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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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12대 계왕 미상13대 근초고왕 부여구14대 근구수왕 부여수
시호근초고왕(近肖古王) / 조고왕(照古王) /
초고왕(肖古王) / 속고왕(速古王)
부여(扶餘)
초고(肖古) / 구(句) / 여구(餘句)[1]
생몰년도음력? ~ 375년 11월 (미상)
재위기간음력346년 9월 ~ 375년 11월 (약 30년)

백제의 전성기를 연 임금.

1 명칭

명칭한자출처국가시기비고
근초고왕近肖古王삼국사기고려1145년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
여구餘句진서644년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왕(372년)
조고왕照古王고사기일본712년일본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왕(396년?)
초고왕肖古王일본서기일본720년"
속고왕速古王신찬성씨록일본815년"

동성왕 이전까지 백제의 왕 대다수가 이름을 그대로 왕호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이름은 초고-조고-속고로 추정된다. 셋은 의미상 동일한 단어의 다른 표기인데, 고대 한국어에서 같은 파찰음인 ㅊ-ㅈ-ㅅ음의 상호호환성은 신라의 김흠순(純)과 김흠춘(春), 용수(樹)와 용춘(春), 관창(昌)과 관장(壯)과 같은 이표기 사례들을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왕실의 성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점으로 미루어, 진서의 기록에 따라 성을 (부)여, 이름을 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구는 (초)고의 이표기라고도 한다.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담덕'을 '안'이라 표기한 중국의 이표기를 볼 때(...)

대수왕호한자대수왕호한자
4대개루왕蓋婁王21대근개루왕近蓋婁王
5대초고왕肖古王13대근초고왕近肖古王
6대구수왕仇首王14대근구수왕近仇首王

백제의 왕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대응이 이루어지므로, '근초고왕'의 근(近)이 이전의 왕과 구분짓기 위해 부기된, 서양의 '2세'와 비슷한 의미의 글자로 추정된다. 고구려에서도 과 이를 따서 위궁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다른 일설에는 고이왕계인 계왕을 물리치고 초고왕계 왕통을 복구해서 왕명이 근초고왕이 된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개루왕의 용례와 무엇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단순한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함부로 결론짓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어떤 역사왜곡 드라마에서는 다 무시하고 여구에서 근초고로 개명. 개명 참 좋아하는 드라마다.

2 개요

백제의 제13대 국왕/건길지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346년에 즉위해 375년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재위 20년부터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원년부터 즉위 19년까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왜곡된 기록을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의 업적이 드러난다. 백제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지 알 수 있는 사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왕인데 총 재위기간의 2/3에 가까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2]

흔히 알려진 업적은 일본과 어울리다가 고구려와 싸워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고, 그러던 와중에 고구려 측 고국원왕이 화살 맞아 사망하신 정도...인데, 사실 그의 업적은 고구려 전쟁만이 아니다. 바로 그 직전까지 무수한 정복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며(상당 부분에서 신뢰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개시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백제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백제를 고구려와 맞서는 한 축으로 당당히 성장시켰다.

오늘날 근초고왕이 대한민국에서 평가받는 모습은 한국 고대사가 평가받는 것처럼 과장과 축소로 얼룩져 있다. 처음부터 근초고왕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사료부족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색안경을 끼고 본 탓도 크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신라, 가야, 일본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를 맺으면서 남한에서 독자적인 패권을 구축했다. 이것은 이후 광개토태왕의 간접적인 복속 정책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적 연맹국가에서 국제적 패권국가로 다시 통일적 영토국가로 발전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포문을 열었다.

개인적 성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에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보건대 근 20년 동안이나 힘을 비축하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치밀한 국제정세의 분석과 조정을 통해 최소한의 전력 소모로 단번에 패권을 휘어잡는 것을 보면 대단히 치밀하고 경제적인 인물이 아니었을까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사람의 성격을 원대한 식견이 있는(有遠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진흥왕과 비견될만하지만,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백제 10성을 점령하는 등 치세를 전쟁,정복,전쟁,정복으로 보낸 진정한 전투광정복군주이며, 진흥왕도 고작 10대 후반~20대 때 영토를 즉위 시점의 2~3배로 뻥튀기시켰지만 근초고왕은 20년 동안이나 힘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 광개토대왕과 진흥왕이 젊은 패기와 뛰어난 군사적 식견으로 전장을 휩쓰는 패왕 타입의 군주였다면 근초고왕은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전장에 나서는 신중하고도 치밀한 성격의 군주 였을 가능성이 높다.

3 생애

3.1 내치의 안정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ㅡ 고등학교 과정 국사 교과서

  • 이 목차에서는 그의 내정을 다룬다.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 백제는 북쪽으로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고구려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런 마당에 백제의 왕통은 분열되어 매우 불안정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이 서로 계통이 다른 고이왕과 비류왕의 경우 기록에서 주장하는 그대로 나이를 추산하면 100살이 훌쩍 넘는 엄청난 수명을 자랑한다.

재위기간왕호비고왕호비고왕호비고
128~166개루왕선왕의 자
166~214초고왕선왕의 자
214~234구수왕선왕의 장자
234~234사반왕선왕의 장자
234~286--고이왕개루왕의 제2자(?).[3]
286~298--책계왕선왕의 자. 전투 중 사망
298~304--분서왕선왕의 장자. 암살당함
304~344----비류왕구수왕의 제2자(?).[4] 민간인
344~346--계왕분서왕의 장자--
346~375----근초고왕비류왕의 제2자

따라서 초고왕에서 이어지는 왕통을 초고왕 계열, 고이왕에서 이어지는 왕통을 고이왕 계열, 비류왕에서 이어지는 왕통을 비류왕 계열으로 완전히 다른 가문으로 분리해서 보기도 하고, 또 일설에는 비류왕을 구수왕의 아들은 아니어도 손자 정도 되었을 것이므로 비류 왕통은 초고 왕통의 연장이라 주장하거나(대개 이쪽이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또 일설에는 근초고왕까지도 비류왕과는 다른 가문이라고 주장하는 등 완전히 중구난방이다.

어찌되었든 근초고왕 바로 이전의 계왕이 고작 2년 동안 즉위하다가 왕위를 넘겨줬을 정도로, 당시 백제의 왕통이 제대로 깽판이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근초고왕 이후 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 등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으로 선명히 가닥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개 민간인에 불과하던 선대의 비류왕이 근 40년의 기나긴 치세 동안 안정적인 선정과 반란 진압으로 기반을 튼실히 닦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근초고왕이 재위 중반에 이르기까지 근 20년 동안의 세월을 자신의 왕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데 치중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때 근초고왕 이하 왕실의 정치적 파트너는 바로 진씨(眞氏) 가문이었는데, 바로 이 진씨 가문은 비류왕 때 진의(眞義)가 내신좌평이 된 이래 근초고왕 때 진정(眞淨)이 왕후의 친척으로 조정좌평이 되며, 근구수왕 때 진고도(眞高道)가 왕의 장인으로 내신좌평이 되는 과정을 거치며 공히 백제 최고의 외척이자 엘리트 귀족 가문이 되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ㅡ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

이처럼 근초고왕과 혼인으로 연결된 진씨 가문은 비류왕 계열의 근초고왕이 고이왕 계열의 계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는 데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러한 진씨 가문의 독주는 곧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한 듯하고, 이후 일본서기 등 근초고왕의 재위 후반부 활동에는 진씨를 대신해 사씨(沙氏)와 목씨(木氏)가 대대적으로 등장하여 근초고왕의 대외활동에 공헌하게 된다.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체로 이 서기를 역사서로 생각하지만, 이 서기가 단순히 명령과 문서의 성문화를 뜻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역사서라는 견해가 주류.

3.2 목지국 정복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ㅡ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 이 목차에서는 그의 외정 중 마한 관련 기록을 다룬다.

근초고왕의 업적 중 가장 불분명한 부분. 즉 이 단락의 내용은 사실 싹 날려야 할 수도 있다. 마한 정복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위에서 보듯 원문은 온조왕본기에 있다. 우선 사학자들의 의심하는 것은 온조왕 대의 강역 문제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ㅡ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13년

'패하', '웅천', '큰 바다', '주양'라는 영역은 대개 예성강, 금강(공주), 서해, 춘천 혹은 철원으로 비정된다. 문제는 경기도 ~ 충청도 영역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나 되어서야 가능한 이 영역과 달리, 3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서부는 55개의 마한 소국이 꽉 들어찬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지명을 다른 곳에 비정해 보고자 해도 뚜렷한 경계가 되는 강 이름이 패하, 대하, 한수, 웅천 등 몇 개씩이나 등장하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위치는 한정되어 있다.

백제의 이 영역을 인정하고 마한의 소국을 비정할 경우 배치할 곳도 마땅치 않을 뿐더러, 중국 사서 상에는 이렇게 넓은 영역을 차지한 국가가 왜 등장하지 않는지도 해명하기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경우에도 마한 정복은 기리영 전투가 이루어진 3세기 중엽의 고이왕 대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서』에서도 3세기 후반에 관련해서는 '마한'의 기록을 남기고 있고 실제로 수차례 '마한'의 휘하에 있는 국가들(다만 후에 설명할 신미제국 등 독자 세력도 나타난다)이 조공하는 사례가 발견되기 때문에, 고이왕 대에 마한을 정복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고이왕 설에서는 이 마한을 백제로 바꾸어보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왜 굳이 백제가 아닌 마한의 이름으로 보내야 했는지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무엇보다 고고학적으로 목지국으로 비정되는 천안 지역의 독자적 문화가 크게 쇠퇴하는 것이 4세기 중반이기 때문에 근초고왕설이 많은 지지를 받는 것.

다음 단락의 일본서기 내용을 120년 인하해 끌어다 쓴다고 해도 근초고왕의 재위 2년부터 18년 사이에는 큰 공백이 남는다. 목지국 정복을 근초고왕이 마쳤다고 보는 주장에서는 이 시기를 목지국 정벌의 때라고 비정한다. 그러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추측에 근거하는 점이 많기 때문에, 일단 온조왕본기의 연대를 함께 기록한다. 이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앞서 말했듯 근초고왕 대로 기록을 옮겨보자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아래의 서술은 위의 추정에 따른다.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ㅡ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24년

웅천으로 비정되는 공주 인근과 목지국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천안 지역은 50km를 조금 넘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짧은 거리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먼 거리는 아니다. 이 지역에 임시적인 목책이니마 축성이 시작되는 것은 마한 왕에게 굉장한 압박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과거의 권위를 인용해 이를 저지해 보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 왕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일단 이에 응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백제는 기이한 징조를 들어 마한 평정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백제는 마한을 병탄하려 했던 것이다.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ㅡ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25년

그리고 맨 위에 기록했듯, 이듬해(기록상 온조왕 26년) 가을 ~ 겨울에 백제는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 이 때도 대놓고 마한을 공격했을 경우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인지 백제 왕은 사냥을 가는 척하면서 공성에 들어가 천안을 병합한다. 버티던 2개의 성도 1년 뒤에 멸망하여, 백제는 그 백성을 한산 근처로 옮겼다고 한다(기록상 온조왕 27년).

7 ~ 8년 뒤(기록상 온조왕 34년) 마한의 장수 주근이 우곡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5000여 명을 이끌고 친정하여 이를 직접 토벌한 뒤 자살한 주근의 시체를 베고 아내도 죽였다고 한다. '마한'의 소거에 근초고왕이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이 시대 이후 마한의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진다. 일본서기에 '마한'이나 '진한'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우며, 5세기 책봉 명에 마한, 진한, 임나, 가라, 백제, 신라를 끼워넣으려던 일본의 시도로 볼 때 마한이 실존했기 때문일지 아니면 일본 자신의 세계관에 편성하기 위해서인지도 알 수 없다. 이 또한 근초고왕 시대 마한의 정복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다만 목지국 정벌 내용은 고고학에 근거한 추측의 내용이기 때문에 아직 불명확한 면이 없지 않다. 한편으로는 '(준왕의) 한왕(韓王) 혈통은 끊어졌다'는 3세기 당시 삼국지의 기록과 박혁거세 시대 이후 등장하지 않는 서한왕(西韓王)의 소멸이 1세기 초 온조왕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때문에 삼국사기를 온전히 신뢰하려는 측에서는 이 단락의 내용을 전혀 신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마한 자체가 원체 기록이 부족한 미지의 영역이다 보니...예를 들어 임용한은 온조왕대의 마한 정벌을 사실로 신뢰하되, 단지 '마한의 완전 멸망'이 아니라 '한차례 휩쓸고 종주권을 확인하는 수준'의 정벌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까지 마한의 국호가 등장하는 것도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풍납토성의 발굴로 근초고왕 때가 되서야 마한이 정벌을 처음 당했다는 주장은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3.3 남방의 평정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혹은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ㅡ 《일본서기》 진구황후

  • 이 목차에서는 그의 외정 중 남방경략을 다룬다.

이 부분은 사실 일본서기의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특히 '5읍/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그동안 줄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 한국 측 사학자의 분석에 의해 이 정벌을 주도권자를 근초고왕으로 보는 시각이 크게 대두되어 신빙성을 얻었다. 즉 근초고왕의 업적이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되었다는 것. 예를 들면 야마토보다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가 '남만'이라고 적혀있다.

364년, 갑자년에 근초고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 세 사람을 가야 지방의 탁순국에 보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여기서 탁순국왕에게 일본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가 완곡하게 거절당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수집하여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가야 지방의 각 소국과 교섭을 시도하는 등 사전 정지작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366년, 시마-노-스쿠네[5]라는 야마토[6] 측 인사가 탁순국왕과 만나 이상과 같은 백제의 움직임을 접하게 되었다. 시마는 내친김에 종자 이하이와 탁순사람 과고 두 사람을 백제로 보냈는데, 근초고왕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며 오색 비단과 각궁 화살 및 철정 40매를 이하이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서 여러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백제의 경제력을 과시하며 야마토를 낚아보려 한 것이다.

367년, 이번에는 근초고왕이 보낸 구저, 미주류, 막고가 신라의 사신과 함께 야마토에 도착했다. 백제의 사신을 맞이한 야마토 조정은 감동의 도가니. 이 자리에서 구저가 야마토로 오는 길에 있었던 신라의 횡포를 까발리는데, 간단히 말해 신라가 구저 일행에게서 을 뜯었다는 것.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신라[7]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 구저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ㅡ 《일본서기》 진구황후 47년

당시 신라는 가야와 야마토 사이에서 교역을 방해하며 이익을 취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한반도나 중국에서 물자와 문물의 수입이 절실하던 일본 세력은 걸핏하면 신라로 쳐들어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마당에 신라에서 야마토로 가는 백제의 사신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귀한 물건을 가만히 놔두었을 리 만무(...)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안 그래도 신라에 시달리고 있던 야마토는 이 사건을 통해 제대로 플래그가 서게 되었고, 진구황후는 함께 온 신라의 사신을 책망하는 데 이어서 '타케우치-노-스쿠네와 의논하고 치쿠마-노-나가히코[8]를 사자로 보내라'는 신탁을 받는다.

369년, 근초고왕은 드디어 행동에 나선다. 사백·개로가 백제 측 대표가 되어 탁순국에 이르고, 여기에 장군 목라근자·사사노궤가 군사를 이끌고 따라갔다. 일본서기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곱 나라를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일본 측 대표로는 아라타-노-와케와 카가-노-와케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어서 서쪽(전라도)으로 군대를 돌려 고해진에 이르러서 남만 침미다례를 격파하고, 지금의 전북 평야 지대에 해당하는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혹은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의 항복을 받았다. 과거 고해진을 강진, 침미다례를 해남으로 보고 이때 백제의 세력이 전남 땅끝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유물에 따른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이후에도 전남에는 독자적인 세력이 존속했으며 합병은 나중에, 훨씬 느슨한 형태로 백제에게 병탄되었을 가능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나아가 고사산과 벽지산에서 일본 측 대표로 온 치쿠마-노-나가히코와 연이어 국교를 맹세한다.

침미다례는 흔히 『진서』 장화전의 '신미제국(新彌諸國)', 즉 20여 개국과 함께 나타난 '신미국'과 동일시되는데, 혹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의 '분신리아불예(濆臣離兒不例)'로 보기도 한다(다만 이것은 같은 기록의 신분첨국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이 지역은 3세기 기리영 전투로 인한 목지국의 쇠퇴 이후 독자적으로 성장해 서진에 조공한 바 있는데, 아마도 전남 중에서도 서부, 즉 황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항로가 꺾이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교역의 이익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제주도설도 존재하지만, '탐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별도의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설의 확장은 어려워 보인다.

침미다례의 문제는 특히 이 원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유난히 침미다례에 대해서만 '남만'이라고 하여 경멸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침미다례를 '도륙, 도살(屠)'했다고 해 아예 갈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주변의 4읍/5읍이 항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근초고왕은 막 성장하던 전남의 독자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 버렸고, 이후 잔영으로 남아 있던 '마한'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 다만 전남 지역은 고고학상 계통이 경기-충청-전북으로 이어지는 마한과 독립되어 있고, 생각보다 백제의 남방 진출은 좀 늦다. 공주의 경우도 4세기 중엽이나 5세기 안밖에 들어야 어느 정도 세력권에 들어온 것 같다. 사실 금강 이남 및 서해안 지역 백제 문화권에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서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종주권을 잡았다'는 설명에서 그치면 될 것이다.

이후 백제에서는 구저를, 야마토에서는 치쿠마-노-나가히코를 보내 양국 사이에 오니가니 사신 왕래가 이어지다가 362년에 이르러서는 칠지도와 칠자경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사기에는 아직기가 야마토로 건너와 천자문논어를 가르친 시기를 이 때라고 하지만, 일본서기는 아직기의 도일을 한참 뒤인 404년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실질적으로 백제가 아니라 가야 계통으로, 백제 계통의 문물은 5세기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일본에 실질적으로 문물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유혈사태로 남한에서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과 일원적인 패권을 확립하고, 이로서 국제적인 외교분쟁이 해결되어 야마토에 가야의 문물이 안정적으로 유입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마한 정복이 근초고왕 대에 이루어졌다는 설을 취할 경우 근초고왕은 재위 기간 내 마한 정복하고 남방까지 수복하고 고구려까지 때려잡은 초인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남방 전쟁과 대 고구려 전쟁은 같은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실성에 다소 논란이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라근자목만치의 연대 문제도 이 시기에 얽혀 있으며, 앞서 말했듯 고고학적으로 백제계 문화가 전혀 침투하지 못한 것이 확인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로 기록의 연대를 한 갑자 더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3.4 고구려 전쟁

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ㅡ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이 부분에서는 그의 외정 중 북방경략을 다룬다.

이처럼 근초고왕이 남방경략의 위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있을 즈음인 369년 9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갑작스레 2만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진군해 치양에 주둔하며 민가를 약탈했다. 이는 남한의 패자로 성장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더불어 근초고왕이 남방경략에 매진하는 사이 혹은 남방경략을 완수한 직후 북방에 생긴 군사적 맹점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분쟁은 격화되어, 2년 뒤에는 재차 치고 내려오는 고구려 군대를 패수 위에서 역관광보내며 평양성을 포위하여 고구려왕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근구수왕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죄를 짓고 도망간 사기라는 인물이 백제로 돌아와 '정예군은 고국원왕 근처의 군대뿐이므로 그들만 박살내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밀고하면서 이에 따른 공격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근구수왕은 수곡성 서북까지 진군했으나 막고해가 도가의 말을 인용해 그만둘 것을 주청했고 이에 정벌을 마쳤다고 한다. HIT & RUN

이 일로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쟁은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린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지속적인 공방을 주고받게 되며, 진사왕으로 인해 약화되던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는 382년 사지비궤팀킬과 396년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3.5 말년의 기록

근데 이 왕도 말년은 그다지 안좋다. 고구려에 힘쓰는 사이 신라가 서서히 강성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고구려에게 375년 수곡성을 빼앗기고 흉년까지 들어 보복도 못했다. 그리고 죽었다. 사실 징크스라고 할 만한 게 백제 왕 치고 말년이 좋은 왕이 거의 없다.[9]

무엇보다 가장 큰 굴욕은 373년 내물왕 본기의 독산성 관련 기록. 당시 독산성은 300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고, 근초고왕은 이를 돌려주기를 요청했으나 말발에 까이고 끝. 다만 근초고왕 본기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ㅡ 《삼국사기내물왕 본기 18년

그래도 앞서 말한 고흥의 서기 기록이나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은 주목할 만하나, 이어진 근구수왕 대부터 백제는 계속해서 하락세를 걷게 된다. 안습(...)

4 평가

<이희진의 평가>

근초고왕은 이런 상황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상황이 좋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에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까지 이런 경향에 휩쓸리면 뒤끝이 좋지 않다... 근초고왕은 한 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지도자답게, 이 상황에서 구사해야 할 적절한 전략을 찾았다... 여기서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근초고왕의 신중함과 치밀함이 엿보인다... 근초고왕의 전략에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이 있었고, 그 덕분에 애초의 구상 거의 그대로 실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초고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백제와 고구려가 양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국제 정세에서 백제를 한 축의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꼽아야 할 것이다. -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5 이설

이도학이 주장한 '만주의 백제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를 정복'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만주 한가운데서 부여를 정벌하고[10]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를 정복한 다음 마한과 가야를 평정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성 백제의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한성 백제가 이미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잃은 상태.

5.1 근초고왕과 요서경략

그 외에 중국,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이용해 부를 쌓았으며, 요서와 산둥 반도, 규슈 지방까지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상 그의 공적은 백제-가야-왜를 잇는 세력권(이것에 대해 경제적 성격에서 한정 할 것인가 정치적 성격까지 확장해야 할 것인가는 의견이 나뉜다.)을 형성한 것이다. 물론 환빠들을 비롯한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륙백제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중국 남조에는 요서 경략 기록이 있는데, 정작 그 요서와 붙어있는 중국 북조에는 그 기록이 없다. 그래서 대체로 근초고왕이 마한 정복을 거의 완수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호남지역을 제압하지 못하고 단순히 가장 유력한 지배세력이었을 거란 의견이 강하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요서경략설을 참고할 것.

덧붙여 더 나아간 타스틱한 이론에 의하면 근초고왕의 백제는 당시 지구권 인류 전체를 통틀어 최강이었다는 놀라운 설까지 튀어나왔다. 고구려왕을 전사시킨 백제의 강력한 군세는 중국대륙은 물론이요, 당시 혼란에 빠져있는 로마마저 능가할 수 있다는 식이다. 정말 대단한 상상이다(...).

또 당시 백제의 기록 중 일식 관측 기록이 요서지방에서 관측했어야지만 나오는 수치로 된 것이 있는데, 사실 그것도 별 의미가 있는 수단은 아니고 오차도 많기에 믿기는 곤란하다. 그냥 신라방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6 오늘날의 근초고왕

백제의 위대한 정복군주로 알려져있다.

6.1 오늘날 각종 매체에서의 근초고왕

6.1.1 소설

일약 환빠의 대반란. 근초고왕 대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주장은 차라리 애교다. 크고 아름다운 백제의 대륙 영토에 심지어 일본까지 정복하였다.[11].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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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인
    • 송은일의 괴작소설. -이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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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초고왕
    • 대륙백제는 여기도.
  • 백제엔 근초고왕이 있다
    • 여기도 대륙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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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륙의 한
    • 이문열이 쓴 소설. 위 창조적인 작품들과는 격이 다르다 착각하지 말자(...) 전체적인 스토리는 근초고왕에게 밀려난 계왕의 왕자가 선대의 원한을 풀고 요서로 이주해 중원의 광풍 속에서 꿋꿋이 백제인들의 영역을 마련한다는 내용으로, 역사상으로도 잘 끼워맞춰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드라마 '백제영웅 근초고왕'의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내용은 드라마보다 훨씬 개념이다! 본격 서로 팀킬하는 원작과 드라마 심지어 드라마 편찬 이후 새로 낸 재간본의 서문에는 드라마의 원작 변형에 대한 불만이 실려있다. 물론 책 내용에도 요서경략이 근초고왕 때라는 점을 비롯해 몇 가지 오류가 있긴 하지만, 백제사에 대한 역사 지식을 각권 부록으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탄탄한 제반 지식이 돋보인다.
  • 고구려(소설)
    • 김진명이 쓴 판타지 소설에서는 근초고왕의 본명인 부여구로 나오며 병사들을 위해 솔직하게 항복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첫 등장. 고구부가 찾아 다녔던 천하의 영웅 중 1명이나 역시 높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후에 고구려로 도망간 백제의 죄인을 돌려달라는 구실로 고구려에 전쟁을 일으켰고 휘하 병사들이 고국원왕을 죽이나 고구부의 협박에 의해 군사를 물리게 된다.

6.1.2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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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역사 개념은 위 지도에 보이는 대로 막장. 시청자들에게 털리면서 갑옷 고증 외에는 남긴 게 없다거나 보는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평까지. 이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그렇다면 근초고왕(드라마) 항목 참조.

6.1.3 교양서

  • 전쟁의 발견
    • 이희진의 교양서. 역시 전공자이니만큼 이상의 창조적인 작품들과는 완벽히 격이 다르다. 위 항목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1부에서는 근초고왕과 광개토왕을 위시한 삼국시대 중요 전쟁사가 나열되고, 2부에서는 고대 전쟁을 스타크래프트에 비유하여 굉장히 쉽고 혁신적으로 고대 전쟁의 기초 개념을 설명한다.
  •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 이희진의 교양서. 상당히 전작의 우려먹는 티가 나지만, 그래도 드라마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측면이 간간이 발견되어 그 의의를 둔다. 그나마 요사이 제대로 정신차리고 쓴 책은 이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다만 1부의 근초고왕에 비해 2부의 성왕은 거들뿐...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7 기타

7.1 근초고왕 관련 사료의 풍부함

일각에서는 근초고왕 드라마를 옹호하는 일환으로 근초고왕 관련 사료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다른 백제 왕 관련 사료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편이다.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책계왕, 분서왕, 구이신왕 항목을 돌아본 다음 이 문서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자. 엄밀히 말하자면, 한 일에 비해 삼국사기의 기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 점 때문에 어이없이 왜곡되고 뒤틀려있기는 하지만 사료의 원형이 추측 가능한[13] 일본서기를 연구자료로 활용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게 막장 국뽕 창작물들을 정당화해주진 않는다.

당장 중국과 일본 기록에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내시는 왕이고, 왜곡된 모습이나마 대외활동에 대한 모습은 당시 인물들의 이름, 그들이 한 대사까지 남아있다.[14] 비록 재위 초반이 잘려나갔지만 어찌되었든 지금과 같은 막장 상황보다는 훨씬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료 부족을 통한 드라마 및 기타 창작물 옹호론은 말 그대로 비겁한 변명일 뿐이니, 제발 책을 읽자(...)

7.2 근초고왕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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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유적인데 이 중 가장 큰 석촌동 제3호분은 4~5세기 백제 왕릉으로 보이며 학계에서는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그냥 추정이고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석촌동 고분군 문서 참조.

7.3 삼국사기 기록

1년(346)9월에 근초고왕이 즉위하다.
2년(347)1월에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15]
21년(366)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23년(368)3월에 일식이 일어나다.
신라에 좋은 말 두필을 보내다.
24년(369)9월에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5천여 명을 죽이다.
11월에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하다.
26년(371)패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다.
10월에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다.
27년(372)1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하다.
7월에 지진이 일어나다.
28년(373)2월에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7월에 청목령에 성을 쌓다.
30년(375)7월에 고구려가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30년(375)11월에 근초고왕이 죽다.

고구려와 관련된 것을 빼면 반도 안 남는다(...).

7.4 일본서기 기록

어디까지나 일본 중심으로 쓰인 사서라는 것을 명심하고 보자. 액면 그대로 봐서 해석하면 몹시 곤란하다.

진구황후 46년
(246, 366)[16])
3월에 시마(시마-노-스쿠네, 斯摩-宿禰/志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내니, 탁순국왕이 지난 갑자년 7월에 백제 사람 구저, 미주류, 막고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으니, 길을 안내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고 말하다. 이에 시마가 종자 이하이와 탁순 사람 과고를 백제에 보내니, 초고왕이 후하게 대접하고 각종 보물을 과시하며 오색비단과 각궁 화살과 철정을 이하이에게 주다.
진구황후 47년
(247, 367
4월에 백제왕이 보낸 구저[17], 미주류, 막고와 함께 신라의 사신이 와서 조공하다. 태후와 태자가 기뻐하면서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왔는데 선왕이 보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고 말하자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다. 구저 등이 중간에 신라에서 공물을 빼앗아 강제로 바꾸었다고 말하다. 이에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치쿠마(치쿠마-노-나가히코, 千熊-長彦)[18]를 신라와 백제에 보내어 조사하다.
진구황후 49년
(249, 369)
3월에 아라타(아라타-노-와케, 荒田-別)와 카가(카가-노-와케, 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와 함께 탁순국으로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다. 원군을 청하자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 개로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다.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심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다.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의류촌으로 와서 아라타와 목라근자 등을 만나자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항복하다. 백제왕과 치쿠마가 벽지산과 고사산에 올라 번국의 맹세를 하고, 치쿠마를 도읍으로 데려가 후대한 뒤 구저와 함께 보내다.[19]
진구황후 50년
(250, 370)
2월에 아라타 등이 돌아오다.
5월에 치쿠마가 구저와 함께 돌아오다. 다사성을 백제에게 주어 오가는 역으로 삼게 하다.
진구황후 51년
(251, 371)
3월에 구저가 다시 조공하러 오다. 태후가 태자에게 백제와 친할 것을 당부하다.
구저를 치쿠마와 함께 보내다. 백제왕 부자와 번국의 맹세를 하다.
진구황후 52년
(252, 372)
9월에 치쿠마가 구저와 함께 돌아오다. 구저가 칠지도와 칠자경 등 여러 보물을 바치다. 백제왕이 손자 침류왕에게 일본과 친할 것을 당부하다.
진구황후 55년
(255, 375)
백제 초고왕이 죽다.
  1. 중국 《진서》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성이 "여"는 "부여씨"를 축약한 성씨이고, 이름이 "구"는 초고의 축약한 이름으로 추정된다.
  2. 여담으로, 발해의 역사도 여러 가지 이유로 부실하기로 유명한데,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대조영에 관한 기록이 713년 국호변경 외엔 나라를 어떻게 이끌었는지에 대한 남은 기록이 없다.
  3. 즉위 당시 개루왕이 죽은 지 68년 뒤, 사망 당시 개루왕이 죽은 지 120년 뒤. 기록대로라면 개루왕의 유복자여도 120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4. 즉위 당시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 뒤, 사망 당시 구수왕이 죽은 지 110년 뒤. 기록대로라면 구수왕의 유복자여도 110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5. 노 이하는 존칭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이렇게 존칭을 마구잡이로 써놓아서 조금 난감.
  6. 이 대상이 구체적으로 야마토가 확실한지는 해석의 여지가 좀 있다. 일본서기가 이주갑인상 등 연대 인상을 진행하면서 중간 연대의 역사가 모조리 소급당하거나 사라져, 실질적으로 3세기 중후반의 중국 조공과 366년 백제-일본 관계 기록 사이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인 침략 기사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 그러나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이 즈음 야마토가 일본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7. 경남 양산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연구 중. 일단 신라인 건 확실하다.
  8. 백제 기록에 직마-나-나가비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9. 사실 삼국시대 때 전성기를 이끌었던 정복군주 중 근초고왕만 말년이 안좋다.
  10. 혹자는 요서진출후 부여를 공격했다고도 하는데 남아있는 기록이 하도 부족해서(...)
  11. 주장이 엇갈리는데 '일본은 겉은 아니지만 속은 백제의 식민지 였다.' VS '백제가 일본을 정복하다 중단 했다'. VS '그딴거 알게뭐냐 백제가 뭔 초대강국이라고 그건 사실이 아니다.' 란 주장이 얽히고 설키고(...) 난전을 벌이고 지금까지 앞프로도(...)
  12. 내용상 교양서라고 해야겠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13. 가령 진구황후 조의 기사들은 연대를 늦추고 기사의 주어를 왜(진구황후)에서 백제(근초고왕)으로 바꾸는 것으로 실제 사건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14. 광개토대왕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광개토대왕휘하에서 활동한 장수들의 이름이 얼마나 남아있던가? (모두루나 유주자사 진 정도. 그것도 정식 기록이 아닌 무덤의 묵서명을 통해...) 광개토왕 시대 고구려의 인물들이 한 말 가운데 남아있는 것이 있던가?
  15. 문제의 공백기간이다.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16. 뒤에 붙인 연도는 이주갑인상으로 왜곡된 연도를 다시 고친것이다.
  17. 일본어로는 쿠테이(くてい)라고 읽는 것으로 보아 중국 사서의 '구태(仇台)'와 같은 이름으로 보인다.
  18. 백제기에는 직마-나-나가비궤(職麻那那加比跪)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9. 이 대목에 주의가 필요한데, 대부분 학자들은 연대를 120년 뒤로 늦추고 정벌의 주체를 진구황후가 아닌 근초고왕으로 바꾸어서 근초고왕의 정복으로 해석한다. 백제계 도래인들이 가져간 백제의 사료들을 일본서기 편찬에서 여러 변조를 거쳐 이용했다고 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