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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 전투 | ||
날짜 | ||
1차 : 1600년 10월 21일 (음력 9월 15일) | ||
장소 | ||
일본 미노노쿠니 후와 군 세키가하라 (현재의 기후 현 후와 군 세키가하라 정) | ||
교전국 | 동군 | 서군 |
총대장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모리 데루모토 |
지휘관 |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이케다 테루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이코마 마사무네 가토 기요마사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 이시다 미츠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쵸소카베 모리치카 사타케 요시노부 우에스기 카게카츠 오다 히데노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 사콘† 오오타니 요시츠구† |
병력 | 88,888명 | 81,890명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결과 | ||
동군의 승리 | ||
기타 |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작 |
목차
1 개요
일본 역사를 뒤바꾼 전투
일본 역사를 결정짓는 전투이자 중대한 분기점
일본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중요한 전투
서기 1600년(케이쵸慶長 5년) 음력 9월 15일에 일본 미노 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쵸[1])에서 벌어진 전투.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2], 모리 데루모토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 내전이 귀결된 결전이다. 이 전투에서 승자에게는 향후 260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한이, 패자에게는 죽음과 몰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판 라크쉬르, 시빌워
병력규모도 양군 총합 17만 명을 웃도는데다가 향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큰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고작 3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는 넓은 의미로는 동군과 서군 간 벌어진 일련의 내전행위를 총칭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전투는 세키가하라뿐만 아니라 도호쿠, 호쿠리쿠, 큐슈 등 일본 전국에서 벌어졌다.
전투 결과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조선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호전되는데다가 대다수 다이묘들이 개역당하여 멸문지화(가문자체가 망하는 일)되거나 전봉되는 등의 파급효과가 일어났으므로 정치적인 의의도 크다. 세키가하라 합전(合戰), 동서합전이라고도 부른다.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인다. 창작물에서도 가끔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가족 싸움을 여기에 비유한 이 기업은 진정 일본 기업이 맞는 거 같다.
시기적으로는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인해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종전한지 2년만에 일어난 일이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공격했던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도 다카토라, 타치바나 무네시게,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테루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호소카와 타다오키등 왜군 장수들이 다수 참전했다.[3] 고니시와 가토처럼 임진왜란 때도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곤 했지만 이제는 진짜 적이 된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2 배경 - 도요토미 가의 내분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패배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야심을 드러낸 도쿠가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의 히데요시의 측근과 다테 마사무네 같은 이름난 다이묘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마사노리와 기요마사 등의 오와리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인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였다. 반면 문관인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위 오미파라 불리던, 가문 내에서 비교적 신참 다이묘들은 물론 기타 명문 다이묘 가문들을 규합, 도요토미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애초에 미츠나리와 칠본창의 갈등은 임진왜란 이전의 감정적 앙금으로부터 거슬러가는 해묵은 원한이 원인이었다. 그것이 결국 전쟁 중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고, 마에다 토시이에가 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하면서 어떻게든 사태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그 토시이에가 1599년 사망함으로 인해 두 세력은 의견 대립이 아닌 창칼의 대결로 변모해간다. 후쿠시마와 가토 등은 다짜고짜 이시다 미츠나리의 목을 베려고 덤벼들기까지 했고 이에 미츠나리는 다름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 뒤로 숨어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그의 거성인 사와 산성까지 무사히 배웅해주도록 조치는 했으나, 그 직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봉행에서 강제로 파직시켰다. 즉, 은혜를 베푸는 동시에 원수가 된 셈인데 이 은혜마저도 이에야스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3 전투 전
3.1 각 세력의 규합
이렇게 되자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는 반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해 이에야스와 승부를 보기로 작정한다. 물론 양쪽 다 이전부터 자기 세력을 착실히 모으고 있었고, 미츠나리의 파직 이후 본격적으로 소집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문제는 내전이 가시화될 때까지도 미츠나리의 인망이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는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궁여지책으로 대 다이묘 중 한명인 모리 데루모토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미츠나리가 원활하게 거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반대로 이에야스는 얼굴마담 그런 거 없이 본인이 총지휘관으로 앉아 히데츠구 사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한 영주들을 구해줌으로써 쉽게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도 미츠나리를 향해 빠득빠득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일을 풀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에야스 본인이 가장 많은 병사와 영지를 소유한 다이묘였다
아무튼 미츠나리는 비록 인망이 바닥을 기었건 얼굴마담을 세워야 했건 일단은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데 성공했고, 세력 규모는 대강 비등하게 맞춰졌다.
3.2 쟁점 - 정통성은 누구에게 있었나
실질적으로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결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는 둘 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기존에는 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혈통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그의 생모인 요도도노를 지지하는 소위 오오미 파가 중심이 된 서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를 중심으로 한 소위 오와리 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심이 된 동군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주류였다. 당시 일본도 그렇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적통과 서통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적통에 해당하는 정실인 네네를 지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이 서통에 해당되는 요도기미를 지지하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비해 정통성적인 측면에서 앞섰다고 볼 수 있으며, 도요토미 출신 다이묘들이 동군에 든 것도 어느 정도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네가 오히려 서군 편을 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요도도노와 함께 개입했으며, 서군 주요 인물과 친분이 깊었고 나중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딸 타츠히메를 양녀로 삼아 보호하기까지 했다는 것이 그 근거. 이것이 사실일 경우 도요토미 출신 동군 다이묘들은 동군에 든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냥 인정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부가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니라 이시다 미츠나리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 역시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겨우 얻은 도요토미 츠루마츠도 태어나서 3년을 못넘기고 죽었다. 그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났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와의 나이차가 엄청 심한 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는 데다가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가 아니라 첩인 요도도노를 옹립했고 네네가 되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결탁했다는 것이 그 근거. 헌데 굳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시다 미츠나리와 요도도노 사이에서 자식이 1명이라도 태어났다면, 그게 딸이라 할지라도 그걸로 이미 이시다 미츠나리 이외의 모든 도요토미 출신 서군 다이묘들이야말로 서군에 든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경우 도요토미 가문의 영달이 아닌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 계속된 연구로 보건대 실상은 동,서군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주군으로 인정했으며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는 남편이 죽고, 히데요리가 후계자가 되자(어차피 자신에겐 후사가 없으니까 정실 측실 논란이 될 꺼리도 없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고, 이후 권력 다툼과는 멀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때만 해도 히데요리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충성의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4] 누구보다도 히데요리를 지키려했던 히데요시의 충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가 동군에 선 것도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더 잘 보살피고 도요토미 가문을 보존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코다이인은 그저 방관자거나 혹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고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편든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지금 고쿠다카로 보나 개인의 능력으로 보나 이에야스가 다음 천하인이 될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붙었던 것이다. 또한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었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미츠나리와의 대립을 통해 그가 도요토미 정권에 있어 불필요한 존재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오다 노부나가 사망 이후 히데요시를 천하인으로서 인정한 자들의 결말과 그 아들들과 충신들처럼(이를테면 시바타 카츠이에 같은) 히데요시에게 저항한 자들의 결말을 똑똑히 본 이들인데 미츠나리가 필요 이상으로 이에야스에 대해 견제하는 것이 위협적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에야스 편에 붙어 그동안 자기들과 대립해온 미츠나리 파들은 뽑아내면서 동시에 히데요리를 든든히 지킬 수 있는 대 다이묘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했음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러나 이에야스 또한 히데요시가 천하를 잡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히데요시에 대한 저항과 귀순을 모두 경험해본 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3.3 개전
1600년 6월, 에치고의 호리 히데하루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며 고발하였고,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5]
이에야스는 출진하면서 교토 교외의 후시미 성에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와 약간의 경비병을 남겨두었고, 미츠나리와 그 일파(서군)가 이를 급습하여 후시미 성이 함락되었고 모토타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미츠나리는 이세(伊勢), 미노(美嚢)등을 침공하였고, 7월 중순에는 이에야스 또한 이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회군을 시작하여 7월 25일에는 간토의 시모츠케 국 오야마에서 동군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이에야스 휘하에 종군하고 있던 다이묘들이 미츠나리와 맞서 싸우기 위해 이에야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에야스는 주변 다이묘들을 결집시키니, 이를 '오야마 평정'이라 한다. 이후 동군은 토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8월 23일, 동군의 선봉은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 히데노부가 지키던 기후 성을 제압하였다.
동시에 이에야스는 나카센도를 통한 진군을 계획하여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일군을 맡기나,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에 항복을 권했으나 거부한 사나다 마사유키와의 전투로 발목을 잡히고 결국 세키가하라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 이에 대해 처음부터 히데타다의 임무는 서군에 붙은 사나가 가의 공략과 견제, 그리고 나카센도의 제압(퇴보로의 확보)이었으며, 세키가하라에 합류하는 것은 추후 내려진 명령이라는 이설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에야스는 3만 5천명 이상의 군사를 고스란히 보존했다. 이런 점에서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질 경우를 대비해서 토요토미 가신들끼리 싸우게 하고, 자신의 주력군을 보존하려고 했던 이에야스의 교활한 계획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에야스는 기후 성을 점령하고 에도를 출발해 오카야마에 포진하여 히데타다를 기다렸으나, 히데타다가 오지 않자 결국 9월 14일 합류를 포기하고 진군을 개시한다. 이때 서군은 동진을 위해 오사카를 출발하여 오카야마 남쪽인 오가키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군의 예상치 못한 빠른 등장에 당황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군은 가라샤의 죽음으로 인한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이탈을 제압하기 위해 1만 5천의 병력이 묶였고, 주력인 모리군은 출진을 미루고 미적미적대는 등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마저 14일에 있었던 서군 군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서군 수뇌부는 코바야카와군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6]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전의 하루 전날인 9월 14일. 이시다 미츠나리가 농성전을 준비하고 있던 오가키 성[7]을 공략해봤자 공격한 측이 피해가 더 크니, 서군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으로 진군한다고 결정. 이 정보를 일부러 흘렸다. 이에 서군은 동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모여든 곳이 세기카가와라. 누구도 세키가와라가 결전의 무대가 되고, 그것도 반나절 만에 끝날 지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8]
4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Battle of Sekigahara 1600) 関ヶ原の戦い HD
葵徳川三代 - NHK Taiga Drama 2000
세키가하라 전투의 포진. 파란색이 서군이고 붉은색이 동군. 주황색은 서군에서 배반한 부대이며 약간 진한 파란색은 서군으로 참전했지만 전투에는 나서지 않은 방관한 잉여부대이다.
메이지 덴노 시절 일본의 사관학교 장교로 온 프로이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이 포진도만을 보고 즉시 서군의 승리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인들이 동군의 승리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소령은 "그것은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틀리고 쪽팔려서 그랬을수도 있다.
사실 전후사정 다 무시하고 포진만 놓고 보면 전후사정을 몰랐던 클레멘스가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일단 군력은 양군이 거의 대등한 상황에서 지형은 서군이 월등하게 유리했던 것. 동군은 말 그대로 포위당한 상태인데 그것도 그냥 포위도 아니고 산골짜기에 갇혀 포위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동군후방포위부대가 방관한 부대라서 문제인거지.
포진도를 보면 동군의 최종지휘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에야스가 포진(가운데의 가장 큰 붉은 표시)한 산 바로 위의 진한 파란색 부대가 (명목상) 서군의 총대장이자 대군을 이끌고 온 모리 가문의 부대였다. 이들이 제대로 싸웠다면 산 바로 아래에 포진한 동군 본진도 무사하기는 어려웠다. 모리와 안코쿠지 에케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퇴로만 확실히 차단해도 동군을 전멸시키는 것까지도 가능한 포진이었다. 병력의 숫자도 서군이 조금이나마 유리했고 질에서도 결코 동군에 뒤쳐지는 편은 아니었다. 즉 지도 오른쪽에 있는 부대들까지 합치면 동군을 포위하는 형태의 학익진이 완성되는 상황. 클레멘스가 듣자마자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이나 전후 사정을 들은 후에 했다는 '그건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이런 좋은 포진을 가지고 진 데는 전투 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아래에 상세히 나와 있다.
5 동군과 서군의 참전 다이묘/장수
5.1 동군
동군에는 다음과 같은 지휘관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 최종지휘관 도쿠가와 이에야스 : 모든 명령은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 다테 마사무네 :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백만 석의 영지를 약속받고 동군에 참전.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기간 동안에는 카게카츠와 동맹맺고 우에스기군이랑 모가미군이 싸우는 걸 관망만 하였다.
- 난부 토시나오 :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와 함께 우에스기 카게카츠군에 맞서기로 되어 있었지만 영지내에서 잇키가 일어나 귀환.
- 모가미 요시아키 : 딸인 코마히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겸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측실로 들어갔으나 이후,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할복 자살을 하자 그의 측실인 코마히메도 연좌되어 처형당했다. 이쯤 되면 히데요시와 도요토미 가문을 톱 수준으로 증오할만 하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다테와 난부군이 이탈하면서 우에스기군에게 열심히 털렸다. 여기에 이전에 영지를 빼앗겼던 오노데라가가 쇼나이 방면으로 쳐들어 오기까지... 결과적으로 겨우 버티긴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조금만 늦게 끝났어도 전사할 뻔했다.
- 구로다 요시타카 : 전국시대 말기의 명군사로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텅 빈 서군 다이묘들 영지를 신나게 털고 있었다.
- 구로다 나가마사 : 킷카와 히로이에와 내통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 약속을 받아낸 세키가하라 전투 제 1의 공로자.
- 후쿠시마 마사노리 : 이시다 미츠나리를 무지하게 싫어하는 인간. 당연히 전투에서도 열심히 싸웠다.
- 가토 기요마사 : 칠본창의 투톱(혹은 쓰리톱),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텅 빈 서군 다이묘들 영지를 빈집털이했다.
- 호소카와 타다오키 : 아내인 가라샤가 미츠나리 때문에 사망. 더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 도도 다카토라 :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많은 서군 다이묘들의 배신을 획책했다.
- 오다 유라쿠자이, 다나카 요시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야마우치 카즈토요,가토 요시아키 등등등
어쨌든 동군 다이묘들은 대부분 서군을 무찌른다는 혹은 이시다 미츠나리 만큼은 꼭 죽이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향해 움직였다. 예외가 있다면 츠가루 타메노부 정도이다. 그는 처음에는 서군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안도, 도자와, 남부 등등이 모두 동군소속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서군은...
5.2 서군
대부분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인 동군과 달리 이 쪽은 배신과 내분이 철철 넘쳤고 지휘계통도 엉망진창과 막장으로 점철되었다.
- 명목상 총지휘관 모리 데루모토 :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안코쿠지 에케이의 주전론과 킷카와 히로이에의 화평론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래놓고 한다는 게 오사카성에서 버로우 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가 오사카의 방비 때문에 못 가게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진짜 총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 : 말 그대로 진짜 총지휘관이지만 애초에 전략, 전술적인 면에서 답이 없을 정도로 낙제급인 사람인지라 너무 한심한 판단만 내리고, 거기다가 엉망진창의 지휘계통과 자신의 계급이 낮은 편에 속하고 고쿠다카도 채 20만석도 안됐기 때문에 자신이 명령을 전달하려고 해도 "어디서 미츠나리 따위가 나한테 명령질이야?" 라고 말을 들어처먹을 생각이 없는 다른 다이묘들 덕분에 속이 탈 지경이었다. 세력을 잘 규합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 : 이시다 미츠나리의 절친. 미츠나리와의 의리로 600여명의 병사로 참가. 그래도 그 병력을 가지고 1만명이 넘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만 히데아키와 다른 다이묘들의 물량 앞에 결국 GG~. 가뜩이나 인망이 없던데다 호소가와 가라샤사건으로 평판이 땅으로 떨어진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그나마 10만 명 이상의 부대가 모인 것은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시마즈 요시히로 : 역시 서군에서 알아주는 용장. 그러나 애초에 전투의지가 부족한 데다가 거느린 병사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 사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후시미 성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하였는데, 성을 지키던 토리이 모토타다가 모반을 두려워하여 입성을 거부, 이후 천하의 판세에 참여하기 위해 서군에 가담. 이때 요시히로가 이끄는 군사는 1000여 명 정도로 매우 적었는데, 60만석의 대 다이묘가 이렇게 적은 병사를 이끌고 온 이유는 그의 무리한 조선 침략에 화가 나 있던 형 요시히사와 중신들이 참전을 반대하여 요시히로, 그의 지인들이 모여서 합세한 군사였기 때문.[9] 결국 미츠나리는 시마즈군의 수가 적은 것에 실망했고 요시히로가 내놓는 기습계책을 죄다 씹어버렸다. 이에 요시히로도 분노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지휘를 거부하였고 미츠나리의 명령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가장 압권은 전투 도중 시마 사콘이 부상당하자 미츠나리가 요시히사에게 대신 지휘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거부한 것. 미츠나리는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라도 보내달라고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해버렸다. 여기에 전황이 서군에게 어려워져 우키다 히데이에군이 퇴각하자 요시히로는 우키다군에게 총질을 가했다. 실상은 그냥 이 전투에 참여해서 이기면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명분을 얻을 심산이었다.
- 고니시 유키나가 : 그나마 열심히 싸운 몇 안되는 서군 다이묘.
- 소 요시토시 : 쓰시마 섬의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 장인어른 따라 서군에 가담했다.
- 우키타 히데이에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역시 그나마 열심히 싸운 몇 안되는 서군 다이묘.
- 사나다 마사유키 : 우에다성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쳐들어온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덕분에 히데타다는 전후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욕을 엄청 들어야 했고, 마사유키의 장남인 사나다 노부유키는 장인인 타다카츠를 통해 이에야스 앞에서 제발 아버지와 남동생 사나다 유키무라의 목숨 만은 구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 우에스기 카게카츠 : 도호쿠 지역에서 난부 토시나오,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난부 토시나오는 영지에서 잇키가 발생하자 귀환하였고, 다테 마사무네는 카게카츠랑 동맹맺고 사태 관망, 홀로 남은 모가미 요시아키를 털고 있었다.
- 사타케 요시노부 : 이시다 미츠나리의 친구. 아버지 요시시게는 동군을 지지하였으나 요시노부는 친구따라 서군을 지지하였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아버지랑 싸우느라 아무것도 못했다. 전후엔 영지가 칼질 당해 반토막 나고 사타케 가문은 동북 깡촌으로 전봉 당했다.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처조카. 서군 내에선 손꼽힐 만큼 대군을 이끌고 있었으나,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동군과 내통해 배반을 약조하였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역시 칠본창의 일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따라 배신했다. 하지만 사실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와 친교를 가졌으며 본래 동군에 가담하려다 전투가 벌어질 당시 본인이 오사카 성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서군에 가담했다. 전투 중에도 거의 방관하는 처지였으며 동군에 가담하고서야 적극적으로 나선다.
- 킷카와 히로이에 : 처음부터 화평론을 주장하다가 동군과 내통하는 상황이었고, 모리쪽이 끝까지 방관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병사들에게 도시락 먹여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끝까지 방관한다. 이 분 때문에 타치바나, 쵸소카베까지 발이 묶여서 방관하는 처지가 되었다.
- 타치바나 무네시게 : 역시 서군의 몇 안되는 명장이었으나 킷카와군에게 길이 막혀 방관하게 된다.
- 쵸소카베 모리치카 : 아버지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죽은 뒤, 처음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나츠카 마사이에가 길을 막고 버티자 어쩔 수 없이 서군 소속이 된다. 그런데, 서군으로 참전했음에도 이번엔 킷카와군이 길을 막아(...) 방관하는 처지가 되었다.
양과 질은 월등했을지언정 이렇게 서군은 어마어마한 양의 시한 폭탄들을 떠안고 있었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생각나면 지는게 아니라 당연한거다.
5.3 전개
동군의 선봉장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으나 이이 나오마사가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나오마사 본인의 사위되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를 데리고 50여명의 병력으로 냅다 우키다 군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은 개전 당시 동군과 실제로 전투를 할 수 있었던 병력은 약 3만 3천여(미츠나리, 오오타니 + 고니시, 우키타)정도였으나, 압도적인 지형의 이점을 통해 병력차를 극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잘 싸우고 있던 시마 키요오키(시마 사콘)가 부상을 입어 실려 나가면서[10] 삐걱대더니, 미츠나리가 시마즈 군에 사자를 보내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대신 지휘를 해줄 것을 부탁한 것을 요시히로가 미츠나리의 사자가 말을 탄 채 군령을 전했다는 이유로 응전을 거부하면서[11] 일이 꼬인다.
여기에 사실상의 주력인 모리군은 이미 동군과 내통한 깃카와 히로이에가 길을 막고 있어 참전하지 못하였다.[12] 모리군은 데루모토의 양자인 히데모토가 지휘를 맡았으나, 그에겐 안코쿠지 에케이의 주전론과 깃카와 히로이에의 화의론 중 어느 쪽도 선택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는 도시락 먹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로 전투 내내 방관만 하였다.[13] 결국 모리군이 싸우질 않는 바람에 에케이는 물론 타치바나 무네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군까지 발목이 잡혀 방관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 그리고 미츠나리의 편에 서서 끝까지 싸워주는 우키타와 고니시가 있었기에 서군은 여전히 싸워볼 만했다. 정오가 지나면서 슬슬 병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며 어느 쪽이 유리하다 할 수 없는 백중세가 지속되었는데, 이 때 동군의 회심의 카드이자 전투를 끝낼 결정타가 터졌다. 동군과 내응을 약속한 히데아키가 이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보고를 듣고 화가 난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의 진지에 대하여 사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놀란 히데아키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산 밑의 오오타니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14] 히데아키가 이끄는 1만 5천의 병력, 서군 전력의 약 20% 가량이 동군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게다가 히데아키가 진을 친 곳인 마츠오 산은 서군 주력부대의 남쪽 지역 이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도 이곳 근처에 있었다.
그의 배신을 이미 예상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소수의 병력만을 가지고 이를 물리쳐 후퇴시키긴 했으나,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이때까지 전투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던 서군의 여러 무장[15]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오오타니 군을 공격한다. 이에 요시츠구는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괴멸하고 자신도 할복하였다.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흐름은 동군 쪽으로 기울게 된다.
동군은 더욱 사기충천하여, 혼다 타다카츠는 말이 총에 맞아 낙마하였음에도 바로 일어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서군의 병력들을 도륙하는 용맹을 과시하였고 코바야카와 군은 우키타 군을 집중공격해서 결국 괴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패주하여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 방향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시마즈 군이 우키타 군에게 총질하며 팀킬까지 일어났다. 서군은 분전에도 불구하고 시마 사콘, 가모 요리사토, 마이 효고 등의 맹장들이 차례차례 전사하는 가운데 결국 괴멸되었다. 가토 군 또한 고니시 군을 일찌감치 괴멸시켰다.
한편 서군의 시마즈 군은 목숨을 걸고 동군 본진을 정면돌파하여, 일부 병력만이 겨우 살아남아 큐슈로 도주하였다. 참전한 1600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이는 100명도 되지 않았다고. 이 돌진으로 시마즈 토요히사, 쵸쥰인 모리아츠가 전사했다. 현실은 시궁창. 자세한 건 시마즈의 퇴각 항목 참조.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동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정확한 사상자는 알 수 없으나 소설 대망에 따르면 동군의 사망자가 약 4천 정도에 서군은 약 3만 2천에 이르렀을 거라고. 소설인 만큼 숫자에는 신경 쓰지 말고 대강 서군이 그만큼 큰 규모로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시다군을 비롯해 끝까지 싸운 서군 측 병력은 거의 몰살을 당했음을 생각하면 그다지 틀린 주장은 아니다.
6 종전, 그리고 결과
한편 큐슈에서는 구로다 죠스이(구로다 요시타카)와 가토 기요마사가 서군의 빈집을 열심히 털고 있었다. 특히 빈집이 털린 고니시 유키나가와 우키타 히데이에는... 결국 히데이에는 시마즈 가로 도망쳐야 했다. 이들의 빈집털이는 다치바나 긴치요에게 막혔지만 긴치요의 활약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조스이의 이러한 빈집털이를 두고, 그 역시 일본을 차지하려는 야망이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중앙에서 내전을 벌이는 동안 큐슈를 제압하고 시마즈가와 연합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해 볼 만하다는 구상이었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아들 나가마사의 활약 덕택에 동군이 빠르게 승리하면서[16] 망했어요. 세키가하라 전투 종료 후 죠스이는 그동안 털었던 서군 빈집을 모두 이에야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아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가 자신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며 감사를 표했다고 자랑했더니 그럼 네 왼손은(이에야스를 베지 않고) 뭐했냐?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발단이 된 우에스기에서는 이에야스가 떠나기 전 모가미 요시아키의 거성에 도호쿠의 다이묘들을 모아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시키려 하였는데, 본인이 반전하고 다른 다이묘들이 떠나는 바람에 모가미만 전쟁 준비를 하는 꼴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에스기가 모가미를 공격하여 모가미의 거성을 빠르게 포위하였으나, 요시아키는 데와의 여우라는 별명답게 3천의 병력으로 2만이 넘는 우에스기 군을 상대로 선전하였고 우에스기 군은 하세도 성에 묶이게 되었다. 이 때 관망하던 다테 마사무네가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우에스기 군은 퇴각하고 이후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다.
모리 데루모토는 전후 모리 히데모토, 타치바나 무네시게[17]의 주전론을 거부하고 알아서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다.
야사로, 이 때 주변에 살던 일반 백성들은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전투를 구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세 일본처럼 봉건 영주들 간의 전투는 특성상 다른 상황에 비해서는 일반 민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니까 이 대전투 또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전쟁에 휩쓸리면 노역과 약탈, 살해되고 강간당하고,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던 센고쿠 시대에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해야했던 건 피차일반이었기에 오히려 패잔병들을 노렸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만화 배가본드에 이런 상황이 잘 묘사된다.
그리고 일본의 전기 주파수가 동쪽과 서쪽이 다른 이유가 이 싸움의 결과였다라고 전해진다.(신동아 2012년 3월호 별책부록 '우리 곁의 원자력' 중에서)
7 분석 - 동군이 승리한 비결
7.1 이에야스와 미츠나리의 차이
무엇보다 이에야스와 미츠나리의 능력 차이는 이 전투에서 가장 크게 기여했다.
미츠나리는 말 그대로 인망만큼이나 바닥을 기는 게 군략이었다. 오다와라 정벌전 때 카이히메를 상대로 물길을 잘못 파서 수공을 실패하는 삽질을 하지 않나[18] 행주산성 전투에서 10배의 군세로 그 10분의 1밖에 안되는 조선군에게 탈탈 털리고 지휘관 급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병크를 만들어내지 않나... 토리이 모토타다를 상대로도 시간을 질질 끌었고 여러 모로 좋지 못했다.
이런 전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부분에서도 차이가 크게 드러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까지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이 대립이 오래 갈거라 보았고 그래서 어부지리를 노리는 자들 또한 많았던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이에야스만은 누구보다 빨리 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해놓았다.
애초에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작 전부터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우에스기 때문에 이에야스가 서쪽으로 간 틈에 거병하겠다는 게 처음부터 미츠나리가 노렸던 바였을지 모르나 이에야스 또한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 이에야스 입장에서 미츠나리를 없애는거야 진작에 없애버릴 기회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놔두었던 것부터가 미츠나리의 거병을 통해 그에게 붙을 파벌들을 통째로 갈아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서쪽으로 떠난 틈을 타 마침내 거병할 수 있었으나 상술했듯 이후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다 실패하고 호소카와 후지타카를 놓쳤으며 토리이 모토타다의 후시미 성 공격에도 시간을 끌리게 되면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병력 소모가 잇따라 생겼다. 그에 반해 7월 중순 거병 소식을 듣게 된 이에야스는 25일 오야마 평정을 통해 우에스기에 남길 자와 서쪽으로 돌아갈 자들을 정리했고 토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을 개시해 8월 23일 기후 성을 손에 넣었고 9월 15일 마침내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였다.
뭐, 군략에서 이에야스도 간간히 부족한 점이 보였으니까 백보쯤 양보해서 넘어간다 쳐도 가장 큰 문제는 통솔력. 이 부분에서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의 발끝에도 못 미쳤다. 그리고 이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물론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만 따지면 뒤진다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그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게 문제였다. 미츠나리의 뜻을 끝까지 따른 지휘관은 초장에 전사한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제외하면 단 두 명. 고니시 유키나가와 우키다 히데이에 뿐이었다. 물론 둘 다 자기 병력을 통솔에 뭔가 할 능력은 됐지만 불리한 전역을 어떻게든 뒤집거나 승리할 만한 실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모두 배신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 특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1만 5천의 대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간을 보는 처지라 서군 입장에선 무조건 잡아야 하는 존재였다. 특히 히데아키는 미츠나리에 의해 영지가 감봉된 적이 있었기에 감정이 좋지 못할 수밖에 없으니 더더욱 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코바야카와에게 글로 된 서약서만 줬을 뿐 별도의 관리도 하지 않으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펼친 학익진의 한쪽 날개를 맡겼다. 정말 하다못해 서로 백중세였던 정오 즈음이 되어서라도 설득에 나섰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못해서 결국 히데아키가 배신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만 해야 했다.
거기다 모리 데루모토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론 얼굴마담이긴 해도 형식상 총지휘관이니 손을 쓰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데루모토를 전장에 나오게 만들거나 아니면 확실하게 서군의 편으로 만든다든가 해야 했는데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안코쿠지 에케이만 믿었다가 킷카와 히로이에가 히데모토를 미친 듯이 흔들어놓은 덕에 모리 군은 전투 내내 소극적인 행보로 일관했다.[19]
이 점을 감안하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포진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 포진 자체야 좋았지만 한쪽 날개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맡고 있었으며 이에야스의 배후를 노릴 진영은 모리 군이 맡고 있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히데아키를 나름대로 견제하고자 배치해둔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부대마저도 배신자들 투성이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히데아키의 배신 이후 줄줄이 따라간 것은 그만큼 배신하기 쉬운 위치였다는 점도 한몫한다.
거기다 시마 사콘의 부상 이후 대신 지휘해달라고 부탁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또한 이에야스 편을 들려다가 마지못해 온 다이묘… 이쯤 되면 미츠나리가 인선 배치를 못해도 너무 못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반면에 이에야스는 개전 전부터 자기가 짜온 시나리오를 남김없이 선보였다. 어차피 전투는 다이묘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총지휘관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 때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는 정말 대단했는데 전투지휘에 권모술수를 곁들였다. 자기 병력을 지휘하면서 첩자들을 적진에 뿌려 흔들어댔는데 킷카와 히로이에를 통해 모리 군을 뒤흔들었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흔들다 못해 아예 자기편으로 돌아서게 했다. 그러면서 자기 밑의 다이묘들은 꽉 붙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이묘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간토로 보냄으로 인해 임진왜란의 피해를 하나도 받지 않았던 것, 히데츠구 사건으로 인해 다이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 미츠나리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과 반목해온 결과물이었다. 왜란 후 이에야스는 250만 석이 넘는 땅과 상처 하나 없는 8만 가량의 대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휘하 가신들은 예전부터 그를 따라온 자들이었으니 미츠나리가 함부로 흔들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이로 인해 마에다 토시이에 정도가 아니고서야 입 뻥긋 못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보유했고 미츠나리에 반발한 히데요시의 측근들까지 이에야스를 편들지, 다테 마사무네 같은 다이묘들은 자식들의 결혼으로 혈연으로 묶이지 자연스레 다음 천하인으로서의 발판이 완성되었다.
특히 심각했던 건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견제하라고 배치해둔 기존 이에야스의 영지인 스루가, 토토미, 미카와, 시나노와 노부나가의 영지였던 오와리 방면 영주들이 거진 이에야스 편으로 붙었던 것이다. 히데요시 피꺼솟 이로 인해 이에야스는 서쪽으로 쾌속 질주를 할 수 있었고 미츠나리는 거병 후 석 달이 넘는 기간동안 자기와 별로 엮인 적이 없거나 혹은 사이가 안 좋았던 다이묘들을 제대로 포섭치 못해 결국 전투에서 발목을 잡힌 반면 이에야스는 휘하 다이묘들을 능수능란하게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다이묘들까지 흔들 기반이 마련됐다. 물론, 이는 미츠나리 또한 이 상황이 오래 갈 것이라 여겼기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포섭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나 이에야스는 상대 세력에 빈틈이 있는 지금 결단을 내리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 판단했을 것이고 기후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허겁지겁 다이묘들을 포섭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군략의 차이는 적었으나 정치력의 차이는 너무나 컸으니 병력 및 예하부대 장악 능력은 말 그대로 프로와 아마추어였던 것.
7.2 양측 진영의 이해관계 차이
덧붙여 동군과 서군은 각 진영마다 얽힌 이해관계가 확연히 차이난다. 일단 동군부터 보자면 다테 마사무네, 구로다 나가마사 등 어부지리를 노리는 영주들도 분명 있었으나 이에야스 밑에서 그를 따르며 미츠나리 파를 축출하는데 우선목표를 뒀다. 때문에 이들은 각자 자기 부대가 주둔한 곳에서 나름대로 이득을 챙기거나 후일을 도모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동군 진영에 혼란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반면에 서군은 입장이 다른 영주들이 많았다. 애초부터 이에야스를 따르고자 한 영주들이 많았던 동군과 달리 서군은 둘의 대립을 방관할 생각이었거나, 이에야스를 따를 생각이었던 영주들이 다수 존재했다. 당연하지만 전후자 모두 군사 1만 이상을 보유한 대 다이묘가 하나씩 있었고 이들은 모두 서군의 핵심적인 역할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 진영을 비교해보면 정말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총사령관의 전투 참전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 것이다.
서군은 모리 데루모토의 참전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전투 전부터 미츠나리는 데루모토가 오사카 성에서 나와주길 원했고 이건 다른 서군 영주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데루모토의 불참이 확정되자 서군 쪽의 사기는 급격히 꺾였고 여기에 데루모토가 없는 모리 군이 미츠나리의 명령을 무시하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구경만 해 서군의 패배를 불렀다.
하지만 동군은? 물론 동군도 이에야스가 참전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을 것이고 동군 영주들도 이에야스에게 출진을 재촉했던 적이 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도 했고. 그러나 동군 영주들은 이에야스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히데타다가 3만 5천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 있는데도 그가 오기도 전에 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렀음은 물론, 이에야스가 후방에 모리 군이 있다는 이유로 정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군의 사기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는 위에도 설명했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입장 때문이다. 이들의 목표는 미츠나리 파의 축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히데요리를 든든히 지원할 수 있는 대 다이묘로서의 입지를 다질 필요도 있었다. 이에야스가 아무리 에도 막부 수립 이후 검은 속을 드러냈다고는 하나 이미 히데요시와 대립한 바 있는 이에야스를 영주들이 순순히 믿었을 리도 없다. 거기다 엄밀히 말해 칠본창 입장에서 이에야스는 자기들이 이기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자기들이 섬기는 주군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히데요리였으며 이에야스 또한 히데요리의 가신에 불과했다.
즉, 이들 입장에서 이에야스가 정면에 나서 전투를 지배하게 되면 자기들의 공적이 축소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에야스의 개 취급을 받을 여지가 많다. 그러니 이에야스가 총사령관으로서 출진은 하더라도 전투 정면에서 나서 공을 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도 왕창 늘려받고 그러면 전투 이후 도쿠가와 정권이 수립되더라도 도요토미 가문과 그들의 입지 또한 든든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이에야스 입장에서도 이러한 동군 영주들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자기 병사들을 갈아넣지 않고 도요토미 가신들만으로 전쟁이 끝난다면 고스란히 남은 군사력으로 정권 수립 후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주들에게 땅도 떼어줘야 하고 당장에 축출했다간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이에야스는 영주들에게 논공행상으로 떼줄 거 다 떼주더라도 250만 석 이상의 자기 영토는 그대로고 천하를 잡기 위해 수십 년을 기다린 인내가였다.
이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자 동군은 누가 뭐라 할 거 없이 죽자사자 전투에 뛰어들었지만[20] 서군은 자기들끼리 눈치 게임 벌이고나 있었다.
7.3 명령 체계의 차이
이러한 차이는 동군과 서군의 지휘체계에 명명백백히 나타난다. 동군은 오직 이에야스의, 이에야스를 위한, 이에야스에 의한 군대였으나,[21] 여기에 맞서 싸워야 할 서군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절망적인 인망으로 인해 모리 데루모토라는 얼굴마담을 내세워야 했고, 이로 인해 지휘권이 이원화되었다.
물론 데루모토가 형식상 지휘관이었기에 실제로 미츠나리의 지휘권에 간섭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나 그래서 오사카에 버로우. 내부적인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데루모토의 우유부단함 또한 서군 장수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요인이었다. 애시당초 미츠나리가 자신이 직접 최종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모든 명령을 내릴 때마다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을 팔아야만 할 정도로 인망이 바닥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지만. 이러한 서군의 모습을 보면 미츠나리는 미츠나리대로 사람을 못 믿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타 지휘관들은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그런 미츠나리에게 실망하거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나 모리 히데모토처럼 갈팡질팡거리며 전투 중에 미츠나리의 명령을 씹어버리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미츠나리는 당시에 히데요시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딱히 능력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것도 없었다. 하다 못해 가진 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결국 이런 차이는 전투 중에 유연한 배치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으며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반면 동군은 이에야스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고, 이에야스는 자군을 확실히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요 서군의 장수들까지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미츠나리가 이를 막지 못한 끝에 결국 서군 전력의 20~25%가 동군으로 돌아서고 비슷한 수의 전력이 방관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패배는 당연지사였다.
7.4 종합
세키가하라 전투는 결국 개전 전부터 이에야스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의 거병을 통해 자신이 거병할 기회를 얻었고, 미츠나리가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미리 우에스기와 인접한 다테와 모가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는 순순히 아이즈 쪽으로 나아갔으나,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부대를 재편성해서 다테와 모가미로 하여금 우에스기를 상대하게 하고 돌아갔다. 때문에 서군은 바람과 같이 달려오는 동군을 상대로 당황했고 미츠나리는 이런 당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세키가하라라는 전장을 잡고 학익진을 편성해 최고의 포진을 만들어놓긴 했으나 그 또한 이에야스 손바닥 위였다.
미츠나리는 위에서 썼듯이 예하 부대 장악 능력이 최악이었다.[22] 그렇다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미츠나리는 어디까지나 이기기만 하면 불만이고 뭐고 누를 수 있다는 단순무식한 계산을 통해 어떻게든 동군과 전투를 하고 싶어했다. 물론 이렇게 빨리 벌어질 줄은 몰랐겠지만, 이미 계산은 다 해놓았고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의 지형과 포진은 서군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전투라는 게 미리 병력을 배치해놓고 어택땅 찍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 이에야스는 처음부터 서군이 전투를 서두른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순히 서군이 호랑이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데도 그 입 속으로 유유히 들어가 주었다. 이미 이길 판을 다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미츠나리는 전투 중에 아군의 배신 퍼레이드와 말 안 듣고 방관하는 휘하 다이묘들에게 절망해야 했다. 아군의 불만을 방관한 결과 아군이 방관을 하는 최악의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반대로 이에야스는 자기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전투 상황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미 결판나 있었고, 서군에는 이를 전술적 승리로 뒤집을 역량을 가진 자가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휘자와 구성원간의 관계라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겠다.
8 전후 처리
서군 출신 영주들은 그야말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패전 후 도주했다가 옛 친구인 다나카 요시마사에게 붙잡힌 이시다 미츠나리,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거부하고 다케나카 시게카도[23]에게 붙잡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를 당했다. 그리고 모리 데루모토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로 데루모토를 대신해 안코쿠지 에케이가 조리돌림당한 후 참수당했다.
- 모리 데루모토는 사형을 면하는 한편 영지 보전을 약속받고 주고쿠로 돌아갔지만 애시당초 이에야스는 그를 그냥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스오, 나가토, 빈고, 아키, 이와미, 이즈모 120만석에서 스오, 나가토 29만석 8천석으로 감봉. 그나마도 원래 이에야스가 데루모토를 처형한 후 완전히 소봉시키고 자신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주려고 했으나 히로이에가 이에야스와 담판한 끝에 29만석 8천석이나마 남겨 준 것이다.[24] 서군 총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모든 영지를 몰수한 것. 여담으로 데루모토 본인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하게 생각해서 이후 잠잘 때 발을 에도쪽으로 향하게 했다.
참으로 찌질하다...킷카와 히로이에는 좋은 뜻으로 동군과 내통한 것이지만 결과는 참패... 이후 킷카와 히로이에는 가문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아이즈 번의 거대 다이묘 120만석에서 요네자와 30만석으로 감봉 크리. 사실 요네자와는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영지였다. 즉 자신이 가진 영지는 죄다 뺏기고 가신 영지를 대신 차지한 형세.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만을 남겼다고 한다.
- 사실 A급 전범이라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신세였지만, 나오에 카네츠구의 엄청난 말빨로 목숨을 건진데다가 카네츠구의 요네자와의 영지까지 자신의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양도 받았다. 여기에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시대 초기에 우에스기 집안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감봉을 몇 차례 겪다가 4대 번주 시절엔 카게카츠 시절의 30만석에서 절반인 15만석까지 크게 감봉되고, 우에스기 가문의 요네자와번은 고통스런 시절을 보내야 했다.
- 시마즈 가에 망명했다가 체포된 우키타 히데이에는 오카야마 60만석에서 개역당하고[25] 자신은 이즈 제도의 하치죠시마로 유배 된 뒤 거기서 죽었다. 그나마 처가인 마에다가문의 탄원 덕분에 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할복을 강요당하거나 목이 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키타 히데이에는 그야말로 엄청 가늘고 엄청 길게 여생을 보냈는데 에도 막부 제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츠나가 치세하는 시절인 1655년에 향년 83살의 나이로 유배지 섬에서 사망했다.
- 사나다 마사유키와 사나다 유키무라 부자도 쿠노산으로 유배 크리. 동군 쪽으로 보낸 사나다 노부유키가 열심히 구명활동을 한 덕분에 목숨은 건졌다. 이후 마사유키는 유배지에서 죽고 유키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했다.
- 쵸소카베 모리치카는 아버지 모토치카의 친구였던 이이 나오마사에게 부탁해 개역을 면할 뻔 했으나 가신 히사타케 치카나오가 모리치카의 형인 츠노 치카타다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결국 개역크리.
-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 측에 참전했다가 오쓰 성에서 발목이 잡혔고,세키가하라의 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결국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본래 영지였던 규슈 야나가와에서 동군 측에 항전했으나 결국 동군에게 항복하여 패전 서군 다이묘들에 대한 영지 개역에 휩쓸려 영지 다 잃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쇼군 호위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그후 야나가와 10만석으로 복귀한다.
-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에 발목잡혀 뜻을(?) 이루지 못한 사타케 요시노부는 조상대대로 자리잡아 영지를 늘려 간토 히타치 54만석을 가진 다이묘였었지만, 대대적인 감봉 조치로 깡촌인 데와 아키타에 20만석의 다이묘로 전봉을 당했다. 사타케 가문 역시 에도 시대 때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그 외에도 나츠카 마사이에, 오노기 시게츠구, 구키 요시타카는 전후 자결했고, 오노데라 요시미치, 하시오 타카하루 등 상당수가 영지를 몰수당했고 이 영지는 동군에 가담한 영주들에게 돌아갔다. 살아남은 이들도 변방의 도자마 다이묘가 된 자들이 많았으며, 결국 일부 다이묘나 그 밑의 낭인(로닌)들은 아예 쫓겨난 다음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여하거나 민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 시마즈 요시히로만은 사츠마 70만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사실 이에야스도 시마즈가에 대해 토벌령을 내리긴 했으나 건재한 시마즈 가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요시히로가 동원한 병력은 요시히로 본인이 사재를 털어 마련한 병력이라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후에도 시마즈가는 건재했던 것. 여기에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가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는 이 모든 게 치매에 걸린 요시히로의 독단이라며 그에게 독박을 씌워버렸다.[26] 결국 이에야스는 이러한 시마즈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시마즈 요시히로가 당주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걸고 제재를 철회한다. 잘못 건드렸다간 구로다 요시타카와 연합할지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규슈가 너무 멀고 시마즈 군이 강군이란 소문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고니시의 사위 소 요시토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냥 장인어른의 지시로 서군에 가담한 점 + 조선과의 외교회복을 위해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형벌생략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 이후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했다.
- 소마 요시타네는 한 때 사타케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였지만 자기 영지를 통과하려는 다테 마사무네를 곱게 보내주었기 때문에 전후 그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영지를 얻을 수 있었다.
9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으며 이후 도쿠가와의 편을 들었던 영주들은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칠본창의 생각대로 이후 그들은 히데요리의 충신으로서 여전히 남을 수 있었으며 동시에 후원자로서 이에야스가 마냥 천하의 주인으로서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할 수 없게 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여기에 대해 이에야스는 딱히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60만 석 규모로 감봉해 힘을 꺾은 다음 선봉의 공훈과 시마즈 가와의 전투 공적으로 넷째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에게 오와리, 미노의 땅 52만 석을 주었고 그 덕에 위에서도 언급된 적 있던 이에야스의 옛 영지들이었던 스루가부터 시나노까지도 사실상 이에야스의 지배권에 들어오게 된다.
또한 기존 칠본창을 거진 다 오사카 인근이거나 서쪽으로 몰아넣고 다테 마사무네는 전투 이후까지도 들들 볶아 야망 따윈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든데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감봉에 재정난이 겹쳐 더 이상 까불 수도 없어 후방을 안정화시켜 천천히 대 오사카 포위망을 구성해 때를 노렸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등의 핵심 인사들이 죽어나가자[27] 호코지 종명 사건…이라기보단 생트집을 잡으며 오사카 전투를 일으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물론이거니와 첩 소생의 아들까지 죽이는 등 씨를 말렸고 히데요리를 따르던 수많은 영주들도 죽거나 개역당해 절대 권력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에도 막부가 260여년 간 일본을 지배해나갈 발판이 만들어진 것이며 세키가하라 전투의 최종 승자가 이에야스임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이 모든 것이 도요토미 가신들의 요구를 들어줄만큼 들어주면서 챙긴 결과물이라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10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에서도 귀환 포로들을 통해서 이 전쟁소식을 들었고 명나라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을 통보한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의 교생(校生=지방 향교나 서원에 다니는 생도)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자세히 이야기하는 일을 이르던 말)는 다음과 같다.대체로 적정(賊情)은 병신년부터 천재(天災= 자연재해)가 자주 있고 지진이 너무 심하여 공사(公私 = 공과 사)의 가옥(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집)이 무수히 파괴되었고, 심지어는 산릉(山陵= 산과 언덕)과 천택(川澤=내와 못)이 이동하고 균열되어 압살(壓殺=무거운 것이나 센 힘으로 눌러서 죽임)당한 민간과 가축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 8월 18일에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병사(病死=병으로 죽음)하면서 그의 폐노(嬖奴)[28] 석전 치부경[29](石田治部卿: 이시다 미츠나리)·증전 우문승[30](增田右門丞: 마시타 나가모리)·장속 태장승[31](長束太臟丞: 나츠카 마사이에) 등 3명에게 유언하기를 ‘너희는 어린 수뢰(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라.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내부 가강[32](內府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관동북(關東北) 33주(州)를 네가 진복(鎭服=진압하여 복종하게 하다)시켜야 어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하고, 다음으로 중납언[33] 휘원(中納言輝元: 모리 데루모토)에게 ‘관서(關西: 간사이 지방)의 남쪽 30여 주에서는 네가 우두머리이니, 모름지기 나의 아들을 부탁하는 근심을 가련히 여겨 삼가 후사(後事)를 보존하도록 하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 갑비수(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 석전 치부경이 권세를 잡고 자기들을 야박하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가강에게 아부하여 석전 치부경을 강주 좌우성(江州佐祐城)으로 내쫓았는데, 기해년 가을에 가강이 또 수뢰(秀賴)의 유부(乳父:유모의 남편) 시전비전수(蒔田肥前守:마에다 도시나가)를 가주(加州 가슈)로 내쫓고서 자신이 복견성(伏見城: 후시미 성)으로 들어갔으며, 동년 9월에 수뢰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수뢰가 있는 대판성(大坂城: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그대로 웅거(雄據=일정한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폄)하고 있으면서 군국(軍國=군사와 사무)의 모든 일을 제맘대로 하였으므로 상하가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납언 경승(中納言景勝: 우에스기 가게카츠)이란 자가 있는데 3주(州)를 거느린 장수로서 동북(東北: 도호쿠 지방) 지역에 있으면서 가강이 수길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비로소 가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두어 가강이 재삼 불렀으나 끝내 그에게 복속하지 않았습니다. 경자년 9월에 가강이 5∼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본진(本鎭)인 월주(越州)와 능등(能登 노토) 지역에 달려가 그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라는 자를 보내 5∼6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경승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일곱 번 싸워 다섯 번 패하여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석전 치부경 등이 가강이 수길을 저버리고 국사를 제맘대로 농락하는 것을 증오하고, 병권(兵權)을 가지고서도 온유(溫柔)한 휘원(輝元)을 사모하여, 대소(大小)가 모두 휘원을 권하여 허점을 틈타 입성(入城)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증전 우문승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수뢰가 있는 곳에 머물도록 하고, 석전 치부경은 비전주 중납언(備前州中納言) 평수가(平秀家: 우키타 히데이에)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살마 도주(薩摩島主) 도진(島津: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군대 4∼5만 병력을 거느리고서 중로병(中路兵)이 되어 미주(尾州 비슈)·농주(濃州 노슈) 지역 대원성(大垣城: 오가키 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장속 대장승(長束大藏丞)과 안국사(安國寺: 안코쿠지 에케이) 2인을 군총(群總)으로 삼아, 휘원(輝元)의 양자(養子) 예주 재상(藝州宰相) 수원(秀元: 모리 히데모토)과 용장사(龍藏寺)·운주 시종(雲州侍從: 깃카와 히로이에) 등의 4만 3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우로병(右路兵)으로 삼아 이세주(伊勢州 이세슈)로 가서 진성(津城: 쓰 성)과 송오성(松鳥城)을 함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가강에게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군대를 농주(濃州 노슈)의 관원(關原: 세키가하라)으로 이동시키고, 대전 형부경(大田刑部卿 :오오타니 요시츠구)[34]이 산구인 번수(山口因幡守 : 야마구치 나가히루 또는 야마구치 무레나가 중 한 명일 것이다.)의 7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좌로병(左路兵)으로 삼아 월후주(越後州 에치고 국)에서 항전을 하였는데, 당시 가강과 같이 일을 도모한 왜장 시전비전수의 군대가 추격하였습니다. 3로의 군대가 농주 관원에서 합진(合陣)하여 가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강은 휘원이 이미 대판성에 입성하여 군대를 출동하여 항전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붙은 8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야로 달려 농주(濃州)의 청원(靑原)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혹전갑비수(黑田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란 자가, 휘원의 사위 축전주 중납언(筑前州中納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과 휘원의 종제(從弟) 운주 시종(雲州侍從)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본래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가강에게 내통하니, 가강이 즉시 갑비수를 시켜 반간계(反間計)를 사용하였는데, 축전주 중납언 등이 그 말을 달게 여기고 약속하기를 ‘9월 14일에 정예 기병(精銳騎兵)을 정돈해서 기습해 오면 우리는 거짓으로 3로의 선봉(先鋒)이 되었다가 되돌아서서 관원(關原)을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과연 그 약속대로 하니 축전 중납언 등이 역시 약속대로 하여 주야로 연전(連戰=두 번 이상 잇따라 싸움)하였는데 관원의 3로병이 크게 패퇴하여 수가(秀家)와 대소 형부경(刑部卿) 등은 다 전사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궤산(潰散=허물어져 흩어짐)하였으며 가강은 승승장구하여 근강주(近江州 오미슈) 세다교(勢多橋:세타 다리)에 도착하여 운주 시종(雲州侍從:깃카와 히로이에)이란 자를 불러 ‘너의 종형 휘원이 성문을 열고 스스로 물러가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휘원이 속임수인 줄을 모르고 그 말을 믿고서 겁이나 성을 버리고 본진(本津)으로 물러가니 같은 달 27일에 가강이 다시 수뢰(秀賴)의 성으로 들어가 증전 우문승(增田右門丞) 등 자기를 배반했던 10여 인을 추격해서 체포하여 할복 자결하도록 하고, 또 석전 치부경(石田治部卿)과 평행장(平行長)·안국사(安國寺, 에케이) 등 셋을 잡아다 도시(都市=교토)를 돌면서 죄를 성토한 후 경동교(京東橋) 앞에서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원에게 협박하기를 ‘네 죄는 의당 죽여야 할 죄이나 너의 애첩(愛妾)과 자식 수취(守就: 모리 히데나리)를 볼모로 보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휘원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가강은 그들을 볼모로 잡고서도 또다시 휘원의 식읍(食邑) 8주 중에 6주를 빼앗고 협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경승(景勝)은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그 주변의 적추(賊酋) 6∼7인이 그에게 붙었고, 가강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란 자도 역시 제 아비를 배반하고 경승에게 합세하였는데, 경승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대대적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하므로 이는 가강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또 토좌 시종(土佐侍從)이란 자가 남경로(南京路)에 있는데, 가강에게 붙지 아니하고 있으며, 살마 시종 도진(薩摩侍從島津: 시마즈 요시히로)이란 자는 휘원과 같은 무리인데 가강이 지난 10월에 그의 손자 사위인 청정(淸正)으로 장수를 삼아 4만 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진(島津:시마즈)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자 군사를 퇴각시키고, 강화(講和)를 요청하였으나 도진이 병선(兵船) 70여 척을 준비해서 중국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적의 속셈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도진이 가강과 서로 대치하여 변란을 대처하고 있으면서 필시 가강이 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중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관의 평 : 강사준 등의 공초를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뒤를 이어 돌아온 사람들의 공초도 대개 같으니, 모두가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천도(天道)는 악한 짓을 하는 자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이치가 역시 거짓이 아니므로, 여기에 갖추어 기록한 것이다.
선조 136권, 34년(1601년: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5일(임진) 11번째 기사||
11 다루고 있는 매체
NHK 대하드라마에서 전국시대 말기를 다룰 경우 빼놓을 수 없는 전투다. 하지만 대규모 전투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고 중요한 부분만 보여줄 경우가 많다.[35] 2000년에 나온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만은 예외로 세키가하라 400주년을 기념해 에피소드 하나를 다 써서 정말 웅장한 전투를 보여주었다. 특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반하여 오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로 돌격하는 장면과 함께 승리를 예감한 이에야스의 웃음소리가 장면의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게 백미.
11.1 신장의 야망
센고쿠 시대의 종언과 에도 막부의 개막을 알리는 전투기 때문에 신장의 야망에서 자주 등장한다.
신장의 야망 창조 PK에서 도쿠가와-이시다 전국전으로 등장하며 요구조건을 충족하여 이벤트 합전을 이기면 게임상의 동군/서군인 연합구도에 변화가 생긴다(대표적인 예로 이시다가로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하면 아내가 죽어 빡친 상태로 동군에 참전한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어느새 서군에 속해있다.) 그러나 딱히 도쿠가와가 약해지는건 아니다. 또한 이시다가문 전국전은 세키가하라 하나 밖에 없다.
11.2 시바 료타로의 동명의 소설
원제는 '세키가하라関ヶ原'이며 한국에는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전 5권.
소설의 시점은 딱히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이시다 미츠나리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부분이 많으며 소설 오리지널 캐릭터 역시 미츠나리의 첩일만큼 그에 대한 조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까지이며 세간에 알려진 '불의를 싫어하고 타협을 모르는 츤데레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캐릭터성은 이 소설을 통해 확고해졌다고 보면 된다.
이 소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회한 '너구리'이자 산전수전 다 겪은 무장으로 문자 그대로 최종보스 포지션. 미츠나리를 주역으로 서술한 탓도 있어 상대적으로 악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무리한 미화로 거의 이에야스를 부처처럼 묘사한 대망을 먼저 읽은 독자가 이 소설의 이에야스를 접하면 다소 충격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에야스를 무작정 깎아내린 것도 아니고 이에야스의 배포나 장점, 강점도 서술하고 있어서 이에야스가 왜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알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이 오히려 이에야스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한 편이라는 평이 지배적.
자료를 최대한 모으고 등장인물들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편인 시바 료타로의 소설답게 이 소설 최고의 묘미는 히데요시 사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미츠나리에게 붙을지 이에야스에게 붙을지를 고뇌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에 대한 묘사이다. 이 소설은 자못 담담한 어조로 동군과 서군의 여러 인사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왜 동군 혹은 서군에 붙었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으며, 미츠나리가 주창한 대의명분을 따르는 사람/ 히데요시 사후 최강자이자 대세였던 이에야스를 따르는 사람/ 단지 미츠나리를 제거하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붙은 사람/ 어정쩡하게 중립을 지키는 사람/ 가문의 안위에만 급급한 사람/ 이시다와 도쿠가와 모두 물리치고 자기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가까지 다양한 인간 유형들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한국사로 치면 계유정난 전후를 다룬 사극과 비슷한 분위기로 계유정난 시기[36]를 다룬 창작물에서 '실세(수양대군)'와 '명분(단종)' 사이에서 여러 길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히데요시 사후 최강 실세인 도쿠가와를 따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히데요시의 유지를 지키자는 대의명분 아래 뭉친 자들,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길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며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찾아 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묘미이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에서 이시다나 도쿠가와 모두 물리치고 자기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가는 상술된 사항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구로다 죠스이로, 세키가하라 전투후 일단 정리된 일본내 정국을 서술하는 소설 말미를 장식하는 것도 이에야스가 아니라 그이며 그의 표표한 모습도 잘 서술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으나 국내 정식발매본은 2013년 시점에서 거의 절판된 상황이므로 중고 서적 등을 뒤져보자.
11.3 그외 작품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에선 후반 주인공이 테루모토로 교체된뒤 최후반부의 전투이다. 여기선 오다 가문의 잔혹함에 분노한 테루모토가 오다 가문과 싸우다보니 노부나가 사후 오다 잔당을 이끌고 싸우는 이에야스와 세키가하라에서 맞섰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이겼다(...) 역사상으론 명목상의 총대장일뿐 별로 도움도 안됐고 패배한 전투지만 본작의 테루모토가 역사상의 테루모토와는 몇백만년 떨어진 인간이다보니(...) 제대로 된 총대장이 된데다가 이에야스를 영혼까지 털어버린다.
GMT Games에서 만든 세키가하라 : 일본의 통일이라는 보드 워게임에서도 플레이어의 운용에 따라 터질 수도 있는 전투. 게임의 배경 자체가 본 문서와 동일하다. 일반인들도 쉽게 플레이가능한 명작으로 뽑히는 보드게임.
우리나라에서 만든 시뮬레이션 게임인 조선의 반격에서 주 배경으로 나온다. 임진왜란 이후 역사대로 서군과 동군이 싸우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각각 조선과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지원군을 요청한다는 판타지스러운 이야기. 그리고 3국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주 스토리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의 일본 캠페인의 맨 마지막 미션도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다만 주인공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라 사쿠마 키치로라는 가공 인물인 관계로, 정작 전투의 총사령관이었던 도쿠가와가 아니라 키치로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는 느낌.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서는 오다 노부나를 지지하는 서군과 반대하는 동군의 전투다.- ↑ 도카이도 본선 세키가하라역 일대
- ↑ 물론 진짜 규모가 큰 전투는 오사카 전투인데 이것은 야전이 아닌 공성전이다. 원래 공성전은 야전보다 규모를 크게 하기 때문에 예외로 한다.
- ↑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다이묘가 원정에 참전하긴 했다. 히데요시 계열의 다이묘가 주력이라 묻혔지만.
- ↑ 이 늙은 너구리가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낸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3년 후인 1603년 정이대장군(쇼군)이 되어 에도막부를 열고나서 부터다.
- ↑ 에치고는 원래 카게카츠 땅이었는데 히데하루가 전봉을 왔다. 문제는 다른 곳으로 전봉가는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로 전봉오는 다이묘를 위해 한해 석고(石高)의 절반은 두고 가는 게 관례인데, 카게카츠는 전부 다 가지고 가 버렸다. 덕분에 엄청나게 고생을 한 히데하루는 카게가츠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 카게카츠는 양부인 겐신의 유해는 그냥 두고 갔으며 이 유해는 나중에 히데하루가 보내줬다.
- ↑ 이시다 미츠나리의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라는 사고방식은 이 전투에서 서군을 더욱 위기로 몰고 갔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돌아섰다는 정황이 감지된 뒤에도 코바야카와를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던 것.
- ↑ 최신 측성 기술로 만들어져 철포 공격에 대비한 천수각과 해자를 두룬 농성전에 유리한 성
- ↑ 이시다 미츠나리는 결착을 보려면 8개월 이상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고, 2년 이상 10년 이상은 걸릴 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있었다. 구로다 간베에, 다테 마사무네처럼 이 싸움이 오래 걸릴 거라고 내다보고 어부지리 전략으로 이긴 편을 제압하고 천하를 얻을 계획을 세운 사람도 있었다.
- ↑ 다른 주장으로는 반대가 아니더라도 동원할 병력 자체가 없었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특히 노량해전 당시 사츠마 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이를 미처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 이때를 계기로 역사에서 퇴장하였는데, 전사설과 생존설이 분분하다.
- ↑ 시마즈 요시히로는 위에서 말했듯 어쩔 수 없이 서군에 붙어있었고 미츠나리에게 사사건건 무시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
- ↑ 애초에 데루모토는 전투기간 내내 오사카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 ↑ 이로 인해 후세에서 재상님의 빈 도시락(宰相殿の空弁当)이라는 조롱조의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 ↑ 당시의 조총 사격력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세키가하라가 짙은 안개와 총성과 총의 연기으로 가득 차있었기에 후세의 창작이라는 주장과 수 만명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전투의 기록에 있고 수 천명이 한꺼번에 쏘아대는 총소리는 충분히 위협적이기에, 거기다 히데아키 쪽은 전투와는 동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좀더 눈에 띌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그냥 어린놈이 약속을 안지키고 망설이니까 이에야스가 될대로 되라는 심사로 삐져서 쏘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 ↑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구 등 약 4천 병력.
- ↑ 후시미 성 전투를 기점으로 세키가하라까지는 2달 남짓한 기간이다.
- ↑ 아직 모리가문의 병력은 아무런 피해가 없이 오사카성에 주둔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까지 데리고 있었던 만큼 아직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 오시 성에서는(히데요시의 지시였다는 변호는 가능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공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서 엄청난 노동력을 들여 억지로 수공을 감행해 아군에 피해를 냈다.
- ↑ 나중에 모리가 엄청나게 감봉을 당한 뒤 억울해했던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 ↑ 오죽하면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선봉인 자길 제쳐두고 이이 나오마사가 진군했다고 하자 노발대발했다. 이걸 소설 같은데서는 이에야스에게 의심받았다고 분노한 걸로 묘사하지만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의 시종 가신도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보기보단 이에야스의 재촉이 매우 불쾌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뜩이나 이에야스가 끼어드는 것이 싫었을테니. 물론 이에야스 입장에선 너 자꾸 공격 안하면 내가 직접 나선다? 는 식으로 자극하면서 동시에 선봉으로서의 공훈을 가로채갔다.
- ↑ 동군의 다이묘들은 서로 선봉을 서겠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사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일사천리로 움직였고, 야망이 커서 통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다테 마사무네마저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능수능란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 ↑ 행주대첩때 이시다 미츠나리 보여준 군재 무능 때문에 2만 가까운 병사를 잃게 만들었다는 그 이야기는 이에야스도 알고 있었다.
- ↑ 타케나카 한베에의 아들이다
- ↑ 애초에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더라도 모리 가문만은 보존해달라는 조건으로 동군에 가담하였다. 도쿠가와는 킷카와 히로이에의 탄원(담판)은 물론 데루모토의 아들과 첩을 인질로 받고 나서야 그 선에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 ↑ 그 영지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넘어갔다.
- ↑ 실제로 요시히로는 나중에 치매에 걸려 말년이 비참했다고 한다.
- ↑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 ↑ 뜻은 사랑받는 시종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문신 김안로와 대등한 권신이라는 뜻에 가깝다.
- ↑ '치부경'은 관직명
- ↑ '우문승'은 관직명
- ↑ '태장승'은 관직명
- ↑ '내부'가 관직명
- ↑ 관직명
- ↑ "골 곡"을 "밭 전"로 착각한 경우가 아닐까 짐작가는 부분이며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작위인 형부경을 지낸 적이 있다.
- ↑ 제작비 문제 등으로 애초에 전투를 제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다.
- ↑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수양대군이 실세가 된 것은 계유정난 이후이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를 다룬 사극들 가운데 단종 친화루트를 탄 경우는 수양대군 세력의 입지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크다. 아무리 사서가 승자에 대한 미화라고 해도, 역사적 의미에서 계유정난은 '약소 계파가 건곤일척을 노리고 저지린 도박'이지 강대 계파의 확인사살 내지는 양강의 정면충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