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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친노라 불리우는 정치세력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할수밖에 없다. 참여정부의 운명과 함께한 정치계파로, 한때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의회 과반까지 차지했었던 거대 정치세력이지만, 워낙 다사다난했던 참여정부와 그 이후의 정치적 격변에 의해 한때 친노 소속이었던 계파가 비노로 떨어져나가거나 한때 비노였던 인물이 친노로 편입해오는 등의 사건이 너무나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2 순서
2.1 꼬마민주당
일반적으로 친노는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선시킨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형성된 계파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계파의 탄생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친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계파, 혹은 정당이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꼬마민주당이다. 이에는 1차, 2차 꼬마민주당 모두가 포함된다. 이는 3당 합당의 영향으로, 야권 전체가 호남이라는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가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동교동계가 주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동교동계를 제외한 정치세력들은 야권 내부에서도 비주류에 속할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대표하는 정당이 꼬마민주당이기 때문. 1차 꼬마민주당은 3당 합당에 반대해 김영삼의 상도동계에서 이탈한 정치인들의 정당이고, 2차 꼬마민주당은 김대중의 정계은퇴 번복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반발해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이 꾸려간 정당이니 이럴 수밖에 없다.
1차, 2차 꼬마민주당에 모두 참여하며 자신의 정치적 색체를 드러낸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며, 그렇기 때문에 친노의 형성과정에서는 1차, 2차를 불문하고 꼬마민주당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던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막대했다. 노무현 본인을 포함해 김정길, 이부영, 이철, 김부겸, 조경태, 이광재, 안희정 등이 현재도 친노이거나 한때 친노였던 꼬마민주당 출신의 인사들이다. 물론 당시의 정치적 위상과 현재의 정치적 위상은 다들 재각각이지만.[1]
2.2 제16대 대통령 선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노풍을 앞세운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막심했다. 당시 여당 주류 동교동계는 이에 소속된 한화갑, 최소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한 이인제를 고려하고 있었지 노무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고졸 출신이었으므로 동교동계 다음가는 영향력이 있던 386으로 대표되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과도 거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이 후보 재신임을 건 제3회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2002년 월드컵의 영향으로 정몽준이 돌풍을 일으키자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가 출범된다, 통칭 후단협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영입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점에서, 노무현을 지지한 것은 노무현의 측근들과 꼬마민주당출신 영남 세력, 김근태로 대표되는 386 운동권출신 정치인 계파, 정풍운동을 주도한 정동영과 천정배가 이끄는 개혁파들이었으며, 이들은 친노로 지칭되게 되었다. 이렇게 친노는 탄생되게 되었으며,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고 참여정부가 출범하게 되자 새천년민주당내 비주류였던 이들은 일약 주류로 급부상하게 된다.
2.3 열린우리당의 창당과 탄핵역풍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승리 이후, 신주류가 된 친노, 곧 노무현의 측근 및 영남 출신 세력과 천정배-신기남-정동영(천신정)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 및 재창당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부패한 이미지에 호남색이 강해보이는 낡은 민주당으로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물론 새천년민주당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외연확대와 전국정당화를 위해서 2000년 재창당했던 정당이었지만, 대선 때의 혼란과 "실용주의" 노선으로 보수야당인 한나라당과의 구분점이 희미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은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며, 이 시점에서 친노는 열린우리당 소속 정치인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구주류가 된 동교동계와 집권 신주류 친노와의 갈등은 이미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걸치며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는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서 노무현이 한나라당이 요구한 특검을 받아들이는데서 일촉측발의 상황까지 몰린다. 특검에 의해 동교동계의 중진 박지원 비서실장이 징역형에 처해지기까지 하자, 동교동계는 신당 창당에 참여를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서는 친노로 불리던 조순형, 추미애등은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했으며, 도리어 대선 때 노무현에게 반기를 들었던 김명섭, 송석찬, 설송웅 의원 등이 신당 참여를 선언하는 등 다소 애매한 경우도 있었고, 한나라당에서 당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한 이른바 독수리 오형제들[2]과 개혁국민정당을 이끌고 온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친노의 첫번째 재편이 이뤄진 셈.
한편 친노, 곧 열린우리당과 동교동계, 곧 새천년민주당의 갈등은 더욱 극심해져, 그 결과 노무현 탄핵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탄핵 사태를 사실상 주도했으며 이낙연 의원을 제외한 모든 새천년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후 당시 새천년민주당에 소속되었던 인사들과 친노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게 된다. 하지만 탄핵 역풍으로 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을 넘는 압승을 거둔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의석을 거의 모두 상실하며 민주노동당에도 밀리는 원내 4당으로 전락하였고, 동교동계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시점에서는 이후에 민주당계 정당에 소속되어 활동한 정치인은 거의 다 친노였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친노의 정의가 고무줄처럼 바뀌며 야권 인사 누구나 친노로 거론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4 열린우리당의 내홍과 친노의 분열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곧 심각한 내홍에 휩싸이며, 이 과정에서 친노로 싸잡아 불리던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계파는 수없이 분화된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친노 세력을 이탈했고, 이러한 다양한 계파들의 이탈을 통해 친노의 두 번째 재편이 이뤄지게 된다. 정동영이 이끄는 정동영계, 김근태가 이끄는 386계/김근태계, 김한길계,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 등이 비노로 이탈했으며, 이부영, 김부겸 등의 '독수리 오형제'들 역시 이 시점에 비노로 이탈한 인사들로 취급된다.
현재 친노로 분류되는 중진들은 대개 이 시점까지도 친노로 고수한 이들이다.[3] 대표적으로 이해찬과 문희상은 무려 평화민주당(!) 출신임에도 이 시점에 친노를 고수했기에 친노로 분류되며, 새정치국민회의 출신 정세균도 마찬가지이다. 한명숙도 마찬가지, 유시민이 이끌던 개혁국민정당 출신 세력, 곧 오늘날의 참여계 역시 이 시점에 친노를 자처했다는 점 때문에 정의당의 계파인 2016년경 현재까지도 친노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청와대의 대통령비서실 출신 인사들이 이 시점부터의 친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통령비서실장 문재인, 전직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이광재, 노무현 대통령 후보 비서실 정무팀장 안희정[4]등이 있으며, 그 외에 천호선, 김용익, 박재호, 전재수, 김경수(정치인), 최인호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시절 친노는 이후 시점에서 보기에 의외지만, 특히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상당히 우파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광재가 대표하는 친노 우파가 세를 갖고 있었던 점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참여정부의 국정운영기조 자체가 사회자유주의를 따랐던 측면에서 중도(우파)적인 측면이 강했다. 대표적인게 한미FTA나 제주해군기지 문제.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 등 반대 사례도 많긴 했지만. 여튼 당시 친노 계파에 속했던 인물 중 가장 개혁적 색채가 강했던 유시민조차도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서 가장 개혁적인 축에 속하던 김근태[5]계와 천정배계와 계속해서 충돌했으며, 민주노동당은 일명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참여정부를 통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6] 때문에 훗날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유시민의 국민참여당 참여에 대한 진보세력의 거부반응이 나타나기도 했고, 현재도 정의당을 노동당(한국) 등의 군소진보정당들이 꺼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2.5 참여정부의 종언과 폐족
참여정부의 종언에 이르러 친노는 완벽하게 몰락한다. 그 자신이 친노 유력 인사였던 안희정이 친노를 일컬어 폐족이라고 지칭한 것이 이를 대표하는 일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뀌던 정계개편, 제17대 대통령 선거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을 걸치며 친노는 막심한 타격을 입는다. 이 시기 손학규의 입당으로 손학규계라는 거대 비노 계파가 다시 등장했으며, 가장 강경한 비노라고 할 수 있는 새천년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복권되었다. 친노의 경우 당연히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대권주자를 내보내지 못했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시 5선의 이해찬을 위시한 많은 수의 친노 인사들이 불출마하거나 공천에서 배제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영향으로 다수의 친노인사들이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 시기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 민주당(2008년)에 모두 참여하며 원내에 남은 친노인사들의 수장이 된 것이 정세균이며, 여기서 범친노 최대계파로 손꼽히는 정세균계가 탄생한다. 정세균은 민주당 당 대표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정세균계의 세력을 유지했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친노에 대한 동정론이 퍼지면서 범 친노 세력은 유시민이 국민참여당을 창당하는 등 재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정세균이 이끄는 민주당이 무상급식 이슈와 한명숙, 이광재, 안희정 등의 친노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승리하면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2.6 친노의 부활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친노에게 있어 많은 의미를 갖는 선거이다. 이 선거를 통해 친노는 부활에 성공했으며, 민주당내 제일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정세균계의 협조를 통해 민주통합당에서 전면적으로 복귀한다. 또한 무상급식을 이슈로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성공을 계기로 친노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진보적인 성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한 대부분의 주류 친노 인사들은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을 노무현의 사실상 후계자로 간주하였으며, 문재인은 이를 통해 친노계를 대표하는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에 반발한 김두관, 조경태 등이 비노계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반면 국민참여당을 이끌던 유시민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친노계의 주류와 궤도를 달리하고 진보정당 운동과 힘을 합치게 된다. 유시민의 은퇴는 국민참여당이 통합진보당 출범에 참여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참여계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을 통해 통합진보당이 찢어지고 나온 정의당에 속하게 된다. 길고 긴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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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적으로 김정길은 무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출마했으며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여당 민주정의당 후보를 3등으로 밀어버리는 괴력을 보일 정도의 중진으로 노무현보다도 정치적 위상이 더했고, 이광재나 안희정, 조경태 등은 노무현 개인의 비서관이나 선거운동원 정도의 위치였다.
- ↑ 꼬마민주당 출신이 대부분인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등 5명의 의원들을 말한다. "독수리 5형제"라는 별명은 좋지 않게 말하자면 철새지만, 정치성향적으로 따지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기존의 한나라당과 줄곳 충돌하는 의원들이었다는 점을 가리킨다.
- ↑ 하지만 중진이 아닌 인사들의 경우 그런거 없다. 대표적으로 이 시절 비노의 수장 격이던 정동영계의 행동대장이었던 정청래는 현재는 친노로 분류된다.
- ↑ 대선자금 문제로 징역을 살아 대통령비서실 출신은 아니다.
- ↑ 노무현 대통령이 시장원리에 배치된다며 결국 반대한 분양원가제공개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 ↑ 노유진의 정치까페에서 함께 활동하는 진중권과는 당시 시도때도 없이 키배로 대혈투를 벌이던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