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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일 (목) 02:0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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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이탈리아 육군이 마틸다 전차를 노획해 끌고가는것처럼 보이지만 그런거 없고 전차병을 봐라. 절대 이탈리아 육군이 아니다.
영국 육군 마틸다 승무원들이 노획한 이탈리아 왕국 국기를 전차에 매달고 가는 장면이다.
목차
1 개요
일본에서 '이탈리아군 전설(イタリア軍伝説)' 등으로 떠돌아 다니던 것이 2006년 9월쯤 한국에 건너와 '이탈리아군의 전설'이나 '이탈리아군의 위력' 등의 제목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원래는 서구권에서 시작된 유머이다. 영어판 언사이클로피디아에도 이런 항목이 있을 정도이다. 해당 항목은 이탈리아제 탱크는 후진기어가 6개, 전진기어가 1개 라는 유명한 조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발상이 의외로 이탈리아군의 악명이 퍼지지 않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를테면 스페인 내전 당시이탈리아군의 바르셀로나 폭격은 나치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게르니카 폭격을 쌈싸먹는 규모였지만 화가 피카소의 작품으로 크게 알려진 게르니카에 비해 씹혔다. 이탈리아 본토의 국토회복 운동과 직결된 지방인 현대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일대와 에티오피아 같은 곳에서는 정직하게 나치스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만큼 전쟁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들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무능하지만 선량한 집단이란 이미지가 붙어 알려지지 않은 점도 크다. 명심하지만 정도와 효율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파시스트 전범 국가는 파시스트 전범일 뿐이다.
유머로 취급하기에는 내용이 굉장히 편파적이며, 서구 중심적인 생각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를 그냥 웃고 넘기는 내용이 아닌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간혹 등장하는 듯.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유독 인터넷 상에는 과장된 소문이나 이야기가 많다.
인터넷에서 아래 내용들로 검색해보면 이 내용들이 이곳저곳 퍼날려져 있다.
도시 전설이 아닌 근현대 이탈리아군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탈리아 왕국군 문서를 참조 바람 |
2 전쟁사
2.1 기원전 510년 크로토네와의 전투
- 당시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던 시바리스라는 나라에서 기병대의 말을 승리의 퍼레이드를 위해서 연주를 하면 뛸 수 있게 조련했다. 그런데 중요한 싸움에서 상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혼란 끝에 대패...
우선 위치부터 틀렸다. 크로토네와 시바리스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이다. 고대 역사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510년에 시바리스에서의 정치 분쟁으로 인해 두 도시 사이에 전쟁이 났고, 두 도시 사이에 있는 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30만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던 시바리스가 10만도 안 되는 크로토네군에 대패하고 크로토네의 속국이 된 것은 맞지만 도시가 파괴된 것은 그로부터 약 60년 뒤인 기원전 445년경이다. 전투의 진행 자체에 대해서도 이에 대해 서술한 역사가마다 말이 다르는 등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는데다가 시쿨루스의 기록 자체도 병력 수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어 진실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시쿨루스 이외에도 헤로도토스, 스트라보와 같은 다른 역사가들이 이 전쟁에 관해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두 도시간에 전쟁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로 보이지만, 전투 자체에 대해서도 이렇게 확인된 것이 없는데 원문과 같은 멍청한 기록이 사실로 확인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
2.2 이탈리아 독립전쟁
2.2.1 1866년 6월, 쿠스토자 전투
- 20만의 이탈리아 육군은 알프레히트 대공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 육군 7만 5천명에게 대패
실제로 이 전투에 투입된 이탈리아 육군은 총 12만 명이었다.오스트리아군의 병력이 적은 것 같지만 수비하는 쪽이 오스트리아군. 이탈리아의 동맹국 프로이센 육군 참모부에서는 " 그 요새는 함락 못시키니 차라리 빈으로 진격해라"[1] 권유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입장상 1849년, 1861년에 함락시키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만토바 요새를 친다는 것이 과거 이탈리아 영토의 수복이라는 명분에 부합했다. 만토바 요새와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 요새는 합스부르크 가의 이탈리아 지배의 상징과도 같았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이번에도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정면으로 들이 받았고, 민치오강을 끼고 도는 지리적 이점을 누린 오스트리아 군이 이번에도 방어에 성공했다. 전사자는 이탈리아군 8천, 오스트리아 5천6백명으로, 그 자체로는 대패라고 하기 어려웠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7년 이탈리아 원정 중 함락시킨 이후로 난공불락이었던 만토바 요새에 전공 하나가 더 추가 된 셈이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장비와 기술력의 문제도 한 몫 했는데, 오스트리아 육군은 발전된 강선포로 무장하였으나, 이탈리아는 통일된지 5년 밖에 안된 시점에서 구식 활강포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는 이제 막 통일해서 군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한 나라였고 상대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체계화된 군대를 보유했다. 모든 면에서 제대로 열세인 이탈리아군이 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어 교환비 자체로는 선전한 수준. |
2.2.2 1866년 7월 리사섬 공략
첫번째 출전시는 해상에서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번째 출전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제독은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3번째의 출전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섬의 오스트리아 육군은 1개 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 해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동안 예비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해안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2.2.3 1866년 7월 리사 해전
상대인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해군은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정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전 직후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 「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 「아폰다토레」로 갈아탐.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트호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해군은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 해군의 다른 함정들은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그나마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해군 사상자는 장갑함을 따라 충각돌격을 실시한 목조함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 해군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을 웃돈 이탈리아 해군은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참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상대인 테게트호프 제독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알아주는 명장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옆구리를 기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철갑선 항목 참조. 당시의 유탄포는 목선을 무력화시키는데는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아직 철갑선의 장갑을 완전히 관통할만한 수준은 되지 않았다. 리사 해전 이전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의 해전들에서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이후 계속해서 유탄포가 발달하기는 했지만 철갑을 관통하는 강력한 화포를 장착한 현대적인 군함의 등장 이전까지는 철갑선간의 전투에서는 충각돌격이 계속 유효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
2.3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2.3.1 아도와 전투
-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2연패. 최종적으로는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6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패였음.
사실 아도와 전투는 원래 에티오피아군이 이탈리아군보다 4배나 많았다. 이탈리아군 2만명에 비해 초창기에 동원된 에티오피아군은 무려 8만명. 게다가 당시 에티오피아는 현대식 소총과 구식 소총 등의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 상당한 피해를 줬으며 에티오피아는 8천명이 부상당하고 5천명이 전사했다. 원작자의 무식함과 서구우월주의 의식이 강하게 내포된 부분. |
2.3.2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상기되었듯 에티오피아는 숫자도 더 많았으며, 이탈리아는 부족한 병력과 장비, 적대적인 주민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총 10만명 중 8만명이 소총으로 무장했고, 소수의 대포와 기관총을 동원한 데 반해 이탈리아군은 2만명 정도의 병력에 60여문의 대포로 무장. 또한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Menelik) 2세 스스로도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다. 기습을 지시한 것도 바로 이 사람. 그리고 문명 5 에티오피아의 버프도 바로 이 전투를 말하는것 이다. 즉 그정도로 에티오피아의 조국 수호 저력이 엄청났다는것 이다. 사실 이-에 전쟁보다 더 먼저인 1879년에 영국군은 헨리-마티니 후장식 소총과 다량의 화포에 그당시 최신예 병기인 로켓포까지 동원했음에도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보급 문제로 총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관련 분석 줄루족에게 탈탈 털리고 워낙 순식간에 밀려 장교 56명 등 영국군 1329명 전원이 죽임을 당하는 수치를 당했다. 다수의 소총과 2문의 대포까지 노획당한 건 덤. 태양이 가려진 날, 이산들와나 전투 다만 이 전투가 종결된 후 영국군의 패잔병 일부와 임시로 군용병원으로 쓰던 오두막 경비병 150여명(139명 + 환자 39명)이 며칠동안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와 총기를 보유한 줄루족 3500명을 상대로 로르케 국경의 방어전투(# 록스 드리프트 전투)에서 성공함으로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다만 이산들와나 전투 이후로 영국군은 결국 줄루를 정복했으나, 아도와 전투는 일단 이탈리아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를 상대로 패배한 유일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
2.4 제1차 세계대전
참고로 아래에 전투들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미국이 참전한 때이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탈, 니벨 공세의 실패와 프랑스군 항명사태, 제3차 이프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말그대로 연합군 최악의 해나 마찬가지로 미국이 참전했다는 것만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한 해였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애당초 그 당시의 미국은 아직 공업도 발달되지 못했다. 게다가 빠르게 수를 늘린 신병의 전투력울 키우는 과정에서 프랑스군에 크게 의존했다. 미군이 제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은 1918년 초반이었으나 그 당시에도 경험이 적었고 전쟁장비들 역시 부족했다. 즉, 러시아가 빠진 자리를 미국이 완전히 메우는 데는 1년 이상이나 걸렸다는 이야기.
2.4.1 카포레토 회전
오스트리아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km를 패주.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2만 3천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 부상자 2만, 포로 29만 3천, 탈주자 30만.
2.4.2 1918년 10월 경, 피아브강 전투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교섭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노려 피아브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해당 전투는 6월에 있었던 전투다. 또한 피아브 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수비군이었고 오히려 공격을 가한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으며, 이는 제국 붕괴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 사건이다. 카포레토 전투의 경우, 변명거리가 없는 명백한 졸전이고 참패였지만, 의도적으로 상대를 오스트리아군 하나로 축소시키고 있는 서술트릭이 있다.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이 최초로 전면개입한 전투다. |
2.4.3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휴전 발효 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역시 틀렸다.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10월 24일 시작되어 11월 3일에 끝났고, 휴전협정으로 11월 4일부터 전투행위가 종결되었다. 참고로 휴전협정은 공세 5일뒤인 10월 29일부터 개시되었다. |
2.5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2.5.1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것은 바로 독가스...orz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대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한 것이다.
이미 30여년전 전에도 에티오피아군은 8만명을 소총으로 무장시켰던 근대화된 국가였다.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는 70만명의 병력을 소집했는데, 이는 에티오피아의 국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이전에도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다량의 소총과 기관총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과도한 징집으로 무기가 모자라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일부 병사들에게 머스킷이나 창, 활을 쥐어줬을 뿐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이 입은 피해는 에리트레아 출신 식민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전선에서 에티오피아군은 녹아내리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유럽식 무기만 갖춘다고 유럽인들의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인도나 중국 등에서는 유럽식 무기로 무장한 전근대적인 군대가 유럽의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사실에서 보듯 복합적인 군사적 역량이 상당히 중요한데, 에티오피아군이 어느 정도 근대적인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는지는 논란이 조금 있다. 더군다나 창으로 무장한 기병에게 박살났다는것도 그리 이상한게 아니다. 1942년 이탈리아군 사보이 기병연대 600명은 기관총 지원을 받는 소련군 2천명[2]에게 기병도로 돌격하여 31명의 사상자만 내고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한 전적도 있다. 이탈리아군은 독가스 사용을 인증했을 뿐이다. |
2.5.2 1935년 10월
당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실제로 이탈리아군이 사용한 것은 겨자 가스다. 여담으로 에티오피아 점령후에도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그나마도 전후 전범재판에서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의 졸전기록과 더불어 신사적이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일뿐이라는 근거. 단순히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도 약한데 약자에게만 반칙과 더불어 잔인성이 넘쳤을뿐이다. |
2.6 스페인 내전
2.6.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전투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여기서 이탈리아군이 상대한 공화파는 소련제 T-26 전차로 상당히 중무장을 하고 있었던데 반해 이탈리아군은 CV-33 탱켓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지는 싸움이었을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탱켓 따위를 이탈리아의 산악 지형에 적합한 전차 운운하며 선택한 군 상층부의 탓이지 군인들은 잘못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탈리아군은 3월 18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지만 이후 역으로 37mm 대전차포를 활용하여 오히러 공화파의 T-26 전차를 관광태웠다. 그리고 3월~5월동안은 소련이 150여대의 전차와 40여대의 장갑차를 지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달라하라 전투 자체가 과달라하라에 주둔하고 있던 제11 국제 여단을 상대로 이탈리아군과 모로코 출신 식민지병으로 구성 된 국가군이 공세를 퍼붙다가 국제 여단의 치열한 항전으로 인해 좌초 된 것을 지원온 공화국 정규군 제4군단이 역공을 가해 국가군이 대패한 전투인데, 여기서 전투 초기 무장이나 숫자로나 완벽하게 우세였던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막은 제11 국제 여단의 주축은 같은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주세페 가리발디 대대였다. 스페인 내전 내내 가리발디 대대는 미국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독일 출신 에른스트 탈만 대대, 영국 대대와 같이 국제 여단 내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부대 중 하나로 명망이 높았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이걸 참조. |
2.7 제2차 세계대전
2.7.1 1940년 6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단지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계획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또 어떤 작전계획도 명확히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선전포고해놓고도 10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2.7.2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독일군에게 유린되어 항복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불과 2개 사단도 안 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 부대는 이탈리아를 침공(...)할 계획이었음.
이탈리아 전체 사상자가 4,000명 + 2,000명(동상) 정도로 괴멸 당한적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6월 10일에 선전포고하고, 실질적인 전투는 21일에 시작해서, 24일에 종전이 되어서 작전이고 뭐고 펼 시간도 없었고 반대로 프랑스군도 비록 독일군이 북프랑스를 휘저었기는 했지만 바보같은 프랑스수뇌부 덕분에 40개의 사단이 프랑스 국경에 배치된 상황이라(덕분에 파리를 방어할 병력이 20개 사단 밖에 없었다). 마지노선 끝단에 10년간 건설한 Alpine Line 방어선에 85,000명의 프랑스 군, 거기에 여름에 동상만 2000명이 걸리는 알프스 산맥도 있어서 프랑스 군이 크게 열세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 상황에서 이탈리아군은 3일만에 비록 수십 km 정도지만 프랑스로 진격했고 종전 후 남프랑스 일부를 할양받았다. |
2.7.3 몰타항공전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 덕분에 추축국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아프리카 군단은 보급문제로 허덕이고. 결국 연합군의 반격을 허용해 괴멸된다. 원인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실패한것이고 추축군이 몰타를 점령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크레타 섬 전투 덕분.
2.7.4 그리스 침공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로 인해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된다,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결국 독일이 대신 전선에 뛰어들게되고 크레타 섬 전투로 인해 독일 공수부대는 더이상 공수작전을 할수없게되었다.
2.7.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했고,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바르바롯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보내졌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4000대 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2.7.6 타란토 공습
영국해군 지중해 함대의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소드피쉬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콘테 디 카부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 두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쉬 뇌격기 2기.
2.7.7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해군의 손해는 전무.
이탈리아 함대의 원래 목표는 크레타 섬 근처의 영국의 수송 함대를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고, 이탈리아의 작전이 예상대로 이뤄졌을 경우 주력 함대가 한참 멀리 있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영국은 완벽하게 털릴 운명이었다. 그런데 하필 작전 개시 3일 전에 이탈리아의 암호 체계가 앨런 튜링이 이끄는 블리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팀에 의해 최초로 해독되면서(...) 해당 암호문을 통해 영국 해군은 상대의 구성과 목표를 알아내게 되었다. |
2.7.8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만약.. 요리라면 이탈리아가 영국을 이겼겠죠. 하지만 전쟁은 요리 대결이 아니었어요.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이 시기는 북아프리카 전투의 절정이며 최종단계였다. 그 유명한 롬멜이 방어전을 펼치다가 폰 아르님이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교체되었고, 독일군은 티거까지 동원하였지만 결국 졌다. 이 시기는 영국군뿐만 아니라 미군과도 같이 싸운 전투였으므로 25만 vs 3만5천이란 숫자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의 포로는 약 27만여명. 북아프리카 전투 초기 오코너 장군의 영국군 3만이 22만명 가량의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38000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는데,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
2.7.9 1942년 12월 동부전선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은... 무솔리니의 사위였던 치아노 이탈리아 외상[3]이 자국군을 걱정하며 괴링에게 "이탈리아군의 피해상황은 심각합니까?"고 묻자 괴링 왈..."전혀 없습니다..왜냐...그들은 소련군 포화가 시작되자 바로 후방으로 뜀박질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군의 장비는 루마니아군보다 약간 좋았을뿐.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큰 피해를 입자 울며 겨자먹기로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증원받은 상황이었다. 참고로 1년전인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파병하겠다고 하자 히틀러는 수송수단이나 화력의 문제로 거부한 적이 있다. 더불어 이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역에 종군하고 있던 이탈리아 8군의 주력은 산악군단 소속 병력들로, 산악군단 소속 병력들은 동절기 기후에 익숙해 늘어질대로 늘어진 보급선과 장비/예비 병력의 부족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러시아에서 용맹히 싸웠다. 당장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는 1942년 8월에는 사보이아 기병대 700명이 야포, 박격포,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 2500명을 상대로 32명 전사 52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 소련군은 150명의 전사자, 300명의 부상자와 600명의 포로를 잡은 대전과를 내기도 했다. |
2.7.10 1943년 9월 무솔리니 실각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는 무장 SS, 공군 혼성공수부대는 글라이더 12기에 나눠타고 바돌리오 장군의 신 정부에 의해 무솔리니가 감금된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착륙했다(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적이 무장 SS란 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스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당시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군 소속이 아니라 카라비니에리 소속이어서 소총 정도의 빈약한 무장밖에 없었으며, 적이 SS라는 것을 알고 주저없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독일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등 저항했지만 스코르체니가 데려온 친무솔리니파 이탈리아군 장성 페르난도 솔레티 장군이 "국왕의 어명으로 무솔리니가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 라고 거짓 호통을 친 것에 속아 저항을 멈춘 것이다. |
2.8 걸프전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 전폭기 20여기가 출격, 첫 실전 공중급유에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는 절반이 실패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 나머지 10여기는 이라크군 군사시설을 공격했지만 그중 몇 기가 격추되어 조종사는 포로가 되었다.
사실 공중급유는 실제로 매우 어려운 임무이고 이를테면 한국 공군은 공중급유기가 없어서 훈련조차 하지 못한 탓에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배달오는 전투기들은 모두 미 공군 조종사가 조종해서 오는 실정이다.[4] 또 이탈리아 공군이 운용한 토네이도는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초저공 침투 지상공격이 주임무인 기체다. 당연히 위험도가 높은 임무를 맡는만큼 피해도 많을 수 밖에 없다. 비단 이탈리아 공군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도 걸프전에서 다수의 토네이도를 상실했다. |
2.9 소말리아 내전
1994년 소말리아의 내전으로 민간인이 학살당하자 UN에서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전투병이 아닌 건설공병대대.[5]를 파견했는데, 이탈리아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한국군은 약 60명의 공병대, 지원무장 81mm 박격포[6] 반면 이탈리아군 1개 대대병력.망구스타 공격헬기 지원가능한 상태.
처음 이탈리아군은 한국의 비전투부대에게 박격포는 왜 가져왔냐고 비웃으면서 우리는 공격헬기까지 보유했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킨다. 얼마 뒤 소말리아 민병대가 기지를 습격하자 이탈리아군은 공격헬기에게 지원요청하는 것도 까먹은 채 기지에 한국군만 달랑 남겨놓고 이탈리아 대대병력 전원 철수.
기지에 남겨진 한국군은 소수의 특전사 경호병력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비전투 공병부대원에다 부실한 무장이었지만, 소말리아 민병대 격파.
※ 실제 소말리아에 파견된 한국군 공병대대가 이탈리아 보병대대를 지켜준 일화
2.10 아프간 전쟁
대테러전쟁에서 NATO군의 ISAF로 참전한 이탈리아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뒷거래를 한 정황이 포착되게 된다.마피아?? 2009년까지 이탈리아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사루비 지역에서 주둔하다가 아무 탈 없이 프랑스군에게 이 지역을 인계하고 철수를 했다. 하지만 그 철수 직후 프랑스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게되어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사실 아프간이라는 전장환경상 이상할게 없었지만 이탈리아군이 주둔할때는 공격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 문제가 굉장히 이례적으로 보여질수 밖에 없었다. 주둔하는동안 공격이나 탈레반 활동이 저조하다면 사실상의 안전지역으로 분류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가 시작되자 그 결과는 황당했다.
이탈리아군이 자국 군인들의 목숨을 탈레반에게 구걸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군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탈레반에게 뒷돈을 준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관련기사 당시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 정부가 부정했지만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반이탈리아 감정이 증폭되고 외교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3 이탈리아군의 일화
아래의 일화들은 실화가 아니고 그냥 웃자고 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개중에는 진짜로 실화인 것도 있긴 하다.
- 참호속에서의 이탈리아군.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롬멜 원수가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방문했다. 그때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의 병사와 장교는 모두 "오 성모 마리아님!"이라고 외치며 지면에 엎드렸다.(...)
Duck and cover! - 이 광경을 지켜본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군 장교에게
한심하다는 듯이이렇게 말했다. - "......기도를 멈추고 반격명령을 내리시오. 귀관이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 이탈리아군 맞아?
- 몽고메리 원수가 이끄는 영국군이 이탈리아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군이 자꾸 이탈리아군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여긴 몽고메리 원수는 부하에게 저들이 누군지 알아보라고 했다. 부하가 이탈리아군이라고하자 몽고메리 원수는" 그럴리없다! 저들이 이탈리아군일리가 없어! 다시 한번 확인해봐!" 부하가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저들은 이탈리아 폴고레 공수사단이 확실합니다! 몽고메리 원수가 말하길"그럼 그렇지!"[7]
폴고레 공수사단의 부대원들은 10월 23일 시작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라이트 풋(Light Foot) 작전에서 영국군 7기갑사단, 44, 50보병사단, 자유프랑스 제1사단 및 그리스 여단등을 7개 대대 3,500명의 병력으로 막아냈다. 게다가 사실 이 정도면 거의 사단이 아니라 여단급의 병력(…). 기가 질린 영국군은 3일후 퇴각했으나, 사실상 폴고레 사단은 고립되었고 결국 폴고레 사단은 물도, 탄약도, 차량도 없이 염천의 사막을 걸어서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은 고작 295명, 그들은 항복할때 백기를 들지 않았으며, 심지어 손도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44사단장 허기스 장군은 폴고레 사단을 가리켜 "나는 내 남은 생애에 두번 다시 폴고레 사단과 같은 적을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라고 말했으며, 런던 라디오는 육군 보고서를 인용하며 "폴고레 사단은 현재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저항하고 있다."고 했다. 윈스턴 처칠마저도 "우리는 사자와 같던 폴고레 사단의 생존자들을 위하여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라고 하지만 처칠이 이런 연설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없다는게 정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부 해외자료가 처칠이 1942년 11월 2일 하원 연설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고 주장하나, 공식 기록을 살펴보면 당일 하원은 소집된 바 없음. 다만 폴고레 사단 장병들의 분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
- 이탈리아의 전쟁선포
- 제 2 차 세계 대전 이 한창 진행중일때였다.
- 외교관 : 총통 각하! 이탈리아도 참전한다고 합니다!
- 히틀러 : 두 개 사단을 보내라. 그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거야.
- 외교관 : 그게 아니라, 동맹으로 참전한답니다.
- 히틀러 : 그건 얘기가 다르지, 열 개 사단을 보내.[8]
-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에게 무장한 이탈리아군 중대가 항복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리품을 수집하기 바쁜 영국 장교는 그들을 무시한채 "시끄럽다!, 저쪽으로 꺼져!" 라고 이탈리아 병사의 총을 빼앗아 던지면서 고함쳤다. 이탈리아군 무장중대(...)는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아주는 영국군을 찾기위해 다시 총을 주워 또 터벅터벅 걸어갔다.
- 명장
- 어느날 무솔리니가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그장군 이름 뭐지요? '전략의 아버지' 한니발 장군을 물리친 장군 말이오. "그는 스키피오장군입니다." "그럼 우리 이탈리아를 통일로 이끈 장군은요?" "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입니다." "장군, 그러면 그는 누구요? 영국의 유명한 왕 있잖소?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의 뛰어난 지도자인 살라흐 앗 딘을 물리친 왕 말이오?" "그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입니다." "그럼 있잖소. 영국의 왕자 있잖소?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왕자말이오?"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 왕세자 입니다. "마지막 하나만 더 물읍시다! 그는 누구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장군말이오?" "그는 월링턴(아서 웰즐리) 공작입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무솔리니가 말하길 "니들이 자꾸 지니까 이런말을 하잖아! 제발 좀 이기라고!"
-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
- 이탈리아인의 '약함'은 처세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중,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의 포로가 된 독일군은 끝까지 완고하게 소속부대의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하는 일 없이 꼿꼿해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샀지만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울며 용서를 빌었으므로 고문이 멈추었다고 한다.
근데 이 말은 즉 나부터 살려고 동료를 팔아버린거잖...
- 이탈리아인은 지역마다 강약이 다른가?
- 제1차 세계대전시까지는 각 지방에서 징병한 장병들을 각 부대에 균등하게 배치했지만 1차대전 후에는 지역별 편성으로 군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약함에 지역차이는 없었다.
-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리다
- 이탈리아군은 밤이 되면 "우리가 졸리면 상대방도 졸리다. 그러니까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라며(…) 경계도 세우지 않고 취침했다. 그 결과 수많은 기습을 허용했다.
- 국가나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한 이탈리아군
- 병사가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소대장이 어디론가 나가려는 중이었다. 병사는 소대장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싸면서 소대장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내가 목숨을 걸 때는 반한 여자를 지킬 때뿐이다!"[9]
- 그리고 웃는 얼굴로 전선을 이탈했다. 그러자 병사도
- "소대장님! 기다려 주십시오!"
- 뒤돌아본 소대장에게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 "저도 함께 갑니다!"(…)
- 이렇게 아침이 되어 다른 소대원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대원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남은소대원들:어??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 결국 영국군과 싸우기 전에 그 소대는 사라졌다.(...)
- 영국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
- 이탈리아군 잠수함 갈릴레이(Galilei)호는 무장상선도 아닌, 영국 해군의 트롤어선 개조 무장어선과의 1:1 승부에서 패하고 심지어 나포까지 당했다. 어선 주제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 변변한 조준기도 없는데 차례차례 명중탄을 퍼붓고 승리한 영국 해군도 굉장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장교들이 다쳤다고 시원하게 백기를 걸고 항복해버렸다.(...)
실제로는 그냥 무장어선이 아니라 대잠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던 어선이었다. 폭뢰 공격을 견디다 못한 이탈리아 잠수함 쪽이 부상해서 양측이 가지고 있던 함포로 함포전을 벌인 것. 하지만 교전 중에 함장 포함, 4명의 사관을 비롯해 총 16명이 교전 중 전사한데다가 그 직후 영국 해군의 구축함이 왔기 때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잠수함이 잠수상태도 아닌데다가 지휘체계도 날아갔는데 본격적인 군함(그것도 잠수함 박살내는데 최적인 구축함)이 왔다면 항복을 안하는게 이상한 거다. 하지만 실제로 결과는 잠수해있던 잠수함이 어선과 맞짱떠서 졌다는 소리다 |
- 이탈리아의 전쟁학
- 이길 수 없는 상대 = 절대 전쟁까지 가지않는다.
- 강적 및 동격의 상대 = 약해지기를 신중하게 기다리고 나서 개전 → 하지만 참패
- 약한 상대 = 기꺼이 개전 → 하지만 왜인지 참패
- 절대 지리라 생각할 수 없는 상대 = 기꺼이 개전 → 고전을 면치 못한다.
- 전쟁 준비보다 외화
- 피아트사에서 개발한 G50 전투기는 1940년 6월부터 제51전투비행단 21, 22비행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국에도 배치가 안 끝난 최신 전투기 G50은 이미 1940년 1월부터 핀란드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개발된 최신개량형 G50bis는 1941년 1월 핀란드 공군에 판매되었다.(…)
핀란드는 1940년 3월 까지 소련을 상대로 겨울전쟁 중이었으니 당연히 전쟁중이 아닌 이탈리아보다 병기가 시급했다. |
-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
- 이탈리아 전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지만,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이탈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미군도 그걸 눈치채곤 어영부영(...) 공격하고 있었다.
어떻게 공격해야 어영부영이 되는거지공군을 안불렀겠지하지만 이탈리아군은 독일군 정찰기가 지나갈 때는 제대로 싸우는 척했다. 왜냐? 독일군이 오면 전쟁이 더 길어지므로 미군에 발포한 것이다. 당연히 미군도 눈가리고 아웅했는데, 그 전투을 목격한 정찰기는 이렇게 보고 있었다. - "대단해!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
-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바람과는 달리 독일군의 원군이 왔고,
못나쳐먹은 친구놈이 간만에 제대로 싸우는데 도와줘야지이탈리아군:오..오지마!전투는 진짜 격전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실제로는 독일의 뻘짓.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사단장이 해안 상륙을 저지하라는 이탈리아 장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케셀링의 명령을 기다리느라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렸으며 케셀링이 내린 명령도 이탈리아군과 협력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 미군이 해군에게 포격을 요청해서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은 별 활약도 못하고 리타이어해버렸다. |
- 신의 가호
- 이탈리아군은 적절한 보관 장소가 없을 경우 교회에 화약을 즐겨 보관했다. 교회라면 적군도 폭격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몬테카시노 전투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로 교회나 수도원에 대한 공격을 주저한 사례가 종종 있긴 했다. (보통 도시의 중심에 있는 성당이나 교회는 폭격하지 않는게 암묵의 룰이었다고.)
-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교회의 첨탑에 보기좋게 낙뢰[10]가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나 순식간에 마을의 1/5이 날아갔다고 한다.(…)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무기고로 만들었겠다!
-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
이이이이이이이일
- 2차대전 때 이탈리아 나폴리에서는 군함이 도둑맞은 사례(…)가 있었고, 중동전쟁의 한창 때는 전차까지 도둑맞았다고 한다.
- 군용기에 관한 일화
- 이탈리아 공군은 2차대전 때까지도 계기비행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 전투기의 초기형은 조종석을 밀폐식으로 만들었지만 조종사들이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양산형은 개방식으로 되돌렸다. 그 때문에 모처럼 만든 고속 전투기가 엉망.
참고로 1차대전 때만 해도 모든 비행사들은 당연히 손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바람을 직접 몸으로 느껴가면서 풍향과 풍속을 계측해 비행했다. 한마디로 그냥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 또한 당시엔 아직 사출좌석이 없었던 시대라 완전밀폐식 캐노피는 고장이나 피격 등 낙하산으로 탈출해야 할때 제대로 열리지 않아 위험을 초래할까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Mc200 이후부터는 죄다 밀폐식으로 돌렸다. |
- 무기없이 싸울때 이탈리아군은 강하다(?)
- 소말리아에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을 때, 약간의 시비로 미 해병대와 이탈리아군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사건의 단초는 이탈리아군이 검문에서 통과시킨 소말리아인 용의자를 미 해병대가 연행하려고 하자 이탈리아군과 미 해병대간의 언쟁이 일어났고 이 틈을 본 소말리아인 용의자는 도망, 그것을 본 미 해병대원이 그 소말리아인을 사살해 이를 계기로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양군 장교들이 이 패싸움을 수습했을 때에는 이탈리아군이 미국 해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
-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의 패잔병 사냥을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원주민 마을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원주민 마을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현지의 세력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영국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설탕 5포대와 밀가루 5포대를 주겠다."
- 다음날, 영국군은 전원 잡혔다.
- 상대의 발을 멈추기 위해 대연회
- 통일전쟁시 가리발디가 로마 해방을 위해 진군했을 때의 일화.
- 이탈리아 통일전쟁시 이탈리아의 절반을 가리발디의 의용군이 해방하고, 로마 해방이 눈앞에 보이자, 가리발디가 자신들의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세력가들과 마피아는 가리발디의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계책을 궁리했다. 가리발디와 그의 의용군을 초대하는 대연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훈제 햄으로 시작된 코스요리는 메시나풍 생선 요리, 사슴고기, 어린 양 통구이, 닭 요리 등등 디저트에 도넛이나 구운 사과에 이르기까지 총 12 접시가 나올 정도로 매우 호화로웠고, 게다가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여기에 눈이 멀어 발이 묶여버린(…) 가리발디는 정부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고전, 결국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회가 있든 없든 애초에 둘은 동맹관계였다. 싸웠다는 것 부터가 넌센스. 물론 사르데냐 정부와 가리발디는 단순히 동맹관계라기 보다는 조금 미묘한 관계였다. 둘다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지만, 사르데냐 정부는 복잡한 국제외교관계를 따져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카보우 수상이 이끌고 있었고 그에 반해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재야 이상주의자였다. 샤르데냐 정부는 사르데냐의 북이탈리아 통일에 가장 큰 조력자였던 프랑스가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의 완전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교황의 후원자이기도 했고, 게다가 교황에 대한 성급한 군사행동은 다른 외세가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여지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르데냐 정부는 (1) 가리발디가 나폴리를 해방시키고 이어 로마를 침공하려는 의도를 보이자 서둘러 나폴리로 진군하여 가리발디와 회담하여 가리발디의 폭주를 막은 적이 있고, (2) 그 이후에 가리발디가 다시 로마 공격을 위해 의용군을 모집했을 때 이를 무력으로 저지한[11] 적이 있다. 그러나 위 일화의 기술은 (1) 과 (2)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는 않는다. |
- 와인
- 대전기 이탈리아군이 보급한 와인의 표지엔 "전투중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라고 써있었다.
물론 만취한 순간 전투가 두렵지 않은걸로 문제가 끝나진 않겠지만또 물자비축량은 탄약보다 와인이 많았다.(...)
하지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있는게, 유럽의 고질적인 수질문제로 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식수로 음용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맥주도 전통적으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연합군측도 마찬가지였고 현재 유럽의 여러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동맹군인 독일과 일본이 자국 병사들을 상대로 각성제라는 명목하에 마약을 지급한것에 비하면 몇백배는 나은 편이다. 메스암페타민이 이 용도로 개발된 것이며, 실제 2차대전 내내 일반병사에게 엄청난 양이 살포됐다. |
-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
- 오스트레일리아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 3개국의 포로가 수용된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집단을 이뤄 땅굴을 파서 수용소에서 탈주하려고 시도했고 일본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자결해버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수용소의 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고 개중엔 근처의 아가씨까지 애인으로 만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수용소에서는 오페라도 보여줬다고 한다(…). 위에서 보여준 포로가 되기 위한 열정들을 보면 이해가 될지도?
- 사막에서 구원 요청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싸울때, 이탈리아군 부대로부터 구원요청이 들어오자 독일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원하러 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귀중한 물을 사용해 파스타를 데치고 있었다.
후술하는 파스타 관련 내용을 참조. 사실 이탈리아군이 파스타같은 고급 음식을 배급받은 사례가 거의 없다. |
- 음식이라면 역시 이탈리아
- "전장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을까."라는 그 일념하에 이탈리아인에 의해 동결건조 기법이 발명되었다. 연합군측도 매우 놀랐다고 한다.
- 공평한 팀 밸런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이탈리아가 추축국에 붙었다는 보고를 듣자 "제1차 세계대전때는 우리편 이였으니 이젠 딱맞는다." 라고 했다.
너희들도 짐덩어리를 경험해봐야지?[12]
- 이탈리아군에게 잡힌 연합군 병사들의 생활
- 이탈리아 근처에 있는 몰타섬에서 출격해 작전을 하던 한 영국 공군(RAF) 조종사가 이탈리아에 추락,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날 밤 와인을 비롯해 자신이 있었던 몰타섬 영국기지에서는 꿈에서나 보던 음식들을 대접해주는걸 보고 이제 내일 사형당하는구나...이런게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인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잠도 잘 자고 죽을 각오도 다진 상태에서 갑자기 이탈리아 통역병과 장교 한 명이 그의 방에 들어왔다.
- 조종사는 이제 아...죽는건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장교가 말을 하기 시작했고, 통역병이 영어로 통역했다 그가 말하길...어제는 행정상의 착오로, 장교인 귀관에게 일반병사용 식사를 제공하고 말았다.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나는 귀관을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정중하게 대접할 것이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어제의 무례를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 군이 제네바 협약에 따르는 것을 비웃는 게 아니다. 애초에 제네바 협약을 따르고 포로를 정중히 대우하는 행위는 정당하고 신사적인 행동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일이지, 문제있는 행동도, 비웃음 받을 행동도 아니다. 제네바 협약을 휴지 취급했던 일본군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서, 일부 밀덕후들 사이에서 제네바 협약을 "전쟁 중에 도의를 논하는 웃기는 |
- 우리에게 이런군대가 있었다면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리처드 1세 그리고 한니발 바르카와 피로스가 각나라의 군대를 시찰하였다.
- 나폴레옹이 프랑스 외인부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도 이런 군대가 있었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했을텐데..."
- 리처드 1세는 구르카 부대와SAS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도 이런 군대가 있었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텐데..."
- 그러자 한니발 바르카와 피로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상대가 이탈리아군이었다면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을텐데..."
등등, 원 출처를 찾아보면 이외에도 더 많이 있다.
4 평가
이곳에서 몸의 사지인 개개인들에게는 탁월한 역량이 잠재해 있는데, 머리인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투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싸울 때, 이탈리아인들의 힘, 능력 및 재주가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십시오. 그러나 일단 군대라는 형태로 싸우는 일에서는 결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이 모든 것은 지도자의 유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유능한 사람에게는 추종자가 없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다른 지도자들로 하여금 우월성을 인정하게 할 정도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할 만한 충분한 역량이나 행운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곧 지난 20년간 싸운 모든 전쟁에서 오직 이탈리아인 병사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항상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타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카푸아, 제노바, 바일라, 볼로냐 및 메스트리의 전투들은 모두 이 판단의 타당성을 입증합니다.--니콜로 마키아벨리, 그의 저서 <군주론> 26장 '야만족의 지배로부터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한 호소' 에서.
한나라와 다른 한나라가 동맹을 맺어 마이너스가 된 경우는 이 경우(이탈리아)가 유일하다.-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에서
사실 맨 아래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탈리아는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군이 이러니,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하길 전 세계의 모든 군대가 이탈리아군만 같으면 세계평화가 올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어떡하지 외계인도 이탈리아군 같으면 된다
오죽하면 가장 이상적인 전쟁의 요소중 하나가 이탈리아 적군이다. 나머지 요소는 독일의 무기, 소련의 겨울 군장, 영국의 여름 군장, 미국의 보급, 프랑스 위문단. 어떤 글에 따르면, 이건 당시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인들의 평가였다.(...)
아무튼, 이 글이 객관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이런 식으로 편집된 자료만 가지고는 미군도 쓸데없이 비대한 비효율적 군대로 만들 수 있고, 영국 레드 코트도 시도때도도 없이 털린 약골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군도 유럽전선 아주 초창기 때에는 카젤린 협곡 등지에서 추태를 보인 바 있는데 이 때는 이탈리아군도 미군을 무시할 지경이었다. 영국도 미군을 '연합군의 이탈리아군'이라고 조소할 지경이었고. 그래서 이런 꼬락서니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패튼. 사실 따지고 보면 유럽전선의 서방 연합군에서 병력 숫자 등을 볼 때 탱킹을 맡은 쪽은 영국이었고 미군의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패튼의 의의는 숫적으로 비중이 딸린 서부전선의 미군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도 있다. 아 저 미군 중에도 쌈질 잘하는 놈들이 있구나하는 식으로.
예를 들자면,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배급은 장교와 사병의 차별이 아주 극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한 어떤 이탈리아 사병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래먼지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반해 장교들의 식사는...글에 나오는 그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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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복원된 이탈리아군 전투식량. 이것이 그 사막에서 데쳐먹은 파스타의 진실이다.
위의 내용 중 사막에서 파스타를 삶아먹는 이탈리아군 이야기의 경우, 그 파스타는 짬밥의 개념으로 보급된 파스타이다.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그 멋들어진 파스타가 아니고, 그냥 대충 이것저것 넣은 잡탕으로 해먹었다는 것이다. 즉 먹을게 없어서 고추장에 밥 비벼 먹었더니 전주비빔밥을 먹었다고 오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막에서 식당처럼 삶고 난 뒤 물을 버리고 소스에 버무려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넌센스. 이탈리아군은 전투식량용 파스타와 주둔지용 파스타를 달리 사용했다. 전투식량용 파스타는 캔처리된 조리 파스타였고 주둔지에 지급되는 파스타가 흔히 데쳐먹는 건조 파스타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주둔지 식단은 단순히 파스타 뿐만 아니라 싱싱한 야채, 과일, 고기 샌드위치, 스튜, 빵 등을 지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다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보급이 매우 힘들었기에 주둔지 식단이고 뭐고 그냥 캔 파스타나 까먹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느 나라 군대든 2차대전 중에 가능하면 전투식량보다는 가급적 취사장에서 조리된 식사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무슨 소린지 궁금하면 당신이 병사인데 한달 내내 전투식량 1형만 삼시세끼 던져준다고 생각해봐라(...)
그때 독일군은 캔파스타고 나발이고 사령관인 롬멜조차 제대로 먹질 못해서 황달을 비롯한 위장병에 시달리고 있었다는걸 잊으면 안된다. 북아프리카 군단이 아프리카에 파병될 때 초기에 꽤 식량 문제가 있었다. 이탈리아군에게서도 뜯어먹은 경우가 많다. 기존의 독일군용 관급빵 등이 사막 기후에서 쉽게 상했기 때문.
정작 이 파스타 일화와 비슷한 사례라면 같은 동맹군인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다. 일일히 쌀과 냄비를 들고 다니고 밥짓느라 식수는 식수[13]대로 필요 했으며 태평양 전쟁 초 코레히도르 전투의 경우 밥짓다가 연기 때문에 미군의 포격을 맞는 사례도 허다했다.
다만 일본군의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근거 없이 위키 전반적으로 까내리는 성향의 글이 굉장히 강한 편이므로, 이 글을 참고할 것. 물론 계획대로 주지 못해서 문제이지...
웃긴 일화는 정작 이탈리아군은 이 주둔지 식단이 맘에 안든다고 점령지 현지인 집에 쳐들어가서 제값(..!)을 지불하고 현지 음식을 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5 실제 이탈리아군의 전력
그리고 이탈리아군이라고 완전 약체였던 것만은 아니고 정예사단은 다른 나라의 정예부대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웠다.
특히 용맹을 상징하는 검은 수탉의 깃털을 헬멧에 달고 다닌 베르살리에리 부대의 경우 튀니지 전투에서 최후까지 교전하며 그 감투정신을 증명하였고, 폴고레 공수사단의 부대원들은 10월 23일 시작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라이트 풋(Light Foot) 작전에서 영국군 7기갑사단, 44, 50보병사단, 자유프랑스 제1사단 및 그리스 여단등을 7개 대대 3,500명의 병력으로 막아냈다. 게다가 사실 이 정도면 거의 사단이 아니라 여단급의 병력(…). 기가 질린 영국군은 3일후 퇴각했으나, 사실상 폴고레 사단은 고립되었고 결국 폴고레 사단은 물도, 탄약도, 차량도 없이 염천의 사막을 걸어서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은 고작 295명, 그들은 항복할때 백기를 들지 않았으며, 심지어 손도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44사단장 허기스 장군은 폴고레 사단을 가리켜 "나는 내 남은 생애에 두번 다시 폴고레 사단과 같은 적을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라고 말했으며, 런던 라디오는 육군 보고서를 인용하며 "폴고레 사단은 현재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저항하고 있다."고 했다. 윈스턴 처칠마저도 "우리는 사자와 같던 폴고레 사단의 생존자들을 위하여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라고 하지만 처칠이 이런 연설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없다는게 정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부 해외자료가 처칠이 1942년 11월 2일 하원 연설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고 주장하나, 공식 기록을 살펴보면 당일 하원은 소집된 바 없음. 다만 폴고레 사단 장병들의 분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탈리아 육군 제132 아리에테 기갑사단은 롬멜이 다른 독일사단보다도 신뢰하던 사단이다. 이후 독일군 제21기갑사단과 마찬가지로 연료가 떨어지면서 후퇴가 불가능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립되어 분전하다가 전멸했다. 롬멜은 아리에테 사단이 전멸하자 일기에 비통한 어조로 이 사실을 기록했다.
"아리에테 사단과 더불어 노장의 이탈리아 전우들을 잃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형편없는 장비로써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계속 요구했다."
게다가 아리에테 사단은 전멸당하기 전까지 토브룩이나 심지어는 독일군의 기나긴 패주때도 선봉을 맡아 영국군을 개발살내던 정예부대였다. 결국은 독일군의 제공권 장악실패와 보급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전멸당하긴 했지만 그건 당시 나머지 독일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 아리에테 사단이 그만큼 싸워주었기에 독일군의 후퇴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롬멜이 그렇게 징징거렸던 보급 역시 제공권 장악 핑계로 도망간 독일공군과 달리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 최종보스인 영국 지중해 함대와 몰타섬의 공군 병력에게 그야말로 몸이 찢어 발겨지면서 악착같이 보급했다. "다른건 몰라도 전우를 굶게 만들진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 오오 의리 오오
이탈리아 정부의 지휘 아래 싸운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위에 언급 했듯이 스페인 내전 당시 이탈리아 출신 지원병들로 구성 된 주세페 가리발디 대대는 출신 성분 자체가 전 세계의 헌신적인 좌익 운동가들이나 모험과 위험을 일부로 찾아 온 사람들이니 맹렬한 전의로 명성이 자자했던 국제 여단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사기가 높았던 부대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다. 국제 여단이 맹활약한 마드리드 사수, 하라마 전투, 과달라하라 전투, 에브로 공세 등 굵직한 전투 모두 참여해 그 때마다 국제 여단 전력의 주축을 구성했다. 특히 스페인 공화국이 1936년 여름의 쿠데타로 끝나버리지 않고 기나긴 3년간의 내전 동안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국가군 상대로 전쟁을 치룰 수 있게 한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여졌던 장소 중 하나가 지금도 전설로 화자 되는 스페인 유수의 국립 대학,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대학 캠퍼스를 둘러싼 전투였는데, 문자 그대로 대학 건물 하나 하나를 두고 국가군과 국제 여단원들이 피 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결국 공화파가 캠퍼스 전체를 장악하고 이를 기점으로 마드리드 시 전체에서 결국 국가군을 몰아 내는데 기점이 된 중앙 도서관과 약대 건물 점령전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한게 가리발디 대대였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 출신의 국제 여단원들은 조국이 이미 무솔리니, 히틀러의 파시스트들에게 넘어가버려 돌아 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더 치열한 투지를 발휘 했다. 이탈리아군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이 항목의 다른 정예 부대와 마찬가지로 동기 부여가 명확한 경우에는 오히려 이탈리아인들의 투지는 오히려 다른 군부대를 초월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 Decima Flottiglia MAS라는 부대가 유명한데 이들은 어뢰를 개조한 특수잠항정 3기를 이용해 어뢰 1기당 2명씩 총 6명의 대원을 영국 해군의 주요 군항인 알렉산드리아 군항에 침투시켜 35,000톤급의 전함 2대와 유조선 1대를 수중폭파시킴으로써 해군 특수전의 역사를 처음 쓰기까지 했다. 덕분에 영국 지중해 함대에는 단 1척의 전함도 남지 않아서 한동안 영국 해군이 적 대형 함선과의 교전을 꺼리는 막장상황까지 발생했으며, 폭파된 전함을 긴급수리하는 한편, 외부에는 해당 전함들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기위해 국기 게양식을 하고 의장대를 사열하며, 수병들을 주기적으로 이동시키는 연극까지 감행해야 했다. 이 부대는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43년까지 어뢰정과 특수장비만으로 20만톤의 함선들을 격침했고 그 전과는 서쪽의 자브롤터에서 동쪽으로는 소련의 세바스토폴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와 흑해를 넘나 들었다.
이 사건으로 이러한 농담이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해군의 용기는 타는 배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잠수함 부대에서는 유능한 선임장교였던 해군중장 안젤로 파로나 제독을 독일 해군에 파견, 당시 U보트 부대 지휘관으로 용명을 떨치던 카를 되니츠 제독과 더불어 지중해상의 세력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독일에 파견된 이탈리아 함장 중 두 명은 각각 16척 86,438톤, 11척 96,601톤을 격침시켜, 1939년 제정 기사 철십자 훈장을 거머쥐었다. 기사 철십자 훈장은 2급, 1급 철십자 훈장과 격을 달리한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그 동맹국 군대의 수많은 장병 중 수훈자가 7,300여명뿐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철십자 훈장 항목 참조. 되니츠 제독은 훗날 출판된 자신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에서 이탈리아 잠수함 부대원들의 감투정신을 격찬했다.
위에 언급된 글 중간에도 포로수용소에서 미 해병대와 주먹다짐으로 싸워 이겼다는 부분도 있고, 아프리카 원주민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든 영국군을 수색할 때 독일군이 온갖 노력을 해도 찾지 못하던 것을 "님들아 영국 병사 한명당 설탕 5봉지 + 밀가루 5봉지 콜?"이라는 슬로건으로 전원 잡아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포위당한 적군이 변장하고 빠져나가려 했을때, 다른 군대의 보초병은 다 속여도 이탈리아군의 눈만은 결코 속일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계가 투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변장의 어색한 부분이 이탈리아군의 패셔니스트 감각에 발각되는 바람에... 괜히 이탈리아의 밀라노가 세계 패션 중심지 중 하나가 아니다! 히틀러가 롬멜에게 이탈리아군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롬멜의 대답인즉 "병사 개개인은 사자, 장교들은 소시지, 참모본부는 퇴비더미(...)"퇴비에게 사과해!였다고.
사실 무솔리니 통치하의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해 준비도 안 되어있었고 싸울려는 의지도 없었다.일단 선전포고부터 어떻게 했는지 정독했다면 답 나온다 우선 2차 세계대전 직전 이탈리아는 경제발전 및 군비 충실화에 써야 할 돈을 에티오피아 정복과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소모하는 바람에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군의 평시 필요 탄약과 연료를 구입할 돈도 없는 상태였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이탈리아의 2차대전은 사실상 1935년에 남들보다 3년반이나 일찍 시작한 셈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정부는 다른 열강들에 비해 제대로 전쟁 준비에 투자할 여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쟁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탄탄한 국내 경제임을 생각하면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는다. 공교롭게도 1차 세계대전 역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리비아를 정복하면서 똑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모두 참전하면 안될 상황에 참전한 것이고, 해선 안되는 전초전을 치른 셈이다. 그리고 두 전초전 모두 국가원수의 체면치레를 위해 저질렀다가 개피를 본 사건이다. 체면차리려다가 거꾸로 쪽박을 찬 아주 좋은 사례랄까.
게다가 이탈리아인들은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향해가자 곳곳에서 연합군을 환영했고, 자발적으로 반무솔리니 레지스탕스가 되어 싸웠다. 목적도 없고 지도자도 마음에 안드는 전쟁에 누가 몸을 바쳐 싸울까. 현대에 들어서는 역사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가슴아픈 성찰을 통해 그 실체가 사실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야 몸집이 순식간에 불어났고, 그 전공도 크게 과장되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나 몇몇 개개인 중심의 점조직 네트워크를 제외하면 있지도 않았던 나치에 반대했던 독일, 오스트리아의 반체제 집단들과 달리 이탈리아 빨치산은 1930년대 부터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으로 참가하고, 1943년 3월에는 밀라노, 토리노, 리보르노 같은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의 산업도시들에서 1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 거대 파업을 유도하는 등, 체제의 칼날이 서슬퍼럴 때도 활동을 지속하며 가열찬 반파시스트 투쟁을 지속했다. 나치 독일 본토가 패망할 때 까지 유지 됐던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점령지는 연합군의 진격이 안 닫은 곳에서도 지속적인 빨치산 부대들과 전쟁을 벌여야했고, 비록 몇개월만에 진압 당하긴 하였지만 북부 이탈리아 농촌 여러곳에서 1944년 가을~겨울 중에 해방 구역인 빨치산 공화국들이 세워졌다. 나치 독일과 달리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집권기 중에도 대중적인 기반을 두고 체제에 반대하여 지하에서 투쟁을 벌였던 '다른 이탈리아'가 실존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 내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연합군이 진주하니 실재로 군대라고 부를 만한 규모와 전력의 동맹 세력을 형성했던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일본, 독일과 달리 전후에도 전범국 취급을 안 받고 국제 사회로 신속히 재편입 되었던 것이다. 전후 동독과 서독, 일본 정부의 경우 간판으로 내걸기 위해서라도 나치스, 제국 군부와 공식적으로 협력한 전과가 없는 '개인'들을 발굴하여 실재로는 인력 태반이 전범에 가담했던 정부 부서의 얼굴마담으로 내걸었던 반면, 이탈리아는 이미 하나의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내부적 역량을 유지했던 반체제 집단들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웃고 넘어가는 유머글로 읽도록 하자.
6 기타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인 용병대장들은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하들이 죽으면 손실이 생기고 돈에 따라 고용되는 용병이기 때문에 지금 적이 나중엔 자기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탈리아인 용병대장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고 심지어 친구이기도 해서 서로 전투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을 전쟁으로 안보고 아예 경마나 예술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고 한다(…). 어찌나 제대로 싸우지 않았는지, 근대 정치학의 시조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을 읽다보면 용병을 믿지 말라는 말이 지겹게 나온다. 강한 군대는 국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셈.
결국 당대의 이탈리아 용병은 외부의 침입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군에게 개작살났다.(...) 용병끼리의 싸움에 익숙해 있던 이탈리아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파괴와 약탈이, 프랑스군의 입장에서는 전쟁 때면 으레 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에야 ‘성격이 전혀 달랐다’ 라고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는데, 1494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편이었던 밀라노가 전쟁 1년만에 편을 바꾸어 베네치아와 교황령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결성한 반(反)프랑스 동맹에 가담할 정도.
하지만 이건 어느 정도 마키아벨리의 편견의 산물이다. 같은 이탈리아 에서도 베네치아의 경우 용병대장을 유력자의 딸과 결혼시켜 지배층에 편입시키거나 서로 앙숙인 용병대장끼리 경쟁을 붙혀서 매우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애초에 그 양반은 학자였지 군인이 아니었다. 피렌체 국민군은 용병에 비해 효율적인 전투를 하지 못했으며 결국 다시 용병제로 회귀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안기아리 전투에서 1명이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뿐이라고 했지만 실제 안기아리 전투는 1,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한 전투였다. 나아가 베네치아는 용병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캉브레 동맹을 저지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용병대장이 도시의 지배권을 강탈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용병대를 낮게 평가했지만 중세부터 이미 이탈리아 용병들은 인기있는 수출품이었고, 이러한 구조는 후에 16, 17세기의 유럽에서도 통용되었다. 특히 16, 17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스페인 군대 중 두번째로 강한 군대로 평가받았던 것이 바로 이탈리아 테르시오였다. 다만 본국에서 동족간의 혈전에는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미 넘치지 않겠는가.
여담이지만 나폴레옹도 이탈리아군을 무시했다고 한다.- ↑ 프로이센군은 보오전쟁 중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 하노버, 헤센등 중소국가와 벌인 독일 본토 전역은 당연히(?) 석권하고 있었고, 작센과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두들겨 패면서 보헤미아로 진군 중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빈을 공격하면 오스트리아군이 급격하게 무너질 것을 기대하고 제안한 것이다.
- ↑ 게다가 그 악명높은 시베리아 부대다. 사보이아 기병연대와 같은 연대 규모. 근데 이 부대가 조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당한 거긴 하다.
- ↑ 훗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는데 가담하였고 무솔리니가 오토 슈코르체니에 의해 구출되어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의 수장으로 복귀된 뒤 처형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솔리니는 '나를 용서하라'고 울었다고 한다.
- ↑ 이부분은 제품(전투기)의 출고를 담당하는쪽이 어느쪽이느냐의 문제에 따른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조종사들도 공중급유를 할 능력이 되는데, 한 예시가 레드플래그작전 당시 알래스카로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장시간 비행을 한 것이다. #
- ↑ 물론 특전사 경호병력이 소수 있었다.
- ↑ 보병부대로 보자면 중대급의 인원, 지원무장인 81mm 박격포도 중대급 지원화기다.
- ↑ 또 다른 버전은 "진짜? 거짓말아니고? 이탈리아군에도 저런 인간병기들이 있었다니! 믿을수 없어!"
- ↑ 원문은 Diplomat : "My Fuhrer, Italy has entered the war!" / Hitler : " Send two divisions. That should be enough to finish them" Diplomat " No, My Fuhrer, not against us, but with us" Hitler: "That's different. Send ten divisions" 한마디로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개무시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군대가 약한걸 알면서도 침략하지 않았고, 동맹군으로 참전한다는 것을 듣고 열 개 사단을 보낸다는 것이다.
- ↑ 이는 많은 중2병들의 명대사가 된다. 브라이언 킴이라든가….
- ↑ 보통 낙뢰는 신의 천벌로 여겨지는 경우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퍼져있는데...
- ↑ 의용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총격전에 의한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가리발디 역시 체포되어 비록 경미하긴 했지만 처벌받았다.
- ↑ 여담이지만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 하자 히틀러가 "우린 이제 3천년동안 패배 하지 않은 나라랑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동맹이다!"라고 드립을 치고 처칠은 소식을 듣고 "3천년간 패배 하지 않은 나라라...이제 패배할 때가 되었군"이라고 했다. - ↑ 특히나 습한 동남아에서 물을 함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풍토병 방지를 막기 위해서 여러 작업이 필요 했다