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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항목 : 북한의 대남 도발사, 사건 사고 관련 정보, 납북
1 개요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되고 최은희를 찾으러 온 신상옥 감독까지 동년 7월 19일에 납북된 사건.
2 납북 과정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1] 후 안양예술학교, 즉 현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직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 중이었다.
그 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사람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한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마카오로 넘어갔다가 뜬금없이 중국 본토로 가는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달라고 외쳤다가 결국 이들이 준비한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기절했다고..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년을 같이 지내온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만다.[2] 현지에서 신필림 홍콩지사를 운영하던 교포 이영생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것. 거기에 신상옥의 지인이자 신필림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던 김규화가 그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서 거짓 일정을 만들어준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는 귀국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을 복역했다.
납북 루트는 홍콩에서 당시 북한 공작원의 아지트였던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간 것. 북한인의 홍콩 입국은 까다로운 관계로 일본으로 귀화한 조총련계 인사들을 앞세웠으며 이들은 일본 여권을 들고 있어 홍콩 이민국의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홍콩 경찰은 형사조사국(CID)을 앞세워 두 사람을 중국 본토로 끌고 간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추적했고, 이들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3 월북 루머
사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이제서야 납북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 밀입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박정희와 신상옥의 불화가 배경이었다. 시작은 신상옥이 겁도없이 전태일 분신사건을 영화로 찍겠다라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 촬영을 방해했다.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삭제 당한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인가를 취소당했고,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있었다. 결국 행정소송은 취하되었다. 애초에 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고의 경우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면 정치적 외압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라진 것이다. 납북보다 밀입국 설이 신빙성을 갖고 회자될 수 밖에 없었다.
4 북한에서의 생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의 경우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최은희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 감독의 경우에는 납치된 이후에 처음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3]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거라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달아나려다가 청천강까지 달려갔지만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오자마자 다시 숙소의 군관 방에 숨어 2차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몇년이나 수용소에서 사상교화를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4] 큰 고생을 하곤 교화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대접이 좀 나아서 비곗덩어리도 제공되었는데 이웃 죄수들과 대화하는게 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죄수들과[5] 수다를 떨며 정보를 얻다 걸려서 징계를 받는다. 눈에 띄게 형편없어진 식사에 저것들이 설마 나를 죽이려나? 싶어서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단식을 했다. 처음에 간수들은 그래봐야 당신이 손해다. 단식질 하다가 나중에 빌던 놈 많다, 나중에 그쪽에서 밥달라고 애원할걸?이라고 비웃었지만 6일을 내리 굶은 신상옥이 똥오줌을 싸고 기절하자 온 교화소가 발칵 뒤집혔고 인민무력부장이 달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너희들도 죽는다!"라고 길길이 날뛰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그때부턴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신상옥의 '반성문'을 접수한 다음에 그를 풀어주어 최은희와 재회하게 한다.
이후로 이들은 북한에서 재결합했고, 부부는 매우 대접을 잘 받아 심지어는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 생일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줬다고.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여담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8세였던 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으며,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남의 이름은 왜 물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 곧바로 김정일이 "정남아, 어른이 물어보시면 대답을 똑바로 해야지."라고 말했다고. 그걸 아는 인간이 정상회담 때 15살이나 연상인 어른한테 싸가지없게 굴었냐
이렇게 환대를 받고 김정일과 가깝게 지냈다 해도[6] 가족들이 한국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거지같은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김일성 교시와 주체사상 학습을 강제로 시켰으며, 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다.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최은희는 밤 11시에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7]가 울먹이며 "언니, 어디 있어?"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에 끌려온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주선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를 쓸어안았다. 신상옥 감독은 만약 자기 배우들이 그랬으면 화 내면서 컷 외쳤을 동작이라고 했다.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 감독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8]
여차저차 하던 와중에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 애초에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영화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고.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인데 참 여러 가지로 영화같은 이야기.
북한은 오랫동안 공산주의, 그리고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주체사상이 고착되면서 문화예술 부분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6.25 이전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각 분야의 수많은 예술인들이 월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숙청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숭배하던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 분명 깨닫기는 잘 깨달았는데 갈수록 더 막장을 만들었지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에 두 부부를 일찌기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9]
신상옥 감독과 남한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최은희도 이미 50대, 김일성 역시 칠순을 앞둔 노인이어서 그랬는지 그런 시도는 전혀 없었다고. 애초에 기쁨조가 있는데 뭐….[10]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모셨으며[11] 나중에 신상옥 감독에게는 '내가 최 여사를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돈다던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 여사를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 그 외에도 '춘향전',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12]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고…이러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13]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측 감시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훗날 계획해둔 탈출을 쉽게 하기 위해 남궁원에게 북한 체제 찬양과 김일성의 찬양을 했다고.[14]
한편 한국 정부는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 후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60~70년대 신상옥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여담으로 이 때 증거로 제시된건 두 사람이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육성 테이프 그리고 자필 편지였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이 미국 입양(혹은 유학)을 미끼로 신상옥의 두 아들을 해외로 유인 납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사주해 조총련과 연계된 일본인을 통하여 서울로 사진 등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 일본인은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로 신상옥의 지인이었으며, 두 부부가 자의가 아닌 타의로 북한에 살고 있다는 언질까지 서울의 가족들에게 넌지시 전해준 상태였다. 즉 애초부터 신상옥은 북한의 추가 납치 공작을 역으로 이용해 부부가 함께 납북되었음을 전세계에 공표한 셈. 이쯤되면 무서운 사람이다
5 탈출 과정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오스트리아의 빈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 망명을 하게 된다.[15]
신상옥은 앞서 언급한 에노키 아키라에게 빈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점심 약속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 기자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같이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 기자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돌아 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16]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다.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고도 한다. 또한 북한의 이름으로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여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서 한국에서는 이들이 배신,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또는 영화사 허가 취소를 받은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를 찾을 목적 겸 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납북수기에서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말 그대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한 이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서 북한의 암살공작원들이 자신들을 해꼬지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영화처럼 일거에 날려버린다. 실제로 안기부는 훗날 신상옥 감독을 취조하면서 무조건 그가 자진 월북했다고 멋대로 결론짓고 '십수년 전 홍콩에서 머문 호텔 방번호를 불어라!'라는 등의 말도 안되는 심문을 했고 신상옥 감독이 써낸 탈출기는 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정작 일본의 뉴 오타니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도쿄 경시청장은 신상옥 감독을 보고 "선생님이 쓰신 수기를 모든 직원들이 돌려 보고 있습니다."며 그에게 존경을 표해 신상옥은 한동안 벙쪘다고 한다.
6 미국에서의 생활
천조국의 CIA는 자국에 망명한 이들 부부의 목숨에 5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북한에 의해 걸려있는 상황에 맞서 언제나 그들을 경호해 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북한은 영화 제작 비용으로 쥐어준 230만 달러를 횡령하기 위해서 부부가 배신했다고 날뛰었지만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돈을 돌려주자 말을 바꾸어[17] 미국의 납치극이라고 날뛰었고 신상옥에게 없던 일로 할테니 돌아오라고 수차례 접촉하기도 했다. 신상옥은 그래도 북에서 잘 대접받은 것 때문에 북측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CIA가 그럼 경호하기가 어렵다고 허락하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CIA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일상적인 대화[18]를 녹음해 왔는데 그야말로 희귀한 육성 테이프를 미국 정보기관 CIA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 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한다. 정말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 해피 엔딩.
이듬해 1987년에 《김정일 왕국》이라는 납북수기를 동아일보의 김일수 특파원의 도움을 받아 출판한다. 8년간의 북한생활 + 뽀그리우스 김정일과 고위층들과의 만남, 여러가지 북한에서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소망하던 탈출을 이루기까지 적나라하게 밝혀낸 서적이지만 앞서 말한대로 시기가 시기인지라…1989년 노태우 정부의 방한을 권유받아 일시 귀국하였다. 이 때 국가보안법에 따라 안기부에서 21일간 조사를 받았다.
이후 신상옥 감독은 1990년에 대한민국 복귀작을 내놓는데, 북한의 KE858기 폭탄 테러 사건을 영화화하여 마유미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 개봉한다. 영문 제목은 《Virgin Terrorist》.[19] 마유미의 촬영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김현희가 김승일과 머물던 부다페스트의 호텔 씬을 현재 그랜드 힐튼 호텔이 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촬영했다.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활동한다. 후일 신 감독은 1994년 '증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름은 다르지만 노골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디스하는 영화로서 지금까지 말이 많은 김형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과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려 했다. 한국에선 흥행엔 실패했지만 깐느 초청작에 오를 정도였다. 이전 버전에는 북한의 실상과 증발이라는 영화를 연결했지만 그 반대이다. 오히려 "북한도 있는데 어디서 데모질이나"고 중앙정보부에서 여대생 강리나를 고문하고 강간 하는 장면이 나오고 북한을 빌미로 독재를 시행하는 군사정권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한국 배우들은 아무도 대통령 역을 맡으려 하지 않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가 대통령 역을 맡았다. 초기 시놉은 아시아의 어떤 국가라고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한국어를 쓰며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 뉴스 영상에서 대통령 유고후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항모를 파견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미국에 살던 신 감독은 몇차례 영화를 만들어 성공을 했지만 [20] 아시아계 감독이란 이유로 미국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감독직은 싸구려 무협물을 비롯한 뻔한 자리였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못 만들던 신 감독은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2000년에는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였다. 그리고 2006년에 신상옥 감독이 지병으로 인해 사망한다.
…여러모로 영화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다. 실제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탈출 계획을 짤 때도 신상옥 감독이 직접 영화 시나리오처럼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탈출했다고 직접 이야기했다. 오오오!
덧붙여 그들의 납북과 탈출에 대한 논픽션 영화를 만든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기는 하다..훗날의 성사여부는 둘째치고 정말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인지라…기승전결에 해피엔딩까지 있으니.
위에서 언급한 영화가 2016년 Ross Adam, Robert Cannan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Lovers and the Despot 이 이 영화인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영화 예고편
한국에서는 2016년 9월 연인과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7 미디어에서
1995년 MBC에서 방영된 제4공화국 19화, 20화가 이 사건을 다루는 에피소드다. 신상옥은 박영태, 최은희는 양금석이 맡았는데 실제 인물과 비교해보면 외모가 꽤 흡사. 또한 매 화가 끝나고 나서 두 부부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나왔는데 특히 20화에서는 두 부부가 납북 후 처음으로 서울에 귀국한 모습이 나왔다.
다만 위에 서술되었던 내용과는 약간씩 다른데 신상옥 감독이 탈출 시도를 하는 건 최은희를 만나기 이전 딱 1번만으로 묘사되었고 김정일·김일성과 대화할 때 녹음기를 켜는 모습도 생략되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할 때는 지인인 에노키 아키라 기자가 직접 몰고 온 승용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내용으로 나왔다.
8 사건 이후
김정일 사망 직후 최은희는 "납치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죽었다니 안 됐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기사)
김정일 육성녹음 1부 김정일 육성녹음 2부 이것이 김정일의 육성파일이다. 조갑제 기자가 입수한 뒤 정리해서 최초로 일반에 공개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녹취를 바로 최은희가 몰래 녹음하였다. 김정일의 육성은 생전에 일반대중에게 거의 알려진바가 없는데 이유는 김정일이 연설을 싫어했고 발음이 안좋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라 한다.[21][22] 해설 기사 네 부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기사 1부, 2부, 3부, 4부
참고로 최은희가 납치되기 1년전 1977년에도 프랑스에 살고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가 북한으로 납치될뻔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다행히 이 부부는 납치 직전 눈치채고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위험을 면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링크 참조.
신상옥, 최은희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간혹 이들이 납북 된게 아니라 자진 월북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위에도 상술 되었듯이 지금도 이들 부부의 입북에 대해 납북이냐, 월북이냐 말이 많은데, 특히 어떤 감독은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이 신상옥으로 부터 월북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써놓았다. 물론 그 감독의 회고록 내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눈 밖에 난 신상옥은 남한에서 영화를 만들기는 커녕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힘든 지경에 있었다.
최은희가 먼저 납치되자 당시 남한의 어떤 언론은 신상옥이 돈문제로 최은희와 다투다가 최은희를 살해하였다는 황당한 내용을 보도하기도 하였고, 박정희 독재 정권은 어떻게든 신상옥을 영화계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 시키려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 신상옥은 정처 없이 해외를 떠돌다가 급기야는 망명을 타진하기도 하였으며[23][24] 결국 납북이든 자진 월북이든 북한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와 별개로 성혜랑은 자신의 회고록 '등나무집' 에서 이들 부부의 납북, 탈북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냉소적으로 적어 놓았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탈북 후 <김정일 왕국> 이라는 납북, 탈북 수기를 발표 하였는데, 이 수기에서 나오는 북한 이라는 나라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신상옥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적뗴들 소굴'이였기에 당시에 "세상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미친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거 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려고 지어낸 얘기 아니냐." 며 수기의 내용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북한이라는 나라가 그 수기의 내용은 그냥 순화 되었을 정도로 인세지옥이자 마굴이라는게 밝혀진 지금에 와서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이제는 아무도 없다.- ↑ 신상옥 감독은 배우 오수미(본명 윤영희)와의 불륜으로 두 아이를 낳았고, 최은희는 끝내 이혼한다. 여담이지만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92년 교통사고로 요절했고 오수미의 동생이자 유명 모델이던 윤영실은 1986년 갑자기 실종되어 2016년 현재까지 생사 불명 상태다.
- ↑ 신상옥 감독은 리펄스 베이 해안에서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에게 납치당해 그대로 중국 본토로 끌려간다. 이들의 정체는 일본 국적의 조총련들.
- ↑ 신상옥 본인은 박정희와 친분이 깊었고 10.26 사건을 동료 죄수들에게 주워듣고 한동안 침울하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영화인 모임에서 정부의 영화 정책을 비판했다가 그게 박정희에게 신상옥이 반정부 모임의 책동자라고 과장되서 보고되는 바람에 박정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격노했고 신필름의 허가도 취소해서 신상옥은 이미 이민이나 망명을 고려하고 있었다
- ↑ 하루에 열시간 이상 꼼짝도 안하고 정좌를 취하는 건데 한두시간도 아니고 몇시간이나 이런다고 생각해보면...
- ↑ 말로는 월북한 국군 장병이라고 하는데 신상옥 감독은 이들이 자신의 의중을 캐보려는 보위부 첩자가 아닌가 의심하여 일부러 이들 앞에서 북한이 남북 체제 경쟁에서 이길 것이 틀림 없다고 북한을 찬양했다
- ↑ 김정일은 42년생,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둘 다 모두 26년생이다. 김정일이 한참 어리다. 띠동갑보다 더한 나이차….
김정일이 영계! - ↑ 성우 고은정이었다고 한다.
- ↑ "그럼요.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워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데, 항상 제 곁에 있어요. 촬영하는 장면이라든지…."(노배우의 목소리가 젖었다.)(#)
- ↑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일성·김정일과의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최은희가 목숨을 걸고 카세트 플레이어의 녹음 버튼을 몰래 누르고 녹음한 육성이 있다. 들켰으면 어떡하려고….
- ↑ 다만 김일성은 김정일에 비해서는 그다지 엽색 행각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나마 알려진게 여성 안마사와의 사이에서 김현을 낳은 것 정도밖에 없으니…. 게다가 사망하기 직전에는 김정일에게 "넌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아!"라고 꾸짖기까지 했다고
- ↑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이 사망한 이후로는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살아왔는데 특히 계모 김성애와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최은희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라 할 수 있는 김정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최은희를 직접 어르고 달래느라 쩔쩔맸다는 점을 생각하면….
- ↑ 특히 영화 '탈출기' 제작 과정에서의 일화가 유명하다.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에게 '열차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진짜 열차를 폭파시켰다고 한다.(참조)
- ↑ 이 일 덕분에 남궁원도 귀국 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된다.
- ↑ 김정일과 최은희의 전화통화가 녹음된 육성 테이프에 의하면, 김정일은 최은희가 한국측 인사들과 만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이걸 갖고 뭔가 의심을 한게 아니라 그냥 최은희의 안부를 묻던 도중 자연스럽게 그 부분을 언급한 것.
- ↑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CIA의 한국인 직원과 미리 이야기를 맞추었기 때문에 수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미국 대사관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혹시나 북한 감시원이 따라붙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당시 숙소에서 미 대사관까지는 약 10분 거리였는데, 그 10분이 마치 10년처렴 느껴졌을 듯
- ↑ 사실 북한에서 계속 돌려 달라고 징징대서 어쩔 수 없이 돌려준 거다. 신상옥 감독과 가까웠던 한 영화인은 미국에서 그를 만나 왜 굳이 돈을 가져왔냐고 면박을 줬는데 이 때 신상옥의 대답은 "야. 내가 거기서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것도 못 가지고 나오냐?"
근데 사실 수 년 동안이나 납치된걸 생각하면 이해는 간다 - ↑ 주로 면담할 때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한다
- ↑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짬뽕되어 있다. 자막이 없으면 보지 못할 정도. -_-;
- ↑ 이 가운데에는 불가사리의 리메이크작인 갈가메스도 있다. 미국에서 만든 만큼 배경은 고려 대신 중세 유럽
- ↑ 실제로 녹취를 들어보면 아무리 평안도 사투리가 끼어있다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말이 빨라 알아듣기 힘들다. 김정일은 그때 당시 나이도 젊은 편이었다.
- ↑ 북한언론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공개된 김정일의 육성은 1992년 조선인민군 열병식때 외친 "영웅적 조선인민군에게 영광있으라!" 단 한 마디 뿐이다. 그외에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때 만찬장에서 건넨 몇마디가 한국측 녹음자료로 공개되었다.
- ↑ 그의 수기를 보면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 정권이 여권을 연장 안해줘서 위조여권을 구입하는 내용 까지 나온다.
- ↑ 이 때 신상옥은 미국에서 김형욱의 초대를 받아 김형욱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적도 있었는데, 이 때 김형욱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자신의 회고록 원고를 신상옥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이 회고록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상옥은 당장 신변이 위협받는 와중에도 김형욱에게 자신의 영화에 투자를 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