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일 | 1972년 5월 19일 |
녹음일 | 1972년 1월 |
녹음 스튜디오 | 프랑스 에루빌의 샤토 에루빌 |
장르 | 록, 로큰롤, 피아노 록, 소프트 록 |
러닝 타임 | 45:15 |
프로듀서 | 거스 더전 |
발매사 | DJM (UK), Uni (US) |
엘튼 존/음반 목록 | ||||
Madman Across The Water (1971) | Honky Château (1972) |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 (1973) |
목차
1 개요
엘튼 존의 5번째 정규 앨범이자 엘튼 존의 음악성이 한층 변화한 중대한 의미를 가진 명반.
2 엘튼 허큘리스 존
1972년 1월부터 엘튼 존에게 중대한 변화들이 생겼다. 매니저 존 리드와 같이 영국 교외 고급 주택가에서 새로 마련할 집을 찾고 있었고, 영국 서리 주에 위치한 넓은 단층 저택으로 이사했다. 엘튼 존과 그의 부모님은 1962년부터 런던 노스우드 힐의 아파트에서 10년 간 지냈지만, Madman Across The Water가 차트에 오르던 시점에 이사갔고, 엘튼 존은 어머니에게 15,000파운드의 저택을 사드렸고, MG의 스포츠카 1972년형 MG B도 선물했다. 엘튼 존은 어머니 실라와 의붓아버지 프레드의 혼인증명서에 서명을 했고, 10년 뒤에 공식적으로 재혼을 한 것.
그리고 엘튼 존은 1972년 1월 6일에 본명인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에서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법적 개명했다. 엘튼 존은 1967년 말부터 1971년까지 예명으로 사용했지만, 예명을 아예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레지널드는 옛 이름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튼 존을 레지널드로 불렀지만, 개명 이후 부모님도 엘튼이라고 부르고, 대부분의 주변인들도 엘튼이라고 불렀다.[1]
레지는 내 인생에서 불행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레지라고 부르면 기분이 안 좋아요. 레지널드 드와이트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면 뜯어보지도 않습니다. 나는 33년 간 엘튼 존으로 살아왔어요. 어머니도 나를 엘튼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래야죠. - 엘튼 존, 2005년 인터뷰
3 녹음
1집 Empty Sky부터 4집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영국에서 작업했지만, 이 앨범부터 다른 나라에서 작업되었다. 당시 엘튼 존은 세금 문제 때문에 영국 밖에서 앨범을 녹음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뮤지션들은 정부가 부과한 세금이 지나치게 많다며 큰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2] 롤링 스톤스는 프랑스 니스 근처의 이동식 스튜디오를 마련해 그들의 명반 중 하나인 1972년 10집 Exile on Main St.를 녹음했고, 엘튼 존도 프랑스로 정하고 한적한 곳으로 떠났다. 파리에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마을 에루빌에 위치한 샤토 에루빌(Chateau d'Herouville)을 골랐다. (일명 Strawberry 스튜디오) 샤토 에루빌은 17세기에 지어진 거대한 성이고, 쇼팽이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와 같이 살았던 곳이다. 이 성은 휴양지로 봐도 무방한 편의 시설과 스튜디오, 사무실로 구성되었다. 엘튼 존은 이 성을 앨범 작업을 할 곳으로 정하면서 마음껏 여가시간을 보냈다. 이 앨범부터 본격적으로 엘튼 존 밴드의 확연한 모습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1년까지만 해도 공연에선 엘튼 존과 베이시스트 디 머레이, 드러머 나이젤 올슨만 구성되었던 트리오이자 기타가 없던 구성의 밴드였고, 피아노 록 밴드 자체로 봐도 무방했었다. 하지만 전작 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영입된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턴이 밴드의 멤버로 합류하면서 사운드가 한층 다채로워졌고, 엘튼 존이 독주자로서 모든 책임을 떠맡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이비 존스턴은 데뷔 이후로 쭉 어쿠스틱 기타만 연주했기 때문에 일렉트릭 기타, 만돌린 등의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게 된 것이 엘튼 존 팀원에 영입되면서 부터였고, 이후 매우 빠르게 적응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세밀한 녹음 작업을 위해 다양한 세션연주자들을 영입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앨범에선 일부 특별한 세션들을 제외하면 엘튼 존과 투어 밴드의 멤버들만 곡의 연주를 맡았다. 마찬가지로 전작에서 영입된 퍼쿠션 레이 쿠퍼는 이 앨범에서 타악기를 연주했지만, 밴드의 멤버로 합류하기 시작한 건 1973년 11월 Goodbye Yellow Brick Road 투어부터였다.
아침을 먹고나서 부엌에서 앨범 작업을 시작했고, 엘튼 존이 곡을 작곡하고 기본적인 장비와 앰프를 갖춘 밴드가 옆에서 곡들을 익혔다. 엘튼 존은 버니 토핀이 금방 쓴 가사들을 쭉 훑어보면서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여러번 수정하면서 선율을 작곡하고, 그 날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했다. 1960년대 말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작곡 방식이었고, 모든 곡들은 10~20분 안에 매우 신속히 작곡되었다. 전작들에서도 해당하는 점이지만, 작곡과 녹음 작업을 겨우 5일 안에 끝냈고, 1월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4 음악
엘튼 존은 Madman Across The Water가 차트에 오를때 쯤, 1971년까지 이루던 음악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70년 2집 Elton John부터 전작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엘튼 존은 현악이 주를 이루고 있는 진지하면서 무거운 사운드, 심오한 메세지를 담은 음악을 해왔으며, 1970년대 초의 엘튼 존은 간혹 글램 록 뮤지션으로 분류되기도 했었다. 엘튼 존 본인이 애초부터 크게 추구했던 음악과 방향은 록을 바탕한 것이었고, 현악의 어두운 대곡들도 라이브에선 아예 강렬한 록으로 바꿔버리면서 불렀다. 초기 시절의 음악은 모두 어두우면서 차분한 곡들만 있던 것도 아니었고, 가스펠 풍의 경쾌하면서 강렬한 터치의 업템포 록 넘버, 컨트리 뮤직을 바탕한 경쾌한 곡들이나 프로그레시브 록 적인 분위기가 크게 띄는 대곡들도 포함되어 있다.
데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인의 역량이라고 보기 어려운 성숙하면서 진지한 음악들로 이끌고 있었지만, 첫 히트곡 Your Song 이후로 확연히 띄는 히트곡도 없었을 뿐 더러, 단지 현악이 주를 이루는 차분한 발라드들로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에는 엘튼 존을 발라드 뮤지션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포함해서 엘튼 존은 전작들의 진지한 분위기, 복잡한 편곡, 심오한 내용을 덜어내고 보다 팝 적이면서 경쾌한 곡들로 더욱 대중적이면서 듣기 편안한 음악을 시도할려고 마음 먹었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로큰롤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 시절의 뿌리로 돌아가기를 정했고, 더욱 팝 적이면서 록 적인 요소들을 처음으로 제대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전작들에서 보기 어려운 가볍고 밝은 느낌에 비트도 더욱 늘어났고, 거의 모든 수록곡이 블루스 기반의 미국 록의 분위기를 크게 띄고 있다.
Tumbleweed Connection처럼 미국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분위기가 크지만, 경쾌하고 헌란한 재즈 피아노 기법의 뉴올리언스 재즈, 뮤직 홀, 홍키 통크의 모습을 크게 띄고 있다. 전반적인 곡들은 이전에 발표한 곡들보다 쉽게 들리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가깝게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달라졌고, 팝에 크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엘튼 존은 걸작 앨범을 만들어야하는 최종 장벽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의도를 보이듯이 각 곡들에서 한층 변화한 수준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피아노의 존재감이 좀 더 커져 헌란하면서 수려한 연주를 본격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고, 엘튼 존의 보컬 또한 더욱 안정적이게 개선되었다.
밴조, 시타르, 만돌린, 일렉트릭 바이올린, 류트 등의 추가적인 악기들로 배경을 다양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등 음악적인 변화가 커졌다는 것을 확연히 볼 수 있고, 엘튼 존 특유의 스타일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음악적으로 가장 치밀하면서 빼어난 완성도를 보이는 엘튼 존의 대표적인 명반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의 퓨전 바이올리니스트 장 룩 폰티의 일렉트릭 바이올린 연주를 담은 Mellow, Amy를 제외하면 현악이 아예 사용되지 않은 첫 엘튼 존 앨범이기도 하다. 현악으로 덮혀진 전작들에 비하면 새로운 탈을 썼을 정도이고, 이런 이유로 인해 폴 벅마스터가 참여하지 않은 첫 엘튼 존 앨범이다.[3]
5 발매
작업되고 4개월 뒤인 5월 19일에 발매되었고, 각 국가들에서 5~10위 안에 진입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미국 빌보드 200에선 첫번째 1위를 가진 앨범이 되었고, 1973년 말까지 차트에서 머무는 등 전작들보다 확실한 성공을 보였다. 이후로 발매된 앨범들 전부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1975년 10집 Rock Of The Westies까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기록되는 승승장구를 보여주었다.
발매 당시 평론가들에겐 극찬 투성이었고, 1970년 3집 Tumbleweed Connection,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와 같이 평론가에게 가장 호의적인 평을 받은 앨범이다. 롤링 스톤과 올뮤직에선 별 5개를 주었다. 엘튼 존을 그다지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평론가들도 이 앨범 만큼은 크게 칭찬했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작사작곡 능력이 가장 치밀하게 묻어낸 앨범 중 하나라는 평가로 당연히 팬들에게도 호평 일색이었고, 가장 평이 좋은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리스트에서 357위로 기록되었고, 이후 2위 떨어져 359위로 기록.
1972년 7월에 골드를 기록했고, 1995년 10월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5~1996년 로켓, 머큐리 레이블에서 재발행된 앨범의 보너스 트랙으로 Honky Cat 싱글 B면에 수록된 Slave의 업템포 버전이 수록되었다.
6 여담
앨범을 작업한 샤토 에루빌 성의 Strawberry 스튜디오에서 다음작 1973년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를 5개월 뒤인 1972년 6월에 작업했고, 1973년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까지 여기서 작업했다. 약 18개월 동안 샤토 에루빌에서 앨범 작업을 한 셈. 이 앨범까지 엘튼 존의 초기 시절로 분류되고,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부터 초중기 시절로 분류된다. 하지만 간혹 이 앨범도 초중기에 포함해서 분류된다.
앨범을 작업하면서 작곡된 "Hi-Heel Sneakers", "I'll Be There Tomorrow"는 앨범에 수록되지 못했고,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미국의 레이블 사 Uni와 계약이 끝났고,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부터 MCA에서 발매하기 시작했다.
7 라이브
앨범이 작업되고 고작 몇 주도 지나지 않은 1972년 2월 5일, 영국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 공연에서 앨범의 전곡을 불러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었다. Rocket Man이 투어의 레파토리가 되어 1972년부터 40년 넘게 자주 불렀다. 가끔 이 곡을 제외한 투어도 있지만, 현재는 제외하지 않는 대표적인 레파토리 중 하나이다. 그 다음으로 자주 부른 곡은 Mona Lisas And Mad Hatters, Honky Cat, Hercules이고, 특정 투어들에서 레파토리로 분류되어 자주 불렀다.
I Think I'm Going To Kill Myself를 1972년 10월 투어에서 불렀을 당시 곡에서 참여한 본조 도그 두다 밴드의 멤버 '레그스' 래리 스미스가 무대에서도 기상천외한 복장을 입고 탭댄스를 추었다. 이후 I Think I'm Going To Kill Myself는 1976~1977년 이후로 밴드와 연주된 적이 단 한번도 없고, 레이 쿠퍼와 함께하는 2인조 투어에서만 불렀다. Susie (Dramas)는 1972년 투어에서만 불렀고, Mellow, Salvation, Slave 등의 나머지 수록곡들은 1972년 투어에서 조금 밖에 부르지 않았고, 그 후로도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8 트랙 리스트
트랙 리스트 |
1. Honky Cat - 3:15 |
2. Mellow - 5:32 |
3. I Think I'm Going To Kill Myself - 3:35 |
4. Susie (Dramas) - 3:25 |
5. Rocket Man - 4:45 |
6. Salvation - 3:58 |
7. Slave - 4:22 |
8. Amy - 4:03 |
9. Mona Lisas And Mad Hatters - 5:00 |
10. Hercules - 5:20 |
보너스 트랙[4] |
11. Slave (Alternate Take) - 2:53 |
9 세션
보컬, 작곡, 피아노 일렉트릭 피아노, 오르간 - 엘튼 존
작사 - 버니 토핀
기타, 밴조, 스틸 기타, 만돌린, 백보컬 - 데이비 존스턴
베이스, 백보컬 - 디 머레이
드럼, 콩가, 탬버린, 백보컬 - 나이젤 올슨
트럼펫 - 제이스 반하트
탬버린 - 자크 볼로네시
색소폰 - 장-루이 쇼탕, 알랭 아토
일렉트릭 바이올린 (Mellow, Amy) - 장 뤽 폰티
탭댄스 - 래리 스미스
ARP 신디사이저 - 데이비드 헨첼
콩가 - 레이 쿠퍼
코뿔소 경적 (Hercules), 백보컬, 프로듀서 - 거스 더전
백보컬 - 매들린 벨, 리자 스트라이크, 래리 스틸, 토니 하자드
엔지니어 - 켄 스콧
마스터링 엔지니어 - 래리 스미스
리마스터링 - 토니 커슨
편집 - 거스 스키너
디지털 변환 - 리키 그레이엄
서라운드 믹스 - 그레그 페니
앨범 커버 - 에드 카라에프
라이너 노트 - 존 토블러
10 차트 성적
차트 (1972년) | 기록 |
호주 | 4위 |
캐나다 | 3위 |
네덜란드 | 9위 |
이탈리아 | 5위 |
일본 | 21위 |
노르웨이 | 8위 |
스페인 | 1위 |
영국 | 2위 |
미국 빌보드 200 | 1위 |
서 독일 | 43위 |
10.1 연말 차트
차트 (1972년) | 기록 |
이탈리아 | 18위 |
호주 | 15위 |
미국 | 24위 |
차트 (1973년) | 기록 |
미국 | 80위 |
11 판매량
국가 | 증명 | 판매량 |
미국 (RIAA) | 플래티넘 1장 | 1,000,000장 |
12 싱글
Rocket Man / Susie (Dramas) | 1972년 4월 17일 |
Honky Cat / Slave (Alternate) | 1972년 7월 31일 |
12.1 싱글 성적
차트 (1972년) | Rocket Man |
영국 | 2위 |
독일 | 18위 |
아일랜드 | 6위 |
이탈리아 | 6위 |
미국 빌보드 | 6위 |
차트 (1972년) | Honky Cat |
영국 | 31위 |
호주 | 78위 |
캐나다 | 10위 |
독일 | 41위 |
미국 빌보드 | 8위 |
빌보드 AC | 6위 |
- ↑ 에릭 클랩튼은 1990년대에도 그를 레지라고 불렀다. 엘튼 존은 그다지 달갑게 여기진 않았다.
- ↑ 그럴만도 한게 1960년대부터 영국에서 고세율 정책을 시행했고, 세율이 소득의 무려 96%였다. 불만이 안 나올리가 없었다. 조지 해리슨의 "Taxman"이 이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 ↑ 다음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에 다시 참여했지만, 이후로 한동안 참여하지 않다가 1976년 11집 Blue Moves부터 다시 참여했다.
- ↑ 1995/1996년 머큐리, 로켓 레이블에서 재발행된 리마스터링 CD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