난하게 진행했다. 당시 "The River Of Dreams"를 부르던 중에 1층과 2층에 있던 일부 관객들이 흥에 겨운 나머지 무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이후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 들었는데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해 공연에 투입된 경호원들이 무대 앞에 있는 이들을 저지하며 자리로 돌려 보냈다.
이를 지켜 본 빌리 조엘은 곡 연주를 중단하고 관객들을 저지하고 있는 경호원에게 "무슨 일이냐!(What’s Going On!)"며 호통을 쳤다. 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객들을 그대로 놔 두라는 의미였다. 이후 경호원은 물러났고 빌리 조엘의 대인배스러운 행동으로 관객들은 더욱 환호했다. 빌리 조엘은 무대 앞 관객들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듯 손으로 표시를 하며 다시 연주를 이어갔다.VIP석 예매한 사람들은 억울했을 지도
당시 공연은 방송에서 방영되지 않았고 방송국 촬영팀이 와서 촬영하지 않았다. 유튜브에 일부 직캠 영상들만 남아있고 풀버전 영상은 없다.
4 엘튼 존
엘튼 존과 빌리 조엘. 2001년 Face To Face 투어 |
Rocket Man과 Piano Man
엘튼 존은 빌리 조엘과 같이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이라고 꼽히기 때문에 서로 엮이는 경우가 크다. 어린 시절의 음악 관심이나, 부모님의 이혼, 긴 무명, 피아노를 바탕하여 음악을 하는 등으로 공통점이 크다고 볼 수 있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음악적인 면으로 만남이 거의 없었다. 라이벌/실존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한국에선 빌리 조엘의 라이벌이 엘튼 존으로 언급되는 경향이 크다. 엘튼 존의 라이벌으로 볼 수 있는 뮤지션은 로드 스튜어트가 더욱 가깝고, 경력 상으로 솔로로 활동한 폴 매카트니나 스티비 원더, 밴드로 보자면 레드 제플린 정도가 1970년대 당시 엘튼 존과 용쟁호투를 벌인 대상이다.[55] 거기다 빌리 조엘은 1967년 데뷔 이후 1976년까지 약 10년 간의 무명을 가지고 있어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이 서로 달랐다.
빌리 조엘은 1977년 5집 <The Stranger>로 인기를 끌기 시작해서 몇년 간 전성기를 보내었지만, 엘튼 존은 커밍아웃과 은퇴 선언으로 음악 활동을 줄이고 왓포드 FC에 크게 몰두하던 시기였고, 이후 몇년 간 침체기를 보내었다. 엘튼 존은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로 재기에 성공하여 이후에 히트 싱글과 앨범들을 꾸준히 발매해서 빌리 조엘과 사실상 활동 기간이 같아졌지만,[56] 그럼에도 1980년대에도 접접이 거의 없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록커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라이벌 운운은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을 그가 1970년 8월, LA의 Troubadour 극장에서 미국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끌던 시기부터 알게 되었고, 1950년대 이후로 간만에 나온 파격적인 피아노 연주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본인이 가장 먼저 들은 엘튼 존 노래가 Border Song이라고 했다. 엘튼 존은 이전에 빌리 조엘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봤고, 1973년 "Piano Man"으로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76년 쥬크 잡지의 인터뷰에 따르면,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이 피아노를 주무대로 삼은 음악을 다시금 인기를 끌게 만든건 확실하다고 했고, 본인도 엘튼 존을 좋아하긴 하지만, 서로 비교를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거기다 서로의 음악에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57]
둘이서 처음으로 만난 건 1976~1978년 사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World National 호텔이다.[58] 처음 만나고나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한다. 그 후로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사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뉴욕의 5번 거리에서 엘튼 존이 차에서 내리면서 길 건너가는 빌리 조엘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안부 인사를 하고 가벼운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바빴고,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이 둘의 만남은 짧게 이어졌다. 그동안 접접이 거의 없었고 단순한 만남으로만 이어졌지만[59], 1994년 7월부터 엘튼 존과 둘이서 진행하는 합동 투어 Face To Face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투어는 빌리 조엘의 아이디어였고, 엘튼 존도 좋은 생각으로 생각해 곧 투어를 진행했다. 첫번째 공연은 1994년 7월 8일 필라델피아 PA의 베테랑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고, 이후로 1994~1995년, 1997~1998년, 2001~2003년, 2009~2010년까지 16년 간 진행되었고,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일본으로 세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994년 미국 Face To Face 투어 포스터 |
Face To Face 투어 말고, 다른 공연에서도 같이 다닌 적도 몇번 있었는데,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2000년 10월 20~21일 One Night Only 공연에 참여해서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고, 2001년 10월 20일 뉴욕 위문 공연에선 같이 Your Song을 불렀다. 2003년 2월 6일 카네기 홀 자선 공연에선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고, 마이클 J. 폭스가 기타를 연주하면서 Johnny B. Goode을 부르는 사이에 엘튼 존과 빌리 조엘은 키보드를 연주하기도 했다. 2004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에 헌액된 엘튼 존을 축하하는 공연에선 Bennie And The Jets와 The Bitch Is Back을 메들리로 불렀다.
2010년 이후로 사이가 약간 갈라지기도 했다. 빌리 조엘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2009~2010년 투어의 몇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적이 있었고,[60] 빌리 조엘에게 향한 엘튼 존의 지나친 충고와 잔소리들로 인한 가벼운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져 이로 인해서 2013년에 화해할때까지 2년 간 대화를 하지 않았고, 다신 합동 투어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 후로 빌리 조엘은 본인의 공연에서 2014년부터 "Your Song"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1절의 'I don't have much money' 부분 다음으로 Bullshit이라고 하면서 곡을 끝낸다. 그러고나서 우린 그저 친구에요!! 라면서 웃고 넘어간다. 참고로 이런 식으로 2016년에도 2년 간 계속해서 부른다. 가벼운 장난도 정규 레파토리로 집어 넣은 듯.
2012년에 서로 화해를 한 모양이고, 2013년 엘튼 존 에이즈 재단에 빌리 조엘이 참석해 같이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빌리 조엘은 2015년 7월 1일 본인의 65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기념하여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원키로 부르기도 했다.[61]
무대에서의 만남은 잦았지만, 정작 녹음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된 곡은 하나도 없는 걸로 보인다. 거기다 빌리 조엘은 1993년 12집 <River Of Dreams>로 음반 작업에서 은퇴를 했기 때문에 엘튼 존과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가능성은 없다. 1994~95년에 고전 블루스 넘버 Red, White And Blues을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발매되거나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미발매곡으로 남았다.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2006년작 "Wouldn't Have You Any Other Way (NYC)"에 피쳐링해서 보컬을 맡을 예정이었다가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
5 빌리 조엘 밴드
밴드 1기 (1971~1972). 1971년 11월부터 투어 밴드를 결성했고, Cold Spring Harbor에 참여한 세션들 기타리스트 알 허츠버그,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 드러머 리스 클락를 밴드의 멤버로 영입했다. 첫번째 공연은 11월 9일 뉴욕의 울트라소닉 스튜디오 공연으로 추정되고, 1972년까지 거의 스튜디오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겨우 5곡 밖에 부르지 않았고, 1972년에는 5~10곡 정도 불렀다. Cold Spring Harbor의 정식 수록곡이나 발매 예정이었던 미발매곡, 커버곡들로 불렀다.
밴드 2기 (1973~1975). 1973년 <Piano Man>의 성공으로 투어 활동도 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드러머 리스 클락을 제외하면, 베이스와 기타를 새로 영입했고, <Piano Man>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돈 에반스, 베이시스트 패트릭 맥도널드를 영입했다. 1973년 11월부터 1974년 5월까지 진행되었고, 1973년 11월 뉴욕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공연이 영상으로 촬영되기도 했다. 그해 5월까지 진행되다가, 3집 <Streetlife Serenade>가 발매된 시기인 1974년 10월부터 다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1975년 10월까지 약 1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밴드 라인업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2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10월부터 베이시스트 더그 스테그마이어를 영입했고, 1988년까지 14년간 함께했다.
(1976~1977)
(1978~1979)
밴드 3기 (1976~1988). 빌리 조엘의 대표적인 밴드 라인업 1975년 10월 이후로 더그 스테그마이어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전부 팀에서 떠났고, 1975년 후반에 라인업을 새로 결성 해야 했고, 당시 더그 스테그마이어의 동료들이던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 색소폰/키보드/퍼쿠션 리치 카나타,[65] 기타리스트 러셀 재버스, 하위 애멀슨을 영입했다. 이 라인업으로 1976년 1월에 4집 <Turnstiles>을 작업했고, 리버티 드비토의 강력한 드럼 실력과 수려한 색소폰 연주의 리치 카나타 등으로 밴드의 전체적인 사운드가 더욱 탄탄하고 강력하게 변했고, 그로 인해서 이 시기부터 빌리 조엘의 투어 밴드가 각인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역대 빌리 조엘 투어 밴드의 대표적인 라인업으로 꼽힌다.
1976년 4월부터 이 라인업으로 <Turnstiles>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1977년 6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이 투어부터 셋리스트의 곡들이 15~20곡 정도 더 늘어나기 시작했고, 1976년 5월에 호주 시드니로 가게 되면서 처음으로 해외 공연을 진행했다. 이 라인업으로 5집 <The Stranger>를 작업했고, 이 앨범의 막대한 성공으로 인해 무명에서 벗어나 슈퍼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어 빌리 조엘의 투어 밴드로 더욱 각인되기 시작했다.[66]
1975년 가을에 결성된 라인업으로 1978~79년 <52nd Street> 투어까지 함께 했지만, 1980년 7집 <Glass Houses>부터 하위 애멀슨이 밴드에서 나갔고, 데이비드 브라운이 영입되었다. 데이비드 브라운으로 바꿔지고 나서 1981년까지 1년 동안 활동했지만, 1982년 4월, 빌리 조엘의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인해서 1982년 11~12월에 투어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전까진 거의 1년간 휴식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1983년 11월 The Nylon Curtain 투어부터 리치 카나타가 밴드에서 나갔고,[67][68] 대신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리볼트, 색소폰/호른/타악기 마크 리베라가 영입되었다. 1982년 11월부터 영입된 마크 리베라는 현재까지 30년 동안 함께하는 중이고, 가장 오랫동안 잔존하는 밴드 멤버가 되었다.
1983년 한해동안 투어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84년 1월부터 <An Innocent Man> 투어로 투어 활동을 재개했다. 1984년 투어는 1982년과 동일하지만, 그해 2월 1일부터 백보컬리스트 프랭크 심스, 마이크 휴렛, 마크 매큐언이 영입되었고, 호른 세션도 일부 영입되었다. 그리고 6월 6~9일 웸블리 아레나 공연에선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먼스'가 참여해서 "Leave A Tender Moment Alone"에서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다.[69]
1984년 7월 5일 뉴욕 공연 이후로 1985년 한해 동안 투어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당시 빌리 조엘의 결혼으로 잠시 쉬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1986년 7월, 10집 The Bridge가 발매되던 시기에 2년 만에 투어 활동을 시작했고, 1987년 12월까지 약 1년동안 진행되었다. 1986~1987년의 라인업은 1984년과 거의 동일했고, 빌리 조엘은 "A Matter Of Trust"를 부를때 기타를 연주하면서 불렀고, 처음으로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987년 7~8월에 소련에 방문해서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밴드 4기 (1988~2003). 1988년 7월 일본에서 <The Bridge> 투어의 마지막 일정을 진행하고 나서 그 후로 약 1년 간 투어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1988년에 데이비드 브라운, 리버티 드비토, 마크 리베라를 제외한 멤버들이 팀에서 떠나게 되었고, 1975년 이후로 13년 만에 밴드 라인업을 바꾸게 되었다. 러셀 재버스 대신에 토미 번스,[71] 더그 스테그마이어[72] 대신에 스카일러 딜이 영입되었고, 흑인 여성 퍼쿠션/백보컬로 크리스털 텔리페로가 영입되었다.[73] 1989년 여름부터 약 1년 만에 투어 활동을 재개했고, 1991년까지 <Storm Front> 투어로 진행되었다.[74]
1993년 <River Of Dreams> 투어에서도 라인업은 대부분 같지만, 데이비드 브라운이 팀에서 떠났고, 톰 "T-본" 울크가 영입되었다. 데이비드 브라운이 떠나게 되면서 리버티 드비토가 오랫동안 잔존하고 있던 초기 멤버가 되었었다. 1993년에 키보드리스트 데이비드 로젠탈[75]이 영입되었다. 1988~1993년 시기에 영입된 몇 멤버들은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고, Face To Face에도 함께 했다. 일부 세션이 바꿔지는 변천사도 있었지만, 왠만하면 이 라인업으로 2004년까지 15년간 유지했다.
밴드 6기 (2005~). 건강상 문제로 2004년 한해 동안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가 2005년부터 밴드 라인업을 새로 결성했다. 1988년 이후로 17년 만이다. 리버티 드비토를 불러오지 않았고, 대신에 척 버기를 영입했다.[76] 1975년 이후로 30년 만에 드러머를 교체한 경우.[77] 결국 리버티 드비토까지 밴드에서 제외되어 가장 오랫동안 잔존하게 된 멤버는 1982년에 영입된 마크 리베라가 되었다.
베이시스트는 마이클 델쥬디체로 교체되었고, 호른 세션으로 칼 피셔, 앤디 시콘이 영입되었다. 리버티 드비토와 베이스가 나간 걸 제외하면 사실상 달라진게 별로 없었고, 대부분이 1988~1993년에 영입된 동료들. 2006년 1월 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첫 공연을 가지며 3년 만에 투어 활동을 시작했고, 1~4월 뉴욕에선 리치 카나타가 밴드에 잠시 참여하여 색소폰을 불기도 했다. 2005년 이후로 교체된 멤버는 없고, 10년 넘게 이 라인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6 이야깃거리
6.1 가족
십대의 빌리 조엘과 어머니 로서린드 조엘. |
이복 동생 알렉산더 조엘, 아버지 하워드 조엘, 빌리 조엘. 1996년 오스트리아 빈 |
빌리 조엘과 로서린드 조엘. 2013년 |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 부부에서 태어난 어머니 '로서린드 조엘'은 1942년에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당시 '하워드 조엘'과 만나 교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워드 조엘'은 독일에서 태어났고, 하워드의 아버지. 즉, 빌리 조엘의 할아버지 '칼 앰슨 조엘'(Karl Amson Joel)은 독일의 유대인이자 제조업자였다. 조엘 가는 당시 독일에서 알아주던 재벌 가문이었고, 하워드 조엘도 20대까지 독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조엘 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하려 1938년 7월에 스위스로 이주했고 1938년 8월에 프랑스와 영국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다.[78] 칼 앰슨 조엘은 미국에서 새 기업을 차리기 시작했고, 당시 하워드 조엘이 뉴욕에서 로서린드 조엘을 만나게 된 것. 하워드 조엘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육군으로 참전하다가 이후 전역했고 1946년에 24살, 23살의 나이로 결혼했다.[79] 결혼 3년 뒤에 빌리 조엘을 낳았고, 이후에 로서린드의 언니 뮤리엘 니만의 딸 쥬디트 조엘을 입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워드 조엘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빌리 조엘이 8살이던 1957년에 부모는 이혼을 했고, 하워드 조엘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새 가정을 차려 평생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다. 하워드 조엘의 아들 중 한 명인 알렉산더 조엘(Alexander Joel)은 197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오스트리아에서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 로서린드는 누구와 재혼하지 않았고 평생을 혼자 지내왔다. 빌리 조엘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냈으며 가족을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떠나버려 새 가정을 차린 아버지를 원망했다. 이혼 이후 약 20년간 본인의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가 1976년 말~1977년 초반 쯤, 아버지를 찾을려고 직접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8살 이후로 처음으로 만나었다.[80] 당시 아버지와 이복 동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오랫동안 소원했던 사이는 조금씩 풀었고, 1995년 6월 4일 뉘른베르크에서 강연을 열었을때 알렉산더 조엘과 아버지를 무대에 데리고 오기도 했다.[81]
하워드 조엘은 2011년 3월 8일에 88세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 하워드 조엘은 말년에 대머리였고, 현재 빌리 조엘이 아버지의 말년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이 점 때문인지 2006년부터 라이브 공연에서 본인이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는데 난 그게 싫다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도 똑같이 드립을 쳤다.그러고나서 허공에다 안녕 아버지 하면서 고인드립을 시전.
빌리 조엘은 60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고, 어머니에 대한 "Rosalinda", "Rosalinda's Eyes"를 작곡하기도 했다. 로서린드 조엘은 2014년 7월 13일에 92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어머니가 입양한 쥬디트 조엘은 빌리 조엘의 누나이고, 빌리 조엘이 1970년 자살 시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을때 그를 도와주면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빌리 조엘은 이에 대한 "Why Judy Why"를 썼다. 쥬디트 조엘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는 걸 보면 조용한 삶을 사는 걸로 보인다.
빌리 조엘과 엘리자베스 웨버. 1977년 |
빌리 조엘은 여자 관계가 그리 평탄하진 않았다. 이전부터 바람기가 꽤 있었고, 결혼과 이혼을 4번이나 반복했다. 1970년에 아틸라의 드러머 존 스몰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웨버와 바람을 폈고,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존 스몰과 이혼했고, 1973년 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을 해서 빌리 조엘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인들에게 지적이고 상당히 똑똑한 여성으로 불렸고, 1976년에 엘리자베스를 본인의 사무 관리자로 세웠다.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비지니스 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해서 애정도가 크게 떨어졌고,[82] 결국 1982년 7월 20일에 이혼했다. 1971년부터 엘리자베스에 대한 곡들을 여러차례 썼는데,[83] 결국 이혼 이후 해당 곡들에 대한 애정도 떨어졌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곡들이 큰 사랑을 받는 빌리 조엘의 발라드 넘버들.[84]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3년 |
알렉서 조엘과 빌리 조엘. 1990년 7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
알렉서 레이 조엘. 2010년 |
1982년 이혼 이후, 일종의 위로 여행으로 1983년 1~2월 쯤에 생바르텔레미로 여행을 갔고 카리브해로 가던 크루즈에 탈려고 이동하던 비행기에서 미국의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를 만나 한 눈에 반해 그녀한테 접근하기로 했다.[85] 그래서 빌리 조엘은 크루즈의 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생겼고 그녀에게 곡을 연주하게 하려고 했다. 당시 라운지에선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당시 20살의 호주의 모델 엘 멕퍼슨과 당시 20살의 무명이었던 휘트니 휴스턴이 빌리 조엘을 지켜보기도 했었다.[86]
재미있게도 빌리 조엘과 엮이게 된 여성은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아니라 엘 멕퍼슨이 되었고, 잠시 사귀었다. 하지만 1983년 당시 엘 맥퍼슨은 20살, 빌리 조엘은 34세였고 거의 삼촌과 조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나이 차이와 정작 마음은 크리스티 브링클리에게 향했기 때문에 엘 멕퍼슨과 헤어져 친구 사이로 남았고,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연인에 대한 감정으로 <An Innocent Man>을 작업했고, 수록곡 "Tell Her About It"이 크리스티 브링클리를 위한 러브콜 노래이다. "Uptown Girl"은 원래 엘 멕퍼슨에 대한 내용이었고, 크루즈 라운지의 일에 대해 상상하면서 "Uptown Girls"로 붙일 예정이었지만, 크리스티 브링클리에 대한 내용으로 바꾸었다.[87]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85년 3월에 결혼했고, 그해 12월 29일 맨하튼 병원에서 딸 '알렉서 레이 조엘'(Alexa Ray Joel)이 태어났다. 중간 이름 '레이'는 빌리 조엘의 우상인 레이 찰스에 따온 것이다.[88] 이후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좋은 사이로 지내게 되었지만, 9년 뒤인 1994년 8월 25일에 이혼했다. 하지만 친구 사이로 지낸다고.[89]
빌리 조엘은 딸 알렉서에 대한 곡 "Lullabye (Goodnight, My Angel)"[90][91]을 쓰거나, 여러 곡에서 딸에 대해 언급하는 등 딸바보이다. 참고로 알렉서 레이 조엘도 가수 활동을 한다. 2006년에 EP "Sketches"로 데뷔했고, 몇년간 싱글을 발매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로 인해서 그리 뜨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 유명인들의 자식들과 마찬가지이긴 하지만.[92][93] 여담으로 알렉서 조엘은 어렸을때 어머니를 크게 닮았지만, 어른이 된 현재는 오히려 아버지 얼굴이 크게 보인다. 그래도 슈퍼 모델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아서 그런지 상당한 미인.
빌리 조엘과 케이티 리. 2007년 |
1994년 이혼 이후 약 10년동안 혼자서 지내왔지만, 2004년 10월 2일에 미국의 요리사이자 음식 평론가 케이티 리(Katie Lee)와 결혼했다. 2004년 봄, 뉴욕의 Peninsula 호텔의 옥상 술집에서 만났고, 이후 몇개월 동안 교제하다가 그해 10월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의 빌리 조엘 집에서 결혼했다. 2004년 당시 케이티 리는 23세였고, 빌리 조엘은 55세였다. 무려 30살 연하에 알렉서 조엘과 겨우 4살 차이! 하지만 5년 뒤 2009년 7월에 서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2010년에 이혼했다.
빌리 조엘과 알렉시스 로데릭. 2015년 |
케이티 리와 결별하던 시기인 2009년부터 알렉시스 로데릭(Alexis Roderick)과 사귀기 시작했고,[94] 2015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날에 결혼했다.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의 본인 집에서 비밀 결혼식을 열었고, 2번째 아내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딸 알렉서 조엘 등의 지인들이 참석했고, 뉴욕 주지사이자 빌리 조엘의 오랜 친구인 앤드류 쿠오모가 주례를 맡았다. 사실 속도위반(!!)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혼식을 울리게 된 것.영감님 대단 결혼 당시 알렉시스 로데릭은 33세였고, 빌리 조엘은 65세였다. 무려 32살 연하에 알렉서 조엘과 겨우 3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그 힘으로 음반 작업이나 하라는 말도 있다. 서로 혼인 서약을 했고, 2015년 8월 12일에 딸 '델라 로스 조엘'이 태어났다.
6.2 건강
1970년에 몇 년 간 이어진 상업적인 실패로 인한 무명의 좌절감과 생계 문제, 동료 존 스몰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으로 인해서 우울증과 조울증을 앓았고, 당시 매니저 어원 만주르의 아파트에서 자살 유서를 쓰고나서 가구 세정제 한병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존 스몰이 바닥에 누워 있던 빌리 조엘을 발견하고 나서 엠뷸런스를 불렀고,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 목숨을 구했다.[95][96]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퇴원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고, 본인을 크게 도와준 누나 쥬디트 조엘에 대한 "Why Judy Why"를 작곡했고, 자살 유서에 영감을 얻어 "Tomorrow Is Today"를 작곡했다.
본인의 우울증과 조울증에도 영감을 얻어 "Summer, Highland Falls"를 쓴 계기가 되었고, 1985년에 자살 시도에 영감을 얻어 자살 예방 메세지를 담은 "You're Only Human (Second Wind)"를 작곡하기도 했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로 2번의 교통사고를 겪기도 했다. 2003년 롱아일랜드에서 2002년형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다가 나무에 부딛혀 차를 폐차했고, 왼손에 몇주 동안 깁스 했다. 2004년 9월 뉴욕에선 1967년형 시트로엥 2CV를 잠시 주차해두고 피자를 사러갔다가 화재로 전소해버렸다.이쯤 되면 교통수단과 원수졌다
신장결석으로 1989년 9월 25일에 뉴욕의 대형병원에서 수술했다. 그리고 1994년 토론토에서 투어를 진행하던 중에 다시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았다.
1980년대부터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고, 2002년에 약물 남용으로 코네티컷 주의 실버힐 병원에 입원했다. 2005년 3월에는 알코올성 장애로 베티 포드 센터에 30일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6.2.1 오토바이 교통사고
1982년 봄 뉴욕에서 8집 <The Nylon Curtain>을 작업하던 시기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1982년 4월 15일 롱아일랜드에서 본인의 1978년형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있었고, 신호를 기다리다가 초록불로 바뀌고 다시 출발했는데, 오른쪽에서 빨간불에 64km로 질주하던 한 여성이 타고 있던 차에 부딛혔다. 차와 오토바이의 간격의 차이가 짧아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 없었고, 운전석 쪽으로 크게 박았다고 한다. 차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고, 빌리 조엘은 몇미터를 날아갔다. 왼손의 엄지가 안쪽으로 굽어지고 오른손은 반대 쪽으로 펴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손이 크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내 오토바이 어딨냐고 오토바이부터 챙겼다고. 당시 빌리 조엘은 선글라스와 헬맷, 가죽 자켓을 착용하고 턱수염을 길렀던 상태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본인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도로에서 움크리고 있었지만, 옆에 경찰이 와서 오토바이 뒤에 써져있던 이름 "조엘. 윌리엄"을 읽고 그가 빌리 조엘이라는 걸 알아채고 차에 타있던 여성한테 이봐 아가씨, 당신이 빌리 조엘을 쳤어!라고 크게 말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빌리 조엘은 빨리 엠뷸런스를 부르라고 짜증냈다고.
그렇게 뉴욕의 대형 병원에서 두 손의 봉합수술을 마치고나서 병원에 잠시 입원했고, 퇴원하고나서 본인의 손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 자주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한다. [97] 더군다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뮤지션이라서 손 부상은 매우 치명적이라서 의사들은 피아노 연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우려했지만, 정작 빌리 조엘 본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어차피 본인은 록큰롤 뮤지션이기때문에 손이 안되면 팔꿈치로 건반을 치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당시 수술로 왼손의 엄지 손가락 윗부분의 뼈를 제거했기 때문에 현재도 왼손 엄지에 뼈가 없다! 그 때문에 엄지를 몇센치정도 바깥으로 휠 수 있고, 오른손은 70도 아래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1982년 12월 인터뷰에선 기자가 "그럼 지금은 괜찮냐고'" 물어보자, "이전에도 썩 좋지 않았다고" 농담했다. 가수나 피아노 연주자로서 생명력을 잃을 뻔 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낙관적으로 대한 것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일.
6.3 기타
Don't take any Shit from anybody!![98]
- 실질적인 음악 활동은 상당히 짧은 편이다. 빌리 조엘과 비슷한 나이대의 노년 뮤지션들은 201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꾸준히 음반을 내지만, 빌리 조엘은 음반 작업에서 완전히 은퇴해 투어 활동만 하는 중이는게 아쉬운 점. 빌리 조엘은 데뷔 후 무명이 길었으며, 1977년 5집 <The Stranger>로 본격적인 인기를 끌기 전까진 10년간 무명이었다고 해도 무방했다.[100] 60년대에 데뷔한 동기 뮤지션들과 달리 성공을 비교적 늦게 맞이한 셈.
본격적인 인기를 가지고 마지막 음반을 내고 활동한 시기를 보면 1977~1993년으로 16년 정도로 확실히 짧은 편. 거기다 음반을 몇년에 한 번씩 내던 수준이라서 2001년에 발매된 클래식 음반까지 합치면 정규 앨범이 총 13장 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며 여전히 큰 인지도를 끄는 뮤지션으로서 음반 작업을 일찍 접은 것이 아쉽지만, 짧은 활동에 비해 높은 음반 판매량을 거두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거둔 뮤지션들 리스트에서 상위권으로 올라가는 점이 놀랍다는 평도 있다.
- 보통 노래방 같은 곳에서 가창력에 의지해 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교만 잘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빌리 조엘 특유의 뉴요커로서의 정체성과 느낌을 잘 고려하고 담아서 불러야 맛이 살기 때문이다.
- 젊은 시절때 이목구비와 헤어 스타일과 전체적인 모습이 은근히 실베스터 스탤론과 닮았다. 잘 모르는 사람은 헷갈려할 정도. 거기다 빌리 조엘은 십대때 복싱을 취미로 하기도 했다.
- 거의 모든 뮤지션들에게 해당하는 점이지만, 비틀즈의 광팬이다. 빌리 조엘의 음악을 살짝 들어봐도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걸 확인할 수 있고, 빌리 조엘 본인도 공연에서 비틀즈 곡들을 자주 불렀다. 밴드 멤버들하고 새벽까지 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비틀즈 곡들을 불렀다고.
- 상당한 오토바이 마니아다. 집에 전시해둔 오토바이가 수십대가 넘고, 아예 거대한 창고로 제작해서 사용한다.
- 젊었을땐 장발이었지만, 1980년대부터 단발에 곱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머리가 많이 빠져 현재는 대머리.
- 1988년, 세서미 스트리트에 등장해서 미국의 여배우 말리 매트린과 같이 Just The Way You Are를 오스카 더 그라우치에게
고문불렀다. 참고로 여기에 나와서 ABC 송도 불렀다.
- 1996년 위어드 알 얀코빅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빌리 조엘을 We Didn't Start The Fire 남자로 부르거나 이불에 지도 그린적 있냐고 놀리는 등 압권인 장면이 많다. 참고로 위어드 알 얀코빅는 1980년에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를 It's Still Billy Joel To Me로 패러디해서 부르기도 했다. 마지막에 빌리 조엘에게 이 쓰레기 좀 대신 버려줄 수 있냐고 묻다가 거절당했고, 결국 화나서 빌리 조엘을 패버린다. 물론 전부 연출이고, 위어드 알 얀코빅 컨셉이 원래 저렇다.
- 2015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식전 행사로 독창한 영상. 1983년, 1986년, 2000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국가를 불렀다.
- 테드 크루즈를 지지했던 걸로 보였다. 2016년 4월 15일 뉴욕 공연에선 테드 크루즈를 위해 "New York State Of Mind"를 불렀고, 반대로 도널드 트럼프를 위해 "The Entertainer"[101]를 불렀다.
7 디스코그래피
- 빌리 조엘/음반 목록 참고.
7.1 싱글
- 빌리 조엘/싱글 목록 참고.
7.1.1 빌보드 1위
-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1980)
- Tell Her About It (1983)
- We Didn't Start The Fire (1989)
7.1.2 빌보드 2위
- 없음
7.1.3 빌보드 3위~10위
- Just The Way You Are (1977)
- My Life (1978)
- You May Be Right (1980)
- Uptown Girl (1983)
- An Innocent Man (1983)
- You're Only Human (Second Wind) (1985)
- Modern Woman (1986)
- A Matter Of Trust (1986)
- I Go To Extremes (1989)
- The River Of Dreams (1993)
7.1.4 빌보드 11~20위
- Movin' Out (Anthony's Song) (1977)
- She's Always A Woman (1977)
- Big Shot (1978)
- Don't Ask Me Why (1980)
- Say Goodbye To Hollywood (Live) (1981)
- Pressure (1982)
- Allentown (1982)
- The Longest Time (1984)
- Keeping The Faith (1985)
- This Is The Time (1986)
7.1.5 빌보드 21~40위
- Piano Man (1973)
- The Entertainer (1974/1975)
- Only The Good Die Young (1977)
- Honesty (1978)
- Sometimes A Fantasy (1980)
- She's Got A Way (Live) (1982)
- Leave A Tender Moment Alone (1984)
- The Night Is Still Young (1985)
- And So It Goes (1990)
- All About Soul (1993)
- ↑ 참고로 영미권에서는 Billy Joel의 Joel을 조엘'이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졸이나 조얼, 조을이라고 발음한다.
- ↑ 2001년에 13집이자 클래식 앨범 Fantasies & Delusions을 발매했다. 물론 팝 앨범이 아닌 피아노 연주곡들로 수록된 클래식 앨범이다. 이 앨범 이후에도 정규 앨범은 한장도 안 나왔다.
- ↑ 태어났을때 이름은 헬무트(Helmuth)였고 후에 하워드로 개명했다.
- ↑ 알렉산더 조엘도 오스트리아에서 저명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빌리 조엘이 1999년 6월에 이복 동생, 주형기와 클래식 앨범이자 13집 Fantasies & Delusions를 작업한 바 있다.
- ↑ 참고로 "Remember (Walking in the Sand)"의 프로듀싱은 전직 가수이자 프로듀서/Family Production 레이블 사의 사장 아티 립이 맡았는데 후에 빌리 조엘의 1집 프로듀싱을 맡게 되면서 한동안 빌리 조엘의 걸림돌이 되었다.
- ↑ 이 곡은 1983년 Tell Her About It의 싱글 B면에 수록되기도 했다.
- ↑ 사실 빌리 조엘 본인도 이 앨범을 사이키델릭 개소리로 평하기도 했다.
- ↑ 당시 아틸라의 매니저였고, 빌리 조엘의 매니저로 오랫동안 함께했다.
- ↑ 당시 도움을 준 사람 중 한 명이 빌리 조엘의 누나인 쥬디트 조엘인데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Why Judy Why를 쓰기도 했다. 비록 존 스몰과 관계를 청산하긴 했지만, 존 스몰은 이후 1987년 Концерт, 2008년 Live At Shea Stadium: The Concert의 라이브 영상들을 프로듀서로 맡기도 한 걸 보면 관계는 그럭저럭 왠만한 걸로 보인다.
- ↑ 당시 존 스몰과 이혼한 상태였고, 1973년 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빌리 조엘과 결혼했다.
- ↑ 물론 리마스터 판에서는 수정되었다.
- ↑ 빌리 조엘은 24년 뒤인 1995년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 강연에서 이에 대한 비화를 자세히 설명했는데, 당시 자신의 친구들과 같이 앨범을 들었다가 친구들이 목소리가 계집애 같다고 놀리면서 대폭소를 했다고 한다. 본인의 보컬을 다람쥐(Chipmunks, 실제로는 앨빈과 슈퍼밴드(Alvin and the Chipmunks)를 뜻한다.)로 표현했다.
- ↑ 당시 콜롬비아 사의 사장이 Captain Jack의 라이브 버전을 듣게되면서 빌리 조엘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 호주에선 3년 뒤 1976년에 뒤늦게 발매되었다.
- ↑ 발매 4년 뒤인 1977년에 촬영되었다.
- ↑ 사실 이는 1973년 11월 2일에 발매된 리드 싱글 Piano Man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콜롬비아에선 러닝타임이 5분이나 되는 곡은 라디오에서 방영되기엔 길다고 생각해 빌리 조엘의 동의 없이 본인들 마음대로 곡의 2절 반 이상을 편집하고 3분으로 줄인 버전으로 싱글로 발매해 결국 빌리 조엘은 이에 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졌다.
- ↑ 시카고의 프로듀서.
- ↑ 드러머 나이젤 올슨, 베이시스트 디 머레이. 이 둘은 엘튼 존 밴드에서 1969~70년부터 함께한 원년멤버이지만, 1975년 초에 해고되었다. 5년 뒤 1980년에 다시 합류했고,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 문서 참고바람.
- ↑ 공교롭게도 엘튼 존이 이 스튜디오에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Caribou,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Rock Of The Westies를 작업했다.
- ↑ 1976년에 방영된 광고에서 호주에서 꽤 크게 히트쳤다고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
- ↑ 하지만 현재도 오른손을 70도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엄지손가락의 윗쪽 뼈를 제거해 물렁거린다고 한다.
- ↑ 병원에 입원했을때 손에 커다란 깁스를 차고 있었고 사인을 해달라는 종이들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사인해주는 걸 도와줬다고.
- ↑ 1982년 11월부터 12월까지 1개월 동안 The Nylon Curtain 투어를 진행했지만 1년간 100개를 넘는 공연을 진행했던 시기에 비하면 잠깐 수준이었다.
- ↑ 대신 Pressure는 캐나다에서 9위로 기록되었고, Goodnight Saigon은 벨기에, 네덜란드 1위로 기록해 차트 정상에 올랐으며, 유럽에서 가장 크게 히트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 ↑ 1983년 당시 빌리 조엘은 34살이었고, 엘 멕퍼슨은 겨우 20살이었다. 무려 나이차가 14살이나 났었다(...). 당시 센트럴 파크에서 같이 산책하다 찍힌 사진이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하게 올라와 당혹스러웠다고 1990년 공연 중에 설명했다.
- ↑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상으로 오른 The Nylon Curtain도 토토의 Toto IV로 인해서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 ↑ 그해 6월 8일에 웸블리 아레나에서 진행한 공연은 텔레비전에서 여러차례 방영되었다.
- ↑ 이 곡은 1986년 당시 개봉된 대니 드비토 주연의 골치 아픈 여자(Ruthless People)의 Ost.
- ↑ 다음작 Storm Front부터 Family Productions가 빌리 조엘의 레이블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시 계약 문제에서 해방하는 내용을 담은 곡은 The Bridge의 마지막 트랙 Getting Closer가 있다.
- ↑ 이후 2006년 싱글 All My Life에 프로듀싱을 맡았다.
- ↑ 당시 공산주의 체계에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주었던 일종의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본인이 소련 해체의 제공자 중 하나라고 은근 슬쩍 자랑하기도 했다.
- ↑ 하지만 공연을 진행하던 중에 성대결절이 생겨버리는 바람에 이 시기부터 보컬 톤을 살짝 내리게 되었다.
- ↑ 빌리 조엘은 이 곡을 2015년 10월 2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불렀는데 당시 빅터가 관객 석으로 참석해 그를 헌정하는 의미로 불렀다. 곡을 부르는 와중에 빅터는 큰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렸고, 곡을 부르고나서 무대 화면에 빅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 1988년에 라이브 버전의 Back In The U.S.S.R.을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
- ↑ 백보컬로 흑인 여성들이 참여했는데 빌리 조엘이 처음으로 여성 세션과 작업한 경우이기도 하다.
- ↑ 빌리 조엘의 첫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의 오빠
- ↑ 전 매니저에 대한 내용으로 1993년작 The Great Wall Of China를 쓰기도 했다.
- ↑ 이 시기부터 건강에 문제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까지 여러 질병을 달고 다녔다.
- ↑ 이 곡은 가스 브룩스가 1991년에 커버해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
- ↑ Your Song,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 ↑ 본인 곡들도 피아노 한대로 부르거나, 공연에서 거의 부르지 않는 희귀곡도 부를때도 잦다. 예를 들면 1996년 롱아일랜드 주에서 열린 강연에선 1986년작 Temptation을 불렀고, 2015년 10월 4일 뉴욕에선 40년 만에 Falling Of The Rain과 Roberta를 불러 팬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 ↑ 이후에도 가끔씩 딸과 데리고 만나는 경우도 잦다. 2014년 8월 9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Uptown Girl을 불렀을 당시, 크리스티 브링클리도 공연에 참석했었다.
- ↑ 이후로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 ↑ 2001년 10월 펜실베이니아의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빌리 조엘이 주형기를 초대해 앨범의 수록곡 Invention In C Minor, Air를 연주했다.
- ↑ 2003년이 마지막으로 대부분 곡들을 키를 낮추지 않고 부른 년도가 되었다.
- ↑ 유튜브엔 1080p 버전도 있다.
- ↑ River Of Dreams는 1993년 봄까지 제작되었지만, 모든 곡들은 1992년 가을에 녹음되었다.
- ↑ 하지만 케이티 리와 2009년에 이혼해 5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 ↑ Fallujuh는 이라크 중부 알안바르주에 속한 도시이고,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당연히 반전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 ↑ Only The Good Die Young는 원래 레게 리듬으로 녹음할 예정이었지만, 리버티 드비토는 레게를 혐오 수준으로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업비트의 로큰롤 넘버로 바꾸라고 제안을 했다.
- ↑ 하지만 이후에도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 밴드에 들어오지 않았고, 여전히 소원한 관계로 볼 수 있다. 리버티 드비토의 강력한 드럼 실력이 빌리 조엘의 음악을 대표하는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드럼 실력을 크게 좋아했고, 2005년에 영입된 드러머 척 버기는 리버티 드비토에 미칠 정도까진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빌리 조엘 마니아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 ↑ 투어의 시작을 아일랜드로 정한건 처음이다.
- ↑ 2016년 8월 기준으로 총 87개이고, 참고로 2번째는 67개의 공연을 진행한 엘튼 존.
- ↑ Surprises, A Room Of Our Own, Scandinavian Skies, Running On Ice, All About Soul, This Night 등
- ↑ 반면 빌리 조엘의 라이벌 상대는 불명확하다.
- ↑ 당시 빌리 조엘은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1982년 7집 The Nylon Curtain 이후 1983년 9집 An Innocent Man의 싱글, 앨범의 성공을 맞이하고 있었다.
- ↑ 그럼에도 같은 피아노 뮤지션이라서 비슷한 풍의 곡들이 한두개가 아니다.
- ↑ 엘튼 존은 1976년 12월에 홀란드의 방송에 출연했었고, 빌리 조엘은 1978년 3월 홀란드에서 공연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 시기로 추측된다.
- ↑ 1990년 6월 6일 제2회 록 어워드에서 빌리 조엘이 사회자였고, 엘튼 존이 짧게 연설했는데, 1994년 합동 공연 이전의 모습을 담은 유일한 영상이다.
- ↑ 2009년 11월 20일 솔트레이크 시티에 진행될 예정이던 공연은 당시 빌리 조엘이 독감에 걸려 공연이 취소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 엘튼 존은 리언 러셀과 30집 The Union을 작업하기 시작한 날이다.
- ↑ 엘튼 존과의 합동 공연을 제외하고, 이 곡을 1979년부터 2008년까지 본인의 공연에서 가끔가다 부른 적 있었는데, 전부 원키로 불렀었다. 2키를 내린 Eb으로 부르고 가성을 거의 쓰지 않는 엘튼 존과 상반되는 모습.
- ↑ 왼쪽부터 래리 러셀, 빌리 조엘, 알 허츠버그, 리스 클락.
- ↑ 왼쪽부터 더그 스테그마이어, 빌리 조엘, 리버티 드비토, 하위 애멀슨
- ↑ 1982년 12월 29일 롱아일랜드 나소 콜로세움. 빌리 조엘, (빌리 조엘 뒤에) 데이비드 브라운, (색소폰) 마크 리베라, (드럼) 리버티 드비토, 1982~1986.
- ↑ 참고로 리치 카나타는 엘튼 존의 14집 21 AT 33에 참여하기도 했다.
- ↑ 1977~1980년까지 세계적으로 진출해서 투어를 열었고, 일본,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6~8월 미국의 여러 주에서 진행된 공연들의 실황이 1981년 Songs In The Attic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 ↑ 1993년 12집 River Of Dreams에 색소폰으로 잠시 영입되기도 했지만, 밴드에서 돌아오진 않았다.
- ↑ 2006년 1~4월 뉴욕 공연에 오랜만에 참여하기도 했다.
- ↑ 1984년의 여러 공연들에서 참여해서 이 곡의 하모니카를 불렀고, 1991년 8월 8~9일 뉴욕 공연에서도 투츠 틸레먼스가 참여해서 부르기도 했다.
- ↑ 1998년 라인업. 뒤 왼쪽부터 마크 리베라, 크리스털 텔리페로, 비카 브램레트, 마이클 멜렛. 앞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젠탈, 데이비드 산토스, 빌리 조엘, 리버티 드비토, 토미 번스.
- ↑ 1988년 영입 이후로 2010년대까지 함께 하고 있다.
- ↑ 빌리 조엘의 초창기 동료 중 한 명이었지만, 1995년,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본인의 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 빌리 조엘이 처음으로 여성 세션과 일한 경우이기도 하다. 크리스털 텔리페로는 1988년 영입 이후, 2010년대까지 밴드의 퍼쿠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 ↑ 1994년 6월에 <Storm Front Returns>라고 다시 이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 ↑ 1993년 영입 이후, 현재도 밴드의 키보드로 활동하고 있다.
- ↑ 척 버기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Movin' Out에서 드럼을 연주한 적 있다.
- ↑ 이로 인해서 리버티 드비토는 2009~2010년에 빌리 조엘에게 소송을 걸어 불화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타협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밴드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리버티 드비토의 강력한 드럼 실력을 좋아하던 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가져다 주었다.
- ↑ 이 시기에 이민 문제로 잠시 쿠바에 머물기도 했다.
- ↑ 로서린드 조엘이 한살 더 많다.
- ↑ 당시 빈에서의 경험으로 "Vienna"를 작곡한 계기가 되었다.
- ↑ 당시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서 잠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 ↑ 이 시기 빌리 조엘은 다른 여성들과 사귀며 원나잇 스탠드를 꽤 즐겼었다.
- ↑ She's Got A Way, You're My Home, Just The Way You Are, She's Always A Woman.
- ↑ 1984~86년 이후로 부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가 1990년대 말 ~ 2000년대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 ↑ 당시 크루즈에 예약했던 크리스티 브링클리도 프랑스에서 만난 첫번째 남편이자 예술가 장 프란치스코와 1981년에 이혼하고 나서 1982년에 프랑스 카레이서 올리비아 샹동과 연인 사이로 지냈지만 올리비아 샹동은 1983년 3월에 카레이서 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큰 상심에 빠졌었다.
- ↑ 휘트니 휴스턴이 Just The Way You Are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빌리 조엘은 좀 닥치라고 했다.
- ↑ Uptown Girl의 뮤직비디오에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출연했다.
- ↑ 참고로 알렉서는 The Downeaster 'Alexa'의 이름이기도 하다.
- ↑ 이후에도 가끔씩 만나거나 공식 석상에서도 동행하는 경우가 잦다.
- ↑ 알렉서 조엘이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의 곡이라고 한다.
- ↑ 어린 딸이 아빠에게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본 일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으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제목은 자장가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장송곡이나 추모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 2013년에 Just The Way You Are를 커버하기도 했다.
- ↑ 알렉서 조엘은 2009년에 공황발작으로 약물을 복용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떠오르는 아이러니한 일.
- ↑ 2009년 당시 29세.
- ↑ 확인된 결과 복부가 아주 심하게 부어 올랐다고 한다. 처음엔 가구세정제가 그나마 맛이 나을 것 같아서(...) 이걸 골랐다고 1990년 인터뷰에서 밝혔다.
- ↑ 당시 병원에 입원했던 빌리 조엘이 매니저 어원 만주르에게 이봐 어원! 나를 여기서 깨너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야!라고 제정신이 아닌채 본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 ↑ 입원 당시 손에 커다란 깁스를 차고 있었고, 사인을 요청하는 종이들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사인해주는 걸 도와줬다고 한다.
- ↑ 빌리 조엘의 유명한 어록이다. 항상 공연을 마치고나서 마지막에 하던 말.
- ↑ 어느날 본인의 저택에서 18세기 옷을 입고 있던 여성 유령을 보고 나서 유령을 믿었다고 한다.
- ↑ 1964년부터 세션연주자로 활동 시작, 1967년부터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므로 제대로 성공하기 전까진 무명이 길었던 셈.
- ↑ 레이블 사의 만행과 원히트원더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꼬는 내용을 담은 곡이다. 그뿐 만이 아니라 외적인 면에서도 이 곡을 부르며 특정의 대상을 비꼬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